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49화 (349/425)

제349화. 전운 (3)

“신의 해적 놈들이 눈앞에 있습니다.”

“좋아. 놈들과 수평으로 방향을 잡는다. 좌현 전타!”

다카하시는 오늘에야말로 동영 해군의 위력을 천하에 떨칠 순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싸움도 불리할 것이 없었다. 프리깃 두 척과 대형 프리깃 하나의 대결이라면 발을 잡는 정도는 능히 해낼 수 있었다.

상대의 발만 묶으면 그다음은 아군 함대가 해치워줄 것이다.

다카하시는 망원경을 눈에 가져간 채 명령했다.

“포문을 열어라.”

“포문을 열어라!”

동영 사관들이 급히 함장의 명령을 복창했다.

프리깃의 측면에 딸린 14문의 대포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이제 적이 다가온 순간부터 ‘본때’를 보여주는 일만이 남았다.

다카하시는 마른침을 삼켰다.

바람에 펄럭이는 황룡의 기가 가까워졌다. 장루에 서 있던 병사가 크게 외쳤다.

“거리 100!”

그 외침에 병사들이 대포에 장약을 채우고 포격 명령만을 기다렸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갑판 위를 메웠다. 다카하시는 급속히 다가오는 적함의 뱃머리가 자기 함정의 옆을 스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속으로 숫자를 헤아리며 포 갑판의 사격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발사!”

명령과 동시에 대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초탄은 무지막지한 아이언 볼로 시작되었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운 이상, 상대 전투원을 살상하여 전투력을 깎는 것이 우선이었다.

포격과 동시에 적함에서 목재 파편이 튀겼다. 강철 구는 그대로 적의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가 사람을 다지고 목재를 박살낸 다음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무지막지한 타격이 있은 직후, 적함도 응사해왔다.

콰쾅!

짧은 굉음과 동시에 22문의 대포가 프리깃을 강타했다. 수십 발의 아이언 볼이 배의 측면을 뚫고 들어와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포가와 사람, 자신의 궤적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져버렸다.

더 끔찍한 것은 강철 구가 들어오며 만들어낸 파편들이었다. 그것들은 사방으로 비산하며 사람들을 찢어놓고 관통하며 추가적인 피해를 만들었다. 단 일격에 포 갑판은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냉정하다 못해 기계 같다고 표현되는 왕립 해군의 수병들이 아니고는 이런 끔찍한 전투에서 평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양쪽 모두 세 차례 타격을 주고받자 다음 사격이 바로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수평으로 달리는 이상 포격은 언제고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카하시는 손바닥에 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포연으로 뿌려진 시계 사이로 고함을 질렀다.

“포격은! 다음 포격은?”

그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직접 포 갑판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수많은 부상자와 시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다카하시는 마른침을 삼키며 아직 멀쩡해 보이는 포술 장에게 물었다.

“포격 준비는?”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 몇몇 병사들이 급히 장약을 장전하고 있었다. 멍한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는 자들은 몇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얼이 나간 상태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다카하시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뭣들 하나. 지금 내 손에 죽고 싶나. 부장!”

“예, 각하.”

“지금 어물거리는 겁쟁이들의 목을 쳐라.”

“예.”

부장은 그 명령에 따라 칼을 뽑아들더니 오들오들 떨던 병사 하나의 목을 날렸다. 동영에서는 엄격한 신분제 질서가 아직 살아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사족 계급이 몰락하고 있긴 했지만 그 형식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족은 원한다면 평민들의 목을 간단히 자를 수 있었다.

빛을 잃은 머리가 바닥을 구르자 병사들이 침을 삼켰다. 다카하시는 그 모습을 보며 재차 소리쳤다.

“당장 포격 준비를 해라. 겁쟁이처럼 머뭇거리는 놈은 사정 봐주지 않고 목을 치겠다.”

그의 일갈에 병사들이 허둥거리며 대포로 다가갔다. 언제 아이언 볼이 날아와 포 갑판을 휩쓸지도 모르는 판에, 대포로 다가가 장전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병사들이 대포를 보고 움직이는 것을 본 다카하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명예도 모르는 천한 것들은 ‘본’을 보여야 제 몫을 다하게 마련이었다.

