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4 마법사의 탑
그으으으.
“으아아악!”
까악, 까악.
염환의 손에서 펼쳐진 포탈을 타고 나오자마자 정체 모를 울음소리와 주인 모를 비명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눈앞에 펼쳐진 황량한 들판에 우뚝 솟아난 탑이 음산함을 한껏 뽐냈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마법사의 탑에.”
“예. 후후. 잠시만 기다리시죠.”
감격 어린 표정으로 감탄하는 폭스의 어깨를 살짝 건드린 염환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지 혼자서 입을 움찔거리자 잠시 염환을 바라보던 폭스가 다시 시선을 돌려 음산한 탑을 바라봤다. 그런 폭스와는 달리 나는 약간 실망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 볼품없는 탑이 마법사의 탑?’
모든 마법사들의 꿈이자 희망 그리고 긍지라는 마법사의 탑이 이런 조그마한 5층짜리 탑이라고?
폭스의 감격 어린 눈빛을 받는 탑은 조금 커다란 마을에 가면 볼 수 있는 시계탑을 연상시키는 볼품없는 탑이었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탑의 꼭대기에서 쉴 새 없이 빛을 뿜어내는 거대한 하얀 보석 정도? 여기저기 금이 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탑의 모습에 내 미간에 잡힌 주름이 짙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황당하게 한 것은 바로 마법사의 탑 길드 아지트가 존재하는 필드였다.
“망자의 대지.”
“예?”
“아무것도 아니다.”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를 용케 듣고 반문하는 폭스를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주위를 배회하는 임프와 좀비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레벨이 낮은 몬스터라 하더라도 조금은 가지고 있는 수준 낮은 인공지능 덕분에 염환의 막강한 힘을 느끼고 감히 나와 폭스를 공격하지 않고 우리 주위를 배회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했지만 그런 것 따위가 문제는 아니었다.
망자의 대지는 레벨 50에서 100 사이, 그러니까 초보 존에서 막 나온 초보 유저들이 원 스타가 되기 전까지 몰리는, 베이거스 근처에서는 가장 편하고 안전한 사냥터로 이름 높은 필드다.
그런 곳에 길드 아지트를 만들었다?
이건 바보짓이다.
다른 길드들의 길드 아지트가 있는 위치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검은 사자 길드는 많은 경험치와 고가의 아이템을 주는 ‘용의 쉼터’라는 필드에 아지트를 만들었고 ‘다아리엘의 검’이라는 성기사와 성직자 길드는 고레벨의 언데드 몬스터가 많이 출몰하는 ‘잊혀진 자들의 궁전’이라는 필드 근처에 아지트를 만들었다.
그 밖의 다른 길드들도 모두 고레벨의 몬스터나 아이템을 많이 주는 필드 근처에 아지트를 만들고 거의 무한에 가까운 사냥을 하여 레벨을 올리는 실정이었다. 아무리 마법사의 탑이 망자의 대지 깊숙한 곳에 위치했다지만 적어도 하루에 백 명 이상이 근처에서 사냥할 터였다.
“염환…….”
“휴, 다 됐습니다. 이제 들어가죠.”
“상당히 까다롭게 변했군요.”
“양지로 나온 탑은 사방이 적이니까요.”
그렇게 또다시 나를 무시한 채 폭스와 복잡한 대화를 나루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염환이 살짝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자 내 머릿속에서 염환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
[염환: 왜 길드 아지트가 이런 허접한 필드에 있는지 궁금한 거냐?]
폭스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염환이 다시 귓속말을 보냈다.
[염환: 너도 알다시피 마법사의 탑은 음지에 숨어 있다 이제 막 양지로 나온 길드다. 다른 유저들의 지지와 신뢰가 턱없이 부족하지. 막연히 마법사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깨달은 길드 마스터는 망자의 대지에 길드 아지트를 세우고 마법사의 탑에 있는 마법사들을 내보내 초보 유저들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내 모습에 살짝 미소를 흘린 염환이 말을 이었다.
[염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베이거스의 선착장을 접수할 필요가 있었지. 그래서 약간의 불이익을 감수해서라도 베이거스의 선착장을 접수한 거다.]
[블러드: 약간의 불이익?]
“폭염의 마도사 님이십니까?”
내가 염환을 향해 귓속말을 보냄과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곳이 웅웅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공간이 일그러지며 검은 로브의 마법사 한 명을 토해냈다.
염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검은 로브의 마법사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며 손에 들린 스틱을 흔들었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탑의 문이 열렸다.
이내 방금 전의 목소리의 주인으로 보이는 푸른 로브의 마법사가 염환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마스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맙군.”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한 염환이 여전히 감격 어린 표정의 폭스의 앞세워 마법사의 탑의 길드 마스터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며 다시 귓속말을 보냈다.
[염환: 그래. 마스터가 가지고 있던 9클래스 마법서 하나를 검은 사자 길드에 넘긴 거지.]
[블러드: 9클래스?]
경악 섞인 내 물음에 염환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염환: 그래, 마법서와 선착장을 교환해서 초보 유저들의 민심을 끌어 지금은 제법 좋은 길드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마스터 말로는 조금만 더 이 짓을 하고 다른 길드처럼 고레벨 필드로 아지트를 옮긴다고는 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염환의 긴장된 목소리는 이미 내 관심 밖이었다.
내 관심사는 단 하나.
바로 마법사의 탑 길드 마스터가 검은 사자 길드에 넘겼다는 9클래스의 마법서였다.
9클래스라면 포 스타 이상의 마법사들이 배울 수 있는 마법으로, 화염계의 ‘메테오 스트라이크’나 빙설(氷雪)계의 ‘블리자드’ 정도의 위력을 가진 9클래스 마법서는 유니크 아이템과도 맞먹는 수준이었다. 확실히 그 정도면 베이거스 선착장과 바꿀 정도의 가치는 충분했다.
‘문제는 그 9클래스 마법서를 배운 것이 누구냐는 건데…….’
분명 내가 나오기 직전에 길드에 나 말고는 포 스타가 없었다. 아니, 무라사마보다 더 앞선 레벨로 포 스타를 넘보는 마법사 유저가 한 명 있기는 했다.
