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0화. 진퇴유곡 (5)
승도는 역참을 따라 고속으로 대륙을 가로질렀다. 그러던 그에게 파발이 하나둘 들어왔다. 모두 역참을 따라 전파된 긴급 보고들이었다.
그는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북경과 강주 사이의 역참을 통해 ‘중요한 소식’들을 계속 가져오게 조처해 두었다. 장시간 소식을 접해두지 않으면 이동 중에 적절한 지시를 내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쟁 상황에서 그 같은 정보 공백은 심각한 위기를 부르게 마련이었다.
과거 그런 실수를 저질렀던 적이 있었던 승도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대륙을 종단하면서도 눈과 귀를 열어두었다.
그는 말을 타고 달려오느라 노곤해진 어깨와 다리를 주무르며 서신을 받아들었다.
대부분은 전쟁에 관련된 소식들로 그의 예측 범위 안에 있는 내용들이었다. 연합왕국 해군의 강남 공격과 제국의 탄약 운송 상황 등이 그랬다.
하지만 한 가지 소식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세 번째 서신을 올린 대상자는 그의 명령을 받고 상승군 여단들에 명령을 전하러 간 사자였다.
그 서신을 읽던 눈동자가 일순 커졌다.
‘17, 19여단을 강남으로 이동시킨 탓에 제시간에 이동시키기가 어렵다고? 양국번 대인이 큰 실수를 저질렀군. 이렇게 되면 당초 계획에 큰 차질이 빚어질 터인데.’
승도는 이 지연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북경에 2개 여단이 있고 없고는 방어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무엇으로 만회를 해야 하지? 만회할 방법이 있나.’
승도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만회할 방법은 없었다. 적을 지연시켜 시간을 벌지 않는 이상은 병력을 보충할 여유를 갖기 어려울 듯싶었다.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이 위험에 대응할 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위험이 생겼다면 즉시 대응할 한 수를 내야 했다. 전략가의 역량은 예기치 못한 변수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로 결판이 나게 마련이었다.
‘강주처럼 일이 수월하게 풀린다면 좋겠지만 이번에도 그러길 바라는 것은 요행이야.’
그는 입맛을 다셨다.
“강주?”
그러다 불현듯 자신이 내뱉은 말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그 안에 해답이 있었다.
강주에서 그는 연합왕국의 예봉을 꺾으며 한 가지 수를 냈다. 그 수는 지금도 이용할 여지가 있었다.
‘그래, 강주에서 썼던 방법을 한 번 더 사용하면 된다. 적이 북경을 치려면 선진에 상륙해야 한다. 그 항구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도록 아주 못쓰게 만든다면 양륙에 걸리는 시간은 배가 되게 된다.’
승도는 행상 소유의 상선들을 자침시켜 양륙의 효율을 없애려는 생각을 품었다. 보통 선박이 항구에서 양륙의 효율을 보려면 나루에 직접 접안을 해 물목을 내릴 때였다.
하지만 항구의 나루를 쓰지 못하면 문제는 심각해졌다. 모든 물자를 배에서 보트로, 보트에서 다시 해안으로 실어 내리는 이중의 수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작업에서 대포 한 문을 양륙하려면 그냥 접안해서 내리는 것의 열 배의 수고가 필요했다. 적에게 시간 손실을 줄 수 있는 좋은 한 수였다.
물론 적이 대포를 포기한다면 반나절 정도의 지연에 그치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해볼 만한 일이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수십만 냥의 재산이 아까워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수십만 냥의 돈으로 한나절의 시간을 사는 선택도 가능한 세계 제일의 거부였다.
‘항구의 기능을 마비시키면 적에게서 시간 혹은 화력을 원하는 만큼 줄일 수 있다. 추가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승도는 머릿속에서 계산을 해보고 몇 가지 방안을 더 생각했다.
그는 붓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역참의 관리를 불렀다.
곧 중후한 인상의 관리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관리는 조금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생에 한 번 볼 수도 없는 최고위 계급의 권력자를 앞에 두었으니, 일개 역참의 관리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로 빠른 파발마 편으로 북경에 사람을 보내고 싶습니다. 역참에 준비된 사람이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역참에는 조정의 명을 전하기 위한 전문 관원이 있었다. 이들은 평시에 하는 일 없이 기둥서방처럼 놀고먹는 것처럼 보였지만 수시로 조정의 명을 전하며 이 역참 저 역참을 전전했기에 매우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승도가 그 관원이 준비되었는지 묻자 관리가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예, 한 사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를 불러주세요.”
