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루스의 반지-421화 (421/425)

제421화. 사생결단 (4)

승도의 예상대로 후속하던 원정군 병사들은 불길을 우회하여 하나둘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들이 교전에 합세하면서 제국군은 다시 급격하게 밀리기 시작했다.

“연합왕국은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다.”

붉은 코트로 이루어진 거센 물결이 제국군의 측면을 때렸다. 일시에 단련들로 이루어진 열들이 연달아 무너졌다. 백병전이었던 만큼 질적 우세는 크게 발휘되지 않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제국군은 빠르게 뒤로 밀렸다. 전장에 시체가 겹겹이 쌓였는데 태반이 제국 병사들이었다. 이 아수라장 앞으로 기수와 기마 보병 대대가 나타났다.

“적 보병을 뚫는 것은 어려우니 화염 사이로 나가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불길이 일어난 지 시간이 조금 지나 말을 타면 못 지나갈 것도 없을 듯합니다.”

대대 참모가 말했다.

불길 자체가 ‘건초’의 힘을 빌리고 있었던 까닭에 화염의 지속력은 상당히 나빴다. 연기 자체는 처음과 같이 지독한 수준이었지만 불길은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보병이라면 몰라도 기병이라면 이 중앙을 뚫고 지나갈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정면의 적을 돌파해서 지나가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럴 것 같군. 모두 각오는 되었나?”

대대장이 묻자 병사들과 장교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좋다. 형제들의 기개와 충성심은 전하와 하늘이 알아주실 것이다. 모두 칼을 들어라.”

“대신제국 만세!”

병사들은 그 말에 화답해 칼을 뽑고는 기수를 중심으로 대형을 갖추었다.

대대장은 그 모습을 찬찬히 본 다음 앞으로 시선을 옮긴 채로 칼을 뽑아 들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사내에게 가장 값진 영예다. 그 명예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필사의 각오로 나아가도록 하자. 돌격!”

대대장이 돌격 명령을 내리자 기마 보병 대대가 일시에 말을 내달렸다. 상승군 병사들은 총검을 나누는 와중에 아군 기병의 돌격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급하게 길을 내주었다.

기마 보병은 그들이 내준 길을 따라 말을 내달렸다. 그 사이로 오승도의 깃발이 펄럭이며 오연하게 전장을 갈랐다.

그 깃발이 적진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자 지금까지 적의 기세에 눌려 밀리던 병사들도 힘을 받았다.

병사들이 힘을 내어 적과 겨루는 동안, 기마 보병의 선두가 총검을 든 적 보병들 사이에 이르렀다.

기마 보병은 그대로 적을 향해 칼을 내려쳤다. 마상 검술에 익숙한 병사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도 말을 오랫동안 타온 이들이었기에 어느 정도의 공격은 해낼 능력이 있었다.

기병이 내달리며 칼을 내려치는 통에 총검을 쥔 병사 여럿이 피를 뿌리며 넘어졌다.

하지만 정예 보병들이란 이름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적 기병의 돌격에 잠시 당황했던 원정군 보병들은 난전 상황에서도 용케 총검을 곧추세워 적 기병을 요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내 그들은 기병 앞에서 열을 짜 총검을 내질렀다.

첫 열을 가볍게 뚫었던 기마 보병 여럿이 순식간에 낙마했다. 대대장은 그것을 보고 방향을 재빠르게 틀게 했다.

다섯 명의 동료를 잃었지만 판단이 빨랐던 덕에 그다음 희생은 모면할 수 있었다.

기마 보병은 비스듬하게 달리면서 적 보병들의 목을 쳐 날렸다. 예상할 수 없는 방향에서 불시에 출현한 적 기병의 공격에 원정군 보병들은 효과적인 저지를 해내지 못했다.

답답한 비명 소리와 함께 보병들이 연달아 나자빠졌다. 하지만 기마 보병들도 적진을 헤집고 나아가는 와중에 그 수가 빠르게 줄어갔다. 그들이라고 무적일 수는 없었다.

처음에 육십이 넘는 수가 내달렸지만 지금에 와서는 고작해야 열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중앙에 선 기수를 보호하는 대형은 탄탄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기수에게 총검이 날아가면 다른 자들이 몸을 날려서라도 막았다. 그 헌신적인 희생 덕분에 원정군의 중앙을 뚫고 지나가면서 기수는 자신의 깃발을 놓치지 않고 적진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마침내 불길 앞을 가로막은 마지막 적 보병의 대열 앞까지 기마 보병이 도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에 놓인 적의 대열을 힐끗 쳐다본 다음 우렁찬 함성 소리와 함께 적 보병을 향해 돌격을 이어갔다.