베팔! 검은 불꽃의 수장이며 고레벨의 마법사로 수(水) 계열 마법에 능통한 몇 없는 노중년층 유저로 평소 음침한 성격으로 길드 내에서도 말이 많은 그였지만 마법사로서 그의 능력은 거의 천재적이었다. 레벨 또한 염환을 앞질러 마법사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길드 내부의 배반자를 처분하거나 외부의 적을 섬멸하는 일에 항상 앞장서서 마법을 쏟아 붓는 베팔에게는 ‘바다의 마도사’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베팔 또한 그 별명에 매우 만족하는 듯했다.
마법사의 탑 길드 마스터가 건넸다는 9클래스 마법서의 정체는 모르지만 그 마법은 베팔이 배웠을 것이 분명했다.
‘포 스타가 두 놈이라… 크큭.’
적이 강해야 쓰러트리는 맛이 난다는 소리는 정말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 정도 상황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친 듯이 레벨 업을 하고 동료를 모아 검은 사자 길드에 대항해야 할 상황이었다.
“다 도착했다.”
내가 막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앞서 가던 염환과 폭스가 거대한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 또한 탑의 외형과 마찬가지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는데 문 위에 달린 ‘마스터 집무실’이라는 명패만이 이곳이 정말 길드 마스터의 집무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똑똑.
“마스터, 염환입니다.”
“들어와.”
염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 안에서 묵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묵직하게 깔린 낮은 목소리에 염환이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이어 폭스와 내가 들어갔다.
수수한 방에 자리 잡은 탁자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인영이 서서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마법사의 탑에 온 것을 환영하지. 내가 바로 탑의 주인인 ‘마법사가짱이얌’이다.”
‘마법사가짱이얌?’
마법사의 탑 길드 마스터는 삼십대 후반의 무거운 인상에 어깨까지 오는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남자였는데 생김새, 목소리와는 다르게 귀여운 아이디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요상한 건 그렇다치고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아이디였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탑이라는 거대 길드의 길드 마스터라면 아무리 자신을 숨긴다고 하여도 어떠한 방법으로든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드러나지 않은 이유라면 단 두 가지, 정말 이름도 날리지 못하는 허접이거나 엄청난 실력과 계략으로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겼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백의 백, 후자가 분명했다.
이내 염환이 나를 지나쳐 마법사가짱이얌을 향해 목례를 하며 말했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다. 모두 앉지.”
“예.”
마법사가짱이얌의 권유에 염환과 폭스, 그리고 내가 자리에 앉자 무거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마법사가짱이얌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은 눈빛이군.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뭘 걱정했다는 거냐?”
초반부터 반말로 나가는 내 태도에 폭스가 움찔하며 나를 노려보자 마법사가짱이얌이 눈빛으로 폭스를 진정시키며 진득한 미소가 걸린 입을 열었다.
“눈빛 말이야. 혹시나 시간이라는 독약이 너의 복수심을 녹여버린 것이 아닌지 걱정했다.”
“혹시 현실에서 시인인가?”
“그건 왜 묻지?”
갑작스런 내 물음에 갸웃하며 묻는 마법사가짱이얌을 바라보는 내 입가에도 진득한 미소가 걸렸다.
“아이디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생긴 거와는 딴판이어서 물어본 것뿐이다.”
“블러드 님, 말이 너무……!”
“폭스, 입 다물어라.”
“하지만 마스터……!”
“마스터가 아니라 형으로서 하는 말이다. 아가리 닥쳐라.”
“크윽.”
금방이라도 마법을 난사할 듯 살기를 흘리는 마법사가짱이얌의 모습에 내 목에 단검을 박아 넣을 기세였던 폭스가 신음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흐음. 현실에서 형제 사이였군.
“내가 동생을 대신해 사과하지. 이건 마법사의 탑 길드 마스터가 아니라 폭스의 형으로서 하는 사과이니 받아주길 바란다.”
“받아주지.”
“그럼 일 이야기를 해볼까?”
갑작스레 일 이야기를 하자는 마법사가짱이얌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당혹스러운 내 표정을 읽은 것인지 진득한 미소를 흘리던 마법사가짱이얌 또한 당황한 표정으로 염환을 바라봤다.
“염환, 말해주지 않은 건가?”
“예, 아직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일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염환, 나에게 숨기는 이야기가 있었냐?”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흘리는 염환을 향해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내자 염환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놈 또한 자기 나름대로는 나를 생각해서 말해주지 않은 것이겠지만 그런 배려라면 내가 질색이었다. 나 몰래 나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눈감고 넘어가줄 만큼 나는 멍청한 놈이 아니니까.
“어차피 이야기하려고 했으니 내가 이야기하지. 헤라클래스, 아니 지금은 블러드인가? 난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무슨 제안인지 몰라도 날 이용해 먹으려는 속셈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스르릉.
등에 걸린 클레이모어의 손잡이를 잡으며 중얼거리는 내 말에 조용히 있던 폭스가 단검을 꺼내들어 내 목을 겨눴다.
하지만 정작 위협을 받는 마법사가짱이얌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흘리며 나를 지긋이 노려볼 뿐이었다. 하긴, 이제 겨우 초보 존에서 나온 레벨 30짜리가 마법사의 탑 주인에게, 그것도 탑 안에서 덤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 또한 여기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손해는 없었다. 아직은 레벨이 30이라 경험치 다운도 없을뿐더러 여기서 검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나 이런 놈이니까 조심해라.’라는 각오를 보여주는 것이니 오히려 한 번쯤은 죽어주는 것이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린 마법사가짱이얌이 고개를 돌려 폭스와 염환에게 나가 있으라는 듯이 시선을 주자 나를 보며 뭐라고 반박하려던 폭스가 염환의 손에 이끌려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나섰다.
“무슨 수작이냐?”
“후후, 좋군.”
대체 뭐가 좋다는 것인지 내 도발에 낮은 웃음을 흘리던 마법사가짱이얌이 마침내 진득한 웃음을 버리고 무표정한, 그러나 얼굴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정을 숨기지 않은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난 네 복수를 돕고 싶다.”
“뭐……?”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읽은 마법사가짱이얌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마법사의 탑 길드는 여태껏 철저히 음지에서만 활동했다. 그런 우리가 어째서 이제야 양지로 올라왔는지 알고 있나?”
