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2 루안 대륙으로
꾸어.
퍽!
대검과 ‘머드 맨(Mud Man)’이 부딪치며 질퍽한 진흙을 동굴 벽에 튀겼다. 통칭 ‘진흙 인간’이라 불리는 이 몬스터는 말 그대로 인간 형태의 진흙덩어리로 레벨은 25정도다. 거기다 마법이 걸린 무기로 베거나 이마 정중앙에 있는 핵을 부숴야지만 죽는, 초보 존에는 어울리지 않는 까다로운 몬스터다.
25라는 같은 레벨인데도 불구하고 오크의 1.5배에 달하는 경험치와 그에 맞는 돈과 아이템을 주는 머드 맨은 귀찮은 동족 의식도 없어 바로 옆에서 동료가 살해당해도 그저 가만히 있어 초보자에게는 거의 거저 주는 경험치 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것도 머드 맨을 잡을 정도의 수준의 유저에게나 통하는 말이겠지만.
콰직.
이마 정중앙에 대검이 박힌 머드 맨이 검정 색의 핵을 떨어트리며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미리 챙겨온 중급 포션을 마시며 한산하다 못해 황폐한 주위를 둘러보니 은은한 보리차 맛 포션에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이 내 몸을 휘감았다.
끄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양팔이 뭉개진 채로 나를 향해 달려드는 머드 맨의 이마에 대검을 쑤셔 박는 내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놀랍게도 내가 발견한 이 머드 맨의 서식지에는 유저는커녕 유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레벨 19가 되어서 더 이상 고블린으로 레벨이 오르지 않아 오크를 잡기 위해 오크가 나온다는 산 너머의 들판으로 갔을 때, 오크 2마리를 죽이고 얼마 남지 않은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바위라고 부르기 뭐한 돌덩이 밑에 자리를 잡고 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땅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놀라 찾은 곳이 바로 지하에 위치한 이곳, 머드 맨이 서식하는 동굴이었던 것이다.
푹.
꿔어!
[레벨이 올랐습니다.]
머드 맨의 이마에 대검을 박아 넣자 듣기 싫은 비명 소리와 동시에 그와는 반대로 반가운 여인의 목소리가 레벨 업을 알렸다.
푹.
“후우, 드디어 레벨 업이군.”
커다란 대검을 바닥에 박아 넣으며 캐릭터 창을 부르자 ‘팟’ 하는 소리와 함께 15시간 동안 노력한 결과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이름: 블러드. 레벨: 29. 속성: 혈(血).
성향: 중(中). 종족: 휴먼. 명칭: 초보자.
체력: 4500. 마력: 1700. 신성력: 1200.
힘: 124. 민첩성: 30. 체력: 30.
지혜: 30. 신마력: 30. 행운: 30.
말 그대로 ‘노가다의 산물’이리고 표현되는 홀로그램을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뿌듯한 마음으로 바닥에 박힌 대검을 뽑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검을 들지 않은 한 손을 이용해 귀환 스크롤을 찢자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환한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
아침이라 그런지 마을에는 어제 저녁보다는 훨씬 더 적은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피해 마을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시작의 신전으로 움직였다. 레벨 25가 됐을 때 새롭게 장만한 ‘A급 오크 워리어의 갑옷’과 그에 맞춰 새롭게 장만한 대검인 ‘D급 클레이모어’가 아침 햇살을 받아 기분 좋은 검은빛을 반짝였다.
예전에 썼던 오크의 대검의 거의 2배에 달하는 검면과 검의 길이가 1.6m나 되는 클레이모어는 비록 최하급이라 불리는 D급이기는 해도 이곳 초보 존에서 구할 수 있는 최강의 양손 대검이다.
-클레이모어(D급)-
참마(斬馬)의 용도를 가장 잘 살린 대검.
하지만 ‘벤다’라기 보다는 ‘부숴버린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대검이다. 설명대로 무지막지한 파괴력이 일품. 하지만 무게가 매우 무겁다.
공격력- 110/130. 내구력- 130/150.
특수능력- 1% 확률로 3배의 데미지.
고전 RPG게임의 아이템 설명을 생각나게 하는 클레이모어의 아이템 설명을 다시 한 번 읽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을 때쯤, 저 멀리 새하얀 시작의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작의 신전에서 나오는 몇 명의 초보들을 빼면 ‘신전’이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질 정도로 고요했다.
“존 어르신, 계십니까?”
그렇게 한참을 존의 이름을 부르기를 잠시, 판타지 설정에 곰방대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가진 존이 신전 안으로 들어선 나를 발견하고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또 네놈이냐?”
“예.”
“쯧쯧.”
혀를 차며 곰방대를 꺼내 뻐끔거리는 존의 모습에 내 이마가 작게 패였다. 아무리 괴팍하게 설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신관이라는 사람이 신전에서 담배를 피우다니. 내 표정을 읽은 존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새하얀 연기를 후욱 하고 내뱉었다.
“척 보니 루안 대륙으로 나가기 위한 퀘스트를 받으러 왔구나. 잠시만 기다려라. 다아리엘 님이 신탁을 내려줄 것이다.
다아리엘의 창조물인 인간의 다아리엘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간혹 가다 라그아노나 루키아논을 따르는 인간도 있지만 거의 모든 NPC들이 자신들을 창조한 신을 따르고 있다.
자신이 할 말을 마친 존이 내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획 몸을 돌려 신전 중앙에 위치한 분수대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로 눈을 감았다.
우우우웅.
이내 존의 등 뒤로 은은한 우윳빛 기운이 넘실거리며 존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것도 잠시,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에 초보 존을 벗어나며 보았던 광경이 내 눈앞에 다시 한 번 펼쳐졌다.
파앙!
커다란 이불을 한 번에 털어내는 듯한 시원한 소리와 함께 존의 몸을 감싸던 우윳빛 덩어리가 새하얀 날개로 변해 존의 몸을 약 2m 정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그와 동시에 감고 있던 존의 눈이 번쩍 뜨이며 신광을 토해냈다.
이내 존의 입에서 무게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 운명의 굴레에 들어서지 못한 나와 라그아노의 자식이여. 그대가 이곳, 시작의 땅을 벗어나기 위해서 해야 할 과제를 내가 내려주겠어요. 서쪽 해변의 동굴에 씨 스파이더 킹의 새끼가 있을 거예요. 인간을 잡아먹고 아이들에게 공포를 주는 그의 자식을 저의 곁으로 보내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을 겪게 하세요.”
자신의 곁으로 보내라면 결국 죽여 버리라는 소리 아닌가.
고상한 척 입을 놀리는 존, 아니 다아리엘의 모습에 내 입가가 비틀렸다.
툭.
다른 NPC들이 주는 퀘스트처럼 수락 여부를 묻지도 않고 그저 일방적으로 퀘스트를 내린 존이 바닥에 내려앉으며 어지러운 듯 머리를 휘휘 흔들었다.
“으으, 젠장. 망할 신. 어지러워 죽겠네.”
“그게 신관이 할 소립니까?”
“네놈도 이거 한번 해봐라! 젠장, 어서 빨리 나가서 받은 신탁이나 해결하고 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구시렁거리는 존에게 인사를 하고 서쪽 해변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길…….”
망망대해.
말 그대로 끝없이 펼쳐진 서쪽 해변을 노려보는 내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막상 신탁이 내린 서쪽 해변으로 오기는 했지만, 미처 포션을 챙기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머드 맨을 잡기 위해 미리 사놨던 포션은 다 쓰고 겨우 2개가 남았을 뿐이었다.
다시 가자니 귀찮고 이대로 하자니 약간 불안했다.
콰직.
끽!
은근슬쩍 뒤로 다가와 기습을 하려던 블랙 크랩의 등껍질에 대검을 박아 넣자 등껍질이 반으로 쪼개지며 누런 점액을 뿌렸다. 겨우 레벨 10의 몬스터이기는 했지만 약간의 확률로 중독되는 블랙 크랩의 독은 상당히 짜증나는 것이었다.
블랙 크랩이 드롭 한 제법 많은 양의 동화를 주은 뒤 주위를 둘러보니 척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작은 동굴 하나가 바닷가 절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퀘스트에 전혀 문외한인 사람이 봐도 신탁의 장소가 저 동굴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쏴아아아.
