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5화. 휴지 (2)
승도가 동영의 굴복을 받아내고 귀국을 하려는 시점에서 신은 왕국과의 최종적인 승부를 위한 모든 패를 갖추고 있었다. 수만 명의 포로를 가져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조건을 갖추어 왕국의 전략적 선택지를 크게 줄였다.
동방에 투사할 수 있는 제한된 군사력을 보강해줄 동맹자(루시와 동영)들도 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굴복시켰다. 외부적 변수는 모두 통제 범위에 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불안한 부분은 신의 부족한 산업 역량이었는데, 이것조차 일시적인 휴전으로 모두 만회되었다.
로망스의 상인들과 여타 군수상인들은 휴전기간을 이용해 미리 발주한 군수물자들을 신에 제공했다.
탄약부터 각종 부품류, 보충이 시급한 장비에 이르기까지 그 물자는 실로 전쟁 수행에 긴요한 것들이었다. 신으로서는 가뭄의 단비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것들이었다.
왕국도 그런 실태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일시적으로 휴전을 하지 않고는 신의 ‘역공’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의 역량이 부족하긴 하지만 적잖은 수의 침공군을 접경 식민제국에 보낼 능력은 있었고, 그 정도면 왕국의 통치 질서에 심대한 손상을 줄 수 있었다.
식민 제국의 핵심 부분까지 위협할 수준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의 침공은 그 자체로 중대한 위험이었다. 수백 년에 걸쳐 구축한 ‘안정된 통치 질서’ 자체가 한 번 흔들린 순간, 그 금이 간 부분을 다시 땜질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사실은 지난날 세계적인 규모의 식민 제국을 경영했던 세이비아를 위시한 전임자들이 누구보다 잘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양자 모두 서로의 ‘이익’을 위해 휴전에 동의한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이 휴전 기간 동안 강주를 비롯한 남방 주요 항구를 통해 신은 장기간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여분의 물자를 보충했다. 뿐만 아니라, 신은 이 휴전 기간을 이용해 에우로페의 선박 기술자 및 각종 무기 기술자들을 추가로 수혈하였다.
이들을 구하려 한 것은 당연히 지난 전투에서 노획한 대량의 선박과 무기를 수리해서 신의 전력으로 흡수하기 위한 조처였다. 신의 자체 역량으로는 이것들을 수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자. 당겨.”
백장의 명령 하에 나루에 서 있던 임노동자들이 있는 힘껏 밧줄을 당겼다. 수백 명이 밧줄을 당기자 큼직한 배가 나루로 천천히 끌려왔다.
이윽고 큰 배가 나루에 닿자 일꾼들은 능숙하게 매듭을 묶었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구경했다.
“저게 다 양선이라네.”
“이번에 뺏은 양이 배들이란 말인가?”
“아무렴 그렇다는군.”
나루에는 이렇게 들어온 배들이 벌써 열 척 이상 묶여 있었다. 강상에는 아직도 노획한 배들을 끌고 오는 보트며 배들이 수도 없이 떠 있었다.
“양이들이 아주 크게 졌다는 게 실감이 가네.”
사람들은 수도 없이 뜬 배들을 보았다.
금포강 전역에서 노획한 왕국의 배는 모두 육십 척에 육박했다. 아문에서 노획한 상선을 합치면 그 수는 백 척이 넘었다. 강에 뜬 배의 태반이 상선이었지만 군함도 적지 않았다.
이것들 외에도 동영에서 확보한 배들이 더 있었으니 강주로 들어올 배들의 행렬이 끝나려면 시간이 한참 더 필요했다. 물론 모든 배가 강주까지 예인되지는 않았다.
손상이 심한 배들은 아문의 도크로 예인했다. 그곳에서 바로 수리를 진행하는 것이다. 아문은 해상에 노출된 곳이라 배를 두기가 상당히 껄끄러운 곳이었다.
동방 함대가 파멸하긴 했지만 전력의 노출을 꺼리는 신으로서는 가급적 그곳에 배를 두길 원치 않았다.
그래도 손상이 심한 배들을 강주로 예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것들은 모두 아문에 들어갔다.
아문의 도크에도 수백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배들을 수납하는 절차를 밟고 있었다. 에우로페의 기술자들이 도착하는 대로 바로 손을 보기 위해 그들은 도크에 배를 넣자마자 안에서 물을 빼는 작업을 진행했다.
