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420화 (420/425)

제420화. 사생결단 (3)

원정군 지휘관들은 기병의 예상치 못한 피해에 당혹감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만 서두르면 아직 기회는 충분하다고 여겼다. 일만의 적이 이곳까지 도달하려면 시간은 제법 소모되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일만의 적이 제국의 일반적인 비정규군 수준에 불과하다면 그렇게 걱정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보병 연대들이 태세를 다시 갖추자 전진을 명령했다.

준사관들이 선두에 서서 부대의 전진을 이끌었다.

각 연대의 깃발 아래 보병들이 대열을 갖춘 채로 적진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붉고 검은 군복들로 이루어진 군세가 적진 앞을 서서히 메우며 나아가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세계를 호령한, 강철 같은 심장의 사나이들의 전진이다. 이 병사들이라면 끝내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기수들이 펄럭이는 깃발을 든 채 병사들의 전진을 선도했다.

보병의 물결이 적진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가운데 제국군 포병이 다시 포문을 열었다. 원정군 포병은 아직 운하 건너에 있어 전투에 개입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하지만 보병의 질적 우세를 감안하면 포병의 지원이 없다 해도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병사들은 자신의 주변으로 떨어지는 포탄을 무시하며 적을 향해 똑바로 걸었다. 포탄이 떨어졌지만 그들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원정군 보병의 선두에 선 고지 보병들의 대열이 적 보병과 가까운 위치에 다다랐다. 고지 보병들은 만세 소리와 함께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우리들의 심장에 새겨진 긍지에 걸고 맹세한다. 연대는 죽어서도 전진한다!”

장교들은 보병들의 사격을 굳이 통제하지 않았다. 전장식 소총의 시대라면 전열 사격이 매우 중요했지만 후장식 소총은 그렇지 않았다.

사격의 통제보다 속사를 통한 화력 우세를 살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원정군 보병은 무시무시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조금 전의 교전에서 밀어붙인 것이 운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 무자비한 탄막을 쏟았다.

연사 속도와 정확성 모두 끔찍한 수준이었다.

상승군 보병들은 그 공격을 다시 견디지 못하고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원정군 보병은 그 기세를 타고 적에게 접근하려 했지만 기관포의 존재가 일방적인 흐름을 끊었다. 기병이 적진을 휘저었다면 진즉에 무력화되었을 기관포였다.

하지만 이렇게 보병이 앞에서 받쳐주는 상황에선 이야기가 달랐다. 보병과 기관포가 시너지 효과를 내어 원정군 보병의 강력한 화력을 상쇄했다.

상대의 화력이 비등한 수준의 파워를 내면서 원정군 보병의 공세가 탄력을 잃었다.

콰웅!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상승군 포병이 재차 불을 뿜었다. 이번에는 산탄이 아니라 아이언 볼이었다. 충격량을 앞세운 강철 구가 밀집된 보병들을 치고 지나가며 팔다리를 부러트렸다.

쇳덩어리가 지나간 자리로 끔찍한 혈선이 짙게 그어졌다.

지금까지 질적 우세를 앞세워 간단히 적진을 돌파할 기세로 공격을 진행하던 원정군 보병들의 기세도 여기서 한풀 꺾였다.

원정군 지휘관들은 이를 보고 일부 연대들을 측면으로 돌리게 했다.

왕국 근위 보병연대를 비롯한 4개 연대 규모의 공격 부대가 좌측면으로 돌아 움직였다. 그들은 그대로 적 본진의 좌익을 찌르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것을 본 상승군 쪽에서 주저 없이 후퇴를 알리는 깃발을 다시 올렸다. 이번에도 상승군은 본진을 버리고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적이 급속하게 물러나는 움직임을 보이자 정면에서 교전을 벌이던 보병 연대가 그 뒤를 추격했다.

전투는 언제나 퇴각 과정에서 사상자의 대부분을 발생시키게 마련. 여기서 적에게 확실한 피해를 주면 승부는 끝이었다.

“전군 착검!”

착검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사들이 총구에 칼날을 끼웠다.

“돌격!”

장교들의 명령이 떨어지자 원정군 보병들이 총검을 번뜩이며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와아아아!”

“승리까지 한 걸음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일부 뒤처진 상승군 보병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포병과 기관포를 지키던 자들도 달아났다. 포병이 무너지는 판이니 더 이상 적에게 저지력이 남을 공산은 없었다.

원정군 보병들은 적진에 뛰어들자마자 자신들의 깃발을 힘껏 치켜들었다.

전투는 이제 원정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이 나는 것 같았다.

“승리를 향해 전진!”

