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415화 (415/425)

제415화. 도강 (1)

황족 아이신무쿠 혁천은 황실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거물이었다. 제도 안에서 힘을 가진 황족 중에 반드시 포함되는 자이기도 했다.

그는 황실의 방계로 황위 계승 서열이 두 자릿수에 해당되었지만, 원래 가진 실력은 그렇지 않았다.

명예직인 팔기의 요직을 거친 경력이 있는 데다 황족으로서 보기 드물게 대단한 부를 축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부는 유사시 군사력으로 연결될 수 있어 황실에서의 입지가 작을 수 없었다.

그는 그런 막강한 실력에 못지않은 야심도 있었다. 실제 그 야심에 맞는 일을 도모해 보기도 했다. 공사 하워드와 손을 잡고 제국의 내정을 흔드는 반란을 뒤에서 꾸며본 것이다.

잔챙이 황족들이야 신분 보장의 이익을 노리고 일에 끼었지만 그는 나름 큰 뜻을 생각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시대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전임 총리대신 리첸의 시대에는 팔기라는 비빌 언덕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그것도 없었다. 팔기는 해체되어 이름만 남았고 황실의 발톱과 이빨은 모두 뽑혔다.

남은 것은 그저 오승도의 치세 아래 숨을 죽이고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도 대세를 아는 사내였기에 그렇게 하려 했다.

그렇지만 격변의 난세가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세계 최강의 열강과 권력자 오승도가 격돌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격돌의 틈바구니에서 기회를 보았다.

혁천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제국 내에서 반란을 조장하는 음모에 가담했다. 잔챙이 황족들은 왕국 공사의 신분 보장에 혹해 움직였지만 그는 달랐다.

혁천은 열강이 승도의 적대자로 선 호기를 살려 그를 실각시키고 입지를 얻으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반란은 싱겁게 진압되었고 혁천의 큰 뜻은 간단히 무너졌다.

그는 이를 아쉽게 여겼지만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왕국과 제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더니 대규모 외국군이 북경의 코앞까지 육박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천우신조의 기회였다. 북경에 대한 오승도 정권의 영향력이 급감하는 유일무이한 기회 말이다.

혁천은 그 기회를 잡기 위해 선이 닿는 일부 황족들을 이용해 총리아문에 말을 넣게 했다. 거물인 자신이 나서서 총리아문에 제의를 넣으면 공연한 의심을 사기 때문이다.

그는 나라를 위해 팔기를 다시 조직하여 북경의 방어에 한 팔을 보태겠다는 뜻을 비쳤다. 속내가 훤히 드러나는 짓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명분상으로 욕을 먹을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이라 정부에서 뭐라고 할 이유가 없었다.

이 제안을 정부에서 거절한다면 거절하는 대로 황실은 구국의 위기에서 나름 나라를 위해 힘을 보태려 했는데, 강주 왕이 권력자 특유의 의심을 가지고 황족들을 백안시한다며 그 입지를 깎을 수 있었다.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받는 대로 북경에서 정권 장악의 기회를 도모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었다. 손해 볼 일이 전혀 없는 꽃놀이패나 다름없다 보니 제안을 꺼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총리아문이 제의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혁천은 생각했다. 당금 오승도 정권이 그 정도로 현실 균형 감각이 없다 여겨지지 않아서다.

하지만 서신을 보내고 몇 시진 지나지 않아 돌아온 총리아문의 답변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팔기를 다시 편성하는 문제는 군의 운용에 문제가 있을 수 있어 검토해 보겠습니다. 대신 각하께서 기왕 나서주기로 하셨으니 나라를 위해 원정군과 선을 대어 이야기를 한 번 해주셨으면 하고 청을 드리겠습니다. 현재의 우리 정부 인사들은 모두 왕국에 선제공격을 가한 일이 있어 저쪽에서 신뢰할 사람들이 아니라 대화가 어렵습니다. 전하는 이 문제에서 자유로우니 교섭을 각별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혁천은 서신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답변은 그의 허를 찔렀다 할 만했다.

정권에 위협이 되는 위험분자에게 적대국과 접촉할 기회를 주겠다니? 그것도 자신들의 입으로 ‘부탁’까지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부탁을 해버리면 접촉을 해도 저들이 처벌할 근거를 스스로 없애는 것과 같았다.

