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6화. 도강 (2)
혁천이 교섭을 마치고 돌아간 직후 원정군은 상대의 의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승도가 지연전을 의도하고 협상을 걸어온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공격을 유발하려 한 것인지 떠보기 위해 운하 변에 포병을 방열하고 포격을 준비했다.
그들은 포격에 대한 상대의 반응을 관찰하고 그 행동을 통해 상대가 무엇을 가지고 운하에서 이쪽 전력을 받아치려 하는지에 대해 보기로 했다. 적에게 마땅한 방어 대책이 없다면 그대로 공격을 한다.
이것이 원정군이 내린 최종 결정이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방열되어 있던 포병이 포문을 열었다. 급하게 이동을 서두르느라 포탄을 미처 보충할 겨를이 없었던 포병은 최초 포격에 문 당 30발이라는 제한된 횟수만을 할당받았다.
적을 시험한다는 의도 하나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물량은 그것이 전부였다.
첫 포성과 함께 수십 발의 포탄이 운하를 건너 상승군의 진지로 쏟아졌다. 포탄은 그대로 상승군이 구축한 목책과 엄폐물들을 강타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데다 시계를 방해할 요소도 없어 포격은 효과적으로 진행되었다.
발란틴은 망원경을 들고 적의 움직임을 살폈다. 포격이 이루어지는 동안 특별히 이쪽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행동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야만인 놈들, 그냥 물러나는군. 처음부터 운하를 지킬 생각은 없었던 건가.”
상승군은 포격이 시작되자마자 일선 진지를 버리고 뒤로 물러났다.
발란틴은 이것으로 보아 적이 지연전을 목적으로 협상을 걸어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보병 연대 하나를 운하로 전진하게 했다.
기수가 깃발을 흔들자 붉은 코트들의 전열이 적을 향해 가슴을 쭉 펴고 걸어 나갔다. 용맹함으로 이름이 높은 고지 보병 연대다.
여자처럼 차려입은 보병들이었지만 그들의 전투력이 우습지 않다는 것은 원정군 지휘관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운하 변으로 슬쩍 다가섰지만 신은 아직 마땅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확실히 지금 시점에서 공격을 해보는 것도 좋을 성싶었다.
결심을 굳힌 발란틴이 도강 명령을 내리자 공병들이 보트를 들고 와 연대의 도하 준비를 지원했다. 포병 역시 대포를 교두보가 될 지점 주변으로 돌리고 이를 원호할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신은 이것까지 보고도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발란틴은 여기까지 보고 그냥 북경까지 진격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지휘관들도 그의 견해에 동감했다.
연대가 보트에 차례로 승선하고 운하를 건너는 동안 포병은 지휘부의 재가를 얻어 여유분의 나머지 포탄까지 대포 옆에 옮겨두었다.
이제 적을 원교에서 밀어내고 북경으로 진격하려는 원정군의 움직임은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원정군 보병 연대가 도강을 하여 교두보를 굳히려던 찰나에 신이 움직임을 보였다.
콰앙!
멀리서 은은한 포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운하 주변으로 수십 발의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강한 원정군 보병을 사정권에 둔 포격은 아니었지만 포격 자체는 비교적 정확했다.
포탄은 집중적으로 보병 주변에 떨어지면서 새하얀 연기를 만들었다. 그 새하얀 운무를 지켜보던 발란틴은 그 순간 적의 움직임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간파했다.
‘설마 아군 병력이 운하를 애매하게 건너간 시점에 연막을 치고 우리 병력을 잡아먹으려는 기도를 하는 것인가.’
아니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었다. 상대는 지금까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수를 여러 번 보여준 전적이 있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도강한 연대 병력이 위험했다.
이런 식으로 아군 연대들을 축차적으로 소모시켜 버리면 공성보다 효율이 좋은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보병을 분산해 다른 지역으로 옮겨 도강을 시도할 수도 없었다. 신 쪽의 정찰 역량이 원정군보다 우세하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간과하고 섣부르게 병력을 분산했다간 그대로 각개 격파의 기회를 제공할 여지가 있었다. 여산에서 바로 밀고 올라왔다면 몰라도 지금의 적 병력은 원정군이 쪼개지면 각개 격파를 시도할 정도의 전력은 되었다.
발란틴은 고민 끝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일단 운하를 건너는 부분은 조금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는 듯싶었다.