그가 막 돌아서서 갑판으로 돌아서려던 차에 벽을 뚫고 무언가가 날아왔다. 묵직한 것이 얼굴로 날아왔다고 느낀 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함장의 머리가 사라지자 그 옆에 서 있던 부장의 입이 딱 벌어졌다. 동시에 함장의 머리를 부순 강철 구가 만든 파편이 부장의 전신을 쓸었다.

그는 그대로 고슴도치처럼 되어 바닥에 질퍽한 흔적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상급 지휘관 둘이 일순간에 전사한 꼴을 본 병사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그대로 대포를 팽개치고 안전한 배 아래로 대피했다.

***

“적함 중 하나의 포격이 멎었습니다. 하나는 확실히 침묵시킨 듯합니다.”

“좋아.”

로망스 사내는 주먹을 쥐며 입을 열었다.

“좌현에서 교전을 벌이던 장병들을 함의 우현으로 옮긴다. 남은 놈에 공격력을 집중해 끝장을 내버려!”

“예, 각하!”

돌아오는 목소리가 힘이 있었다.

병사들은 다친 동료들을 자리에서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몇 번의 포격으로 운용 능력이 떨어진 대포에 인원이 보강되자 함은 금세 전투력을 회복했다.

물론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대형 프리깃의 막강한 ‘내구력’이 한몫했다. 대형 프리깃은 기본적으로 3급 전열함과 대등한 체급을 자랑했다.

그런 만큼 포격을 주고받았을 때 입는 손실도 훨씬 적을 수밖에 없었다.

포술 장은 병사들이 장약을 채우기를 기다렸다 힘껏 외쳤다.

“사격!”

동시에 대포들이 연달아 굉음을 토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속된 강철 구들이 적함의 측면을 찢고 들어갔다. 전과를 확인한 함장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몇 번의 난타전으로 상대 프리깃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이제 거리를 벌린 후, 마스트에 사슬 탄만 먹여주면 추격은 꿈도 꿀 수 없을 것이다.

“포탄을 사슬 탄으로 바꾸게.”

그의 말에 용병 지휘관이 못내 아쉬운 듯 물었다.

“지금 저희에게 도선을 명령하시면 몇 분 안에 탈취할 수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지만 저길 보게.”

함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수평선 저편에는 느릿느릿 추격을 이어오는 적의 전열함 몇 척이 있었다. 그들과 교전 거리에 들어갔다간 어떤 운명이 기다리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백 문 가까운 대포와 겨루어 이긴다?

그건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저들이 접근하기 전에 나포할 수 있을 겁니다. 믿어 주십시오.”

“하지만 운용이 문제가 아닌가.”

함장은 나포 이후의 운용 문제를 지적했다. 용병들이 건너가 배를 나포한다 해도 운용 요원들을 보내 배를 장악하고 부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이면 전열함이 거리를 좁히기에 충분했다.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운용 요원을 쪼개는 만큼 함의 성능은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적에게 위치와 항적이 폭로된 상태에서 추가 추격을 받는다면 요원을 나눈 것만으로도 위험을 부를 우려가 컸다.

아무리 돈이 탐나더라도 그런 위험은 감수할 수 없었다.

용병 지휘관도 그제야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놈은 포기하겠습니다. 대신 다음에 기회가 오면 꼭 저희를 부려주셔야 합니다.”

“물론 여부가 있겠나.”

함장은 힘을 주어 대답했다.

용병 지휘관이 ‘도선 기회’를 기다리는 부하들을 다독이기 위해 돌아간 사이, 함장은 적 프리깃의 마스트가 사슬 탄에 박살나는 광경을 보았다.

곧, 속도를 잃은 적함이 천천히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대형 프리깃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무사히 살아났다. 함장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위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번 전투에 개입한 보이지 않는 손 ‘연합왕국’이 적으로 가세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연합왕국이 동영의 뒤에 끼었다면 이 통상 파괴전은 지금처럼 재미만 보긴 어렵다. 상당한 위험도 감수해야 할 테지. 일단 피해도 복구해야 하니 신으로 돌아가 사정을 보고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한다.’