아문은 왕립 해군이 세계 경영의 전초 기지 중 한 곳으로 선택한 요지였던 까닭에 건조 도크만 서른 개 이상 있었다. 파손된 선박들을 보관하기에 충분한 규모였다.
하지만 단순히 보관 절차만 진행하기에 이곳에 보관된 배들은 너무 중요했다. 부서진 배의 상당수가 군함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이들 선박을 보호하기 위해 임시로 단련 및 정의군 병력 이천을 도크 주변에 우선 배치하고 추가 병력을 증파하기로 했다.
혹시나 ‘연합왕국’ 쪽에서 생각지도 않은 공격(가능성은 거의 없지만)을 감행해올 수 있어서다.
물론 그렇게 될 경우, 초기에 큰 피해를 볼 수 있는 아문에 상승군을 두는 것이 문제였기에 고육책으로 이들을 배치했다.
이외에도 수리 작업을 위해 수천의 인부가 추가로 동원될 예정이었다.
수리에 필요한 자재와 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아문 철도의 복구공사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전시이긴 했지만 이렇게 동시에 다발적으로 일을 벌이면서 강주 일대는 활기를 보였다.
남방의 관리들이 일시적인 휴식기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전력을 끌어올리는데 부산을 떨고 있었다면, 신의 조정은 그들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조정 역시 일은 많았다. 이번 전쟁을 시작하면서 엄청난 전비를 지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배상금과 상계의 지원 등으로 막대한 비용을 겨우겨우 충당하고 있긴 했지만, 앞으로 전쟁이 길어지면 그 문제가 심각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조정은 아문과 선진에서 왕국으로부터 노획한 자산을 재검토하여 이를 민간에 불하하는 방식으로 전비를 충당할 계획을 세웠다.
이 작업은 승도의 부친이자 행상의 영수인 오유도가 맡았다.
공식적으로 오유도는 조정의 직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강주 왕의 부친이라는 사사로운 신분에 더해 정1품(정2품이었지만, 아들이 왕으로 올라선 덕에 승차)의 관품을 가지고 있어 조정의 재무 업무를 맡을 입지 정도는 되었다.
오유도는 업무를 세부적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먼저 아문 은행 등이 준비한 막대한 황금과 은(이들 자산은 대부분 왕국 은행가들이 금과 은의 시세를 보다 이따금 백지 어음 대신 지불금으로 쓰며 시세 차익을 노리는 용도로 사용)은 그대로 호부의 예산에 편입시켰다.
이것은 말 그대로 현찰이었기에 민간에 넘길 필요가 없었다. 이쪽 자산은 군수물자의 매입 대금 등을 지불하는 용도로 쓰기로 했다.
그리고 대량으로 노획한 선박의 처분은 염상과 행상, 그리고 강상의 주요 상인들에게 ‘입찰 공고’를 내고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제국이 대외 원정을 나서지 않을 바에야 이들 자산은 가지고 있는 것이 손해였다. 민간에 넘겨 이익을 내는 편이 낫다는 것이 오유도의 판단이었다.
이를 통해 제국 정부가 필요로 하는 전비 약 50만 냥 정도(상선은 값이 그리 비싸지 않은 데다 염가 매매)는 추가로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50만 냥 정도로는 언 발에 오줌 누기에 지나지 않았다.
오유도는 상선 외에도 여러 가지에 손을 대었다.
왕립 해병대 및 육군이 보유한 마차와 소, 말, 그 외 각종 집기들이 물류에 종사하는 강상에 대량으로 팔려 나갔다. 물론 그 가격은 상당히 저렴했다.
이어 오유도는 ‘사람의 노동력’까지도 판다는 발상을 해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인간의 노동력도 하나의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었다. 이재에 밝은 행상들은 오래 전부터 서역의 경제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만큼 오유도도 서역의 이러한 관행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노동력 판매로 제국 정부가 필요로 하는 자금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노동력이란 바로 ‘건장한 서역 포로 수만 명’이었다.
내륙으로 옮겨 ‘밥벌이’를 시키기로 했으니, 그 과정에서 적당히 일을 시켜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오유도는 고민 끝에 이들의 대부분을 대륙 내륙에 있는 광산에 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들의 일당으로 절약될 돈은 모두 제국 정부의 전비로 돌릴 수 있었다.
