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8화. 나포 (1)
왕국 공사 하워드는 전쟁이 일어나고 거의 한나절이 지나서야 소식을 접했다. 그는 늦은 점심을 먹고 평소처럼 본국에 보낼 전문을 작성하다 신의 관리로부터 예방을 받았다.
신의 관리는 격식 있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신과 귀 연합왕국이 전쟁 상태에 돌입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전쟁 전에 맺은 외교관 특권에 의거, 공사 각하의 안전은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단, 그 특권은 앞으로 48시간 동안 유효함을 알려드립니다.”
하워드는 그 ‘통보’에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노기를 터트렸다.
“전쟁이라니? 지금 신에서 우리 왕국에 전쟁을 선언했단 말이요? 개전을?”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 조정의 뜻입니다.”
“믿을 수가 없군. 이게 얼마나 위험한 불장난인지 정말 모르는 거요?”
“저는 조정의 의사를 전할 뿐입니다.”
신의 관리는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좋소. 48시간이라면 귀국의 강주 왕 전하를 만날 시간은 되겠지. 총리아문으로 가면 강주 왕 전하를 만날 수 있는 거요?”
공사는 아직 개전이 확정된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선전포고를 날리고 바로 전쟁을 하는 나라는 없었다. 한나절의 여유를 두고 전쟁을 하는 것이 에우로페의 관례였다.
공사는 승도가 에우로페의 열강을 상대하는 만큼 그 관례를 지킬 거라 생각하고 최후의 교섭을 해보려 생각했다. 민간인 학살 문제가 걸린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양보할 용의도 있었다.
며칠 전부터 민간인 학살 건과 관련해 조율할 뜻을 총리아문에 전한 만큼, 협상의 진정성은 저들도 알아주리라.
공사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 기대를 배신했다.
“각하, 협상은 불가능합니다. 총리아문으로 가셔도 저희 전하를 뵐 수 없으실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저희 전하께서는 총리아문에 계시지 않습니다. 지금 선진에 계시지요.”
공사는 그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강주 왕이 총리아문에 있지 않고 선진에 있다니.
그는 잠깐 후에야 상대가 한 말의 속뜻을 알아챘다.
“그럼 전쟁을 지휘하러?”
“그렇습니다.”
포탄이 날아갔다면 협상은 헛일이다. 공격을 받고도 넘어가는 것은 열강의 체면에 맞지 않았다. 명분이 없고 정세가 불리해도 그런 공격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공사는 이미 모든 일이 글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상투적인 말로 신의 관료에게 경고를 남겼다.
“이번 일. 분명 귀국은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요. 우리 연합왕국은 반드시 이 대가를 치르게 해줄 것이니, 두고 보시오.”
“하오시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신의 관리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방에서 물러났다. 관리가 물러나자 공사 하워드는 자신의 책상에 있던 찻잔을 내던졌다.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지며 굉음을 냈다. 공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고용인들에게 짐을 챙기라고 명령했다.
48시간의 유예 운운한 것으로 보건데 정말 시간이 지나면 그들을 추포해 감옥에 넣고도 남을 분위기였다.
공사는 이 앙갚음을 톡톡히 해주리라 다짐하며 자신의 방을 떠났다.
선진에서 탈출한 왕립 해군 전투함들은 대륙의 동쪽 해안을 돌아 아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침로를 동영으로 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동영은 품질 좋은 탄광을 보유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철도가 하나도 건설되지 않아 항구까지 안정적으로 석탄을 공급할 능력이 없었다.
덧붙여 동영에는 연합왕국 해군이 마련한 보급 기지가 전무했다. 이번 교전으로 소모한 자재와 포탄 등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아문으로의 이동은 불가피했다.
‘무엇보다 우리가 아문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제해권에 문제가 생긴다.’
라함은 해군 전투함 네 척을 잃어버린 시점에서 자신들이 매우 위험한 처지에 몰렸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선진을 위협하던 분 함대의 전력이 반 토막이 나서 격퇴된 이상, 신은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모든 함정을 원양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조건이라면 아문에 남은 분 함대만으로 그 근해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수역 방어를 위해서라도 이 네 척의 전투함은 반드시 합류해야 했다.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선진 주둔 함대의 아문 행은 불가피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불안한 부분이 없진 않았다. 선진을 공격한 신이 아문을 그냥 두었을까 하는 점 때문이었다.
