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57화 (357/425)

제357화. 아문 탈환 (2)

왕국 육군은 처절하게 패배했다. 전투에 투입된 병력의 4할이 사상자가 되거나 포로가 되었고, 동원한 장비의 태반을 상실했다. 거기다 작전의 목표도 달성하지 못했으니 치욕스럽기 그지없는 결과를 맛보았다 해야 했다.

데이빗 대령으로부터 교전 결과를 보고받은 총독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총독은 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잠시 혼자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총독이 ‘항복’을 검토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선선히 방에서 물러났다.

명예를 중시하는 총독이 간단히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으니, 생각할 시간은 주어야 했다. 그들은 방을 나와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데이빗은 피난 보낸 아내가 그나마 ‘적’의 수중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남은 시민들의 운명에 동정을 보냈다. 아니, 그도 안심할 처지는 아니었다. 운이 나쁘다면 적의 손에 최후를 맞을지도 모른다.

대령은 파이프를 깊게 빨아들이며 총독이 결정 내리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방 안에서 짧은 총성이 울렸다. 놀란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총독은 두부에서 피를 쏟고 있었다. 급히 군의관을 부르긴 했지만 누가 봐도 총독은 살아나긴 그른 상태였다.

가까이 갔던 장교 하나가 손으로 X자를 표시하자 모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항복도 무거운 판에 총독이 자결을 했다. 모두가 한없이 무거운 표정으로 총독의 시체 옆에 선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군의관이 총독의 사인을 확인하는 동안, 장교 하나가 총독의 유언장을 들고 왔다. 유언에는 시민들의 안전을 당부하는 말이 쓰여 있었다. 사실상 책임을 자신이 지고 가겠으니, 결정은 뒷사람들에게 맡긴다는 내용이 주였다.

총독의 유언에 따라 육군과 해군 장교들은 차 순위 서열인 치안감 허드슨 경에게 아문 식민지의 운명을 결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허드슨은 그들의 말을 듣고 전투를 당분간 지속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왕국 육군에 가능한 한 시간을 벌어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시민의 수를 줄이기를 원했다. 이에 따라 데이빗 대령은 야간 동안 시민들의 탈출을 위한 ‘제비 작전’을 입안했다.

작전은 시민들을 태울 배들이 출항 준비를 마치고 항구를 떠날 때까지 육군의 잔존 병력은 적이 항구에 접근하는 것을 최대한 막기로 했다.

‘제비 작전’의 발동에 따라 항구에 남은 최소한의 헌병과 경찰은 선상 경험이 있는 자들을 추려 배에 나누어 태우고 시민들에게 항해에 필요한 물품을 옮겨 싣게 한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계획이 자신들을 모두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배들에 선상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만재해서 바다로 나갔다가 어떤 참상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준비된 배 자체도 턱없이 부족했다. 선박 중 태반은 노동자들이 중도에 떠나버려 선창에 아직 짐이 꽉꽉 차 있는 상태였다. 그것들을 끌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 아문에 있는 왕국 시민의 대부분은 여성과 아이, 그리고 관리자 역할로 온 중장년의 사내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힘깨나 쓰는 자들을 모두 전장에 내보낸 상태에서 배들을 출항 준비로 만들 능력이 부족했다.

애당초 아문 당국이 ‘방패 작전’을 실천에 옮겼던 것도 모든 아문 시민들을 피난시킬 수 있는 배편을 준비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어서다.

아무튼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려는 것이 나은 것은 사실이라 사람들은 배에 있는 각종 상품을 내리고, 항해에 필요한 물품을 싣는 작업에 착수했다.

“제대로 들어야 한다, 꼬마야.”

늙은 신사가 작은 포대를 넘겨주자 어린 여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받아 끙끙거리며 끌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살겠다고 움직이는 인간의 집념은 확실히 놀라운 구석이 있었다.

일단 시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출항 준비 상태에 들어가는 배의 척수가 하나씩 늘기 시작했다. 사람을 만재한다면 배 한 척에 오백 명 이상도 너끈히 태울 수 있었으니, 한 척이 늘어날 때마다 수백 명의 아문 시민을 야만인의 손에서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만에 달하는 시민들을 모두 피난시키기에 준비된 배편은 너무 부족했다.

시간이 촉박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도시 북쪽에서 포성이 울렸다.

“아?”

