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3 적과 동료 (5/34)

챕터3 적과 동료

초보 존에서 루안 대륙으로 가는 동안 걸리는 시간은 게임 시간으로 총 6시간. 현실 시간으로는 3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쓸데없이 폭스와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연신 말을 거는 폭스를 무시하고 로그아웃을 중얼거리자 카나리아와 함께 죽을 맞춰가며 떠들던 폭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로그아웃 하시겠습니까?]

“그래.”

[감사합니다. 이상, 또 하나의 세상! 판타즈마 월드였습니다.]

둥둥둥둥.

“블러드 니임……!”

힘차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와 함께 폭스의 외침을 끝으로 사정없이 흔들리던 세상이 고요한 검은 일색으로 뒤바뀌는가 싶더니 이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밝아졌다.

* * *

약간의 은은한 빛이 흐르는 좁은 공간.

바로 커다란 누에를 연상시키는 게임 캡슐이었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며 땀으로 젖은 상의를 손으로 잡아 늘리자 땀으로 젖은 상의가 추욱 늘어졌다.

‘제길, 샤워나 해야겠군.’

꼬르륵.

“하!”

설상가상으로 배에서 나는 소리에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조이는 헤드셋을 벗은 뒤 장갑과 심장 부착기를 해제하고 벽 한편에 달린 붉은 버튼을 누르자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캡슐이 서서히 열렸다. 그와 동시에 밖의 시원한 공기가 물밀듯이 밀려들어 캡슐 안의 뜨거운 공기와 바뀌어 나름대로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미네르바, 온수 준비. 밥 준비. 메뉴는 보통 정식 1번.”

[예, 모두 시행하였습니다.]

쏴아아아.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서랍에서 속옷과 간편한 옷을 챙겨 욕실 안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욕조 안에 몸을 뉘자 장시간 뭉쳐 있던 근육이 편하게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땀만 닦기 위한 샤워였기에 대충 하고 새 옷을 입고 나오자 전자레인지에서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보통 정식 1번 세트가 구수한 향기를 뿌리며 나를 유혹하듯이 천천히 식탁 위로 움직였다.

채 식지 않고 무서운 기세로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후후 불어 먹자 구수한 맛과 함께 뭔가 이질적인 맛이 느껴졌다.

역시 인스턴트식품의 한계인가? 갑자기 느껴지는 불쾌함을 떨쳐내며 숟가락을 들어 억지로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보통 정식 1번을 재빨리 먹어치우고 냉장고에 있는 우유와 함께 각종 영양제를 먹은 뒤 홀로그램 TV를 틀어 채널을 돌리며 러닝머신에 올라타자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러닝머신이 천천히 움직였다. 식사 뒤 바로 하는 운동은 몸에 해롭지만 이렇게 천천히 걷는 것은 오히려 소화를 도와준다.

“안녕하십니까! 신나라 게임 TV의 기자 김진호입니다. 오늘은 곧 있을 판타즈마 월드의 대대적인 업데이트 소식을 듣고 판타즈마 월드 본사를 찾았습니다!”

TV에서는 이제 곧 시작될 판타즈마 월드의 대대적인 업데이트에 관해서 떠들고 있었다. 나 또한 예전부터 은근히 떠돌던 업데이트 소문을 알고 있었지만 3개월 전에 판타즈마 월드를 잠시 떠나면서 잊고 있던 소문이었기에 자연히 관심이 갔다.

판타즈마 월드 본사의 직원으로 보이는 검은 양복의 사내가 화면에 나와 업데이트에 관한 몇 가지 사항을 알려주었다.

“이번 업데이트는 과거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없을 엄청난 업데이트입니다. 일단 대륙의 크기가 약 2배로 늘어나며 스토리 또한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퀘스트의 수가 거의 무한에 가깝게 늘어나며 마법의 종류와 아이템이 엄청나게 추가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가장 커다란 업데이트는…….”

여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아니었다.

“바로 무협 대륙이 생기는 것입니다.”

난 내가 러닝머신을 뛰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그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덕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은 바닥을 굴렀지만 그런 것 따위는 이미 내 신경 밖이었다.

“대륙의 이름은 ‘월국(月國)’이 될 계획이며 크기는 현재 루안 대륙과 거의 비슷할 것입니다. 월국은 저희가 판타즈마 월드 오픈 전부터 계획했던 것으로 판타지에 질리신 여러 유저 분들께 새로운 자극을 주는 새로운 세계가 될 것입니다.”

“와아! 정말 대단하네요! 하지만 그것은 곧 새로운 게임을 하나 더 만든다는 것과 같은 말씀이신데요. 과연 유저들이 자신이 키웠던 캐릭터를 삭제하고 월국으로 넘어갈까요?”

“미쳤군.”

아려오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나는 내 입에서 흘러나온 냉정한 한 마디에 맞춰 TV 속의 직원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본래 루안 대륙에서 레벨이 높으셨던 분들이 캐릭터를 삭제하고 월국으로 옮기는 것을 감안해서 월국이 오픈되고 일주일 동안은 모든 경험치와 아이템 드롭률 3배의 이벤트를 열겠습니다.”

“와아! 굉장하네요. 근데 루안 대륙에 있는 유저들의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요?”

날카로운 기자의 질문에 직원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그런 것쯤은 모두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유니크 아이템 3개와 초절정 무공서 2개, 절정 무공서 4개, 그리고 일류 무공서 5개를 랜덤으로 필드 몬스터에게 설정하였습니다. 물론 아이템들이 레벨 50의 필드 몬스터에게 들어갈 확률도 있으니 저레벨의 분들도 운만 좋다면 초절정 무공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미쳤군.”

방금 전과 똑같은 말을 내뱉은 내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유니크 아이템 3개라면 한동안 판타즈마 월드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루안 대륙은 피의 전쟁에 휩싸일 것이다. 거대 길드의 수장이나 엄청난 힘을 가진 절대자, 혹은 NPC가 그 유니크 아이템을 소유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정도로 ‘유니크’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컸다.

현재 루안 대륙에서 발견된 유니크 아이템은 총 2개였다.

예전 헤라클래스 시절에 내가 가지고 있던 ‘영광의 검’과 소수 정예의 어쌔신 길드로 유명한 ‘미친 달’ 길드의 길드 마스터이자 ‘그림자가 쫓는 자’, 혹은 ‘사신의 눈’이라 불리는 다크가 가지고 있는 ‘그림 리퍼’라는 단검.

