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8화. 해병대 괴멸 (1)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포의 동쪽에 대기하고 있던 검은 군복들의 물결이 한 번에 쏟아져 나왔다. 지금까지 왕립 해군의 공격력을 우려하여 교전에 가담하지 않고 있던 싱싱한 병력이었다.
이들이 일시에 참전하자 왕립 해병들을 지휘하고 있던 페티 소령은 일단 성곽 방어를 지시하면서 해군 쪽에 구원을 요청했다. 창고에서 구한 민간인들을 싣고 해군과 보조를 맞추어 물러나기 위해서였다.
해병들은 격렬한 총격을 가하면서 검은 군복들의 공격을 저지하려 했지만 수적 격차가 너무 컸다. 거기다 북쪽에서 나타난 적에 단련들과의 전투로 지친 여건을 고려하면 교전은 필패나 다름없었다.
해군이 없다면 결과는 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빌어먹을. 정작 필요할 때 다 어디로 도망간 거야.”
페티는 이를 갈면서 신호사관에게 상선의 접안을 재차 요구했다. 상선은 바로 해병들이 타고 왔던 배들로 해군의 최후미에서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상선에 접안 요청을 한다고 해도 바로 지원이 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장 강 양안에서 포탄이 쏟아지고 함대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란 통에 상선이 올라온다는 자체가 쉽지 않았다.
요청이 이루어지고 몇 분이 지나도록 해군은 그 요구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자 페티 주변에 서서 상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간인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처음 조국의 병사들이 그들을 구하러 와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 때만 해도 안도하고 있던 그들로서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또 버림받는 것이 아닌가 하여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아문에서 해군에 버림받은 전력이 있었던 터라 더욱 절박하게 해병대에 매달렸다. 민간인들이 탈출하지 못한 탓에 해병들로서도 금포를 계속해서 지킬 수밖에 없었다.
꽝!
포격이 금포 성벽에 떨어졌다. 이미 왕립 해군의 손에 육상 쪽 성벽도 크게 훼손된 상태여서 그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돌 부스러기가 흩날렸다.
“대대장님, 적 병력이 새카맣게 몰려왔습니다. 해군 지원은 없는 겁니까. 저렇게 멀리 가서는 지원이 되지 않잖습니까.”
“그야 멍청한 뱃놈들에게 물어볼 일이지. 일단 민간인들부터 탈출시킨다. 상선이 오면 순서대로 승선시키도록.”
“그럼, 병사들은 어떻게 합니까.”
“상선에 민간인들만 싣고 우리는 해군 지원을 받으면서 강을 따라 물러간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럼 염병할 이 상황에 다른 방법이 있나.”
페티는 모자를 내팽개쳤다.
부하 장교들은 그의 짜증에 입을 다물었다. 페티는 그런 부하들을 보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할 시간에 가서 적이나 막게. 알겠나?”
페티는 부하들을 돌려보냈다.
페티의 요구에 따라 민간인들을 급히 철수시킬 목적에서 일단의 상선들이 강을 거슬러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포격을 주고받으며 혼란스럽게 움직이는 아군 함정들 사이를 지나야 했다. 그 와중에 해군 함장들이 욕을 퍼붓기도 했다.
“전투 중에 올라와서 뭘 어쩌겠단 거냐.”
“함이 이동할 길을 막으면 우리보고 포탄을 다 맞으란 소리냐.”
그들은 전투 현장에 낀 상선에 악을 쓰며 돌아가라고 강요했다. 함대 제독의 지휘에 따라 정해진 위치와 항로로 움직이면서 최대한 포격의 손실을 줄여보려는 그들 입장에선 멋대로 함대의 기동을 방해하는 상선들이 곱게 보일 턱이 없었다.
하지만 상선들도 할 말이 있었다. 그들은 해병의 구원 요청을 받은 상태였다. 거기다 민간인 구출은 이번 작전의 핵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 혼란 속에 길을 비키니 마니 악다구니를 주고받았다.
이렇게 양자가 뒤엉켜 움직이지 못하자 신이 난 것은 신의 포병들이었다.
그들은 조금 전보다 ‘좀 더 풍성해진’ 먹이들을 향해 무자비한 포격을 집중했다.
물기둥이 연거푸 솟구치는 와중에 부서지는 배들이 점점 늘어갔다.
