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72화 (372/425)

제372화. 제국의 질서 (1)

남방에서 올라온 승리 보고에 오승도의 입가가 펴졌다. 강주 왕은 자신이 그린 모든 그림이 원하는 대로 채색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퍼즐 조각이 맞추어진 이상 남은 그림도 짜 맞추기가 한결 편해졌다.

전략적으로 동방 함대가 전멸하고 왕국의 군사력이 한풀 꺾이면서 남방 방어에도 한결 여유가 생겼다. 루시가 협조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 반년은 왕국의 원정군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연합왕국의 저력을 얕볼 수는 없지. 그들의 예비 전력을 고려하면 최소 이만 이상의 원정군을 동원할 여력은 남겼다고 봐야 한다. 그 정도면 남방 연해의 요충인 강주를 흔들 만큼의 타격력은 있다고 해야겠지.’

승도는 왕국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보통 한 국가의 역량은 현역 군사력의 규모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경우에는 오차가 꽤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과거 도시 국가였던 알렌시아를 상대한 우스만이 맛보았던 ‘실패’도 오판에서 비롯되었다. 우스만은 알렌시아가 주변국과의 분쟁으로 보유 해군력이 크게 분산된 상황을 고려하여 자신들이 절대적 우세를 차지하리라 확신하고 분쟁을 걸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우스만 제국의 참패로 끝났다. 그 이유는 알렌시아가 세계 최대의 조선소와 상선 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알렌시아는 그 거대한 조선소 내에 즉시 전력화가 가능한 대형 함정을 50척 이상 여분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 거대한 상선 대에서 잘 훈련된 해양 인력을 즉시 차출함으로써 해군력을 단시간에 2배 이상 증강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었다.

그 같은 잠재된 실력을 몰랐던 우스만은 쓴맛을 볼 수밖에 없었다.

연합왕국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현재 왕국이 보유한 상선의 규모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상선 규모의 절반에 육박했다. 그 수치만으로도 왕국 해군력의 가공할 잠재력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기다 전시 팽창에 대비해 노후 함정들을 다수 건조 도크에 보관하도록 규정된 ‘해군 함정 관리법’은 전시에 왕립 해군이 엄청난 규모로 증강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어주었다.

동방 함대가 전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한 전력의 함대는 예비역 전력만 동원해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따라서 왕국 본국이 신을 위협할 만한 전력을 동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만에 하나 왕국이 에우로페의 복잡한 정세에서 해방되기라도 한다면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본국 함대(왕립 해군의 4개 제대 중 가장 강력한 함대로 최신예 장갑함들을 비롯한 해군의 핵심 전력을 포함하고 있다)’가 출동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하니 지금부터 찬찬히 준비를 갖출 필요가 있겠지. 그 전에 남은 문제도 처리해야 할 것이고.’

남방의 적인 연합왕국이 침묵했지만 동방의 적, 동영은 아직 백기를 들지 않고 있었다. 왕국이 개입하기 전에 이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것은 중요한 과제였다.

그렇게 하려면 확실한 힘의 우위를 인식시키는 편이 빠르고 정확했다. 동영이 아직 항복을 망설이는 것은 ‘연합왕국’이 개입하여 판세를 바꾸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 기대를 송두리째 부수어 놓을 장치가 필요했다.

그는 잠시 턱을 매만지다 이번에 올라온 공식 문서에 언급된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왕국 위상함인 흑 태자가 우리 손에 들어 왔다고 했지. 그 괴물을 동영으로 보내면 괜찮은 수가 될 것 같군.’

승도는 포함 외교에 익숙했다. 그 역시 열강의 지도자로서 무력으로 상대를 위협한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장갑함 흑 태자가 동영으로 파견된다면 적의 사기를 확실히 꺾으리란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일단 그 괴물이 신에 나포된 자체로 동영인들을 충격에 빠트리는 것이 흑 태자 파견의 첫째 효과였다.

그리고 그 괴물의 확보로 연합왕국을 상대로 신이 밀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이 두 번째 효과였다. 그 두 가지를 머리에 박아주는 것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충분했다.

‘그리고 하나 더. 기왕 간다면 내가 직접 나서는 편이 좋겠지.’