한마디로 현재 존재하는 유니크 아이템 수의 2배에 달하는 유니크 아이템을 뿌린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곧 대륙의 전쟁과도 직결되는 말이었다.

“정말 엄청나네요! 그럼 이번에 등장하는 월국에 대해서…….”

삑.

계속 이어지는 기자와 직원의 대화를 무시하며 TV를 끈 뒤 몸을 일으켜 집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운동 기계에 앉아 천천히 운동을 시작했다. 과연 무공서라는 것이 얼마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유니크 아이템만큼은 아닐 터였다.

유니크 아이템은 말 그대로 천급(天級) 아이템이니까.

물론 그 위로 신급(神級) 아이템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 신급 아이템은 어느 도시의 전설이나 음유시인들의 노래에서, 혹은 헛소문만 무성하게 나돌 뿐 제대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찾으신다면 있는 것이고 못 찾으신다면 없는 것입니다.>

운영자 측에서 또한 이런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말로 신급 아이템에 관한 유저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무라사마와 월향의 배신으로 설령 눈에 보이는 것이라 해도 믿지 않기로 각오를 다진 나에게 있어 소문만 무성한 신급 아이템은 관심 밖이었다.

끼익, 끼익.

카강.

“후우…….”

기름칠 좀 해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기계를 거칠게 내려놓은 뒤 몸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자리에 일어나자 쌓여 있던 피로가 지친 몸과 함께 비명을 지르며 들고 일어섰다. 머리도 조금 쑤시는 것이, 오랜만에 접속한 게임의 부작용인 듯했다.

“미네르바, 친구 목록에 있는 다훈에게 문자 메시지 전송. 내용은 곧 루안 대륙 도착.”

[예스, 마스터.]

순식간에 다훈에게 보내는 문자 메시지가 완성되자 이내 ‘띠리링’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문자 메시지 완료창이 나타났다.

“좀 자야겠군.”

몸에 흐르는 진득한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로 침대에 눕자 불쾌하면서도 묘한 편안함이 내 몸을 휘감았다.

“미네르바, 2시간 30분 후로 알람 설정.”

[예스, 마스…….]

차가운 미네르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주인의 성격을 대변이라도 하듯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는 보석이 박힌 대리석으로 된 거대한 어느 방.

방 안에는 육지 몬스터 중에서도 제법 강한 축에 속하는, ‘난폭자’라는 별명으로 더욱 잘 알려진 오우거의 몸이 박제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크기가 어림잡아 8m 이상인 것을 보면 보통 오우거가 아닌 것이 분명했고 무엇보다 오우거의 얼굴과 온몸에 새겨져 있는 피처럼 붉은색의 기기묘묘한 문신은 이 거대한 오우거의 정체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오우거 킹(Ogre King)!

레벨 350 이상으로 ‘절망의 늪’이라는 필드에서 한 달에 한 번 꼴로, 3% 이하의 확률로 등장하는 이 ‘괴물’이라는 말이 손색없는 몬스터는 오우거라는 하등 지능을 가진 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가장 강한 보스 몬스터 30위 안에 들 정도로 막강한 보스 몬스터였다.

투 스타 기사의 강철 갑옷을 맨손으로 찢어버리는 오우거의 힘과 A급 인공지능의 만남은 오우거 킹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자세히 보면 오우거 킹의 심장 부근에 성인 남자의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다른 자잘한 상처가 없는 것을 보면 오우거 킹이 그 일격에 죽을 것이다.

물론 본래 상태의 오우거 킹을 일격에 죽이는 것은 과거 헤라클래스라도 불가능했다. 분명 네크로맨서의 저주나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꼼수가 있었겠지만 오우거 킹을 일격에 죽인 것은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그 옆의 벽 한쪽에는 오우거 킹이 썼을 법한 도끼가 있었는데 그 크기가 가히 엄청났다. 벽의 3분의 2를 채우고도 조금 삐져나올 정도이니 능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도끼를 나르기 위해 투 스타 전사 5명이 필요했을 때, 근처의 유저들은 다시는 절망의 늪에 오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의 밑에는 검은 장발의 사내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가운 햇볕을 정면으로 받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창밖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여름 태양 볕을 연상케 하는 햇볕에 눈이 따가울 만도 하건만 사내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 사내의 뒤로는 총 5명이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중 남자가 3명, 여자가 1명, 그리고 성별을 알 수 없는 검은 복면에 바닥까지 끌리는 검은 망토를 걸친 사람이 1명이었다.

3명의 사내 중, 이십대 후반의 남자는 온통 검은 칠을 한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등에 달린 커다란 활이 사내의 직업이 아쳐(궁수)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또 다른 한 사내는 형형한 붉은빛을 내뿜는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갑옷의 크기가 거대하여 사내의 덩치가 보통 사람보다 2배는 더 크게 보였다. 거기다 얼굴에 쓴 투구에는 오직 눈 부분만을 뚫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런 사내의 허리춤에는 연분홍빛을 발하는 평범한 장검이 매달려 있어 사내의 직업은 나이트(기사)인 듯했다.

나머지 한 사내는 오십대 후반의 중년인으로 탐스러운 검은 수염을 가슴까지 기르고 있어 푸근한 인상이었다. 중년인의 옷은 온통 푸른색으로 되어 있는데 시원하기보다는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중년인의 손에 들린 기다란 스틱을 보아 중년인의 직업은 메이지(마법사)인 듯했다.

그리고 인영들 중, 유일한 여인은 이제 막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어떻게 보면 색기가 풀풀 넘쳐 보이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바람 불면 날아갈 정도로 유약하게 보이는, 보는 각도마다 다른 빛을 발하는 크리스털 같은 여자였다. 옷 또한 대단히 애매해서 척 보면 신관복 같지만 굉장히 얇아 속살이 비칠 정도였다.

“보티스, 넌 나가서 내가 명령했던 일을 진행해라.”

그윽한 눈길로 창밖을 주시하던 사내의 입에서 마침내 사내의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명령이 떨어지자 보티스라 불린 검은 망토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자리에서 증발하듯 사라졌다.

“율칸.”

