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5화. 승천 (4)
연합왕국은 근대 국가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재앙을 맛보았다. 군사적 패배, 재정 파산, 내전, 파업, 식민지의 독립, 위신 실추, 영향력 감소. 하나같이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흔들기에 충분한 사안들이었다.
그런 만큼 왕국이 받은 피해도 끔찍한 수준이었다. 연이은 ‘증시의 대폭락’과 은행의 줄도산 속에 왕국 경제는 그 뼈대가 부러졌다.
재기의 가능성조차 없다고 단언할 정도의 피해였다.
하지만 왕국 최고의 금융 자본가들은 조국이 철저한 몰락의 길을 밟는 이 상황 속에서도 손실을 최소화하며 파고를 넘겼다.
이 전쟁의 배후 중 하나인 로스실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로스실트는 왕국에서 가장 빠른 정보망을 가진 자답게 ‘패전 소식’을 비롯한 각종 악재를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
그는 이 정보의 우위를 이용해 모두가 손해를 보는 ‘폭락장’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며 자산을 챙기는데 성공했다.
로스실트는 대부분의 자산을 로우랜드와 세이비아, 오스티아 등지로 이전시킴으로써 재앙을 피해갔다.
하지만 그도 손해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략 자산의 사 할을 손해 보았다.
모두가 몰락하는 와중에 육 할이라도 건졌다면 ‘대단한 선방’을 했다고 할 수 있었지만 피해액은 굉장했다.
무엇보다 큰 손실은 국제 금 시세를 조정할 수 있는 ‘금의 지배자’로서의 권리를 잃어버린 데 있었다.
금 가격을 뜻대로 조절하던 은행 카르텔이 무너지면서 그의 경제적 위상은 대폭 무너졌다.
그가 잃은 것은 비단 경제적인 부분에 그치지 않았다.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었던 ‘연합왕국’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힘을 쓰고자 한다면 연합왕국을 대신할 다른 나라의 힘이 필요했다. 그럴 나라가 있다면 진즉에 그는 본거지를 옮겼을 것이다.
하지만 연합왕국이란 초강대국을 대신할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로망스와 오스티아?
그들은 이제 빈사 상태에서 벗어난 나라였다. 그들은 도움이 될 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설령 된다고 해도 로스실트의 협잡에 이를 갈 텐데, 손을 잡을 턱이 없다.
프리지아?
그들은 비교적 국력은 충실했지만 본질적으로 육군국이었다. 거기에 로망스, 오스티아와 적대 관계를 맺었고 루시가 에우로페로 진출해오는 판이었다.
이런 처지에 외부 세계로 눈을 뻗칠 여력이 있을 턱이 없었다. 거기다 오승도가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인 마당에 왕국 측과 손을 잡을지도 미지수였다.
손을 잡는 건 어디까지나 이익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과거의 로스실트라면 몰라도 지금의 그는 이익을 나눠줄 수 있는 강자가 아니었다.
로우랜드나 스와질란드, 세이비아 등의 경우에는 세계정세에 힘을 끼칠 기본 국력이 모자랐다.
남은 것은 루시인데, 그들은 동방형의 전제 국가 구조를 취하고 있었다. 두마(의회)를 통해 황제를 다룰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힘들었다.
황제 본인도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이 나라를 다룰 바에야 왕국을 다시 키우는 편이 속 편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세계 최고의 권력자로서 가졌던 영향력도 무너지고 있었다.
각국에 깔아둔 강력한 자금력과 인맥은 건재했지만 그의 힘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하지만 불길한 소식은 아직도 더 남아 있었다.
“주인님, 신임 수상으로부터 온 전갈입니다.”
“가지고 와.”
로스실트는 파이프를 내려놓으며 집사에게 말했다.
잠시 후, 집사가 수상의 서신을 가지고 들어왔다.
집사는 고개를 숙이고 서신을 건넸다.
