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70화 (370/425)

제370화. 신화의 끝 (1)

“해병대가 백기를 들다니?”

“적에게 앞뒤로 포위당해 어쩔 수 없다고 전해 왔습니다. 우리 연락장교와 신호장교들도 모두 포로가 되었습니다.”

베이컨 대령의 보고에 하우 제독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번 원정은 완전한 재앙이었다. 민간인 구출이라는 목표는 실패로 돌아갔고, 해병 수천 명을 적에게 포로 혹은 전상자로 헌납했다.

거기다 왕립 해군의 4대 제대 중 하나인 동방 함대가 혹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강어귀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함대 전멸이라는 전대미문의 피해까지 추가될 판이었다.

이건 재앙이란 말로도 부족할 판이었다. 연합왕국의 기나긴 역사에서 주력 함대가 전멸한 전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피해를 보아도 주력함 3척 내외의 손실에서 그친 것이 고작인 왕립 해군이다.

그것조차 ‘전대미문의 피해’ 혹은 ‘참담한 패배’라고 말해오던 왕국 해군인데, 함대가 전멸이라니?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 상상해보지 않은 악몽이 현실이 될 판이었다. 강력한 왕립 해병대의 전멸과 함께.

하우는 그런 패배까지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함대라도 살려야 하네.”

하우가 말했다. 베이컨 역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강어귀에서 적함을 피해서 움직일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동선을 잘못 잡았다가 진로라도 얽히면 함대 전체가 기동이 꼬인 상태로 그 막강한 포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럴 테지. 항로는 적함을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서 결정하도록 하세.”

“예, 각하.”

“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선임 함장들을 중심으로 조를 짜서 개별적으로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하게.”

하우가 덧붙였다. 왕립 해군은 엄격한 함대 기동을 중시하긴 했지만, 이를 맹신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정석적인 교리’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개별 함장들의 창의성이 발휘될 여지를 충분히 허용하고 있었다.

이 점이야말로 여타 경쟁자들과 연합왕국 해군이 진정 거대한 실력의 차이를 보이는 원동력인지 몰랐다.

제독의 명령은 곧 함대 전체에 전파되었다. 왕립 해군은 해병대의 전멸이라는 악재를 딛고 강 하구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전열함은 도전해오는 적의 포대를 치고, 프리깃과 상선 등은 후미에서 그들을 따랐다. 기범선은 선두에 서서 다른 함정들이 움직일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유기적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왕립 해군의 기동은 실로 지켜보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렇다 해도 손실을 아주 없앨 수는 없었다.

강어귀 근처에 다다른 시점에서 왕립 해군은 도합 3척의 상선 손실, 9척의 상선 소파, 13척의 상선 중파, 상선 4척 대파, 전열함 3척 소파, 대형 프리깃 1척 손실, 대형 프리깃 2척 중파, 기범선 1척 소파, 포함 1척 중파에 이르는 피해를 입었다.

이미 받은 피해도 꽤 절망적이었다. 수병 사상자만 천 명에 육박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로망스 제정과 운명을 건 일대 해전을 폈을 때도 천 단위의 사상자는 낸 적이 없었다.

왕립 해군으로서는 참담한 성적표였다.

하우는 부서지고 망가진 아군 전투함들을 쓸어보다 점점 가까워지는 강 하구를 보았다.

멀리 저녁노을이 내리는 수평선 쪽에 큼직한 물체가 비쳤다.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막은 괴물은 보기에도 크고 위압적으로 비쳤다.

제독은 그 물체를 보고 정말 흑 태자가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빌어먹게도 안 좋은 보고는 하나도 틀리지 않는군.”

그는 상대의 위치를 살폈다. 흑 태자는 탈출을 방해하려는 듯 정확히 강 중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좌우로 함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반응을 보이려는 듯했다.

오래 전부터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챈 듯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예열이 끝난 장갑함은 얼마든지 기동할 수 있었다.

제독은 턱을 매만졌다. 이대로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적함은 당연히 그 침로를 방해할 위치로 움직일 것이다. 그러면 함대의 기동은 망가지고 만다. 유연한 움직임을 지시해두긴 했지만, 그래도 선두가 방해받으면 타격은 적지 않았다.

그는 고민 끝에 함대 신호사관을 불러 다음과 같은 명령을 전하게 했다.

“선두에 선 기범선을 우측으로 향하게 하고, 나머지 함정들도 그 뒤를 따르게 하게. 단, 우측의 기범선 쪽으로 적 장갑함이 움직인 순간 나머지 함정들은 침로를 바꾸어 좌측으로 보내야 하네. 할 수 있겠나?”

