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6화. 아문 탈환 (1)
아문의 목줄을 야만인들이 장악했다!
명예로운 육군의 패배는 육해군 관계자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거기에 더해 해군의 프리깃까지 수장당하면서 위기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요새가 함락당하면 야만인들의 대군이 아문으로 들어오고 말 것이다!
그 위기감 속에 왕국 장교들은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강구했다. 거기에는 지위 고하와 출신의 장벽이 없었다. 해군과 육군, 해병대, 헌병, 경찰, 민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휘관들이 각양각색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 중 가장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된 방안은 아문 반도 북부를 탈환하여 고립된 요새를 구원하자는 안이었다. 이 안은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졌다. 상륙한 적의 병력은 거의 3개 여단에 육박하긴 했지만 모두 경화기로 무장하여 화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실탄이야 재보급을 통해 보충할지 몰라도 중화기를 들여올 정도는 못 되리라. 왕국 장교들은 그 같은 가정 하에 승산이 있는 도박이라 보았다.
더구나 적은 한차례의 소모전을 겪었고 요새를 치기 위해 병력을 갈라야 하는 입장이었다. 전력상 이쪽의 병력을 총동원하면 한 번은 밀어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자면 병력을 확실히 확보한 다음 공세에 임할 필요가 있었다.
육군 측의 발언을 듣고 있던 데이빗 대령이 손을 들었다.
“그럼, 우리 해군에서 각 함정에 탄 수병들을 내놓겠습니다. 함정 한 척당 평균 삼백.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삼백? 그럼 도합 이천사백입니까?”
데이빗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군에서 이천사백을 내놓는다면 해병과 헌병, 기마경찰에 육군 잔존부대를 합쳐 오천은 동원 가능합니다. 병력 오천이면 한 번은 적을 압박해볼 수 있을 겁니다.”
회의 결과가 나오자 공격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육군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해군과 민병들에게 제공했다. 편제를 갖추고 장비를 수령하는데 걸린 시간은 모두 두 시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시간은 요새가 견뎌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요새들은 기본적으로 튼튼한 외벽을 갖추고 있었고, 그 방어를 위해 보병 중대도 하나씩 보유하고 있었다.
지형의 이점도 있는 만큼 단숨에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그 믿음에 근거하여 최대한 차분하게 전력을 가다듬었다.
공격 준비가 끝나자 편제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육군 연대 잔존 부대 및 민병, 도합 1,850명. 제1임시 보병연대, 지휘관은 후크 육군 중령.
해병 대대 및 기마경찰 및 민병, 도합 1,250명. 제2임시 혼성연대, 지휘관은 아담 해병 중령.
해군 수병 및 헌병, 도합 2,540명. 제3임시 수병연대, 지휘관은 무어 대령.
임시로 갖춘 편제치고는 그런대로 전력을 낼 수 있도록 신경 쓴 부대 구성이었다. 전통의 정예 연대들처럼 막강한 전투력을 내긴 어려웠지만 일단 겉모습은 그럴듯했다.
총독은 지휘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그들에게 반드시 승리해 달라는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 임시 편성 부대의 참모장 역할을 자임한 데이빗 대령과 악수를 나누며 말했다.
“대령, 이 공격이 실패하거든 무모한 전투는 포기해도 좋소. 지는 건 굴욕이지만 병사들을 죽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총독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곧, 아문 최후의 지상 방어부대가 편성을 마치고 해군 사령부 앞을 출발했다. 언제나 경쾌한 연주로 항구를 드나들던 함정들을 맞던 해군 군악대가 그들의 출발을 배웅했다.
북소리와 함께 펄럭이는 깃발을 든 붉은 코트와 남색 코트들이 하나둘 북쪽을 향해 움직였다.
총독은 제 앞에서 사라져가는 병사들을 향해 천천히 경례를 붙였다.
육군의 명예와 아문의 존망이 바로 저들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붉은 코트들이 반격 준비를 마치고 도시로부터 진격해오는 동안, 요새에 고립된 왕국 포병들은 격렬한 방어전을 치르고 있었다.
마이클은 지금까지 ‘평온한 일상’을 지루하다 여긴 자신을 저주하며 총에 총탄을 넣었다.
“빌어먹을. 대포를 옮겨다 저 쳐 죽일 야만인들 머리에 산탄을 쏠 수 없을까.”
“그러기엔 대포가 너무 무겁지 않나.”