“알 리가 없지.”
“솔직해서 좋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분히 불쾌함을 느끼게 하는 미소를 머금은 마법사가짱이얌의 입이 다시 열렸다.
“간단히 말하지. 난 판타즈마 월드를 지배할 생각이다.”
“……!”
갑작스러운 마법사가짱이얌의 말에 말문이 막힌 것도 잠시, 이내 내 입이 열렸다.
“미쳤군.”
“너라면 충분히 날 이해할 줄 알았는데.”
싸늘한 내 대답에 마법사가짱이얌이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구겼다. 판타즈마 월드를 지배한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미친 자식.’
마법사가짱이얌을 단순한 미친 자식으로 판단한 내가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마법사가짱이얌의 입이 다시 열렸다.
“현재 판타즈마 월드는 10개의 막강한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지. 과거 네가 속해 있던 검은 사자 길드와 우리 마법사의 탑을 비롯한 여러 국가 권력 기관과 유저들로 이루어진 길드나 NPC, 혹은 몬스터들로 이루어진 단체들 말이야. 아쉽게도 그중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진 것은 NPC들로 이루어진 국가와 몬스터들로 이루어진 단체지. 유저들로 이루어진 단체 중, 한 나라와 대적할 수 있는 단체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마법사가짱이얌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판타즈마 월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유저라면 모두 다 알고 있을 법한 사실을 말해주는 마법사가짱이얌의 모습에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마법사가짱이얌 또한 마주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우리는 그 10개의 단체들 중 유저들로 이루어진 단체에서 가장 막강한 검은 사자 길드를 쓰러트리고 그 힘을 흡수하고 싶다.”
“그런데 그게 나의 복수와 무슨 상관이 있지?”
확실히 상관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상관이 있지도 않았다. 이제 고작 초보 존을 벗어난 내가 무슨 힘이 있을까. 물론 아직까지 나를 믿고 따라주는 예전 길드원들이 몇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솔직히 말해 믿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믿고 그들과 접촉했다가 그중에 스파이라도 있다면 큰 낭패였기에 아직까지 염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상태였다.
“상관이 있지. 그것도 아주 커다랗게…….”
‘설마 나보고 그들을 회유라도 하라는 건가?’
일순간 떠오른 생각에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는 나를 눈빛으로 제지한 마법사가짱이얌이 속에 담은 말을 모두 쏟아내기라도 하듯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현재 검은 사자 길드를 쓰러트리기 위한 무대는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주연들까지 모두 준비되었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주인공 자리가 미정이라서 말이야…….”
독사의 눈을 연상시키는 싸늘한 세모꼴의 눈으로 날 흘겨보며 말끝을 흐리는 마법사가짱이얌의 모습에 내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설마 지금 나에게 그 무대의 주인공을 부탁하는 건 아니겠지?”
내 말투가 우스웠는지 마법사가짱이얌이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후후후, 부탁하지.”
“거절하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내 거절에 마법사가짱이얌이 의문 담긴 눈빛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현재 우리 탑과 뜻을 같이하기로 한 길드는 최소 2개다. 그 2개의 단체 모두가 우리 마법사의 탑 못지않은 저력을 가지고 있는 길드지.”
“그래서?”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내 말투에 마법사가짱이얌이 조금은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멍청한 놈, 겨우 그따위 정보로 내가 놀라길 기대했냐? 검은 사자 길드와 대적하려면 당연히 그 정도는 준비해야지.’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감춘 마법사가짱이얌이 말을 이었다.
“흠흠, 우리는 잠시 동맹을 맺고 가장 강력한 적인 검은 사자 길드를 무너트리기로 작정한 거지. 물론 무작정 힘으로 무너트리려는 것은 아니다. 현실 시간으로 100일 뒤, 판타즈마 월드에서 어떠한 형식의 무투회를 연다고 한다. 뭐. 운영자 측에서 알려준 것이니 거의 99.9%확실한 정보지.”
무투회라… 마법사가짱이얌이 말하는 ‘어떠한 형식’의 무투회에 내 관심이 쏠렸다. 대체 그게 내 복수, 그리고 검은 사자 길드를 쓰러트리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의문 가득한 내 표정에 마법사가짱이얌이 전의 그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한 무대는 그 무투회다. 우리는 무투회에서 너의 아이템 복사의 진실을 밝힐 것이고 그것을 핑계로 우리 동맹은 검은 사자 길드의 본진을 칠 것이다. 물론 여론과 여러 유저들은 우리 편일 것이고. 크큭! 멋지지 않나? 억울하게 사라진 영웅을 위해 뭉친 유저들! 그리고 무너지는 검은 사자 길드! 크크큭.”
자아도취에 빠져 웃음을 흘리는 마법사가짱이얌을 바라보는 내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네놈,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네 사건의 진실 말이냐? 크크크.”
“그래.”
으드득.
서늘하게 울리는 이 가는 소리에 마법사가짱이얌의 입가에 걸린 조소가 한층 더 짙어져 마침내 승자의 미소를 만들어냈다.
“이것 또한 운영자 측에서 건넨 정보다. 뭐,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지만 말이야. 어때, 주인공이 되어주겠나?”
“큭! 나보고 그 무투회에 나가서 그 빌어먹을 사건에 대해 떠들라는 얘기냐?”
“그래. 네가 손해 보는 일은 아닐 텐데?”
“으음.”
확실히 내가 손해 보는 일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익이라면 엄청난 이익이었다.
염환 빼고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지금, 마법사의 탑이라는 막강한 단체와 탑과 비슷한 수준의 힘을 가진 2개의 길드라면 적어도 실패할 확률은 없었다. 아니, 실패한다고 해도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난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버린 욕을 먹으며 다시 힘을 길러 나 혼자만의 계획을 실행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이놈 또한 믿을 만한 놈은 아니다. 만약 내가 쓸모없어지거나 자신의 계획에서 조금만 틀어진다면 일말의 고민 없이 버릴 냉정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천의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죽여 버릴 수 있는 자만이 가지고 있는 눈빛. 그것이 설령 가상현실이라 하더라도 위험한 놈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크큭!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복수의 계획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강해져야 하는 거냐?’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이 더러운 현실에 욕을 삼키며 마법사가짱이얌을 향해 슬쩍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말한 사건의 진실을 사람들이 믿지 못하면?”
