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8화. 이대도강 (3)
승도는 체스 판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아문에서 적의 움직임을 지연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금포강으로 오는 도상에서 도로를 파괴하여 한 번 더 적을 지연시켰다. 시간을 번 것은 힌디아에서 벌일 작전과 무관하지 않았다.
시차를 두고 이루어질 그쪽의 작전 상황이 전해지면 동방 원정군이 전력을 분산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의 의도대로 되었다면 지금쯤 반응이 있어야 했다. 적 부대가 잠시 작전을 중단하고 망설이는 모습이 보여야 맞았다.
‘하지만 적은 조금도 흔들리는 모습이 없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심리전인가?’
전장에서 위험한 정보는 통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동방 원정군 지휘부가 힌디아의 ‘위급한 사태’를 비밀에 부치고 강주 전역을 처리한 다음, 일을 도모하기로 결심했을 수도 있었다.
‘그럴 수는 없다. 왕국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식민지. 그 식민지의 실함 가능성이라면 왕국이 반응을 보이지 않을 리가 없다.’
승도는 일이 뭔가 잘못 풀린 것이 아닌지 고민했다.
이 세상 제일의 전략가 중 하나라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세계적인 규모의 판 위에서 전략을 짜면서 실수가 없을 수는 없었다. 인간인 이상 사소한 실수는 있게 마련이었다. 그가 간과하고 넘어간 ‘혹시 모를’ 사소한 실수가 변수를 만든 것은 아닌가.
그가 체스 판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데 몇몇 사내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보고드릴 것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승도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예, 조금 전 적 기병이 여문에 대한 위력 정찰을 수행하고 갔습니다. 전하께서 명하신 대로 어설프게 대응하도록 조처했습니다. 단련을 선봉에 세우고 포병도 자율 포격을 명령했습니다.”
“잘했습니다. 혹 적이 보인 행동에 특이한 것은 없던가요?”
“아군 방어선을 한 번 점검이라도 하듯 위협만 하고 물러났습니다. 특별한 의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승도는 손가락으로 체스 말 하나를 잡았다.
“기병이 위협만 하고 갔다. 진공을 위한 정석적인 위력 정찰이란 말인데. 혹 적 기병 연대의 문장은 알아보았습니까?”
“검은 바탕에 황금 쌍두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프리지아 왕실 기병 연대로군요.”
프리지아 왕실 기병 연대는 반혁명 전쟁에서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몇 안 되는 적수였다. 그들은 소수의 전력으로 로망스 황제의 군막 앞까지 밀고 들어온 가공할 돌파력을 자랑한 괴물들이었다.
프리지아가 자랑하는 가장 날카로운 창끝. 승도는 그 부대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했다.
“그들을 알고 계십니까?”
“에우로페에서도 유명한 자들이라 그에 대해 약간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무튼 그자들이 무력 정찰을 왔다면 저들 원정군의 주력이 조만간 전진해 오겠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정예 기병을 단순한 정찰 용도로 투입하진 않았을 테니.”
“전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것 같습니다.”
“일단 우리 측 방어선 앞으로 물을 뿌려두세요. 그것만 해도 적 기병이 확인한 정보는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물을 말입니까. 그게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효과는 있을 겁니다. 이 사람을 믿으세요. 인부와 병사를 동원해서 방어선 앞을 전부 진창으로 바꾸세요. 갈수기가 아니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보고를 올린 로망스 인들은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 군막에서 물러났다.
승도는 그들과 잠깐 나눈 대화의 내용을 상기하며 다시 자신의 생각에 잠겼다.
‘동방 원정군이 프리지아 왕실 기병을 투입하여 위력 정찰을 감행했다면 그 의도는 분명 아군의 방어 태세를 확실히 살피고 돌파하려는 데 있다. 강주를 직격하겠다는 생각이 아니고는 보낼 이유가 없지. 보통의 기병을 선발로 보냈다면 우리 측 방어선에서 정보를 상세히 얻어내긴 어려울 테니까.’
프리지아 왕실 기병 정도의 정예가 아니고는 방어자에게 위협을 주긴 어려웠다. 작금의 전쟁터는 기병보다 보병에게 유리한 상태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그럼 적은 강주로의 진공에 뜻이 있단 것이고, 힌디아의 반란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고 있지 않는다는 것인데. 난감한 일이군. 그 반란을 무시하기로 했건, 정보가 늦건 이쪽 입장에선 꽤나 위험해.’