병사들이 승리감에 취해 함성을 질렀다. 원정군 장교들 역시 이 순간에 승리를 확신했다. 이제야말로 적은 끝이다. 그들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약 몇 발의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쏴!”

신의 군대 후미에 대기하고 있던 유목민 병사 몇이 일제히 불화살을 쏘았다. 그 화살들은 그대로 포병을 은폐하기 위해 쌓은 건초와 포병들이 남긴 화약 더미 위로 떨어졌다.

꽈광!

다음 순간 폭발과 함께 건초더미에 시뻘건 화염이 솟구쳤다. 불길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대량의 화약이 연소되면서 내는 연기였다.

짙은 연기와 화염이 솟구치는 통에 적진으로 막 뛰어들었던 원정군 보병들이 둘로 분단되었다. 지휘체계는 일시적이지만 그 충격으로 마비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군대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적이 혼란에 빠진 것을 본 신의 지휘관들은 전 보병에 착검을 명령하고 돌격을 명했다.

지금까지 고전을 거듭했던 제국군도 상황이 급변하자 자신들이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다.

“제국은 승리한다! 홍모귀들을 죽여라!”

“돌격!”

우렁찬 함성 소리와 함께 제국 보병들이 재차 반전하여 화염과 연기 사이에 갇힌 원정군 보병들을 향해 쇄도했다.

원정군 보병들은 이 혼란의 와중에 자신들을 향해 몰려온 적에 맞서기 위해 급하게 총검을 갖추었다.

“물러서지 마라. 승리가 코앞에 있다!”

양쪽 보병은 그대로 지옥 같은 풍경 속에 얽혀 총검을 주고받았다.

피와 살점이 곳곳에 튀었다. 갑작스럽게 전투가 아수라장의 난전으로 변하자 원정군 지휘관들은 대경실색했다. 이렇게 되면 전투를 단시간에 끝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괴물 같은 야만인 놈들.”

피칠을 한 붉은 코트가 침을 뱉으며 달려드는 단련의 가슴을 총검으로 쑤셨다.

각 부대가 쪼개진 상태에서 적의 공격을 받다 보니 훈련이 잘된 원정군 보병들도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상당수는 장시간의 전투로 지쳐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그래도 체격이 크고 전투에 능한 원정군 보병들은 백병전에서 쉽게 밀리지 않았다. 단련 정도의 상대라면 일대일에서 쉽게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교전은 일대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길 앞에 고립된 원정군 병사들은 더 많은 적을 상대해야 했다.

푸욱!

붉은 코트는 적의 가슴에 박힌 총검을 힘차게 뽑아냈다. 빛을 잃은 적병이 천천히 무너짐과 동시에 그 너머로 새로운 단련 하나가 총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미처 그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붉은 코트는 총검을 돌려 그 공격을 받아냈다.

하지만 적병은 그 방어를 예상한 듯 총검을 그대로 마주 그어 내렸다.

“이런 개 같은.”

그 바람에 상대의 날카로운 칼날에 붉은 코트의 손가락 네 개를 썩둑 자르고 지나갔다. 제법 고통에 익숙한 붉은 코트도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총을 놓쳤다.

적 단련은 그것을 보고 그대로 총검을 내질렀다.

붉은 코트는 곧 피를 토하며 뒤로 넘어졌다.

곳곳에서 양쪽 병사들은 죽고 죽이며 난투극을 벌였다. 교환비가 당초 ‘총격’을 주고받을 때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수준이 나왔다.

원정군 병사들은 일시적이지만 신의 두 배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예상치 못한 화공의 충격으로 조직력이 일시적으로 무뎌진 것이 이 말도 안 되는 교환비의 원인이었다.

왕국 본토의 높으신 분들이 봤다면 눈을 의심했을 만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 끔찍한 소모전의 와중에 원정군 보병들의 열이 연달아 무너졌다. 상승군 보병들은 계속해서 적 보병들의 대열을 무너트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적의 예봉을 본 장교들이 직접 칼을 뽑아 들었다.

그들은 위치를 고수하라고 악을 쓰면서 직접 적병들과 칼을 마주했다.

물론 장교들이라고 해서 병사들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들도 혼전 속에 무수히 쓰러져 갔다.

그래도 장교들이 희생을 감수하고 일선에 나서 모범을 보이자 흔들리던 병사들의 분위기도 잡혔다.

잠시나마 공황 상태에서 흔들렸던 보병들은 이내 기세를 회복했다. 그들은 해일처럼 몰려오던 적 보병들을 향해 총검을 마주 세웠다.