로스실트는 집사에게 손짓해 물러가게 하고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새로 수상이 되었으니 내게 인사라도 하려는 것인가. 하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 굳이 서신을 보내는 것은 썩 좋은 생각이 아닐 텐데.’
로스실트는 시기가 맞지 않다고 생각을 하면서 수상의 서신을 뜯었다.
‘로스실트 의원.
이번 전쟁과 관련한 대중적인 불만으로 전쟁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의 목소리가 높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겁니다. 전쟁 한 번에 나라가 무너질 판이니 그 어느 때보다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아시리라 봅니다. 사정이 그러다 보니 왕실의 책임도 거론되는 판이라 의원을 우리가 나서서 보호하기가 어렵습니다. 의원을 보호하다가는 우리 당도 보수당처럼 침몰할 판입니다. 하니 의원께서 잠시 나라를 떠나주셨으면 합니다. 아시는 이들이 많은 오스티아로 여행을 가시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의원의 오랜 벗으로서 부탁을 드립니다.’
자유당 출신 신임 수상의 편지를 읽은 로스실트는 그것을 손안에서 구겨버렸다.
양당제를 표방한 연합왕국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나라의 두 정당은 모두 그의 수중에 있었다. 자유당도, 보수당도 모두 그의 돈을 먹고 자란 장난감이었다.
애송이들이라면 몰라도 정계의 거물들이라면 그 같은 이치를 모르지 않았다.
건방진 편지를 보낸 신임 수상 리브 백작도 그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실상 나라를 떠나달라는 무례한 내용의 서신을 보낼 정도라면 정계 일각에서 그의 책임론에 대한 말이 크게 돌고 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건방진 것들. 감히 내게 이 나라를 떠나라고? 나는 이 나라의 지배자야. 내 은혜로 빌어먹은 것들이.”
왕국의 국력이 쇠하고 경제적인 파워가 줄긴 했지만 그는 아직 강자였다. 이런 무례한 이야기를 들을 처지는 아니었다.
그는 구겨진 서신을 내던졌다.
하이에나 같은 것들. 하지만 수상의 말을 무시할 순 없었다. 여기서 버티다 리브 백작이 실각하기라도 하면 최소한의 보호막마저 날아가고 만다. 강경파인 브루스 같은 애송이가 집권해 봐라. 그땐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잠깐의 수모를 견뎌야 하나?
로스실트는 방을 오가며 자존심과 실리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했다. 우둔한 천민들의 기억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내리는 소나기만 피하면 왕국으로 복귀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세계의 지배자라 자부하던 자신이 물러서야 한다는 사실에 울분이 터졌다.
몇 달 전만 해도 이런 굴욕을 맛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승도!
그 빌어먹을 동방의 천것.
그놈이 자신의 왕국을, 세계 제국을 무너트렸다. 놈만 없었다면.
로스실트가 이내 고함을 질렀다.
“집사!”
“예, 주인님.”
“프리지아의 종가로 가겠다.”
“종가에 기별하겠습니다.”
‘내가 다시 돌아오는 날, 네 목을 조를 올가미를 준비할 것이다. 오승도.’
로스실트는 애써 분을 삭이며 망명을 준비했다.
***
한때 연합왕국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렸던 신은 이제 주변국들로부터 그 입지를 인정받는 신흥 강국으로 올라섰다.
그 국력은 동방 전역을 넘어 그 주변 세계에 미쳐 ‘미개한 동방 국가’라고 웃어넘길 수준을 초월했다.
오만한 에우로페 인들도 이제는 제국의 위치를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가 정가에 나오기 시작하자 각국 정부는 손익을 따져본 연후에 상주 외교관 파견을 요청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양국이 서로 상주 외교관을 파견하여 의사를 나누는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는다. 이는 제국을 동등한 대화의 상대로 인정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에우로페 열강들이 비에우로페 국가와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었던 전례는 없었다. 기껏해야 공사를 파견하는 수준에 그쳤다. 하나 이제는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제국은 연합왕국을 패배시키고 동방에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함으로써 세계정세에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격을 증명했다.
