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6화. 교두보 (3)
왕국 보병들이 파도처럼 밀려 올라왔다. 제국군은 공격을 막아낼 능력이 거의 없었다. 기세란 것이 한 번 넘어가면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 전장이었다. 흐름을 바꿀 반전의 수가 없다면.
생존자들은 총검을 휘두르며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동료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중에도 용케 숨이 붙어 있었지만 그 운이 어디까지 갈 지는 몰랐다.
그때 나팔 소리가 울렸다.
살아남은 제국 병사들은 그대로 적에게 등을 보이고 달리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패주의 모습이었다.
제국 병사들이 등을 보이고 달아나자 붉은 코트들도 기세가 올랐다. 위트 소령은 칼을 뽑아들고 추격을 명령했다. 붉은 코트들은 그대로 총검을 쥐고 적의 뒤를 밟았다.
조금이라도 뒤처지는 제국 병사들은 날카로운 총검에 맞아 비명을 질렀다. 일부 붉은 코트 장교들은 승리를 확신한 나머지 병사 몇몇에게 연대기를 가져오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
승리의 순간에 연대기를 적진에 꽂는 것만큼 기분이 좋은 일도 없었다.
그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남은 적 보병을 쓸어버리면 적 포대의 함락은 식은 수프 핥기보다 쉬웠다.
“여왕 폐하의 위대함을 야만인들에게 보이는 영광은 우리가 차지한다. 포대까지 계속 전진한다!”
장교들은 병사들을 독려했다.
붉은 코트들은 그 독려를 받으며 그대로 능선을 따라 올라가려 했다. 적 포병이 포격을 가할 위험도 없었기에 걱정할 것은 전혀 없었다.
“부대를 계속 전진시켜도 되는 것입니까? 혹 지뢰를 추가로 매설해 두었다면.”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이대로 밀어붙이면 되는 거야.”
위트 소령은 부관의 걱정을 부정했다. 그는 승리가 확정되었다고 믿었다.
붉은 코트들은 달아나는 적의 뒤를 추격하여 능선의 절반을 넘어섰다. 여기저기 지뢰가 남아 있어 발목이 조금 잡히긴 했지만 달아나는 적을 잡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거리가 벌어지면 사격을 하고 가까워지면 총검을 휘둘렀다. 도망치는 적의 수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선두에 선 붉은 코트들은 남은 적을 향해 부지런히 총격을 가하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슬쩍 모습을 보인 구릉의 고지대를 보았다. 그곳에는 오래된 성곽과 신의 깃발이 있었다.
그들의 진정한 목표인 다고 포대였다. 포대 주변에는 장갑함이 쏜 것으로 여겨지는 포연이 자욱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해군이 하지 못한 일을 우리가 해내는 건가.’
병사들은 그 생각을 하니 자신감이 더욱 올랐다. 강력한 장갑함도 무너트리지 못하는 제국의 요새를 굴복시킨다는 자신감이 그들의 어깨에 힘을 실어 주었다.
“여왕 폐하 만세!”
함성 소리와 함께 군화의 속도가 빨라졌다.
병사들은 적 보병들이 서 있던 잡목 숲을 넘어 포대로 향하는 마지막 비탈길을 올랐다.
적의 저항은 이제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적이 좀 더 버틸 수 있었음에도 간단히 후퇴했다는 사실을.
그때 바위 사이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 소리는 너무 작아서 병사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 소리는 몹시 불길하게 들렸다. 붉은 코트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대로 적병들의 뒤를 추격하는 데 전념했다.
다음 순간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없는 굉음이 터졌다.
꽈앙!
폭발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그 주변을 달리던 병사들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폭발의 에너지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자갈이 사방으로 튀었는데 거기에 맞아 다치거나 죽은 병사도 여럿이었다.
거센 폭풍이 휩쓴 자리는 순식간에 공터로 변했다. 붉은 코트들의 선두가 일시에 증발하는 바람에 공격의 호흡이 뚝 끊어졌다.
“하느님 맙소사.”
폭발을 일으킨 폭발물은 기뢰였다.
이 기뢰는 해상에서 쓰는 물건이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무기의 용도는 사용하는 자에 의해 얼마든지 다용도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문에서 기뢰를 보루 철거에 이용한 제국군은 이번에는 ‘적의 공격’을 늦추는 용도로 준비하였다.
