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1 복수의 첫 걸음 (3/34)

챕터1 복수의 첫 걸음

꽝꽝꽝!

“여기 강철중 씨 댁 맞죠? ‘신나라 게임 TV’에서 나온 기자들입니다. 문 좀 열고 잠깐 인터뷰 좀 해주시죠!”

“이번 사건으로 할 말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강철중 씨, 3달 동안 접속 불가에 대해 일부 게임 유저들은 아예 게임을 못하게 하라고 말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이지도 않는 나를 향해 문 건너편에서 계속 질문을 쏟아 붓는 기자들의 성화에 입에서 절로 이 가는 소리와 함께 거친 욕이 튀어나왔다.

“꺼져!”

꽝!

주먹으로 힘껏 문을 치고 나서야 조용해지는 기자들을 향해 욕을 중얼거린 나는 자포자기 한 심정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양팔로 머리를 감쌌다.

‘제길……!’

그저 게임으로만 끝날 것 같았던 빌어먹을 아이템 복사 사건은 게임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내 주소를 알았는지 2번에 걸친 이사에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집에 돌이 날아왔고 문에는 ‘사기꾼 헤라클래스!’ 등 수많은 욕설들이 늘어나고 있어 지금은 아예 포기하고 지우지도 않는 정도였다.

모든 것이 다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심각한 게임 중독자들 때문이었다. 경찰을 불러봤지만 경찰로서도 어떠한 조취를 취할 수 없었다. 경찰차 소리만 들려도 도망을 치니 아무리 뛰어난 경찰이라고 해도 잡을 수 없었다.

거기다 TV에서 하는 게임 프로그램에서는 항상 나에 대해, 아니 헤라클래스라는 사기꾼에 대해 떠들었고 각종 게임 언론들 또한 1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을 올려 헤라클래스를 파고들었다.

평소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친구가 없었다. 그나마 게임을 하다 알게 된 몇몇 친구들은 아예 연락을 끊었고 대놓고 욕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나를 믿어주는 몇 명의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미쳐도 진작 미쳤을 것이다.

그렇다. 난 미쳐가고 있는 것이다.

“으드득.”

하지만 미쳐가는 정신에서도 단 한 가지 집념이 내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복수!

바로 복수였다! 나를 배신하고 범인으로 몰아 나를 쫓아낸 월향과 무라사마, 그리고 나머지 간부들에 대한 복수심! 그것이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그 당시에는 워낙 황당하고 당황해서 아무런 저항 없이 아이템을 뺏기고 캐릭터를 삭제 당했지만 진실을 깨달은 지금은 아니었다.

“야! 강철중 인마!”

‘응?’

그렇게 한참을 절망에 빠져 욕설을 내뱉는 내 귀에 들리는 커다란 목소리에 내 얼굴에 황당함이 스쳤다. 너무나 익숙한, 또 반가운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지겹도록 나를 괴롭히던 기자들의 목소리가 아닌 내 친한 친구의 목소리였다.

절로 기분 좋아지게 하는 목소리에 재빨리 문을 열자 너무나 친숙한 얼굴이 나를 반겼다.

“자식, 오랜만이다? 이 형님이 왔다! 으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친구의 모습에 거의 1달 만에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2m는 될 법한 거대한 덩치와 짧은 스포츠머리, 그리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얼굴은 분명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친구였다.

“내가 형님이고 네가 동생이지, 누가 형님이냐?”

“누가 네놈 동생이냐!”

유쾌한 목소리로 떠드는 거한의 정체는 바로 몇 안 되는 친구인 다훈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나와 함께 커온 친한 친구다. 나와 함께 베타 때부터 판타즈마 월드를 했던 놈으로 현재 마법사 랭킹 8위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녀석이다.

검은 사자 길드에 길드 마스터라는 직책으로 묶인 나와는 달리 다훈은 독고다이, 일명 솔로 플레이를 하며 레벨을 올린 놈이다. 철저히 보조 클래스라고 알려진 마법사의 솔로 플레이가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레벨 300대까지 오른 다훈에게는 ‘폭염(暴炎)의 마도사’라는 거창한 별명까지 주어졌다. 다훈이 놈이 주 속성으로 사용하는 마법이 파괴력이 강한 화염(火炎)계 마법이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다훈은 내가 월향과 무라사마의 음모에 빠져 충격으로 허우적거릴 때도 나를 믿은 몇 안 되는 친구 중에 하나였다. 이내 다훈이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은 봉지를 흔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하자.”

“좋지.”

“으하하. 빨리 들어가자. 추워 죽겠다!”

추워 죽겠다며 엄살을 떠는 녀석을 끌고 집으로 들어서 따뜻한 온기와 함께 현관의 감식 센서를 슬쩍 지나치자 미네르바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인님, 13통의 화상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총 25890통의 화상 메일과 34310통의 음성 메일이 누적되어 있습니다.]

“켁,. 무슨 메일이 그렇게 많이 오냐?”

무슨 괴물을 보는 듯한 다훈의 시선에 피식 웃으며 옷을 옷걸이에 걸치고는 술상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그룹에 있는 주소는?”

[없습니다.]

“다 삭제해.”

[예.]

촤르륵.

효과음과 함께 삭제되는 메일을 보던 다훈이 안주로 사온 과자를 집어먹으며 물었다.

“안 봐도 돼?”

“주소에 없는 거라잖냐. 분명 사기꾼이니 뭐니 하는 욕 메일일 거다. 귀찮아서 삭제 안 하고 있던 것들이니까.”

“쩝.”

덩달아 쓴웃음을 짓는 녀석이 등짝을 한 대 후려친 뒤, 간단한 안주로 시작된 술판은 9개의 소주병이 바닥을 굴러서야 막을 내렸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오징어를 씹던 다훈이 대뜸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자 조금은 들떴던 술판의 분위기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난데없는 질문이었지만 그 질문 속에 담긴 뜻을 알고 있는 난 쓰게 웃으며 잔에 반쯤 남은 소주를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

“이대로 2달만 버티고 다시 판타즈마 월드를 할 생각이다. 복수를 해야지.”

“복수?”

“그래, 복수!”

강력한 의지를 담은 내 말에 다훈이 약간 혀 꼬부라진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쉽지 않을 텐데……?”

“크큭! 날 뭐로 보는 거냐. 한국 서버 랭킹 1위 헤라클래스다! 두고 봐라. 월향이고 무라사마고 검은 사자 길드고 모두 내 앞에 무릎을 꿇을 거다!”