승도는 이참에 자신의 위신도 세울 생각을 했다. 단 한 번도 대륙의 왕조에 굴복해본 적이 없는 동영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일은 정권 차원에서 중요한 선전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 중대한 일대 사건을 자신이 챙겨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면 향후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아울러 지난 유구 패전으로 달라진 동영 정부 내의 권력 역학 구도를 파악하고 ‘적절하게’ 조종할 수 있는 끈도 마련해 둔다면 몸소 움직일 가치가 있었다.

승도는 계산을 마치기가 무섭게 비서를 불렀다. 아름다운 여비서가 그 부름에 응해 얼굴을 비치자 그가 웃으며 서신을 내밀었다.

“이 서신을 가장 빠른 연락 편으로 강주에 보내세요. 한시가 급한 일입니다.”

엘리자베스는 그 서신을 공손히 받아들었다.

연합왕국 남방 식민지의 관계자들도 패전 관련 소식을 입수했다. 황제의 대리로서 파견된 흠차대신 임경문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현 상황에서 ‘강화 협상’을 할 의향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사자를 보냈기 때문이다.

승도 역시 가급적이면 피를 덜 흘리는 선에서 전쟁을 멈추길 바랐기에 승리를 거두는 즉시, 한 번 정도 협상을 제의해볼 것을 요구했었다.

왕국 외무성 동방 정책 국장을 비롯한 주요 관료들은 그 제안을 받고서야 자신들이 맛본 패배를 알았다.

“원정군이 전멸이라니. 이만에 달하는 해병대와 해군 장병 전부가 포로가 되거나 사상자가 되었단 소리인데,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요.”

국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와 자리를 함께한 자말의 총독과 식민지 치안 부대 사령관, 왕립 육군 남방 군수 계획국장 모두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역량으로 그런 위업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군사력이 없습니다. 해군성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남방에 전개된 신의 육상 전력과 해상 전력으로는 도저히 원정군을 격파할 전력이 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가지고 온 일지와 아군 장성들의 서명, 그리고 대동한 포로, 그리고 저들의 사자가 타고 온 상선이 우리 패배를 증명하잖소. 저들에게 생포된 포로가 회유라도 되지 않은 이상, 구태여 우리 원정군이 전멸되었다고 증언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런 거짓말을 해봐야 며칠이면 확인될 일 아니요?”

자말 총독의 반문에 치안 부대의 사령관이 입을 다물었다.

그도 패배가 사실일 거라고 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한 번 부정해본 것은 그 사실을 간단히 긍정하기엔 왕국 군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였다.

외무성 국장은 둘의 짤막한 설전을 지켜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총독의 말씀대로 패배가 확실하다면 우리 정부가 짊어져야 할 부담은 이전의 몇 배로 커졌소. 수만의 민간인 포로도 모자라 군인 포로 수만이 추가되다니. 이건 정치적으로 내각이 흔들릴 수도 있는 문제요.”

“맞습니다.”

군수 계획국장이 그 말을 받았다.

“거기다 신에게 제해권까지 넘겨주었으니, 당분간 우리 식민지까지 위협받을 판입니다. 신이 남방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킨다면 조만간 우리 식민 제국에 대한 공세도 펼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야만인들이 우리 영토까지 넘볼 수 있단 말이요?”

외무성 국장이 당혹스럽다는 듯 묻자 군수 계획국장이 긍정의 뜻을 보였다.

“가능합니다. 우리 군사력이 파괴된 시점에서 저들이 못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의지만 있다면 충분한 일입니다. 물론 면밀한 전략 검토와 준비가 갖추어져야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것 참.”

“그러니 지금 시점에서 저들의 강화 제안을 간단히 무시할 입장이 아닙니다. 본국의 훈령이 없더라도 ‘최소한’ 휴전 정도는 고려해야 합니다.”

“휴전?”

군수 계획국장의 말에 외무성 국장의 눈이 커졌다.

“가능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합니다. 식민 제국의 안전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우리는 저들에게 전쟁 준비 능력을 더 키워주게 될 거요.”

외무성 국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동방에서의 일시 휴전에 동의하면 현재 신으로 향할 수 없도록 금지된 상선들의 ‘항로’가 일시적으로 열리게 된다. 그들 상선의 태반은 무기 상들의 것이었다.

돈만 되면 무엇이든 팔아넘긴다는 왕국 군수상과 신을 밀어주고 있는 로망스 상인들. 그들의 무기가 대량으로 넘어간다면 그만큼 연합왕국의 전쟁이 어려워지리란 사실은 불문가지였다.