함장은 긴장을 달래기 위해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

동영과의 통상 파괴 전은 신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몇 달에 걸친 공방은 보이지 않는 손의 개입에 의해 동영이 균형을 지킬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처음에는 연합왕국의 개입이 일시적인 수준에 머물 것이라 믿었던 신의 군부와 승도도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건 사실상 우리 싸움에 개입하겠다는 의사 표시입니다.”

“전하, 더 이상 묵과하여선 안 될 일입니다.”

장교들이 고함을 지르는 통에 승도의 관저는 시장 바닥을 연상시켰다.

승도는 그 말을 묵묵히 듣다 손을 들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대화를 할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내 생각도 경들과 같습니다. 저들은 동영의 손을 들어주었고 우리 함정을 거듭해서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옳으신 판단이십니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합니다. 이번 일에 대한 ‘경고의 의미’와 동시에 저들의 발을 묶겠습니다.”

“그 말씀은.”

“아문을 기점으로 활동하는 우리 인부와 선원들 중 몇몇 방의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 철수시키세요.”

승도의 대응 조처가 무얼 의미하는지 깨달은 사람들이 입을 벌렸다.

“그건.”

“저들이 상선을 다수 운영하지 못하면 우리 일에 끼기도 어려울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연합왕국이 이를 두고 가만히 보고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니겠지요.”

승도는 그 사나운 승냥이들이 순순히 한 방 먹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어찌 그런 강수를 생각하셨습니까.”

“어차피 저들은 ‘경고’에 그치지 않고 우리를 적대하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행동을 보인 이상 우리와 저들은 갈 데까지 간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정을 봐준다고 저들이 압박의 강도를 낮출 이유가 없지요.”

“그렇다고 해도 너무 위험한 자극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매우 건방진 도발일 겁니다. 하지만 이는 이 사람이 보내는 마지막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 대담한 발언에 장교들이 침을 삼켰다.

천하의 연합왕국을 상대로 경고를 보낸다고?

그들은 그 한마디에서 승도가 왕국을 상대로 한 치도 물러설 뜻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왕국이 도발을 한다면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그렇다면.”

승도는 이를 살짝 드러냈다.

“이 사람도 더는 당하고 있지 않겠습니다.”

승도의 선언에 장교들은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하지요. 서기는 잠시 남으시고.”

승도의 말에 로망스 장교들이 물러가고 총판장경 건문만이 방에 남았다.

“저만 남기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실은 서기에게 시킬 것도 있고 물을 것도 있어서입니다.”

“제게 말입니까. 하문하시지요.”

“그러지요. 먼저 서기는 이번에 왕국과 충돌하는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합니까.”

“전하, 일을 도모하시는 것은 좋사오나 왕국과의 대결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좀 더 확실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이 사람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따로 복안이라도 계신 것입니까?”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그대가 북적으로 건너가 줘야겠습니다.”

“제가 북적으로 말입니까?”

그가 놀라 묻자 승도는 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천하에 연합왕국과 겨룰 적이 그들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하오나 그들은 지난 전쟁의 적이 아닌지요.”

“적의 적은 아군인 것이 양이들의 세계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불편한 마음이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연합왕국에도 그 같은 마음을 품긴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난 전쟁에서 우리에게 패했지만 실상은 왕국의 인재와 돈에 패한 것이니 말입니다.”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하니 경이 북적으로 넘어가 일을 도모해주길 바랍니다.”

“제가 북적에 가서 무얼 해야 하는 것입니까?”

“다른 일을 할 필요 없습니다. 북적 쪽에 4만 정도의 군대만 연합왕국 식민 제국의 경계로 옮겨달라고 부탁하십시오.”

“거긴 우리와도 멀지 않은 곳입니다.”