다시 열린 사내의 입에서 나온 부름에 온몸을 갑옷으로 도배한 사내가 두 걸음 앞으로 나섰다. 사내가 입고 있는 갑옷 때문인지 사내가 걸을 때마다 나무로 된 바닥이 끼익하며 비명을 질렀다.

“넌 나가서 이번에 새롭게 풀릴 유니크 아이템에 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 와라. 어쌔신 50명과 로그 50명을 허락하마.”

철컹.

사내를 향해 거칠게 허리를 숙인 사내가 남아 있는 인영들을 지나쳐 문을 나서자 마침내 창밖을 보던 사내의 시선이 방 안으로 향했다.

“때까치.”

“옙.”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대답을 하며 앞으로 나선 것은 궁수로 보이는 사내였다. 경박한 사내의 모습에 인상을 중년인의 미간이 구겨졌다.

“던전 탐색 진행은 어떻게 됐나?”

“현재 90% 가까이 완성되었습니다.”

“3일 안에 완성해라.”

“그건 좀 곤란한데…….”

날카롭게 빛나는 사내의 눈초리에 때까치가 움찔하며 경박하게 웃음을 흘렸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런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그럼 전 일하러 가보겠습니다.”

사내의 차가운 눈길을 정면으로 받은 사내가 조금 오버하는 동작으로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서자 중년 마법사가 거칠게 지팡이를 후려치며 불만을 토해냈다.

“제기랄, 저 빌어먹을 까치 새끼!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스크롤 발동 불가능 지역으로 가서 죽여 버리든지 해야지!”

불만을 토하는 중년인을 무덤덤한 눈으로 보던 사내가 중년인의 불평이 시들 때쯤 입을 열었다.

“베팔 님께서는 이브젤 평원의 ‘살육자의 소굴’에서 벌어지는 저희 길드와 ‘판타지 소드’ 길드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고 와주시기 바랍니다.”

“잉? 이 늙은이보고 전장의 한복판으로 나가라는 건가? 그것도 이름도 못 들어본 허접한 길드 때문에?”

연신 인상을 찡그리며 불만을 토하던 중년인이 사내의 말에 얼빠진 표정으로 반문하자 사내의 미간이 살며시 구겨졌다.

허접한 길드라니. 판타지 소드라고 하면 제법 알아주는 중소 길드로, 전원이 워리어로 이루어진 막강한 전사 길드다. 물론 그 점이 최강의 강점이자 최악의 약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내였기에 마법사인 베팔을 보내는 것이다.

“그것보다 이번에 헤라클래스가 다시 게임에 복귀했다면서? 지금은 루안 대륙으로 오는 중이고 말이야. 크크, 어떤가. 내가 가서 죽이고 오겠네. 응? 키키키.”

푸근한 인상과는 다른 추악한 웃음을 흘리며 기괴한 표정을 짓는 중년인의 모습에 사내의 미간이 작게 구겨졌다.

“레벨 업 직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저 때문에 베팔 님의 레벨 업에 차질이 생기는 일만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농담도 못하나. 응? 키키키.”

중년인은 오히려 이런 사내의 반응을 즐기는 것인지 한참을 그렇게 웃음을 흘리다 지팡이를 한 번 휘둘러 워프 포탈을 불러내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역겨운 늙은이군요. 그렇죠? 호호호.”

어디선가 들린 비음 섞인 목소리에 사내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라 불릴 만한 것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리 와, 월향.”

월향! 블러드, 아니 강철중이 들었다면 거품을 물며 길길이 날뛸 이름을 가진 여인이 매혹적인 몸놀림으로 사내의 품 안으로 안겨들었다. 대체 누가 월향을 이렇게 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사람은 판타즈마 월드에 단 한 명밖에 없다.

월향과 함께 헤라클래스를 배신한 자!

“무슨 일 있어?”

방금 전까지 냉기를 풀풀 날리며 명령을 하던 사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할 따스한 말투에 월향이 예의 그 색기 풀풀 날리는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베팔 그 늙은이가 과연 헤라클래스를 그냥 놔둘까? 예전에도 헤라클래스는 베팔 늙은이가 하던 NPC 인체 키메라 실험을 반대해서 미움을 받았다고. 분명 그 병신 같은 헤라클래스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호호호.”

“아니, 베팔은 헤라클래스를 죽이지 못해.”

단호한 무라사마의 말에 월향이 ‘어째서?’ 하는 눈빛으로 무라사마를 바라봤다. 그런 월향을 향해 씨익 웃음을 흘린 무라사마가 월향의 볼을 쓰다듬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무라사마의 모습이 참으로 매혹적이라고 월향은 생각하며 무라사마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베팔은 헤라클래스를 죽이면 자신이 나에게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

“그렇다면 왜 헤라클래스를 가만두는 거야? 난 그 머저리 같은 놈이 나와 같은 게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싫다고! 그 병신이 게임 천재가 아니었다면 그놈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느라 진땀도 빼지 않았을 거고 말이야.”

“그래, 그래. 네 기분 알아.”

쌍심지를 켜며 불평을 토하는 월향을 어린애 달래듯이 달랜 무라사마가 품에 안긴 월향을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지? 난 헤라클래스에게 잊혀지지 않을 절망을 내려주고 싶어. 월향, 넌 현명한 여자니까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지?”

“으응.”

소름 끼칠 만큼 싸늘한 무라사마의 말에 월향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무라사마에게서 멀어졌다. 무라사마는 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고.

“호호호. 그럼 이만 나갈게.”

다시 한 번 웃음을 흘린 월향이 짙은 색기를 흘리며 천천히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천박한 것…….”

휘이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무라사마의 입에서 나온 말과 합쳐져 싸늘한 바람이 되어 방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 * *

[계정과 비밀 번호를 말해주십시오. 계정이 없으신 분은…….]

“악어는악어새. 새는악어새.”

공허하다 못해 싸늘한 공간에 울려 퍼진 내 목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맑은 종소리와 함께 다시 기계적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정이 확인되었습니다. 지문 검사와 함께 홍채 검사를 하겠사오니 사용자께서는 약간의 충격에 대비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지이잉.

여인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눈을 현혹시키는 붉은빛이 내 눈을 한 번 스쳐 지나갔고 그와 동시에 따끔 하는 무언가가 장갑을 통해 내 열 손가락에 느껴졌다.

[사용자를 확인하였습니다. 총 1개의 캐릭터가 있습니다. 캐릭터 명, 블러드. 접속하시겠습니까?]