“푸하하! 잘 생각했다. 폭염의 마도사라 불리는 이 염환 님만 믿어라! 네가 복귀할 때쯤이면 깜짝 놀랄 만큼 강해져 있을 테니!”

자신의 판타즈마 월드 이름인 염환을 외치며 혼자 웃던 놈이 돌연 무게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머지 2달 동안은 뭐 할 거냐?”

“으음?”

다훈의 물음에 내가 낮게 신음하자 다훈은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확실히 2달이 문제였다. 매일 이대로라면 2달은커녕 한 달, 아니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난 미쳐버릴 것이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다훈이 녀석이 짐짓 밝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 운동해라.”

“운동?”

“그래, 심장이 터질 정도로 뛰고 근육이 찢어질 정도로 운동해라. 그러면 다 잊을 거다.”

다소 표현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상당히 끌리는 말이었다.

180cm가 조금 넘는 키에 빼빼 마른 몸. 얼굴마저 길었다면 ‘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법한 모습을 가진 사람이 바로 나였다.

“2년 동안 매일 게임만 하느라 몸도 정상이 아닐 텐데 2달 동안은 체력 보강하는 셈치고 운동만 열심히 해라. 나가서는 하지 말고, 집게 기계 2, 3대만 들여놔라. 러닝머신하고. 돈은 충분하잖냐.”

“으음.”

배부른 소리일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돈이야 많았다. 아직 처분하지 못한, 다훈의 창고에 있는 아이템의 가격만 적게 잡아도 2억은 나오고 지금 통장에 있는 돈이 대충 3억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넘칠 정도였다.

거기다 게임을 하며 각종 무투회나 이벤트에서 상품 대신 받은 계정만 하더라도 3년은 족히 넘어 다른 사람들처럼 비싼 계정 값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좋아. 2달 동안 죽어라 운동이나 해야겠다.”

“푸하하! 잘 생각했다. 너도 우리 마초 클럽에 들어라!”

“마초 클럽?”

“그래. 마초 클…….”

픽.

호탕하게 웃으며 마초 클럽이라는 것에 대해 말하려던 다훈이 녀석이 돌연 픽하며 옆으로 쓰러져 코를 골며 바닥을 굴렀다.

“자냐?”

“음냐음냐… 복수다…….”

입맛을 다시며 잠꼬대를 하는 다훈을 보는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뭉클 치솟았다.

“…고맙다, 친구야.”

‘나를 믿어줘서…….’

“복수다! 음냐.”

연신 입맛을 다시며 ‘복수다, 복수!’를 외치는 다훈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나 또한 이불을 덮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내일부터 있을 지옥의 운동을 생각하며.

짹짹짹.

“후우, 후우…….”

덜컹덜컹.

이름 모를 잡새의 요란스러운 울음소리와 함께 울리는 운동 기구의 거친 마찰음이 묘하게 흥분한 내 가슴을 진정시켰다.

‘오늘로써 드디어 3달이 끝나는군.’

덜컹.

집 안 한구석에 위치한 운동 기구에서 벌컥 몸을 일으킨 난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 커다란 저지방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3달.

딱 3달이었다. 날수로는 91일. 시간으로는 2184시간. 분으로는 131040분. 초로 설명하면 7862400초라는 엄청난 수의 압박을 자랑하는 3달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더디게 느껴지는 건 24년 내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미네르바. 필터 가동, 메일 확인.”

[필터에 걸린 14076통의 메일을 제외한 화상 메일 2통이 도착했습니다. 1통은 친구 그룹에 속한 ‘최다훈’ 님이시고 1통은 가족 그룹에 속한 ‘어머니’입니다. 무엇을 먼저 보시겠습니까?]

“어머니부터 재생.”

[예.]

몸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소파에 침대에 걸터앉은 내 앞, 벽걸이 TV에 익숙한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름과 동시에 화상 메일이 시작됐다. 가벼운 인사로 시작해서 마지막으로는 집에 생활비가 모자라니 생활비 좀 부치라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에 생활비 보낼 날짜가 훌쩍 지났군.’

판타즈마 월드라는 게임은 나에게 명성과 함께 돈도 가져다주었다.

하루만 사냥해도 현금으로 몇 십만 원, 심지어는 몇 백만 원짜리 아이템들이 두세 번꼴로 떨어졌다. 그 많은 아이템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기에 모두 창고에 모셔두고 있었다. 뭐, 내가 쓰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깝다는 심리랄까?

어쨌든 난 그 아이템들을 모두 다훈의 명의로 현금 경매에 올려 현금으로 돈을 벌었고 다훈과 9:1의 비율로 나눴다. 그 덕에 통장에 있는 돈도 꽤 됐기에 어머니한테는 서울에서 작은 사업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한 달에 얼마씩 생활비를 보내고 있었다. 뭐, 실제로도 게임이 질리면 작은 캡슐 방이나 하나 차릴 생각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음은 최다훈 님의 화상 메일입니다.]

미네르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우락부락한 다훈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동안 운동은 잘했냐? 하하하. 네가 이 화상 메일을 보고 있다면 이제 게임 접속 거부 제재가 풀리는 날이겠구나. 어쨌든 복수는 해야겠지? 지금 검은 사자 길드는 한마디로 쓰레기 길드가 됐거든. 어쨌든, 초보 존을 나오면 내 아이디로 메시지 보내라. 깜짝 놀랄 만한 걸 보여주마. 하하하.]

팟.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다훈의 얼굴을 뒤로한 채 땀에 젖은 옷을 벗고 미리 물을 받아뒀던 욕조에 몸을 눕히자 적당히 뜨겁게 데워진 물이 긴장했던 근육을 풀어줬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수많은 잡념들이 내 머릿속을 떠다녔다.

다훈이 말한 깜짝 놀랄 만한 것의 정체도 궁금했지만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역시나 ‘복수’라는 단어였다.

‘이제 슬슬 게임을 해볼까.’

촤악.

거칠게 몸을 일으키자 투명한 물방울들이 내 몸을 따라 허공으로 치솟았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네르바, 게임 전용 옷 준비.”

[예.]

몸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거실로 나가자 천장에서 나온 기계형의 팔이 속옷과 검은색의 반바지, 그리고 반팔 티를 내밀었다. 딱히 게임 전용 옷이라는 것이 없고 그냥 내 몸에 가장 편한 옷을 입고 하는 것이기에 내가 선택한 것은 평소에도 즐겨 입는 간편한 반바지와 반팔 티였다.

“미네르바, 문 잠금. 방문자 얼굴과 방명록 시스템 가동.”

[예.]

