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90화 (390/425)

제390화. 이대도강 (5)

승도는 적이 여문을 돌파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도 별로 놀랍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패배할 것을 미리 계산에 넣고 있었다. 아니, 패하는 것을 전제로 계획을 세웠다.

“적 기병도 투입되어 아군의 뒤를 추격하고 있겠군요. 아군 부대의 후퇴 경로는 잘 지시해 두었겠지요?”

로망스 장교가 열기구 아래를 향해 손짓해서 답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지시하신 대로 주지시켰습니다.”

그는 패주하는 단련들을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 후퇴하게 계획했다. 덩어리가 작고 보병이 추격하기 쉬운 전력은 동쪽으로 후퇴하게 했다.

상대적으로 덩어리가 크고 보병이 추격하기 어려운 위치의 부대들은 각각 여문의 북쪽과 남쪽으로 향하게 했다.

이들 병력은 적의 기동 병력에 해당되는 기병 세력을 유인하기 위해 그 방향으로 후퇴하게 계획되었다.

상대가 의심하지 않는 이상 기병은 그 뒤를 추격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보병이 추격할 수 없어 놓칠 법한 병력을 기병이 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승도는 적이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순간, 그들을 함정에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 그가 결정적인 전장에서 떼어내려 한 기마 병력은 승도의 ‘덫’에 걸리기 어려운 전력이었다.

그들은 기관포와 지뢰에 걸려도 적절한 수준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는 선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거기다 그들 병력은 승도의 덫을 무너트릴 가능성을 가진 상대였다.

‘기관포와 지뢰로 이루어진 고착 방어선은 화력을 집중해야 그 의의가 있다. 그 방어선의 규모는 협소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우회가 쉽다. 기병이 있다면 적은 그 배후를 돌아가 우리를 역으로 위협할 수 있지. 그 위험을 배제하려면 내 전장에서 치워야 한다.’

그의 의도대로 적 기병은 북쪽과 남쪽으로 대거 도주하는 아군 단련들의 추격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을 돌파한 보병들은 기세를 타고 동쪽으로 쭉 나아오고 있었다. 이대로 경로상의 아군을 모두 청소하고, 재정비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전략가라면 내릴 만한 명령이었다. 패주하는 아군 보병의 뒤를 추격한다면 지뢰의 위험도 피할 수 있을 테니, 그 이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적은 몇 가지를 잘못 판단했다. 아군이 후퇴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전략적으로 계획된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

일부러 내준 전장에 투입한 전력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머릿수는 제법 되어도 전력 자체는 보잘것없는 단련과 구식의 장비들이 투입 병력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병력과 방어선을 돌파한다고 해서 신의 주력 병력이 타격받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적이 오판할 여지가 없진 않았다.

승도는 고의로 ‘시간’을 끄는 모양새를 연출하는 동시에 주력 병력의 위치를 노출하지 않았다. 여기서 적은 이쪽이 예비대를 후방에 두고 자신들의 의도를 읽을 때까지 신중을 기하려 한다고 착각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면 당연히 적은 아군이 투입한 병력을 전부 잡아먹을 기회가 왔다고 착각하고 무리를 해서 추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승도는 그런 착각을 한 적에게 한 번 더 확신을 줄 생각이었다.

후방의 제3방어선에 해당하는 둔덕 라인에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소수의 병력과 장비, 그리고 급하게 증원되는 상승군 병력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이쪽이 ‘예비대’의 적절한 투입에 실패했다는 착각을 강화시켜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적은 속아 넘어가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문제라면 적이 한 번 호흡을 고르는 것이지만, 그럴 이유는 없겠지.’

전장에서는 기세를 탈 때 밀어붙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3방어선에 투입되는 상승군 병력의 질과 양을 본 다음, 승세까지 잡는다면 적이 머뭇거릴 이유는 없으리라.

그대로 승기를 잡는 즉시 둔덕을 넘어 공격을 가해올 공산이 컸다.