승도는 열기구 안에서 망원경을 들고 적 보병이 운하를 건너 퇴각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적이 이쪽이 친 연막을 보고 겁을 먹고 후퇴하는 것이 꽤나 볼 만했다.
심리적으로 적이 몰려 있지 않았다면 사실 통하기 어려운 잔 수였다. 연막을 친다고 해도 상승군 보병이 운하 변으로 몰려가 적 보병 연대를 치면 적 포병의 포격을 얻어맞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강력한 포병의 지원을 업은 채 운하를 등진 적의 정예 보병 연대를 단숨에 밀어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과거 반혁명 전쟁 당시의 이스페른 전투에서 승도 자신이 처했던 입장이 바로 적의 보병과 같았다. 그곳에서 강변에 몰려 있던 로망스 육군의 3개 사단은 신성 동맹군 10개 사단을 상대로 전멸의 위기에 내몰려 있었다.
하지만 그 위기는 강변에 바싹 전진 배치한 채 포격을 가해주던 아군 포병의 지원으로 견뎌낼 수 있었다. 뒤이어 아군 사단들이 속속 도강을 하면서 로망스 육군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멋진 대역전극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처럼 전투가 진행된다면 원교에서 상승군은 도리어 전멸될 가능성도 있었다.
일이 그렇게 풀리지 않은 것은 여산에서의 ‘패배’로 이쪽의 전략을 높게 평가한 원정군 쪽이 겁을 먹고 한 발을 뺀 탓이었다.
승도가 원교에 진을 치기로 결심한 것도 여산에서의 승리로 심리적 우위를 점한 탓이 컸다.
승도는 적 보병이 퇴각하는 것을 지켜보다 옆에 있던 장교에게 말했다.
“적에게 확실히 겁을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연막이 걷히기 전에 아군 보병 세 개 여단을 적이 넘어왔던 교두보 주변까지 접근시켰다가 물리도록 하세요.”
적이 물러갔는데 아군 병력을 적 포병의 사정권 근처에 넣으라니.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피를 보지 않아도 될 상황에 구태여 피를 보려 한다. 전력 보존의 측면에서는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전술적으로는 필요한 행동이었다. 심리적으로 위축된 적에게 자신의 ‘철수’를 정당화할 명분을 확실히 보여 줌으로써 그 판단이 옳았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이 소극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을 계속해서 도와주면 결정적인 기회에 큰 이익을 챙기기가 쉬웠다. 승도는 그것을 위해 포탄을 몇 발 맞아주기로 했다.
“여단 전진한다.”
승도의 지시가 떨어지자 황룡의 깃발을 든 검은 군복들이 발을 맞추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새하얀 연기로 앞을 알아보기 힘든 운하 변을 향해 나아갔다.
승도는 그 전진 속도를 조절하게 하면서 적 보병이 있었던 위치를 정확히 세 방향에서 압박하게 조율했다. 만일 적이 있었다면 버티기 어려웠을 것 같은 ‘모양새’를 정확히 연출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보병대가 운하로 나아가는 동안 승도는 슬슬 옅어지는 연막을 보았다. 이 시점에서 적도 아군 보병의 전진을 눈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승도는 적 쪽을 응시하며 손바닥을 문질렀다.
‘이번에 한 번 더 확실하게 속아서 우리 교섭 제의를 받아준다면 이 전쟁의 승패는 확실해진다. 원정군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공성의 승산이 없어질 정도로 방어군이 증강되면 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승도가 적진을 훑는 동안 원정군도 상승군의 전진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상승군 보병이 자신들의 보병 연대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무섭게 포문을 열었다.
수십 발씩 포탄이 우박처럼 운하 주변으로 떨어졌다. 그 포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서던 상승군 보병의 선두 대열이 포탄을 여러 발 두드려 맞았다.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것을 본 승도가 입을 열었다.
“부대를 정지시키세요.”
장교는 신속하게 그 명령을 전파하기 위해 기수를 호출했다.
그가 정지 명령을 내렸을 때 상승군의 선두는 이쪽 운하 변에 남아 있던 적 보병을 사정거리에 거의 넣기 직전이었다.
원정군 쪽이 깜짝 놀랄 만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대로 교전이 벌어졌다면 연대가 날아갈 것이라고 착각할 만한 상황이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승도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승도는 득보다 실이 큰 것처럼 보이는 이 전진으로 상대의 기세를 확실히 꺾었다고 판단했다.
