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9화. 해병대 괴멸 (2)
왕립 해병대는 해군의 통보에 절망했다. 적 기병이 수시로 측면을 후려치고, 후방에서는 대규모 적에게 밀리는 상황에서 민간인을 보호하며 알아서 후퇴하라니. 이건 죽으란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뒤늦게 전문을 받은 윙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해군은 더는 도와줄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나마 종선을 조금 내려 어린아이와 부녀자 일부를 태우겠다는 의사를 보이긴 했지만, 해병대에겐 기별도 가지 않는 도움이었다. 그렇지만 앉아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윙 소장은 페티 소령에게 선도를 맡기고 금포에서 허겁지겁 빠져나온 나머지 부대에 후미를 맡겼다. 후미를 맡은 부대는 적의 추격을 차단하기 위해 프리깃의 지원을 받으면서 고슴도치처럼 진을 쳤다.
포위되더라도 보트로 철수를 시킨다는 것이 윙의 복안이었다.
그냥 전체가 철수하다 몰살당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후위를 남겨 적 주력을 견제하며 ‘후위’만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최선이었다.
해병대는 이 전략에 따라 최대한 신속하고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해군의 협조는 별로 없었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주어진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했다.
악조건 하에서 싸웠기에 해병들의 역량은 더욱 빛이 났다. 웬만한 군대였다면 스스로 무너지고도 남았을 위기였지만, 해병대는 살길을 스스로 고안했다.
세계 최강 왕립 해병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었다.
해병대가 죽음의 덫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동안, 임경문은 적의 이동 상황을 보고받으며 적을 확실히 전멸시킬 지점을 고르고 있었다.
“적 병력은 후위를 남겨 상승군 여단들의 추격을 모면하고 있습니다. 기병이 덜미를 잡고 있긴 하지만 적의 퇴각 자체는 시간상 불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틀 안에 적은 강어귀에 도달하여 탈출을 위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 거라고 추측됩니다.”
“그건 우리 측이 손을 쓰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요?”
“그렇습니다.”
로망스 장교가 씩 웃었다.
상승군은 이미 적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의 수를 마련한 지 오래였다.
“먼저 적이 남하할 이동 경로 상에 지뢰밭을 마련해둘 예정입니다. 최소한 발목을 잡을 만큼은 심어둘 수 있을 겁니다.”
“발목을 잡을 만큼이라.”
그 정도면 남하하는 해병대에게 충격을 선사하기에 충분한 수량이었다.
“물론 그게 선물의 전부는 아닙니다. 포대처럼 땅에 파묻어둔 기관포도 다수 동원됩니다. 아마 적의 이동은 이 지점에서 돈좌될 예정입니다. 해병대가 탈출하지 못한다면 적의 해군 역시 강어귀 입구에서 머뭇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적해군 역시 모두 수장될 테니, 이번 작전에서 왕국 원정군의 ‘소멸’이라는 전략적 목표는 간단히 달성될 겁니다.”
로망스 장교가 지도의 한 지점을 지휘봉으로 짚으며 말했다. 임경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되는구려. 하지만 그러려면 적의 동선을 면밀하게 확인해야 할 거요. 그게 글라이더란 물건만으로 가능하겠소?”
“가능합니다. 저게 있으니까요.”
로망스 장교는 지휘봉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둥근 통 같은 것을 매단 것이 떠 있었다. 승도가 그간 전쟁에서 즐겨 사용한 열기구였다.
“저런 기물이 있다면 가능할 법도 하오. 왕국의 오랑캐들을 모두 섬멸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장교는 흠차대신에게 보고를 마치고 기수에게 신호를 보내게 했다.
기수는 신호장교의 확인을 받고 약속된 깃발을 들어 흔들었다. 그 깃발이 올라가자 저 멀리서도 같은 대형 깃발이 흔들렸다.
왕립 해군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 행동은 자살 행위였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해도 걱정할 것이 없었다. 해군은 지금 포대와 싸우면서 자기편을 챙기기도 바빴다.
신호는 차례로 남쪽으로 빠르게 전달되었다. 약속된 신호가 전달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큼직한 둔덕 주변으로 수백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호를 받자마자 둔덕을 경계하던 붉은 코트를 쏴 죽인 다음,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들이 땅을 파자 금세 구덩이들이 여럿 파졌다. 그들은 그 안에서 엄청나게 무거워 보이는 물체들을 여럿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모두 목재 궤짝이었다. 그것을 열자 조그마한 목함이 여럿 들어 있었다.
