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397화 (397/425)

제397화. 진퇴유곡 (2)

동방 원정군은 준비를 마치기가 무섭게 함대를 출동시켰다. 적색 함대의 증기선들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차례로 아문을 벗어났다. 거대한 장갑함들이 먼저 수로를 벗어나자 범선들이 돛을 펴고 따라나섰다.

왕국 섬에 정박해 있던 범선들도 행렬에 합세했다.

함대의 규모는 실로 압도적이었다. 그들은 최강의 타격력을 자랑하는 장갑함 20척을 중핵으로 한 전투 함정 30여 척과 이들을 지원할 육군 연대 둘과 보급품을 실은 상선 50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함대는 그대로 신의 동남쪽 해안을 따라 움직였다. 이들 함대가 모습을 보이면서 해안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함대가 움직이는 모습 자체를 신으로부터 감추기 어렵다는 부분도 있었고, 상대를 기만하려는 의도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가공할 타격 집단의 움직임을 고의로 노출시킨 상태에서 신의 동남부 해안을 타격하여 함대의 움직임을 ‘강주 공격’을 위한 조공으로 위장하려 했다.

세부적인 부분에서 신중을 기한 나름의 묘수인 셈이다.

적색 함대의 그리섬 제독은 이를 위한 기만적인 작전을 준비해 펼치기로 했다.

그가 작전의 목표로 삼은 것은 대륙 동남부의 항구 도시 월해였다.

월해는 대 동영 무역을 담당해온 통상 항으로 그 규모는 강주의 십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작은 항구였다. 십 년에 한 번 꼴로 조공 무역을 주고받는 관행대로 운영되다 보니 규모가 커지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제국에서 몇 안 되는 해관이 위치한 곳이라 도시 자체의 방어는 제법 튼튼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도시의 북쪽과 남쪽에는 강력한 포대가 구축되어 있었고, 월해관 자체를 방어하는 이중의 성벽도 있었다. 도시의 방어력은 간단히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섬 제독은 이 점에 주목하고 이 도시를 기만 공격의 표적으로 선택했다. 지나치게 방어력이 강하지 않으면서도 적의 신경을 건드릴 만한 목표였기에 선택은 적절하다 할 수 있었다.

함대는 월해 앞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장갑함들을 선두에 내세웠다. 저항할 군함 자체가 없었기에 대결은 육상 포대와 함정들의 포격으로 좁혀졌다.

“발사!”

포격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갑함들이 포문을 개방했다. 강렬한 포성과 함께 수십 발의 포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육상을 향해 날아갔다.

콰앙. 콰앙.

땅에 떨어진 포탄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큼직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신의 병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몸을 피하기에 바빴다.

구식 대포로는 사거리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기에 타격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압도적인 포격이 가해지는 동안 그리섬 제독이 망원경을 들고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야만인들은 이렇게 때려줘야 정상인 것인데, 강주에선 우리가 너무 고전을 했어.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우리 해군이 제 실력을 낼 수 있는 전장이 아니었던 것이 고전의 이유입니다. 처음부터 강주는 우리에게 좋은 전장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아니지. 우리 장갑함들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장이니 말일세.”

제독은 떨어지는 포탄을 응시하며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떨어진 포탄들에 성벽이 연달아 허물어졌다. 구식 포대는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었고, 방어자의 역량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상황이 순조롭게 돌아가자 제독은 신호를 보내 장갑함들을 전진하게 했다.

적의 화력을 충분히 떨어트린 이상 적당히 포격을 받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공연히 시간을 두고 포격하는 것은 ‘자원 낭비’, ‘시간 낭비’였다.

제독의 지시에 따라 장갑함들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월해를 향해 다가섰다.

함정들이 천천히 도시로 다가오자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고 있던 포대에서 최초의 반격 탄이 나왔다. 적이 유효 사거리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장갑함의 시계를 방해할 수 있는 위치에서 새하얀 연기들이 연달아 피어올랐다. 그 연기들은 장갑함의 포격을 방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피운 것이 틀림없었다.

제독은 그런 적의 반격을 가소롭다는 듯 지켜보며 장갑함들을 그대로 전진하게 했다.