“접속!”

둥둥둥둥.

힘찬 내 외침을 뒤로, 듣기만 해도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번쩍 하며 사방을 뒤덮는 거대한 빛에 눈을 감았던 내가 다시 눈을 뜨니 짭짜름한 바다 냄새가 풍기는 배 안이었다.

‘제길,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건가?’

내가 접속한 곳이 루안 대륙 선착장이 아닌 배의 선실 안이라면 아직 도착은 하지 않았을 터. 짭짜름한 바다 냄새와 함께 작게 출렁이는 배의 느낌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폭스와 카나리아는?’

돌연 조용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니 왜인지 선실 안에는 나 말고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로그인 전의 모습을 보는 듯한 고요함에 막 갑판 위로 나가는 문을 여는 순간 기다란 나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우우!

“와아아! 드디어 도착이다!”

“루안 대륙이다!”

나팔 소리만큼이나 커다란 사람들의 함성에 작게 인상을 찡그리며 삐걱거리는 낡은 계단을 밟아 갑판 위로 올라갔다. 어떻게 알았는지 막 선실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오던 폭스와 카나리아가 나를 보고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블러드 님! 드디어 접속하셨네요?”

“그래, 벌써 도착인가?”

싸늘한 내 반응에 폭스가 볼을 긁적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흥, 덜떨어진 놈. 내가 웃으면서 대답하길 기대한 거냐.’

“이놈! 폭스 아우가 웃으면서 인사를 하면 네놈도 그에 맞는 예의를 보여야 할 것 아니냐!”

언제부터 폭스가 아우가 됐는지 폭스의 옆에서 점차 가까워지는 대륙을 구경하던 카나리아가 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찔끔하며 시선을 피할 만한 카나리아의 눈빛을 마주본 내가 천천히 등에 손을 가져다 대자 중간에 있던 폭스가 유쾌한 웃음을 흘리며 나와 카나리아를 중재했다.

“카나리아 님도 그만 하세요. 그것보다 저기 대륙이 보이네요. 와아, 정말 멋진걸요?”

“푸하하하! 그래. 역시 ‘꿈의 도시’라 불리는 항구 마을 베이거스답구만!”

‘꿈의 도시가 아니라 환락의 도시겠지.’

저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 숨어 있는 추악한 진실을 알고 있는 난 가벼운 조소를 흘리며 시선을 거둬 뚜렷이 윤곽을 드러내는 거대한 육지를 바라봤다.

마침 일몰 시간이라 이제 막 하나 둘 등불이 켜지는 항구 도시 베이거스의 풍경은 노을과 어우러져 가히 일품이었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초보 존을 가뿐히 넘어서는 그 엄청난 위용에 배에 타 있던 초보 유저들이 숨을 삼키며 그 장엄한 광경에 빠져들었다.

뿌우우우!

다시 한 번 울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배가 천천히 선착장에 도착하자 갑판 위에서 도시를 구경하던 유저들이 함성을 지르며 입구로 달려갔다. 배 안에 타 있던 수백 명의 초보 유저들이 겨우 두 사람이 들락거릴 만한 입구로 먼저 나가려고 아등바등하는 광경은 마치 개미지옥에서 빠져나가려는 개미들의 모습 같았다.

‘몇 분 늦어도 상관없겠지.’

저 개미 떼의 틈새에 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느긋하게 등에 매달린 클레이모어의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베이거스를 바라봤다.

번쩍이는 화려한 불빛과 그에 못지않은 형형색색의 갑옷과 마법사들의 로브. 골목 여기저기에서 숨을 죽이고 목표를 찾는 로그(도둑)와 테이머(조련사)로 보이는 유저와, 유저의 펫으로 보이는 커다란 샤벨 타이거를 보고 까르르 웃는 자그마한 소녀 유저. 그리고 누구를 기다리는 듯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는 검은 갑옷의 유저들…….

‘검은 갑옷?’

날카로운 시선으로 선착장을 휩쓸던 내 시선이 검은 갑옷의 무리들에게 꽂혔다. 개인이면 몰라도 저렇게 단체로 검은 갑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단체는 단 한곳!

“검은 사자단……!”

쥐어짜듯 흘러나온 한마디에 내 곁에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던 폭스와 카나리아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와 나의 게임 친구들이 창단한 검은 사자 길드에는 총 6개의 전투 부대가 있었다.

오직 마법사 계열로 이루어진 ‘검은 불꽃’과 성직자 계열로 이루어진 ‘검은 손’, 궁수 계열로 이루어진 ‘검은 화살’, 어쌔신과 로그 계열로 이루어진 ‘검은 그림자’ 그리고 길드 마스터인 나의 직속 부대였고 몇 명의 간부들로 이루어진 ‘검은 별’과 가장 많은 수로 이루어진 최전방 전투 부대인 ‘검은 사자단’이었다.

한 치의 틈도 없는 모습으로 나란히 도열해 있는 검은 갑옷의 유저들이 바로 그 검은 사자단이었다.

그중 가장 뒤쪽에 도열해 있는 유저의 손에 들린 커다란 휘장에 새겨져 있는 검은 사자 무늬와 그 사자의 몸통에 새하얗게 수놓인 ‘九’라는 수로 그들의 정체가 검은 사자단에서도 가장 수준이 떨어지는 검은 사자 9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놈들이……!”

“블러드 님, 무슨 일이세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폭스를 무시한 채 여전히 검은 사자단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내 눈가에 점차 살기가 흘렀다. 놈들이 선착장에서 단순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아무리 중요한 인물이라도 게임 상에서 엄청난 권력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약해빠진 9단이라 할지라도 검은 사자단을 보낼 리가 없었다. 검은 사자단은 검은 사자 길드의 힘이요, 정의요, 곧 명예니까.

‘설마……!’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혹시라도 놈들이 내가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상황은 최악에 가까웠다.

아니, 그것보다는 놈들이 어떻게 내가 이곳으로 올 것을 알았단 말인가. 분명 내 곁의 누군가가 검은 사자 길드에 정보를 흘린 것이 틀림없었다.

‘멜린? 톰? 아니면, 배에서 만난 폭스나 카나리아?’

수십 명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명확히 범인이라고 짐작되는 사람은 없었다.

‘대체 누구냐!’

“블러드 님?”

“닥쳐!”