현재 시간은 아침 6시. 마땅히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생활비는 미네르바를 이용해 부치면 되니 시간은 충분했다.

“후우.”

판타즈마 월드 전용 헤드셋 위에 뿌옇게 쌓인 먼지를 대충 옷으로 문지르고 머리에 쓰자 답답하면서도 묘하게 편안한 헬멧이 내 머리를 압박했다.

“미네르바, 저녁 8시 알람.”

[예.]

거대한 누에고치를 연상시키는 판타즈마 월드 캡슐의 붉은 스위치를 누르자 ‘피슉’ 하는 소음과 함께 캡슐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검은색 의자와 천장에 연결된 붉은 줄, 그리고 똑같이 천장에 연결된 심장 부착기와 검은 장갑 한 쌍. 이 모든 것이 판타즈마 월드를 즐기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다. 이내 캡슐 위에 뿌옇게 앉은 먼지를 무시하고 의자에 앉자 편안한 쿠션이 조금은 흥분된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후우, 시스템 가동.”

철컥.

위이잉.

천장에 연결된 붉은 줄을 잡아끌어 헤드셋에 있는 구멍에 연결한 뒤 접착 벨크로로 되어 있는 부착기를 심장 부근에다 붙인 다음 검은 장갑을 착용하자 곧 캡슐의 문이 닫히며 익숙한 어둠이 몰려왔다.

“판타즈마 월드 접속!”

사아아아.

둥둥둥!

마치 거대한 모래성이 무너지는 듯한 효과음과 함께 판타즈마 월드 오프닝 특유의 북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이내 주위가 점점 밝아지며 칙칙하고 어두운 캡슐 안이 아닌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아……!”

근 3달 만에 돌아온 판타즈마 월드의 시작점인 ‘태초의 공간’에 눈을 빼앗긴 것도 잠시, 이내 3달 전에 마지막으로 들었던 여인의 목소리가 태초의 공간에 울려 퍼졌다.

[계정과 비밀번호를 말해주십시오. 계정이 없으신 분은…….]

“악어는악어새. 새는악어새.”

띵.

[계정이 확인되었습니다. 지문 검사와 함께 홍채 검사를 하겠사오니 사용자께서는 약간의 충격에 대비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지이잉.

“큭.”

여인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눈을 현혹시키는 붉은빛이 내 눈을 한 번 스쳐 지나갔고 그와 동시에 따끔 하는 무언가가 내 열 손가락에 느껴졌다.

[사용자를 확인하였습니다. 총 0개의 캐릭터가 있습니다. 캐릭터를 등록하시겠습니까?]

‘제길, 역시 삭제된 건가.’

운영자로부터 캐릭터가 삭제된다고 미리 말을 들었지만 막상 삭제된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니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가상현실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추억을 만들었던 캐릭터가 하루아침, 아니 3달 만에 사라진 것을 보고도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

“캐릭터 등록.”

내 말과 함께 내가 있던 태초의 공간이 커다란 바다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며 장엄한 광경을 그려냈다. 과거 헤라클래스를 만들 때에도 봤던, 루안 대륙의 태초의 모습이었다. 이내 바다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 어둠과 빛이 뿜어져 나왔는데 빛은, 빛과 창조를 다스리는 ‘백광신(白光神) 다아리엘’이 되었고 어둠은, 어둠과 멸망을 담당하는 ‘흑광신(黑光神) 라그아노’가 되었다.

처음으로 두 신이 한 일은 지금의 ‘루안 대륙’이라 불리는 하나의 대륙을 만드는 일이었다. 커다란 원 모양의 대륙을 만든 두 신은 북쪽으로는 ‘이브젤 평원’이라 불리는 넓은 평원을, 남쪽으로는 ‘혼돈의 바다’라 불리는 광활한 바다를, 동쪽으로는 ‘태초의 숲’이라 불리는 풍족한 숲을, 서쪽으로는 ‘타이나루스 산맥’이라 불리는 장엄한 산을 만들었다.

자신들이 만든 대륙을 보던 두 신은 문득 자신들이 만든 대륙이 공허한 것을 보고는 이내 대륙을 누빌 존재들을 만들었다. 가장 먼저 다아리엘이 자신과 닮은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은 다아리엘을 닮아 본성이 선하고 호기심이 많아 다아리엘이 전해준 약간의 마법으로 순식간에 문명을 발전시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중앙에 자신들만의 제국을 만들었다. 그 제국이 바로 ‘크라센 제국’ 과 ‘사담 제국’, ‘프리안 제국’이라 불리는 지금의 3제국이었다.

라그아노 또한 드워프를 만들었는데, 그들은 라그아노를 닮아 심성이 고약하고 어둠을 좋아했다. 또 겉모습마저 흉측해 다아리엘의 미움을 받았다. 그것을 딱하게 여긴 라그아노가 그들에게 뛰어난 손재주를 부여해 대대로 드워프들 중에서는 뛰어난 장인들이 배출되었다. 그들은 타이나루스 산맥에 자신들의 터전을 잡고 라그아노를 따르며 살았다.

3번째로 만들어진 존재는 다아리엘의 아름다움과 착한 마음을 이어받은 엘프였다. 그들은 다아리엘의 착한 마음을 그대로 이어받아 싸움을 싫어했으며 활을 잘 다루었다. 처음에는 인간과 함께 조화롭게 살던 엘프들은 인간들 간의 전쟁이 싫어 태초의 숲에 숨어 자신들의 거처를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 만들어진 존재는 라그아노의 투쟁심과 호기심을 이어받은 ‘투칸’이었다. 처음부터 태초의 숲에서 태어난 그들은 자연에 대립하며 자신들의 존재의 기쁨을 느끼었고 오직 검 한 자루를 들고 세상을 유랑하는 것을 즐겼다.

그렇게 모든 존재를 창조한 두 신은 문득 쓸쓸함을 느끼고 자신들이 만든 창조물들처럼 ‘자식’을 낳기 위해 몸을 섞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루키아논’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쓰다듬는 라그아노의 손을 깨물어 그 피를 마셔 힘을 가진 루키아논의 행동에 다아리엘이 루키아논을 차원의 가장 밑바닥에 던지자 루키아논의 눈에서 여섯 방울의 눈물이 흘러나와 각자 막강한 힘을 가진 ‘악왕(惡王)’들이 되었다.

이내 스스로 자신을 ‘대악령(大惡靈)’이라 칭한 루키아논은 여섯 명의 악왕들을 이끌고 루안 대륙을 휩쓸며 갖가지 재앙을 초래하다 다아리엘과 라그아노 그리고 다른 종족들의 협공에, 황급히 ‘악계(惡界)’라는 차원을 만들어 악왕들과 함께 몸을 숨겼다.