이렇게만 해도 1년에 은자 오십만 냥은 족히 절약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해도 전비가 턱없이 모자랄 거란 점인데.’
오유도는 작업을 진두지휘하면서도 전비 부족을 걱정했다.
연합왕국처럼 ‘신용 화폐’ 위주로 전환하기만 한다면 사실 전비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신용 화폐 제도 하에서는 지급 준비금(금과 은)의 몇 배에 해당하는 지폐를 찍어내어 시장에 공급하고, 이로 채권을 구입하게 하여 정부의 전쟁 수행 능력을 뒷받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용 화폐’ 단계에 접어들기에는 금융의 성숙도가 낮은 신으로서는 이 방법을 바로 고려하긴 어려웠다. 최초의 동방계 은행 역할을 수행했던 강주양행조차도 신용화폐를 유통할 수 없었다는 점만 보아도 그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게 걱정이군.’
오유도는 여기에 대해 아들과 한 번 상의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은 결국 돈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패전에 대한 충격적인 소식은 오래지 않아 연합왕국으로 전해졌다. 왕국 정부는 또 한 번 날아온 패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패배는 ‘기습’에 의한 패배로 치부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이었다.
“머저리 같은 친구들이 전쟁을 완전히 망쳐 놓았습니다. 이거야 원. 이래서야 함대를 증파해봐야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육군성 장관이 격앙된 어조로 해군을 힐난했다. 해군은 그에 대해 할 말이 없었기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사실 해군은 일전의 계획에 따라 출동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함대에 태울 왕립 해병대만 항구에 도착하면 강력한 서방 함대의 출동은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동방 함대가 전멸하면서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왕립 해군 4개 제대 중 하나가 전멸해 버리면서, 1개 함대의 파견으로는 신에 전혀 위협을 가할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최소한 함대가 2개는 되어야 신을 위협할 수 있을 거란 것이 현 군사 전문가들의 예상이었다.
함대 하나의 파견은 오히려 신의 기를 살려줄 가능성이 높았다. 함대 하나가 전멸 당하자마자 허겁지겁 방어적 자세를 취하는 모양새로 비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거듭된 패배로 우리 위신이 실추되었단 겁니다. 당장 몇몇 국가들의 태도가 바뀔 우려가 높아졌습니다. 우리를 두려움이 아니라 해볼 만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순간, 우리 패권은 불안정한 경쟁 구도로 내려가고 맙니다.”
외무성 장관의 한마디에 참석자들이 입맛을 다셨다. 이 부분은 쉽게 간과할 부분이 아니었다. 장관은 그저 ‘외부 문제’만을 언급했지만 내부적으로도 파장이 컸다.
왕국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에 찬 시선이 내부 식민 제국으로 확산될 경우, 그 통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지난날 독립 전쟁까지 치른 신대륙 식민지라면 다시 한 번 다른 마음을 먹을 우려도 있었다.
“대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고 우리 명예를 회복하는 겁니다. 신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수상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단언했다. 그는 그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고 믿는 것 같았다. 다른 참석자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자면 전력이 확실히 필요합니다. 전비야 로스실트 의원이 도와준다 해도 로망스가 해결되기 전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 프리지아가 준비를 마치자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습니까.”
“시간이 더 필요하다.”
내각의 인사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 패전 소식이 언론에 실리면 대중은 더 격한 반응을 보이며 보복을 부르짖을 것이다. ‘휴전 이야기’가 나오면 아마 내각을 갈아먹으려 들 터, 정치적으로 보자면 외통수나 다름없었다.
“신을 손볼 때까지 시간을 벌 방법이 없겠습니까?”
“시간을 벌 방법이라. 그렇다면 여론 몰이밖에 없습니다.”
재무 장관이 한마디 했다. 그 한마디에 장관 몇몇이 표정을 찌푸렸다.
여론 조작은 과거 로망스 제정의 필립이 자주 하던 수법으로 연합왕국은 이를 두고 ‘전제 정치의 추악함’이라고 비웃었다.
왕국은 언론에 대한 자유만큼은 전시에도 보장할 만큼 ‘미덕’이라 여겼기에 이에 대한 생리적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여론을 조작하자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까?”
“대중을 조용히 시키자면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있다면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재무 장관의 대꾸에 나머지 장관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그 조작에 대해 몇 마디 묻겠습니다.”