승도는 자신이 전력상 그렇게 유리하지 않은 입장임을 직시하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동방 원정군이 지금 진출시킨 병력에 증원 병력을 더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대결의 판을 짠 것이라 양군이 전력을 다해 격돌할 경우 상승군이 승산을 점치기란 어려웠다.
물론 신의 전체 병력이 동원된다면 동방 원정군이 절대 이길 수 없었지만, 왕국 지휘관들이 머리에 총을 맞지 않은 이상 그 집결 시간을 기다려줄 이유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 강주를 내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승도는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가 수십 년을 나고 자란 땅이요, 그의 정치적 기반이 있는 곳. 행상의 자산이 집중되어 있고 제국의 부가 모인 보물 창고.
이 황금의 대지를, 고향을 내준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부담이 막심했다.
하지만 지킬 수 없을 때는 이를 내주는 것도 고려해야 했다. 맞설 수 없는 적의 예봉에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강주를 간단히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번 시간을 이용해 적의 ‘강주 진공 의도’에 맞추어 주변에 분산된 방어 병력을 부지런히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까지 집중시킨 병력은 자그마치 7만을 넘었다. 하지만 그중 많은 수가 단련과 정의군 전력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여문과 강주에서의 방어가 어렵다는 점을 예감하고 있었다. 군기가 잘 선 동방 원정군 주력이 집결해 한 점으로 돌파해 들어올 경우, 전력이 빈약한 이들 전력이 차례로 격파당하면서 각개 격파의 양상을 보일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여문은 수만 대군이 들어갈 여지는 있었지만, 그 병력으로 전략을 펴기엔 좁은 전장이었다. 강주는 곳곳에 운하가 있고, 도시 자체의 담과 건물이 성벽 역할을 해서 대군의 운신에 불리했다. 조직력에서 우세하여 좁은 전투 전면에서 최대 효율을 내는 동방 원정군 측에 유리한 지형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강주까지 무혈로 들여보낼 수가 없어 승도는 동방 원정군을 상대할 한 수를 준비하긴 했다. 훈련이 안 된 병력을 여문에 세워 적을 방심하게 한 것이 그것이었다.
이들 병력이 간단히 패하며 ‘패주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자연스레 적에게 전과 확대를 유도하는 것이 그의 노림수였다.
여기에 적이 걸려들면 그대로 지뢰밭과 기관포로 이루어진 함정에 유인해 몰살을 시키도록 했다. 이들 전력은 추격하는 적의 병력과 지휘부가 절대 파악할 수 없도록 여문과 강주 사이의 둔덕 뒤에 배치해 두었다.
학살이 벌어지더라도 적이 금방 눈치채지 못하도록 한 나름의 노림수인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도 동방 원정군의 집중된 전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승도의 생각이었다.
전쟁 이전에 추산한 적의 원정군 전력이라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망스를 밀어버리고 ‘전력’을 기울인 것도 모자라 프리지아까지 끌어들이면서 동방 원정군의 지상군 규모는 그가 상상한 것의 몇 배를 넘고 있었다.
그 부분이 그를 가장 두렵게 한 변수였다. 승도는 그에 대한 대응의 수로 힌디아를 흔드는 방법을 내놓았지만, 그 효과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가 강주 포기를 생각하는 것은 전략가로서 당연한 고민이었다.
‘하지만 제국과 강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강주가 아닌 제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제 행상의 영수이자 강주 관리사인 신분이 아니다. 이 제국의 수반으로서 이 제국의 운명을 책임진 몸이다. 내 고향이 중하다고 해도 여기에 제국의 명운을 걸 수는 없다. 이길 수 없다면 한 번 구부리는 것도 선택해야겠지.’
승도는 한참 체스 판을 바라보다 결심을 굳혔다.
그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만약 그가 강주를 지키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면 여문과 강주 사이에 병력을 모두 쓸어 넣고 추가 병력까지 강주로 달려오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패한다면 제국은 확실히 결딴이 날 것이다. 그런 심각한 패배를 맛보면 동방 원정군은 그대로 육상 통로로 전진하며 ‘집결하지 못한’ 신의 군대를 연파하고 상경까지 직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신이 이번 전쟁을 위해 준비한 엄청난 규모의 보급창이 있었다.
