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409화 (409/425)

제409화. 해전 (3)

그리섬 제독은 적 해군의 대담한 도전에 이를 갈았다. 처음 아군 장갑함을 향해 일자진을 치고 달려드는 적을 보고 단순한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쪽 장갑함의 사이사이로 정확히 파고들어 간 다음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야만인들이 아군의 석탄 부족을 간파하고 공격을 가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략적으로 아군의 허를 찌른 좋은 수였다.

“각하, 야만인들의 장갑함이 아군 장갑함 함열 중앙으로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벌써 세 척이 격침당했습니다.”

“나도 알아.”

제독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상황은 심각했다.

장갑함 세 척이 침몰하며 중앙에 구멍이 열린 탓에 적 장갑함들은 운신의 자유를 얻었다. 이제 반전을 하여 자유자재로 양면의 아군 함정들을 공격하며 학살을 자행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이 해전에서 왕국 해군이 입어야 할 손실은 절망적인 수준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위험을 알고 있었기에 아군 전열함을 동원해 적 장갑함의 뒤를 잡게 했다. 포격을 가하면서 아군 장갑함을 지원하고, 동시에 기회를 보아 그 뒤를 따라가 충각을 가할 수도 있게 말이다. 적 장갑함만 잡으면 아군 장갑함의 벽을 무너트릴 군함은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것을 간파한 듯 자신들의 전열함을 동원해 그 뒤를 지키게 했다. 그들의 견제 때문에 전열함은 상대 장갑함을 집중 타격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선회하여 그 뒤를 칠 수도 없었다.

장갑함만 기동이 가능했다면 이런 위험을 겪을 이유가 없었다. 제독은 그 부분이 짜증스러웠다.

전력에서 우위에 있다고 하지만 장갑함을 움직일 수 없는 그들로서는 기동 가능한 장갑함을 가진 신에 대항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면 항구 안에 있는 두 척의 장갑함은 기동이 가능하단 것이었다.

기껏해야 짧은 시간 움직임이 가능한 것이 고작이었지만 이것도 감지덕지였다. 제독은 아군의 급변을 보고 급하게 다가오고 있을 두 장갑함에 신호를 보내 아군 장갑함의 함열을 메우라고 명령했다. 교전 위치를 고르는 것은 두 함장의 재량에 맡겼다.

위기에 빠진 왕국 해군을 구하는 역할이 두 함장의 어깨에 걸렸다. 두 장갑함은 이곳에 남은 장갑함들 중 가장 크고 강력한 배들이었다. 그 중 하나는 흑 태자와 동등한 성능을 가진 괴물, 엘리자베스였다.

제독은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대비해 남쪽으로 흑 태자 급의 장갑함을 하나만 보내고 하나는 함대에 남겨두었다. 이 조처는 ‘최악의 경우’에 함대 차원에서 흑 태자를 상대하기 위한 그 나름의 대응이라 할 수 있었다.

콰앙!

제독이 명령을 내리는 동안에 주변에 물기둥이 솟구쳤다. 적색 함대의 원래 기함을 남쪽으로 내려 보낸 탓에 제독은 함열의 중앙에 있는 비교적 쾌적하고 안전한 기범선 매킨지에 좌승하고 있었다.

이 배의 근처에는 신의 장갑함이 밀고 들어온 상태였다.

아군 기범선 하나가 선회한 장갑함의 포격을 맞았는지 굉음을 일으켰다. 그나마 잘 훈련된 왕립 해군이기에 이 정도 손실에도 함열을 유지하며 질서를 최대한 지키고 있었다.

수준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로망스나 프리지아의 해군이었다면 벌써 함열이 흔들리면서 적에게 더한 성공의 기회를 허락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독은 망원경을 들고 검붉은 연기와 포연으로 뒤덮인 전장 너머를 훑었다. 그는 항구 방향에서 두 장갑함이 빨리 달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적 전열함이 아군 함열에 돌입합니다.”

“벌써 말인가?”

“저길 보십시오.”

부관이 손을 들어 불을 뿜는 아군 기범선 너머를 가리켰다. 제독은 얼른 시선을 그곳으로 돌렸다.