철퍽철퍽.
동굴의 입구는 작다기보다는 아담하다고 느낄 정도의 크기였는데 작은 파도가 동굴의 벽에 부딪치며 내는 소리와 함께 보이는 풍경이 가히 일품이었다.
지금은 오전 11시 경이지만 만약 해가 뜨는 아침이나 석양이 지는 저녁 시간이었다면 장관을 그려냈으리라.
첨벙첨벙.
동굴에 들어가기 위해 바다에 발을 담그자 발목까지 차오르는 바닷물의 기분 좋은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동굴 속은 아름다운 밖의 풍경과는 달리 음침한 분위기였다. 머드 맨의 서식지 못지않게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동굴의 모습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서자 동굴 벽에 달라붙어 이끼를 뜯어 먹던 3마리의 블랙 크랩이 벽에서 떨어져 발을 놀렸다.
끽! 촤악.
괴상한 각도로 한껏 움츠린 다리를 펴며 뛰어오른 블랙 크랩이 튀긴 물이 사방으로 퍼지며 가뜩이나 좁은 시야를 가득 채웠다.
후우웅.
크기가 크다는 클레이모어의 장점을 가장 잘 살린 공격법.
일명 검면으로 휘두르기에 막 집게발을 휘두르려던 블랙 크랩 2마리가 벽에 부딪혀 터지며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합!”
와직.
검을 휘두르는 반동을 이용해 몸을 돌려 비스듬히 올려 치자 남아 있던 블랙 크랩의 몸이 3분의 2가량 뜯겨 누런 점액을 토해냈다.
퍽.
끽!
얼마 남지 않은 몸뚱이로 발악을 하는 블랙 크랩의 몸통에 대검을 박아 넣자 그제야 남아 있던 블랙 크랩의 몸이 모래가 되며 얼마 안 되는 동화를 떨어트렸다. 그렇게 몇 번 더 블랙 크랩 무리를 만나고서야 동굴의 끝, 씨 스파이더 킹의 새끼가 살고 있을 법한 평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씨 스파이더 킹이라고 하면 육지와 수중, 두 곳 모두에서 살아가며 루안 대륙에도 자주 나타나는 몬스터다. 레벨 45의 씨 스파이더 킹의 새끼라면 적어도 레벨 20. 어렵지 않게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는 레벨이지만 혹시라도 새끼가 어미와 같이 있다면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다. 그 정도면 적어도 나와 같은 레벨의 유저 4명이 파티를 맺어야 해치울 수 있을 테니까.
첨벙.
소란스러운 물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숙여 천천히 동굴의 끝을 향해 걸음을 옮기니 고블린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불쾌한 울음소리가 얼마 남지 않은 동굴의 끝에서부터 메아리치고 있었다.
‘새끼 혼자 있는 건가?’
뜻밖의 행운에 작게 중얼거리며 동굴의 끝, 바로 앞쪽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제법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날려 숨자 계속 들리던 울음소리가 잠시 끊겼다 이내 다시 이어졌다. 고개를 내밀어 보니 예상대로 동굴 끝에 씨 스파이더 킹의 새끼로 보이는 내 몸통만 한 노란 바탕에 검은 줄무늬 거미 2마리가 오크로 보이는 몬스터의 시체를 뜯어 먹으며 울고 있었다.
‘속전속결이다!’
씨 스파이더 킹 새끼들의 어미가 오기 전에 빨리 끝낼 심산으로 예전 고블린을 처음 죽일 때 사용했던 방법으로 돌멩이를 주워 내 반대편에 던졌다.
오크의 배에 얼굴이라고 생각되는 부위를 처박고 게걸스럽게 뜯어대던 녀석들 중 한 마리가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돌멩이가 떨어진 곳으로 어기적거리며 움직였다.
잠시 후, 두 마리의 거리가 제법 벌어진 순간, 홀로 남아 오크를 씹어 먹고 있는 씨 스파이더 킹의 새끼를 향해 몸을 날렸다.
끽?
그제야 나를 발견한 놈이 오크를 파먹던 고개를 들어 의문 섞인 소리를 냈지만 그때는 이미 클레이모어가 놈의 다리를 파고든 후였다.
푸화악.
끼에엑!
누런 점액과 함께 허공으로 솟구치는 내 팔뚝 굵기만 한 4개의 다리가 피를 뿌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그제야 돌멩이에 속았던 다른 한 마리도 소리를 지르며, 막 다른 한 마리의 등에 검을 박아 넣는 나에게 연두색 침을 뱉었다.
치이익.
연두색의 침으로 보이는 산성 액체를 맞은 검면이 살짝 녹아 내렸다. 황급히 검을 들어 방어했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더라면 녹는 것은 검이 아니라 내 광대뼈였을 거라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지고 동시에 분노가 치솟았다.
“빌어먹을 거미 새끼!”
쾅.
끼엑.
다행히 동굴 바닥에 모래가 상당량 깔려 있어 검을 박아 넣어 새끼 거미를 향해 뿌리자 제법 많은 양의 모래가 새끼 거미를 덮쳤다. 갑작스레 덮친 모래에 놈도 당황했는지 커다란 8개의 다리를 사방으로 휘두르며 나를 견제했다.
찌직!
다시 한 번 날아오는 침을 피하며 점차 거리를 좁히자 그제야 시야를 회복한 놈이 무수히 많은 징그러운 눈을 굴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죄 없는 자신을 왜 죽이냐고 묻는 듯한 모습에 내 입에서 놈의 눈과 같은 징그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크큭! 그딴 건 신탁을 내린 운영자에게 따져라!”
끼이익!
피할 곳이 없다는 좁은 동굴의 이점을 이용해 점프해 대검으로 찍어 내릴 심산으로 대검을 뒤로 젖히며 거미를 향해 달려가자 놈이 전의 괴상한 울음소리와 함께 산성 침을 마구 뱉어댔다.
치익.
침이 검에 부딪치며 검면을 녹이는 순간, 허공에 멈춰 있던 검이 내 몸과 함께 움직였다.
몸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과 급격히 깎이는 체력을 무시하고 착지하며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려찍자 검이 거미의 몸을 가르는 걸로도 모자라 3분의 1 이상이 땅에 박힌 채 짜릿한 떨림을 선물했다.
“큭.”
땅에 박힌 검을 그대로 놔두고 남은 2개의 포션 중 하나를 꺼내 마시며 거미가 죽으며 남긴 노란색 주먹만 한 구슬 모양의 아이템을 아이템 창에 집어넣고 먼저 기습으로 죽인 거미에게서 나온 아이템을 줍기 위해 움직이려는 순간, 오싹한 느낌과 함께 무언가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피하기에는 너무나 가까이 느껴지는 느낌에 재빨리 검을 들어 넓은 검면을 이용해 가장 중요한 급소인 얼굴을 막자 어디선가 날아온 녹색 액체가 검면에 부딪히며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끼에에엑!
“빌어먹을!”
‘촤아악’ 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물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낸 씨 스파이더 킹의 모습에 입에서 절로 나오는 욕을 참으며 재빨리 검을 고쳐 잡으려는 순간, 씨 스파이더 킹이 나를 향해 달려와 몸을 부딪쳤다. 육중한 몸과 검이 부딪치며 터트리는 커다란 소리에 내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르륵!
내가 막은 것이 의외였는지 흉측한 눈알을 굴리며 가래 끓는 울음을 흘린 씨 스파이더 킹의 몸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쿠궁!
“큭.”
온몸으로 느껴지는 압박에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질끈 감았던 눈을 뜨니 씨 스파이더 킹의 흉측한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와 동시에 씨 스파이더 킹을 지탱한 검이 휘청거렸다.
끼익!
3차 공격을 하려는 셈인지 뒤로 빠졌던 씨 스파이더 킹의 몸이 맹렬한 기세로 다시 꽂혔다.
퍼벅.
검을 회수하며 몸을 날림과 동시에 날아온 씨 스파이더 킹의 앞다리를 슬쩍 흘리며 손에 들린 검을 무작정 휘두르자 애꿎은 돌에 부딪친 검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터트렸다.