병사들은 그 물건들을 조심스레 옮겨다가 둔덕 주변에 심기 시작했다. 이 둔덕은 강에서 좀 떨어진 위치에 위치하고 있어 해군의 포격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장소였다.
이 둔덕의 가치는 강이 아니라 강안에 대한 포격에 있었다. 이곳에 포대를 배치하면 육상 병력이 살아서 탈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포대를 걷어내기 위해 공격자들은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병사들이 심은 지뢰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상당수의 병사들이 지뢰를 심는 동안, 일부는 땅에서 무거운 기관포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관포를 꺼내 둔덕으로 접근할 수 있는 요로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기관포는 모두 12문이었다. 말이 12문이지 이 화력이면 공격자들에게 공포를 맛보여 주기에 충분한 수량이었다.
지뢰와 기관포가 준비되자 병사들은 구덩이에서 마지막 남은 물건을 꺼냈다.
최후를 장식할 물건은 운용이 편리한 경량의 3인치 야포였다. 3인치 야포는 속사 능력은 물론이고 다루기가 쉽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야포와 기관포, 지뢰.
방어에 필요한 3요소가 갖추어지자 병사들은 자신들을 엄폐할 목적으로 군데군데 흙을 쌓기 시작했다. 후장식 소총의 이점을 살리자면 엄폐를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은 로망스 장교의 감독을 받았기에 ‘어설픈 부분’은 거의 없었다. 방어 준비는 에우로페의 표준적인 전술에 따라 맞추어 이루어졌다.
그들의 준비가 끝나갈 즈음, 멀리 강상에서 포격음이 들려왔다. 신의 포병과 싸우면서 왕립 해군이 내려오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땅을 파던 고씨가 삽을 땅에 박은 채로 손을 문질렀다.
“양이 놈들, 쉴 틈도 주지 않고 금방 내려오는군.”
“우리가 상대할 놈들은 오려면 멀었어. 저놈들은 우리 상대가 아니야.”
동네에서 함께 상승군에 입대한 막씨가 말했다.
막씨는 그간 공적으로 준사관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그의 말에 고씨가 코를 훔쳤다.
“그건 다행이네. 아직 땅도 다 못 팠거든.”
“아마 우리 상대가 오면 신호가 내려올 걸세.”
막씨는 상승군의 ‘무시무시한 정보력’을 믿었다. 글라이더와 열기구를 통해 상대의 움직임을 물샐 틈 없이 파악하고 있는 지휘부가 제때 정확한 정보를 줄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그나저나 우리가 이번에 내려올 양이를 막을 수 있을까? 일전에 단련들이 양이들과 싸웠다가 아주 개박살이 나지 않았나.”
고씨는 얼마 전의 패전에 대해 말했다. 상승군이라고 해도 겁이 없진 않았다. 몇 배의 병력으로 한 줌의 적에게 말도 안 되는 참패를 당하는 것을 보았으니, 조금은 적을 두렵게 볼 만도 했다.
전설적인 불패의 지휘관 오승도가 함께하고 있다면 그 불안 정도야 간단히 날려버릴 수 있었겠지만, 지금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뭐 양이들이 우습지 않겠지.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생각해보게. 지뢰라는 신묘한 물건이 아문에서 양이들을 혼쭐을 내주지 않았던가.”
아문 전투에서 지뢰가 왕국 군대에 준 어마어마한 피해를 생각하면 확실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거기다 우리에겐 기관포도 있지. 북적들도 이 무기 앞에 다 쓸려나가지 않았나? 그러니 너무 걱정할 것은 없네. 일전의 단련들은 지뢰도, 기관포도 없지 않았나.”
막씨의 격려(?)에 고씨도 그럴 법하다고 느꼈다.
“하긴 그렇지. 질 싸움이었다면 강주 왕 전하께서 시작하실 이유가 없어. 자네 말이 맞네. 괜한 걱정이었어.”
“자, 농을 할 시간이 있으면 흙이나 더 쌓아두게. 자네 목숨을 지켜줄 방패니까.”
“그러지.”
고씨는 입을 다물고 삽으로 부지런히 흙을 퍼서 쌓기 시작했다. 상승군 병사들은 마지막 전투를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그들이야말로 이번 전투에서 적에게 쐐기를 박을 마지막 한 수였고, 해병대를 위한 최후의 올가미이기도 했다.
그 죽음의 덫을 향해 왕립 해병대가 사자기를 펄럭이며 한 발 한 발 다가오기 시작했다.
***
콰앙!