그 폭발력으로 보병을 살상하는 용도로 준비한 판단은 주효했다. 해상에서 군함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기뢰의 폭발력 앞에 연약한 피륙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은 견디지 못했다.
위트 소령은 이 무지막지한 손실에 얼이 나가 공격을 정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병사의 손실도 손실이었지만 장교들도 떼로 죽어 나갔고 사기도 완전히 꺾였다.
이 갑작스런 폭발을 보고 혼이 나간 병사들을 계속해서 전투에 투입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었다.
지원 요청은 불가피했다. 남은 전력으로는 포대까지 밀고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잘 준비된 방어선을 기만을 통해 돌파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입은 손실은 적지 않았다.
여세를 몰아 적을 추격했다면 돌파가 성공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적은 재정비를 마치고 다시 방어 태세를 다진 상태였다.
애초 작전에 돌입하면서 원정군이 동원한 지상 병력은 모두 일개 연대였다. 그나마 석탄을 수송하고 할 일이 없게 된 상선의 선원들에게 총을 지워주고 위해의 방어를 맡긴 덕에 가용이 가능한 규모였다.
위트는 연락 장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지원이 없다면 포대 공격을 재개할 수 없을 거라고 못을 박았다. 육군 지휘관들은 그 보고를 듣고 화를 냈지만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원정군 지휘관들은 어쩔 수 없이 급하게 각 함정에서 수병들을 차출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지상전 훈련이 되지 않긴 했지만 수병들을 동원해서 머릿수라도 채우고 봐야 했다.
“각 전열함에서 이백 명씩 차출한다. 상선에서도 전투 경험이 있는 자들은 모두 차출한다.”
급한 대로 전열함과 상선에서 사람을 동원하자 한 개 연대 규모의 수병 연대가 급하게 편성되었다. 해군은 이렇게 확보한 병력을 급히 뭍으로 올려 보내 육군 측에 제공했다.
이 수병 병력은 사실 동원하는 것 자체가 손해였다. 해군의 운용 역량을 크게 깎아먹는 데다 전투 효율이 좋지 않은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른 병력을 수급할 시간이 없으니 별수 없었다. 원정군 본대를 기다리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일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모된 시간은 적지 않았다. 병력의 편성과 재 양륙, 증원까지 두 시간을 잡아먹었다. 시간이 귀한 원정군으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그들은 재편을 마치기가 무섭게 이차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철저하게 준비를 갖추었다. 혹시나 적이 또 폭발물을 사용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돌격 상황에서도 병력의 밀집 정도를 조절하기로 했고, 공격에 앞서 능선 주변으로 해군의 포격도 지원하기로 했다.
포격의 효과는 없겠지만 적의 시선을 끄는 정도는 기대가 가능하리라 여겨졌다.
만반의 준비가 끝나자 원정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시작은 해군 장갑함들의 포격이었다. 능선 주변으로 포탄이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지금까지 포대의 시선을 끌기 위해 공격을 가하던 함정들이 능선 주변에 포격을 가하자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그 포격 때문에 방어선 상의 방어 병력들의 주의가 상당히 분산되었다. 이를 이용해 붉은 코트들은 비교적 피해를 덜 입고 적진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바람도 그들을 도왔다.
장갑함이 일으킨 포연이 바람을 타고 날아오면서 시계를 가려주었기 때문이다.
그 효과 덕에 붉은 코트들은 손쉽게 근접전을 시작할 수 있었고 이번에도 적을 간단히 밀어붙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신’을 내지 않고 병력을 최대한 분산한 채로 효율이 낮은 추격을 이어갔다.
이번에도 적이 폭발물을 사용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신은 그 덕분에 피해를 경감시키며 능선을 따라 후퇴를 이어갔다. 하지만 후퇴는 후퇴였다. 원정군은 전과를 착실히 쌓으며 능선을 올랐다. 이제 포대는 그들의 코앞에 있었다.
***
구릉 위에서 망원경을 들고 능선을 바라보던 장교가 말했다.
“전하, 원정군이 방어선을 돌파했습니다. 이제 곧 이곳 포대까지 치고 올라올 겁니다.”
승도는 그 말을 듣고 뒷짐을 졌다.
“예상한 일이긴 하지만 너무 빠른 게 걸리는군요.”
“전령을 보내 단련을 준비하라고 전할까요?”