사람들이 잠시 손길을 멈추고 북쪽을 바라보았다. 포성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가지 한쪽에서 폭음이 울렸다.

동시에 마지막 순간까지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던 항구는 아비규환에 빠졌다. 시민들은 서로 배에 오르겠다고 아귀다툼을 하며 다른 이들을 밀어내기에 바빴다. 그 혼란 속에 데이빗이 입안한 ‘제비 작전’은 서서히 물거품으로 변해갔다.

항구에서 철수 작업을 직접 감독하고 있던 데이빗에게 육군 장교 하나가 달려와 상황을 알렸다.

“조금 전에 적이 시가지 북쪽을 향해 포대를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적은 대포를 가지고 오지 않았을 텐데, 어디서 대포가 났단 말인가?”

데이빗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게 있었다면 간밤의 전투에서 적이 사용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었다.

“육상 회랑이 열리면서 가지고 왔을 수도 있을 겁니다. 경포 정도라면 밤새 가지고 들어와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으음.”

데이빗은 그 대답에 침을 삼켰다. 적이 대포를 가지고 와 포격을 시작한다면 해상 철수는 사실상 무리였다. 잘 훈련된 군인들이라면 포격 하에서도 일사불란하게 후퇴를 진행할 수 있겠지만, 현재 철수 대상은 군대가 아니라 시민이었다. 시민에게 평정심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사령부로 가시겠습니까.”

장교가 묻는 순간 포성이 울렸다. 데이빗은 움찔하다 항구를 바라보았다. 첫 포성이 울리자마자 항구에 있던 민간인들 사이로 혼란이 번지는 모습이 생생했다.

“그러세.”

데이빗은 은은한 포성을 듣다 해군 사령부 건물 쪽으로 향했다. 육군 잔존 부대는 시가지의 방어를 포기하고 항구 구획을 사수하는데 전념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령부는 해군의 것을 빌려 쓰고 있었는데, 버나드 소장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데이빗이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버나드도 상황을 인식하고 있었는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군님.”

“아, 대령. 항구 쪽 철수는 어떻게 되어 가오?”

“아직 1할도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준비된 배들도 탈출에 당장 동원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요?”

그 말에 데이빗이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포격 때문입니다. 포격을 멈추기 전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작전은 실패란 말이요?”

“예, 각하.”

버나드는 그 말에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그와 함께 사령관 실에 있던 치안감 허드슨이 입을 열었다.

“그 제비 작전이 실패라면 조만간 우리 민간인들이 교전에 휩쓸리겠군. 그렇지 않소?”

“아마 그럴 겁니다.”

“방법이 없단 거로군. 방법이 없다. 그거 참.”

허드슨은 쓰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안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버나드도 얼결에 따라 일어났다.

“장군, 이만 항복합시다. 육군과 해군은 왕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소. 이만 하면 여왕 폐하와 조국에 부끄럽지 않은 노력을 했다 자평할 수 있을 거요.”

“하지만 항복을 하면 수만 시민의 목숨을 적에게 맡기게 됩니다. 그 정치적 부담은 본국에 엄청난 짐이 될 겁니다. 향후 전쟁을 생각하면.”

장군이 정치적 파장을 우려하자 허드슨이 고개를 저었다.

“뒷일은 정치인들이 걱정할 문제요. 우리가 할 일은 왕국 시민들의 목숨과 재산을 보존하는 게 전부요. 그렇지 않소?”

치안감의 반문에 데이빗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내 이름으로 적에게 정전 교섭을 청하도록 합시다.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치안감이 한마디를 붙이자 버나드는 권총집에서 권총을 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각하께서 그리 결정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썩 내키는 일은 아니군요.”

장군은 총을 놓고 방 밖으로 나갔다. 치안감은 그 뒷모습을 보다 대령에게 말했다.

“대령은 의복을 정리하시지 않을 거요?”

“정리라니요?”

“버나드 소장은 의복에 달린 훈장과 계급장을 떼고 나올 생각인 듯싶은데.”

명예로운 왕국 육군 장성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을 보이러 갔다는 말에 데이빗은 쓰게 웃으며 자신도 잠시 의복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장교들이 굴욕적인 항복에 앞서 의복을 정리하러 간 사이 치안감은 의자에 앉아 집무실 한쪽에 놓인 총독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책임을 뒤에 넘기고 명예만을 챙겨 달아난 그가 새삼 원망스러웠다.

