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411화 (411/425)

제411화. 여산 (2)

원정군은 결정을 내리기가 무섭게 닻을 올렸다. 그들은 작전에서 본 시간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움직임을 서둘렀다. 닻을 올린 시간이 오전이었는데, 함대가 목표로 한 항구에 도착한 것은 저녁이었다.

손상을 입은 함정들을 뒤에 남겨두고 움직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속도였다.

“양적들이 선진으로 향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곳으로 온단 말인가.”

육관의 방어를 맡은 방어사 정영은 갑자기 나타난 적 함대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조정으로부터 적이 선진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안심하고 있던 그로서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방어사 대인, 양적들의 함대가 강대하니 이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단 조정의 명령대로 시설을 넘겨주지 않고 철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기의 건의에 정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세.”

정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서기는 파괴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폭파를 위해 군관들을 모아 구역을 할당해주고 화약을 배분해 주었다. 미리 화약을 설치해 두었다면 일이 쉬울 것 같지만 습기가 많은 바닷가에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시간은 넉넉했다. 양선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곤 하지만 부술 시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침착하게 계획대로 파괴 작업을 진행한다면 문제될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자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 문제란 파괴를 담당할 군관들에게 있었다.

이곳의 군관들은 근대 군사 교육을 받지 않은 전통 군관들이었다. 제국이 돈이 썩어 돌지 않는 이상 모든 인간을 훈련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곳의 군관들은 교육을 생략하였는데, 이곳 군관들이 그 중요하지 않은 곳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화약에 익숙지 않아 폭파 작업을 제대로 지휘할 능력이 없었다. 그것이 이곳 폭파 작업에 존재하는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군관들은 어느 정도의 분량을 써야 건물을 날려버릴 수 있는지에 대해 경험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부분은 사소할 것 같지만 폭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화약을 대중없이 사용하면 금세 양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군관들은 대충 ‘감’에 의존하여 화약을 건물마다 나누어 폭파를 준비하게 했다. 그들의 감이란 대포알에 들어가는 ‘화약’의 양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들은 폭파 준비가 끝나자마자 아무런 검토도 없이 폭파를 시작했다.

항구 곳곳에서 굉음과 함께 건물들이 폭삭 주저앉았다. 그들은 창고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만족스런 얼굴을 했지만 정작 파괴해야 할 나루를 비롯한 핵심 시설들이 부서지지 않은 것을 보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나루는 건물을 부술 정도의 화약으로 완파를 시키기엔 문제가 있었다. 풍랑이 닥쳐도 쉽게 부서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든 것이 나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루가 부서지지 않은 것을 보고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창고 폭파에 너무 과한 화약을 써버린 탓이다. 대중없이 화약을 낭비한 대가는 비쌌다.

원래라면 항구 전체를 완파하고도 남을 넉넉한 분량이었지만 군관들은 건물을 몇 채 날리는 데 화약을 전부 써버렸다. 그것이 그들이 한 일의 전부였다.

‘큰일이다.’

그들은 점점 가까워지는 양선을 보다 급하게 관청으로 달려가 폭파 작업의 결과를 보고했다.

서기는 뒤늦게 그 보고를 받고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황급히 항구 아래를 망원경으로 살폈다.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완파된 핵심 시설은 몇 되지 않았다. 제일 먼저 날려버려야 할 나루는 부서지지도 않았다.

“맙소사.”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이렇게 되면 양적에게 공으로 항구를 선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서기가 경악한 얼굴을 하고 있자 짐을 꾸리고 있던 정영이 밖으로 나와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놀라는 건가?”

“폭파에 실패했습니다, 대인.”

“폭파에 실패하다니? 화약은 충분하지 않았던가.”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해 각 항구에는 정부에서 제공한 화약이 대량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 분량이면 폭파 작업을 하는데 차고 넘쳤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은 군관들의 ‘교육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제국으로서는 나름 준비를 해두었다고 생각했지만 기본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는데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었다.