올라가는 상선에 내려오는 전열함, 길을 비키려는 프리깃함, 아수라장 속에 부서져 동력을 잃은 배까지. 이 혼란은 도무지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페티는 망원경을 들고 강상을 살피다 상선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나머지 해병 지휘관들과 급히 논의를 갖고, 육상으로 탈출을 시도하기로 했다. 해군 신호사관에게는 프리깃 한두 척이라도 화력을 더해 탈출을 도와달라고 했다.
그에 따라 해군 프리깃함이 신호를 받고 강가로 바싹 다가섰다. 혼란스런 상황이긴 했지만 왕립 해군의 실력은 깡통이 아니었다.
아비규환 속에 용케 신호를 받고 다가온 프리깃이 포격을 가해오자 도시를 공격하던 상승군의 움직임이 일순 주춤해졌다.
이를 기회로 해병대는 박격포를 비롯한 보유 화기를 전부 동원해 강안까지 다가선 상승군을 집중 타격했다. 검은 군복들이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일부 지점에서 물러나면서 도시의 남쪽으로 약간의 탈출구가 열렸다.
붉은 코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여왕 폐하 만세. 돌격!”
해병들이 일시에 밀려 나오면서 총격을 가했다. 검은 군복들은 붉은 코트들과 총격을 교환하며 그 탈출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적의 기세는 너무 강했고 프리깃의 존재가 컸다.
프리깃이 발사한 산탄이 검은 군복들의 측면을 강타하면서 순식간에 수십여 명이 증발했다. 저지력이 한순간에 뚝 떨어지자 붉은 코트들은 위치를 굳히면서 검은 군복들을 밀어냈다.
해병들이 일단 돌파구를 열자 검은 군복들은 그들을 도로 밀어내는데 주력하는 대신, 금포 자체에 대한 공격에 집중했다. 적을 통째로 잘라먹는 대신 그 꼬리부터 끊어나가며 죽이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도시에서 후미를 맡은 붉은 코트 일부가 고전을 거듭하는 동안, 나머지 병력은 민간인을 보호하며 강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티는 그 철수를 선도하며 해군 함정들의 참극을 보았다.
강상으로 수도 없이 포탄이 쏟아지는 와중에 해군 전열함은 용케도 대응 포격을 가해 적의 포대들을 제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받은 피해도 끔찍한 수준이었다.
강에 떠 있는 해군 함정들과 상선의 태반이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이런 교전을 계속하다가는 이번 작전에 나선 동방 함대와 왕립 해병대의 전멸은 피할 길이 없어보였다.
특히 배후에서 ‘정확한 시간’을 기다렸다 개입한 대규모 적 지상군까지 생각하면.
페티는 침을 삼키며 해군 전열함이 포대를 제압하는 즉시, 해병들을 앞으로 이동시켰다. 아군 해군이 어떻게든 적의 대포를 침묵시키는 동안 강 하구까지 철수해야 했다.
해군이 화력을 지원하고, 해병은 민간인을 보호하며 아슬아슬한 교전을 지속해야 하는 난제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이라도 해내면 이번 모험은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본국에 부담이 될 수 있었을 다수의 민간인을 구해냈기 때문이다.
페티는 막대한 피해에 대한 부담을 애써 떨치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렇지만 민간인의 구출 역시 처음부터 신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다. 민간인은 죽음의 덫에서 빠져나가려는 왕립 해군과 해병의 발목을 늦추어 그 전력을 심각하게 약화시킬 주요한 미끼였다.
그렇게 약화된 전력으로는 절대 덫을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중, 삼중으로 주도면밀하게 설계된 이 파멸의 덫을 벗어날 길은 오직 하나, 하늘밖에 없었다.
***
“후미에서 몰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족장님.”
망원경을 든 채 적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하얀 황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연합왕국과 오랜 세월 전쟁을 치러왔던 신대륙의 주인은 실로 긴 시간 만에 그들과의 전쟁을 재개할 참이었다.
“좋아. 우리도 슬슬 하얀 악마들의 머리 가죽을 벗겨보자. 준비되었나?”
“물론입니다. 모두 이날만을 기다렸습니다.”
“가자.”
하얀 황소가 망원경을 접어 품에 넣고 말에 오르자 누런 얼굴의 사내들이 차례로 말에 올랐다. 이들은 적의 측면에 해당하는 강주 아문 간 철도 근방에 숨은 채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의 역할은 적이 퇴각을 시작하면 철도 노선으로 튀어 올라가 적과 평행하게 달리며 공격을 가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일이었다. 적의 행군 속도를 최대한 늦추어 후미를 따라오는 상승군이 최대한의 전과를 올리게 하는 것이 그 주 임무인 셈.
