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74화 (374/425)

제374화. 휴지 (1)

프리지아는 군국주의 모델에 의지해 성장한 전형적인 병영 국가였다. 군대가 국가를 소유한다고 이야기되는 이 나라는 사회 전반에 걸쳐 군부의 입김이 강하게 미쳤다. 그러다 보니 사회의 상류층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군부에 발을 담갔다.

프리지아 국가가 이처럼 기형적으로 성장하다 보니 그들의 상식 역시 여타 국가들과 차이를 보였다.

예를 들어 프리지아에 있어 외교는 군사 전략의 하위 개념에 불과했다. 전쟁을 하는 데 유리하다면 기존의 외교는 얼마든지 무시될 수 있었고, 군사 전략의 개변에 따라 희생되었다.

그러다 보니 프리지아는 자국의 ‘안보적 이익’에 필요하다고 군부가 군사 전략을 수립하면 그에 따라 외교가 일방적으로 재편되는 경향을 보였다.

오늘, 프리지아의 툴리에 궁에서 열린 프리지아 국왕과 수상의 회동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국왕은 수행원들을 뒤로 물리고 수상과 나란히 궁전의 뜰을 거닐었다. 날씨가 화창한 탓인지 정원에는 신선한 풀냄새가 물씬 풍겼다.

“안보적으로 우리 프리지아는 서로는 로망스, 남으로는 오스티아, 동으로는 루시라는 세 열강과 접한 상태입니다. 언제나 이들 중 하나를 우방으로 만들어야 우리의 안보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 일종의 난제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과제는 그러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프리지아는 언제나 불리한 패를 들고 외교 무대에 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폐하.”

국왕은 세 잎 클로버의 잎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다 반응을 보였다. 약간은 서늘하게 들리는 음색이 나왔다.

“달라질 수 있다. 연합왕국과의 동맹이 말이요?”

“예, 폐하. 물론 이 동맹은 과거의 것과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이 동맹은 ‘근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행동을 포함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로망스를 박살내는 것 말이군.”

“맞습니다.”

국왕은 클로버의 잎 하나를 떼어내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로망스를 무너트린다고 해도 조건이 달라질 것은 없지 않소? 동으로는 루시, 남으로는 오스티아가 남아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다.”

“생각해둔 것?”

“로망스를 치기에 앞서 오스티아를 치는 겁니다. 지금 루시는 에우로페에 손을 쓰기 어렵고, 로망스는 왕국이 견제해줄 겁니다. 오스티아의 유일한 후원국은 연합왕국이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손을 내민다면 왕국은 우리 손을 잡아줄 테지요.”

“결과적으로 전쟁을 두 번 하자는 말이군.”

“맞습니다, 폐하. 이를 통해 오스티아와 로망스를 무릎 꿇리고 나면 우리의 안보적 이익은 더 이상 ‘협상의 조건’으로 올라가지 못할 겁니다.”

“나쁘지 않은 이야기군. 군부에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소?”

“군부에서는 모두 이 안건에 찬동하고 있습니다. 폐하의 재가만 떨어진다면 참모본부에서 전쟁 계획을 수립하여 올해 안에 대 오스티아 전을 개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년에 바로 로망스를 칠 수 있을 겁니다.”

“상당히 무리한 도박이군.”

빌헬름은 아직 제대로 된 강대국이 되지 않은 그의 나라가 두 차례의 전쟁을 단시간에 치르는 것이 얼마나 힘에 버거운지 모르지 않았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폐하,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 최강의 열강이 우리 편에 서서 이 나라를 강대국으로 설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해 왔습니다. 그 호기는 백년에 한 번 올까 한 기회입니다.”

“그야 그럴 거요.”

빌헬름은 클로버의 잎 하나를 더 따서 떨어트렸다.

필시 연합왕국은 이 프리지아를 오스티아라는 말을 대신할 새로운 수단으로 생각하고 키우려는 것일 터이다. 프리지아는 아무리 강해져도 삼면에 강국을 접하고 있어 왕국이 적절하게 저울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계산에 편승한다면 프리지아 하나의 힘으로 로망스와 오스티아 둘을 상대할 정도까지 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계획의 일부로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한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 계획에서 만약 차질이라도 빚어지는 날에는 프리지아도 망하고 말 것이다.

군부는 그걸 염두에 두고 있을까.

왕은 클로버를 털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수상의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군부는 그저 자신들의 공상 속에서 만들어진 계획에 맞추어 국가 전략을 움직이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세상이 움직여주면 희희낙락하리라.

군사 전략에 있어 일류인 자들이지만 외교는 사류였다.

“폐하, 깊게 고민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럼 하나만 묻겠소. 수상.”

“예, 폐하.”

“여기서 만약 우리가 로망스에 패한다면 우린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폐하의 참모본부를 믿어 주십시오.”