그쪽에는 원래 아군 전열함 세력이 적 장갑함의 뒤를 때리며 기범선과 협공을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갑함이 90도를 선회해 양쪽 측면의 대포를 기범선과 전열함 양자에게 퍼붓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그 공격력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밀리고 있었다.

장갑함과 전열함이 난타전을 벌이면 누가 이길지는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 가공할 장갑함의 위력에 전열함은 급하게 함을 반전시키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 간극으로 적 전열함이 파고들어 오기 시작했다. 장갑함도 모자라 적 전열함까지 진입한다. 생각보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제독은 손바닥을 문질렀다. 땀이 절로 배여 나왔다.

“길이 열렸습니다. 이대로 진입해야 합니다.”

로망스 출신의 함장 베르뚜앙은 결정적인 전과 확대의 기회가 열렸다는 것을 간파했다. 적의 전열함이 아군 장갑함의 포격을 받아 밀리면서 길이 열린 판이었다. 이 간극을 파고들어 가면 적에게 굉장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는 선임 위관의 조언에 동의했다.

“좋아. 이대로 밀고 들어가도록 하지. 우현 전타, 아군 장갑함이 확보한 돌파구로 향한다.”

“알겠습니다. 후속하는 아군 전열함에도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베르뚜앙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원경을 들었다.

진입을 해야 할 방향은 돌파구가 넓게 드러나 있었다. 이제 저곳으로 치고 들어가 적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면 이 승부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걸로 이 전쟁은 우리 해군이 끝장낸다.’

베르뚜앙은 자신들이 밀고 들어가 적의 상선과 기범선을 쓸어버리면 연합왕국은 더는 이 일대에서 작전 역량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을 거란 사실을 확신했다.

저 정도의 전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원정군이 보급선을 유지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아마 한 호흡을 쉬어가며 전력을 보충해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속도가 중요한 이번 전쟁에서 원정군은 패할 수밖에 없었다. 원정군이 쉬는 동안 제국이 충분한 전력을 집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돌파구를 슬쩍 살핀 다음 뒤를 따라오는 아군 함정들 쪽으로 망원경을 돌렸다.

아군 함열 역시 비교적 안정적으로 뒤를 따르고 있었다. 돌파구로 진입하는 아군의 기동을 적은 저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승부는 이것으로 결정적으로 기울고 말 것이다.

베르뚜앙이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데 갑자기 후미 쪽을 따르던 아군 전열함에서 이상한 신호가 올랐다. 진입이 위험하다는 신호였다.

그는 그 신호를 보고 자신이 잘못 보았나 싶어 신호사관을 불렀다.

“저 신호, 함열 진입을 잠시 늦춰달라는 연락 아닌가?”

“맞습니다, 각하.”

그는 그 연락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호기는 두 번 오지 않았다. 적 전열함 전대는 아군 장갑함의 포격을 받고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다시 선회하여 바깥쪽에서 아군 전열함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면 이쪽 장갑함의 공격을 피하면서 아군 전열함이 함열로 진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그는 후미에 있는 지휘관이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포연으로 시선이 잘 보이지 않을 때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코앞에서 난타전을 벌이던 적 전열함이 피하는 것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신호사관이 입맛을 다시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 명령이지만 명령은 명령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베르뚜앙은 함대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신의 해군 역시 왕립 해군처럼 엄격한 명령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여러 나라 출신이 얽힌 탓에 명령 체계의 중요성은 더욱 강했다.

북양 함대 사령관 클레망소가 이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기에 각 함장들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명령에 따라야겠지. 염병할, 좌현 전타.”

베르뚜앙은 함의 방향 선회를 지시했다.

전열함은 재차 방향을 바꾸며 적의 함열로 진입하려는 기동을 포기했다. 그들은 유연하게 방향을 틀면서 적 함열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 외해로 향했다.

그렇게 되자 자연스레 적 전열함과 완전히 닮은꼴로 움직이게 되었다.

다시 진입을 시도한다면 적 전열함과의 재대결은 불가피했다.

그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 망원경을 내리려 했다.

그때 선임 위관이 크게 외쳤다.

“각하, 저기 수평선을 보십시오.”

“수평선에 뭐라도 있나?”

베르뚜앙은 망원경을 다시 눈에 가져간 채 수평선 쪽을 살폈다.

“응?”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수평선 위에는 생각지도 못한 두 개의 검은 연기가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적 장갑함?’