행군 중이던 해병대의 선두 전열 위로 포격이 떨어졌다. 그 공격에 윙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뭔가, 이 포격은?”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두 번째 포탄이 대열 사이로 떨어졌다. 붉은 코트 여럿이 피 떡이 되어 나자빠졌다. 생존자들이 급히 주변으로 산개하는 사이, 장교 하나가 망원경을 들었다.
그는 오래지 않아 문제의 공격 지점을 파악했다.
“각하, 저깁니다. 저기서 포격이.”
“저긴 내륙 방향이 아닌가.”
윙은 장교가 가리킨 지점을 보고 이맛살을 구겼다.
포격이 이루어진 장소는 강에서 상당히 거리를 둔 장소였다. 해군의 사정거리에 들긴 했지만 하필 강안과 강의 고저차가 크게 벌어진 곳이라 포로 타격하기가 심히 곤란했다.
최대 사거리로 쏘자니 강안의 절벽에 맞고, 입사각을 높게 잡자니 둔덕이 사거리에 들지 않았다. 해군으로서는 타격할 방법이 없는 장소였다.
윙 역시 저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유 때문에 해병 초병을 남겨 적이 대포 등을 옮겨오지 못하도록 감시하게 조처했었다.
하지만 적은 그 노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낌새도 없이 포병을 가지고 왔다. 초병이 매 6시간마다 올리는 보고의 간격을 감안하면 불과 6시간 사이에 적이 대포를 끌고 와서 포대를 구축했단 소리인데 말이 되질 않았다.
다른 둔덕의 포대들도 그랬지만 상식 밖의 일이었다.
윙은 혹시 적이 둔덕으로 다가갈 수 있는 비밀스런 통로를 미리 만들어두고 숨겨둔 대포를 빠르게 견인해간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시간은 적지 않게 걸렸다. 대포란 물건이 그리 가벼운 놈이 아니기 때문이다. 둔덕 주변은 강안 지역이 대부분 그렇듯 땅이 물렀다. 무른 땅에서 대포를 옮기자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노력이 소요되었다.
그러니 그 가정대로 한다고 해도 이틀은 잡아야 했다.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야만인들이 대포를 가지고 둔덕에 배치했다는 ‘현실’ 앞에 대포를 배치한 수법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둔덕 앞을 지나는 퇴각로 전체가 적 포병의 타격권 안에 든다는 점이었다.
민간인을 대동하여 늘어질 대로 늘어진 느린 종대가 이 타격을 받으면 생각할 것도 없이 괴멸이었다. 그 상태에서 염병할 적 기병이 강습하면 확실히 몰살이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둔덕을 우회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할 때 내륙으로 백 리 이상 여정을 돌아가야 한다는 것인데, 뒤에서 대규모 적의 추격을 받는 해병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옵션이었다.
더구나 프리깃의 지원까지 업지 못하면 말할 것도 없었다.
윙은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았다.
‘환장할 노릇이군. 도망치기도 바쁜 판에 고지 공략이라니.’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공격을 요구하고 있었다.
윙은 지휘관 몇을 불러 둔덕 공략을 준비하게 명령했다.
지휘는 페티 소령에게 맡겼다.
페티는 급한 대로 민간인들을 지키는 해병들까지 최대한 뽑아냈다. 윙 역시 이 공격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해병의 공격 제대는 모두 1,000여 명의 병사와 준사관, 장교들로 채워졌다. 금포에서의 교전에 이어 후퇴하며 거듭 소모전을 치른 해병대로서는 사실상 가용할 병력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공격은 한 번 이상 반복할 여력조차 없는 지경이라 페티도 신중을 기했다.
해병들은 해군에 사정을 알리고 ‘시간’이 촉박한 와중에도 대포 몇 문을 지원받았다.
이 대포로 둔덕을 타격해 적의 방어력을 약화시킨 다음, 전 병력을 돌격시키는 것이 페티의 생각이었다.
준비가 끝나자 페티는 포병에 발포를 명령했다.
쾅! 쾅!
강력한 해군의 탈거 대포들이 연달아 불을 뿜었다.
수십 발의 포탄이 둔덕에 떨어져 허연 포연을 일으키자 일단 둔덕의 시계가 일시적으로 좁아졌다.
포격이 이어지는 동안 신의 병사들은 엄폐를 위해 쌓은 흙더미 뒤에 숨었다.
지옥 같은 포격을 통해 적의 전력을 충분히 약화시켰다고 판단한 페티가 칼을 뽑아들었다. 전통에 따라 선두에는 해병 준사관들과 장교들이 섰다.
페티가 말했다.
“여왕 폐하의 이름으로 전진한다. 돌격!”