혁천은 그 희한한 발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제안을 했는지 그 속내가 궁금해서였다. 진정으로 자신이 나서 교섭을 하면 열강과의 대화가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그건 물론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보여 온 오승도의 모습을 보자면 그렇게 순진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럼 그를 기만적인 수를 던지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인가?

이 부분이 조금 헛갈렸다. 정말 그렇다면 정보를 적에게 넘겨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럴 정도로 오승도가 대단히 유리한 입장인가.

혁천은 그 자신감이 왠지 찝찝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일단 제의는 받아들여야겠지. 그래, 어쩌면 이건 놈이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 제 놈의 뜻대로 끌고 가려는 포석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 패를 받아 내 뜻대로 끌어가면 놈이 뭘 생각하든 소용없을 거다.’

혁천은 총리아문이 던진 대담한 답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상대가 던진 이 제안에서 결국 웃는 것은 자신이 될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북경에서 남쪽으로 십 리 정도 떨어진 원교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에서 남쪽에서 올라온 대운하와 선진에서 올라온 운하가 교차하였다. 방어의 요충인 이 원교에 상승군은 진지를 마련하였다.

“전하, 적 기병이 제도 부근까지 진출해온 상황입니다. 조만간 적 주력이 이곳 원교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여겨집니다. 현재 우리 병력 상황으로 고려하건데 여기서 물러나 성내에서 방어전을 치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군중에서 열린 회의에서 유진이 정세를 고려한 후퇴를 건의했다. 승산을 확실히 기대할 수 있는 공성으로 시간을 벌어 결정적인 승리를 취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승도는 그 제안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장군의 제안이 현재 아군이 취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 거란 점은 이 사람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성으로 물러나면 우리 쪽이 패할 가능성이 꽤 높아집니다.”

“그건 어째서입니까.”

참모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간단히 말해 사기 문제입니다. 지금 제도는 저들의 기병이 행한 ‘초토 작전’의 영향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이런 제도에 방어군을 그냥 집어넣으면 방어전에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열을 이길 것도 일곱을 이기게 될 것이니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요. 보다 확실한 안전판을 마련하기 전에 북경으로 철퇴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오나 전하, 이곳에서 싸운다면 더욱 불리하지 않습니까.”

참모들은 승도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이 비록 운하를 끼고 있다고 하지만 성보다는 조건이 좋지 않았다. 다소 사기 문제가 걸린다 해도 성에서 버티는 편이 훨씬 이익이란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물론 싸운다면 그렇겠지요.”

승도의 말에 장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싸우지 않고 이곳에서 어떻게 버틴다는 말씀이신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산에서 한 번 기만을 당한 적이 우리 군대를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지요.”

승도는 참모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감이 실린 대답에 장교들은 조금 어안이 벙벙해졌다.

“예전에는 어려웠지만 지금은 가능한 기책이 있습니다.”

승도는 적을 상대로 준비한 계책을 설명했다.

승도가 준비한 것은 자신의 정적 혁천을 적과 접촉하게 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는 교활한 심리전이었다. 이를 위해 군대를 일부러 북경에 두지 않고 도시의 밖에 두었다.

그렇게 해야 정적이 도시에서 공작을 진행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원정군에 믿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법으로 말하자면 제17계 포전인옥과 33계 반간계, 34계 고육계를 연속으로 사용한 연환계라 할 수 있었다.

원정군이 선진에 상륙하던 당시만 해도 이 계책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다.

그들이 시간에 쫓기고 있었던 만큼 교섭이고 뭐고 북경을 점령하고 본다는 태도로 일관해서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져 있었다. 원정군은 선진과 여산에서의 거듭된 참패로 상당한 시간을 손실하여 ‘확실한 승리’를 얻을 여지를 잃은 상황이었다. 그들로서는 상황을 반전시킬 결정적인 묘수가 절실했다.

그런 그들에게 승도의 정적 혁천이 접촉해 온다면 어떨까.

그 신분을 의심할 수도 있지만 그럴 이유는 없었다. 공사 하워드를 통해 신의 내정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승도의 정적이 접근해 그들에게 ‘적당한 제안’을 내걸며 협력을 청한다면 저들도 그에 보조를 맞추어 시간을 끌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들이 할 행동은 우선 승도의 정적 혁천이 북경을 함락시킬 수 있는 공작을 진행할 시간을 주기 위한 정지였다. 동시에 상승군이 철수하지 않도록 압박만 가하며 대치 양상을 만들 것이다.