포탄이 장갑함의 주위로 거듭 물기둥을 일으켰지만, 거함들은 그 공격에 신경도 쓰지 않고 의연하게 항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제독은 이것으로 승부가 났다고 생각했다.

“쏴!”

창씨의 명령에 포대의 대포가 재차 불을 뿜었다. 강력한 5인치 거포가 사람 머리통보다 큰 포탄을 힘차게 쏘아냈다. 그 강철 구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대기를 가르며 적 함정들을 향해 나아갔다.

창씨는 그 포탄이 검게 칠해진 왕국 장갑함들에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곧 포탄이 좌익에 있던 장갑함 하나에 명중했다.

콰앙!

굉음과 동시에 장갑함이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외관상 피해는 없어 보였다. 묵직한 충격 에너지에 배가 흔들렸을 뿐, 피해가 없었던 것이다.

창씨는 입술을 깨물면서 다시 사격을 준비하게 했다. 그는 원래 강주 군관 학교에서 군관 양성 과정을 마치고 상승군에 배치된 첫 세대의 지휘관 중 한 사람으로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인재였다.

그런 그가 월해와 같은 곳에 머물게 된 것은 전란에서 고향을 지키고 싶다는 뜻에서 ‘이곳에 부임’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동기생들은 모두 강주 왕의 눈에 들기 좋은 강주에서 임무를 수행했지만, 그만은 고향에서 싸우기를 원했다.

물론 이 한적한 곳이 전장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전략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재능을 아꼈던 상관들은 강주로 갈 기회를 여러 번 제의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고향이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지 않아서였다.

그 덕분에 오늘 고향의 위험에 맞서 대포를 지휘하게 되었지만, 현실은 절망 그 이상이었다. 포탄은 양선에 무력하기 그지없었고, 적의 전력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런 강대한 적으로부터 고향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고향을 지키겠는가. 싸울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야겠지.’

창씨는 부하들이 포탄을 장전하자 힘껏 깃발을 흔들었다.

“쏴!”

콰앙!

5인치 대포가 다시 힘차게 불을 뿜었다. 이번 포탄은 아까보다 좀 작은 장갑함을 노렸다.

창씨가 노린 장갑함은 로망스에서 건조된 ‘벨라리온’이라는 함정이었다. 벨라리온은 시험적으로 건조된 로망스의 장갑함으로 공식 함 급에 포함이 되지 않은 배였다.

이 배는 연합왕국의 장갑함을 타격할 목적으로 ‘굉장한 거포’를 실었는데, 그 대포의 구경은 흑 태자의 것과 맞먹었다. 방패보다는 창에 집중한 군함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없진 않았는데, 이처럼 구경이 큰 대포를 실은 탓에 배의 밸런스가 좋지 않았다. 대포를 쏘면 그 반동으로 균형을 회복할 때까지 포격을 할 수 없는 것이 이 배의 최대 약점 중 하나였다.

포탄은 포물선을 그린 다음 벨라리온의 측면에 떨어졌다. 그것이 물기둥을 일으키자 벨라리온은 반사적으로 포격을 퍼부었다. 그 포격은 장갑함의 좁은 시계와 연막 때문에 포대에 못 미친 지점에 떨어졌다.

상대 장갑함이 포격을 하면서 크게 출렁인 것을 본 창씨는 다른 장갑함들과 달리 이 배가 공격할 만한 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이 상대를 집중 타격하도록 명령했다.

창씨의 명령이 내려지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벨라리온은 무수한 물기둥에 휩싸였다. 그들은 대량의 포격을 받자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배와 친숙한 사이의 병사들이라면 그런 경향이 덜했을지 모르지만, 이 벨라리온은 나포함이었다.

그 때문에 왕국 수병들은 벨라리온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다. 그 부족한 신뢰만큼 왕국 수병들은 조금 더 무리를 하게 되었다.

포격의 간격은 배가 견딜 수 있는 한계보다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조율해야 할 장교들은 수도 없이 쏟아지는 포탄에 시간관념을 잃어버려 병사들이 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바람에 배는 점차 복원력을 잃고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물기둥이 솟아난 반동으로 배가 기울어진다고 착각한 장교와 병사들은 10도 이상 배가 기울어질 때까지도 위험을 모르고 포격을 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포격이 나왔다.