스위프트의 대꾸에 마이클은 침을 뱉으며 총구를 총안에 밀어 넣은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제길, 요새 후면이 약점인 걸 알았으면 뒤에도 대포를 달아야지, 이 무슨 바보 같은.”
마이클은 요새를 설계한 건축가들을 탓하며 신의 보병 하나를 해치웠다. 검은 군복 하나가 피를 토하며 나뒹굴자 스위프트도 총안에 총을 넣으며 말했다.
“그 말은 맞아.”
그도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요새의 설계가 잘못된 것은 없었다. 공격자가 요새 앞의 육상 회랑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 후미를 공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쪽에 공격력을 집중한 것은 대단히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설계였다. 적의 잔 수에 무력화되긴 했지만 설계를 욕할 부분은 아니었다.
그들이 총을 한 발씩 쏘며 요새의 건축가들을 다시 욕하고 있을 때 병사 하나가 외쳤다.
“중위님!”
“무슨 일이냐?”
“저기, 저길 보십시오.”
병사가 가리킨 방향에서는 상상치도 못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둡긴 했지만 아주 분간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이클은 병사 하나에게 횃불을 가져오게 하여 요새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러자 그 근처에서 적이 하고 있는 ‘짓’이 드러났다.
적은 요새로 올라오는 경사진 비탈에 굴을 파고 있었다. 비탈을 올라와 요새의 후미를 공격하는 것은 전부 이 움직임을 숨기려는 계략이었다.
간단히 말해,
‘요새를 무너트리려는 거다. 미친놈들.’
마이클은 그것을 알아차리기가 무섭게 병사들을 불렀다.
“이봐. 화약고에 가서 쓸 수 있는 포탄을 전부 가져와. 심지가 있는 걸로.”
“하지만 그것을 어디에 쓰려 하십니까.”
“저 염병할 것들이 땅을 파고 거기서 폭발물을 터트리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다. 그 전에 놈들을 생매장시켜야지.”
마이클의 말에 병사들은 그가 무얼 하려는지 알았다.
그들은 냉큼 시킨 대로 한아름의 포탄을 가지고 나왔다. 모두 유산탄으로 상당한 양의 화약을 담은 것들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심지의 길이를 가늠한 다음, 그 위에 기름을 한 번 더 적시게 했다. 하늘을 나는 동안에 심지의 불이 꺼져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는 준비를 마치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저기 횃불 보이나?”
“잘 보입니다.”
“저쪽으로 신호를 하면 던진다. 나머지는 놈들이 총을 쏘지 못하게 엄호해.”
잠시 후, 그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일시에 유산탄을 던졌다. 물론 심지에 불을 붙인 다음이었다.
포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땅을 구른 다음 폭발을 일으켰다. 붉은 코트들은 몸을 움츠린 채 그 충격을 견뎠다. 마이클은 폭발의 충격이 가라앉은 다음에 조심스레 총안으로 바깥 상황을 살폈다.
폭탄은 비교적 정확한 지점에서 터진 듯했다. 굴 주변의 검은 군복들은 모두 피 떡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운이 좋았다면 굴도 무너졌을지 몰랐다. 마이클은 그제야 한숨 놓아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몇 분 후, 요새의 아래에서 굉장한 폭발이 울렸다.
우르릉. 꽝!
굉장한 폭발음에 요새 위에서 총을 쏘던 붉은 코트들이 충격에 모두 자빠졌다. 무거운 대포들조차 일시적으로 들썩거릴 만큼 폭발의 충격은 대단했다.
동시에 잘 만들어진 요새의 한쪽 지반이 푹 꺼지더니 건물에 균열이 갔다. 그러더니 요새의 한 부분이 폭삭 내려앉으며 방어 구획이 일시에 붕괴하였다.
요새의 중앙에 위치한 사자기도 옆으로 기울었다. 그것은 이제 함락의 운명을 코앞에 둔 요새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이클이 총을 챙겨 일어섰을 때는 늦어 있었다. 그가 다시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었을 때, 이미 수백이 넘는 검은 군복들이 요새로 진입하고 있었다.
***
“굴을 판 다음 기뢰 세 발을 폭발시켜 요새를 한 방에 날려 버렸습니다. 나머지 요새들도 그 방식으로 차례로 굴복시킬 예정입니다.”
“통로는 곧 개척되겠군.”
“예, 각하. 남은 것은 육상 회랑이 열리기 전까지 적 육군의 공세를 견디는 일입니다.”