관리는 승도의 명을 받고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젊은이 하나를 불렀다. 사내는 승도의 앞에 서자 어떻게 예를 갖추어야 할지 몰라 일단 절부터 했다.
승도는 웃으며 그 어색한 절을 받고는 그에게 서신을 한 부 내주었다.
“그대에게 심부름을 시킬 것이 있습니다.”
“예, 명하신다면 바람처럼 달려가 일을 해내겠습니다.”
사내는 승도의 명에 씩씩하게 답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오승도란 인물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자였다. 어려서 유협으로 나고 자라 동네에서 칼싸움을 하며 지낸 그에게 ‘서역인’들을 쳐부수고 제국을 일대강국으로 우뚝 세운 이 거인은 인생의 표상과도 같았다.
사실 이 사내처럼 승도를 존경하는 자들은 상당히 많았다. 미천한 출신에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그를 ‘우상시’하는 자들도 있었고, 제국에 새로운 활력을 준 그의 정책 자체를 지지하는 자들도 있었다.
승도는 사내의 진지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을 내주었다.
“이 서신은 총리아문에 있는 총판장경 건문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총판장경 건문 대인께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서신은 나흘 안에 전해야 하니 중도에 다른 관원들과 반드시 교대를 해서 전달하도록 하세요.”
“예, 전하.”
“그럼 출발하도록 하세요.”
사내가 다시 절을 하고 방을 나서자 승도는 수염을 쓸었다.
그가 건문에게 지시한 것은 배를 침몰시키란 지시가 아니었다. 선진에는 지금 상선이 별로 없었다. 행상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선진에 있는 상선들을 그 동쪽의 작은 항구들로 대피시켜 두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시한 것은 그 상선들을 선진으로 모아 항구를 폐쇄할 준비를 하라는 점이었다.
동시에 몇 가지 조처도 추가하도록 했다.
해군이 보유한 잠수함의 기뢰들을 전부 계류 기뢰로 개조하여 선진에 설치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 첫째였다.
그로서는 아쉬우면서도 어쩔 수 없는 조처였다. 잠수함에 기뢰를 탑재하여 공격을 가하면 적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지연전이란 측면에서 계류 기뢰보다 효율성이 낮았다.
전과보다 시간 지연이 필요했던 그로서는 기뢰 개조 명령이 필수적이었다.
두 번째로 해안에 지뢰를 심도록 조처했다. 약간의 시간을 추가로 버는데 집중할 수밖에 없는 그로서는 ‘효율성’보다는 시간의 이익에 집중해야 했다.
세 번째로 일부 황족을 동원하게 했다.
승도는 정치적으로 적이 신의 내정을 흔들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감시 대상에 놓인 황족들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어 연합왕국과 접촉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왕국은 황족들과 사전 조율을 하느라 약간의 시간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 세 가지 조처라면 충분히 지연된 방어 병력이 도착할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승도는 자신했다.
하지만 그도 한 가지 오판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왕국이 ‘힌디아의 반란’으로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는 점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왕국이 반응을 보이지 않은 탓에 힌디아 반란이 기대보다 효과가 미미하다고 생각했다.
실상은 왕국이 ‘강화’를 생각할 만큼 심각한 위험을 맛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을 잘못하고 있었기에 왕국 측이 공세의 호흡을 매우 빠르게 가져갈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었다. 이 오판은 그의 ‘예상’을 근본부터 흔들 수 있는 위험한 요소였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승도는 그 같은 간극을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그는 조처를 마친 데에 만족하며 촛불을 훅 불어 끄고 잠을 청했다.
***
위해는 제국의 주요 군항 중 특별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전통적으로 제국 해군의 주력이 이곳에 주둔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제국이 해군의 주력을 주둔시켰던 것은 근본적으로 제국의 내해인 발해를 제어할 수 있는 요충인 탓이 컸다.
이곳에 해군이 배치되지 않을 때면 해적들이 수도 코앞까지 들어와 노략질을 했기에 제국 정부들은 국가가 파탄에 이른 상황에서도 위해에 해군을 두었다.