다아리엘과 라그아노 또한 루키아논을 퇴치하느라 소진된 자신들의 힘을 보충하기 위해 각자 자신만의 차원을 만들어 몸을 숨겼다.

다아리엘은 루안 대륙 하늘 위에 ‘천상계(天上界)’를 만들어 자신을 보호할 창조물과 함께 휴식을 취했고 라그아노 또한 루안 대륙의 땅 밑에 ‘지하계(地下界)’를 만들어 자신을 보호할 창조물과 휴식을 취했다.

그 뒤로 300년의 시간이 흐른 세계가 바로 현재 판타즈마 월드의 배경이었다.

“대단하군.”

장엄한 음악으로 끝을 맺는 영상에 내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두 번째 보는 것이지만 이 탄탄한 스토리와 뛰어난 영상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내 연신 감탄을 터트리는 내 앞으로 4명의 종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의 영상에서 봤던 4가지 종족이었다.

[기본 종족은 총 휴먼, 엘프, 드워프, 투칸이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휴먼으로 하지.”

[차후 수정하실 수 없습니다. 종족을 휴먼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래.”

내 말에 4명의 인영 중 나와 똑같이 생긴 휴먼을 제외한 나머지 3종족이 슬며시 뒤로 물러나 숲 속으로 사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강력한 힘을 가진 ‘마족(魔族)’이나 ‘천족(天族)’으로 설정하고 싶었지만 마족이나 천족과 같은 이종족은 특별한 이벤트를 해야만 변화되는 것이라 휴먼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캐릭터의 이름을 정해주십시오.]

“헤라클래스.”

삐.

[금지 단어입니다.]

‘제길……!’

쓴웃음과 함께 입에서 욕이 절로 흘러나왔다. 금지 단어라니! 한때는 판타즈마 월드 한국 서버의 영웅이었던 이름이 금지 단어라니! 예상했던 일이기에 쓴웃음을 삼키며 아는 동생을 시켜 오늘 삭제하라고 일러뒀던 아이디를 나직이 말했다.

“블러드.”

[캐릭터 명 ‘블러드’. 맞습니까? 한 번 정하신 이름은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그래.”

[확인되었습니다. 캐릭터를 수정하시겠습니까? 머리 길이, 머리 색, 눈동자 색. 이 3가지가 수정 가능합니다.]

“수정.”

내가 처음 헤라클래스를 키우던 때는 뭣도 모르고 무작정 멋있게 하자는 생각에 머리는 노란색에 길이는 무릎까지, 거기가 눈동자 색도 황금색으로 해서 꽤나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전투를 할 때도 거추장스럽고 또 개나 소나 다 금발에 긴 머리니, 사람 찾는 것이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머리 길이는… 조금 짧게.”

스윽.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깨까지 내려오던 머리가 줄어들어 스포츠형보다 조금 더 긴 머리의 형태로 변했다. 머리하고 눈동자 색은… 이왕이면 이름하고 맞추는 것이 낫겠지.

“머리와 눈동자 색은 진한 핏빛.”

스윽.

[수정되었습니다. 차후 수정이 불가능하니 사용자께서는 실수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래.”

둥둥둥!

갓 배를 가르고 흘러나온 피와 같은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가진 또 다른 내가 어디선가 들리는 북소리에 맞춰 내 앞에 다가섰다. ‘블러드’라는 이름을 머리 위에 달고 있는 또 다른 나의 옆으로 복잡한 모양의 그래프가 ‘촤르륵’ 하는 효과음과 함께 나타났다.

[캐릭터의 속성과 능력치를 정하여주십시오. 한 번 정하신 것은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판타즈마 월드의 캐릭터 능력치는 여타 게임에 비해 비교적 단순한 모습이었다.

말 그대로 힘을 올려주는 힘, 그리고 민첩성, 체력을 올려주는 체력, 운을 올려주는 행운, 신성력이나 마력으로 구사하는 마법의 수준을 높게 하는 지혜, 또 신성력이나 마력의 양을 늘려주는 신마력. 총 6가지였다.

속성 또한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오행(五行)이라 불리는 기본 속성인 화(火), 수 (水), 목(木), 금(金), 토(土)를 비롯해 광(光), 성(聖), 암(暗), 마(魔) 등. 엄청난 수의 속성이 있고 또 각 속성마다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방대한 시스템이었다.

전사의 경우 레벨 100, 즉 ‘원 스타(One Star)’ 때부터 뽑아내는 검풍(劍風)의 색은 이 속성에 따라 달라지며 만약 화 속성을 선택한 검사가 검기를 뽑아내면 검기는 검사의 속성에 따라 붉은빛을 띤다. 마법사의 경우 자신이 선택한 속성의 마법이 숙련도 올리기가 다른 마법보다 수월하고 위력 또한 강했다.

또한 속성에는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이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풍생화(風生火)’, 즉 ‘바람은 불을 살린다’였다. 그 예로 풍 속성을 가진 검사와 화 속성을 가진 검사가 파티를 이뤄 몬스터를 공격한다면 화 속성을 가진 검사의 공격력이 평소보다 높아진다.

그 반대가 ‘광멸암(光滅暗)’, 즉 ‘빛은 어둠을 멸한다’인데, 빛 속성을 가진 검사와 어둠 속성을 가진 검사가 서로 대결을 한다면 어둠 속성을 가진 검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불리한 조건에서 싸움을 하는 것이다.

예전 헤라클래스 같은 경우에는 속성은 화(火)로, 레벨 업을 할 시 주어지는 3의 보너스 능력치를 1대 2의 비율로 힘과 민첩성에 투자해 파티 플레이에는 좋지만 PK나 솔로 플레이를 할 때는 비교적 안 좋은 단점을 많이 나타냈었다.

이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캐릭터 옆의 능력치 그래프의 보너스 능력치 10을 모두 힘에 찍은 뒤 생각해온 속성을 말했다.

“속성 혈(血).”

혈 속성의 부가 능력이라면 상대의 방어력을 약간이나마 무시한다는 점이었다. 내가 키울 힘 위주의 전사에게는 제격인 속성이었다.

[차후 수정은 불가능합니다. ‘혈(血)’ 속성으로 하시겠습니까?]

“그래.”

치이잉.

[캐릭터 등록 완료했습니다. 캐릭터 명, 블러드. 접속하시겠습니까?]