***

항복 조인은 과거 연합왕국과 신의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연상시키는 분위기 속에 이루어졌다. 상석에 둥글게 앉은 신의 관료들과 장교들 앞에 홀로 나선 왕국 아문 치안감 허드슨 경이 펜을 들고 문서에 서명을 했다.

그가 항복 문서를 내놓자 신의 관료들이 돌아가며 그 문구를 읽은 후, 그 아래에 서명을 했다.

항복이 이루어지자 아문 시가지 안으로 검은 군복들이 팔과 다리를 높게 들고 직각보행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군홧발 소리를 울리며 도시로 들어와 신의 깃발을 곳곳에 내걸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민간인 약탈 및 범죄는 없었다. 통제가 어려운 단련 등이 투입되었다면 문제의 소지가 있을 수 있었지만, 왕국이 포격에 항복한 탓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검은 군복들은 아문 시민들의 불안에 찬 시선을 받으며 항구 및 주요 군사 시설물을 접수했다. 이 과정에서 상승군은 엄청난 분량의 전리품을 얻었다. 아문에서 미처 출항하지 못한 오십 척의 상선을 비롯해 건조 도크에 들어가 있던 네 척의 전열함이 그 노획품 중 가장 값진 것이었다.

그 외에도 은으로 천만 냥은 될 아문 은행 소유의 금과 은, 보석, 각종 상품이 접수되었다. 민간인 소유의 물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딘 상회’처럼 ‘아편’ 무역과 관련해 부를 쌓은 상회의 자산들은 모조리 몰수가 결정되었기에 전리품은 고스란히 신의 자산으로 편입될 예정이었다.

전쟁 전비로 엄청난 비용을 지출할 예정인 신으로서는 매우 반가운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임경문은 이 전리품들을 행상의 관리 하에 넘기고 전투 중 공을 세운 병사들을 대거 포상했다.

포상은 전쟁 이전 승도가 정립한 ‘서훈 제도’에 따라 훈장과 일정한 상금이 주어졌다.

하지만 전후에 남은 일은 ‘신나는 논공행상’과 전리품 처리만이 다가 아니었다. 엄청난 수의 포로들과 도시 민간인들에 대한 처우 문제가 있었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어렵고 골치 아픈 문제였다.

신은 아문을 함락시키면서 요새와 아문에서 모두 4,150명의 왕국 육해군 및 기타 부대의 병사와 장교를 포로로 잡았다. 이 포로들을 좁은 아문에서 관리하는 것은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대륙 본토로 이송할 필요가 있었다.

거기다 아문 시민들도 그냥 둘 수 없었다. 이 민간인들을 현지에 거주하게 할 경우에는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방위상 불리한 아문의 왕국 시민들을 계속 잡아두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배치해야 한다는 것인데, 전력이 제한된 신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지출이었다.

두 번째로 아문으로 왕국 군대가 반격을 가해올 경우, 아문의 왕국 시민들을 간단히 잃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정치적으로 아문 시민들은 연합왕국을 상대할 좋은 카드였기에 이를 쉽게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 번째는 아문으로의 식량 공급 문제였다. 아문은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황량한 토지였기에 지금까지 해상과 육상으로부터 식료품 및 연료를 공급받았다.

하지만 왕국과 전쟁을 하는 상태에서 해상으로 물자를 조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육상 공급도 곤란했는데, 철도에서 기관차에 불을 지른 바람에 당분간 아문과 대륙 간 철도 교통이 마비된 상태였다.

소와 말을 동원해 아문 시민들에게 먹일 물자를 나른다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그렇게 고생해가며 아문의 적국 시민들을 그 자리에 유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 아문을 점령한 상승군 당국은 아문 내의 모든 백인 포로와 민간인들을 제국 본토로 이송하는 작업을 개시했다.

이 작업은 후속 부대를 거느리고 달려온 정의군 사령관 풍겸이 지휘하기로 했다.

“자, 빨리 걸어라. 이 오랑캐 놈들아.”

작달막한 키의 사내가 대열을 오가며 채찍을 휘둘렀다. 그가 바닥을 채찍으로 칠 때마다 백인들이 깜짝깜짝 놀라며 아픈 발을 재촉했다.

“엄마, 다리 아파.”

“조금만 참으렴. 조금만 더 걸으면 될 거야.”