그것은 신에 들어와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신의 왕조가 부정부패로 썩어 문드러지는 상황에서도 위해의 해군은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패한 관료들도 이곳의 해군력을 건드리면 자신들의 안위가 위태롭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위해의 제국 해군은 제국이 쇠퇴의 일보를 걷는 중에도 비교적 건실한 전력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물론 이번 전쟁이 발발한 시점부터는 위해에 주둔해 있던 함정들은 모두 선진으로 옮겨가 있었다. 북경의 군사력이 대거 내려간 공백을 메우고 북경과 조정을 안심시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처였다.
하지만 그 선택 때문에 위해는 북상해온 왕국 적색 함대의 가공할 전력 앞에 헐벗은 몸으로 노출되었다.
“양적들의 함대입니다, 대인.”
“나도 보고 있네.”
위해의 방어를 책임진 방어사 장석도가 망원경을 내리며 말했다.
위해에는 두 개의 포대와 항구 내에 있는 열 척의 구식 정크가 있었다. 정크는 해군 수병들의 훈련을 위해 폐기하지 않고 남겨둔 배들이라 전술적으로 그리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장석도는 항구 방어에 포대만이 전력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표정이 좋지 않았다.
“보병들은 어찌 배치하면 좋겠습니까.”
“양선들이 산더미처럼 크고 강하니 성벽에 배치한다고 의미를 갖기는 어렵겠지. 포대로 올라가는 길에 배치하고 적에 대응하도록 하게.”
장석도는 지난 아편 전쟁에서 왕국 해군과 싸운 경험이 있었기에 해안의 성벽에 전진 방어를 한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당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 대인.”
군관이 명을 전달하기 위해 내려가는 것을 보며 장석도는 수염을 쓸었다.
‘이 장석도의 운명도 여기까지인가.’
그는 새카맣게 수평선을 뒤덮은 적 함대의 위용에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내다보았다.
적의 세는 강대했고 위해의 방어 병력은 한 줌이었다. 싸워 이기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마 이 싸움은 패전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하나 달아날 수는 없었다. 제국의 관료로서 자신의 임무를 방기한 자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비겁하지 않게 행동하며 자신의 이름을 지켜온 관리였다. 그랬기에 이 중요한 위해의 지휘관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었지만.
‘남은 것은 어떻게 전사하는가의 문제로구나. 좋다. 이곳이 내 무덤이라면 천하가 이 장석도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리라.’
그는 결심을 다지고 천천히 다가오는 거대한 양이들의 함대를 보았다.
장석도는 항구를 향해 나아오는 장갑함들을 응시하다 입술을 열었다.
“포문을 열어라!”
“포문을 열라신다.”
군관이 방어사의 명령을 복창했다.
그 명령에 따라 대포들의 입사각이 천천히 올라갔다. 대포들은 모두 연합왕국의 것으로 최근에 수입한 최신 장비들이었다. 왕국의 병기로 왕국의 군함을 공격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돈은 그런 우스운 일을 가능하게 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직후 군관들이 깃발을 흔들었다. 동시에 대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위해의 포대는 항구의 양쪽 측면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포대마다 배치된 대포의 수량은 각각 오십 문이었다.
일반적인 제국의 요새에 배치되는 신형 대포의 문수가 삼십 문 내외임을 감안하면 백 문은 엄청난 화력이었다.
이는 연합왕국도 무시하지 못할 규모였다. 통상 육상 포대의 대포는 해상의 대포에 비해 3배의 위력을 가진 것으로 간주했다. 해상과 달리 육상에서는 수면의 흔들림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성에서 해상 대포에 비교할 수 없는 우세를 자랑했기에 육상의 대포 백 문은 해상의 대포 삼백 문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포격이 시작되자 만으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물기둥이 연달아 솟구쳤다. 그 포격 속에 왕국 최강의 장갑함 두 척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내비치며 밀고 들어왔다.
두 거함은 비처럼 쏟아지는 포탄을 간단히 튕겨내며 방어자들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
“말도 안 돼. 포탄이 먹히지 않다니?”
아무리 장갑함이라고 해도 포탄이 쏟아지면 물러나는 시늉 정도는 해야 했다. 하지만 왕국 최강의 장갑함들은 그 위협을 우습다는 듯 무시했다.
포병들은 그 가공할 전력 차이에 얼어붙었다. 장석도도 그 경악할 방어력에 혀를 내둘렀다.