“접속.”

둥둥둥둥!

힘차게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또 다른 내가 천천히 걸어와 씨익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3달 전만 해도 늘 봐왔던 일이기에 익숙히 또 다른 나의 손을 잡자 뭔가 내 몸을 관통하는 찌릿한 느낌과 함께 세상에 하얗게 변했다.

짹짹짹.

“어라? 이놈은 처음 보는 놈인데?”

밖의 잡새와는 확연히 다른 맑은 새 울음소리와 그리웠던 맑은 하늘,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던 초보 시절과 그 시절 죽은 다음에는 항상 들어왔던 초보 존 NPC의 목소리.

“크큭, 크하하핫!”

딱.

“뭘 웃고 발광이야!”

새삼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에 광소를 터트리던 노인이 방금까지 물고 있던 곰방대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머리 위에 ‘NPC 존’이라는 문구만 없다면 정말 노인 유저라고 해도 믿어줄 만큼 사실적인 흰옷의 노인 NPC가 곰방대를 빨며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놈인데… 오늘 처음 온 거냐?”

“예.”

클로즈 베타 때부터 이 게임을 해온 내 경험에 따르면 이곳, 판타즈마 월드의 NPC들은 절대 다른 게임의 NPC들처럼 녹록하지 않다. 항상 같은 말만 반복하는 다른 게임의 NPC들과는 달리 판타즈마 월드의 NPC들은 스스로 생각도 하고 또 장사도 하고 화도 내는, 최소 B급 인공지능이었다. 물론 바보로 설정되어 있는 NPC들은 제외하고.

이내 물건을 감정하는 감정사를 연상케 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존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흠. 그래. 대충 보아하니 가진 것도 없는 비렁뱅이 같은데…….”

“하…하하.”

루안 대륙의 3제국 중, 강대국이라 불리는 크라센 제국의 왕 NPC 또한 나의 눈치를 봐가면서 말을 해야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이런 초보 존의 NPC에게 비렁뱅이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깔보는 듯한 존의 말투에 내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크라센 제국이라면 루안 대륙에 있는 3개의 제국 중에서도 가장 강한 제국으로 작은 섬인 ‘초보 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곳이다.

“이놈아, 뭘 그렇게 구시렁거려! 네놈이 오늘 처음인 듯하니 이 늙은이가 대충 설명해주마. 이곳 초보 존에서 레벨을 29까지 올리고 나에게 다시 와서 내가 주는 퀘스트를 수행하면 내가 진짜 모험을 할 수 있는 루안 대륙으로 가는 배의 표를 주마. 내 너를 특별히 여겨 빨리 레벨 업을 할 수 있는 아이템을 몇 가지 주마.”

“감사합니다.”

특별히는 무슨. 판타즈마 월드를 처음 하는 사람이라면 다 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입가에 떠오르는 비웃음을 참으며 존이 내미는 아이템을 받자 머릿속에 여인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초보 존의 NPC 존에게 단검과 최하급 체력 포션 5개, 초보 존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가서 빨리 레벨 29나 되어 오너라!”

뻐끔거리며 연기를 내뿜는 존을 뒤로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이 초보 존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하와이의 모습을 그대로 가상현실로 옮긴 것이 바로 초보존의 모습이었다. 초보 존에는 초보들에게 도움을 주는 존뿐만이 아니라 대장장이, 잡화점, 무기상점 등 여러 종류의 상점과 NPC들이 있다. 다만 규모가 좀 작고 수준이 낮다 뿐이지 루안 대륙의 시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이템 창.”

팟.

모습을 드러낸 아이템 창에 내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있는 아이템이라고는 처음 주어지는 반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존에게 받은 B급 단검과 최하급 포션 5개뿐이었다. 이 아이템으로 언제 레벨 30이 돼서 루안 대륙으로 간단 말인가.

“후우, 그래. 초보 때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거다. 복수를 위해서 이런 것도 못 참을까.”

“잡소리 하지 말고 빨리 꺼져, 이놈아!”

뒤에서 소리치는 존의 말을 무시하고 재빨리 처음 눈을 뜬 ‘시작의 신전’을 벗어나 초보 존의 마을로 나오자 척 봐도 초보자로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나를 반겼다.

판타즈마 월드.

클로즌 베타 2년, 오픈 베타 3개월, 현재 상용화 1년.

한국 서버 동시 접속자수 9십만이라는 엄청난 수를 자랑하며 당시 최고의 인기 게임이었던 ‘환타지아 랜드’를 당당히 제치고 세계적인 게임으로 발돋움했다. 상용화 1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신규 가입 회원 수 하루 몇 백 명이라는 엄청난 기세로 세계 1위의 가상현실 게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아이템을 얻으려면 사냥을 해야겠지.”

단순하고도 명쾌한 해답에 만족하며 존이 준 B급 단검 위에 손을 올려놓고 ‘설명’을 누르자 단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조그만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단검(B급)-

초보 존의 NPC 존이 주는 단검. 초보자가 쓰는 단검치고는 그럭저럭 쓸 만하다.

공격력- 13/15 내구력- 20/20

특수능력- 없음.

“후우…….”

단검을 바라보는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기억으로라면 직업이 세부적으로 나뉘는 것은 레벨 100부터였다. 비교적 레벨이 잘 오르는 99까지는 자신이 원하는 직업에 초점을 맞춰 능력치를 올리다 레벨 100, 즉 ‘원 스타’가 되면 세부적인 직업으로 전직을 하는 것이다.

척.

아이템 창에 이미지로 자리 잡은 단검 위에 손을 올려놓고 살짝 쥐는 시늉을 하자 아무것도 없던 손에 약간 묵직한 무언가가 잡히며 묘한 안정감을 선사했다. 오랜만에 하는 게임이라 그런지 허접한 단검 한 자루 잡는데도 마치 보스 몬스터를 앞에 둔 양 몸이 흥분됐다.

“캐릭터 창.”

파밧.

이름: 블러드. 레벨: 1. 속성: 혈(血).

성향: 중(中). 종족: 휴먼. 명칭: 초보자.

체력: 500. 마력: 250. 신성력: 200.

힘: 40. 민첩성: 30. 체력: 30.

지혜: 30. 신마력: 30. 행운: 30.

아이템 창과 마찬가지로 ‘파밧’ 하며 나타난 이 간결한 표가 바로 나의 캐릭터 정보였다.

“파티 구해요! 렙 25 이상. 오크 야영지 가실 분 모집합니다!”

“민첩성에 다 찍은 레벨 18이 파티 구합니다!”