그러나 식민지의 안전이라는 ‘현실적인 이익’ 앞에 미래의 위험은 다소 멀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식민 제국의 관료들은 그 사안을 놓고 천천히 논의를 시작했다.

***

머나먼 서방에서 벌어진 ‘전쟁 소식’은 메리를 긴장시켰다. 그녀가 운용하는 자산의 태반이 강주 행상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왕국 정부 당국에서 그 자산에 제재를 가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녀는 사실 겁도 먹었다.

하지만 그녀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왕국은 승도의 자산을 압류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왕국이 도덕적이라서가 아니라 철저히 ‘자본주의’화된 덕이었다.

왕국은 기본적으로 세계 금융의 허브 역할을 수행했다. 그래서 이 나라에는 엄청난 외국 국적의 자산들이 들어왔다. 그 중 상당수는 각국 왕실의 것이었다. 그 자산들 중에는 왕국의 ‘적대국’이거나 ‘잠재적 적성국’의 것들도 더러 포함되어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과거에는 타 국가들과 분쟁이 생길 때마다 해당국가의 ‘자산이 몰수’된 전례가 가끔 생겼다.

그 결과 투자자들은 왕국과 ‘관계’가 악화될 가능성에 대비해 슬슬 자산을 빼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엄청난 자본을 흡수하여 전 세계에 자본을 공급하는 ‘금융 허브’의 역할을 수행하려던 왕국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결국 왕국은 이러한 ‘자본 유입의 부정적 요인’을 제거하고자 ‘자본’과 ‘정치’의 분리를 선언했다. 간단히 말해 왕국과 적대하는 사이라고 해도 해당 국가의 투자자가 넣은 자산을 왕국의 이름으로 보장해 주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 약속은 철저히 지켜졌다. 이익에 민감한 왕국인들인 만큼 그 선언이 지켜지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 반혁명 전쟁 기간 중에 로망스 제정의 편에 선 국가들의 왕족과 귀족들이 입금한 자산까지도 그대로 보존을 해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최근 왕국과 사이가 나쁜 루시와 로망스의 왕실 역시 연합왕국에 자산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승도의 자산이 몰수될 가능성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만약 그런 전례를 다시 만든다면 당장 왕국에 투자한 자본의 대규모 탈출 러시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왕국으로서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이유가 없었다. 보기엔 아니꼬워도 승도의 자산을 그대로 보장해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익이었다.

메리는 전쟁 소식이 날아오고 며칠이 지나도록 정부 당국에서 자산에 대한 제재가 없자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투자를 한 승도가 세계 최강의 국력을 가진 자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사실에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왕국 사람이긴 했지만 조국애가 희박한 신대륙 출신이었고, 동시에 승도의 은혜로 한 사람의 상인으로 선 몸이었다. 왕국보다는 승도의 편에 서는 것이 당연한 사람인 것이다.

그녀는 고민 끝에 그간 확보한 막대한 이익금을 바탕으로 신문사 확보에 착수했다. 혹여 승도가 전쟁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면 여론전을 통해 그를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전하께서 위험에 처한다면 구해드릴 사람은 나밖에 없어. 필요하다면 돈을 쏟아부어서라도 판을 바꾸어드려야 해.’

메리는 일단 현금으로 만 파운드를 동원했다. 자금력은 모자라지 않았다. 신대륙 중부의 철도와 운하를 틀어쥔 ‘교통여제’에게 돈은 마르지 않는 우물과 같았다.

그 막강한 자금력 동원에 유서 깊은 신문사의 기자 여럿이 순식간에 넘어왔다.

그녀는 기자들을 확보하자마자 윤전기를 사들이고 건물도 하나 사들였다. 그리고 그럴듯한 이름으로 신문사 하나를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신문사를 ‘인수’하는 것이 더 좋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기존 언론 재벌과 정치인의 견제가 만만찮았다.

메리는 이렇게 확보한 신문사를 통해 여론전의 발판을 만들었다. 그녀는 꾸준히 이익금을 투자하여 신문사의 구독수를 올리는 쪽으로 중기 계획을 세웠다. 전쟁이 한 해 안에 당장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신문사야말로 차후 승도를 구원할 유일한 희망이 되리라 믿었다. 그녀가 아는 연합왕국은 그야말로 최고 최강의 강대국.