‘설마’ 하면서도 아닐 거라 믿었지만 공격을 받고 있을 공산도 없진 않았다.
“결국 도착해봐야 알 수 있단 건데.”
대령은 머리를 긁고는 해도를 보았다. 선진을 벗어나 벌써 수천 리 바닷길을 주파했다. 슬슬 아문이 가까워질 시점이었다.
대령이 해도를 보고 있는데 당직 사관이 그의 방에 노크를 했다.
“들어오게.”
사관은 경례를 하고 기함에서 받은 전문을 건넸다. 신호사관이 꼼꼼하게 코드 집을 대차해 살핀 것이라 급히 전문을 번역하며 나오는 사소한 오류도 없었다.
함장은 전문을 읽다 잠시 눈을 크게 떴다.
“번즈가 침수가 심해지다니. 이러면 우리만 아문으로 단독 항해를 해야 하겠군.”
대령은 제독의 전문을 읽고 입맛을 다셨다.
전열함 번즈가 수십 발의 피격으로 속도가 떨어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문으로 가기도 전에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큼직한 번즈를 예인하기 위해 기범선과 나머지 프리깃이 남아야 했다. 장갑함 흑 태자가 예인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긴 했지만, 당장 흑 태자는 아문으로 갈 석탄도 간당간당했다.
견인을 하다가 흑 태자가 동력을 잃고 표류하면 그때는 예인할 방법도 없었다. 구천 톤이 넘는 거함을 끌기에는 남은 배들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다.
라함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기함에 먼저 이동하겠다는 신호를 보내게 했다.
그리고 나흘 동안 고독한 장갑함은 홀로 원양을 돌아 아문으로 향했다. 최대한 석탄을 아끼기 위해 침로를 대륙 해안을 따라 잡은 탓에 흑 태자의 이동 동선은 신에 낱낱이 까발려졌다.
하지만 함장은 그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신은 이 함정을 정면에서 대항해 잡아낼 전력이 없었다. 그는 그의 배에 자신이 있었기에 도전이 올 거라면 와도 좋다고 생각했다.
함장이 여유를 보인 탓일까.
그 휘하의 병사들도 ‘동료’들을 잃고 홀로 항해한다는 불안을 떨치며 나름대로 평정을 회복했다.
그들은 ‘아문’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고 자신들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수병들은 그 희망을 쫓고자 부지런히 자신들의 항로 앞을 살폈다.
그때, 전방을 감시하던 견시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전방에 선박 출현! 대형 상선입니다!”
“상선이라고?”
그 보고에 아문의 도착 보고만 기다리던 장교들이 갑판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망원경을 들고 수평선 너머를 살폈다. 과연 수평선 위로 희미한 불빛이 떠 있었다. 그 불빛에 의지해 자세히 살피니 마스트에 왕국의 사자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장교들은 그 국기를 확인한 다음 망원경을 내렸다.
“우리 상선이라니.”
“아문에서 온 배인가.”
그들이 수군거리는데 라함이 갑판 위로 올라와 망원경을 낚아챘다. 대령도 상선을 흘깃 살펴보고는 턱을 쓸었다.
“우리 상선이라. 일단 가까이 가도록 하지. 아문 소식도 들을 겸.”
대령은 기관부에 명령해 출력을 줄이도록 하고 키를 상선 앞으로 돌리게 했다.
명령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함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잘 훈련된 승무원들은 다루기 어려운 증기기관과 ‘거대한 배수량’을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다루었다.
그들의 실력은 부하이긴 하지만 감탄이 절로 나왔다.
대령은 망원경을 들고 가까워지는 상선 쪽을 보았다.
마침 상선 쪽에서도 그들을 확인했는지 배 위에서 손을 흔드는 자들이 보였다. 그리 수는 많지 않았지만 불빛 아래 보이는 자들은 모두 백인 남성들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갑판을 한 번 더 보았던 함장은 피식 웃으며 망원경을 내렸다.
이제 상선 근처에 배를 세우고 저들로부터 아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일만 남았다. 혹 아문이 실함되었다면 저들에게 부탁해 석탄을 가져오게 해야 할 것이고.
대령은 편하게 생각하며 부하 장교에게 자신의 코트와 모자를 가져오게 했다.
***
“놈들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아직 낌새를 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 듯싶군.”