그것이 승산이 불투명한 공성전을 피하고 이길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승도는 적의 행동을 그렇게 자신의 뜻대로 유도함으로써 한 번 더 시간을 끌어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면 승도가 원하는 마지막 전력을 북경 근방으로 불러들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승도의 구상을 들은 지휘관들은 그 방법의 위험성을 조심스레 입에 올렸다. 원정군이 만에 하나 이쪽의 의도를 간파하고 원교를 직접 공격해 온다면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도는 그렇다 해도 적이 무식하게 밀고 들어올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했다. 이미 여산에서 정보를 전부 가지고도 코를 베인 적이니 만큼 이쪽의 패도 모른 상태에서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장교들은 자신감을 보이는 승도의 생각에 약간은 불안을 가지면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강주 왕은 거의 실수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판단이 옳을 것이다.

지휘관들은 그렇게 믿기로 하고 여기에 필요한 제반 사항들을 챙기기로 했다.

***

원정군은 여산에서 하루를 낭비한 다음 숨 쉴 틈도 없이 북상을 계속했다. 그들은 하루의 강행군 끝에 북경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장애물인 운하 변에 다다랐다.

운하의 앞에는 상승군의 5개 여단을 비롯한 대규모의 방어군이 진세를 갖추고 있었다.

적이 농성이 아닌 야전을 선택한 것은 의외의 결정으로 여겨졌지만 그들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의외의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바로 싸움을 걸었을 것이다. 시간을 낭비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대를 전개하고 포병대가 방열되기만을 기다리던 원정군 지휘부는 참모로부터 이런 보고를 받았다.

“신의 황족 아이신무쿠 혁천이란 자가 사절로 찾아왔다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이신무쿠 혁천? 잠깐만 기다리게 하게.”

“예, 각하.”

오스틴 중장은 참모에게 잠시 기다리게 하고 신의 사정에 정통한 해군성 정보 장교를 불렀다.

해군성은 기본적으로 외무성의 정보까지 받기에 그들의 정보는 곧 왕국이 가진 정보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스틴은 해군 정보 장교가 막사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아이신무쿠 혁천에 대해 물었다.

콜리 소령은 전쟁 이전에 머릿속에 정리해 두었던 인물 정보를 떠올려본 다음 입을 열었다.

“아이신무쿠 혁천은 과거 제국 팔기의 요직을 역임한 황족입니다. 황실 보수파의 한 사람이자 정치적으로는 강주 왕을 지지하는 청림당의 반대 파벌에 속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강주 왕 오승도의 적이다?”

“예, 현재 숙친왕을 비롯한 오승도의 주요 정적이 힘을 잃은 제도에서 그나마 힘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상당한 거물처럼 보이는 것 같군.”

이야기를 듣고 있던 프리츠 대장이 말했다.

“하지만 그런 정도로 힘이 있는 정적이라면 강주 왕 오승도가 함부로 북경을 드나들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뭔가 그자의 흉계를 전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닐지 의심스럽지 않은가.”

다른 장성들도 그 점을 껄끄럽게 여겼다. 그렇지만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동서고금의 진리가 있는 만큼 그냥 돌려보내기에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장성들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아이신무쿠 혁천을 불러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지 말이라도 들어보기로 합의를 보았다.

잠시 후, 왕국 장교의 안내를 받은 장년 사내가 막사로 들어왔다. 그는 작달막한 키에 볼품없는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외견만 놓고 보면 별 볼일 없는 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옷을 장식한 화려한 옥과 값비싼 관모가 그런 인상을 불식시켰다.

장년 사내는 신의 방계 황족이자 제도에서 제법 힘이 있는 거인, 아이신무쿠 혁천이었다.

사내가 막사로 들어서자 원정군 지휘관들은 예를 차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혁천은 그 인사에 화답하며 자신을 맞이해준 데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인사나 하려고 만난 것이 아닌 만큼 그들은 마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본론을 나누었다.

“이곳까지 행차해주신 각하께 한 가지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 제국에서 보낸 사절이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알기로 각하는 강주 왕의 정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정적을 사절로 보낸 신의 저의가 알고 싶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설명을 들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총리아문에서 나를 사절로 보내면서 한 말이 자신들은 왕국과의 개전에 책임이 있어 교섭함에 원정군 측에 진정성을 보이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해서 정적인 이쪽이 나서면 협상이 좀 더 순탄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신에서 우리에게 진정성을 보이면서까지 협상할 이유가 있습니까.”

