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8화. 해전 (2)
전열함 로드니의 함장 마일러는 인맥과 연줄 없이 실력 하나만으로 출세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역량은 함대 내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오죽하면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경쟁자들조차 그의 실력에 대해서는 악평을 내놓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함대에서 제독들이 믿을 만한 함장에게 맡기는 전열의 선두 자리는 언제나 마일러에게 돌아가곤 했다. 마일러도 그 기대에 부응하여 언제나 그 몫을 다하곤 했다.
이날도 함대의 지휘관은 마일러에게 적과 조우할 가능성이 높은 단함 경계 임무를 내렸다. 전열을 이루어야 제 전투력을 십분 발휘하는 전열함이 단함 작전을 할 때는 그만큼 함장의 실력이 중요했다.
마일러는 그 명령에 따라 함대 전열에서 다소 떨어진 위치에 서서 아군 프리깃들과 신호를 주고받으며 위협을 알리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는 ‘실력이 있는’ 인간들이 대개 그렇듯 부하들에게 깐깐했다. 약간이라도 근무 형태에 어긋난 상황을 발견하면 부하들에게 기합과 체벌을 가했기에 수병들은 언제나 초긴장 상태에서 근무를 했다.
그의 함정 근처에 적함이 나타난다면 놓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마일러는 자신의 방에서 책을 한 권 읽고 난 다음, 혹시 부하들이 태만하게 경계를 하고 있는지 살피기 위해 등도 들지 않고 조용히 선실 밖으로 나왔다. 갑판은 새벽의 조용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병사들은 긴장 속에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다. 장루에 선 장루원들은 졸 법한 상황임에도 먼동이 터 오르는 먼 바다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머지 당직 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품을 하면서도 돛 주변에 쭉 늘어선 채로 구경하고 있었다.
마일러는 부하들의 근무 상황을 둘러보고 그 태도에 만족하며 자신의 선실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 정도 긴장을 유지한다면 실수할 일은 없어 보였다.
그가 막 선실로 돌아서려는데 장루 위에 있던 장루원이 고개를 드는 것이 보였다.
뭔가를 발견했는가 싶어 마일러도 그 시선을 따라 수평선을 훑었다. 태양이 떠오르는 동녘 바다를 쭉 따라가던 그의 시선은 이내 흐릿한 실루엣 몇 개를 확인했다.
‘저건.’
그 실루엣들은 검은 연기를 천천히 흘려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증기선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이곳에 증기 기관을 가진 배는 딱 두 종류밖에 없었다. 기범선과 장갑함이다.
불행하게도 아군 쪽에서 기동이 가능한 장갑함들은 모두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 말은 그들이 나타나더라도 동쪽이 아닌 남쪽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이다!”
장루원의 외침이 그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함장은 그제야 방관자처럼 구경을 하던 태도를 버리고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봐, 거기.”
“아, 함장님.”
뒤늦게 소리도 없이 마스트 뒤에 서 있던 함장을 발견한 당직 사관이 놀란 얼굴을 했다.
“지금 당장 비번인 병사들을 모두 깨우게. 전원 전투 배치다.”
“알겠습니다.”
마일러는 수병을 몇 더 불러 아래 갑판으로 내려 보냈다. 지금은 가장 피곤할 시간이라 해먹을 걸고 잠을 청하는 병사가 전체 인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을 일시에 다 깨우려면 한두 사람의 손으로는 부족했다.
마일러는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신호사관을 찾았다. 다행히 신호사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갑판으로 얼굴을 비쳤다.
마일러는 그에게 당장 프리깃 쪽으로 신호를 보내라고 명령했다. 함대 전체에 적의 접근을 알려야 했다.
신호사관이 신호를 준비하는 동안 마일러는 망원경을 들고 다가오는 적 함대의 움직임을 살폈다. 적은 이쪽을 정면으로 가로질러 돌파할 작정인지 일자 진형을 짠 채로 전진해오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멍청하다’고 비웃었겠지만 선두에 선 것이 장갑함이다 보니 비웃을 처지가 아니었다. 장갑함이 포격을 맞아주며 이쪽 함열을 가로지르면 역으로 학살당하는 쪽은 이쪽 함정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적과 수평 방향을 유지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돛을 내리고 있는 아군 함정들이 동력을 회복하도록 공격을 알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마일러는 적의 대담한 진형을 보면서 속속 갑판에 올라온 병사들과 준사관들에게 당장 돛을 펼치라고 명령했다. 일단 적과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전열함으로 승산이 없었다.