내 마음은 이미 마법사가짱이얌의 계획에 동참하고 있었다. 혼자서 비참하게 발악하는 것보다는 막강한 힘을 뒤에 업는 게 더 효과적으로 놈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내 말 속에 담긴 승낙의 뜻을 읽은 마법사가짱이얌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내 얼굴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넌 아무런 걱정 없이 레벨 업에만 몰두해서 100일 뒤, 무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강자가 되기만 하면 된다. 아무런 걱정 없이 말이야. 후후후! 물론 그때까지 네가 헤라클래스라는 것은 철저히 숨겨야겠지만 말이야.”
‘뭔가 있군.’
마법사가짱이얌의 입에서 풍기는 ‘음모’라는 이름의 지독한 악취에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서 문으로 가자 마법사가짱이얌이 푹신한 의자에 몸을 눕히며 입을 열었다.
“밖에 나가면 염환이 아이템을 줄 거다. 네가 지망하는 직업이 힘 위주의 전사라고 해서 대충 원 스타 이전의 전사들이 쓰는 아이템 중 가장 좋은 아이템들로 모아놨으니 거절할 필요는 없다. 물론 예전 아이템에 비하면 우습겠지만 지금은 그걸로 만족하라고.”
“고맙게 받지.”
자존심을 앞세우며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의외로 별다른 거절 없이 받는다고 하자 마법사가짱이얌이 의외라는 듯 눈을 치켜떴다.
‘흥, 멍청한 자식. 벌써 자존심도 다 버리고 네놈들에게 이용당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아이템을 거절할 리가 있겠냐.’
잠시 멍한 눈으로 날 노려보던 마법사가짱이얌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같은 뜻을 가진 동료에게 무엇인들 못해줄까. 크큭.”
“그래, 같은 뜻을 가진 동료. 크크큭.”
마법사가짱이얌의 말투를 비슷하게 따라해 비꼬며 집무실을 나서는 내 뒤통수로 서늘한 눈빛이 쏟아졌지만 애써 태연한 척 무시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마법사가짱이얌 또한 내가 쉽사리 자신에게 이용당해줄 놈이 아니란 것을 대충이나마 눈치 챘을 것이다. 아니, 쉽사리 이용당해도 후에 뭔가 후환을 가져다줄 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강렬한 인상, 그것이면 된 거다.
“크크큭. 다시는 멍청하게 이용당하지 않을 테다…….”
“응? 뭐라고?”
낮은 광소와 함께 내뱉은 살기 어린 독백에 문 앞에 있던 염환이 큰 눈을 껌뻑거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보다 염환, 마법사가짱이얌이 너에게 아이템을 받으라고 하더군.”
“아! 맞아. 그런데 받겠다고 했냐? 의외네. 나는 네놈이 거절할 줄 알았는데. 거기다 전사 아이템이라면 네 창고에도 깔렸잖냐.”
운영자가 일부러 가지고 가지 않은 것인지 내 창고에는 몇 가지 아이템들이 제법 남아 있었다. 사라진 아이템들에 비하면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들이지만 다른 유저들이 보기에는 거의 상급에 해당하는 아이템들이었다.
“내 창고에 있는 아이템들은 거의 다 쓰리 스타 이상이 쓰는 것들이다. 최하가 투 스타 이상이란 말이다.”
고개를 돌리자 염환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인영의 살기 어린 눈이 무심한 내 눈과 마주쳤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는 인영의 정체는 바로 폭스였다.
“블러드 님, 방금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건성으로 사과하는 폭스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린 염환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 나를 말리며 거래 신청을 해왔다.
[상대방 염환 님께서 거래를 신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파팟.
거래를 수락하기가 무섭게 거래 여부를 묻던 홀로그램 창이 사라지고 한쪽에 제법 커다란 거래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염환의 손이 허공에서 몇 번 움직이자 아무것도 없던 거래창에 아이템 하나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지화가 되어 있어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온통 검은색의 갑옷과 세트 아이템으로 보이는 각종 방어구들과 목걸이, 그리고 반지였다.
[상대가 거래를 완료했습니다. 완료하시겠습니까?]
“완료.”
거래를 완료하기가 무섭게 아이템이 쌓이는 효과음과 함께 가벼웠던 몸이 갑작스레 늘어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블러드, 지금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들은 모두 버려라.”
염환의 말대로 지금 착용하고 있는 싸구려 아이템들을 모두 바닥에 버린 뒤 염환에게 받은 아이템들을 하나씩 착용하며 몸 여기저기를 움직여 새로운 아이템에 몸을 적응시켰다. 전에 착용하던 오크 워리어 세트와 비교해서 오히려 무게가 줄었으면 줄었지 결코 무거워지지 않은 착용감에 만족하며 상태창을 열었다.
-검은 용병의 흑철 갑옷(A급)-
제법 이름 있는 용병이 입었던 갑옷으로 방어력이 좋다.
방어력- 130. 내구력- 110/110.
특수능력- 0.5% 확률로 적의 공격 무시.
(단, 적과의 레벨 차이가 20 이하여야 함.)
세트 착용 시 방어력 50증가.
힘 5증가. 체력 5증가. 민첩성 3감소.
(검은 용병의 세트- 검은 용병의 갑옷, 검은 용병의 투구, 검은 용병의 각반, 검은 용병의 건틀릿.)
-검은 용병의 흑철 투구(B급)-
제법 이름 있는 용병이 썼던 투구로 무게가 가볍고 방어력이 좋다. 단 눈 부분만이 뚫려 있어 답답한 것이 흠이다.
방어력- 35. 내구력- 60/60.
특수능력- 0.5% 확률로 화살 공격 무시.
세트 착용 시 방어력 50증가.
힘 5증가. 체력 5증가. 민첩성 3감소.
-검은 용병의 흑철 각반(A급)-
제법 이름 있는 용병이 쓰던 각반으로 가죽 위에 얇게 편 흑철을 덮은 것으로 가볍고 방어력이 좋다.
방어력- 30. 내구력- 50/50.
특수능력- 세트 착용 시 방어력 50증가.
힘 5증가. 체력 5증가. 민첩성 3감소.