승도가 예상치 못한 연합군 장교들의 헌신. 그들의 노력으로 전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뛰어난 전술적 역량’이 판을 뒤엎는다. 그 농담 같은 말이 지금 현실이 되려 하고 있었다.

***

“제 위치를 지킨다. 물러서지 마라.”

“대 연합왕국의 명예를 걸고 현 위치를 사수하라.”

원정군 보병들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장교들의 독려를 받아 사자처럼 싸웠다.

짧은 시간 안에 혼란을 극복한 보병들은 적에게 더 밀리지 않고 단단히 제 위치를 지키고 섰다.

해일처럼 밀려들던 제국군의 기세는 이 탄탄한 저항 앞에 서서히 그 기운을 잃었다.

처절한 혈전이 계속되었지만 원정군 보병들은 적의 총검에 무너지지 않았다.

처음에 세 개, 네 개의 열을 무너트리며 고립된 적 보병 연대들을 일시에 쓸어버릴 기세였던 상승군의 창날은 무뎌졌다.

마침내 상승군의 전진이 멈추어 섰다. 밀리는 상황에서 안정적으로 마주 교전하는 모습으로 바뀌자 교환비는 차츰 상승군에 불리한 쪽으로 바뀌어 갔다.

승도는 이 흐름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예상은 했지만 빌어먹을 만큼 회복 속도가 빨라. 이래서 여기에 크게 기대를 걸지 않은 것인데.’

그는 적 보병들이 갑작스런 화공에 전력이 둘로 쪼개지고도 강력한 저항력을 보인 데에 이를 갈았다.

이렇게 되자 적의 고립된 전력에 대 타격을 가해 적의 기세를 꺾고 시간을 벌려던 계산이 꽤나 미묘하게 되어버렸다. 일이 잘 풀렸다면 일만의 우군이 도착하는 시점까지 적 주력을 붙들고 있었겠지만.

승도는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했다. 이제 불길로 쪼개졌던 적의 후속 전력이 정신을 차리며 좌우로 돌아 아군을 협공할 차례였다.

당연히 그렇게 되면 전투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전세를 바꿀 다음 수를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예비대도, 미리 준비한 포석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있는 것은 그의 탁월한 두뇌뿐이었다.

승도는 주위에 명해 자신의 깃발을 가져오게 했다.

“전하, 깃발은 왜 가지고 오라고 명하신 것입니까?”

“전세가 어렵다면 시간을 벌 수 있도록 속임수를 하나 더 써야겠습니다.”

그는 깃발이 가지는 상징성을 잘 알고 있었다.

승도 자신의 깃발은 곧 그를 의미하는 동시에 제국 자체를 상징했다. 그런 만큼 제국의 깃발이 꺾인다면 병사들의 사기가 전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적도 동방에 대한 경험이 많은 만큼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승도는 그것을 이용해 마지막 속임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곧 기수가 승도의 깃발을 가지고 왔다. 그 깃발은 황룡의 표식 아래에 별과 달을 새기고 있었다. 바로 강주 왕 오승도의 문장이었다.

이 깃발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화려한 색상을 자랑했다.

기수가 깃발을 든 채 그 앞에 대기했다.

승도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경호를 맡은 기마 보병 대대의 지휘관을 불렀다.

그가 부른 기마 보병대대는 강주에서 북경으로 올라올 때도 그의 수행을 맡을 만큼 신뢰받는 부대였다.

하지만 오랜 전투로 그 전력이 깎이고 깎여 ‘대대’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그 수효는 중대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지금 그대에게 긴히 명할 것이 있습니다.”

“하문하십시오.”

대대장이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승도는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다음 기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친구가 화염 너머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호위해 주세요.”

그 이해 못 할 명령에 대대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기수를 화염 너머까지 호위해서 보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거기에 이번 전투의 승패가 걸려 있습니다.”

승도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것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을 참이었다.

기수가 만일 화염 너머까지 무사히 도달한다면 연막 너머를 보고 있지 못한 원정군 지휘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당연히 연막 너머에서 자기편이 패했기에 상승군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승도의 깃발이 화염 너머까지 넘어왔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내릴 명령은 하나밖에 없었다. 상황을 알아보라고 전령을 보내면서 각 부대의 움직임을 정지시킬 것이다.

승도는 여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기로 했다. 적이 속지 않는다면 원정군 보병은 그대로 제국군을 격파하고 승리한다.

승도의 단언에 대대장은 굳은 표정으로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장교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믿겠습니다. 이 사람의 기대를 지켜주세요.”

“목숨을 바쳐 전하의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대대장은 승도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병사들에게 말에 오르라고 말했다.

승도는 기마 보병들이 기수와 함께 말에 오르는 모습을 보며 입술을 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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