여기저기에서 함께 사냥 할 파티를 찾는 유저들을 지나쳐 마을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조금은 한산한 초보 존이 나를 반겼다. 처음 레벨 1부터 10까지는 마을 앞의 ‘킹 크랩’이나 ‘거대 불가사리’, 혹은 ‘거대 성게’ 같은 레벨 5대의 몬스터를 잡는데 나 말고도 여러 초보 유저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었다.

“합!”

퍽.

끼에!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찌른 단검에 찔린 거대 불가사리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튀어 올라 흔하디흔한 기본 공격인 몸통박치기로 나를 공격했다.

“큭.”

몇 번 더 칼질을 하자 거대 불가사리는 손쉽게 무너졌고 곧 질퍽한 누런 액체를 흘리며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거대 불가사리가 죽은 자리에는 거대 불가사리가 드롭 한 아이템으로 보이는 가시 몇 개와 짙은 갈색의 동전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거대 불가사리의 가시 1개와 3동화를 습득하셨습니다.]

“도우미 시스템 종료.”

무엇을 줍고 무엇을 떨어뜨렸는지 자세히 알려주는 도우미 시스템을 종료하고 내 손에 들린 거대 불가사리 가시와 몇 안 되는 동화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곳 판타즈마 월드의 루안 대륙은 하나의 화폐 단위로 통일이 되어 있는데 그 순서가 동화, 은화, 금화, 룬 순이었다. 100동화가 1은화, 100은화가 1금화, 1000금화가 1룬이다. 1룬은 현실 세계의 돈으로 약 5만 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 참고로 내 손에 들린 이 3개의 갈색 동전은 화폐 단위에서도 가장 낮은 동화였다.

한 마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8%나 올라 있는 경험치 게이지를 보는 내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걸렸다.

“크큭! 예전 기분으로 오랜만에 폭랩이나 해볼까?”

키에!

단검이 틀어박힌 거대 불가사리가 처량한 비명을 지르며 연두색 점액을 뿌리며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한국 서버 랭킹 1위까지 오른 내 경험에 따르면 몬스터에는 급소가 있다. 크게는 머리가 날아가면 죽는 것에서부터 작게는 목 어느 부위를 꿰뚫으면 죽는 것까지. 수만 종류의 몬스터와 싸우며 경험을 익힌 나에게 초보 몬스터의 급소를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훨씬 더 쉬웠기에 특별히 민첩성이 낮아 빗나간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다 원킬 할 수 있었다.

“우와, 저기 저 유저 봐. 무조건 원킬이네?”

“그러게.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

내 단검 한방에 정확히 한 마리씩 죽는 몬스터들을 넋 놓고 바라보던 주위의 유저들이 웅성거리며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내 주위에 몰려들어 사냥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유저들을 노려보는 내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콰직.

끼엑!

한층 더 날카롭게 변한 내 단검에 희생당한 거대 성게를 마지막으로 내 몸 주위에 푸른색의 빛이 밝게 일렁이다 사라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구경하던 유저들 또한 사냥한 지 10분도 안 돼 레벨 업 하는 나를 놀랍다는 눈길로 바라봤다. 이 상태라면… 아마 내일쯤이면 아마 이곳 초보 존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레벨 업의 어려움은 원 스타라 불리는 100부터니까.

콰직.

거대 불가사리의 몸에 단검을 박는 내 손길이 한층 더 분주해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기다렸던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내 주위로 푸른빛의 빛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장내를 휘감아 하늘로 솟구쳤다.

“캐릭터 창.”

파밧.

이름: 블러드. 레벨: 10. 속성: 혈(血).

성향: 중(中). 종족: 휴먼. 명칭: 초보자.

체력: 1100. 마력: 700. 신성력: 550.

힘: 67. 민첩성: 30. 체력: 30.

지혜: 30. 신마력: 30. 행운: 30.

콰직.

끽.

이제는 따로 급소를 노리지 않아도 한방에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거대 불가사리를 보며 아이템을 챙긴 나는 착용할 아이템도 장만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아이템도 처분할 겸, 초보 존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을 앞에서 사냥을 해서 편한 점은 단 하나, 바로 마을이 가깝다는 점이었다.

얼마 걷지 않아 마을에 도착한 난, 지도를 펴 마을의 잡화점을 확인한 뒤 지도에 ‘톰의 잡화점’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잡화점을 향해 움직였다. 새하얀 벽과 붉은색의 지붕이 대조되어 보이는 톰의 잡화점은 초보 존의 다른 상점들처럼 아담한 크기의 건물이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입구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카운터에서 앉아 있던 ‘멜린’이라는 주황빛 단발머리의 십대 후반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꾸벅 하고는 카운터로 다가온 나에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아버지가 일이 있으셔서 제가 가게를 보고 있어요. 무엇을 하러 오셨나요?”

“물건 처분.”

짧게 끊는 내 말에 멜린이 웃으며 내가 내민 아이템들을 받아 감정하기 시작했다.

수가 얼마 되지 않는 아이템은 실제로 손 위에 나타나지만 수가 많은 아이템은 낱개로 나타나지 않고 그저 이미지만 나타나는데, 이것 또한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시스템 중 하나였다.

어느새 감정과 계산을 마친 멜린이 카운터 밑에서 몇 개의 은화와 동화를 꺼내 건네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계산 다 됐습니다. 거대 불가사리 가시 78개, 거대 성게 껍질 46개, 킹 크랩의 집게 발 27개, 킹 크랩의 알 6개. 이렇게 총 4은화 78동화입니다. 2동화 더 쳐서 4은화 80동화 드릴게요.”

“고맙군.”

“예, 나중에 또 이용해주세요!”

멜린의 활발한 배웅을 뒤로하고 지도를 펼쳐 무기 상점 겸, 방어구 상점의 위치를 확인한 난, 바로 몸을 돌려 그곳으로 향했다. 대장간 2개와 초보 존에 있는 건물치고는 제법 커다란 건물에는 ‘무기&방어구 상점’이라는 그럴 듯한 간판까지 달려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십대 중반의 ‘잭’이라는 단순한 이름을 가진 남자 NPC가 카운터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이는가 싶더니 곁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쓸 만한 양손 대검과 갑옷.”

내 말에 잭이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가지고 계신 돈이 얼마신지 말해주시면 제가 그 가격대에 맞는 양손 대검과 갑옷을 맞춰드리겠습니다.”

“6은화.”