‘좋군.’
이 정도면 원 스타 이전의 전사가 쓰기에는 최상에 가까운 아이템이었다. 주욱 아이템을 훑은 내 시선이 마지막으로 건틀릿과 장식류로 구분되는 반지와 목걸이의 설명란에 멈췄다.
-검은 용병의 흑철 건틀릿(A급)-
제법 이름 있는 용병이 쓰던 건틀릿으로 용병의 피와 땀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안쪽에 거친 몬스터의 가죽을 기워 전투 도중 무기를 놓치는 사고를 피하게 만들었다.
방어력- 40. 내구력- 75/75.
특수능력- 무기를 놓칠 확률 20% 감소. 힘 3증가.
검은 용병 세트 착용 시 방어력 50증가.
힘 5증가. 체력 5증가. 민첩성 3감소.
-푸른 늑대의 목걸이-
어느 대마도사가 심심풀이로 바람의 하급 마수 ‘윈디 울프’를 봉인한 목걸이. 가끔 목걸이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방어력- 3.
특수능력- 민첩성 7증가.
바람(風)계열 마법 방어 5% 상승.
-토지의 반지-
착용자의 힘을 일정 양 올려주는 반지.
방어력- 5.
특수능력- 힘 7증가.
땅(地)계열 마법 방어 3% 상승.
이내 마지막으로 푸른 늑대의 목걸이를 착용하자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느낌이었다.
“캐릭터 창.”
이름: 블러드. 레벨: 30. 속성: 혈(血).
성향: 중(中). 종족: 휴먼. 명칭: 초보자.
체력: 4800. 마력: 1750. 신성력: 1300.
힘: 142. 민첩성: 34. 체력: 35.
지혜: 30. 신마력: 30. 행운: 30.
세트 아이템의 영향으로 힘은 대폭 상승했고 체력 또한 조금이나마 상승했다. 민첩성이 조금 내려간 것이 조금 찝찝하기는 했지만 대폭 상승한 힘으로 만족하며 천천히 등에 걸린 클레이모어를 쥐어 들었다.
스응, 스응.
휘리릭. 척.
느릿한 속도로 허공을 가르던 클레이모어가 일순간 속도를 높여 현란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멍하니 내 모습을 바라보던 폭스의 목 언저리를 스쳤다.
“좋군.”
만족스럽다는 내 말투에 클레이모어가 스친 목 언저리를 쓰다듬던 폭스가 입을 열었다.
“무기는 안 바꾸실 겁니까?”
‘무기라…….’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아이템을 훑어보던 내 시선이 손에 들린 거대한 대검, 클레이모어에 꽂혔다. 확실히 클레이모어라면 양손 대검 아이템 중에서는 거의 상급에 해당하는 아이템이다. 그러나 등급 최하급인 D급인 클레이모어로는 확실히 빠른 레벨 업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염환, 그거 아직도 창고에 가지고 있겠지?”
“그거라니…….”
“거인의 단검 말이다.”
“아아!”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염환이 이마를 치며 탄성을 터트렸다.
“흐흐흐. 물론 가지고 있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염환의 모습에 내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걸렸다.
“좋아, 염환. 베이거스로 워프 포탈을 열어라.”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거인의 단검을 가지러 갈 기세로 염환을 재촉하는 내 앞을 막아선 폭스가 허름한 탑의 내부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비록 생긴 것은 허름해도 아지트로서 갖추어야 할 것은 모두 갖췄으니 마을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탑의 3층에 창고가 있으니까요.”
[폭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으니 염환 님께 혼자서 아이템을 찾아달라고 부탁해주시죠.]
갑작스런 폭스의 부탁에 고개를 갸웃하며 폭스를 바라보자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폭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응해주자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염환의 모습에 내 미간이 구겨졌다.
염환은 내가 버린 아이템들을 마치 유니크 아이템이라도 되는 양 소중하게 줍고 있었다.
“상점에 팔아봤자 1골드도 안 나오는 쓰레기들이다. 뭐 하러 줍는 거냐?”
“1골드를 비웃는 사람, 1골드에 눈물 흘린다. 이건 누구보다 우리가 더 잘 알잖냐. 하하하!”
예전에 나와 염환이 처음 판타즈마 월드를 시작했을 때 내가 정말 가지고 싶었던 검을 사기 위해, 지금 생각하면 정말 하찮은 검 값 1골드를 모으기 위해 초보 존의 사소한 퀘스트까지도 해결하며 발로 뛰어다녔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염환의 눈이 즐겁게 빛났다.
“크큭! 그래. 그건 그렇고 미안하지만 거인의 단검은 너 혼자 가서 좀 찾아와야겠다.”
“뭐?”
룰루랄라 즐거운 표정으로 손을 탁탁 털던 염환이 ‘내가 미쳤냐!’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불만을 토했다.
“내가 네 부하냐! 이놈이 아주 심부름꾼으로 부려먹으려고 하네. 이 자식아, 그런 건…….”
“부탁하마.”
“엥?”
“부탁하마.”
한바탕 불만을 토하려던 염환이 인상일 찌푸리며 폭스를 바라봤다. ‘무슨 일 있냐?’라고 묻는 듯한 염환의 눈초리에 폭스가 약간 난처한 미소를 흘렸다.
그렇게 한참을 나와 폭스를 번갈아 보던 염환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길치라서 거인의 단검을 찾고 오는 길에 길을 잃어서 아마 10분 정도는 늦게 올 거다. 그 안에 해결해라.”
말리는 건지 부추기는 건지 요상한 말을 내뱉은 염환이 로브가 휘날리도록 몸을 돌려 발소리와 함께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자 마침내 나와 폭스만이 남은 복도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블러드 님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그 고요를 먼저 깬 것은 폭스였다.
잠시 말을 끊고 멈칫했던 폭스가 여전히 미소가 걸린 입으로 또 여전히 싸늘한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의 예전 캐릭터는 제라스라는 흑마법사로 그림자(影) 계열의 흑마법을 주 속성으로 사용하여 유저들에게 ‘그림자들의 아버지’라는 과분한 별명까지 받았습니다. 과거, 당신이 사자왕(獅子王)이라 불렸던 것처럼 말이죠.”