“제길!”
퍽.
쿠당탕.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야와 함께 한 뭉텅이 깎이는 체력에 재빨리 포션을 꺼내 입에 물고는 천천히 검을 들어 자세를 잡자 동굴 씨 스파이더 킹이 저편에서부터 그 특유의 기다란 다리를 이용해 느긋하게 거리를 좁혔다.
‘빌어먹을. 시금치 맛 포션이군!’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눈앞의 거대한 거미보다는 고작 포션이 시금치 맛이라는 사실에 더 분노하는 내 자신의 모습에 실소를 흘리자 놈이 자신을 보고 비웃는 줄 알았는지 거대한 울음을 토하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끼에에엑!
“크하압!”
까강.
쇠로 만든 검과 거미 다리가 부딪친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날카로운 쇳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재빨리 몸을 빼 거리를 벌리자 ‘슉’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종아리 굵기만 한 다리가 내 옆구리를 스쳐 땅을 헤집었다. 공격이 실패한 것이 불만인지 씨 스파이더 킹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끼으에에엑!
“닥쳐라! 빌어먹을 거미 새끼야!”
부우웅.
콰직.
온 힘을 다해 가로로 휘두른 검에 검은 광택을 내뿜던 다리가 부딪히며 누런 액체와 함께 부서졌다. 이내 씨 스파이더 킹의 다리에서 쏟아진 누런 액체를 뒤집어쓴 돌이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흉한 모습으로 녹아내렸다.
내 몸통만 했던 바위가 5초도 되지 않아 한 줌 물로 변해버리는 서늘한 모습에 내 얼굴이 굳었다. 피 자체가 산 성분을 가지고 있는 독이라면 만약 내가 씨 스파이더 킹을 이긴다 하더라도 쏟아지는 피에 나 또한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 있었다.
‘일격필살이다!’
타닥.
“와라!”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는 양손을 이용해 대검을 뒤로 젖히며, 가슴이 훤히 드러난 상태로 놈의 도발하자 뜻밖에도 놈이 알아들은 것인지 8개나 되는 눈을 사방으로 굴리며 힘찬 울음과 함께 나를 향해 돌진했다.
끼에에엑!
무릎을 최대한 굽혀 자세를 잡자 동시에 돌진하던 씨 스파이더 킹의 양 앞다리가 ‘슈욱’ 하는 소리와 함께 양 옆으로 쇄도했다.
퍼벅.
씨 스파이더 킹의 다리에 부딪혀 튀어 오른 흙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내 시야를 가렸다. 놈 또한 갑자기 솟구친 모래에 당황했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8개의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자리에 멈춘 씨 스파이더 킹의 기다란 다리가 꺾일 듯 휘청거렸다.
“하압!”
콰직.
널찍한 검면에 씨 스파이더 킹의 다리가 부딪히자 ‘와지직’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씨 스파이더 킹의 다리가 수수깡마냥 부러지며 노란 점액을 뿌렸다.
끼아악!
쿠긍.
찢어지는 듯한 고음의 비명소리와 함께 씨 스파이더 킹의 몸이 균형을 못 잡고 바닥을 구르며 미친 듯이 발광을 하자 좁은 동굴이 우르릉 하며 불길한 신음을 흘렸다.
“큭!”
끼?!
양쪽으로 갈라져 날카로운 수십 개의 이빨이 달린 입을 뻐끔거리며 미친 듯이 발광하던 씨 스파이더 킹의 살기 가득한 8개의 눈이 내 두 눈과 마주쳤다. 이내 씨 스파이더 킹의 입에서 녹색의 산성액과 함께 부러지지 않은 기다란 다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들이닥쳤다.
“크악!”
꽝.
끄에엑.
몸을 날리며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듯이 휘두른 검에 부딪힌 씨 스파이더 킹의 앞다리가 부서짐과 동시에 검끝에 익숙한 감각이 걸렸다. 다른 검에 비해 뭉툭한 검끝이 약 10cm 정도 파고든 씨 스파이더 킹의 머리였다.
“죽어라!”
퀴에에엑!
온 힘을 다해 검을 박아 넣자 ‘푸욱’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그에 비해 처지지 않는 씨 스파이더 킹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내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크큭. 아주 끝을 내주마.’
“크크크!”
찌지직.
씨 스파이더 킹의 머리에 박힌 검을 가로로 긋자 두꺼운 천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미 특유의 세로로 갈라져 있던 씨 스파이더 킹의 입이 열 십(十)자 모양으로 갈라지며 시퍼런 내용물을 쏟아냈다.
끼에… 끼에엑!
“닥쳐라!”
꽝!
검을 뽑으면서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돌리며 손에 들린 검을 위로 올려 치자 그나마 형체가 남아 있던 씨 스파이더 킹의 머리가 뭉개지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살점과 시퍼런 내용물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자아냈다.
“크크… 크하하하!”
꽝꽝꽝!
끼?!
이미 절반은 모래가 되어 사라져버린 씨 스파이더 킹이나 레벨이 올랐다고 말해주는 여인의 목소리 따위는 참을 수 없는 파괴 본능에 묻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헉, 헉, 허억… 크크큭.”
그렇게 한참을 미친 듯이 칼질을 하기를 잠시, 씨 스파이더 킹의 시체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몇 개의 아이템이 흉한 검상을 잔뜩 머금은 동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모습에 단내를 풍기던 내 입에서 자조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털썩.
“후우…….”
‘사람들에게 받은 스트레스가 이런 곳에서 나온 건가?’
방금 전, 나 자신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잔인한 행동에 인상을 구기며 캐릭터 창을 열어 보너스 스탯을 모두 힘에 투자한 뒤 귀환 스크롤을 꺼내려는 내 눈에 씨 스파이더 킹이 죽으면서 떨어뜨린 것으로 보이는 아이템이 보였다.
제법 많은 양의 은화와 세 개의 금화 그리고 내가 입고 있는 속옷 종류의 셔츠와 물소의 뿔을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발톱 모양의 아이템이었다.
“셔츠?”
발톱 모양 아이템을 시작으로 모든 아이템을 수거한 뒤 마지막으로 짙은 보랏빛 셔츠를 줍는 내 입에서 의외라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셔츠, 그러니까 속옷 종류의 아이템은 루안 대륙의 보스 몬스터라 해도 잘 떨어뜨리지 않아 그 값이 매우 비싸기로 유명했다. 쓸 만한 B급 셔츠가 웬만한 A급 검과 맞먹는 정도랄까? 물론 초보 존에서 좋은 셔츠가 나올 리는 없겠지만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아이템 설명을 누르자 ‘띠리링’ 하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작은 설명란이 셔츠 옆에 나타났다.
-씨 스파이더 킹의 가죽 셔츠(C급)-
천 가지 독을 담고 있는 씨 스파이더 킹의 가죽으로 만든 셔츠. 독에 대한 내성이 제법 높다. 처음 어쌔신이 된 초보 어쌔신들이 독을 수련할 때 애용하는 셔츠.
방어력- 5. 내구력- 25/25.
특수능력- 독(毒)저항력 5% 증가.
독에 걸릴 확률 5% 감소.
독에 대한 숙련도 습득 속도 2% 증가.
초보 어쌔신들에게 팔면 제법 괜찮은 가격을 받을 거라는 생각에 일단 착용한 뒤 귀환 스크롤을 찢어 마을로 귀환했다.
스윽.
퀘스트의 영향인지 내가 도착한 곳은 바로 신탁을 받은 시작의 신전이었다.
“어라? 네놈이 어떻게 안 죽고 잘 왔구나.”
듣는 사람의 얼굴을 절로 구기게 만드는 존의 걸걸한 입담을 무시하고 씨 스파이더 킹의 새끼를 죽이고 얻은 노란색 구슬을 꺼내 존에게 건네주자 뭐가 그리 불만인지 인상을 구긴 채 연신 알아듣지 못할, 그러나 욕이 분명한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입을 다물고는 품속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루안 대륙으로 가는 배표다. 신탁을 완수했으니 약속대로 주마.”
띠리링.