하지만 그들은 단지 그 보조적인 역할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때만 온다면 적의 대열로 뛰어들어 그 머리 가죽을 몽땅 벗길 생각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얀 황소를 위시한 신대륙 원주민 기병들은 일시에 말을 내달렸다. 붉은 코트들이 정찰을 꼼꼼하게, 보다 넓게 했다면 철도선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머물러 있던 그들의 존재를 파악했을지 몰랐다.
‘그렇지만 신은 하얀 악마들의 눈을 가렸다. 그들을 징벌하라는 어머니의 뜻이다.’
하얀 황소는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원주민 기병들은 능숙하게 총을 꺼내 손에 쥔 채로 철도 위로 올라섰다. 그들은 철도선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보이는 강안을 훑으며 그대로 올라갔다.
곧, 남쪽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붉은 코트들의 종대가 보였다. 하얀 황소는 그 모습을 보자 크게 웃으며 외쳤다.
“대정령께서 복수의 기회를 주셨다. 하얀 악마들을 죽여라!”
“악마들을 죽이자!”
기병들은 일시에 말의 배를 걷어찼다. 전마들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자 붉은 코트들도 뒤늦게 기병의 접근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급하게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원주민 기병들은 그 옆을 스쳐 지나가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탕. 탕. 탕.
연거푸 총성이 울렸다. 총격이 이어질 때마다 붉은 코트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철도를 따라와 날쌔게 공격한 원주민들은 일회의 사격을 마치고 그대로 철도 옆의 숲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 공격 때문에 붉은 코트들은 잠시 방어 태세를 갖추느라 움직이지 못했다. 상대가 보병이었다면 접근을 미리 알아채고 해군에게 포격 지원을 요청했겠지만, 기병을 상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원주민 기병들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나타나 귀신처럼 공격을 하고 사라졌다. 그 충격에 왕립 해병들은 급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못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뒤늦게 페티가 상황을 알고 달려와 부하 장교들을 걷어찼다.
“멍청한 놈들. 지금 해군 놈들은 바쁘고, 우리 해병 동료들은 뒤에서 야만인 대군을 막고 있는 판인데, 왜 이렇게 어물거리고 있나. 지금 일 초를 어물거리면 동료 하나가 더 나자빠지는 걸 모르나?”
“하지만 적 기병이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움직였다가 적이 공격을 재개하기라도 하면.”
“공격을 하면 맞아. 맞아 죽더라도 움직여. 그게 네놈들이 할 일이다.”
페티는 부하들이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지금은 위험을 따져가며 시간을 낭비할 겨를이 없었다. 배후에서는 적의 대군이 다가오고 있고, 해군은 탈출구를 열기 위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며 포대들을 제거하고 있었다.
사실 해군의 입장만 생각하면 그냥 아래로 내빼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포대를 치는 것은 원정군과 민간인의 철수를 위한 나름의 노력이었다.
“알아듣겠나.”
페티가 윽박지르고서야 부하들이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소령은 후미로 돌아와 종대의 움직임을 다시 지휘하려 했다. 민간인들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해병들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길게 늘어설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해병대의 전투력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병사들의 움직임을 독려하면서 종대의 이동을 감독해야 했다.
페티가 길게 늘어진 대열의 중간에 이르렀을 때, 다시 숲속에서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하얀 악마들을 죽여라.”
그사이에 전마에 짧은 휴식을 주고 숨을 고른 원주민 기병들의 2차 공격이었다. 그들은 벼락처럼 몰려와 총격을 퍼부었다. 페티도 급한 대로 총을 꺼냈다. 그가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긴 순간, 적 기병들도 총격을 가했다.
쌍방의 총격이 교차했다. 짙은 총연이 양군의 사이를 가렸다. 기병들은 사격을 마친 즉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그 유령 같은 자들의 공격에 페티는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수시로 종대가 중도에 공격을 받으면 이동이 느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면 해병은 전멸이었다. 해군 쪽에서 뭔가 수를 내주지 않는다면.
페티는 이를 악문 채 강상을 바라보았다.
“강 양안의 적 포대 일부를 제압했습니다. 현재 기함을 중심으로 약 1마일 구역은 안전이 확보되었습니다.”
“수고했네.”
하우는 베이컨의 보고에 겨우 안도하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하지만 그의 안도는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갑자기 신호사관이 그 옆으로 달려왔다.