물론 왕도 참모본부의 역량을 신뢰했다. 그들은 이 에우로페에서 제일가는 수재들로 채워진 군사 전문가들로 ‘전략’에 관해서는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석년의 로망스 황제라 해도 이들의 적수가 되진 못하리라.

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전쟁은 별개다.

왕은 가진 것이 많은 만큼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애 불장난하듯 국가 전략을 군사 전략에 맞추려는 자들의 장단에 간단히 끌려갈 수야 없었다. 신중하게 득실을 따지고 위험을 검토해야 했다.

프리지아 왕들이 군부에 쉽게 휘둘렸다면 프리지아란 나라는 진즉에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참모본부는 신뢰하오. 하지만 짐은 만전을 기하고 싶을 뿐이요.”

왕은 다시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겼다. 기세 좋게 하늘로 올라오는 분수대 앞에 이르렀을 때 수상이 말했다.

“폐하,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 로망스 황제 필립에게 맛본 굴욕을 말입니다. 그 앙갚음을 할 기회가 지금 외에 언제 있겠습니까.”

왕은 분수대를 바라보았다. 분수대는 과거 그의 아버지가 로망스 황제에게 무릎을 꿇으며 와신상담의 뜻을 담아 만든 것이었다. 분수에서 물을 뿜는 조각상은 백마를 탄 기마의 형상을 했는데, 그 위에는 프리지아의 대왕이 타고 있었다.

그 물이 떨어지는 자리에 음각된 여인은 로망스 혁명을 상징하는 ‘혁명의 여신’이었다. 부친은 이 분수대를 만들며 로망스를 짓밟을 그날을 꿈꾸었음이 틀림없었다.

“폐하.”

왕은 잠시 분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일간 연합왕국 대사를 한 번 만나보고 생각을 정리하리다.”

“정말이십니까.”

그간 왕국 대사와의 접촉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여기던 국왕이 만남을 입에 담은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렇소.”

“하면 제가 날짜를 잡겠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장소와 시간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대사에게 통보하겠습니다.”

“시간은 일주일 후, 스파가 좋겠소. 요양 차 온천에 가는 길에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확실히 해둡시다.”

“예, 폐하.”

왕은 분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는 단단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쟁에 대한 부분은 그대들이 아니라 내가 결정하는 거요.”

“물론입니다.”

“그대들이 그 사실을 종종 잊고 있는 것 같아 짐은 마음이 편치 않소. 이 사안에 대해 짐이 결정을 내리면 모두 그 뜻을 따라주길 바라오. 이의는 받지 않겠소.”

“그리하겠습니다.”

“알았소. 짐이 과민했던 것 같군. 일단 짐과 대사가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지 그대들의 준비를 진행하는 것은 허락해 두겠소. 하지만 짐이 허락한 것은 거기까지요. 그다음은 짐의 영역이요.”

“물론입니다.”

“그만 물러가 보시오. 혼자 있고 싶으니.”

왕이 손짓을 하자 수상은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을 쳐 물러났다. 빌헬름은 분수대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반혁명 전쟁 이후 수십 년간 에우로페는 평화로웠다. 신성 동맹의 이름으로 모두가 평화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 틀 안에서 외교적으로 이합집산이 있긴 했지만 전면 전쟁의 위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제 평화의 시대는 저물고 전쟁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과연 그 격동의 시기를 맞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이 프리지아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왕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

산업화 시대의 중심, 세계에서 가장 맹렬한 속도로 발전하는 해상 제국의 수도, 론디니움. 이 위대한 도시의 아침은 언제나 자욱한 안개와 함께하고 있었다. 집집마다 갖추어진 난방 설비가 토해내는 탄소 찌꺼기 덕이다.

고도의 발전과 산업 혁명의 혜택으로 모두가 석탄 난방을 향유하게 된 덕에 공기의 질이 떨어진다.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라 할 수 있었지만 이 또한 문명이 가져다준 대가였다.

뿌연 안개가 수분을 머금은 채 햇빛을 산란시키는, 기묘한 창밖의 풍경에 이불을 덮고 있던 여인이 몸을 가늘게 말았다. 자신의 옆에 있던 여성이 몸을 말자 금발의 사내가 조심스레 침상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셨나요?”

여자가 눈도 뜨지 않고 묻자 사내는 그녀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여왕은 그 감촉에 기분이 좋은 듯 눈꺼풀을 가늘게 떨었다. 남자는 이불을 그녀의 목까지 끌어 올려주고 방에서 나왔다. 오늘 아침은 중요한 약속이 있는 시간이었다.

공작이 시간에 맞추어 응접실에 나타나자 미리 도착해서 차를 홀짝이던 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내의 이름은 공작도 잘 알고 있었다. 막후의 절대 권력자, 로스실트다.

“이른 아침에 실례가 많습니다, 전하.”