“으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톰의 잡화점에서 받은 4은화 80동화와 내가 사냥을 해서 번 1은화 20동화, 총 6은화가 순식간에 날아가는 것이 아까웠지만 모든 것을 10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 생각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무기와 방어구를 찾으러 간 잭을 기다렸다.

잭이 무기와 갑옷을 가지고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무기와 방어구 좀 구경할 겸 고개를 돌려 상점 벽이나 유리관에 나열된 아이템에 눈을 돌리자 하나 같이 싸구려 티가 나는 아이템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 같았으면 보지도 않았을 아이템들이건만 지금은 돈이 없어 사지 못하는 내 신세에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내 잭이 다른 NPC와 함께 무기와 갑옷을 들고 와 카운터에 ‘쿵’ 하고 내려놨다.

“휴우, 오크의 대검과 오크의 갑옷입니다. 총 6은화 5동화지만 5동화 깎아 6은화에 드리겠습니다.”

짤랑.

“감사합니다. 또 이용해주세요.”

잭에게서 받은 오크의 대검과 오크의 갑옷을 아이템 창에 넣고 상점에서 나와 한적한 공터로 나가 아이템 창을 열자 몇 시간 동안 사냥을 해서 번 돈의 결정체가 내 눈에 들어왔다.

철컹, 철컹.

카캉.

B급 단검을 해제한 뒤 오크의 대검을 착용하고 속옷으로 분류되어 있는 반바지와 반팔 위에 오크의 갑옷을 입자 몸이 묵직해지는 것이 확실히 차이가 느껴졌다. 그래도 힘에 투자한 것이 괜히 한 것은 아닌지 조금 시간이 흐르자 자유롭게 몸을 제어할 수 있었다.

후웅.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는 오크의 대검이 허공을 가르며 내는 무거운 파공음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내 캐릭터 창을 열어 내가 착용하고 있는 오크의 대검과 오크의 갑옷에 손을 올려놓고 아이템 설명을 누르자 2개의 아이템에 관한 간략한 설명이 ‘파밧’ 하고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오크의 대검(B급)-

오크 종족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오크 워리어 중, 양손 대검을 쓰는 워리어의 무기. 인간에게 약탈한 검을 자신들에게 맞게 개조한 검이다. 초보들이 쓰기에는 꽤나 쓸 만하다.

공격력- 45/60. 내구력- 70/70.

특수능력- 3% 확률로 3배의 데미지.

아이템 착용 시 모든 오크족이 착용자를 적대시함.

-오크의 갑옷(C급)-

오크 워리어들이 입는 갑옷. 대충 쇠를 두드려서 만든 갑옷이라 어설프기 짝이 없다.

방어력- 70. 내구력- 60/60.

특수능력- 1%확률로 상대방의 공격 무효.

아이템 착용 시 오크족이 착용자를 적대시함.

약간 푸른빛을 띠고 있는 1.2m짜리 투박한 형태의 거대한 양날 대검과 간단히 가슴과 등 그리고 허리 근처를 가린 짙은 황색의 오크의 갑옷에 대한 짧은 평을 마친 뒤 몸을 돌려 마을 밖의 산으로 향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현재 내 레벨로 조금 무리를 해서 잡을 수 있는 몬스터는 고블린(Goblin)밖에 없다. 고블린은 오크(Orc)과 같은 진녹색의 몸에 징그러운 토끼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1.2m정도의 키를 가진 몬스터로 레벨 10~15정도의 몬스터였다.

대체로 종족을 가진 몬스터는 보통 이름을 가진 몬스터부터 ‘히어로’, ‘족장’, ‘선구자’라는 명칭이 붙은 레벨 200대의 고급 몬스터까지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오크나 고블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곳 초보 존에는 보통 이름을 가진 몬스터밖에 없고 가장 높은 레벨의 몬스터라고 해도 바다 근처의 해변에서만 나오는 레벨 45 ‘씨 스파이더 킹(See Spider King)’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좋아, 이제 다시 사냥을 해볼까…….”

킁킁!

결의를 다지며 수풀을 향해 움직이려던 내 앞으로 수풀을 헤치고 튀어나온 작은 멧돼지 한 마리가 나를 향해 거칠게 돌진했다. 비록 레벨 5 정도이지만 제법 강한 데미지를 주는 몬스터였기에 나를 향해 달려오는 멧돼지를 향해 막 대검을 들어 찍으려는 순간, 조잡하게 만든 화살이 내 갑옷을 강타하며 ‘팅!’ 하고 부딪히며 약간의 체력을 깎았다.

퍽.

황당한 합공에 인상을 구기며 검을 내려찍어 멧돼지의 앞이마를 함몰시킨 뒤 재빨리 주위를 살피자 막 화살을 쏜 자세를 취한 고블린과 내 눈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하압!”

퍼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막 화살을 장전하려던 고블린의 얼굴이 대검에 통째로 뜯겼다. 그 덕에 손이 조금 얼얼했지만 바로 눈앞에 보이는 도끼를 들고 있는 고블린 3마리 덕에 통증 또한 순식간에 사라졌다.

끼에! 끼!

한 고블린의 외침이 공격 시작의 신호였는지 3마리가 나란히 나를 향해 달려왔다.

우당탕! 끼엑?

그중 한 마리가 돌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자 나머지 2마리의 고블린들이 당황한 얼굴로 내 앞에 멈춰 서서 낑낑거리는 동료와 나를 번갈아봤다.

“멍청한 것들!”

끼엑!

가로로 크게 휘두른 대검에 한 마리는 머리가 터지며 질퍽한 초록 피를 뿌렸고 또 한 마리는 급히 피하느라 팔이 뜯겨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내며 도끼를 휘둘렀다.

쐐애액.

“큭.”

언제 일어났는지 엎어졌던 고블린이 던진 도끼가 허벅지에 박히며 내 시야를 따라 움직이는 체력 게이지를 조금 깎아 먹었다.

“크합!”

우드득.

무지막지한 힘을 이용해 대검의 날이 아닌 면으로 고블린의 머리를 몸통 속에 박아 넣자 그 힘을 이기지 못한 고블린의 귀와 눈에서 붉은 피와 함께 뭉그러진 뇌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경련을 하는 고블린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피거품을 피해 재빨리 몸을 날려 수풀 속으로 몸을 감추자 도끼를 던진 고블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찾아 주위를 경계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 나가 대검으로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하급 포션 하나 아까운 이 상황에 그럴 수는 없어 조심스레 대검을 바닥에 걸치며 다른 한 손으로는 돌멩이를 집어 내가 있는 곳의 정 반대 방향으로 높게 던지자 투둑 하는 소음이 났다.