하지만 그가 준비한 모든 함정은 후방에서 관측할 수 없는 둔덕 뒤에 꾸려져 있었다. 신이 상식적인 방어를 한다면 고지대인 둔덕에 진을 치는 것이 맞았기에 둔덕 아래에 거대한 덫이 펼쳐져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승도는 이 함정으로 동방 원정군에 뼈아픈 손실을 줄 참이었다. 이 수로 충분한 피해를 주지 못한다면 그는 강주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적은 전체 전력에서 신의 강주 방면 전력을 압도하고 있었기에 상대가 기겁할 수준의 피해를 주지 않고는 재 공세를 막아낼 가능성이 없다고 보아야 했다.

승도는 서서히 둔덕으로 적이 다가온다는 보고를 받고 턱을 매만졌다.

붉은 물결은 패주하는 단련의 뒤를 추격하여 둔덕까지 단숨에 밀고 들어왔다. 그들을 저지할 화력은 당연히 없었다. 이곳에서의 ‘얄팍한 방어’가 실패한 시점에서 동방 원정군은 신의 최후 방어가 강주라는 도시에서 이루어지리라 예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승도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둔덕 이편으로 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해병들은 기세를 타고 단련의 뒤를 쫓아 그대로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대포의 지원은 없었지만 적 역시 대포가 없었다. 원정군이 너무 빨리 여문의 방어선을 돌파한 탓에 방어 병력을 제때 전개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이곳 둔덕 일대는 병력을 주둔시키기에 부적합한 곳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데다 온통 암반으로 이루어져 병사들이 막사를 치기도 곤란했다.

적은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병력을 두었다가 여문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전에 이 둔덕으로 병력을 옮기려 했는지 몰랐다.

생각은 나쁘지 않았지만 원정군이 너무 쉽게 여문을 뚫어낸 탓에 공격을 간단히 허용했는지 몰랐다. 적의 의표를 찔렀다면 그만큼 승리가 가까이 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

해병들은 적의 방어선에 다가섰다. 총성이 오갈 때마다 양쪽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곳은 적이 제대로 지키기를 작심했는지 고성능의 기관포가 몇 문 거치되어 있었다.

총탄 세례가 섬뜩하게 대열 사이를 지날 때마다 돌격하던 해병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하지만 몇 문 정도로는 강력한 해병대의 공격을 막기에 부족했다. 용맹한 해병 중 일부가 엉금엉금 기관포에 접근해 던진 수류탄에 신병기는 간단히 무력화되었다.

기관포를 지킬 보병이 충분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지만, 이렇게 방어가 허술한 데야 별수 없었다.

해병들은 새로운 방어선의 존재를 지휘부에 알렸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오스틴은 이 새로운 방어선을 보고 잠시 공격을 늦출까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적의 방어가 약하다는 데 주목하고, 적이 방어력을 증강하기 전에 여문 승리의 승세를 몰아 계속 치고 나가는 것이 확실한 길이라고 믿었다. 어차피 이 둔덕 외에 강주로 가는 도상의 방어 요지는 더 이상 없었다.

그의 견해에 프리지아 쪽은 포병을 동원해서 돌파하자는 제안을 꺼냈다. 적의 방어선이 특별히 준비되지 않은 것 같으니 포병 전력을 보강해서 돌파해도 나쁘지 않을 거란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오스틴은 그 우려를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받아쳤다.

지금 시간을 끌면 적은 예비대를 동원할 것이다. 전장의 상황만 보아도 지금 같은 호조건을 얻기는 어렵다. 신은 의표를 찔렸고, 적시에 예비 병력을 투입할 기회를 잃었다. 지금 돌파해야 강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동시에 적 병력을 각개 격파할 기회도 잡을 수 있다.

그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상승군은 지금 제대로 된 포병 전력의 지원도 없이 급하게 보병만 가져와 둔덕에 방어선을 펴려 하고 있었다. 제대로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면 귀한 정규 보병 세력을 막강한 원정군 보병과 정면으로 싸우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신으로서는 출혈이 큰 소모이기 때문이다.

오스틴의 거듭된 주장에 프리지아 측은 하는 수 없이 공격의 재개에 동의했다.

‘상대는 사실상 실기했다. 적은 방어의 기회를 놓치고 우리에게 결정적인 공격의 기회를 내주었다. 여문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끌지 못한 탓에 강주의 예비 병력을 가져올 시간을 벌지 못한 거지. 이런 판에 적이 병력과 장비를 어디에 두겠나. 지금까지 몇 번 놈들에게 당했다고 해서 그 허세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움츠리다니. 이렇게 해선 될 싸움도 지게 마련이다.’