그곳의 탄약과 보급품이 잘려나가면 강남의 전 병력은 맨손으로 왕국과 싸워야 했다. 강남 병력이 그 신세가 되면 제국도 자연히 볼 것이 없었다.
그러니 강주를 내주더라도 병력은 온존시켜야 했다. 그것이 제국의 지도자인 승도가 내려야 할 결단이었다.
***
동방 원정군의 주력은 어렵지 않게 여문에 도달했다.
그들은 프리지아 왕실 기병의 ‘위력 정찰’ 결과를 보고받고 적이 ‘여문’에서 단순히 시간벌이를 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그 의심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껏 신은 일관되게 시간을 질질 끌며 동방 원정군 주력과의 대결을 회피했다. 제대로 된 충돌은 단 한 번도 벌이려 들지 않았다.
‘동방 것들은 그저 시간만 벌려는 겁니다. 지금에서야 부랴부랴 군마를 모으고 있을 텐데, 한 이십만이 모일 때까지 움직임을 보일 턱이 없지요. 지금 공세를 진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간을 끌면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습니다. 제한된 작전 시간을 감안할 때, 지금 강주를 직격해서 타격을 가하고 적 병력을 이곳으로 최대한 많이 불러들여야 합니다. 당초 작전의 목표가 그것 아니었습니까?’
‘적은 허세를 자주 이용해 왔습니다. 지금도 허세로 시간을 벌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사이에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대군을 모아 이쪽과 대결할 진용을 갖추려는 속셈일 겁니다.’
동방 원정군 지휘부는 이내 상승군과 정면 대결을 벌이자는 쪽으로 생각을 통일했다. 그들은 길게 시간을 주어서는 좋을 것이 없다는 점에 이해를 같이하고 병력을 전개하게 했다.
신의 진영 앞쪽으로 곧 어마어마한 군세가 펼쳐졌다. 전면에는 전통에 빛나는 왕립 해병대의 세 개 연대가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사자가 포효하는 깃발을 든 채로 화려한 전열을 갖추었다.
그 좌우로 프리지아 육군과 왕국 육군의 정예 연대가 각 세 개씩 자리 잡았다. 이들 역시 모두 가공할 전력을 자랑하는 에우로페의 정예들이었다.
보병 연대가 전개를 마치자 그 뒤로 400문이 넘는 대규모 포대가 전개되었다. 이들 대포는 우마가 간단히 견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경량의 3인치 야포들이었다.
모두 튼튼하고 신뢰성이 높은 물건들로 프리지아 육군의 것이었다. 원래 연합왕국 쪽의 야포도 대거 동원될 예정이었지만, 그것들은 운반이 느려 아직 전장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포들이 쫙 전개되자 말에 타고 있던 발란틴 중장이 망원경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는 적의 방어선을 슬쩍 훑고는 코웃음을 쳤다. 기본적인 배치는 나쁘지 않았지만, 병력의 집중도나 방어 태세 모두 형편없었다.
타격은 1시간 정도면 족했다.
장군은 망원경을 내리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포병 여단장들이 돌아서서 장갑 낀 손을 움직였다. 그들의 손짓에 기수들이 깃발을 움직였다.
“포격 준비!”
프리지아 육군은 전통적으로 포병이란 병과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에우로페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축에 속하는 나라였기에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기병’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기병 다음은 보병, 마지막이 포병이었다. 전장에서 피를 흘리지 않는 병과는 명예롭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 이유 때문에 프리지아 포병들은 ‘지원 받는 장비’에 비해서 그 수준이 상당히 떨어졌다. 포병을 중시하는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물론 프리지아도 반혁명 전쟁 이후로 포병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 질과 양을 배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그 노력이 빛을 보기엔 토대가 너무 얕았다.
그래서 프리지아 포병들은 왕국 장교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어설픈 모습으로 포격을 준비했다.
포탄을 ‘왕국 육군의 규정’대로라면 용납할 수 없는 위치에 아무렇게나 쌓아 두었다가 한 발씩 장전하는 모습은 확실히 ‘이류 포병’이란 평가에 걸맞았다.
그렇긴 해도 우습게 볼 수준은 아니었다.
“발사!”
기수가 깃발을 내림과 동시에 포대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수백 발의 포탄이 한순간에 하늘을 날았다. 그 굉음에 놀라 말이 일부 움찔하기도 했다.
포탄은 그대로 포물선을 그린 다음 지상에 떨어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프리지아와 왕국 장교들이 잠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은 포탄의 종류가 아이언 볼이 아니었는지 잠깐 의심했다.