끼엑?

“죽어라!”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는 고블린의 뒤로 다가가 대검을 놈의 허리에 박아 넣자 우두둑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놈의 옆구리가 기역 자로 꺾이며 펄떡이는 내장을 떨어뜨렸다.

끼이!

이내 내장 위에 엎어져 내장과 하나가 되어 몸을 꿈틀거리던 고블린이 모래가 되어 사라지자 꽤나 많은 양의 동화와 아이템이 드롭 됐다. 멧돼지 한 마리와 고블린 4마리를 잡고 얻은 수입은 총 48동화와 귀환 스크롤 한 장, 그리고 최하급 체력 회복 포션 하나였다. 아이템 드롭률이 높은 초보 존이라 그런지 고블린 4마리와 멧돼지 한 마리 잡고 얻은 수입치고는 꽤나 많은 편이었다.

끼렉! 끼!

이내 잠시 자리에 앉아 체력을 회복한 뒤 다시 움직이려는 내 앞 수풀 여기저기에서 고블린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수는 총 5마리였는데 두 마리는 도끼, 나머지 3마리는 심하게 녹슨 낫을 들고 있는 놈들이었다. 내가 죽인 동족의 피 냄새를 맡고 모인 것인지 눈동자들이 하나같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복수라도 하려고 왔냐?”

뀌에에엑! 끄에엑!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런 침을 흘리던 고블린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향해 한꺼번에 뛰어들었다.

타닥. 카가강!

가로로 크게 베는 대검에 고블린들이 일제히 몸을 뒤로 날려 피하며 각자 들고 있던 손도끼를 던지자 몇 개는 오기도 전에 휘두르는 대검에 맞아떨어졌고 몇 개는 대검에서 일어난 바람에 위력을 잃고 떨어지다 옆구리를 스치며 체력을 갉아먹었다.

“건방진 것들!”

콰직.

커다란 사선 베기에 고블린 한 마리가 어깨째로 머리가 떨어져 나가며 진득한 피 분수를 뿜었다. 이내 사선 베기의 반동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바닥에 낮게 베자 내 등 뒤에서 기회를 노리던 고블린 2마리의 발목이 숭덩 잘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발목이 잘린 고블린들이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토해냈다.

“큭!”

끼에.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르는 고블린들을 처리하기 위해 대검을 치켜 든 틈을 이용해 고블린 한 마리가 번개처럼 튀어나와 옆구리에 낫을 박아 넣고는 황급히 몸을 날렸다.

‘빌어먹을!’

“죽어라!”

길이가 1.2m나 되는 대검의 길이에 희생당한 고블린이 얼굴이 반 짓이겨져 뇌수와 마른 피거품을 흘리며 발광을 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현재 죽은 고블린은 2마리, 거기다 2마리는 전투 불능에 남은 것은 눈앞의 한 마리뿐. 옆구리에 박힌 낫이 꽤나 큰 데미지였는지 체력은 이미 3분의 1을 보이고 있었다.

“하압!”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맹렬한 기세로 쏘아지는 대검에 남아 있던 고블린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들린 도끼로 맞섰다.

“큭. 그 따위 녹슨 도끼로 내 대검을 막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꾸엑.

휘두른 대검에 부딪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자신의 도끼를 멍하니 보는 고블린의 목을 단숨에 쳐올린 뒤 몸을 돌려 바닥을 기고 있는 2마리의 고블린의 목에 대검을 박아 넣자 잠시 몸을 떨던 고블린들이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대체로 몬스터들은 회복력이 빨라 보통 몬스터도 발목이 잘린 상처는 30분 정도면 다 회복이 된다. ‘불사(不死)의 왕자’라는 어울리지 않는 별명을 가진 트롤 역시 발목이 잘린 상처 정도는 30초면 모두 다 재생이 되니 몬스터의 재생력에 대해 뭘 더 말하겠는가.

꿀꺽꿀꺽.

달콤한 포도 맛 포션을 단숨에 비우자 떨어졌던 체력의 3분의 1이 단숨에 회복됐다. 나머지 체력은 포션의 능력으로 천천히 차올랐다.

모래가 되어 사라진 고블린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놈들이 드롭 한 아이템을 천천히 수거한 뒤 다음 사냥감을 찾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세상이 노랗게 변하는가 싶더니 세상이 기울어졌다. 아니, 내가 쓰러진 건가? 의문 속에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시야가 검게 변하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초보 존에서의 죽음은 ‘시작의 신전’으로 갑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블러드로서의 내 첫 죽음이었다.

“쯔쯔, 젊은 놈이 겨우 독에 중독돼서 죽다니. 네놈은 용사로서 실격이다!”

눈을 뜨자마자 들리는 걸걸한 존의 목소리에 절로 인상을 구겨지는 것도 잠시, 숨길 수 없는 의구심이 떠올랐다. 독이라니?

“노인장… 아니, 존 영감님. 독이라뇨?”

“파상독이다. 뒷산에 쓰러져 있는 널 마을 청년이 봤다는데, 척 보니까 고블린 놈들의 무기에 찔린 모양이구만. 고블린 놈들의 무기에는 썩은 피와 살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상처를 입었을 때는 포션을 마시는 것보다 상처에 부어 응급조치를 하고 해독 포션을 마시거나 해독 약초를 먹는 게 좋다.”

초보자를 위해 해독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는 존의 모습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독이라니… 그것도 독 중에는 최하급이라는 파상독이라니.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키자 존이 거의 광소에 가까운 웃음을 토해냈다.

‘그러고 보니… 그냥 신전의 바닥에 누워 있는 채로 부활됐군.’

씁쓸한 표정으로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날 바라보던 존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신전의 한구석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네놈의 아이템이다. 치료해주는 대가로 30동화를 받았으니까 뭐라고 구시렁거리면 다시 죽여 버릴 테다. 우하하! 이 신전에서는 내가 신이다!”

뭐가 그리 좋은지 혼자 화내고 혼자 웃는 존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기는 내 입에서 서늘하게 이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겨우 고블린 따위에게 죽다니!

서늘한 이 가는 소리에 주변의 초보 유저들이 나와 간격을 벌리며 나를 힐끔거렸다.

“현재 시간.”

[현재 시간은 오후 3시입니다.]

시간을 알리는 차가운 목소리에 내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열정이 떠올랐다.

“알람 설정 취소.”

고블린이 있는 산으로 발을 옮기면서 내 가슴에서 모처럼 분노가 아닌 투지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12시간. 12시간 안에 30레벨이다!’

검을 잡는 내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비장함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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