거기다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까지 갖추었으니 이들을 무시하고 국제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열강의 외교관 파견 요청에 대해 승도도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대사를 파견함으로써 제국의 국제적 지위를 공인받고, 국제 문제에서 신의 지분을 챙길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승도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행상의 수장들을 불렀다.
“여러 열강에서 우리 신과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자고 제의해 왔습니다. 이 사람도 그럴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상주 외교관이 있다면 우리 행상을 비롯한 여러 제국 상인들이 장차 해외로 나아가 장사를 하려면 ‘보호’를 받을 우산이 필요한 것은 물론입니다. 외교관이 상주하고 있다면 현지에서도 공정한 처우를 받기가 쉽습니다.”
행상 노진승이 말했다. 총상을 지냈던 늙은 상인은 과거 동료 행상이 사기를 당했을 때 정부의 도움이 없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기를 당한 행상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역만리 뱃길을 떠나 재판까지 벌여 승소를 얻어냈지만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정부의 도움이 있었다면 그런 참담한 일은 겪지 않았으리라.
노진승의 말에 나머지 행상들도 동감의 뜻을 보였다.
“그렇습니다. 비빌 언덕이 있고 없고는 차이가 큽니다. 무엇보다 우리 제국 상인들은 ‘모험’보다 ‘안정’을 좋아하는 성향이 커서 관의 보호가 없는 곳으로는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상주 외교관’이 있어야 우리 상인들의 해외 진출도 가속화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아울러 상인들이 자력으로 따낼 수 없는 정부와의 거래도 관에서 주선해줄 수 있으니 여러모로 득이라 여겨집니다. 우리 상인들이 돈을 벌어야 그만큼 제국의 재정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상인들이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승도도 마음이 편해졌다.
“모두 대사급 외교 관계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니 이 사람도 마음이 편하고 좋습니다. 다만 우리 제국의 외교 부처에는 상주 외교관을 맡을 인재가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습지요.”
행상들도 그의 지적에 수긍했다. 제국의 외국 사무를 담당하는 총리아문을 위시한 각 부처의 관료 태반은 아직도 꽉 막힌 과거의 보수적인 관료들이었다.
그들은 외국어 한 줄을 구사할 줄 모르는 것은 물론, 행정 실무에 대해서도 그리 밝지 않았다. 잘 아는 것은 예법과 기존의 관례였다.
물론 전통적인 동방의 외교에 한정한다면 그들도 쓸모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에우로페 국가들을 상대로 그런 이들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외국의 상황에 밝은 행상에서 이 일을 맡아 주셨으면 하는 것이 이 사람의 생각입니다. 각 행상의 요인이나 대인들이 상주 외교관 자리를 맡아주시면 마음이 놓일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승도가 그 속내를 비치자 행상의 요인들이 잠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의 최고 권력자인 승도의 부탁이니 거절을 할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명령을 내리고도 남았을 위치.
하물며 이 일은 그들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말이 해외로 나가는 상인들이지 그럴 만한 위치에 있는 거상들은 행상이 사실상 유일했다.
그들은 고민 끝에 답을 내놓았다.
“전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향후 적당한 인재를 골라 전하께 명단을 올리겠습니다.”
승도와 행상의 수장들이 결정을 내리자 신은 각국 정부와 대사급 관계를 맺기로 하고 ‘현재 파견된 외교관’들을 모두 대사로 격상시키든지 새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진정으로 비상하는, 제국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로스실트 남작이 망명하자 자유당 정권은 민심 안정책을 내놨다. 승산이 보이지 않는, 돈과 물자만 무제한으로 들어가는 식민지 전쟁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왕국 정부의 결단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식민지 몇 곳의 독립을 인정하면 나머지 식민지들도 줄줄이 들썩일 수 있었다. 그 위험을 알면서 식민지 독립을 승인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세계 제국으로 군림하던 연합왕국의 영광이 완전히 저물었다는 건 확실해졌다. 이번에 독립한 식민지들은 식민지 세수 거의 전부를 책임지던 알토란같은 땅이었다.