***

적진에 불길이 일어난 다음부터 원정군 지휘관들은 최전방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그렇지만 자신들의 보병이 가진 능력을 믿고 있던 그들은 적의 ‘최후 발악’에도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들은 야전에서 자신들이 제대로 벼르고 싸움을 건 이상 패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적의 전력이 그들이 생각한 수준 이상일 수가 없는 한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생각하지 못한 일만의 적이 다가오기 전까지 승부를 끝낼 수 있다. 그들은 약간의 불안감을 그렇게 다독이면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참모 장교 하나가 손을 들어 불길 앞을 가리켰다.

“저기. 저길 보십시오. 적의 깃발입니다. 강주 왕의 깃발입니다.”

그 말에 장성들이 황급히 망원경을 들었다. 불길 너머에서 한창 아군에 밀리고 있을 적이 연막 너머로 강주 왕의 깃발을 들고 나왔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들은 잠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니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아군 병사들이 완전히 박살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난 강주에서의 경험을 떠올렸다.

당시에 그들은 ‘보지 못한 곳’에 가공할 덫을 마련해둔 승도에게 호된 맛을 본 경험이 있었다.

촌각이라고 할 만한 시간에 수천 명이 싹 갈려나간 전적이 있다 보니 불안이 증폭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동방에서 지휘관의 깃발은 곧 부대의 상징과 같았다. 하물며 제국 최고 권력자의 그것이라면 ‘제국의 상징’이나 마찬가지.

그런 깃발을 함부로 위험한 곳에 내보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행동을 할 때는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승리를 과시할 때다.

장성들은 깃발을 든 적의 기수를 주시하다 그 주변으로 달려드는 아군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적의 기수는 혼자 남은 상태에서 용감하게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아군 병사들을 향해 깃발을 휘두르며 분전을 이어갔다.

총검에 찔리고 칼에 맞았지만 기수는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의 깃발을 놓지 않았다. 장성들은 처절한 혈전을 벌이는 적의 기수를 보다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강주 왕의 깃발이 앞으로 나온 이유가 뭐라고 보는지 의견들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쪽 병력이 괴멸했다고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은 기만일 수도 있습니다. 놈이 그렇게 믿게 만듦으로써 우리에게 철수를 강요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생각 자체가 놈의 유도라면 어쩔 생각입니까? 제 놈의 본진에도 생각지 못하게 대포를 숨기고, 불을 피울 준비를 한 작자입니다. 오히려 이쪽 병력을 전부 끌어들여서 날려버리면 우리는 재기불능이 되고 말 겁니다.”

그 위험이 가짜라면 좋겠지만 승도는 그렇게 한 전적이 있었다. 그런 만큼 장군들은 쉽사리 적 기수의 존재에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전장에서 판단은 머뭇거려선 안 되었다. 그들은 고심 끝에 기수에게 신호를 전하게 했다.

‘현 위치에서 전진을 멈추고 잠시 대기하라.’

동시에 장교 하나를 말에 태워 전방으로 보냈다. 직접 상황을 보고받고 결정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정지는 원정군 보병들이 피를 흘려 얻은 기회를 날려버렸다.

원정군 보병들은 좌우에서 아군이 합류하며 공격에 탄력을 받던 차에 ‘제지 명령’을 받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어 그들은 그 자리에서 적을 바라보며 멈추어 서야 했다.

그 잠깐의 정지를 이용해 제국군은 뒤로 물러나며 전열을 정비했다. 그대로 속공을 했다면 제국군은 전멸을 면키 어려웠지만 이렇게 호흡을 돌릴 기회를 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수선한 전열을 재편하고 방어 위치를 다시 갖출 시간을 가진 이상 한 번에 간단히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기 어려웠다.

원정군 장성들은 뒤늦게 그에 대한 보고를 받고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원정군에게 주어졌던 ‘주도권’은 끝났다.

***

‘운명이 배반당하는 순간은 항상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게 마련이다.’

우스만 제국에 멸망당한 작은 공국의 군주 블라드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에 무너진 인간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동녘 하늘로 찬란하게 떠오른 태양을 등지고 동쪽 지평선 너머로부터 질서 정연하게 열과 오를 맞춘 일만의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휘관들은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전방에서 싸우고 있던 병사들은 그것을 몰랐다. 그랬기에 잘 싸울 수 있었지만.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다가오는 적의 존재를 알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다 지나도록 적의 주력을 섬멸하지 못한 상태에서 ‘후방’에 일만의 적 보병이 다가왔다.