“철을 두른 장갑함이라 해도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 장갑함들이 포격을 맞는 것을 보고 있던 후속 함정들에서 로켓이 솟아올랐다. 왕립 해군은 전날의 교훈을 살려 장갑함들만 교전에 투입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화력을 일시에 투사하여 상대를 철저하게 박살내야 한다는 것이 왕국 해군이 정립한 새로운 교리였다.
하늘로 날아오른 로켓들은 그대로 포대 주변으로 떨어지며 폭음을 일으켰다. 그것들은 폭발하며 산탄을 흩뿌렸다. 기존의 백린 대신 산탄을 탄두로 하였기에 그 목적은 분명 달랐다.
로켓이 터질 때마다 포대 근처까지 쇠구슬이 날아왔다.
운이 나쁜 병사들은 그 구슬에 맞고 다치거나 전사했다.
그러다 로켓 몇 발이 비교적 정확하게 동쪽 포대를 직격했다. 장석도는 그것을 보고 군관에게 신호를 보내게 했지만 동쪽 포대에서 응답은 없었다. 산탄 공격에 태반이 죽거나 다치면서 신호를 보낼 여유도 없어진 것이다.
동쪽 포대는 무력화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쪽 포대가 무너지자 왕국 해군은 기세 좋게 항구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장갑함들은 양면에서 공격을 받지 않는 상태라고 확신하자 여유를 가지고 포격전을 벌였다.
포대 주변으로 떨어지는 포탄이 급속하게 늘면서 장석도는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포격을 중지하라.”
장석도의 명령에 군관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포격을 중지하다니요, 대인. 아직 저희는 싸울 수 있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하나 양적 함대는 이제 상대할 방법이 없어. 적 해군은 이제 공격해도 의미를 가질 수 없으니 다른 표적을 치잔 걸세.”
“다른 표적이라 하심은.”
“죽일 수 있는 적을 죽여야 우리 길동무로 삼을 수 있지 않겠나.”
장석도가 굳은 얼굴로 말하자 군관은 그 말을 비장하게 받아들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장석도는 군관이 포대에 사격 중지를 명령하는 것을 보며 망원경을 들었다. 적 함대는 포대가 거의 무력화가 되어가는 것을 알았는지 슬슬 종선을 내리기 시작했다.
장석도는 군관 하나를 시켜 보병들을 단단히 준비하게 했다. 적이 상륙해서 포대를 정리하러 오는 시점에서 마지막 싸움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적 함정들이 ‘포대 정리’를 마치고 육군을 투입하는 시점을 침착하게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포대의 저항이 완전히 끝났다고 판단한 장갑함들이 만의 좌우로 비켜섰다. 그 자리로 수도 없이 많은 보트들이 밀고 들어왔다. 보트에는 붉은 코트들이 즐비하게 타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수천은 되어 보였다.
그들은 해안에 닿기가 무섭게 능숙하게 육지로 뛰어올랐다. 미리 계획이라도 한 듯 관청과 도시의 포대를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 각 부대별로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이 그가 기다린 순간이었다.
겨우 살아남았던 세 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그 포격에 포대를 접수하러 올라오던 붉은 코트 수십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장석도는 적이 일시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장검을 뽑아들고 외쳤다.
“대신제국 만세! 돌격!”
방어사의 돌격 명령과 동시에 검은 군복들이 함성을 지르며 적병들을 향해 쇄도했다.
갑작스런 포격에 이어 검은 군복들이 밀려들자 붉은 코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밀렸다. 해군도 피아가 뒤섞인 상황에서 포격을 하지 못했다.
장석도의 병사들은 그 호기를 이용해 적병들을 닥치는 대로 베고 쏘며 밀어붙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명의 붉은 코트가 죽거나 다쳤다. 장석도의 병사들은 그대로 적병들 사이를 파고들며 전과를 확대하려 했다.
뜻하지 않은 적의 반격에 당황한 왕국 해군은 잠시나마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이내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약간의 오발을 감수하고 최대한 신의 병사들이 모인 쪽으로 포격을 퍼부었다.
무자비한 포격에 검은 군복들이 무더기로 쓸려나갔다. 장석도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방어사는 적의 포탄에 몸의 반절이 날아갔다. 그는 세상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바닥을 굴렀다.
장석도는 그 상태에서 점차 늘어나는 적병들에 둘러싸여 악전고투를 하는 병사들을 보았다. 병사들은 고전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신의 깃발을 놓지 않았다.
이만하면 적에게 충분히 의기를 보였다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따라 목숨을 바치는 부하들의 모습을 담은 채 눈을 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