그는 뒤늦게 항구에 적 장갑함 두 척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글라이더는 이 두 장갑함 역시 연료가 없을 거라고 오판을 했다. 신 역시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지금까지 두 장갑함은 전투에 개입하지 않았다.

‘착각’은 이유가 있었다. 정찰을 할 때는 항구의 장갑함이 예인을 준비하느라 증기 기관을 돌리고 있지 않았고, 공격을 시작했을 때는 예인 준비를 하느라 함이 항구 안에 묶여 있어 기동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덕분에 두 장갑함은 전투가 시작되고 한참 동안 참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그들은 예인 준비를 위해 묶었던 밧줄을 모두 풀고 기관을 예열한 채 전력을 다해 달려오고 있었다.

베르뚜앙은 그런 두 괴물의 개입을 확인하자마자 신호사관에게 신호를 보내게 했다. 신호를 보낼 상대는 아군 장갑함이었다. 장갑함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아군 장갑함밖에 없었다.

***

“아군을 전력으로 구원한다. 전속 전진.”

“예, 각하.”

장갑함 엘리자베스는 포연에 휩싸인 아군의 함열을 확인하고 기관에 석탄을 아낌없이 밀어 넣었다. 기동 가능한 시간이 짧아진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가 미친 황소처럼 질주해오자 그것을 확인한 신의 전열함 전대가 화들짝 놀라며 바깥쪽으로 빠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신의 장갑함들도 반응을 보였다. 아군 함열로 들어가 괴멸적인 타격을 가할 태세를 보이던 그들이 반전하기 시작했다.

상대에게 돌입을 허용했다면 치명타를 입었을 왕국 해군으로서는 안도가 절로 나온 순간이었다.

“아군 함정들이 신호를 보냈습니다. 함열 앞에서 방어 위치를 맡아달라고 합니다.”

“구멍을 메워달란 거군.”

함장은 턱을 쓸었다.

그의 막강한 전투함에게 단순한 방어 임무는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전장에서 언제나 영광을 찾아 움직이는 것은 군인이 아니라 공명심에 들뜬 멍청이나 할 짓이었다. 영예가 없는 멋없는 자리라도 가서 지켜야 할 때는 지켜야 했다.

그것을 망각할 때는 상대에게 전공을 허락하는 얼간이가 될 뿐이었다.

얼마 전 프리지아와 오스티아의 전쟁에서 그런 멍청이들이 둘 나왔다. 공명심에 들떠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지 않고 공을 탐해 달려 나간 두 오스티아 귀족 대위 덕분에 십만이 넘는 오스티아 대군이 프리지아에 측면을 허용하며 어이없이 무너졌다.

‘뭐, 할 수 없는 일이지.’

함장은 신호사관에게 명령에 화답하겠다는 답신을 보내게 했다.

물론 엘리자베스는 이미 상당한 공적을 세운 상태였다.

그의 장갑함은 그저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함대의 위기를 구원했다. 그야말로 구세주. 왕국 최강의 장갑함다운 면모를 보였다. 이 이상의 영예를 누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신의 장갑함들은 그대로 반전하며 반대 방향으로 침로를 잡았다. 끝까지 이쪽 전열함의 움직임을 방해하면서 기회를 유지해 보겠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엘리자베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틈이 보이면 이 함을 좌우에서 몰아쳐 협공하겠다는 빛을 보였다. 기동 가능한 장갑함의 수에서 4 대 2의 차이를 보이다 보니 그 생각은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함은 최강이야. 쉽진 않을 거다.’

함장은 교활하게 움직이는 적 장갑함을 확인하고 포격을 준비하게 했다. 양자의 거리가 급속하게 가까워진 순간 엘리자베스의 포문이 개방되었다.

우르릉.

천둥소리와 같은 울림이 함을 울렸다. 굉장한 포성과 함께 엘리자베스의 첫 포탄이 거대한 물기둥을 일으켰다.

그 포격은 매우 정확했다. 세계 제일의 숙련도를 가진 왕국 수병들의 역량은 원거리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첫 포격에서 비교적 근거리에 포탄을 착탄시키자 상대 장갑함이 크게 놀라며 방향을 슬쩍 바꾸었다.