콰앙!

벨라리온이 별안간 일제 포격을 하다 그대로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포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전복된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창씨와 병사들은 제국 만세를 외쳤다.

천하무적의 장갑함까지 잡아냈으니 못 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이 그들의 가슴속에 가득 찼다.

창씨는 이제야말로 자신이 고향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생각에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의 전공은 거기까지였다. 벨라리온을 잡는 동안 포대를 보호해주던 연막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고, 어느 시점에서 그들은 장갑함의 포격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을 가공할 장갑함 엘리자베스가 정확하게 노리고 있었다. 곧 무지막지한 함포 탄이 포대를 직격했다. 기쁨에 차서 다음 포격을 준비하던 병사들과 창씨는 그대로 폭발에 휘말렸다.

장갑함들은 동료 함을 어이없게 잃은 분풀이라도 하듯 포대 주변으로 쉬지 않고 포탄을 날렸다.

용맹하게 싸웠던 신의 포병들은 장갑함 격침이라는 전과만을 남기고 그대로 전원 산화했다.

***

그리섬 제독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상륙을 명령했다. 어처구니없게 별로 위협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신의 포대 따위에게 장갑함 하나를 잃은 제독의 심기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야만인들에게 철저히 분풀이라도 하지 않으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제독의 명령에 따라 상선들이 보트를 내렸다. 수백 척의 보트가 순식간에 만을 메우고 도시로 천천히 다가섰다.

포대가 무력화된 탓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저항할 능력도 없는 놈들이 장갑함을 잡을 줄이야.”

“뭔가 좋지 않은 징조인 거지.”

병사들은 노를 저으면서 이번 위해 진공에 불안을 드러냈다. 병참이 보장되지 않는 초장거리 공격인 만큼 세상 최강의 군대라 해도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상대가 발로 차면 쓰러질 것 같은 과거의 신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당장 이번 전투만 해도 압도적인 전력을 동원하고도 예상하지 못한 피해를 보았다.

이는 신의 실력을 우습게 볼 수 없다는 반증이나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해안에 도달하기가 무섭게 소총을 들고 허물어진 성벽을 향해 쇄도했다. 성벽은 장갑함들이 신나게 두드려 돌입할 구멍을 만들어둔 상태였기에 진입에 문제가 있진 않았다.

그들이 막 성벽으로 올라서려던 순간 성벽 위에서 검은 군복들이 쓱 모습을 드러내더니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이쪽과 대등한 후장식 소총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저항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성벽 앞으로 다가섰던 붉은 코트의 첫 열이 대번에 무너졌다.

왕국 병사들은 황급히 산개하며 적의 공격을 회피했다.

신호장교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포격의 재개를 요청했다.

보병만 놓고 보면 성벽의 이점을 가진 상승군 보병이 밀릴 게 없었다. 하지만 왕국 보병들은 장갑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차이가 양군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콰쾅!

포탄이 떨어지면서 성벽이 한순간에 폭삭 주저앉았다. 허물어진 성벽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통에 검은 군복들이 그대로 돌무더기에 깔려 즉사했다.

일부는 튄 돌덩이에 신체를 다치고 부상병 신세가 되었다. 성벽에 투입한 병력의 태반이 반신불수가 되자 제국군의 전열은 엉망이 되었다.

군관들이 수습하려 애를 썼지만 이 아비규환 속에 병력을 정비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붉은 코트들은 그럴 여유를 주려 하지 않았다.

방어 병력이 포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틈을 이용해 붉은 코트들이 착검을 하고 도시 안으로 밀려들었다. 흙먼지가 이는 통에 앞을 보고 있지 못하던 검은 군복들은 총검을 번뜩이며 다가온 적의 공격에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붉은 코트들은 그대로 적병들을 해치우며 도시 안으로 쭉 밀고 들어갔다. 상승군은 총검을 휘두르며 추격해오는 적을 피해 도시 곳곳으로 피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적으로부터 달아날 길은 없었다.