그런 나라를 이길 방법은 역시 내부에서 흔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해서 왕국 스스로가 전쟁에 회의를 갖게 만들어야 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녀는 믿었다.

승도가 알지 못하는 신대륙 저편에서 또 하나의 변수가 이렇게 태어났다.

자말에는 수백 척의 상선이 정박해 있었다. 상당수는 에우로페와 자말을 오가는 정기 선단이었지만, 일부는 ‘전쟁 이후’ 접근이 금지된 신으로 향하던 배들이었다.

그들은 신이 발주한 기뢰와 고성능 화약, 추가 주문한 기관포와 야포 등 각종 군수물자를 싣고 있었다.

이들은 선금을 받고 무기를 실어오던 중에 전쟁이 터져 그만 이곳 자말에서 발이 묶였다. 연합왕국 식민 당국의 항해 금지 조처를 받은 탓에 동방 수역으로 향할 수 없게 되자 상인들은 이곳의 선술집과 창관에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로망스 출신의 상인 레옹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그나마 동방 항해의 경험이 풍부해 이곳에 거처를 둔 에우로페 상인 여럿과 친분이 있었다.

레옹은 그 중 하나인 ‘벨기도’란 사내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그는 향신료를 취급하는 인물로 일 년에 딱 3개월만 자말에 머물렀다.

그래서 벨기도의 자택을 방문할 때면 레옹을 맞아주는 자는 그가 아니라 그의 현지처였다.

어쨌거나 ‘내 집처럼 편하게 지내라.’고 말하며 출입을 허가해준 벨기도 덕분에 레옹은 그 현지처 ‘아냐’의 시중을 받으며 나름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다른 군수 상들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로 편한 생활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고온다습한 날씨와 문화적 차이, 그리고 연합왕국 사람들의 텃세 때문에 마냥 편하다 말하기도 어려웠다.

레옹은 매일 이곳을 떠날 날만을 고대하며 총독부 앞에 나가 항해 금지령이 풀렸는지 확인하기에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황룡의 깃발을 단 큼직한 범선 하나가 항구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신과 왕국이 전쟁 중인데 신의 배가 이곳 자말까지 들어온단 말인가.”

그는 그 사실에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의 감은 이 범선의 출현이 ‘짜증스런 일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거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감이 빗나간 적이 없었던 터라, 레옹은 모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범선에서 사람들이 내리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곧, 관복을 입은 신의 관료가 내리고 이어 초췌한 얼굴의 붉은 코트 몇이 따라 내렸다.

그들은 ‘신’의 범선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붉은 코트 몇의 영접을 받으며 총독부 건물로 향했다.

레옹은 그들의 움직임을 구경하며 나름 생각을 해보았다.

신의 관리가 붉은 코트와 함께 왔다면 대체 무슨 영문일까. 하나는 신이 붉은 코트를 포로로 잡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국이 어지간해서 패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쪽은 가능성이 없었다.

두 번째는 신의 관리가 포로가 되어 호송되어 왔다는 쪽이다. 하지만 그 가정은 오류가 있었다. 그랬다면 범선에 왕국의 깃발을 게양하고 와야 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신이 협상을 제안하고 왕국이 동의하여 ‘이야기’를 하러 온 경우였다. 아마 이 가정이 맞을 듯싶었다. 생각해보니 아귀가 맞았다.

레옹은 자신의 추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생각이 맞는다면 곧 ‘항해 금지’가 풀릴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 후 총독부 공고에서 다음과 같은 결정 사항이 통보되었다.

신의 사자와 ‘일시 휴전’에 동의하고 전쟁 수역을 한시적으로 개방한다는 발표였다.

레옹은 신이 왕국에 한 발 양보하는 조건으로 전쟁이 끝나는 수순에 접어들었다고 추측했다.

다른 상인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왕국 식민 당국에서 ‘동방 함대’의 패전에 대한 소식을 기밀에 부친 데다, 신의 사자들도 그 소식을 적극적으로 떠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튼’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전쟁 물자를 팔아치우기 위해 닻을 올렸다.

왕국 상인들은 신이 ‘전쟁’에 패한 이상 물자를 팔아도 된다며 나머지 일말의 양심마저 떨쳐버렸고, 로망스 상인들은 지긋지긋한 ‘대기’가 끝났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하지만 신에서는 그들이 미처 듣지 못한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연합왕국의 무참한 패배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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