수상이 말했다.
“조작을 한다면 어떤 수법으로 어떻게 하잔 겁니까?”
“어려울 것 없습니다. 아주 간단한 수가 있습니다. 위기는 언제나 새로운 위기로 덮으면 대중의 눈을 돌리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것을 터트리십시오.”
“로망스와의 전쟁을 말입니까?”
“로망스가 신을 지원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가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대응을 고려한다. 이런 논조의 기사만 실어도 로망스에서 반응을 보일 겁니다. 그 감정의 연쇄반응만 타고 들어가면 일단 동방문제에 대한 관심은 충분히 돌릴 수 있습니다. 대중은 어리석어서 자기 코앞의 것만 보기 때문이니까요.”
“문제라면 로망스가 전쟁 위기를 느끼고 반응을 보이는 것인데, 그건 어찌 해결할 거요?”
“그야 수면 아래로 접촉해서 해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패전을 불식시키기 위한 외교적 수사 정도라고 안심시키면 될 문제입니다.”
재무 장관의 이야기에 장관들은 불편한 표정을 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거절하라고 하지 못했다. 불쾌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곧 내각은 재무 장관의 제안대로 패전 문제를 수습하기로 했다. 그 수습은 연합왕국이 결코 신과의 대결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나 마찬가지였다.
“호외요! 호외요!”
소년이 신문을 들고 뛰었다.
점잖은 신사가 느긋하게 걷다 신문팔이가 다가오자 아이를 불렀다.
“얘야, 신문 한 부만 다오.”
“네. 2실링입니다.”
“여기 있다.”
신사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소년에게 건넸다. 신문팔이는 날렵하게 신문을 건네고 다시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신문의 1면에는 왕국과 로망스 양국 사이의 갈등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실려 있었다. 그 내용은 해협을 사이에 둔 이웃 국가와의 전쟁 가능성을 전제한 것이었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2면과 3면에는 왕국의 ‘전쟁 준비’ 및 국채 판매 소식 등이 빼곡히 들어가 있었다.
한참 뒷면에 ‘왕국의 패전’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이 내용은 그다지 구체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패배 자체의 의미도 축소되어 있었다.
왕국의 2선급 전력이 ‘비열한 야만인’들의 기습으로 포로가 된 민간인들을 구하고자 나름 철저한 계획 하에 구출 작전을 펼쳤지만, 우세한 전력의 적에게 고전 끝에 패했다는 것이 내용의 골자였다.
내용은 피해보다는 왕립 해군의 투지와 분전이, 그리고 전쟁을 시작한 야만인들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루었다.
그래서인지 왕국 시민들은 패전에 대한 반응이 ‘첫 기습’으로 인한 패배 기사를 받아보았을 때보다 온건했다.
신사도 신문을 읽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수상 관저로 달려가 달걀을 던질 정도로 분노하지는 않았다.
그저 왕국의 패배와 작전을 지휘한 군부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를 한 번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자그마치 수만 명이 포로가 되거나 사상자가 된 사건이건만 그 패배의 의미는 일단 희석되었다.
이렇게 한 번 ‘예방 접종’으로 패전 소식이 전해진 이상, 차후 구체적인 피해 규모와 내역이 알려진다고 해도 대중들이 폭발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거기다 코앞의 로망스와 대결 가능성이 부각된 만큼, 본토를 비우고 동방으로 공격을 가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 기사는 ‘언론’의 속성을 정확히 읽고 정보를 흘린 왕국 정부의 ‘여론 조작’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왕국은 이 기사를 통해 한시적이나마 시간을 벌었다. 로망스와의 갈등 국면이 조장되는 동안은 신에 대한 보복의 여론이 나오긴 어려웠다.
그 시간 동안 프리지아를 가능한 빠르게 키워 대 로망스 전에 투입, 로망스를 위협 국가군에서 이탈시키는 것이 그들의 주된 목표였다.
로망스만 처리된다면 그다음은 전혀 걱정할 구석이 없었다. 기존의 원정군 편성으로는 신을 손보기 어렵지만 로망스가 무력화된다면 최강의 전력을 신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서 왕국을 상징하는 적색함대, 바로 본국 함대의 출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왕국인들은 신은 ‘별것 아닌 상대’로 간주하고 새로운 위협으로 부각된 로망스로 주의를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