남은 것은 적이 헌납하는 시간을 즐기며 전쟁의 승리를 굳히는 일뿐이었다.
***
황족 혁천은 제도로 돌아와 총리아문에 ‘조건’만 조율하면 협상에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건문은 제국 정부에서 수용 가능한 ‘조건’이라며 나름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혁천의 손에 들려주었다.
혁천은 이 교섭 안을 가지고 북경과 원교의 원정군 진지를 하루에 세 차례 오갔는데,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통과하는 북경의 성문 관리들과 자주 접촉을 하였다.
“각하, 이거 하루에 몇 번 성문을 드나드시는 것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양적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뭐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인데 고생이랄 것이 있겠나. 오히려 성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자네 같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이지.”
“과찬이십니다.”
“이렇게 자주 보게 된 것도 인연인데 오늘 저녁에 식사를 한 번 초대하고 싶은데 어떤가?”
혁천이 저녁을 초대하자 관료는 거절의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황족들이 끈 떨어진 연 신세라곤 하지만 아직 그 신분은 막강했다. 최소한 성문 관리 정도의 사람이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혁천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드나드는 성문의 관리들과 만나는 족족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는 이렇게 초대한 관리들에게 푸짐한 식사를 대접하고 선물도 주었다.
이 과한 대접에 관리들은 손사래를 쳤지만 혁천은 자신의 성의를 무시하면 곤란하다며 화를 내었다. 결국 관리들은 그 선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게 마련이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관료 사회 자체가 그랬다. 과거 시험에서 시험 감독관이 합격을 시켜주면 급제자들은 감독관을 스승으로 여기며 그를 중심으로 계파를 만들었다.
‘합격’이라는 대가를 주었으니 그에 대해 충성을 바치는 것으로 보답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국 황족 혁천이 선물을 주고 푸짐한 식사를 대접한 이상 아랫것들인 성문 관리들은 그에 대해 빚을 진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혁천에게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 이상의 대가를 주어야 도리였다.
신분이 높은 자가 아랫것에게 신경을 써서 무언가를 내려주면 아랫것은 높은 자에게 그 곱절의 것으로 성의를 표시해야 하는 것이 전통적인 관례였기 때문이다.
혁천은 정치에 밝은 인간이었기에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관리들과 자신의 끈을 만들었다.
단시간에 사람을 이렇게 휘어잡는 방법은 평범한 신분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혁천은 이렇게 만들어진 관계를 보다 공고히 하고 성문 관리들을 더욱 옥죄기 위해 그들의 부모에게도 따로 선물을 보내고 그 ‘철저한 근무 태도’에 대한 칭찬을 보냈다. 이렇게 자신을 알아주고 계속해서 호의를 보내면 어떤 형식으로든 보답이 불가피했다.
혁천은 자신의 은혜에 구체적으로 뭘 보답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심리적으로 상대에게 빚을 만들어 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 가지 요구를 하면 상대가 들어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른바 인간의 채무의식을 찌른 매수라 할 수 있었다.
돈을 주고 요구를 하는 매수를 하수라고 한다면, 요구하지 않고 은혜를 베푸는 매수는 고수라 할 수 있었다. 혁천은 바로 그런 종류의 매수를 할 줄 아는 자였다.
혁천은 이렇게 매수를 진행한 다음 그 진척 상황을 원정군 쪽에 알리면서 적당한 시간만 더 준다면 북경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확실히 만들 수 있다고 알렸다.
원정군의 입장에서도 운하를 건너는 것은 약간의 위험부담이 있었던 터라, 혁천의 말을 듣고 공격을 다시 망설였다.
“황족 혁천의 말대로 된다면 승산이 있습니다. 오승도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교섭을 제안했는지 아직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강주 왕의 정적인 혁천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그자와 당초 합의한 대로 일을 도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강주 왕의 운하 방어가 생각보다 탄탄합니다. 일차 도강 시도에서 증명되었듯 놈은 우리 병력을 잘라먹을 의도를 분명히 보였습니다. 그 위험을 감안하면 보다 안전한 도강 전략을 세울 때까지는 혁천의 제의를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원정군에게 의지가 충분했다면 승도의 허세에도 불구하고 한 번 운하를 강행 돌파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우회적인 길로 이길 가능성이 꾸준히 제시되는 데다 심리적으로도 공격이 불안하게 여겨진 탓에 원정군은 공격을 한차례 미루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운하를 안전하게 건널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운하 변을 따라 부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승도와 대치를 이어갔다.