“아닙니다. 여긴 이미 틀렸습니다. 사전에 준비를 해두었다면 몰라도 고지를 뺏긴 입장에서 불러봐야 의미를 갖긴 어렵겠지요. 말을 가져오세요.”
“예, 전하.”
승도는 포대의 포기를 결정했다. 적은 수병을 동원하면서까지 포대 공격을 강행하고 있었다. 이런 판에 보병이 더 버텨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시간만 맞았다면 좀 더 방어 병력을 투입해 시간을 더 벌어보았을 것인데. 승도는 그 부분에 못내 아쉬움을 가졌다. 이런 간극이 생긴 이유는 그가 계획한 병력의 동원 시점보다 적이 훨씬 이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적이 이렇게까지 빨리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전략적으로 위해에서 후속 제대를 기다렸다가 함께 공격에 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생각하고 좁은 전장에 맞는 상승군의 동원만을 준비했던 것인데 의표를 찔리고 말았다. 전쟁이 강주에서 생각한 대로 흘러갔다면 이렇게 될 이유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 부분은 이상해. 적은 이상할 정도로 움직임을 빠르게 가져가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움직인다면 안정적인 승리를 얻는 것은 불가능해. 병력의 손실을 지양하며 확실한 승리를 따내야 하는 원정군이 이 같은 전략을 취할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그는 강주에서 왕국 쪽이 보였던 고압적인 태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시간상으로 힌디아 문제가 불거졌다면 반응을 보일 시점이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힌디아의 반란은 분명 아니었다. 그 이후에 알려졌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랬다면 원정군은 신과 강화를 하건 군대를 철수하건 상식적인 판단을 보여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걸로 보았을 때 힌디아의 문제는 그다지 크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럼 도대체 저들이 저렇게 바쁘게 공격의 흐름을 잡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쪽의 병력 집결에 대한 소식을 눈치챈 것일까.
승도는 그 가능성을 생각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가능성이 없진 않군.’
그는 이 가능성에 주목했다. 제국 내에는 아편 상인들이 제법 있었다. 그들은 군대의 이동 정보에 대해 제법 밝았다. 군대와 연결이 되는 창녀들이 아편굴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입을 빌리면 단편적인 군사 정보를 모으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전체 윤곽은 몰라도 일부 정도를 알아내는 것은 무리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저들이 서두르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지. 아군이 병력을 북경에 모은다면 승산을 생각할 수는 없을 테니. 그럼 우리도 저들도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셈인가.’
그 점에서 양쪽은 동등한 페널티를 안고 있는 셈이었다.
한쪽은 시간을 벌어야 하고, 한쪽은 시간을 덜 소모해야 했다. 그 경쟁의 과정에서 보자면 저들이 희생을 감수하며 선발대를 먼저 움직인 것도 이해가 갔다.
‘문제는 우리가 한 수를 밟혔단 건데. 선진에서 기껏 상선을 침몰시켜가며 번 시간이 의미를 잃을 것 같아. 이 시간을 어디에서 만회해야 할까.’
해군이 전력을 온존하며 시간을 벌어주고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좀 더 시간을 벌 방법이 필요했다.
‘일단 처음에 생각한 것처럼 먹히든 안 먹히든 황족을 내세워서 시간을 버는 수를 던져보아야 하나.’
승도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장교가 말을 가지고 왔다.
그는 그 위로 뛰어오르려다 균형을 잡지 못했다. 며칠 무리를 했는지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 그가 볼썽사납게 미끄러질 찰나에 장교가 급히 손을 내밀어 균형을 잡아주었다.
승도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고삐를 잡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그는 애써 손을 들어 자신이 괜찮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며 철수를 시작하라고 말했다.
최고 지휘관의 재가가 떨어지자 포병들은 사전에 준비한 대로 물자의 파기에 들어갔다.
승도는 그 모습을 확인하며 말 머리를 돌렸다. 생각한 것보다 적이 빨리 도착하여 그 의도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아직 그에게는 몇 가지 패가 남아 있었다.
승부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붉은 코트들이 포대 위에 올라 깃발을 흔들었다. 그리섬 제독은 그 신호를 보고 주먹을 쥐었다.
“해냈군.”
그는 만족스런 얼굴을 보였다. 희생도 크고 지연도 있었지만 이 정도 손실이면 감수할 수준이었다.