대부분의 식민지가 적자 경영 상태란 걸 고려하면 왕국의 식민 제국은 사실상 해체된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 식민지가 없는 나라들보다 못한 처지라 해야 할 것이다.
왕국은 이 결정으로 전쟁의 수렁에서 겨우 헤어 나왔지만, 누적된 사회적 불만과 경제적 혼란을 단시간에 수습할 순 없었다.
프리지아로 건너갔던 로스실트는 이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세계 제국 연합왕국의 공식적인 해체는, 그의 반격 계획에 사형선고를 내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소란이 잠잠해지는 대로 왕국으로 돌아가 신에 반격을 가하려 했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리브 이 미친놈이. 감히 내 제국을!”
로스실트는 격노했지만 상황을 바꿀 순 없었다.
왕국에서 망명한 제왕에겐 수상을 갈아치우고 결정을 번복하게 만들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게 가능하다 해도 대세는 기울었다. 민심은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로스실트는 화를 터트리다 목 뒤가 화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숙부님!”
프리지아 종가의 가주 로스베르크가 급히 달려와 로스실트를 부축했다.
“내, 내 제국이. 오승도, 그 그놈을.”
로스실트는 몇 마디를 더듬거리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격심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뇌의 모세혈관이 터진 것이다.
“집사! 당장 의사를 불러라! 어서!”
로스베르크가 고함을 지르는 동안 로스실트는 자신의 몸이 마비된 것을 느꼈다.
한때 세계를 지배하며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르던 제왕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좁은 교도소에 갇힌 죄수 신세가 됐다. 황금과 권력의 힘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육체란 절대적인 감옥에.
‘아, 안 돼.’
로스실트는 손가락을 움직이려 애썼지만 그의 육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이럴 순 없다. 나는.’
로스실트는 필사적으로 눈꺼풀을 깜빡였다.
기나긴 세월 오승도의, 로망스 황제 필립의 적수로 군림하던 대자본가는 이제 눈꺼풀을 움직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로스실트란 말이다!’
세계의 제왕은 소리 없는 절규를 터트리며 역사의 뒷면으로 퇴장했다.
에필로그
제국을 둘러싼 오랜 음모와 협잡은 끝났다. 대자본가 로스실트가 쓰러지면서 제국을 둘러싼 암운의 기류는 완전히 걷혔다.
로스실트가 거느렸던 거대한 금융 제국은 친족들에 의해 찢어졌고, 그 과정에서 로스실트 가문의 결속도 깨졌다.
가문의 계승자들은 원수보다 못 한 사이가 된 친족들과 이전투구를 벌이며 빠르게 영향력을 잃어갔다.
승도와 메리는 여기에 쐐기를 박듯 구 연합왕국 출신 자본가들의 시장 진출을 막아 그들이 재기할 기회마저 앗아갔다.
연합왕국의 해체와 전쟁 승리를 기점으로 신이 상승세를 타자 침체에 빠진 에우로페의 기술자와 인재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아 신으로 몰려들었다.
기술과 자본이 선순환 구조를 일으키며 경제 성장을 견인하자 제국의 국력도 욱일승천하였다.
연합왕국과의 전쟁이 끝날 당시만 해도 신흥 열강 정도의 대접밖에 받지 못했던 신은 이제 잠재적인 패권국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제국의 달라진 위상은 세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승도의 사촌 동생으로서 로망스 대사로 파견된 오경석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교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그 이유는 모두 미인계를 써서 제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두려는 에우로페 귀족들의 ‘필요’ 때문이었다.