그 방향 전환은 결정적이었다. 그 움직임으로 엘리자베스의 함대 복귀를 막을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재차 상대를 향해 포격을 가하며 적이 방향을 다시 바꾸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함장은 망원경으로 포격을 지켜보며 전투가 이것으로 끝이 나리란 것을 예감했다. 적은 다시 반전해서 함열을 노릴 기회를 상실했다. 엘리자베스가 함열에 들어가면 적색 함대의 빈 공간을 노리기 어려웠다.

그는 점차 외해 쪽을 향하는 적 함정들을 보며 망원경을 내렸다.

“이만 철수하도록 하지.”

교전을 지켜보고 있던 클레망소가 말했다.

“하지만 각하, 아직 기회가.”

“기회는 이미 지나갔네. 적 장갑함 두 척이 움직여서 온 시점에 승부는 나버린 거야.”

클레망소는 아직도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는 부관의 말을 잘랐다.

중간에 적 함대에 괴멸적인 손실을 입히며 공멸 수준까지 교전을 몰고 갈 기회가 없진 않았지만, 예상치 않게 기동해온 엘리자베스와 다른 장갑함 하나의 존재로 승부는 이제 어려웠다.

이들의 존재는 단지 장갑함 두 척의 전력에 그치지 않았다. 기동이 가능한 두 척이 장갑함의 함열을 옮겨 다니며 기동 방어를 하면 최소한 장갑함을 제외한 아군 함정은 전부 작살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은 적 함열 사이에 고립된 장갑함들이 차례로 격파되는 수순으로 연결되게 마련이었다. 제독으로서는 그런 결과를 예견해야 했기에 교전을 포기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기왕이면 적 함대와 공멸하는 결과를 냈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희망은 사라졌다. 아쉬운 부분이었다. 승도가 바란 것처럼 공멸까지 갔다면 이 전쟁은 신의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제는 다 지나간 가정이었다.

계산대로 적색 함대가 괴멸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면 원정군은 절대 보급선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정하면 신은 판을 새롭게 짤 수 있었다. 다소의 부담을 감수하고 북경을 버리고 시간을 버는 전략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서 유구의 통상 파괴 전대가 적의 보급선을 자르면 전쟁은 신의 승리로 무조건 끝날 수밖에 없었다.

연합왕국이 어떤 전략을 세우든 이 부분은 확실했다. 왕국 역시 이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초단기전을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신에 그 점을 들켜선 안 되었다. 어떻게든 보급을 유지할 역량이 있다는 점을 신에 인식시켜야 북경을 점령하고 ‘강화’를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색 함대가 공멸 수준의 타격을 받는 부분은 신이 지상전을 치르지 않고 승리를 따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길이었다.

물론 왕국 해군의 가공할 전력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승도는 이 가능성에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우연치 않게 적의 석탄 고갈 가능성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그는 클레망소에게 공격을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쉬운 일이다. 기왕이면 해군의 손으로 전쟁을 매듭지었어야 할 일이다. 그랬다면 전하께서 공을 들여 기른 해군이 결정적인 수훈을 세워 그 밥값을 다 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는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미련을 가져봐야 헛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아군 함정들에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그러게.”

클레망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자를 눌러쓴 채 함교에서 내려왔다.

신의 함정들은 그대로 바람을 타고 적의 함대와 거리를 둔 채 동쪽으로 쭉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이번 전쟁에서 그들이 활약할 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왕국은 초단기전을 선택했고, 북경을 함락시키며 ‘강화 교섭’을 걸겠다는 방침 아래 작전을 진행할 참이었다. 해군이 재정비를 해서 공격을 재개하기 전에 모든 승부가 날 것이니 교전을 할 기회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이 거둔 전과는 작지 않았다. 짧은 교전 시간 동안 그들은 세계 최강 왕립 해군을 상대로 장갑함 세 척 격침, 전열함 두 척 대파, 기범선 한 척 격침 및 두 척 대파 등의 물적 손실에 천이백 명의 사상자라는 피해를 안겨주었다.

왕국이 해전 사상 이런 피해를 본 전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물며 최강의 적색 함대가 이런 피해를 본 일은 없었다.

그들은 그 전과만으로도 왕국과 원정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황룡의 깃발을 단 신생 해군은 이 교전으로 자신들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열강에게 각인시키며 조용히 무대에서 퇴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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