[특별 퀘스트 ‘신탁’을 완수하셨습니다. 경험치 10000과 5금화, ‘루안 대륙행 배표’를 얻으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기분 좋은 알림음을 만끽하며 보너스 스탯을 모두 힘에 투자하자 힘 부족으로 조금 부담스러웠던 클레이모어의 무게가 조금 줄어들었다.
“캐릭터 창.”
이름: 블러드. 레벨: 30. 속성: 혈(血).
성향: 중(中). 종족: 휴먼. 명칭: 초보자.
체력: 4800. 마력: 1750. 신성력: 1300.
힘: 127. 민첩성: 30. 체력: 30.
지혜: 30. 신마력: 30. 행운: 30.
캐릭터 창을 확인한 뒤 아이템 창 구석에 있는 루안 대륙 행 배표를 클릭하자 아이템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나타났다.
-루안 대륙행 배표-
루안 대륙으로 가는 배표. 한 명당 한 장밖에 받지 못한다. 잃어버리면 평생 초보 존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배 시간- 오전 6시. (판타즈마 월드 시간으로.)
오후 1시.
오후 5시.
오후 10시.
“드디어 초보 존에서 나가게 되는군.”
다른 유저들에 비해 몇 배나 단축된 시간에도 불구하고 뭔가 찝찝한 마음을 느끼며 루안 대륙으로 나가기 전에 지금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아이템을 처분하기 위해 톰의 잡화점으로 갔다.
딸랑.
“어서 오세요. 어마? 블러드 님!”
인사를 하다 말고 나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반가운 표정으로 큰 소리를 치는 멜린을 바라보던 톰이 나와 멜린을 뭔가 구린 눈초리로 번갈아 노려봤다.
‘뭐야, 저 기분 나쁜 눈초리는.’
톰의 눈초리에 내가 인상을 구기자 나를 바라보던 멜린이 황급히 내 팔을 잡아 카운터로 이끌었다.
“블러드 님이 이해하세요. 오늘이 검은 사자 길드에서 수금하러 오는 날이라 아버지가 신경이 날카로우세요.”
“수금이라니 그게 무슨…….”
콰강.
“수금하러 왔다!”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가벼운 옷차림의 남자 5명이 톰의 잡화점으로 들이닥쳤다. 믿을 수 없게도 그들 5명의 왼쪽 가슴에는 모두 검은 사자 길드의 마크인 검은 사자 문양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수금이라니? 그것도 초보 존에서? 내가 길드 마스터로 있던 예전에는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이런 초보 존의 유저를 길드원으로 받아주는 일 따위가 가능할 리 없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톰의 잡화점에 들이닥친 5명의 유저들은 마치 현실에서 빚을 받아내는 깡패처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과 고함을 섞어가며 톰을 협박했다.
“벌써 2주일 치가 밀렸잖아! 정말 가게 망하고 싶어? 앙?”
“이놈들아! 죽어도 돈은 못 준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진짜 죽고 싶어!”
톰과 몇 번 실랑이를 벌이던 검은 옷의 사내가 발악을 하는 톰을 내버려두고 거친 걸음으로 멜린과 내가 있는 카운터로 다가왔다.
그는 멀뚱히 서 있는 내 어깨를 밀치고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멜린에게 단검을 들이댔다.
“네 애비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빨리 10골드 내놔!”
“낄낄. 어차피 NPC니까 죽어도 괜찮아. 운영자가 금방 다시 살려줄 텐데, 뭐. 하하하!”
“크하하.”
검은 옷 사내의 말에 붉은 옷 사내가 맞장구치며 천박한 웃음을 터트리자 사내의 나머지 일행인 3명 또한 각자 웃음을 터트리며 가게 안을 마구 휘저었다.
지금 저 쓰레기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금방 ‘수금’이라는 말의 의문이 풀렸다. 한때 ‘다크 킹’이라는 길드가 작은 마을을 점령하고 길드원들을 시켜 NPC들에게 일정액씩 수금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우리 길드가 해체시켰지만, 지금 쓰레기들이 하는 행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유저들에게는 운영자들의 제재가 있을까봐 하지 못하고 NPC들만 핍박하는 비열한 짓이었다.
저열한 3류 양아치, 아니 쓰레기들이었다. 악인(惡人)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쓰레기들을 바라보는 내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멈춰라.”
“…뭐?”
나직한 나의 말에 가게 안을 휘젓던 5명이 모두 움직임을 중단하고 나를 노려봤다. 오직 검은 옷의 사내만이 여전히 멜린에게 단검을 들이대며 멜린을 위협하고 있었다.
‘아니다. 저건 검은 사자 길드가 아니야. 결단코 아니다.’
내 자신에게 애써 최면을 걸며 검은 옷의 사내를 노려보는 나를 향해 은빛 날카로운 장검을 가진 푸른 옷의 사내가 건들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정의의 사자 등장인가? 낄낄. 꼴을 보아하니 전사 같은데. 그 커다란 대검을 제대로 들 수나 있겠…….”
우드득.
“꺄아아악!”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푸른 옷의 목이 형체를 잃고 반쯤 짓뭉개져 덜렁거리자 멜린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다시 말하지. 멈춰라.”
“…….”
잠시 간의 고요 속에 목이 뜯긴 푸른 옷의 시체가 완전히 모래가 되어 사라질 때쯤, 멜린을 위협하던 검은 옷이 떨림을 주체 못하고 거칠게 입을 열었다.
“네, 네놈 뭐냐! 감히 검은 사자 길드 6진인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게임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6진? 검은 사자 길드에 그런 것이 있었나?”
의문 섞인 내 물음에 검은 옷의 옆에 있던 붉은 옷이 장검을 꺼내 들며 맞장구쳤다.
“흥, 우리는 초보 존을 관리하기 위해 검은 사자 길드에서 직접 뽑힌 특별한 유저들이다. 우리 뒤에는 그 유명한 검은 사자 길드가 있다 이거야!”
“검은 사자 길드가 그렇게 대단한가?”
검은 사자 길드의 이름을 듣고도 전혀 위축 되지 않는 내 모습에 당황했는지 입을 뻐끔거리던 검은 옷이 황당하다는 듯 외쳤다.
“다, 당연하지! 비록 랭킹 1위였던 헤라클래스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부 길드 마스터였던 무라사마 님이 다시 길드를 평정하고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래? 다행이군.”
스쳐 지나가듯 조용히 중얼거린 내 말을 들었는지 검은 옷이 눈을 치켜뜨며 손에 들린 검을 나에게 겨눴다.
“알아들었으면 당장 꺼져!”
검은 옷의 외침에 주변의 나머지 쓰레기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들며 나를 위협했다. 그 가당치도 않은 모습에 내가 다시 검을 들자 놈들이 지나치게 움찔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놈들이 나보다 레벨이 높으면 내가 물러서야 했을 테지만 이곳은 초보 존. 놈들 또한 레벨이 아무리 높아도 30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클레이모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잘못 알아들었나 보군. 너희들이 검은 사자 길드라고 해도 너희가 죽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아니, 오히려 검은 사자 길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희는 죽어야 한다.”
“이 미친 자식!”
쉬식.
독기 오른 외침과 함께 내 뒤에서 기회를 노리던 붉은 옷의 쓰레기 2명이 각자 단검을 휘두르며 뛰어들자 그 뒤를 이어 멍하게 서 있던 나머지 2명 또한 고함을 지르며 무기를 휘둘렀다.
까강.
“헉!”
온 힘을 다해 단검을 휘두른 붉은 옷의 쓰레기들이 자신들의 단검이 나의 클레이모어에 너무나 쉽게 막혀버리자 숨을 삼키며 거리를 벌리기 위해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딜!”
콰강.
간발의 차이로 붉은 옷의 옆구리를 스친 클레이모어가 거친 굉음을 터트리며 잡화점의 바닥을 부쉈다. 그 엄청난 위력에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이 무너지며 튀어 오른 나무 조각들이 사방을 메웠다.
급소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급소로, 한 번 찔리면 가사 상태에 빠지는 심장을 노리는 장검을 흘려보내며 검을 휘두르자 잠시 멈칫하던 검이 너무나 손쉽게 부러졌다.
“무슨…….”
“피해!”