바로 선진을 접수해 후속 부대를 위해 준비를 갖춘다면 원정군의 작전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그는 망원경을 내리고 부관에게 물었다.
“작전 시간은 얼마나 넘어간 건가?”
“한 시간 정도 초과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 손실은 후속 부대의 작전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할 겁니다. 단지 적 해군의 탈출 문제 때문에 시간이 다소 지연되는 부분이 우려스럽습니다.”
부관의 지적에 제독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 해적 놈들이 남아 있었군.”
“그렇습니다.”
그리섬은 신의 해군을 해적이라 칭했다. 해적이라 칭한 것은 왕국의 장갑함을 강탈한 도적질에 대한 그 나름의 ‘분풀이’가 섞인 호칭이었다.
“그럼, 곧바로 선진에 입항해서 석탄을 옮겨 싣는 작업부터 진행하도록 하지.”
제독이 시원스레 작전 지시를 내리자 부관이 신호사관을 불렀다.
곧, 제독의 명령에 따라 수병들이 보트를 하고 항구로 접근했다. 장갑함부터 접근을 하지 않는 것은 적이 기뢰를 설치했을 가능성을 생각해서였다.
수병들은 장대를 들고 물속을 능숙하게 쑤셨다.
해군 장교들은 그 작업을 지켜보며 팔짱을 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항구 쪽에서 첫 폭발음이 들렸다. 동시에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쳤다.
그것을 보고 해군 장교 하나가 이죽거렸다.
“멍청한 야만인들. 우리가 두 번 당할 줄 알고 준비를 한 모양이군. 어리석은 것들이야.”
그들은 보트가 항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함을 움직였다. 예열을 한 상태로 기다리고 있던 장갑함들이라 어렵지 않게 보트의 뒤를 따를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남은 석탄을 일부 장갑함에 ‘몰아주기’ 위해 바로 부두에 접안을 할 시간만을 기다렸다.
보트들은 그런 따가운 시선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작업을 서둘렀다.
“거기, 장대로 쑤셔.”
보트를 타고 들어가던 준사관이 크게 외쳤다.
수병은 그 말을 듣고 장대를 푹 쑤셨다. 동시에 물기둥이 하나 더 솟구쳤다. 보트는 기뢰를 차례로 제거하며 수로를 열었다.
그들은 뒤를 따르는 장갑함들을 위해 속도를 높이며 부두 쪽으로 다가갔다.
준사관은 노련하게 기뢰가 있을 만한 위치를 골라내며 부두 쪽으로 다가갔다.
수병들은 온갖 부유물로 수면 아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용케 기뢰를 찾아내는 준사관의 재주에 감탄했다.
선진의 항구 안은 수심 삼십 센티미터 아래도 보기 어려웠다. 그 안의 물은 신이 고의로 방출한 생선 기름과 돼지기름, 각종 동물의 배설물, 인분 등으로 더럽혀져 시계가 탁했다.
수병들은 야만인들의 추잡한 수법에 치를 떨면서 노를 저었다. 준사관은 그런 통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다음 표적을 찾아 움직였다.
“이번엔 저기로 가지.”
준사관의 지시에 수병이 장대를 푹 쑤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폭발음이 들리지 않았다. 준사관은 자신이 잘못 생각했나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수병이 말했다.
“여긴 수심이 낮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물 밑에 뭐가 걸리는 것 있습니다.”
“불발탄인가? 이리 줘보게.”
준사관은 장대를 넘겨받아 해저를 더듬었다. 그는 몇 번 바닥을 더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의 항구라면 이곳은 배가 가장 많이 다닐 위치였다. 당연히 수심이 얕아도 준설을 해서 파내야 할 곳이었다.
그런 곳이 이상스레 수심이 얕았다.
그는 바닥을 몇 번 장대로 더 더듬다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해저는 수도 없는 배들이 깔려 부두로 접근하는 길을 막고 있었다.
준사관은 당황한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장대를 놓았다.
“왜 그러십니까?”
“놈들이 배를 자침시켜서 수심을 얕게 만들었다.”
그의 경악스런 말에 수병들의 눈도 커졌다. 장갑함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보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대로 더 들어오다간 바닥에 걸려 옴짝달싹도 못 할지 몰랐다.
그들은 적이 만든 이 보이지 않는 덫에 치를 떨며 정지를 알리는 깃발을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