‘맙소사, 염병할 괴물이 선두였나.’
전열함이 돛을 펴는 동안 장갑함의 실루엣이 보다 분명해졌다. 배의 크기는 끔찍할 만큼 컸다. 적색 함대 최강의 장갑함으로 존재하는 두 척의 군함과 동등한 크기인 듯싶었다.
아마 ‘나포되었다’고 알려진 흑 태자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마일러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함의 존재에 압박감을 맛보았다. 곧 적함으로부터 최초의 포탄이 날아왔다. 첫 포탄은 거리를 가늠하려는 목적에서인지 전열함의 한참 앞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다음부터 포격이 제대로 시작될 거란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일러의 독려에 병사들은 날렵하게 돛을 펴는 작업을 마쳤다. 돛이 활짝 펴지자 전열함이 부드럽게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 전열함은 기본적으로 장갑함에 비해 속도가 썩 빠르지 못했다. 무거운 목재 함정을 움직이기에 바람의 동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왕립 해군의 뛰어난 조함술과 신의 미숙한 조함 능력 차이를 감안하면 속도만 비슷하게 장갑함을 따돌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충분한 속도가 나올 때까지만 견디면 걱정할 것은 없었다.
콰앙!
두 번째 포탄이 날아와 물기둥을 일으켰다. 이번 포탄은 거리를 제법 가늠하고 쏜 것이라 전열함에서 제법 가까운 위치에 떨어졌다.
마일러는 그 위치를 가늠하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함이 속도를 내기 전에 거리가 더 좁혀지면 명중탄을 맞을 가능성이 있었다.
“우현 전타! 현재 항로를 포기한다!”
마일러는 재빠르게 침로를 바꾸기로 했다. 함열에 속해 있었다면 제독의 지시 없이 함대 진형을 포기할 수 없는 전열함이지만, 단함 행동을 할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잠시 후, 배는 급격하게 키를 꺾어 배를 우측으로 꺾었다. 급격한 반전에 배가 옆으로 기울었다. 그 반전에 이쪽을 약간 비스듬한 방향으로 빗겨 들어오며 뒤를 잡으려던 적 장갑함이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침로를 능숙하게 바꾸지 못하고 뒤를 추격해오지 못한 것이다. 정교한 조함이 필요한 장갑함이었지만 배의 선원들이 숙련도가 낮아 그 같은 기술을 발휘하지 못했다.
덕분에 마일러는 적 장갑함과의 거리를 벌리면서 그대로 아군 전열함의 함열까지 물러설 수 있었다.
그가 함열에 다가오자 이미 상황을 보고받았는지 제독의 신호기가 올랐다.
마일러는 망원경을 들고 그 신호를 떠듬거리며 읽었다. 기본적으로 해군의 고위 장교들은 약 400개의 약속된 단어를 상징하는 신호기를 모두 외워야 했다.
이 신호를 암기하지 못하면 함장 승진에 통과할 수 없어 고급 장교들에겐 상식 중의 상식에 속했다.
그는 신호를 해독하고는 함대의 함열에 끼도록 말했다.
로드니가 함열에 합류하자 제독은 그대로 함대를 채찍 모양으로 돌려 아군 장갑함들이 정박해 있는 해안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일러는 그 함대 기동에 다소 불안을 느끼면서도 제독의 판단을 존중했다. 원칙적으로 왕립 해군에서 제독의 명령을 거스를 수 있는 함장은 없었다.
예외가 ‘정당한 사유’를 가지고 그 명령을 거절하는 것인데, 그런 전례가 해군성에서 인정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마디로 제독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하는 게 왕립 해군의 룰이었다.
마일러는 함대에 종속된 채 기함의 뒤를 밟는 기동을 지켜보다 다시 시선을 적 쪽으로 돌렸다. 적은 분명 ‘기습’을 해왔다.
아군 함대를 기습할 목적으로 해군이 가장 기습하기 좋다는 새벽 시간대를 골라 공격해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군에 발견 당했고, 그 의도는 완전히 무너졌다.
이 정도면 알아서 후퇴해야 정상이었다. 탐색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쪽과 적의 전력 차이가 압도적이라는 것은 저들도 모를 턱이 없었다.