허무할 정도로 부러져, 바닥을 구르는 자신의 검을 바라보는 쓰레기를 향해 다른 쓰레기가 소리쳤지만 그때는 이미 클레이모어 특유의 뭉툭한 검날이 쓰레기의 허리춤을 파고든 후였다.
우드득.
“끄아악!”
“닥쳐라.”
허리가 잘려봤자 성인 남자가 강하게 꼬집는 정도의 통증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임에도 길게 늘어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바닥을 구르는 쓰레기의 턱을 밟아 오른쪽 어깨를 향해 힘껏 밀자 뼈가 엇갈리는 소리와 함께 꿈틀거리던 쓰레기의 목이 기괴한 각도로 부러졌다.
“도, 도망…….”
퍼억.
황급히 스크롤을 찢어 도망가려던 붉은 옷을 입은 쓰레기의 팔꿈치가 뭉개지며 스크롤을 들고 있는 손이 바닥을 뒹굴었다.
“사, 살려…….”
“첫째, 검은 사자 길드는 등을 보이지 않는다.”
우두둑.
뭉개져 버린 팔꿈치를 보며 울부짖는 쓰레기를 향해 검을 휘두르자 쓰레기의 쇠골 부분을 시작으로 겨드랑이가 흉하게 뭉개지며 붉은 피를 뿌렸다.
과거의 나, 혹은 현실의 나라면 꿈도 못 꿀 나의 행동에 진득한 미소가 내 입가에 걸렸다.
“크크큭.”
한쪽 구석에서는 톰과 멜린이 두려운 눈초리로 다시금 클레이모어를 들어올리는 나를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둘째, 검은 사자 길드는 약자를 공격하지 않는다.”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몸을 떠는 쓰레기의 얼굴이 사선으로 베였다. 귀부터 반대편 턱까지 그어진 흉한 검상 사이로 흐른 붉은 피가 바닥을 덧칠했다.
“셋째, 검은 사자 길드는 적을 피하지 않는다.”
쾅!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붉은 옷의 쓰레기의 가슴에 박힌 클레이모어가 커다란 굉음을 터트리며 붉은 옷의 쓰레기의 몸을 완전한 모래로 만들어버리자 방금 전의 일격으로 반쯤 부서져 있던 바닥이 ‘우직’ 하며 내려앉았다.
이제는 반항할 생각을 버린 건지 아니면 아직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2명의 쓰레기들을 향해 검을 들이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넷째, 검은 사자 길드는 순수한 강함을 추구한다.”
“네, 네놈이 어떻게……!”
“어떻게 검은 사자 길드의 길드 구호를 아냐고?”
내 나직한 물음에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쓰레기의 모습에 내 입에서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자신이 만든 구호도 잊어버리는 바보가 있는가? 아니, 특별히 자신이 만들지 않았어도 대규모 전투에 들어서기 전이면 항상 외치는 구호이니 조금이라도 판타즈마 월드에 해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구호였다.
“그건… 무라사마에게 물어봐라!”
퍼억.
방어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붉은 옷의 쓰레기의 가슴에 클레이모어를 박아 넣으며 크게 흔들자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와 내 몸을 적셨다.
“죽엇!”
쉬익.
이내 마지막으로 남은 쓰레기가 살기 어린 고함을 지르며 검을 찔렀다. 방금 전의 다른 쓰레기들과는 다른 날카로운 찌르기에 황급히 검을 들어 막자 ‘까강!’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어 올랐다. 날카로운 공격에 주춤하는 나를 노려보는 쓰레기의 눈에서 빛이 번뜩였다.
“끓어오르는 한 줌의 기운이여, 바람마저 찌르는 날카로운 검이 되어라!”
쉬시식.
쓰레기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평범했던 쓰레기의 검이 돌연 짙은 초록빛을 머금으며 날카로운 기세로 내 심장을 노렸다.
“헉!”
까강.
갑작스런 날카로운 공격에 숨을 삼키며 재빨리 검을 들어 막자 초록 빛 기운에 휩싸인 쓰레기의 검이 평범한 검으로 돌아왔다.
“매직 아이템?”
“으으, 죽어라!”
의문 섞인 내 물음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힘찬 고함과 함께 검을 휘두르는 쓰레기의 행동에 내 몸이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방금 전 쓰레기가 외치면서 한 찌르기는 분명 전사 클래스가 원 스타 때 배우는 스킬인 ‘바람 찌르기’였다. 원 스타가 되어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을 겨우 레벨 30이 썼다면 그것은 분명 특수능력으로 ‘바람 찌르기’가 있는 매직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제길!’
까가강.
미친 듯이 공격을 하는 쓰레기의 모습에 뒤로 물러나는 내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쓰레기가 매직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면 자칫 잘못하다가는 내 목숨이 위험했다.
“받아라!”
쉬익.
내가 물러서는 모습에 기운을 얻은 쓰레기가 제법 날카로운 공격으로 나를 위협하며 점차 거리를 좁혔다.
“큭.”
까가강.
쓰레기가 가지고 있는 매직 아이템에 딸려 있는 바람 찌르기 덕에 가까이 다가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연신 검을 이용해 방어에 전력을 다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쓰레기의 몸 구석구석을 훑어봤다. 매직 아이템이라면 분명 매직 아이템 특유의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 부순다면 이 전투는 나의 승리가 확실했다.
몸 곳곳에 상처를 입으며 매직 아이템을 찾는 것도 잠시, 이내 쓰레기의 검에 시선이 꽂혔다.
‘저거다!’
여태껏 바람 찌르기의 영향으로 빛나는 줄 알고 있던 검이 시간이 지나도 꺼지지 않고 계속 빛을 내고 있었다. 쓰레기가 가지고 있는 검이 매직 아이템이 분명했다.
방법은 단 하나, 놈의 손을 자르는 것뿐이었다.
타닥.
“와라, 쓰레기!”
씨 스파이더 킹을 잡을 때처럼 검을 뒤로 젖혀 가슴을 보이며 쓰레기를 향해 약간의 도발을 하자 갑작스런 내 도발에 움찔 떤 쓰레기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끓어오르는 한 줌의 기운이여, 바람마저 찌르는 날카로운 검이 되어라!”
쉬시식.
날카로운 기운을 머금은 쓰레기의 바람 찌르기를 막을 생각도 없이 뒤를 향해 몸을 날리자 방금까지 내가 있던 허공을 찌른 검이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뒤로 뺐던 몸을 그대로 앞으로 쏘며 손에 들린 검을 휘둘렀다.
후우웅. 서걱.
“크아악.”
무서운 기세로 허공을 찢어발긴 검이 바람 찌르기의 부작용으로 잠시 멈칫한 쓰레기의 왼쪽 팔을 스치자 쓰레기의 팔이 반쯤 잘려 덜렁거리며 피를 뿌렸다.
후우웅. 서걱.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잘린 팔을 바라보는 쓰레기를 향해 뻗었던 검을 회수하며 그대로 반쯤 잘린 쓰레기의 팔을 올려치자 덜렁거리던 팔이 완전히 잘려 바닥을 굴렀다.
“크아아악!”
그제야 자신의 팔이 잘린 것을 실감하고 쓰레기가 돌연 비명을 지르며 오른손에 들린 검을 떨어트렸다.
챙캉.
“으으!”
온몸에 피를 칠한 모습으로 다시 검을 고쳐 잡는 내 모습에 쓰레기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신음을 흘렸다. 슬슬 풍겨오는 노린내와 축축이 젖은 하의를 보니 지나친 공포로 시스템이 발동된 듯했다. 아마 자신은 자각하지 못했겠지만.
“살고 싶나?”
나직한 내 물음에 쓰레기는 자신이 지금 게임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듯,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쓰레기를 향해 겨눴던 검을 거두며 잡화점 구석에서 벌벌 떠는 멜린과 톰을 가리키자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멜린과 톰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쓰레기는 공포와 의아함이 반반씩 섞인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저들에게 사과해라.”
“예?”
철컹.
“저들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히익! 아, 알겠습니다!”