해상에서 단시간에 보이기엔 꽤나 까다로운 전술 기동이었다. 말은 간단하지만 적의 움직임에 맞추어 정확하게 배를 움직여야 하고, 더불어 아군 함정들의 움직임도 예의 주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간단하긴 해도 왕립 해군 외의 해군이라면 짧은 시간에 임기응변으로 할 수 없는 기동이었다. 하지만 신호사관은 어렵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전하겠습니다.”

거대한 함대가 서서히 가까워오자 장갑함 갑판에 서 있던 르망이 망원경을 내렸다. 그는 미숙한 부하들을 데리고 이 다루기 힘든 괴물을 사용해 적을 저지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안고 있었다.

장시간의 포격전으로 쇠약해진 적이었지만 아직 그 전력은 막강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함정 안으로 들어갈 것을 지시하고 자신도 배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시계를 통해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움직일 시간이 된 것이다.

장갑함에 기동 명령이 내려지자 거함이 낮게 용트림하며 그 거체를 움직였다.

함은 적의 침로에 맞추어 유연하게 강의 우측으로 따라갔다. 마치 승무원들이 대단한 조함술을 발휘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키만 돌린 다음 배를 앞으로 가게 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거함이 슬슬 진로를 막아오자 왕립 해군의 전투함들도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우측으로 나아오는 것처럼 하다 일순 침로를 틀며 좌측으로 모조리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제일 앞에 선 기범선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장갑함은 그 움직임을 늦게 알아챘다.

르망은 그것을 보고 투덜거렸다. 먹이를 놓쳐서 그런 건 물론 아니었다.

“영감에게 모두 넘겨주게 생겼군.”

그는 자신들이 속았음에도 적이 탈출할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했다. 적 함정들이 탈출한 방향에는 잠수함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선두에 선 기범선이 장갑함과 같은 선상까지 도달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바다였다. 해군이 나고 자란 고향. 왕립 해군이 진정으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

기범선이 탈출을 향한 마지막 일보를 내딛는 순간 굉음이 울렸다.

동시에 기범선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워낙 큰 거함이라 일시에 침몰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멈춘 것만으로도 왕립 해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함대의 기동이 순식간에 꼬였다.

일부 함장들이 임기응변으로 기범선을 우회하여 침로를 잡았지만 그들 역시 같은 운명에 처했다.

폭음이 울릴 때마다 함정들이 멈추어 서자 왕립 해군은 크게 당황했다. 그들이 머뭇거린 사이, 잔 수(?)를 부려 기만했던 장갑함이 선회했다.

이제 르망도 킬 스코어를 올릴 시간이었다.

자신만만한 로망스 사내가 말했다.

“포문 개방.”

“포문 개방!”

그간 잠잠했던 장갑함의 육중한 거포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장갑함을 기만하기 위해 함께 움직였던 기범선은 아직 그 공격권역에 있었다.

“발사.”

르망이 짧게 외쳤다. 그의 할아버지는 로망스 제정과 연합왕국이 벌인 대규모 해전에 참가했다 왕국 해군의 포탄에 팔과 다리를 잃고 병신이 되었다. 그의 작은할아버지는 왕립 해군에 배를 나포당해 알거지가 되었고, 백부는 왕립 해군의 총탄에 죽었다.

로망스에서 해운업에 종사하며 평생을 살아온 그에게 지금은 하늘이 내려준 복수의 기회였다.

콰앙!

굉음과 동시에 거포들이 포탄을 쏘았다. 강력한 강철 포탄들이 그대로 대기를 찢으며 날아가더니 기범선의 옆구리를 쑤시고 들어갔다.

단 일격에 얇은 강판이 갈라졌다. 그것도 모자라 포탄은 압축 목재로 만들어진 선체를 관통하고 들어가 그 안에 무수한 파편을 쏟았다.

일격에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흑 태자의 위력은 실로 가공할 만했다. 장갑함을 상대하려고 만든 괴물이다 보니 기범선 따위는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르망은 갈가리 찢어진 적함을 보며 다시 외쳤다.

“발사!”

그 명령에 따라 포탄이 재차 찢어진 기범선의 옆구리를 맹타했다.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은 데다 장갑함과 수평으로 선 상태라 도무지 회피할 길이 없었다. 기범선의 측면에서 다시 한 번 굉음이 일었다.

흑 태자는 사납게 포효하며 자신의 입에 들어온 사냥감을 난폭하게 물어뜯었다.

***

“마, 맙소사. 기뢰입니다. 놈들이 기뢰를 깔았습니다.”

베이컨 대령이 하얗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구에 기뢰가 깔렸다면 탈출할 길이 없었다. 적은 처음부터 왕립 해군을 철저히 전멸시킬 계획으로 덫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장갑함은 그저 기뢰가 지키지 못하는 공간을 커버하기 위해 가져다 둔 물건인 듯했다.