함성 소리와 함께 붉은 코트들의 물결이 둔덕을 향해 새까맣게 몰려갔다. 그들이 육박해오자 둔덕 위의 포병도 정신을 차리고 포격을 가했다.
산탄이 작렬할 때마다 넓게 퍼진 해병 너덧 명이 땅을 굴렀다. 예상한 손실이었지만 해병으로서는 뼈아픈 타격이었다.
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적진에 돌입만 하면 단번에 승부가 나리라.
해병들은 ‘여왕 폐하 만세’를 외치며 사자기를 흔들었다. 일부의 총검이 예리한 빛을 번뜩이며 적진의 초입까지 다다랐다.
그때 ‘핑핑’ 소리와 함께 땅에서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꽝!
폭음과 동시에 해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짚단처럼 쓰러졌다. 느닷없는 비명에 해병 제대의 공격이 일시적으로 주춤거렸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덤불에 몸을 감추고 있던 기관포들이 섬뜩한 이를 드러냈다. 그들은 긴 총신을 해병들에게 겨눈 채 무자비한 빛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타타타타타.
갑작스레 폭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엄청난 총탄이 적진에서 터져 나오자 해병의 선두 제대는 그야말로 ‘눈 한번 깜짝할’ 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붉은 코트들의 선두가 증발해 버리자 그들을 따르던 페티의 입이 딱 벌어졌다.
하지만 재앙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산탄과 지뢰가 연이어 폭발하는 통에 후속 제대들까지 순식간에 그 전력의 상당 부분을 날렸다.
부상병들이 속출하는 통에 공격자들은 날카로운 기세를 잃고 적진 근처에서 발이 묶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기관포와 신의 후장식 소총들이 쉴 새 없이 총탄을 쏘아댔다. 시체가 즐비하게 깔리고 땅은 피로 젖었다.
용맹했던 왕립 해병대는 그 ‘용기’를 살릴 기회 한 번 갖지 못하고 새로운 시대가 만든 병기들의 위력에 증발하고 말았다.
그들의 투지를 상징하던 사자기는 주인을 잃고 땅을 굴렀다. 병사들을 독려하며 선두에 섰던 준사관과 장교들은 제일 먼저 시체가 되었다.
과거의 전쟁이었다면 어느 정도의 손실은 보더라도 이렇게 순식간에 전멸할 일은 없었다.
페티는 부하들이 사라지는 광경을 보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맙소사, 이건 지옥이다. 우린 악마의 아가리에 떨어진 거다.’
그의 눈에 쉴 새 없이 총탄을 쏟는 기관포와 땅에서 솟아나는 지뢰, 그리고 포신이 벌겋게 되도록 산탄을 갈겨대는 적의 야포 모두가 탐욕스럽게 생명을 받아가는 악마의 장바구니처럼 보였다.
그는 쓸려나가는 부하들을 보다 평소라면 내리지 않을 명령을 내렸다.
“후퇴. 후퇴다!”
페티는 명령을 내린 다음 순간 날아온 산탄에 갈가리 찢겨 분쇄되었다.
지휘관의 명령이 내려지자 후속 제대의 병사들이 황급히 물러나기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산탄이 수도 없이 날아와 그들의 뒤통수를 때렸다.
겨우 5분이었다. 5분 사이에 왕립 해병대 1,000여 명은 겨우 300명의 상승군 분견대를 상대하여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지휘관 페티 소령 이하 대부분의 병사가 전사한, 말도 안 되는 교전이었다.
사상자 비율은 자그마치 7 대 940.
잘 준비된 방어자들의 진지를 과소평가한 해병대의 참담한 패배였다.
윙은 해병 역사에 길이 남을 ‘압도적인 패배’를 보고 넋이 나갔다. 이 어마어마한 대살육은 살아남은 민간인들과 해병들의 사기마저 뺏기에 충분했다.
육상으로의 탈출은 이것으로 완전히 끝장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왕립 해병대가 무너지기가 무섭게 측면으로부터 오랜 숙적이던 신대륙 기병들이 출현했다. 그들이 총격을 가하며 달려오자 해병들은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용할 수 있는 병력 전부가 소멸당한 상태에서 전투는 불가능했다.
기병들은 지금까지와 달리 아예 종대로 파고들어 해병들의 목을 쳐 날리기 시작했다. 산발적인 저항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해병 소장 윙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백기를 들게 했다. 이로써 지상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왕립 해병과 민간인들 전체가 신의 수중에 떨어졌다. 남은 것은 강상에 있는 해군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