폭스를 향해 토한 날카로운 외침이 검은 사자단의 귀에 들린 것인지 검은 사자단의 가장 선두에 있던 자가 고개를 들어 정확히 날 바라봤다. 그와 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 입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해골……!”

검은 사자 9단의 단주이자 순전히 현금으로 뇌물을 먹여 간부들의 추천을 받아 길드에 가입한 투 스타의 검사! 해골이라는 아이디보다는 ‘들쥐’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그였다.

-키키키. 무슨 소리십니까. 당신이 저에게 아이템을 주셨잖습니까.

“으으……!”

머릿속에서 해골의 목소리가 마치 수백 명의 해골이 외치는 양,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그리고 마침내 수백의 목소리가 하나로 화해 내 뇌리를 강타했다.

-더러운 사기꾼!

“크크. 죽여 버리겠… 컥!”

낮은 광소를 터트리며 막 뛰쳐나갈 자세를 잡고 살기 어린 함성을 토해내려는 내 입을 틀어막는 커다란 손에 놀라는 것도 잠시, 이내 무지막지한 힘에 내 몸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잘하셨습니다, 카나리아 형님.”

“크하하! 나야 폭스 아우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지. 그런데… 괜한 짓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스르릉.

“죽여주마.”

살기 어린 중얼거림과 함께 클레이모어를 꺼내드는 내 모습에 나를 집어던진 카나리아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카나리아와는 달리 폭스는 여전히 그 여유로운 표정을 지우지 않고 묘한 눈길로 나와 선착장의 해골을 번갈아 보았다.

“어라? 들쥐네요?”

‘해골을 알고 있어?’

폭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의외의 이름에 내 움직임이 그 자리에 박히듯 뚝 멈췄다.

“아무리 수준 낮은 9단이라도 그렇지 검은 사자단의 단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오다니, 검은 사자 길드도 참 한가하나 보네요. 아니면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길드 마스터 몰래 나온 것이거나 말이죠. 인원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후자 쪽인 것 같은데요? 그래도 상대가 들쥐라니…….”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술술 말을 풀어대는 폭스를 바라보는 내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비록 들쥐가 투 스타의 검사였지만(내가 있던 3달 전에는) 명색이 검은 사자단의 단주다. 몇몇 거대 길드와 NPC들로 이루어진 국가, 그리고 몇 개의 길드 연합을 합쳐 판타즈마 월드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길드의 단주 앞에서 어떤 미친 인간이 마구 별명을 부르겠는가.

해골 또한 그 별명을 싫어해서 자신의 상관이 아닌 사람이 그 별명을 부르면 꼭 처절하게 복수를 하고는 했다. 그래서 몇몇 고위급 유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잊혀가는 것이 바로 해골의 별명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폭스는 그런 해골의 별명을 마구 부르는 것도 모자라 마치 해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너 대체…….”

“우리도 빨리 내려가죠. 카나리아 형님, 블러드 님.”

“응? 그래. 내려가자고! 으하하.”

클레이모어를 집어넣으며 말끝을 흐리는 내 시선을 피한 폭스가 도둑 특유의 재빠른 몸놀림으로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 그 뒤를 따라 카나리아가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머리를 거칠게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보니 어느새 우리 3명 말고 다른 유저들은 모두 육지에 내렸는지 배 안에는 초보 유저들의 목소리 대신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긴장된 걸음으로 폭스와 카나리아를 따라 배에서 내렸을 때는 이미 우리와 함께 배에 탔던 초보 유저들이 모두 모습을 감춘 뒤였다.

‘분명 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별천지에 놀라 사방으로 달려갔겠지. 별천지 뒤에서 자신들을 노리는 교활한 사냥꾼들은 생각지도 못하고 말이야.’

“블러드 님?”

“무슨 일이냐.”

“저쪽 분들이 블러드 님께 무슨 볼일이 있나 본데요?”

가느다란 폭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태산 같은 위압감을 내뿜는 검은 사자단이 무거운 갑옷을 철거덕거리며 우리를 향해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물론 그 선두에는 기다란 금발을 휘날리는 해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으음.”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검은 사자단의 장엄한 행렬에 경비병들의 창 앞에서도 침착했던 카나리아가 무거운 신음을 뱉었다.

판타즈마 월드의 초보라면, 아니 초보 유저라고 해도 한 번쯤은 검은 사자 길드와 길드의 무력 단체를 듣고는 꿈에 그려봤을 것이다.

그건 카나리아 또한 예외는 아닌지 입으로는 무거운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두 눈만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다만 나와 폭스는 싸늘한 안광을 내뿜으며 벗은 투구를 옆구리에 들고 실실 웃음을 흘리는 해골을 노려보고 있었다.

“멈춰!”

철컹!

휘장을 들고 있던 단원의 외침에 전진하던 검은 사자단의 단원들이 자로 잰 듯 정확한 위치에 한 치의 틈도 없이 도열했다. 마치 한 자루의 검이 낸 소리인 양 단 한 번 울리는 묵직한 쇳소리에 카나리아의 몸이 움찔했다.

씨익.

유일하게 드러난 눈 사이로 흉흉한 안광을 내뿜는 검은 사자 9단을 배경 삼아 오만한 모습으로 턱을 치켜 올리고 있던 해골이 씨익 썩어빠진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으드득.

건들거리는 해골의 인사에 거친 이 가는 소리가 대신 답했다.

그런 내 반응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한 번 썩은 미소를 흘린 해골이 손을 들어 살짝 흔들자 나란히 도열해 있던 단원들이 재빨리 우리 주위를 둘러쌌다.

“폭스 아우.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침을 삼키던 카나리아가 조심스레 묻자 잔뜩 굳어 있던 폭스의 표정이 점차 풀리는가 싶더니 마침내 평소와 같은 유들유들한 웃음을 흘렸다.

“낄낄. 오랜만입니다?”

“놈……!”

방금 전과 똑같은 해골의 인사에 내가 등에 매달린 클레이모어를 뽑으며 뛰쳐나가려는 순간, 내 손을 살며시 저지한 폭스가 웃으며 해골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오랜만이네요.”

“예,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당신이나 저쪽에서 이를 가는 멍청한 놈이나 말이죠. 낄낄낄.”

으드득.