배의 반대편 그늘에 도사리고 있던 용병 사내들이 서늘한 칼을 갈았다. 그들은 가까워지는 검은 연기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처음에는 그들도 다가오는 적함이 장갑함이라는 사실에 크게 당황했다. 사실 그들은 장갑함을 사냥하기 위해 대기하던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이 근방으로 북상해올지 모를 왕립 해군의 프리깃을 사냥할 목적으로 대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장갑함과 마주친 순간 그들의 표적은 동방 최대의 거함, 흑 태자로 전환되었다.
어차피 그들의 정체가 장갑함에게 폭로당하면 도망칠 틈도 없이 박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바에야 한 번 배를 강탈해 보려는 시도라도 해보는 편이 나았다.
용병들이 칼을 갈며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로망스 사내들도 평정을 가장하며 침착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들은 강주 군관학교에서 신의 해양 인력을 기르는 일을 하던 뱃사람들로 이번 전쟁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었다.
이들이 이 위험한 일에 낀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왕립 해군의 격파를 위해서는 적당한 기만술도 필요하다고 판단한 오승도가 이들에게 거금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이 사내들이 전쟁에 나올 이유는 없었다.
로망스 사내들은 애써 목에 힘을 주고 뻣뻣한 자세로 서서 연합왕국 장갑함을 응시했다.
“지금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은 기분인데. 내 다리 좀 봐주겠나?”
“안 봐도 알 것 같아. 술이라도 한 모금 마시지 그러나?”
“아까 놈들 장갑함을 봤을 때 마셨지. 그건 그런데 정말 크고 무지막지한 놈일세.”
“그런 것 같군. 우리 조국에선 결코 만들 수 없을 괴물이야.”
그들은 바다에서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거함을 보며 위압감을 느꼈다.
“저런 놈을 우리가 나포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진 않을 거네. 놈들은 우리가 기습할 거란 것도 모르고, 가까이서 함포를 쏘긴 어려울 테니까.”
그들은 서로를 안심시키며 가까워지는 장갑함을 응시했다.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장갑함이 멀지 않은 위치까지 다가왔다. 거함은 그 상태에서 거의 멈추어 섰다. 그래도 관성이 있어 앞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보니 몇 분만 있으면 상선과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까지 다가올 듯싶었다.
로망스 사내들은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판단하자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용병들이 하나둘 조용히 물로 몸을 감추었다. 원래 수영에 능한 자들이 아니다 보니 물에 뜰 것을 하나씩 든 상태였다.
그래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고요한 밤에 뱃전에 포말이 부딪치며 철썩이는 소리를 내는 터라, 물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용병들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차를 포장하듯 단단히 밀봉한 통을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그 통에는 배를 나포하기 위해 담아둔 수류탄이 들어가 있었다. 척탄병용으로 만들어진 것을 선상에서 쓰도록 준비한 물건이었다.
용병들이 소리 없이 헤엄쳐 다가가는 동안 장갑함 쪽에서 상선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우리 배로 몇 분만 건너와서 이야기를 할 수 없겠습니까?”
“이야기라고요?”
“그렇습니다. 혹 아문에서 나온 상선이라면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왕국 장교의 외침에 상선 쪽에서 선선히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잠깐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이쪽 보트를 단단히 묶어놔서.”
“알겠습니다.”
연합왕국 사내들은 별 의심도 없이 그 말을 믿었다. 그 믿음은 상대를 믿었다기보다 자신들의 우세를 확신했기에 나온 것이었다.
상선 따위가 허튼수작을 부려도 장갑함은 끄떡없다. 그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왕국인들이 상대가 넘어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생각하지 않은 손님들은 검은 물살을 헤치고 장갑함 근처로 다가왔다. 검은 옷을 입은 탓에 그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장갑함의 뒤로 다가가 갈고리를 던졌다. 그사이에도 상선 쪽에서 주의를 끌기 위해 큰 소리로 이야기를 걸고 있었던 탓에 갈고리의 투척음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판단한 용병들은 눈빛을 교환한 다음, 날렵하게 밧줄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검은 그림자들이 장갑함의 후미로 기어올랐다. 그들은 함의 후미에 오르기가 무섭게 가장 먼저 눈에 보인 해병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해병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야간인 데다 4교대를 취하고 있었던 까닭에 함 내의 요원 상당수는 선내에서 취침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나마 당직인 자들과 교대를 준비하는 자들은 모두 상선 쪽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세계 최강의 군함이라곤 하지만 결국 사람이 운용하는 병기였다. 그 인간이 허점을 보이는 이상 이 괴물도 허점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후미에서 소리 없이 해병들을 해치운 용병들은 동료들을 재빠르게 끌어 올렸다. 침입자는 몇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서른으로 불었다. 수가 그 정도로 늘어나자 용병들은 함의 구조를 대강 살핀 다음, 갑판 위주의 적을 헤아렸다.