‘하지만 놈들은 우리 뒤를 추격해오고 있어.’
마일러는 여전히 수평선 저쪽에서 꾸준히 거리를 좁혀오는 적 함정들의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을 자신감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아군 함대의 약점을 간파한 대담한 도전으로 보아야 할지 몰랐다.
‘확실한 건 상당히 힘든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거다.’
마일러는 입술을 깨문 채로 망원경을 내렸다. 이제 그가 바랄 일은 적이 아군 장갑함의 위용을 확인하고 중도에 물러나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
로망스 출신의 모험적인 선원 르망은 제국 해군에서 벼락출세한 인물이었다. 로망스에서 일할 당시만 해도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던 인생을 살던 남자였지만, 이곳 신에 도착해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제 재능을 한껏 펼쳤다.
바로 왕립 해군이 자랑하는 ‘최강의 장갑함’을 상선을 가지고 나포하는 위업을 달성했던 것이다.
그 공적은 제국 해군에서 제일가는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공으로 르망은 작위와 보직, 포상금을 얻었다. 한마디로 인생이 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포상보다 자신의 인생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던 연합왕국에 엿을 먹였다는 사실을 더 흡족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한 번 왕립 해군에 엿을 먹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자 그는 자청해서 선봉에 서기로 했다.
조국인 로망스가 당한 것까지 곱절로 갚아주기로 작심한 터라 그의 투지는 제국 해군에서도 남다른 바가 있었다.
“적 함대 후퇴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해안 쪽으로 철수해 정박한 함정들과 합류할 생각인 듯합니다.”
“그건 예상한 일이지. 수평선 쪽 장갑함들은?”
그가 묻자 선임 위관이 조심스레 답했다.
“아직 예열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쪽 접근이 한참 전에 알려졌을 텐데 예열을 하지 않는다?”
“예, 각하. 이 점을 고려하면 적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문제가 있다. 적에게.”
르망은 부장의 말을 곱씹으며 턱을 매만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해보다 입을 열었다.
“신호를 보내세. 적이 아직 반응이 없으니 공격을 강행하자고 건의하지.”
“알겠습니다.”
선임 위관이 함대에 보고를 올리는 동안 르망은 망원경을 들었다. 슬슬 분명해지는 적 장갑함들의 실루엣 위로 정말 연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르망은 씩 웃고 망원경을 내렸다.
르망의 보고는 이내 클레망소에게도 전해졌다. 제독은 그 보고에 함대 전체의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지금과 같은 시점에 적 함대에 대 타격을 가한다면 전략적으로 신이 가져갈 이익은 매우 컸다.
지연 정도가 아니라 승도가 바라는 ‘전쟁의 승리’를 해전으로 얻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적색 함대를 무너트릴 수만 있다면 적은 ‘제해권’ 자체가 끝장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작전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거기서 끝이었다.
연합왕국이라는 초유의 열강이 ‘해상’에서 패해 굴복하는 결과로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클레망소는 그것이야말로 연합왕국에 대한 가장 멋진 승리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천무에서 전언이 왔는데 연기가 없다는군. 작전을 강행합시다.”
신의 함대는 일자진을 유지한 채 해안선 방향으로 쭉 나아갔다. 이러한 함대 운동은 한 번 회전 기동을 하며 아군 장갑함들과 합류할 생각을 가졌던 왕립 해군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다.
설마 적이 장갑함의 함열을 향해 정면으로 치고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이렇게 되자 중간에 적이 자신들의 함열 중앙을 치고 지나가며 학살을 벌일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경험 많은 왕국 해군은 이 위험을 확인하고 재차 함대의 위치를 바꾸어 원래 왔던 방향으로 반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바람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재주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복잡한 함대 기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함대 기동은 문제를 가져왔다. 이미 장갑함에 접근한 상태에서 함대를 급격하게 반전시키다 보니 장갑함들의 시계를 막은 것은 물론이고 그 자신도 재차 반전할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신의 함대가 장갑함의 함열까지 접근한 시점에서 적색 함대는 ‘최악의 교전’을 벌일 처지에 내몰렸다.