분노에 떠는 내 반응이 웃긴지 폭스를 바라보던 해골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천박한 웃음을 터트렸다. 전사 중의 전사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불리는 검은 사자단의 단주로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그의 모습에 카나리아가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카나리아는 곧 입을 다물었다. 입가에는 여전히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해골의 눈가에 어린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왜 이 사람이 여기 있냐고 묻는 듯한 해골의 눈초리에 나 또한 다른 종류의 호기심 어린 눈으로 폭스를 바라봤다.

폭스와 해골의 대화를 들어보면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인연이 아닌 악연으로.

폭스라면 충분히 해골을 알 수 있었다.

검은 사자단의 단주라는 것만으로도 홈페이지에 검색하면 수만 개의 자료를 찾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해골이 폭스를 알고 있는 것은 의외였다.

아무리 검은 사자 길드가 초보 존에까지 손을 뻗쳐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있다지만 하루에도 천 명이 넘는 유저들이 탄생하는 초보 존의 유저들 한 명, 한 명을 기억할 만큼 검은 사자단의 단주 자리가 한가한 것이 아니었다.

“낄낄,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이죽거림이 담긴 해골의 말에 나와 카나리아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소문? 대체 무슨 소문이라는 거지?’

해골의 저열한 눈빛과 폭스의 싸늘한 눈빛이 교차하는 가운데 마침내 해골의 기분 나쁜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마탑의 어느 미친 마법사가 캐릭터를 삭제하고 새로 만들었다는 소문 말입니다.”

“마탑?”

카나리아의 얼빠진 물음을 뒤로한 해골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천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낄낄, 그 조건이 아마 폭염의 마도사가 마탑에 가입하면 어느 멍청한 놈이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 보호해주겠다는 것이지요? 키하하핫!”

소름 끼치는 해골의 웃음소리와 함께 폭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리고 폭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잠시 사라졌다고 느낀 순간, 어느새 양손에 단검을 든 폭스의 몸이 한줄기 화살이 되어 해골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모든 스탯을 힘에 투자한 나와 카나리아는 감히 넘보지 못할 속도임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웃음까지 흘리며 폭스의 손목을 잡아챈 해골이 기합과 함께 폭스의 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쿠우웅.

“커헉!”

뽀얀 먼지가 솟아오를 정도로 강한 충격에 한동안 폭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대로 몸을 돌리며 춤을 추듯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입가에는 여전히 유들유들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창백한 안색이 폭스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폭스의 모습을 바라보던 해골이 기다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쾌락에 들뜬 음성을 토해냈다.

“아아! 내가 당신을 집어던지는 날이 오다니. 낄낄. ‘그림자들의 아버지’라 불리던 당신을! 캬하핫. 지금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면 당신을 따르던 수많은 마법사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한낱 사기꾼을 보호하기 위해 캐릭터를 삭제하고 주 클래스인 마법사도 아닌, 비천한 도적을 택한 그림자들의 아버지의 모습을 말이야! 캬하하하.”

“죽어라!”

후우웅.

광기에 전 웃음을 터트리는 해골을 향해 달려 나가는 카나리아의 뒤에 클레이모어를 든 내가 따라붙자 웃음을 터트리던 해골이 가소로운 표정으로 짙은 검은색의 검을 빼어 카나리아를 겨눴다.

“어디서 쓰레기 같은 놈이!”

우우우웅.

콰앙!

해골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짙은 남색의 검기에 카나리아의 몸이 두 동강 남과 동시에 내 몸을 덮치는 충격에 나 또한 바닥을 굴렀다.

“헤라클래스! 네놈은 지금 랭킹 1위가 아니라 막 초보 존을 벗어난 벌레다! 조금은 네놈의 주제를 파악하는 게 어떠냐! 낄낄낄.”

반 이상 깎여버린 체력 게이지에 시선을 빼앗긴 내 머릿속에 강한 분노와 짙은 광기,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날려버릴 만한 잡념들이 가득 찼다.

마탑, ‘마법사의 탑’은 모든 마법사들이 가입하기를 희망하는 마법사 길드다. 정확한 위치조차 알려지지 않은 마법사의 탑은 검은 사자 길드와 함께 판타즈마 월드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10개의 단체 중 하나다.

그런 곳에서 다훈, 아니 폭염의 마도사라 불리는 염환은 분명히 좋은 동지이자 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환은 오직 솔로 플레이를 고집하면서 수많은 요청과 아이템을 거절하며 마법사의 탑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솔로 플레이를 하는 유저들은 염환을 거의 광적으로 따랐다. 그런데 그런 염환이 마법사의 탑에 가입을 했단다. 바로 나를 위해!

“키키키!”

‘다훈아……!’

역겨운 웃음소리가 사방을 채우는 가운데도 절친한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염환이 직접 나서 나를 도와준다면 내 정체가 들통 날 것이 뻔했다. 아니, 적어도 조금은 버텨도 머지않아 그 사실이 판타즈마 월드 전체에 퍼질지도 몰랐다.

사기꾼 헤라클래스와 폭염의 마도사가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피해는 결코 게임에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염환은 현실에서조차 내가 받았던 고통을 받을 것이다. 물론 나 또한 지금보다 더한 괴롭힘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염환은 마법사의 탑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마법사의 탑 유저들 중 한 명을 나에게 붙여준 것이다.

그 마법사가 폭스라는 사실까지는 알았지만, 어째서 폭스가 자신의 캐릭터를 삭제하면서까지 나를 보호해주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마법사의 탑에 가입된 마법사라면 적어도 쓰리 스타 이상! 물론 아이템이야 개인 창고나 친한 지인에게 맡겨놨을 테지만 마법사 중심의 아이템이 도적 지망인 폭스에게 도움이 될 리 없었다.

“블러드 님! 블러드 님!”

수백 개의 의문과 잡념을 가르고 들려오는 폭스의 목소리에 그제야 내 정신이 판타즈마 월드로 돌아왔다.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폭스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폭스의 뒤에서 엄청난 크기의 불꽃 기둥이 터져 올랐다. 하늘마저 뚫어버릴 듯한 장엄한 불꽃 기둥 앞에 폭스가 환히 웃으며 외쳤다.

“탑에서 폭염의 마도사 님이 도착했습니다!”

폭스의 외침과 함께 갑작스레 나타난 염환은 자신의 별명이 폭염의 마도사라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주기라도 하듯 미친 듯이 화염계 마법을 뿌리며 선착장을 말 그대로 화염지옥으로 만들고 나서야 그 움직임을 멈췄다.