“우리가 지옥의 아가리에 들어왔었나.”

하우는 적이 설치한 이 이중, 삼중의 덫에 경악했다. 함대와 해병대를 끌어들여 말살하기 위한 온갖 창의적인 수단이 있었다. 당해보지 않고서는 상상할 길이 없는 공격들이 연타로 이어졌다.

이 계략을 꾸민 자는 진정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략가라고 감히 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도망갈 방법이 없습니다.”

“빌어먹을. 그럼 항복하잔 소린가? 저 야만인들에게?”

그건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왕국 해군 역사에 항복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한 ‘패배’조차도 치욕 중의 치욕으로 여기는 해군이다. 항복이란 그들의 생리가 허락하지 않는 영역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야만인들의 육군이 뒤를 따라와 포대를 전개해 우리를 옥죈 다음 기뢰를 위에서 뿌리기 시작하면 함대는 무조건 전멸입니다.”

“그건 나도 잘 알아.”

제독이 말했다. 그걸 의식하지 않았으면 해군이 해병보다 먼저 아래로 후퇴하려 발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파손된 함정들과 상선, 그리고 종선들을 앞으로 보내 기뢰를 걷어내는 것이 어떠십니까?”

“농담하나? 그걸 염병할 장갑함이 보고 있지 않겠지. 파손된 함정들이나 상선들은 일격을 견디지 못할 걸세. 기범선도 일제 사격 두 번에 넝마로 만든 괴물이 아닌가? 더구나 기뢰가 어디까지 깔려 있을지도 모르는 판에 그런 돌파가 먹힐 성싶은가?”

흑 태자가 없다면 시도해볼 수 있는 일이었지만, 놈이 있는 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들은 몰랐지만 그런 방법으로 기뢰가 걷어지지도 않았다. 기뢰는 그들이 상상하는 계류 기뢰가 아니라 잠수함이 들고 있는 장대 기뢰였다.

“항복도 안 되고 함정들을 흘려 기뢰를 걷어내는 방법도 안 된다면 무얼 생각하십니까.”

“간단하잖나. 저 염병할 장갑함을 격침시키는 수밖에.”

그렇다면 해군이 살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염병하게 강력한 왕립 해군 최강의 위상함을 자신들의 손으로 때려 부수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놈이 있던 지역은 안전한 것이 확실했다.

베이컨은 그 발상에 당황했다.

“장갑함을, 흑 태자를 우리가 격침시키잔 말씀이십니까?”

“못 할 것도 없지. 우리 왕립 해군이 운용한다면 최강이겠지만, 흑 태자를 운용하는 놈들은 야만인들이다. 그 포술은 형편이 없을 걸세. 그만큼 오랜 시간 두드릴 수 있지 않겠나?”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말씀입니다만, 그렇게 해도 흑 태자의 리벳이 벗겨질지는 미지수입니다.”

“알고 있네. 하지만 항복보단 낫지 않나.”

제독의 반문에 베이컨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항복하지 않고 이 강을 탈출할 방법은 저 빌어먹을 장갑함을 침몰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제독의 명령에 따라 동방 함대는 장갑함 흑 태자의 말살로 목표를 선회했다. 그에 따라 전열함과 기범선들이 쭉 늘어선 채 전열을 재정비했다. 이들이 전열을 정비하는 모습을 장갑함은 여유롭게 지켜보았다.

“왕국 친구들이 하다하다 안 되니 우리 배를 잡으려는 모양인데.”

르망은 망원경으로 포문 너머의 움직임을 보았다. 그러다 적 함대 사이에서 불꽃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 코를 문질렀다. 곧 둔탁한 충격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쾅! 쾅!

거인이 망치로 내려치는 듯 거센 충격이 배를 흔들었다. 장갑함의 주변에 쉴 새 없이 포탄이 떨어지고, 이따금 배의 측면과 갑판에서 폭발이 이는 통에 장갑함 안은 귀가 먹먹해지고도 남을 소음에 휩싸였다.

“피해 상황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군관들이 외쳤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피해 없습니다. 함은 건재합니다!”

최강의 장갑함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왕립 해군이 엄청난 혈세를 들여 단 세 척만 만든 최강의 전투함답게 그 두터운 장갑은 그 어떤 포탄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았다.

비처럼 쏟아지는 함대의 포격조차 폭풍 속의 자장가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왕립 해군의 자랑이자 희망이라 불린 괴물의 실력이었다.

르망은 포격을 두드려 맞다 적의 포격이 잠시 뜸해지자 포문을 열게 했다. 이쪽도 대응 포격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발사!”