오스틴은 프리지아 측의 소극적인 태도에 혀를 차면서 적의 방어선에 아군 병사들이 달라붙기를 기다렸다.

곧, 왕국과 프리지아 육군 보병이 일시에 개입하자 수천의 해병대를 상대로도 밀리고 있던 상승군은 그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한 줄을 쓰러트려도 그 뒤에 두 줄, 세 줄이 밀려오며 일제 사격을 퍼부으니 방어자의 이점이고 뭐고 없었다.

압도적인 화력 열세를 견디다 못한 상승군은 이내 둔덕 뒤로 슬금슬금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신의 강주 방어는 결판난 것처럼 보였다.

***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붉고 검은 물결이 둔덕을 넘어섰다. 그들은 발아래 깔린 상승군 병사들의 시체를 밟으며 강주로 가는 최후의 고지를 차지했다.

그들은 승리의 순간을 만끽했고, 그 벅찬 희열의 맛을 가슴에 담은 채로 둔덕 뒤편으로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 환희는 오래가지 않았다.

“응?”

선두에서 부하들과 함께 내달려가던 해병 중위 칼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의 앞에는 생각한 것과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겁에 질려 달아나는 적과 ‘텅 빈 벌판’, 그가 생각한, 동방 원정군 지휘부가 그려보았을 그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수십 줄로 나뉜 채 벌판을 빽빽하게 메운 장대한 규모의 적이었다.

수도 없이 늘어선 보병들의 뒤로 대포가 가지런히 방열되어 있었고, 그 앞으로 기관포가 섬뜩한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다.

퇴각하는 적들은 그대로 잘 준비된 자기 부대의 진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는 뭐라고 외칠 틈도 갖지 못했다. 아군 병사들이 뒤에서 계속 밀고 들어오는 통에 그대로 앞으로 떠밀렸다.

그가 사정거리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상승군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그 가공할 포격에 해병들이 당황하며 흩어졌다.

산탄 세례가 쏟아지면서 선두 대열이 그대로 쓸려 나갔다. 운이 좋은 소수를 제외하고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동료들이 포격에 싹 날아간 것을 본 해병들로서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뒤에서는 아군 병사들이 사정도 모르고 밀고 내려오고 있어 후퇴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전진밖에 없었다.

왕립 해병대의 장교들은 그 사실을 깨닫기가 무섭게 ‘냉정’을 되찾고 병사들에게 현실에 맞는 명령을 내렸다.

“모두 돌격한다.”

그들이 돌격을 명령한 것은 멍청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지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봐야 밀집도만 높여 포병의 먹이가 될 뿐이다.

그럴 바에 전진해서 동료들이 운신할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아직 ‘도주’ 중인 적병들이 있었다. 그 뒤만 잘 따라붙는다면 적 보병의 화력을 상쇄하며 접근할 기회도 있었다. 그 의도는 분명 그른 것이 아니었다.

해병들은 장교들의 판단을 신뢰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장교들은 언제나 상황에 대처하는 적절한 명령을 내리곤 했다.

해병들은 군기를 든 채 그대로 앞으로 돌격했다. 충격적인 상황에 직면해 얼이 빠져 있던 프리지아 보병들과 왕국 육군 보병들도 해병의 움직임을 보고 ‘옳다구나’ 하고 뒤를 따랐다.

동방 원정군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한 순간 신의 지휘관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잘 훈련되어 ‘적절한’ 반응을 내놓은 결과 함정에 걸려든다는 사실이 어이없어서였다.

그들은 적의 전술과 심리를 통찰해 철저하게 파멸로 이끌 덫을 만든 오승도의 솜씨에 새삼 감탄했다.

검고 붉은 물결은 그대로 상승군의 전면까지 나아왔다. 해병들은 중앙으로 후퇴하고 있던 상승군과 단련 잔존 병사들의 뒤를 밟아 그리 피해가 없었지만, 나머지는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돌격을 하다 곳곳에서 ‘핑핑’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른 지뢰의 습격을 당하고 있었다.

“지뢰다!”

장교들이 당황하며 병사들의 전진을 막았다.