“여어, 모두 괜찮지?”

선착장의 절반을 태워버린 마법을 시전한 책임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은 염환의 넉살좋은 모습에 폭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 덕에 폭스가 건넨 포션을 받던 나까지 덩달아 자세를 낮췄다. 얼빠진 표정으로 사태를 관망하던 해골이 그제야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외쳤다.

“폭염의 마도사! 지금 네가 한 짓이 얼마나 큰일인지 알고 있냐!”

“일? 무슨 일?”

마법사의 탑 길드 마크인 짙은 흑색의 오망성(五罔星) 마크를 가슴에 수놓은 붉은 로브를 나풀거리며 태연히 묻는 염환의 모습에 폭스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폭스를 향해 살기 어린 눈초리를 날린 해골이 시선을 돌려 멍청한 표정으로 스틱을 만지는 염환에게 소리쳤다.

“지금 네 행동으로 마법사의 탑은 우리 검은 사자 길드와 적이 되었단 말이다!”

“내 행동? 내가 뭘 어쨌는데.”

“지금 네놈이 시전한 마법 때문에 내 부하들이 죽어… 응?”

비참한 모습으로 모래가 되어 사라질, 아니 적어도 팔다리 중 하나는 부러져 바닥을 구르는 부하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소리치던 해골이 딱 멈췄다.

그리고 이어지는 멍청한 말에 나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하나도 죽지 않았어?”

마치 하나도 죽지 않아서 아쉽다는 듯한 해골의 말투에 검은 사자 9단마저도 유일하게 투구 밖으로 드러난 눈을 찌푸리며 해골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마법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검은 사자단의 바로 앞, 정확히 배표를 파는 대기실에서 터졌다. 마법의 여파로 흉측하게 변한 대기실과 아직도 꺼지지 않고 남은 잔해를 태우는 불꽃이 진정 염환이 폭염의 마도사라 불리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네놈이 시전한 마법은 대범위 마법이라 부하들도 같이 피해를 입어야 정상인데…….”

“단주.”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보다 못한 검은 사자단의 단원 중 한 명이 해골의 팔을 잡고 이끌었지만 해골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단주.”

“꺼져라!”

자신을 잡아끄는 단원을 거칠게 밀쳐버린 해골이 광기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염환을 향해 검을 겨누며 말을 이었다.

“그래봤자 네놈이 우리를 향해 마법을 시전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만으로도 동맹이 깨질 이유는 충분하지. 크크크.”

“이 쥐새끼야, 베이거스의 선착장은 오늘 부로 우리 마법사의 탑이 관리하기로 되었다.”

“뭐, 뭐얏?!”

“한마디로 지금 네놈이 하고 있는 행위가 우리 마법사의 탑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짓이라는 거지. 네놈은 판타즈마 월드의 절반이 넘는 마법사를 모두 적으로 만들고 싶으냐?”

살기 어린 염환의 외침에 해골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염환의 말 그대로 마법사의 탑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판타즈마 월드에 존재하는 마법사들의 절반을 적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마법사의 탑에 가입한 마법사는 몇 안 되지만 마법사의 탑은 마법사들의 꿈이자 희망.

그런 곳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마법사라는 직업을 우습게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니, 해골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검은 사자 길드나 마법사의 탑과 적대 관계에 있는 길드에 속한 마법사들을 제외한 다른 마법사 유저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터였다.

잠시 동안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해골이 검을 쥐자 ‘웅웅’ 하는 진동과 함께 해골의 검에 짙은 남색 빛의 검기가 뭉클뭉클 맺혔다.

‘쓰, 쓰리 스타!’

점차 짙어져가는 해골의 검을 노려보던 내 눈이 부릅떠졌다.

해골이 쓰리 스타라니! 쓰리 스타라면 염환과 동급 레벨이다.

물론 염환이 레벨이 더 높아 유리할지 모르지만 해골에게는 검은 사자 9단이 있다. 해골 또한 그 점을 믿고 그러는 것인지 주위의 검은 사자단을 둘러보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키키키. 그게 무슨 개소리냐! 감히 나에게 사기를 치려고 하다니. 베이거스의 선착장은 예전부터 우리 길드가, 그것도 내가 관리하던 곳이다. 그런데 그곳을 마법사의 탑이 관리한다니! 마법사의 탑이 양지로 나와서 활동하기로 마음이라도 먹었단 말이냐! 낄낄.”

“하!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별명이 들쥐라서 진짜 지능 지수가 쥐처럼 돼버린 거냐?”

“닥쳐라!”

“실드!”

꽈강!

공기를 가르는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날아든 검기가 염환이 만든 실드에 부딪치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아온 검기에 부딪혀 폭음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졌다.

“무, 무슨 짓이냐!”

“그만 해라, 해골.”

해골의 검기를 같은 검기로 폭발시킨 장본인은 방금 전에 해골을 말리다 밀쳐진 검은 사자단의 단원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검에서도 해골과 같은 짙은 묵빛의 검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해골의 검기보다 훨씬 더 강맹한 기운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네, 네놈은 누구냐!”

자신보다 강한 부하를 향해 부르짖는 해골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 해골을 무시한 정체불명의 단원이 염환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폭염의 마도사께서도 그만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흥, 조금만 늦게 나타났으면 저 쥐새끼는 잘 익은 쥐 고기가 되었을 거다!”

화르르륵.

가볍게 코웃음 치며 조소를 흘리는 염환의 손에 어느새 나타난 푸른 불꽃에 염환을 중심으로 주변의 땅에 난 식물들이 순식간에 말라 재가 되어 사라지고 촉촉하게 젖은 비옥한 땅이 쩍쩍 갈라졌다.

“헤, 헬 파이어!”

“지옥의 불꽃이다!”

헬 파이어.

일명 지옥의 불꽃이라 불리며 모든 공격 마법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파괴력을 지닌 무지막지한 마법으로 살상 능력이나 파괴력으로는 가히 으뜸이었다.

헬 파이어 한방이면 검은 사자 9단의 3분의 1 이상이 순식간에 로그아웃 당할 것이기에 염환의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검은 사자 단원들이 경계의 눈초리로 거리를 벌렸다.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해골을 막은 정체불명의 단원과 폭스 그리고 염환 정도였다.

‘포 스타……!’