“우리 군관들이 폭약을 낭비해버린 모양입니다, 대인.”

“그럼 당장 도끼질을 해서라도 무너트리라고 해야지 지금 이러고 있단 말인가?”

“그게 가능했다면 시켰을 겁니다. 하오나 양적들이 코앞입니다, 대인.”

서기가 손가락을 들어 항구 앞을 가리켰다. 이미 양선들은 항구 입구까지 다다라 있었다. 이제는 도끼질이고 뭐고 할 시간 자체가 없었다.

정영은 그것을 보고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푸른 바다 위로 보트가 깔렸다. 원정군은 기뢰에 몇 번 혼이 난 이래, 항구 진입에는 언제나 보트를 앞세우고 있었다.

물론 포격도 없이 보트를 앞세울 수 있었던 데에는 이곳에 포대가 없다는 첩보 내용도 한몫했다.

이 육관은 아편 상인들에게 제법 유명한 항구였다. 제국의 관문인 선진에 제국 해군 주력이 머문 탓에 아편 밀수 루트가 이 육관 근처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편 상인들은 이 육관에 비교적 관심이 많았다. 이곳에 배가 있는지, 포대가 있는지, 방어 병력은 많은지 등에 대해 언제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덕분에 왕국으로서는 긴장감이 적은 상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선두는 본부 소대다. 뭍에 도착하는 즉시 각 부대별로 방어 위치를 확보한다.”

로스 대위는 부하들에게 임무를 단단히 주지시켰다.

그는 부하들에게 임무를 단단히 일러주면서도 조금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항구는 폭파 작업이라도 한 듯 곳곳에서 화약 연기가 치솟고 있었지만, 나루를 비롯한 주요 시설은 멀쩡했다.

대위는 그 점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혹시 기뢰가 나루 아래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쪽에 보트를 대게 했다. 그러면서 다른 보트에도 경고를 주는 걸 잊지 않았다.

“나루에 기뢰가 있을지 모른다. 나루에 보트를 대지 마라.”

그의 지시에 따라 해병들은 나루를 피해 바로 항구에 보트를 대었다. 이렇게 하면 뭍으로 올라갈 때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올라가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기뢰에 모두 작살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해병들이 나루를 피해 상륙하는 모습을 본 프리깃은 그 아래에 기뢰가 숨어 있을 거란 생각을 가졌다. 기뢰가 있으니 가까이서 물속을 보았을 해병들이 피해가지 않았겠냐는 의심이었다.

실제로도 아문에서 제국이 그 비슷한 짓을 했던 전력이 있어 정황 증거는 충분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어 프리깃은 후속하는 보트들을 향해 바싹 다가선 다음 큰 소리로 물었다.

“나루에 기뢰가 있는 건가?”

프리깃에서 기뢰의 존재 여부를 묻자 후속하던 보트의 해병들이 대답했다. 그들은 로스 대위의 경고를 듣고 ‘정말’ 기뢰가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아마 있을 겁니다.”

그 대답에 프리깃은 망설임 없이 나루에 포를 조준했다. 나루에 기뢰가 있다면 ‘폭발’을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머지 나루는 천천히 확인해보면 그만이었다.

“쏴!”

함장의 명령이 끝나기가 무섭게 프리깃의 대포가 나루를 강타했다. 포탄이 터지면서 나루에서 물기둥이 치솟았다. 그들은 나루가 박살날 때까지 연달아 포격을 가했다. 그 포격에 나루는 흔적도 남지 않고 박살났다.

하지만 나루가 박살이 나도록 기뢰는 터지지 않았다. 애초에 없는 물건이니 터질 수가 없었다.