전투는 붉은 코트들이 성벽 안으로 진입한 순간에 결판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붉은 코트들은 어렵지 않게 도시의 남쪽 구획을 점령하고 월해관과 관청이 있는 도시 중앙부로 향했다. 전통적인 동방 도시의 기준에 따라 도시의 핵심 기능은 중앙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월해의 함락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감독 대인, 월해는 이제 실함입니다. 도시에서 군을 철수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대인. 우리는 할 만큼 했습니다. 강주 왕 전하께서도 우리의 노력을 이해해주실 겁니다.”

관리들은 뒷짐을 지고 서 있는 검은 관복의 사내에게 철수를 거듭 요청했다. 하지만 사내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어림없는 소리. 강주 왕 전하께서 내게 월해를 맡기시며 내리신 사명이 무엇이던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곳을 지키는 것이 그 역할이요.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만 물러가시오.”

사내는 냉정하게 그 요구를 잘랐다.

얼핏 보면 이상하게 보이는 이야기지만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내는 승도가 상인 출신들을 중용하면서 ‘관직’에 오른 강주 행상의 사람이었다.

그는 상인들이 사람들에게 보다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그만큼 나라를 위해 피 값을 보여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 관직에 나선 그의 어린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상인’이 이재를 우선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은 뒷전에 미룬다는 인식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이 자리에서 장렬하게 산화해서라도 아들의 장래를 열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할 만큼 했으니 달아나자는 관리들의 제의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관리들은 감독의 집무실에서 물러나며 혀를 찼다.

“상인 출신 주제에 무슨 충성의 도리를 다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지. 이러다 우리까지 다 죽겠소.”

“빌어먹을. 제 놈이 은혜를 받았으면 혼자 죽으면 그만이지 왜 철수를 막고 난리란 말이요.”

“하, 어쩔 수 없소. 감독을 팽개치고 달아났다간 우리까지 죽은 목숨이요. 할 수 있는 데까진 더 해봅시다.”

관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상승군 장교들과 다시 방어를 논의하기 위해 흩어졌다.

이들이 자신의 자리를 버리지 않고 싸우기로 마음먹은 것은 전쟁 개전 직전에 승도가 반포한 ‘의무 수행에 대한 규정’ 때문이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관리로서 임지를 멋대로 이탈하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삭탈관직 및 참수형을 내리게 되어 있었다.

걸핏하면 ‘불리하다’고 꽁무니를 빼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관리들의 습속을 고치기 위해 승도가 내린 지침이었다.

물론 이 규정에도 문제가 없진 않았다.

전쟁에서는 언제나 유연함이 요구되었는데, 이 규칙을 준수하려면 불리해도 함부로 후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승도 본인이나 흠차대신이 머무는 곳에서는 상부의 재가를 제때 받아 후퇴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흠차를 늘렸다간 필요 이상으로 전쟁 지휘부를 비대하게 만드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문제점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 규정이 있어 신의 관리들은 승도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도 최선을 다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관리들이 병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흩어지자 감독은 의관을 정제하고 준비한 비단 방석 위에 앉았다. 그는 그 옆에 칼을 한 자루 놓고 눈을 감았다.

총성이 조금씩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했다. 상승군이 밀린다는 보고를 받았던 터라 적이 관청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내는 달아나고 싶다는 유혹을 애써 참으며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직은 어린 아들의 빛나는 미래를 생각하면 죽음의 공포도 견딜 수 있었다.

‘아들아, 이 아비는 상인으로 태어났지만 제국의 관료로서 당당하게 죽겠다. 그러니 훌륭한 관리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곧 비명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더니 대청에서 발자국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잠시 후, 키 큰 양이 몇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들은 사내에게 총을 겨눈 채로 항복하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사내는 그런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대신 옆에 놓인 칼을 잡는 것으로 응수했다.

짧은 총성과 함께 사내의 손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월해는 그렇게 붉은 코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하지만 왕국인들은 이 월해 전투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주 전장이 아닌 곳에서조차 신의 군대와 관리들은 이전과 차원이 다른 저항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전쟁에 분명 좋지 않은 징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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