가벼운 손놀림으로 헬 파이어를 소멸시키는 염환을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헬 파이어라면 포 스타 이상이 되어야만 배울 수 있는 고위급 마법! 그런 헬 파이어를 염환이 사용했다면 그 답은 하나였다.

“포 스타가 된 거냐?”

“그래. 드디어 네놈을 따라잡았다. 약 오르지? 푸하하하.”

칭찬 좀 해달라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리는 염환의 모습에 기쁨과 함께 절망이 내 몸을 엄습했다. 3달의 공백은 내 ‘강함’의 기준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나 말고는 아무도 꿈도 못 꾸던 포 스타가 내 눈앞에 나타났고 허접이었던 해골은 쓰리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염환이나 해골보다 뛰어나고 레벨이 높았던 유저들은 아마 더욱 더 강해졌을 것이다.

‘그건 무라사마 또한 마찬가지겠지.’

내가 절망감에 휩싸여 있던 순간, 해골을 막았던 단원이 투구를 벗으며 고개를 흔들자 투구 안에 숨어 있던 기다란 금발이 쏟아지듯 흘러내려 갑옷 위를 물들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드러난 단원의 얼굴에 붉게 상기되었던 해골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로, 로즈마리 님……!”

로즈마리라고 불리는 인물은 의외로 선이 가는 미남이었는데 새하얀 피부와 지나치게 붉은 입술, 그리고 오뚝한 코가 전체적으로 이국의 귀족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흥, 네놈의 천박함은 내가 진작 알아봤지만 이건 천박해도 너무 천박하구나. 갑자기 아지트를 나서는 너를 수상하게 여기신 무라사마 님이 미리 말씀해주셔서 몰래 따라왔기에 망정이지, 만약 내가 없었다면 어찌 하려 했느냐.”

로즈마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싸늘한 말에 새하얗게 질려 있던 해골이 주위의 시선도 잊은 채 허리를 숙이며 비굴한 음성을 토해냈다.

“죄, 죄송합니다.”

“흥, 사과는 무라사마 님께 하는 게 좋을 거다. 그건 그렇고… 포 스타가 되었다는 게 사실이었군.”

“음… ‘전장의 신사’라는 로즈마리는 아직 포 스타가 되지 못했나 보지? 어쨌든 저 쥐새끼가 날뛴 값은 충분히 치러야 할 거다.”

화르륵.

간단한 수인으로 양 옆에 거대한 불꽃을 소환한 채 말하는 염환의 모습에 로즈마리의 미간이 구겨졌다. 누가 봐도 협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염환의 모습에 고개를 돌리던 로즈마리의 시선이 나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이내 해골을 향해 꽂혔다.

“대체 저 핏빛 머리가 누구기에 남의 구역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그, 그게…….”

‘나를 모르고 있어?’

해골과 로즈마리의 대화에 나를 비롯한 염환과 폭스의 눈이 흔들렸다.

‘분명 로즈마리는 나를 모르고 있다. 그런데 해골이 알고 있다? 그것도 정보가 제한된 중급 직책을 맡은 해골이?’

로즈마리라면 나 또한 잘 알고 있는 유저로 전장의 신사라 불리며 검기가 장밋빛과 장미향을 내는 괴이한 검을 사용하는 유저로 검은 사자 길드의 상급 직책을 가진 간부였다.

그런데 그런 로즈마리도 모르게 해골이 단원들을 데리고 나온다? 물론 파티 사냥을 핑계 대고 나오면 가능하겠지만 그것도 인적이 드문 곳에 갈 때에나 가능한 이유였다.

베이거스 선착장이라면 초보 존에서 막 들어온 초보 유저나 그런 초보 유저들을 등쳐먹을 기회를 노리는 사기꾼들, 그리고 고레벨 유저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 아닌가.

분명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독자적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컸다. 그것도 내가 다시 게임을 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는 그 누군가에 의해.

내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이미 사태가 끝났는지 로즈마리와 염환이 서로 악수를 나누고 등을 돌려 각자 자신들의 갈 길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만나지. 전장에서 말이야.”

“기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의 검은 사자단을 데리고 선착장을 빠져나가는 로즈마리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보던 폭스가 전의 그 유들유들한 웃음을 흘리며 염환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입니다. 적절한 때에 나타나주셨군요.”

“아닙니다. 늦은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용케 제시간에 도착했습니다. 하하하.”

“그건 그렇고 마법사로서는 3번째 포 스타가 되셨군요. 대단합니다. 마법사를 했던 유저로서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아뇨. 폭스 님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아마 저보다 먼저 포 스타가 되셨을 겁니다. 그림자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은 허명이 아니니까요.”

“과찬이십니다.”

현실에서의 모습과는 180도로 다른, 예의범절의 표본을 보는 듯한 염환이 폭스와 말을 몇 번 주고받은 뒤 그제야 짜증 섞인 눈빛을 흘리고 있는 날 발견했는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그 거대한 덩치를 최대한 움츠리며 다가왔다.

“폐인은 진짜 폐인이다. 어떻게 하루도 안 돼서 초보 존을 나오냐?”

“…….”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하루 안에 초보 존을 나온 사람은 네가 최초일 거다. 응?”

“너… 진짜 마법사의 탑에 가입한 거냐?”

침묵 끝에 이어지는 내 질문에 염환이 제법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에 달린 오망성을 가리켰다.

“그래. 푸하하! 원래 마법사의 탑에서 이 형님을 스카우트하려고 꽤나 고생했잖냐.”

“…멍청한 자식.”

한참 만에 열린 내 입에서 흘러나온 떨리는 목소리에 헬 파이어를 자랑하던 염환이 씨익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말로는 하지 못할 수많은 이야기들이 팔을 타고 내 마음에 전해졌다. 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받은 염환이 아무 말 말라는 듯이 내 어깨를 치며 폭스와는 다른 시원한 웃음을 흘렸다.

“짜식, 부럽지? 부러우면 빨리 레벨 업해서 너도 탑에 가입하든지. 아! 너는 마법사 아니지? 쉿, 지금은 부러워도 그냥 아무 말 말아라! 푸하하!”

“크큭! 부럽기는 뭐가 부럽다는 거냐? 멍청한 곰탱아. 두고 봐라. 금방 따라잡을 테니까.”

‘그래… 친구 사이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아무 말 하지 않아도 통하니까 친구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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