젊은 백인 여자 하나가 어린 소녀를 달래며 그 손을 쥐었다. 대열에서 낙오되었다간 저 야만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 생각에 그녀는 딸아이를 쉬게 할 수 없었다.

여자들은 그런대로 통제에 순응하며 걸었지만 남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군인들은 이 ‘불쾌한 처우’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보였다.

“더러운 야만인 놈들, 명예도 모르고 이런 대접을 해?”

“야만인들이니 별수 없는 게지.”

그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런 오랑캐들의 건방진 태도에 불만을 갖기는 정의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바로 천국 출신. 천국을 멸망시킨 상승군과 조정의 병기는 양이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승도의 휘하에 들어간 그들은 자연히 불만의 화살을 양이들에게 돌리고 있었는데, 마침 뻣뻣한 태도를 보이니 배알이 더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행렬이 아문을 벗어나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더는 못 가겠다. 우리 여자들을 쉬게 해줬으면 한다.”

붉은 코트 장교가 통역을 통해 요구를 전해왔다. 그러자 정의군이 코웃음을 치며 행군을 계속할 걸 명령했다.

그러자 붉은 코트들도 더는 못 가겠다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이 소소한 반항에 대해 정의군은 날카롭게 반응했다.

“밟아.”

십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곽씨는 망설이지 않고 제 앞에 누운 붉은 코트의 배를 밟았다. 그러자 답답한 신음이 터졌다.

“이 건방진 양놈, 어디서 감히 기어오르는 거냐. 여긴 신이다. 네놈들 나라가 아니란 말이야.”

곽씨는 그간 쌓인 분노를 풀려는 듯 붉은 코트에게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사실 곽씨는 연합왕국이 동방으로 진출하며 생긴 무수한 희생자 중 하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릴 적에 아편에 중독되어 폐인 중의 폐인이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품앗이를 하고 물레를 돌리고, 머리를 잘라 팔고. 그것으로도 아이들을 먹일 수 없어 이웃들에게 몸을 팔기도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편 중독자 남편과 여덟 자식을 건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몸부림친 대가는 참혹했다.

‘더러운 창년.’

‘남편 잡아먹을 년!’

더러운 세상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친 그녀에게 돌팔매질을 했다. 그녀의 치마 아래서 편안하게 아편을 피우며 시간을 죽인 아비마저 그 돌팔매질에 가담했다.

그렇게 어미는 동네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죽었다.

그게 다 무엇 때문일까.

아편을 피운 아비 탓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아비란 인간이 그것밖에 되지 못했다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자제력이 부족한 아비도 원래는 건실하고 부지런한 청년이라고 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그런 아비를 어미의 짐짝으로 만든 것이 아편이었다. 그 염병할, 저주할 아편을 가지고 온 악마 새끼들이 피부 허연 백인들이었다.

그런 주제에 제 여인들을 염려해서 길을 못 가겠다고? 웃기지 마라.

곽씨는 있는 힘껏 백인의 배를 밟고 그 얼굴을 걷어찼다. 피가 터지고 허우적거리는 손짓이 느껴졌다. 하지만 곽씨는 사정 봐주지 않고 계속 발길질을 했다.

“그만해.”

십장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악마 새끼를 죽이기 위해 발길질을 계속했다.

“그만하게.”

십장이 그의 팔을 당겼을 때야 곽씨는 정신을 차렸다. 그때 그에게 두드려 맞은 백인은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 빈사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 꼴을 본 붉은 코트들이 겁을 먹었는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십장은 그런 백인들에게 경고했다.

“이번은 이 정도로 넘어간다. 하지만 두 번 반항하면 그때는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밟아주마. 알겠나?”

그의 서늘한 눈이 스치고 지나가자 백인들은 기세가 꺾인 듯 눈빛을 슬슬 피했다.

십장은 ‘좋아’ 하고 행렬에 다시 출발을 명령했다. 그가 어깨를 탁 쳤을 때 곽씨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십장 어른. 저도 모르게.”

“아니야. 잘했어. 저놈들 겁먹은 것 좀 보라고. 이렇게 겁을 줘야 움직일 놈들이야. 신경 쓰지 말게.”

십장은 그를 격려하고 행렬의 이동을 감독하기 위해 앞으로 움직였다.

백인들은 정의군의 잔혹한 모습에 겁을 먹고 이후 군말 없이 이동 명령에 복종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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