“그림자들의 아버지라. 잘 알고 있지.”
“그거 영광이군요.”
싸늘한 내 말투에 폭스가 정말 영광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골의 말을 듣고 설마 했지만 폭스가 그 그림자들의 아버지였다니. 아무리 염환의 가입과 검은 사자 길드를 쓰러트리는 것이 중요하다지만 그림자들의 아버지를 희생시키면서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는 길드가 길드인 만큼 음지에 있던 마법사의 탑이 다른 길드와 부딪힌 일은 별로 없었지만 가끔 그런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타나 그림자 속성의 마법을 사용하며 적들의 배후를 노렸다.
그 잔인할 정도의 치밀함과 흑마법 특유의 강력한 마법은 적들에게 그의 이름만 들어도 저절로 자신의 그림자를 돌아보게 할 만큼의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마법사의 탑의 간부로 있는 ‘오행마왕(五行魔王)’이라는 조금 유치한 이름의 5명의 간부 중의 1명으로 쓰리 스타의 흑마법사 30여 명을 이끌고 전장을 헤집는 제라스의 모습은 가히 오행마왕이라는 이름에 걸맞았다. 거기다 흑마법사 랭킹 6위라는 명예는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제라스가 폭스였다니…….’
“블러드 님?”
“음?”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폭스가 양 허리춤에 달린 단검을 각각 양손에 잡아 쥐어 자세를 잡으며 나를 노려봤다.
“블러드 님 또한 형님, 아니 마스터에게 마스터의 목표를 들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래, 그 미친 짓이라면 확실히 들었다.”
비웃는 듯한 내 말에 폭스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것도 잠시, 이내 폭스의 눈에서 차가운 살기가 스멀스멀 뻗어 나와 내 몸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저와 마스터, 그리고 나머지 4명의 간부들이 모든 것을 바쳤던 계획입니다. 그런 계획의 중간에 나타난 당신을 전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과연 당신이 우리 계획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는지! 그림자들의 아버지라 불리며 수없는 적들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던 제 캐릭터를 지우면서까지 계획에 동참시킬 필요가 있는지!”
‘어떻게든 나와 엮이려고 애쓰며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게 누군데.’
격한 외침을 토해내는 폭스의 모습에 내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뭘 그렇게 말을 돌리는 거냐. 그냥 말해라. 너희들의 계획에 끼어들지 말라고! 그리고 캐릭터가 아깝다고 말이야! 크크큭.”
뿌드득.
빈정거리는 내 말에 서늘한 이 가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을 간질이던 살기가 한층 더 짙어지며 이제는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날 노려보던 폭스가 돌연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후후후.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모두 거짓이었나요? 헤라클래스라는 사람이 이렇게 저열한 인간이었다니.”
‘흥, 멍청한 자식이 이제는 안 되니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군.’
여전히 낮은 웃음을 흘리며 나를 비꼬는 폭스를 향해 같잖지도 않다는 눈초리를 보내자 한참을 지껄이던 폭스가 잠시 움찔했다.
‘크크크. 그래, 이 자리에서 끝을 봐주마.’
마법사가짱이얌과는 달리 이런 부류는 한 번 제대로 상대해줘서 이기면 그 다음부터는 뒤끝이 없는 의외로 깨끗한 타입이다.
내가 여기서 싸워도 마법사가짱이얌은 내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같은 동지라고 지껄인 지 1시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날 책망할 수 없지 않은가. 거기다 여차하면 폭스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하면 되니 그럴 걱정은 없었다. 증거라면 아까 전부터 몰래 실행했던 동영상 기능이 할 테니까.
“복수를 위해서 저열하고 비열한 인간이라고 되지 못할까. 원한다면 겁쟁이도 되어주지. 그래도 네놈처럼 좀생이는 되지 않는다.”
“블러드으!”
‘걸렸다!’
도발에 걸려든 폭스의 모습에 득의의 웃음을 흘리려는 순간,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폭스의 양손에서 단검이 번뜩이며 빛을 뿌렸다.
스걱.
피부가 찢기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콧잔등에서 화끈한 통증이 일어났다.
“크하압!”
콰르르.
뒤로 쏠렸던 몸을 다시 앞으로 당김과 동시에 오른발로 중심을 잡으며 양손을 휘두르자 클레이모어가 주변의 공기를 찢어발기며 폭스를 향해 쇄도했다.
스으응.
살을 가르고 뼈를 바스라트리는 묵직한 타격감 대신 빈 허공을 가르는 검에 내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어느새 다섯 걸음 이상 뒤로 빠져 있던 폭스가 다시 자세를 잡으며 내 주위를 천천히 돌며 언제든지 치고 들어올 기세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단검을 그으며 위협했다.
빈틈을 보이면 번개같이 달려들어 치고 빠지는 빠른 속도를 가진 도적의 전술, 그리고 번개같이 달려들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숨통을 끊는 힘을 가진 전사의 전술.
오랜만에 증오가 아닌 묘한 흥분이 찌릿하게 울렸다.
‘네놈이 스피드라면 난 힘이다!’
“죽어라!”
쿠궁!
거친 외침과 함께 바닥을 내려친 내 발을 중심으로 우레와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저히 레벨 30의 캐릭터에게서 나올 수 없는 기백에 잠시 흠칫하던 폭스가 단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점차 속도를 높였다.
쉬이익. 채챙.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정확히 내 정수리를 노리고 쏘아진 무언가에 재빨리 검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싸구려 투척용 단검이 바닥을 굴렀다.
폭스는 단검이 내 미간을 꿰뚫을 것을 예상했는지 갑작스레 일어난 의외의 상황에 재빠르던 움직임을 멈추고 황당하단 얼굴로 나와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무언가 깨달은 듯 탄성을 내지르고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군요.”
“이제 알았나?”
“…….”
처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폭스의 모습에 불쾌한 기분을 털어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제발 말하지 말라고, 제발, 제발 말하지 말라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별을 듣기 직전의 남자와 같은 표정의 폭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나의 검은 오크 수십 마리를 한꺼번에 죽이지 못하고 수백의 그림자를 이끌던 너의 마법은 이제는 이런 싸구려 검조차 뚫지 못하는 단검으로 변해버렸다.”