봉황의 깃발을 펄럭이며 대군이 다가오자 원정군 지휘관들은 급하게 세 개 연대를 빼내 후방으로 돌렸다.

원정군 지휘부는 새로운 적이 ‘기만’ 혹은 ‘허세’라는 데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 판단을 허황되었다 말할 순 없었다. 이 이상의 병력을 차출하면 전면에서 승리를 얻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하게 마련.

그들로선 이 이상의 수를 내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대국은 그것으로 확정되었다.

세 개 연대가 차출된 바람에 전방에서 싸우던 나머지 연대들은 적에 대한 공세 여력을 거의 상실해 버렸다.

뒤늦게 방열을 마친 포병이 개입하였지만 전세는 돌이킬 수 없었다.

상황이 총체적으로 뒤집히자 승도는 아군 일만 대군의 ‘실체’를 감추기 위해 그 주변을 따라 기동했던 유목민 기병들까지 불러들였다.

전체 전력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점했던 원정군은 이제 적에게 수적으로 압도당하는 처지에 몰렸다.

“저, 적 기병 출현입니다. 추정 일천 이상.”

보고를 하는 부관의 음성이 떨렸다. 이 상황에서 기병까지 추가된다면 더 볼 것도 없다. 당장 적이 대치를 유지하면서 기병으로 보급선만 잘라도 군 전체가 앉은 자리에서 고사당할 판이다.

냉정하던 장군들조차 이제 창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적은 전세가 변할 거라고 예상이나 한 듯 결정적인 국면에 새로운 전력을 추가로 불러들였다. 원정군은 적의 압도적인 전력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후, 후퇴 명령을.”

오스틴 중장이 입술에 침을 바르며 어려운 얘기를 꺼냈다.

“이, 일단 운하 건너편에서 전열을 수습합시다.”

프리츠 대장이 동의하자 즉시 신호가 날아갔다.

“후퇴! 후퇴한다!”

뒤늦게 전군 퇴각 명령을 받은 장교들이 고함을 질렀다.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 최전방 보병 연대들은 기세등등하게 도강했던 운하를 도망치는 생쥐 꼴로 다급하게 건너기 시작했다.

그 뒤를 매섭게 따라온 상승군과 단련들이 총구를 겨누었다. 그들은 한나절에 걸친 ‘수모’를 돌려줄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발사!”

타타탕.

요란한 총성이 울릴 때마다 수백 명의 병사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밀집된 채 달아나는 적병들은 너무나 좋은 표적이었다.

원정군 지휘관들은 여기에 대응할 수단이 전무했다. 배다리와 운하 주변으로 원정군 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깔렸다.

참담한 패배는 결정적인 국면으로 이어졌다. 후방에서 다가온 적은 세 개의 ‘지친’ 보병 연대를 간단히 쓸어버렸다. 삼천여 명의 보병으로 상대하기에 ‘려의 일만 대군’은 너무 강하고 많았다.

이 1만 대군이 ‘허세’라는 데 마지막 희망을 품었던 원정군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들이 단순한 비정규군이었다면 원정군의 저지가 먹혔겠지만, 이들 병력은 한 국가의 국력이 집약된 군사력의 총체였다.

그런 전력을 전투로 지치고 소모된 연대 몇 개로 막겠다는 생각이 오만한 것이었다.

앞뒤로 적이 밀어붙이는 와중에 원정군은 거의 삼분의 일의 병사들을 잃었다.

이런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원정군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전면 붕괴의 상황 속에서 명예를 저버리지 않는 장교와 병사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제국군은 궁지에 몰린 적을 끝까지 추격하는 대신 운하에서 밀어내는 수준에서 교전을 멈추었다. 계속해서 싸움을 걸기에는 그들도 심하게 지쳐 있었다. 소모도 컸다.

원정군은 적이 추격을 늦추자 안도하면서 황급히 여산 방향으로 부대를 물렸다.

전쟁에서 패할 것이 자명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전군이 몰살하는 일은 피해야 했다.

전력이 남은 상태에서 적과 이야기하는 것과 전멸한 상태에서 말을 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원정군은 그렇게 북경을 목전에 두고 벌인 ‘처절한 일대 격전’에서 패배했다.

한때 놀라운 전술적 역량과 투지로 승리를 코앞에 두기도 했지만, 담대한 수를 연달아 내던진 오승도의 기만 앞에 그들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것으로 전쟁은 사실상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은 것은 동방 원정군과 신이 어떤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하는지의 여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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