여단장 올랑드는 파이프를 문 채로 보고를 받았다. 그는 요새 공략이 시간문제라는 사실에 만족하며 아문으로부터 올 수 있는 적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보고입니다, 각하. 전방으로부터 다수의 적이 접근 중입니다. 예상했던 적의 공세입니다.”
척후가 적의 접근을 보고하자 여단장은 파이프를 손가락으로 잡고 짙은 연기를 뿜었다.
“지뢰는?”
“일단 급한 분량은 긴급 매설을 마쳤습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혹시 적의 기관포는 사용 가능한가?”
“어렵습니다. 기관포는 손상이 된 상태라.”
“아쉽지만 할 수 없군. 부대에 장전 명령을 내리고 적이 보는 대로 사격을 시작하라 이르게.”
여단장의 지시가 내려지자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장전을 시켰다. 병사들이 실탄을 장전하는 동안, 우렁찬 여왕의 찬가가 가까워졌다.
알 수 없는 서역인들의 노래가 어둠 속에 점점 가까워졌다. 그것은 병사들의 긴장감을 점점 더 고조시켰다.
병사들이 막 총구를 앞으로 향하려던 찰나에 ‘꽝’ 소리와 함께 하늘에 밝은 빛이 태어났다. 공중에서 폭발한 소이탄 덕에 일시적으로 시계가 훤해졌다.
그와 동시에 양군은 서로의 위치를 분명히 확인했다.
잠시 후, 다시 빛이 스멀스멀 꺼져갔다. 그 옅은 빛의 흔적 속에서 상승군을 노려보던 붉은 코트 장교가 외쳤다.
“부대 정지!”
“부대 정지!”
그 외침에 복창하던 붉은 코트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그 상태에서 턱을 살짝 든 채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렸다.
“2연대 현 위치 대기! 1연대 좌익으로 이동한다. 3연대 우익으로 이동하라.”
팽팽한 긴장 속에 붉은 코트들은 자신들과 대치한 적 앞에서 부대를 전개했다. 상대에게 포병이 있다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포병이 없다는 것을 아는 이상, 이렇게 행동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상승군도 적이 코앞에서 전개하는 것을 보며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쌍방은 잠시 동안 총탄 한 발 교환하지 않고 대치 국면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대치는 오래갈 수 없었다. 상승군이야 대치만 해도 전투에서 이길 수 있으니 상관없지만, 연합왕국은 달랐다.
그들은 눈앞의 적을 격파하고 요새들을 지켜야 아문을 살릴 수 있었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우르르릉!
멀리 요새에서 들리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그들의 마음을 급하게 했다.
곧, 붉은 코트 장교가 ‘공격’을 외침과 동시에 붉은 코트들이 일제히 앞으로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타타탕. 타탕!
요란한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총구가 불을 뿜을 때마다 발사광이 병사의 모습을 노출시킨 탓에 ‘야간’임에도 불구하고 양쪽은 비교적 정확하게 서로에게 조준 사격을 퍼부었다.
사상자의 수는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늘었다. 곳곳에서 붉은 코트와 검은 군복들이 피를 흘리며 널브러졌다. 사상자의 수는 왕국 쪽이 조금 더 많았다.
양군 모두 후장식 소총을 쓰고 있었고, 각자 거의 비슷한 이점을 누리고 있었다. 상승군은 방어자로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태에서 총격을 교환하고 있는 반면, 연합왕국 보병들은 보다 경험 많고 우수한 장교들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왕국이 사상자 비율에서 밀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야간 전투의 특성상 ‘화려한’ 붉은 제복이 검은 제복보다 눈에 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 차이는 장교단의 우수성과 ‘왕국 후장식 소총’의 미세한 이점을 덮고도 남을 만큼 컸다.
병사들이 적진에 다가가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통에 왕국 장교들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3개의 연대 모두 결정적인 돌파를 이루어 내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소모전만 거듭하고 있었다.
시간과 병력. 모두 귀한 자원이었다. 이렇게 무익하게 싸움을 이어가는 것은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왕국 장교들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에 반전의 수를 찾고자 머리를 굴렸다. 그들은 적진을 면밀하게 살핀 끝에 한 군데 약점을 골랐다.
그곳은 적진의 최우측으로 병력의 배치 밀도도 가장 낮았고 지원도 어려운 곳이라 여겨졌다.