지뢰가 터질 때마다 돌격하고 있던 보병들의 대열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죽음의 병기가 자신들의 발밑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프리지아와 왕국 육군 보병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들의 전진이 둔해지자 자연히 중앙에서 지뢰가 없는 곳으로 돌격하고 있던 해병대가 홀로 돌출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상승군과 단련을 방패로 삼아 뒤를 따르고 있어 정면의 총격은 입지 않고 있었다.

그 덕에 피해 수준은 양면에서 함께 전진한 다른 부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았다.

이대로 전진한다면 충분히 상승군의 중앙에 쐐기를 박으면서 다른 부대들에도 반전의 여지를 줄 수 있었다.

해병들은 아군 병사들의 비극에 자신들이 해내야 할 몫이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진격 속도를 높였다.

그때 그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양면의 프리지아, 왕국 보병을 노렸어야 할 기관포들이 중앙으로 고개를 돌린 채 돌출한 해병을 향해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양익에서 전진해올 원정군 병력이 지뢰에 머뭇거린 탓에 기관포의 화력을 돌려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타타타타타.

무지막지한 포화가 양면에서 쏟아지자 상승군의 뒤를 따라 내달리던 해병들이 짚단처럼 픽픽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명이 널브러지는 통에 해병이라고 버틸 재간이 없었다.

기관포라는 신병기의 공격은 전열 전투라는 오래된 전통마저 무너트릴 만큼 끔찍한 것이었기에 ‘밀집 대형’은 그저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해병 장교들은 그 끔찍한 손실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상황은 그들이 의도한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앞에서 죽어나가며 공간을 만들어준 덕에 아래로 내려온 병사들은 다시 ‘포격’을 맞고 같은 판단을 한 탓이었다.

그 바람에 뒤로 물러서려던 움직임은 다시 내려오던 동료들의 물결에 가로막혀 방해받았다.

이렇게 되자 기관포는 전과를 올릴 기회를 잡았다. 긁어대는 대로 적병이 죽어나가니 그야말로 최적의 환경이었다.

기관포가 총성을 낼 때마다 수도 없는 병사들이 죽어 나자빠졌다.

“엄폐한다. 전우들의 시체로 총탄을 막는다.”

명예와 전통에 빛나는 정예 보병들이었지만 상황이 급해지자 가리는 것이 없어졌다.

병사들은 급한 대로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방패 삼아 무자비한 적의 총격을 줄이려 들었다.

하지만 포탄이 수시로 날아드는 통에 피해를 줄이기는 쉽지 않았다. 판 자체가 너무 불리하게 짜여 있었던 탓에 동방 원정군이 손실을 보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전방에서 병사들이 이렇게 무자비하게 죽어나가는 동안, 뒤에서는 상황도 모르고 병사들의 물결이 밀려 내려왔다. 그들은 둔덕 뒤의 상황을 전혀 몰랐다.

포성과 총성이 이어지니 적이 둔덕 뒤에서 그냥 ‘저항’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더더욱 빨리 둔덕을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이것은 끔찍한 악순환이었다.

시체가 쌓이지만 철수를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일부 장교들이 후방에 있는 지휘관들에게 상황을 알리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지휘관들의 시계를 둔덕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방 원정군으로서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위치에 적이 ‘가공할 방어선’을 구축했기에 벌어진 참사였다.

프리지아의 명장이라 불린 프리츠조차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전장 경험이 풍부한 그도 통상적인 방어선은 ‘둔덕’ 위에 설치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던 터라, 둔덕 아래에서 적이 막강한 방어선을 꾸렸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오스틴의 공격을 반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전투가 길어지고 포성과 총성이 끊이지 않자 원정군 지휘관들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도 전장 경험이 풍부한 자들이라 ‘적의 잔당’을 추격하는 전투가 이렇게 계속 이어질 이유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스틴 중장은 급히 후속으로 들어가려던 병사들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발란틴 중장은 휘하 장교들을 둔덕 너머로 보내 상황을 알아보게 했고, 프리츠는 기병에 재집결 명령을 내렸다.

나름대로 노련한 대응이었지만 피해는 이미 심각했다.

전투에 투입된 원정군 보병들은 벌써 사천이 넘는 사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원정군의 승리로 끝날 것처럼 보였던 교전은 다시 신의 우세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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