뭘 잘못 들었다는 듯이 눈을 끔뻑거리며 반문하는 쓰레기를 향해 클레이모어를 겨누며 다시 한 번 말하자 그제야 쓰레기가 피로 얼룩진 몸을 일으키며 황급히 구석에서 몸을 떠는 톰과 멜린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평소 같았다면, 아니 불과 몇 분 전만 하더라도 하찮은 인공지능이라며 경멸하고 침을 뱉었어야 할 자들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외치는 모습에 피식 하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래, 인간이라는 생물은 저런 생물이다. 약간의 위협만 있어도 당장에 몸을 사리고 서슴없이 배신을 하는 생물이다.
이내 계속해서 “죄송합니다.”를 외치던 쓰레기가 약간의 희망이 담긴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난 살려준다고 한 기억이 없는데?”
“예? 이런 제기……!”
푸욱.
서늘한 미소를 흘리는 내 말뜻을 이해한 쓰레기가 황급히 검을 집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욕을 내뱉었지만 그때는 이미 거대한 클레이모어가 쓰레기의 턱을 가르고 목 바로 아래, 쇄골 부분에 박힌 뒤였다.
“커억!”
본래 가슴을 찌르려고 했지만 쓰레기가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타이밍이 빗나가 턱을 가르고 쇄골을 찌른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상이어서 몇 번 뭐라고 욕을 중얼거리던 쓰레기의 몸이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물론 턱과 함께 혀 또한 잘렸기에 쓰레기의 욕은 그저 허무한 웅얼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크크큭.”
완전한 모래가 되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휘날리면서도 입모양으로 욕을 해대는 쓰레기를 무심히 바라보던 내 입에서 작은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죄책감은 없었다. 내 말대로 나는 쓰레기를 살려준다고 약속한 기억은 없으니까. 다만 살고 싶냐고 물어본 것뿐이었다.
휘익.
투두둑.
진득한 피가 묻은 클레이모어를 휘두르자 검에 얽혀 있던 피들이 허공을 날아 잡화점 벽에 달라붙었다.
챙그랑.
‘응?’
어디선가 들린 날카로운 쇳소리에 황급히 몸을 돌려 자세를 취하자 어색한 모습으로 식칼을 들고 나를 겨누는 톰이 보였다. 그리고 톰의 뒤에서 벌벌 떨며 공포에 취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멜린의 모습에 그제야 내가 그들 앞에서 한 광란의 살육이 떠올랐다.
“제길…….”
씹어뱉듯이 흘러나온 욕설에 톰과 멜린이 몸을 움찔하며 떨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나를 향해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던 멜린과 그런 멜린에게 일 좀 하라고 호통을 치면서 나를 흘겨보던 톰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되는 지금 그들의 모습에 자조 섞인 미소가 흘러나왔다.
‘뭐, 질질 짜는 모습을 보지 않아 이것도 괜찮군.’
“크크큭.”
철컹.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가볍게 뒤집어 등에 달린 검갑에 넣은 뒤 아이템 창에서 5골드를 꺼내 수리비라도 보태라는 심정으로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잡화점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톰과 멜린은 여전히 경계와 공포가 섞인 눈초리로 어서 빨리나가라는 듯이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좋기는 좋은데 역시 찝찝하군.’
“후우, 현재 판타즈마 월드 시간.”
[현재 판타즈마 월드의 시간은 오후 1시 05분입니다.]
가장 가까운 배 시간이 1시였지만 시간 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한 판타즈마 월드의 시스템 상 5분이 지났으면 이미 배는 출발해도 진작 출발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다음 배 시간은 5시. 거의 4시간을 기다려야 배를 탈 수 있다.
그동안 사냥이라도 하고 싶지만 레벨이 30이 된 현재에는 초보 존에서 아무리 몬스터를 잡아도 경험치를 주지 않으니 헛수고였다. 그렇다고 몬스터를 잡아 돈을 벌자니 4시간 동안 별로 모으지도 못할 것 같아 그것 또한 싫었다.
시간 설정을 해놓고 로그아웃하거나 배가 오는 선착장에 가서 죽치고 앉아 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차라리 로그아웃 하는 게 낫겠군.’
다음에 접속했을 때 바로 배를 탈 생각으로 선착장에서 로그아웃을 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선착장으로 향하자 주변의 유저들이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유저가 죽는다고 해도 그 유저가 흘린 피는 몇 시간 동안 남아 있도록 짜인 성인전용 게임 프로그램 상, 지금 내 모습은 거의 피에 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거기다 지독히는 아니더라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비릿한 혈향이 풀풀 풍기는데 그 누가 길을 비키지 않겠는가.
걸음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며 마을의 외곽 쪽으로 빠져 선착장으로 향한 지 5분이 되어서야 선착장을 나타내는 배 무늬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음?”
반가운 마음에 내달리려다가 그 자리에 멈췄다.
바로 내 눈앞에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목조형 배로 배의 외곽을 둘러싼 황금빛 테와 배 중간에 세워져 있는, 한신을 상징하는 엄청난 크기의 한반도 모양 동상을 보고 내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NPC가, 그것도 시간을 잘 지키기로 유명한 판타즈마 월드의 NPC가 제시간에 배를 출발시키지 못했다? 그것도 5분이나? 평소 같았다면 의아해야 했겠지만 이 배를 놓치면 4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나로서는 이유를 따질 필요도 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한걸음에 선착장으로 내달려 내 앞을 막아서는 경비병 NPC들을 향해 대륙 행 배표를 보여주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NPC들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배를 번갈아 보며 길을 비켜주었다.
“대체 왜 안 된다는 거야! 어떤 자식이 내 배표를 훔쳤다니까 그러네! 시작의 신전에 있는 존에게 가서 신탁을 확인하면 될 것 아냐!”
“죄송합니다. 배표가 없으신 분은 배에 탑승하실 수 없습니다.”
배에 올라타는 입구를 향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커지는 목소리에 의아해서 제법 많은 수의 사람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자 나에게는 고마운, 그러나 다른 유저들에게는 더없이 짜증나는 사건의 장본인으로 보이는 유저와 그런 유저를 말리는 NPC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망할! 누가 내 표를 훔쳐간 것이 내 잘못이야? 대체 왜 안 된다는 거야! 나는 신탁을 모두 완수했단 말이다!”
“죄송합니다. 배표가 없으신 분은 배에 탑승하실 수 없습니다.”
방금 전의 말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반복하는 선착장 관리 NCP의 말에 진한 온통 붉은색 옷을 입은 유저가 가슴을 치며 거의 괴성에 가까운 고함을 토해냈다.
“으아아악! 대체 어떤 자식이 내 표 훔쳐간 거야! 지금 나오면 반 죽이는 걸로 봐주마!”
피를 연상케 하는 내 붉은색과는 달리 어깨까지 내려오는 그 유저의 머리는 금방이라도 뜨거운 열기를 토하며 타오를 듯한 붉은색이었다. 심지어 언뜻 언뜻 광기를 내비치는 눈동자마저도 머리색과 같은 붉은색이었다.
나이는 대충 삼십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희망하는 직업이 라운 파이터(격투가)인지 옷차림은 도적을 연상케 하는 비교적 가벼운 붉은 옷차림이었고 주먹에는 주먹을 보호하는 싸구려 강철 너클이 착용되어 있었다.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내가 배를 탈 수 있게 도와준 그 붉은 머리 유저에게 시선을 돌리며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배표를 받는 선착장 관리 NPC에게 다가가 막 표를 내밀려는 순간, 귀가 얼얼할 정도로 고함을 지르던 붉은 머리 유저가 기합을 지르며 NPC를 향해 쇄도했다.
“무, 무슨 짓…….”
“막아랏!”
엄청난 기세로 NPC를 향해 내뻗은 붉은 머리 유저의 주먹이 NPC의 머리통을 막 부숴버리려는 순간, 내 등에 걸려 있던 클레이모어를 한 바퀴 돌리듯 비틀며 클레이모어의 검면을 이용해 붉은 머리 유저의 주먹을 막자 ‘콰강!’ 하는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와 선착장을 휩쓸었다. 도저히 검과 인간의 주먹이 만들어냈다고 믿을 수 없을 법한 엄청난 소리에 멍하게 서 있던 유저들이 인상을 구기며 뒤로 물러났다.
“큭.”