그들의 의미 없는 행동 속에 야속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신과 원정군이 운하 변에서 치열한 신경전과 심리전을 벌이던 시각, 왕립 해군이 버리고 떠난 선진 앞바다로 수십 척의 선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선단의 주위로는 북양 함대 소속의 전열함과 프리깃이 다수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이 선단을 호위하기 위해 클레망소의 명령을 받아 여순만에서 약간의 휴식만 거치고 호송 작전에 동원된 배들이었다.
선진 해전에서 엄청난 손실을 본 북양 함대의 인적 물적 손실을 생각하면 전투가 끝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이렇게 동원되는 것은 무리한 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맡은 임무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그들이 동원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들이 호송한 선단은 모두 대형 상선으로 이루어진 배들이었다. 모두가 무역에 종사하던 배들로 별로 대단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었다.
실제 선진에서의 군사 작전에서 제국 당국은 엄청난 수의 상선을 간단히 자침시킴으로써 상선의 가치를 낮게 볼 수도 있다는 시각을 보인 바 있었다.
하지만 상선으로 이루어진 이들 선단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하찮지 않았다. 그들이 실은 화물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선단에는 자그마치 일만이 넘는 대병이 타고 있었다. 바로 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비수가.
그런 중요한 패를 실은 선단이니 무리가 아니라 함대가 전멸하는 한이 있어도 호송에 나서야 했다.
선단이 선진의 입구에 도달하자 해군 지휘관이 항구의 우측으로 배를 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에 상선 선장들은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이상한 놈들이군. 멀쩡한 항구를 두고 왜 해안에 배를 대란 거야.’
그들은 이전의 전투로 선진이 초토화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행상의 선장들도 기본적으로 해군의 통제를 받도록 된 전시 지침이 있었기에 그들은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시킨 대로 해안으로 배를 몰아갔다.
선단이 닻을 내리자 해군은 육상으로 보트를 하나 보내 해안의 상황을 살피게 한 다음 양륙을 시작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이 골치 아프고 위험한 일이 이제 끝이란 생각이 들자 행상의 선장들은 반색을 하며 보트를 내리게 했다.
“자자, 좌우를 맞추어서 보트를 내린다.”
선장들의 독려 속에 선원들이 보트를 내렸다. 강주 행상에서 직접 운용하는 직할 상선들과 달리 려에서 대리 운영해주는 상선에는 경험이 풍부한 선원이 부족했다. 그래서 보트를 내리던 중에 실수가 번번이 생겼다.
균형을 맞추지 못한 채 보트가 바다에 떨어져 전복되는가 하면, 일부 보트는 사람을 태운 채 기울어져 그 안에 탄 병사와 총을 모조리 물에 빠트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한바탕 난리가 났지만 대체적으로는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시간에 쫓기면서 급박하게 양륙을 재촉하지 않은 덕이었다.
약 삼십 분 만에 백 척이 넘는 보트가 바다로 내려졌다. 그때부터 양륙은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보트들은 해안과 모선 사이를 오가면서 수많은 병사들을 실어 날랐다. 병사들이 쓸 각종 군수물자도 꾸역꾸역 하역되었다.
하역이 진행되는 동안 북양함대의 군함들은 선단의 외곽을 경계하며 적 해군이 공격해올 시에 전멸을 각오하고 싸워서라도 선단을 지킬 태세를 보였다.
양륙은 정확히 여섯 시간 만에 끝났다.
동원된 상선의 규모를 생각하면 매우 오래 걸린 양륙이었지만 해안에 대고 상륙을 한 점, 선원들의 숙련도 부족을 생각하면 그나마 빠르게 일이 진행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전쟁의 향방을 가를 일대 변수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선진에 그대로 떨어졌다. 왕국은 여기에 대해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
상륙을 마친 군대는 봉황의 깃발 아래 질서정연하게 정렬을 마쳤다. 그들은 지휘관들의 훈시를 받으며 각 부대별로 도열한 다음 북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 전쟁의 시계추가 가파르게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