신이 그렇게 불리한 입장일 것 같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추측이었다. 원정군 지휘관들의 의문에 혁천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간단히 말해 정치 문제입니다. 제국의 남쪽 변방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에는 부담이 크지 않았지만 제도 주변에서 싸움이 길어지면서 제국 정부도 그리 편한 처지가 아닙니다. 한 번 정도는 교섭을 생각해볼 만한 상황이란 것이지요.”

혁천은 자신의 발언권을 확보할 목적으로 정권이 불안한 상황이라고 강조하였다.

원정군 지휘관들은 그것을 듣고 일단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주장이란 것을 인정했다. 전쟁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지면 전쟁에 끼지 않은 계파의 사람을 보내 대화를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 사절을 보낸 자가 강주 왕이란 부분이었다. 그자라면 눈을 뜨고 있어도 코를 베어가는 술수를 부리고도 남았기에 그 말 하나만으로 그냥 수긍하고 넘어가기엔 애매한 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각하께서 신의 총리아문이 명한 교섭을 받아들여 사절로 파견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유라면 간단합니다. 에우로페에서도 알듯 나는 강주 왕의 적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치세 하에서 살기엔 영 불편한 처지라 할 수 있지요. 그 치세를 무너트릴 기회가 저절로 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강주 왕의 치세를 무너트린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입니다. 물론 이는 신의 모든 황족들이 바라 마지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치세를 무너트리기 위해 여기서 무얼 하실 생각이신지 듣고 싶습니다.”

“그거야 간단하지 않습니까. 귀국에서 상승군을 이곳에 잡아두면서 그들의 신경을 끌어들이면 내가 성안에서 관리와 사람을 매수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문 하나만 열어드리면 일은 간단히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지휘관들은 아이신무쿠 혁천의 대답을 듣고 통역에게 통역을 하지 말라고 전한 다음 몇 마디를 나누었다.

“저자가 성문을 열어준다고 말을 했는데 제안 자체는 꽤 매력적입니다.”

“문제는 저자를 보낸 강주 왕의 의도이지. 일이 이렇게 되리란 것은 분명 그도 알고 있을 터. 그 의도가 저자의 계획을 위한 우리 군대의 정지에 있다면 제안 자체가 함정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부러 성에 자리를 잡지 않고 운하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강주 왕도 나름의 승산을 보고 진을 쳤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사절을 보낸 이유를 파악하고 서둘러 운하를 건너 공격할 것을 기다렸다 혹심한 피해를 주려는 것이 그의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원정군 지휘관들은 여산에서 하도 기기묘묘한 계략에 당하고 보니 적이 도대체 무엇을 의도하고 이 이상한 사절을 보냈는지 그 속내를 가늠하지 못했다.

사절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고민 없이 운하를 건너 공격했을 것인데, 말을 듣고 나니 괜히 머리만 복잡해졌다.

원정군 지휘관들이 고민에 잠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데 혁천이 입을 열었다. 그는 통역이 대화를 통역해주지 않은 것에 꽤나 불쾌한 듯 말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여러분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무례가 아닙니까.”

그의 항의가 전달되자 원정군 지휘관들은 짧은 논의를 마치고 서둘러 사과의 말을 꺼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각하의 제안이 상당히 놀라운 것이라 약간의 의견 교환이 필요했습니다.”

“그럼, 의견 정리는 된 것입니까.”

지휘관들은 잠시 시선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거절을 하더라도 지금은 동의한다고 말해두어 가능성을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습니다. 각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좋습니다.”

“대신 각하께서도 약속해주실 것이 있습니다. 우리 원정군이 각하의 협조를 받아 제도를 점령해서 권좌를 만들어 드리는 대신, 우리가 원하는 조건의 강화 협상안을 만들어 주시기로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물론 그리 해드리겠습니다. 황실을 역적의 손에서 구하는 일인데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그럼 협력에 대한 부분은 합의가 된 것으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런 셈입니다. 그럼 제도 함락까지 각하의 각별한 지원을 기대하겠습니다.”

원정군 지휘관들은 웃는 얼굴로 혁천에게 손을 내밀었다.

혁천은 그런 양이들의 손을 잡으며 이 운명의 갈림길에서 승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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