클레이모어를 타고 전해지는 예상외의 강한 충격에 신음을 삼키며 뒤로 미끄러지듯 물러서자 주먹을 내질렀던 붉은 머리 유저도 뻗었던 주먹을 회수하고는 사나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아무래도 초보인 만큼 강철로 만들어진 검에 부딪친 것은 무리였는지 밑으로 늘어트린 붉은 머리 유저의 주먹이 흉하게 부러져 있었다.
그렇다고 내 클레이모어 또한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A급은 아니라도 강철로 만든 클레이모어의 검면 또한 흉한 모습으로 파여 있었다. 분명 저 유저 또한 나처럼 모든 능력치를 힘에 투자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무식한 파괴력이 나올 리 없으니까.
“네놈… 뭐냐!”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백번은 로그아웃시켰을 법한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붉은 머리 유저를 향해 마주 노려보며 클레이모어를 겨누자 수십의 경비병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포위했다.
“꼼짝 마라!”
“닥쳐, 빌어먹을 자식들아! 거기 커다란 검 들고 있는 놈!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
감정이 없는 NPC들마저 움찔하게 만든 살기를 흘리며 외치는 붉은 머리 유저의 모습에 클레이모어를 잡은 내 손에 바싹 힘이 들어갔다.
“상대방의 정체를 묻기 전에 자신의 정체부터 밝히는 것이 예의 아닌가.”
“뭐라고?”
다소 건방져 보이는 내 말에 쓰리 스타급 경비병 NPC들을 향해 살기를 흘리던 붉은 머리 유저가 미간을 구기며 얼빠진 신음을 흘렸다. 지금 저 표정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내 정체를 들을지 아니면 힘으로 협박해서 내 정체를 들을지 고민하는 것이 분명했다.
‘다훈이 녀석과 똑같은 인간이 한 명 더 있었군.’
이곳 판타즈마 월드에서는 ‘폭염의 마도사’라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인 다훈이 녀석과 너무나 닮은 붉은 머리 유저의 모습에 모처럼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자 나를 노려보던 붉은 머리 유저의 표정이 괴상하게 구겨졌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는지 구겼던 인상을 펴며 입을 열었다.
“난 라운 파이터를 지망하는 카나리아라고 한다.”
“풉.”
“크큭.”
본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이디라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는지 웃음을 터트리는 주변의 유저들을 한 번 쏘아본 붉은 머리 유저, 카나리아가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놈의 이름은?”
“블러드. 지망하는 직업은 전사라고 해두지.”
“해두지?”
나를 노려보며 미간을 구긴 카나리아가 그제야 창백해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크큭.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군.’
한눈에 뻔히 보이는 카나리아의 행동에 웃음을 참으며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어디선가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모여 있는 인파를 가르고 어느 유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절로 유쾌해지는 쇼였습니다. 아하하핫!”
홀연히 나타나 간드러지는 웃음을 흘리는 유저를, 막 도주로를 확보하려던 카나리아와 그런 카나리아를 체포하려던 경비병들이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열기를 내뿜는 카나리아의 붉은 머리와는 달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스러운 숲을 연상하게 하는 초록빛 머리칼을 가진 십대 후반의 유저였는데 눈동자는 옅은 갈색으로 짙은 핏빛인 나나 붉은빛인 카나리아보다는 정상으로 보였다. 옷차림은 카나리아와 버금갈 정도로 가벼워 보였는데, 다만 허리춤에 달려 있는 두 개의 단검이 그가 도적을 지망하는 유저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하하하! 아이고 배야.”
그렇게 한참을 간드러지게 웃었던 유저가 점차 붉어지는 카나리아의 얼굴을 봤는지 다소 과장된 몸집으로 허리를 숙이고 있지도 않는 모자를 벗는 시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도적을 지망하는 폭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기 막 폭주를 하려고 준비 중이신 카나리아 님의 배표를 훔친 장본이기도 하구요. 하하핫!”
한 마리 장난꾸러기 여우를 연상시키는 초록 머리 유저, 폭스의 새하얀 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 이……!”
절로 유쾌한 기분이 들게 하는 폭스의 인사는 카나리아에게는 전혀 유쾌하지 못했는지 부들부들 몸을 떨던 카나리아가 욕을 내뱉으며 폭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죽어라!”
퍽!
우당탕.
막 팔꿈치를 이용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폭스의 머리통을 부숴버리려던 카나리아의 몸이 어디선가 나타난 창끝에 맞고 허공을 날아 바닥을 굴렀다.
“꼼짝 마라!”
철컹!
카나리아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경비병 NPC들이 우렁찬 고함과 함께 카나리아에게 창을 겨누었다.
카나리아의 표정이 핼쑥하게 변했다. 비록 초보 존을 지키는 경비병이라지만 설정 상 경비병의 레벨은 투 스타 이상. 이제 겨우 레벨 30이 되어 초보 존을 벗어나려는 카나리아가 경비병들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거기다 게임에서 중요직을 맡고 있는 NPC를 폭행하는 것은 중죄 중의 중죄.
현실에서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곳 판타즈마 월드에서는 평생 지명수배자가 되어 NPC들이나 현상금 사냥꾼들에게 추격당하고 모든 NPC들이 주는 퀘스트나 상점을 이용하지 못하고 쓸쓸히 게임을 접거나 눈물을 삼키며 다른 캐릭터를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철컹철컹.
‘난 이제 죽었다!’라는 마음을 표정으로 보여주고 있는 카나리아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가는 경비병들의 절도 넘치는 걸음 소리에 카나리아의 주변에 있던 유저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제길…….”
카나리아 또한 이미 포기했는지 체념한 표정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힘없이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수십 명의 경비병들이 카나리아에게 막 창을 뻗으려는 순간,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폭스가 초록 장발을 휘날리며 조용히 경비병들의 손을 제지했다.
“자애로우신 초보 존의 경비병 여러분, 잠시 멈춰주시겠습니까?”
“응?”
“음?”
난데없는 폭스의 말에 조용히 경비병들의 체벌을 기다리던 카나리아나 카나리아에게 창을 뻗으려던 경비병들 또한 묘한 표정으로 폭스를 바라봤다. 나 또한 폭스의 난데없는 말에 호기심을 표하며 다시 벌어지는 폭스의 입을 바라봤다.
“항상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나오셔서 루안 대륙으로 가는 저희 초보 여행자들에게 용기의 말과 희망의 축복을 주시는 로한 님께 방금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선착장 관리 NPC의 이름이 로한인가?
폭스의 말에 고개를 돌려 카나리아에 대한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몸을 떠는 삼십대 중반의 NPC를 보니 머리 위에 ‘로한’이라는 이름이 제법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흐음, 제법 중요한 NPC인가?’
NPC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이름은 그저 NPC들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NPC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알려준다. NPC의 이름이 발하는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NPC가 게임 상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나 현재 내가 하고 있는 퀘스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이다.
어쨌든, 천연덕스러운 폭스의 말에 겁에 질려 있던 로한이 굳은 고개를 끄덕이며 폭스의 말에 답했다.
“괘, 괜찮다.”
“다행입니다. 자, 일어나시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로한을 일으켜 세우는 폭스의 손 밑으로 무언가 빛을 발하는 물건이 로한의 옷깃을 타고 로한의 옷 속으로 쏙 하고 빠져 들었다.
보석, 분명 붉은빛을 발하는 커다란 루비였다.
로한 또한 폭스의 손을 타고 들어온 이질적인 무언가의 정체를 눈치 채고 옷을 가다듬는 척하면서 옷 속의 루비를 잘 추스르며 의아한 눈빛으로 폭스를 바라봤다.
마치 이런 커다란 물건을 왜 자신에게 주냐고 묻는 듯한 로한의 눈빛에 폭스가 카나리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기 카나리아 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번 일을 당하신 듯하니 이번 한 번만 어떻게 잘 넘어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모두 저의 장난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모든 책임은 제가 지도록 하겠습니다.”
‘음?’
능글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로한의 옷깃을 정성스레 터는 폭스를 나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이건 분명 뇌물이었다. 그것도 아주 교묘한. 다른 유저들은 아직까지 영문을 모른 채 ‘저놈 왜 저래?’ 하는 눈으로 폭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으흠. 그, 그럴까?”