“각하, 큰일입니다.”
“큰일이라니? 지금 포대도 제압했고 고비도 넘기지 않았나.”
“그게 아문 어귀에 남겨두었던 우리 신호사관의 보고입니다. 정체불명의 대형 전투함이 강어귀에 나타나 퇴로를 봉쇄했다고 합니다. 그 마스트에는 신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고 합니다.”
“야만인들에게 퇴로가 차단되다니? 그들에게 그런 해군력이 있을 리가 있나. 잘못 본 것 아닌가.”
하우는 믿을 수 없었다.
신의 주력 장갑함들은 모두 유구에 있었다. 대형 프리깃들도 마찬가지다. 설사 그들이 이동한다고 해도 강어귀에 오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무리를 하면 가능한 전력이 프리깃 정도인데 그 정도로는 전열함과 기범선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신이 미치지 않고선 배를 배치할 이유도, 의미도 없었다.
“사실입니다. 두 번이나 다시 코드집대로 확인해본 결과입니다.”
“그럼, 그 염병할 배야 밀어버리면 그만 아닌가?”
장갑함이 아닌 이상 그렇게 처치하면 그만이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전열함 넷이면 길을 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신호사관은 쐐기를 박았다.
“그게 불가능합니다. 그 배가 장갑함처럼 보인다고 알려왔기 때문입니다.”
“장갑함이라고? 신의 장갑함에 날개가 달리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있나. 그 농담대로라면 신은 30노트 이상의 속도를 내는 쾌속 장갑함을 가졌다는 말인데, 그게 가능할 성싶은가?”
하우가 짜증스럽다는 듯 반문하자 베이컨이 끼었다.
“각하, 하나 걸리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
“걸리는 거라니?”
“실종된 아군 장갑함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실종된 아군 장갑함이라면. 설마.”
그제야 하우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흑 태자 말입니다.”
“그게 강 하구에 있단 말인가?”
“정황상 장갑함이 있다면 그것 외에 다른 배가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흑 태자는 난공불락의 함정이네. 그런 전투함이 어떻게 나포를 당한단 말인가? 침몰 당했으면 당했지 나포를 당할 배는 아니야.”
“하면 우리 쪽에 진즉에 접촉해야 했습니다. 강 하구에 우리 쪽 사관을 남겼으니 마음만 먹었다면 존재를 알렸을 겁니다. 그리하지 않은 이유는 역시 적에게 나포되었다는 가능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칠 노릇이군. 유령처럼 나타난 적 포대도 황당한 판에 아군 최강의 장갑함이 실종되었다가 적의 편에서 나타났다?”
“물론 최악의 가정입니다.”
“당연하지.”
하우는 목소리를 높였다.
왕립 해군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최강의 전투함은 그 자체로 무적의 방패이자 창이었다.
이론상으로는 그 함정 하나만으로도 동방 함대 전체를 박살낼 수 있었다. 그것도 지금처럼 탈출구가 막힌 상태라면 ‘이론’이 아니라 실천에 옮길 수도 있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상대가 흑 태자라면 놈을 무시하고 빠져나가야 합니다. 흑 태자가 아무리 거함이라도 혼자서 강어귀를 봉쇄하진 못합니다.”
“그렇겠군.”
“다만 문제라면 상선입니다. 느린 상선에 병사와 민간인을 만재했다간 흑 태자에게 그대로 수장당할 겁니다. 그러니 해병과 민간인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아문까지 걸어서 이동하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아문까지 걸어서 철수하라? 지금 우리 지원 없이 적과 겨루는 처지가 아닌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해병이 자기 할 일을 다했다면 우리 해군이 지금처럼 지원을 못 하는 일이 나오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우리는 보다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 흑 태자를 상대할 방법을 고민했을 겁니다. 해병의 입장을 고려해 주기엔 우리 처지가 너무 나쁩니다.”
베이컨의 냉정한 말에 하우가 턱을 매만졌다. 윙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 격노했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윙은 아까 할 말이 없는 처지를 절감하고 종선을 타고 제 부하들이 있는 뭍으로 옮겨간 상태였다.
“하는 수 없군. 해병대에 우리 입장을 통보하도록 하게.”
“예, 각하.”
하우는 사실상 해병대에 전멸의 위험을 감수하라는 요구를 보냈다. 흑 태자를 감당할 능력이 있었다면 중도에 민간인들을 실어 부담을 덜어주었겠지만, 그들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이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인지도 몰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