로스실트의 물음에 윌리엄은 그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했다.

“별말씀을. 경이 원한다면 새벽이라도 맞아야겠지요.”

“제가 그런 무례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로스실트는 찻잔을 들며 말했다. 물론 별 의미 없는 정치적 수사다.

윌리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현실 정치에서 왕실이 차지한 입지가 로스실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위엄이 아니라 자본이다.

몇 년 전의 젊은 혈기였다면 그런 현실에 개탄했겠지만, 그도 이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우치고 있었다. 낡은 귀족과 왕실보다 위에 있는 자들을 거스르다간 지켜야 할 여왕에게 해를 끼친다.

윌리엄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로스실트가 찾아온 용건이다.

둘은 차를 나누며 잠시 이야기를 빙빙 돌렸다. 그러다 로스실트가 불쑥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오늘 전하를 찾아뵌 건 이번 전쟁에서 국채 발행에 힘을 보태달란 부탁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국채 발행은.”

윌리엄이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현재의 연합왕국은 기본적으로 국채에 대한 거부감이 심한 나라였다. 수십 년 전, 왕국 경제계를 흔든 ‘국채 사기사건’을 비롯한 대규모 투기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져 국채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이 매우 컸다.

그런 이유 때문에 로스실트는 오래 전부터 왕실에 눈독을 들여왔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왕실이 나선다면 지지부진한 국채 판매도 단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조만간 지출할 막대한 양의 전비를 메우기 위해서라도 국채 판매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다. 그걸 위해서 장기적 투자로 공작을 전쟁 영웅으로 만들어줬다.

자본가가 투자를 했으면 이득을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곤란하십니까?”

로스실트는 뱀처럼 차가운 눈으로 공작을 보았다.

공작이 국채 발행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건 매우 위험한 사안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왕가의 인기가 떨어져 여왕과 왕실이 벼랑에 몰릴 수도 있다.

왕실 폐지를 주장하는 공화주의자들은 왕국 내에도 있었다.

“국채 발행이 필요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윌리엄은 거부의 이유를 찾기 위해 상대에게 공을 넘겼다.

“전하께서는 아직 듣지 못하셨겠지만, 현재 내각 차원에서 로망스에 대한 징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계획을 추진하자면 단시간에 엄청난 군비를 지출해야 합니다.”

“로망스를? 그들과 전쟁을 한단 말입니까?”

“우리 왕국의 패권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의 패권을 위해서겠지.

윌리엄은 반사적으로 나올 뻔한 말을 겨우 삼켰다.

“하나 우리 육군은.”

“부족한 부분은 프리지아가 도울 겁니다.”

프리지아? 그들이 개입한다면 모험이라고 볼 순 없다.

그 정도라면 로스실트의 손을 들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윌리엄이 셈을 마친 순간 로스실트가 위험한 얘기를 덧붙였다.

“프리지아와 힘을 합쳐 로망스를 정리하는 즉시 신에 대한 원정 계획도 추진할 겁니다. 동방에서의 도전은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니니까요.”

로스실트의 대답에 공작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신에 대한 정벌?

왕국의 위엄을 손상시킨 제국을 징벌하는 건 매력적이었지만 왕실의 존폐 가능성이 있는 사안을 두고 도박을 벌이긴 쉽지 않다. 한 나라도 아니고 두 나라와 연속 전쟁이라니? 상식적으로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

“자칫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세계 최강인 우리 군대가 패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 둘을 꺾으면 우리 왕국은 세계만방에 확고부동하게 군림하게 될 터, 왕실의 위상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질 겁니다. 그 누구도 고개를 들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윌리엄이 대답을 내놓지 않고 찻잔을 바라보고 있자 로스실트가 쐐기를 박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전하. 걱정하실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이번 일에 저도 사활을 걸었습니다. 내각 역시 정치적 생명을 걸었습니다.”

전쟁에 보수당이 전력을 다한다. 그 의미는 작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보수당은 왕실과 행보를 함께해 왔다. 자유당도 왕실을 존중하긴 하나 보수당만큼 코드가 맞진 않았다.

그런 보수당이 실각한다면 왕실의 운신이 편친 않을 것이다.

윌리엄은 고민 끝에 입술을 떼었다.

“알겠습니다. 돕지요.”

“감사합니다, 전하.”

“대신 이번 일은 왕실이 아닌 저 개인의 지원인 겁니다. 그 점 분명히 해줄 수 있겠습니까?”

로스실트는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윌리엄 개인의 이름으로 지지한다. 물론 그렇게 포장해줄 순 있다. 하지만 대공이 나선 일이다. 왕실이 국채 발행과 무관하다고 누가 믿어줄까? 왕실이 전면에 나섰다고 모두가 인식할 것이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윌리엄은 한숨을 내쉬곤 찻잔을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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