방금 전보다 훨씬 무거운 고요가 복도를 짓눌렀다.
“그래서 어쨌단 겁니까?”
“뭐?”
“그렇습니다. 수백의 그림자를 이끌던 저의 마법은 이제 싸구려 검조차 뚫지 못하는 단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뭐가 어떻단 말입니까.”
씹어뱉듯이 말을 내뱉은 폭스가 살기 어린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며 단검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모든 것이 변해도 저와 나머지 간부, 그리고 마스터의 긍지와 목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희의 모든 것의 방해물일 뿐입니다!”
쉬쉭!
마지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폭스의 몸이 어둠을 가르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빠른 스피드에 절로 욕이 흘러나왔다.
채챙.
목젖을 노리고 쇄도하는 단검에 재빨리 검을 들어 방어하자 검의 옆면에 부딪친 단검이 거칠게 흔들리며 목에 생채기를 남겼다.
“크윽.”
목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통증에 클레이모어를 쥔 손에 힘이 빠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폭스의 단검이 다시 한 번 허공을 나는가 싶더니 갑옷의 틈새를 할퀴며 피를 뿌렸다. 급소로 지정되어 있는 목을 다쳐서 가득 차 있던 체력이 어느새 3분의 1 이상 깎여 있었다.
일격필살을 노려볼까 생각도 했지만 폭스의 속도는 그런 기회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대체 어떻게 레벨 30이 저런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건지… 번뜩이는 단검을 들고 내 주위를 돌며 기회를 노리는 폭스의 모습에 얼굴이 구겨졌다.
쉬시식.
깡.
투구 중 유일하게 뚫려 있는 눈을 향해 쏘아지는 단검에 클레이모어를 거칠게 휘두르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단검이 맥없이 바닥을 굴렀다. 너무나 맥없이 막히는 단검에 잠시 당황한 틈을 타 다시 공격을 가하는 폭스의 손에 들린 단검이 서늘한 빛을 발했다.
‘칫! 먼저 던진 단검은 페인트였나?’
“죽엇!”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부드러운 모습과는 다른 독기 어린 외침과 함께 목 부분의 틈을 노리는 단검이 서늘한 빛을 발했다.
깡!
“크윽.”
“큭.”
생각보다 빠른 단검에 처음부터 피할 생각을 버리고 내가 쓰고 있는 투구의 내구력을 믿고 머리를 내밀자 투구에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겼다.
예상 밖의 강한 충격에 제어를 벗어나는 몸을 애써 가누며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폭스의 몸을 향해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두르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붕 떠오른 폭스의 몸이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복도 구석에 처박혔다.
“쿨럭.”
“크아아아!”
검날이 아닌 검면으로 빗맞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데미지를 입었는지 고개를 처박고 마른기침을 해대는 폭스를 완전히 끝내버릴 심산으로 기합과 함께 검을 잡은 손에 온 힘을 주며 치켜든 검을 막 내려찍으려는 순간, 후끈한 열기와 함께 무시 못 할 기운이 느껴졌다. 아니, 느끼는 순간 이미 커다란 불덩어리가 내 몸에 작렬한 뒤였다.
퍼엉!
“크허억.”
몸통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함께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야와 함께 이동하는 체력 게이지가 상당량 깎이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내 몸이 스프링마냥 그 자리에 튕겨지듯 일어나 마법을 사용한 범인을 찾기 위해 눈을 번뜩였다.
“그만 해라, 철중아.”
“염환!”
놀랍게도 마법을 사용한 범인의 정체는 방금 전, 거인의 단검을 찾기 위해 자리를 떴던 염환이었다.
“방해하지 마라.”
으르렁거리며 다시금 검을 고쳐 잡은 나를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던 염환이 시선을 돌려 나와 마찬가지로 몸을 추스르며 단검을 고쳐 잡는 폭스를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다시 시선을 돌려 나와 폭스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만둘 생각은?”
“없다.”
“없습니다.”
“휴우…….”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거의 동시에 같은 의미를 가진 대답을 내뱉는 나와 폭스의 모습에 깊은 한숨을 내쉰 염환이 돌연 손에 잡은 지팡이를 위로 치켜들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우우웅.
“무, 무슨?”
“염환 님?”
염환의 지팡이를 중심으로 모이는 엄청난 마나의 파동에 죽일 듯이 서로를 노려보던 나와 폭스가 당황한 얼굴로 염환을 바라봤다.
드드득. 우우웅.
복도에 장식되어 있는 장식품들이 덜덜거리며 바닥을 길 정도의 엄청난 마나의 파동에도 전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염환의 모습에 보다 못한 폭스가 단검을 거두고 염환에게 다가서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폭스의 몸을 압박하며 폭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크윽.’
그 압력은 비단 폭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지 조용히 사태를 지켜보며 언제라도 달려들어 검을 휘두를 생각으로 검을 들고 있는 내 손도 보이지 않는 힘에 조금씩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우리 둘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던 염환이 마침내 손에 들린 지팡이를 천천히 움직이며 지팡이 속도와 비견될 정도의 느린 속도로 입을 열었다.
“너희는 약하다.”
쿠구궁!
마치 신탁을 내리는 신 마냥, 장엄한 모습으로 내뱉은 염환의 한마디가 끝나기가 무섭게 탑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엄청난 폭음과 함께 내 몸을 누르던 압력이 사라졌다.
그건 폭스 또한 마찬가지인지 거의 90도로 숙이고 있던 허리를 천천히 펴며 염환을 향해 이 갑작스런 사태의 대답을 구하는 시선을 보냈다.
나 또한 방금 전, 염환이 보여준 황당한 행동의 대답을 듣기 위해 염환을 노려보며 염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는 약하다.”
방금 전과 똑같은 말을 내뱉은 염환이 다시금 지팡이를 하늘로 들어올리자 나와 폭스의 몸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피식.