해군은 승도에게 크게 물을 먹은 경험 때문에 공으로 얻을 항구의 나루를 자기들 손으로 부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렇지만 그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해병대는 항구와 관청을 접수하면서 적이 ‘폭파 작업’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해군에 보고했다. 그제야 적이 ‘바보짓’을 해서 공으로 항구를 주었다는 사실을 안 해군은 자신들도 똑같이 바보짓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승도에게 하도 당했더니 이제 의심 병에 걸려 돌다리도 건너보기 전에 자신들 손으로 때려 부수고 ‘돌다리’였구나 확인하는 짓을 하고 있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원정군 지휘부는 이 해프닝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적에게 심리적으로 말리고 있는지 절감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이고 전과는 전과였다. 적이 바보짓을 해준 덕분에 원정군은 항구 하나를 공으로 챙겼다. 그 이익은 결코 작을 수가 없었다. 바로 원정군이 가장 걱정하던 시간 손실을 다소 줄여주었기 때문이다.

***

육관에서 철수한 정영 일행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회의를 가졌다. 자신들이 저지른 ‘바보짓’을 어떻게 변명할지에 대한 논의였다.

폭약도 있었고 시간도 있었는데 폭파에 실패했다. 당연히 그렇게 보고하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강주 왕 오승도는 불가능한 일에 실패할 때는 관대함을 보이는 사내였지만, 할 수 있는 일을 실패할 때는 그에 맞는 처분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정영 일행은 변명에 대해 생각해둘 수밖에 없었다.

서기가 입을 열었다.

“대인, 이제 돌아가면 항구 실함에 대한 질문이 있을 겁니다.”

“나도 알고 있네. 하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나.”

정영이 조심스레 묻자 서기가 입에 침을 발랐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대인, 거짓을 고하는 것은 어떠십니까. 이대로 보고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잘못하면 참수, 잘 되어도 파직을 면키 어려운데 곧이곧대로 보고할 필요가 있겠는지요.”

“하나 우리가 보고하지 않는다고 해서 강주 왕 전하가 사정을 모를 턱이 있겠는가.”

정영은 그것이 두려웠다. 강주 왕이 바보가 아닌 이상 보고를 받고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 정찰을 해서 사정을 알아볼 것이란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리되면 육관의 사정을 알아차리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대인. 속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보고를 받고 강주 왕 전하께서 사정을 살피기로 하셔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상승군이 주둔한 곳과 육관은 거리가 있었다. 정찰을 하려 해도 보고를 받자마자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딴은 그렇지. 그것이 우리 실수가 걸리지 않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그 시간이면 양적들이 ‘나루’를 복원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 아닙니까. 멀리서 항구를 관찰한다고 해도 의심스러울 것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정영이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옳거니. 처음부터 폭파가 되었으나 양적이 복원을 한 것이라고 둘러 대어도 된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과연. 그 같은 수라면 충분히 거짓 보고를 할 수도 있는 일이야. 좋아, 그렇게 하세.”

정영이 서기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미리 입도 맞추어 두어야 합니다. 우리 군관들에게 입단속을 시키지 않으면 거짓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하니 그들에게 겁을 주어야 합니다.”

“폭파 문제의 책임을 묻는다고 말해야겠군.”

“예, 대인. 그렇게 하면 처벌이 두려워 모두 입을 다물 것입니다.”

“좋아, 그리하세.”

정영이 동의하자 서기는 군관들을 불러놓고 몇 가지를 당부했다. 폭파 실패의 책임을 지고 싶지 않으면 입을 조심하라는 것이 그의 당부였다.

당연히 폭파 문제에 주눅이 들어 있던 군관들은 그의 ‘당부’를 따르기로 했다.

“군중에 가서 뭐라고 진술할지는 생각해 두었겠지?”

“예, 대인. 시키신 대로 폭파 작업은 성공했다고 말하겠습니다.”

“좋아. 그렇게만 하면 되는 걸세. 만사는 잘 처리되었다. 그렇게 보고를 올리게. 알겠나?”

“물론입니다.”

정영 일행은 그렇게 거짓 보고를 올리기로 입을 맞추고 승도가 있는 동북쪽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양적들이 육관에 상륙했어요?”