명령에 따라 주포들이 연달아 불을 뿜었다. 포술이 형편없어 포탄은 대부분 적함에 못 미쳐 물기둥을 일으켰다. 최소 사격선에 들어온 기범선처럼 가깝지 않은 탓이었다.

물기둥이 연이어 솟구치는 통에 왕립 해군 전투함들도 재장전을 마치고 포격을 재개했다. 1 대 10 이상. 최강의 괴물과 함대 단위의 전투함들이 포격을 주고받는 광경은 신화적인 한 장면을 연상하게 했다.

포격은 쌍방 모두 전과를 거의 내지 못했다. 왕립 해군은 장갑함의 장갑을 뚫지 못해서, 신의 수병들은 명중탄을 내지 못해서였다.

양자가 부지런히 포격을 주고받는 동안 물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더 세게 밟아!”

거함들의 포탄이 떨어지는 ‘충격음’이 멀지 않은 곳에 울리는 와중에도 잠수함 승무원들은 부지런히 페달을 밟고 있었다.

새 시대를 대표할 신병기라고 하지만 그 동력은 참으로 원시적이었다. 석기 시대에도 주요한 동력으로 사용되었을 인간의 다리가 그 동력원이었다. 교수의 외침에 승무원들은 이를 악물고 페달을 밟는 속도를 높였다.

페달을 밟는 속도가 충분히 빨라지자 잠수함들은 하나둘 물살을 거슬러 하구에서 보다 위로 나아갔다. 그들은 그대로 적함들을 향해 접근했다. 위치를 보며 움직인 건 물론이었다.

자칫 포격이 오가는 현장으로 다가섰다간 ‘눈먼 포탄’에 맞아 비명횡사하는 수가 있었다. 이곳에서 포격을 주고받는 가장 약한 함 급 ‘전열함’의 함포 탄 한 발로도 이 연약한 잠수함을 간단히 박살낼 수 있어서다.

잠수함들은 긴장 속에 물살을 헤치며 상류로 움직였다. 그들은 일정한 위치까지 나아간 다음 그곳에서 잠시 페달을 늦추었다. 거리를 가늠한 잠수함들은 일시에 장대 기뢰를 밖으로 보냈다.

기뢰들은 천천히 적함을 향해 다가섰다. 그리고 그것들이 함과 접촉한 순간 대폭발이 일었다.

콰앙!

포격을 주고받던 와중에 전열함 몇 척이 폭음을 내며 급속히 기울어지자 왕립 해군은 크게 당황했다. 그들은 이 기뢰가 혹 상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닌가 하여 겁을 먹었다. 그 공포는 왕립 해군을 파멸로 인도했다.

동방 함대는 그 공포에 스스로 확보하고 있던 거리를 버리고 장갑함 쪽으로 나아갔다. 한 발이라도 더 빨리 때려 장갑함을 눕혀야 살 수 있다는 절박감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 대가는 비쌌다.

콰쾅!

흑 태자의 일제 사격에 전열함 하나가 대폭발을 일으켰다. 무지막지한 포탄에 관통당한 화약고가 연쇄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거리가 가까워진 상태에서 장갑함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힘을 보였다. 다가오는 적함들마다 일격을 가했는데, 단 한 번의 일제 사격만으로도 반신불수의 타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전투는 이제 종반으로 치달았다.

“각하, 벨리어에서 건의입니다. 항복을 요청하는 신호입니다.”

“뭐? 건방지게 일개 함장 따위가 항복 건의라니. 그놈의 직위를 해제시켜 버려.”

“각하, 승산이 없습니다. 탈출할 방법이 없습니다. 거기다 기뢰까지 놈들이 보내는 듯합니다. 더 싸워도 승산이 없습니다.”

“하지만 명예로운 여왕 폐하의 해군으로서 어떻게 항복이란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의 첨병이네.”

“그럼, 저들을 모두 죽게 하실 참이십니까.”

베이컨이 손을 들어 장갑함 앞에서 죽어가는 아군 전투함들을 가리켰다. 벌써 표류 상태에 들어간 배만 네 척이었다. 장갑함의 앞으로 갔다가 무사한 배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남아서도 방법은 없었다. 놈들의 기뢰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까.

“미치겠군.”

하우는 제독의 삼각모를 팽개쳤다. 그러곤 입술을 달싹거렸다. 항복을 해야 하는 당위는 이해하였지만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 입술을 달싹이다 어렵게 그것을 움직였다.

“백기를 걸도록 하게.”

제독은 그 한마디만 남기고 자신의 견장을 뜯어 물 위로 던졌다. 힘없이 자신의 방으로 사라지는 하우를 보던 베이컨도 마음이 무거웠다.

대령은 제독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신호사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기를 걸라는 명령을 전하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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