후크 중령은 이 약점을 골라 1연대의 핵심 전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사실상 육군 보병의 잔존 병력이 집중된 만큼, 그의 부대는 이 공격군의 핵심이나 마찬가지였다.
후크는 교묘하게 적의 눈을 속이며 부대 대부분을 최우측으로 옮겼다. 그 자리는 2연대가 맡아주며 병력 이동을 감추었다.
실로 능수능란한 병력의 재배치였던 데다 어둠 속에서 이루어진 기동이라 상승군은 그 움직임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검은 군복들이 정면의 싸움에 집중하는 사이, 후크는 자신이 돌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여왕 폐하의 이름으로 야만인들을 죽이고, 아문을 지킨다. 돌격!”
“여왕 폐하 만세!”
병사들이 함성을 내며 돌격했다. 갑작스레 수적으로 열 배가 넘는 적이 밀려들자 검은 군복들은 화력에 압도당했다. 무자비한 총격에 검은 군복 여럿이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얄팍하던 저지선은 순식간에 커다란 구멍으로 변했다. 그제야 적이 반응하는 듯싶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1연대가 이 구멍으로 돌아 들어가 측면에서부터 적을 쓸어내기 시작하면 승부는 단박에 결정 나고 말 것이다.
후크는 승리가 눈에 보인다고 생각하며 부하들을 독려하고자 왕국의 사자기를 들고 몸소 돌격 대열에 합류했다.
‘우리 왕국은 패하지 않는다. 연합왕국은 네깟 야만인들이 어설픈 기습을 한다고 쓰러트릴 만만한 나라가 아니란 말이다.’
후크는 그 조국에 대한 자부심을 담아 사자기를 힘껏 흔들며 스물한 번째 걸음을 내딛었다.
다음 순간 폭발이 일었다.
후크는 시야가 하얗게 변한다고 느꼈다. 이어 그는 격심한 통증을 느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퍼퍼펑.
곳곳에서 도약식 지뢰가 용수철의 도움을 받아 땅에서 튀어 오른 다음 쇠구슬을 쏟아냈다.
그때마다 적을 쓰러트리겠다는 일념으로 돌격하던 붉은 코트들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굳건한 의지와 승리에의 일념으로 다져진 그들이라지만 육신이 무쇠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쇠구슬이 쏟아질 때마다 그들은 피와 내장을 쏟으며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재앙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을 엄습했다. 지뢰밭으로 용감하게 돌격했던 육군 보병들은 이 신병기 앞에 수십 명이 분쇄당하고 백 명 이상이 부상자로 변했다.
이 참극에 생존자들은 대번에 전의를 상실하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폭발은 이어졌고 연대는 문자 그대로 괴멸 상태에 빠졌다.
이렇게 되자 붉은 코트들은 ‘전술적’ 이동으로 점할 뻔했던 이익을 누리는 대신 적에게 측면 공격의 기회를 제공하고 말았다.
검은 군복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수백의 검은 군복들이 재빠르게 밀고 들어오면서 1연대는 수습을 할 기회도 없이 밀려났다. 그 자리를 차지한 적은 이제 측면에서까지 공격을 가해왔다. 생각했던 이점을 적이 역으로 누리고 있었다.
점증하는 적의 압력에 아군 병사들이 연달아 쓰러지는 것을 본 데이빗 대령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육군 소장 버나드에게 말했다.
“각하, 이 싸움은 우리가 진 것 같습니다. 승산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백기를 든다면 시민들은 어쩐단 말이요?”
“항복을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각하. 시민들이 철수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우리 전력은 온존시켜야 합니다. 아문을 지키기 위한 ‘방패’ 작전은 실패했으니, 항구라도 방어해야 합니다. 그곳이라면 해군의 지원이 있으니 한나절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 방법이 최선인가?”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후.”
버나드는 무거운 표정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발사광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대령의 말대로 하지. 철수 신호를 보내시오.”
“알겠습니다.”
데이빗은 체리의 재가를 구하자마자 군악대에 퇴각을 알리는 노래를 연주하게 했다.
그 노래는 과거 연인을 잃고 슬픔에 겨워하던 어느 아낙네의 사연을 담은 곡이었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삶은 화려하게 꽃피었지요.’
대령은 그 노래의 음울한 한 곡조를 되뇌었다. 왕국은 아문에 이름과 번영을 주고 동방의 보석으로 길러냈다. 하지만 이제 짐을 챙겨 떠날 시간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