방어사 정영의 보고에 승도가 꺼낸 첫마디는 이랬다. 그는 별로 놀라지 않는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정영은 공손하게 소맷자락을 모으며 답했다.

“예, 전하. 오늘 저녁에 양적들이 상륙했습니다.”

“그 규모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신이 보기에 족히 수만은 될 것 같았습니다. 수평선을 메운 함대의 규모로 보건데 그 정도는 되리라 여겨졌습니다.”

“그래요? 적 주력이 저녁에 육관 도착이라. 생각보다 움직임이 빠르군요. 이렇게 되면 예상한 것보다는 북경 공격이 조금 빨라진다는 건데.”

승도는 다소 계산이 맞지 않는 듯 입맛을 다셨다. 생각보다 적이 신속하게 움직인 것을 보면 역시 ‘장기전’을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호흡을 빠르게 가져가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폭파 작업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습니까?”

폭파에 대한 물음은 필요했다.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상대의 양륙 속도가 한나절 당겨지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간단한 것 같아도 상당히 커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영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태연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물론 조정의 명령에 따라 잘 처리하였습니다. 주요 시설은 완파시켰고 일부 창고만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조금은 실수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잘해 주었습니다.”

승도는 폭파가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말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정예 상승군이 관리하지 않은 이상 실수가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음에도 완파에 성공했다면 하늘이 그에게 미소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진은 그 대답을 듣고 승도에게 말했다.

“전하, 폭파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크게 걱정할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상으로 기존 계획과 큰 차이가 없는 흐름으로 적의 행동을 예상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사람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황을 살피는 것은 나쁘지 않겠지요. 육관 주변으로 기마를 보내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한 가지 더.”

“예.”

“외곽에서는 적세를 살피기가 어려우니 글라이더를 띄우도록 하지요. 하늘에서 적의 양륙 상황을 살핀다면 보다 정확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준비시키겠습니다.”

유진이 대답을 하고 막사를 나서는 동안 정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글라이더라니? 하늘에서 적정을 살핀다니. 생각지도 못한 수단이 언급되면서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일이 만약 그렇게 돌아가면 거짓말이 들통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늘에서 적정을 살핀다면 양륙된 병력 규모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빌어먹을. 이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가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승도가 말했다.

“갑작스런 기습에도 임무를 다해주어 이 사람의 기분이 좋습니다. 내 특별히 상등품 차를 내릴 테니 사양 말고 한잔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전하.”

정영은 차를 내린다는 말에 더욱 목이 탔다. 거짓말을 했는데 강주 왕은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그런 만큼 거짓이 밝혀지는 날에는 몇 곱절로 격노하리란 것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정영은 떨리는 손으로 승도가 준 차를 받았다.

그는 그대로 차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차를 후루룩 마셨다. 그 모습을 본 승도가 혀를 찼다.

“차를 그렇게 마시면 욕을 먹게 마련입니다. 경은 다도에 대해서 조금 배울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예. 꼭 배우겠습니다, 전하.”

정영이 진땀을 흘리며 대답하자 승도는 조금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까부터 얼굴빛도 좋지 않고 땀도 흘리는 것이 몹시 피곤한 모양이군요. 이만 물러가서 쉬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전하.”

정영은 승도가 물러가도 좋다고 말하자 구원을 받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막사에서 물러갔다.

승도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피곤한가 보다 생각을 하고 자신이 처리해야 할 서류에 눈길을 주었다.

과거에는 편집증 환자처럼 부하들을 의심하며 살았지만, 지금의 그는 그런 부분에서는 다소 넉넉해져 있었다. 믿음을 주어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치관은 지금까지 그에게 다디단 결실로 보답해왔다. 그런 만큼 승도는 부하가 거짓 보고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느긋하게 붓을 들고 결제해야 할 서류에 날인을 하며 창백한 정영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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