그런 우리 모습을 보며 낮은 비웃음을 흘리는 염환의 모습에 내 반대편에 있던 폭스가 붉어지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나 또한 투구 속에서 화끈거리는 얼굴을 애써 진정시키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자 다시 한 번 염환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3달 전의 너희들이었다면 내가 지팡이를 드는 순간 내 손목은 철중이 네 검에 잘렸을 테고 바로 뒤에 내 그림자에게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서 로그아웃 됐을 거다. 바로 폭스의 마법 때문에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3달 전의 나와 폭스는 분명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너희의 모습을 봐라. 너희들 입장에서는 치열한 싸움이지만 내 눈에는 허접들이 칼부림 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염환의 독설에 나와 폭스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그런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잠시 멈칫했던 염환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하루 빨리 강해질 생각은 하지도 않고 유치한 싸움이나 하고 있냐? 사자왕? 그림자들의 아버지? 다 과거일 뿐이다. 고작 지팡이 한번 들었다고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면 무라사마와 월향이 뭐라고 할까?”
으드득.
무라사마와 월향이란 말에 내 입에서 서늘하게 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런 내 모습에 피식 낮은 웃음을 흘린 염환이 말을 이었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 가는 것뿐이다. 지금 이 모양이 뭐냐! 뭐? 복수? 그래, 복수 좋지. 그런데 지금 이게 뭐냔 말이다!”
점점 격해져가는 염환의 감정에 따라 염환이 입고 있는 아이템인 화령(火靈)의 로브가 착용자와 정신 교감이라는 특유의 능력을 발휘해 붉은 불꽃을 넘실대며 키웠나갔다.
“그리고 제라스, 아니 폭스. 지금 네 모습을 봐라. 네 말대로 그림자들의 아버지는 없어져도 마스터와 나머지 간부들이 키웠던 꿈은 존재하겠지. 그런데 지금 네가 하는 짓을 봐라. 너와 간부들, 그리고 마스터의 꿈이 고작 이런 싸구려 단검으로 설치는 것이었냐?”
넘실대는 화염과 더불어 막강한 위압감을 몸에 두른 채 우리를 꾸짖는 염환의 모습은 진정 폭염의 마도사의 위용이었다. 넘실대며 점차 그 크기를 키워가는 화령의 로브의 불꽃을 제외하고는 모두 돌이 된 듯 조용한 적막이 복도를 뒤덮었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 적막을 먼저 깬 것은 염환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폭스였다.
나 또한 바보가 아니었기에 들었던 검을 살며시 검갑에 집어넣었다.
“나 또한 생각이 짧았다.”
화르륵.
나와 폭스의 사과에도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불꽃에 내가 막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는 순간, 폭스가 ‘아!’ 하는 감탄사를 흘리며 나에게 다가와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뻔뻔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뭐 하는 짓이냐?”
갑작스런 폭스의 행동에 투구 속 내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염환의 성화에 싸움을 그만두기는 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목숨을 노리며 싸웠던 상대가 손을 내밀며 사과하는데 황당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 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내 귀에 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폭스: 지금은 일단 휴전하죠.]
[블러드: 지금은?]
의문 섞인 내 물음에 눈짓으로 복도 중앙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을 뿜어내는 염환을 가리킨 폭스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귓속말을 이었다.
[폭스: 타 죽는 건 싫으니까요. 저거 의외로 뜨겁답니다.]
“제 사과 안 받아주실 건가요?”
방금 전의 살기 어린 모습 대신 예전의 능글거리는 말투로 귓속말을 마친 폭스가 커다랗게 뜬 눈을 깜빡이며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제길.’
덥석.
“미안했다.”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태워 죽일 듯한 열기를 내뿜는 염환의 모습에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삼키고 폭스의 손을 마주 잡자 그제야 염환을 중심으로 타오르던 불꽃들이 사그라졌다.
“그래. 그래야 내 친구지. 으하하핫.”
방금 전까지 죽일 듯한 기세로 불꽃을 피워 올린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바보 같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는 염환의 모습에 나와 폭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건 그렇고 염환 님, 방금 전 폭음의 정체는 무엇이죠?”
“폭음?”
“예, 염환 님의 마나가 사라짐과 동시에 들렸던 엄청난 폭음이요.”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인지 폭스는 살랑거리는 태도로 물었다.
염환은 다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말했지? 너희들은 약하다고.”
비록 마음에 드는 말은 아니지만 틀린 말도 아니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염환이 다시 한 번 지팡이를 들어 허공에 기묘한 형상을 그려냈다. 다행히 방금 전처럼 움찔하며 물러나는 추태 따위는 보이지 않고 나와 폭스는 염환의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이내 염환의 지팡이에서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빛이 허공에서 스스로 맞춰지며 기묘한 마법진 모양을 그려냈다.
우우웅.
마침내 빛이 완벽한 마법진의 모습을 갖추자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염환이 지팡이를 들어 마법진에 살며시 가져다 대며 입을 열었다.
“우주의 마나여, 세계의 마나여, 창천의 마나여, 공간의 마나여. 지금 나에게 다른 장소로 가는 차원의 틈을 허락해라, 워프 포탈.”
치이잉.
아주 잠깐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 지팡이 끝에 모이는가 싶더니 이내 허공을 수놓은 마법진의 중심에서 작은 소음과 함께 일렁거리는 은빛 점이 점차 그 크기를 넓혀가며 쓰리 스타 급 마법인 워프 포탈의 입구를 만들었다.
과거에 한 번이라도 가봤던 곳에 마력석을 박아 넣으면 특별히 마법 발동 불가능 지역이 아니라면 언제 어디서든지 포탈을 열어 그곳으로 갈 수 있기에 상당히 유용한 마법이었다.
“들어가자.”
한 마디를 남긴 염환이 훌쩍 포탈 속으로 들어가 버리자 그 뒤를 이어 폭스가 은빛 파도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나 또한 포탈의 지속 시간인 1분이 지날세라 재빨리 포탈 속으로 몸을 날렸다.
타닥.
“탑의 지하에 이런 곳이 있었나요?”
몽롱한 느낌의 포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발에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에 이곳이 잘 다듬어진 어느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들리는 폭스의 들뜬 목소리에 흐릿한 시선을 억지로 뜨며 주위를 보자 역시나 거대한 동공 크기의 장소였다.
폭스가 탑 운운하는 것을 보니 마법사의 탑 지하에 있는 장소인지 진득한 습기와 함께 생전 처음 보는 화려한 버섯과 기괴한 곤충들이 사방을 가득 채우며 츳츳 하는 불쾌한 소리를 흘리는 이곳은 누가 봐도 ‘던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