발란틴은 망원경을 들고 포탄이 떨어진 지점을 보다가 잠시 후 쓴웃음을 지었다.
“교활한 쥐새끼들.”
그는 상대의 잔머리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 참신함에 혀를 내둘렀다.
적은 프리지아 기병이 위력 정찰을 하고 지나가자 자신들 부대 앞에 물을 뿌려 질척한 대지를 만들었다. 기병이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땅에 물을 흘려 아이언 볼을 튕기지 못하게 하다니. 야만인이라 보기엔 너무 머리가 좋군.”
그는 적이 의도한 것이 단순히 그것 하나에 그치지 않을 거란 점도 내다보았다.
‘거기다 기병이 돌격하면 진흙탕에선 속도가 느려지게 마련이지. 겉보기엔 허술하게 보이는 진지이지만 내실을 보면 피해를 줄 수 있게 설계된 훌륭한 방어진이라 이거군. 놀라워. 이 고약한 방어선을 설계한 놈은 도대체 누구지?’
발란틴은 잠시 그런 의문까지 품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그 의문을 털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설계를 누가 했느냐가 아니었다.
“포탄을 교체하도록 하지.”
발란틴이 말했다. 포병 여단장들도 그의 견해에 동의했다.
프리지아 포병은 탄 종을 유산탄으로 바꾸고 입사각을 높였다. 아이언 볼을 쓰지 못한다면 공격 방식을 바꾸면 그만이었다.
발란틴은 명령을 내리고 다시 망원경을 들었다.
잠깐의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포격이 재개되었다.
포병은 조금 전에 아이언 볼을 날려먹은 데에 대한 보복이라도 하듯 정확히 적 보병의 대열에 포탄을 박았다.
포탄이 터짐과 동시에 적 대열 사이에서 비명이 번졌다. 풀썩 쓰러지는 적 보병들의 피해가 그리 커보이진 않았지만, 효과가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포격은 비처럼 계속해서 쏟아졌다. 그러자 신의 포병도 반응을 보였다. 저들에게도 에우로페제의 신형 대포가 보유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간헐적으로 포문을 열어 아군의 선두 보병 대열에 포탄을 쏘며 위력을 과시했다. 다만 그 공격은 이쪽의 거창한 포격과는 비교될 만큼 형편없었다.
‘포탄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아군이 보병을 내보낼 때까지 포탄을 아끼는 것인가.’
전자일 가능성은 물론 없었다. 후자일 가능성이 있다면 조금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아군 보병 대열에 포탄을 집중적으로 쏟은 다음 생각지도 않은 전술을 보일 여지가 있어서다.
‘정말이지 자잘한 곳에서 많이 고민하게 만드는 귀찮은 적이군.’
발란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전투가 제법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뭔가 수를 주고받는 적은 언제나 싸우는 맛이 있다 할 수 있었다. 멍청하게 그들에게 박살이 난 로망스와 오스티아 장군들은 그에게 그런 인상을 전혀 주지 못했다.
시종일관 프리지아에 끌려다니다 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적은 달랐다. 아문에 상륙한 순간부터 그들의 허를 찔렀고, 잠시만 방심하면 놀라운 수법을 들고 나와 견문을 넓혀주었다.
상대는 에우로페에서도 본 적이 없는 뛰어난 적이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포격은 계속되었다. 여문의 제국군은 거듭된 포격을 받아 수백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그나마도 포격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병사들의 밀도를 낮추었기에 가능한 수준의 손실이었다.
적의 방어력이 꾸준히 경감하자 왕립 해병대의 오스틴 중장이 전령을 보내왔다.
‘이만하면 준비는 끝난 것 같고, 우리가 나설 기회를 주시지요.’
그의 요구는 합리적이었다. 포격을 계속하여 피해를 주는 것도 의미가 있긴 했지만 적의 방어선은 이미 전술적으로 상당한 피해가 누적되어 있어 보병의 전진이 가능해진 단계였다.
발란틴은 아직 적 포병이 포격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설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상황이 돌아갈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다.
교활한 적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그럴 바에야 그 위험을 섬나라 놈들에게 떠넘기는 것도 좋을 성싶었다.
뜨거운 감자를 자청해서 먼저 주워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발란틴은 오스틴에게 짧게 답을 보냈다.
‘5분 후에 돌격하십시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