“이렇게 제발 부탁드립니다. 로한 님의 크나큰 마음으로 한 번만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크라센 제국 듀포리안 백작가의 둘째 아들인 내가 겨우 이런 일로 그럴 수야 없지! 내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용서해주겠으니 다음에는 조심하게!”
“예, 예. 감사합니다. 하하! 자, 어서 가시죠?”
“으, 으응.”
그렇게 방금 전의 소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순식간에 모든 사건을 종결시켜버린 폭스가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나리아의 손을 잡아끌고 배 안으로 사라지자 다른 유저들도 멍청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하나 둘 배에 탑승했다.
나 또한 로한에게 표를 보여주고 탑승한 뒤 비교적 경치가 잘 보이는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내부는 일반적인 배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보는 웅장함과는 다르게 현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저 그런 크기의 여객선과도 같았다. 배의 갑판으로 올라가자 따듯한 햇빛이 나를 반겼다.
“블러드 님! 여기예요. 이곳 전망이 아주 좋답니다!”
갑판 외곽의 벤츠에 앉아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유쾌하다 못해 훨훨 날아갈 듯한 폭스의 목소리에 내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런 폭스의 옆에는 아직까지도 어리둥절한 표정의 카나리아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나 또한 저들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호감에 가까운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복수 앞에서는 모두 쓸데없는 짐이 될 뿐이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나를 반기는 폭스를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쳐 폭스와는 제법 멀리 떨어진, 초보 존이 한눈에 보이는 외곽 벤츠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클레이모어를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고 톰의 잡화점에서 산 C급 숫돌을 꺼내 클레이모어의 날을 갈기 시작했다.
-숫돌(C급)-
무기의 날을 살리는 돌. 주로 초보 대장장이들이 사용한다.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품이다.
내구력- 1/1.
‘멜린…….’
이 숫돌 또한 멜린이 있는 톰의 잡화점에서 산 것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멜린의 마지막 모습에 인상을 구기며 클레이모어의 날을 가는 손에 힘을 주자 ‘뿌각!’ 하는 소리와 함께 싸구려 숫돌이 부러졌다.
“제길…….”
“우와! 힘이 정말 세시네요? 그렇지 않아요, 카나리아 님?”
“그렇군!”
다른 숫돌을 꺼내려는 내 옆으로 다가와 앉는 초록 장발의 청년과 붉은 머리의 사내, 폭스와 카나리아의 모습에 막 숫돌을 꺼내려던 내 행동이 멈췄다.
이 인간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대체 저 둘이 언제 저렇게 친해진 것인지 더 궁금했다. 그 둘은 자신들이 콤비라도 되는 양, 나를 중심으로 양 옆에 척 달라붙어 있었다.
거기다 카나리아는 방금 전에 폭스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렸는지 나와 폭스를 번갈아 보며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유쾌한 폭스의 목소리마저도 단숨에 얼려버리는 싸늘한 내 목소리에 실실 웃음을 흘리던 카나리아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지며 전과 같은 살기가 풀풀 흘렀다. 아마 내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폭스는 여전히 웃음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블러드 님, 맞으시죠?”
“그건 왜 묻지?”
“이런 재수 없는……!”
덜컥. 철컹.
싸늘한 내 반응에 마침내 참다못한 카나리아가 격하게 반응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 또한 정리하고 있던 클레이모어를 비틀어 쥐며, 나를 향해 막 주먹을 뻗으려던 카나리아의 목 앞에 내밀었다.
카나리아의 목과 클레이모어와의 거리는 많이 잡아도 10cm.
내가 조금만 힘을 주어도 클레이모어의 날이 카나리아의 목에 꽂혀 붉은 피 분수를 뿜어낼 수 있는 거리였다.
“으음.”
“하하하. 카나리아 님이 참으세요. 그건 그렇고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블러드 님 맞으신가요?”
그 미묘한 경계에 카나리아가 먼저 신음을 삼키며 다시 자리에 걸터앉자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폭스가 똑같은 웃음을 흘리며 똑같은 질문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블러드다. 그런데 그건 왜 묻지?”
“와아, 드디어 찾았네요! 보상이 꽤 짭짤해서 덜컥 받아들였는데. 혹시나 못 찾으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정말 다행이에요!”
‘보상?’
연신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폭스의 말에 나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폭스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제가 정확히 29분 전에 이 퀘스트를 받았답니다. 정확히 30분 안에 블러드 님과 멜린을 대면시켜야 하는 거죠. 다행히 1분 남은 상태에서 블러드 님을 찾았네요!”
멜린은 바로 잡화점 주인인 톰의 딸 멜린을 말하는 것이었다.
“멜린이 왜 나를……?”
“글쎄요. 그건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시죠?”
“뭐……?”
“블러드 님!”
얼빠진 내 물음이 채 여운을 남기기도 전에 폭스 못지않게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꽤나 무거운 무언가가 내 몸을 덮쳤다.
체온. 분명 따듯한 체온이었다.
비록 가상현실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일지라도 지독한 배신을 당해 아무도 믿지 않는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NPC, 멜린이었다.
“정말, 정말 죄송해요! 아버지는 몰라도 저는 블러드 님께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무엇이 미안하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 또한 멜린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연신 “미안해요.”를 중얼거리며 내 품에 안겨 몸을 떠는 멜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멜린의 몸을 떼어내기가 무섭게 폭스의 주위로 시원한 바람과 함께 밝은 빛 무리가 몰아쳤다.
‘보상이 이런 의미였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 얼굴에 떠오른 일그러짐을 지우며 아직 까지 훌쩍거리는 멜린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자 내 손에 남아 있는 차가운 감촉에 멜린이 움찔했다.
“정말, 정말 죄송해요.”
“나는 괜찮다. 그저 네가 충격을 많이 받았을까 조금 걱정했던 것뿐이다.”
“그래도…….”
“나는 괜찮으니 상관하지 마라.”
“으음.”
퉁명스러운 내 말에 잠시 곤란한 표정을 흘리던 멜린이 자신을 바라보는 폭스의 시선을 느끼고 고맙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폭스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흔들며 멜린에게 웃음을 흘렸다.
“그건 그렇고, 이 배에는 어떻게 탄 거냐? 표가 없으면 들여보내주지 않을 텐데.”
“존 님이 도와주셨어요.”
“존이?”
“예.”
‘그 괴팍한 영감이?’
의외라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멜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철썩 붙어 있던 내 품에서 떨어지며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전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블러드 님이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블러드 님의 얼굴을 보고 싶었거든요.”
몸을 꼬며 말하는 멜린이 나에게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차마 아는 척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솔직히 두려웠다. 나 또한 멜린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멜린은 그저 마음에 상처를 입은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고마운 NPC’에 불과했다.
조용히 내 대답을 기다리는 멜린의 머리에 손을 올려 슥슥 쓰다듬자 멜린이 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다시 찾아오마. 이건 블러드라는 내 이름을 걸고 너에게 하는 약속이다. 또한 절대 깨지지 않은 우리 둘만의 맹약이다.”
과거, 헤라클래스 시절에 어느 퀘스트를 수행하며 들었던 어느 남자 NPC의 대사를 듣고 기억해두었던 것을 약간 바꿔 멜린에게 말하자 가뜩이나 붉어졌던 멜린의 얼굴이 수박 속살처럼 새빨개졌다.
그리고 멜린의 머리에서 손을 떼는 순간, 멜린의 붉은 입술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확 하고 뜨거운 것이 내 입술에 닿았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꼭 오셔야 돼요! 기다릴게요!”
“아하하핫!”
“크하하하!
뿌우우우!
순식간에 멀어지는 멜린의 뒷모습과 아직까지 채 여운이 가시지 않은 입술의 기묘한 느낌에 멍하니 서 있는 내 귀로 시원스러운 폭스의 웃음소리와 함께 털털한 카나리아의 웃음소리, 그리고 길게 늘어지는 배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폭스의 웃음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하…하하하!”
“블러드 님! 꼭 다시 오셔야 돼요!”
우리 3명의 웃음소리와 함께 멜린의 힘찬 외침을 배웅 삼아 마침내 거대한 배가 천천히 바다를 향해 미끄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