화력의 한 축을 맡아주어야 할 전열함은 반전 기동을 하느라 일시적으로 전투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장갑함들은 적이 함열을 쪼개고 들어오는 동안 포격을 가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덕분에 적이 접근하기 전에 타격을 가할 기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간극을 뚫고 장갑함 천무가 왕국 장갑함들의 함열 사이로 불쑥 파고들었다. 함은 그 상태에서 엔진을 멈추고 함의 양옆에 위치한 장갑함 두 척을 상대로 공격을 시도했다.
불행하게도 화력이 측면에 집중된 두 장갑함은 자신들의 사이에 들어온 천무에 대항할 화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기동을 해서 대항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들은 사자처럼 강했지만 네 발이 모두 부러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네 발이 부러진 사자가 초원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그 처지는 간단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사격!”
수십 발의 포탄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그것들은 무지막지한 운동 에너지를 담은 채로 상대 장갑함들을 타격했다.
평범한 장갑함 간의 대결이었다면 승부가 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겠지만, 포탄을 쏜 당사자는 왕국 최강의 위상함이었던 흑 태자였다.
이름을 천무로 바꾸었다고 해서 화력까지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포탄은 단숨에 장갑함의 장갑판을 뚫고 선체까지 관통했다. 적의 장갑함을 죽이기 위해 만든 왕국 최강의 병기가 정작 왕국 장갑함들을 때려 부수는 상황은 아이러니했다.
포탄은 장갑함의 두터운 선체를 부수고 들어갈 때마다 무수한 파편을 만들었다. 그때마다 승무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갈가리 찢겨 나갔다.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 움직일 수조차 없는 사자들은 묵묵히 두드려 맞으며 최후를 기다리는 것밖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르망의 장갑함이 상대 장갑함들을 쳐부수는 사이, 나머지 장갑함도 차례로 적 장갑함들의 함열 사이로 파고들었다. 신이 조함술에 능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장갑함의 간격을 넓게 하여 최대한 많은 함정을 보호하려 한 왕국의 조처는 오히려 엄청난 피해를 불렀다.
배가 하나 끼어들어 포격을 가할 때마다 값비싼 장갑함들이 약점을 노출한 채로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았다. 이것은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콰앙!
폭음과 함께 장갑함 하나가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대폭발을 일으켰다. 세계 최강의 장갑함이 근거리에서 전력으로 퍼부은 공격에 탄약고가 날아가며 일으킨 참사였다.
공격은 약 30분여에 걸쳐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때까지 왕국 해군은 두드려 맞는 샌드백 역할 그 이상을 할 수 없었다.
참혹한 첫 타격이 지나가고 나서 왕국 해군은 제대로 된 반격을 시작했다. 해안과 장갑함의 함열 사이에서 어수선하게 보호받고 있던 기범선들이 돛을 펴고 자리를 조금 바꾸어 아군 장갑함 사이에 끼어 있는 적 함정들에 포격을 가했다.
이어 급하게 반전을 하느라 전투에 개입하지 못하고 있었던 전열함 함열이 선회를 마치고 전장에 복귀했다. 그들은 노련한 조함술로 아군 함정 사이로 파고들어 포화를 주고받는 적함의 뒤로 다가가 정확하게 배를 세우고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최초에는 왕국 해군이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 것으로 시작했던 교전은 중간 부분부터는 치열한 공방으로 변했다. 양군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포탄을 주고받으며 상대 함정에 엄청난 명중탄을 기록했다.
근거리에서 포격을 나누다 보니 해상의 ‘공식적인 명중률’이란 것은 의미를 잃었다.
클레망소는 적 전열함이 전투에 가세한 것을 보고자 아군 전열함도 불러들였다. 적의 함열이 달아날 길을 막아버리면 적 함대 사이로 파고든 장갑함만 고립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강인한 방어력을 가진 장갑함이 아니었다.
“적운 대파입니다!”
아군 함정에 떠오른 신호기를 보고 부관이 보고했다. 클레망소는 그 보고를 듣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수적으로 열세인 데다 질적으로도 떨어지는 아군 전열함은 적 전열함의 사나운 반격 속에서 하나둘 희생을 내고 있었다.
잘 훈련된 왕국 해군이 포탄을 때려대니 맞으면 피해가 쌓이는 전열함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저쪽도 무사하진 못해. 상대 함열만 박살내면 승부는 할 만해.’
클레망소는 아군 장갑함의 공격을 받아 서서히 침몰하는 적 장갑함을 보며 이 난타전에서 결코 패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는 아군 전열함의 손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투를 지속하라는 신호를 올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