“압니다. 그래서 이 제안이 통하는 겁니다. 그들의 병참에 필요한 물자를 우리가 대부분 부담해 주겠다고 하면 그쪽 황제도 솔깃하게 듣겠지요. 제 코가 석 자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승도는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읽은 한 수를 두려 했다. 루시가 주변국의 심상찮은 움직임으로 그 발이 묶이긴 했지만 여력을 아주 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한정된 재원을 에우로페에 집중하다 보니 동방으로 여력을 돌리기 어려울 따름이었다.

이쪽에서 물자를 대주기만 한다면 루시도 얼마든지 대군을 보낼 여력은 있었다. 백만 대군 중 4만을 보내는 정도라면 ‘국방’에 무리가 될 것도 없었다.

승도의 이야기에 건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같은 수를 둔다면 우리에 대한 압력이 경감되겠군요.”

승도는 루시의 힘을 빌려 제국에 대한 연합왕국의 군사 동원 능력을 대폭 떨어트릴 생각을 품었다.

루시가 신에 유감이 있다 해도 신이 망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터였다. 그들이 깃발을 꽂을 자리에 연합왕국이 들어앉아 버리면 영영 남하의 꿈은 접어야 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신을 돕는 것이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될 것이다.

계산을 해보면 루시의 움직임을 끌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상당한 대가를 약속하긴 해야겠지만.

“맞습니다. 이 수를 이용한다면 연합왕국의 침공군을 반 이하로 내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만 해도 왕국은 ‘침공’을 진지하게 재검토할 수밖에 없겠지요.”

전쟁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

승도는 그렇게 믿으며 이 수를 최선의 대응책이라 보았다.

“그렇다면 이 사안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쥘 수도 있겠군요.”

“그럴 겁니다. 이 사람의 경고와 루시의 행동. 두 가지를 보인 연후에 타협안을 제시한다면 저들도 원점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승도는 자신의 전략에 자신을 보였다. 군사적인 준비는 덜 되었지만 그의 무기는 비단 군사력에 그치지 않았다.

진정 그가 자랑하는 무기는 ‘무력’이 아니라 판을 짜고 설계하는 그의 두뇌였다. 전쟁의 천재는 싸우기 전에 이길 수밖에 없는 판을 만들게 마련이다.

그는 그런 판짜기 싸움에서 최상의 실력을 자랑하는 실력자였다. 연합왕국의 돈과 시스템에 패하긴 했지만 제반 조건만 받쳐준다면 그 정도의 한계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다.

“과연, 전하의 생각대로만 풀린다면 연합왕국의 양이들은 우리 신과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오나 하나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걸리는 것이라니요?”

“저들은 지금까지 무척이나 자존심이 높은 면모를 보여 왔습니다. 만에 하나 저들이 실리 대신 자존심을 택하고 전하와 자웅을 겨루겠다고 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때라면 이 사람이 갈고닦은 힘을 보여줄 수밖에요. 전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백기를 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승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승도는 건문을 내보내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수하들에게는 강경한 조처를 지시하고 전쟁을 위한 포석을 두었지만, 연합왕국이 얼마나 어려운 상대인지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았다.

‘범재가 이끌어도 초일류와 상대할 수 있는 완성된 집단.’

시스템의 우수성으로 세계에 군림하는 그 초강대국은 싸운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이 절로 떨리는 강적이었다. 비록 그들의 역량이 동방에 온전히 투사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그 대결 가능성에 긴장했다.

하지만 수하들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그는 평범한 한 인간이 아니라 이 제국의 수장이었다. 범인이라면 허락될 두려움도 그에겐 허락될 수 없었다.

그는 두려움을 몰라야 할 불세출의 영웅이자 이 제국을 지킬 수호자여야 했다. 인간적인 두려움과 고민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따지고 보면 최고의 위치에 선 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고독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르지.’

승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망스 황제 시절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그는 수하들에게 자신을 보이고, 미래의 희망을 역설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끝에 절망과 파멸만이 기다린다는 걸 어렴풋이 예견하며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지금은 혹 그 운명을 되풀이하지 않을까.

승도는 수하들을 내보내고 홀로 그 두려움을 곱씹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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