미개한 동방인이라는 말은 어느 순간 쏙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은 이렇게 제국의 위신을 드높인 승도의 공이 하늘을 덮을 만큼 높다고 말하면서 ‘제위’를 이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저자에서 이런 말이 나오자 곧 조정에서도 ‘양위’에 대한 문제가 나왔다.
승도는 조정의 양위 주장에 대해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대체 방안’을 내놓았다.
자신의 여동생이 낳은 조카에게 황위를 잇게 하고 자신은 섭정으로서 제국을 이끌겠다는 방안이 그것이었다.
승도가 제위를 거절하자 승도의 아내 은비는 조금 의아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권력에 큰 미련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황제’라는 직함을 아무 생각 없이 포기할 정도로 욕심이 없진 않았다.
“서방님, 제위를 계승하지 않으시려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승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양새란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지금 선양을 받으면 어린 황제와 조카의 제위를 뺏는 모양새가 됩니다. 말이 없다 해도 불만을 사기에 좋은 구조가 되겠지요. 그런 모험을 할 만큼 이 사람이 다급하지 않으니 서두를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승도가 자신의 뜻을 밝히자 은비는 수긍하면서도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도 전하의 자식들에게 황녀, 황자의 이름을 주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그거라면 평생 쓰고도 남을 부와 명예로 보상될 것이니 섭섭하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승도는 아내의 손을 쥐며 ‘양위 문제’에 대한 서운함을 달래주었다.
승도가 섭정왕에 취임하기로 한 날, 각국의 외교관들과 고위 관료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승도를 위해 많은 것을 해준 신대륙 합중국의 요인, 메리도 참석했다. 그녀는 신대륙 합중국 건국의 일익을 담당한 공으로 여성의 몸으로 독립 선언서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
승도는 내빈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메리를 보며 어리고 풋내 나던 상인이 한 국가의 거물이 될 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는 메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준 다음 이 자리에 참석한 유진, 클레망소, 루이, 필리프를 비롯한 여러 ‘제국의 동지’들에게도 일일이 눈인사를 보냈다.
승도는 그들에게 목례를 건네고 멀리 뒤편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제도의 시민들로 승도의 ‘섭정왕 취임’을 지켜보기 위해 참석한 자들이었다.
모두가 앞으로 펼쳐질 그의 치세를 기대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지난날’, 정점에 올라서고 실패했던 정치를 펼쳐 전생의 가족들이 맛보았던 비극을 돌려주지 않으리라.
그는 다짐했다.
승도는 제도 시민들의 면면을 천천히 훑으며 그 눈마다 ‘자신의 의지’를 담아 맹세를 보냈다.
‘잘 해내시리라 믿어요, 공자님.’
승도는 그 면면들을 훑다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얼른 그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다 입을 딱 벌렸다.
유하였다.
승도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금이라도 달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의 그는 그렇게 가볍게 행동해선 안 될 사람이었다. 이 제국의 상징이요, 구심점이었다.
승도는 애써 그 마음을 억누르며 유하를 향해 마음속으로 말했다.
‘너를 잃고 얻은 권력이다. 뜻이다. 야망이다.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만큼 이번엔 실패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지켜봐 주었으면 한다.’
승도는 유하를 향해 다짐하고는 자신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단상으로 돌아섰다.
황실 섭정왕은 황제와 태후가 기다리는 단에 올라간 다음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어린 황제를 대신해 승도의 여동생인 오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었다.
승도가 면류관을 머리에 인 순간 장내에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오승도 전하 천세!”
“천세!”
“대신제국 만세!”
승도는 면류관을 쓴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장내를 향해 돌아선 다음 사람들의 환호에 화답하며 손을 들었다.
찬란한 태양이 눈부시게 단상 위로 쏟아졌다.
이제 영광된 황실 섭정왕이 영도하는 대신제국의 시대, 세계 최강국을 향해 달려갈 밝은 미래가 펼쳐질 시간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