기본적으로 군함은 함 내부와 갑판 사이의 통로가 하나밖에 없었다. 구조가 그러다 보니 입구를 장악하면 내부에서 나오는 적을 막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용병들은 손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다음 준비한 수류탄을 꺼냈다.
잠시 후, 그들은 일제히 수류탄을 갑판 위로 던졌다.
데구루루.
괴상한 물체가 한 번에 굴러오자 이야기를 나누던 왕국인들의 시선이 잠시 갑판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갑판 위에 둔 통에서 사과라도 굴러 나왔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은 2초 후에 증명되었다.
콰쾅!
엄청난 폭발음이 갑판 위를 휩쓸었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인간들의 머리와 팔다리가 갑판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공격이다!”
팔과 다리에 큰 상처를 입은 채로 쓰러진 라함 대령이 악을 썼다. 겨우 살아남은 장교와 병사 몇이 급히 총을 꺼내들었지만 그들이 탄환을 장전할 틈도 주지 않고 달려 나온 검은 얼굴들이 그들을 습격했다.
달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나는 칼날이 백인들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그 악귀들을 본 라함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용병들은 부상당한 자들을 내버려두고 갑판의 입구로 관심을 돌렸다. 곧 함 내에서 폭음을 듣고 달려 나오는 자들의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 복도를 향해 수십 발의 수류탄을 굴렸다.
그것들이 굴러오는 줄도 모르고 위기에 대응하고자 달려 나오던 붉은 코트들 앞에서 대폭발이 일었다.
해병 위관은 그 자리에서 폭사했고, 그 주변의 해병들 대부분도 크게 다쳤다.
용병들은 그 매캐한 연기를 뚫고 함 내로 달려 들어갔다.
한 무리의 용병들이 갑판을 제압하고 함 내 공격에 들어가는 동안, 상선 쪽에서도 보트를 내렸다. 보트에는 수백은 되는 용병들이 타고 있었다.
장갑함은 갑작스런 ‘근거리 교전’에 힘을 쓰지 못했다. 라함은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지켜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갑함의 갑판 위는 수백의 검은 군복들로 가득 찼다. 그들이 차례로 함 내로 돌입하는 것을 지켜보던 라함의 곁으로 로망스 출신 장교 하나가 다가왔다.
그 장교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그 앞에서 모자를 벗더니 무릎을 구부려 눈을 맞추었다.
“이거 실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로망스 사람들이 실력이 있었다면 정정당당한 승부를 해드렸겠지만 원체 실력이 모자란 것을 어쩌겠습니까. 귀 해군의 넓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 비웃음 아닌 비웃음에 라함은 입술을 비틀었다.
“비웃을 것 없소. 방심을 하다 진 것도 패한 것이지. 하나만 대답해 주겠소?”
“말씀하시지요.”
“아문은, 아문은 어떻게 되었소?”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마 함락된 거요?”
그 물음에 장교가 상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답했다.
“아문이 함락되지 않았다면 귀국 상선을 빌려서 이렇게 보기 좋게 속일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미칠 노릇이군. 아문이 넘어가다니.”
라함은 기침 소리를 냈다. 폐가 상한 듯 기침을 하자 피가 나왔다.
“그나저나 당신네들 솜씨가 좋더군. 처음부터 우리를 노리고 기다린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왕립 해군의 프리깃이나 잡을 생각이었습니다. 큼직한 장갑함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요.”
“그렇군. 대답 고맙소.”
“별말씀을. 괴물은 잘 받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로망스 장교는 모자를 쓰며 익살스럽게 답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라함은 그 모습을 보며 피를 한 움큼 더 토하더니 고개를 모로 꺾었다.
유구를 병합하여 연합왕국의 이익을 극대화하자는 방안을 제시했던 해군 엘리트의 비참한 최후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