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5 망자의 던전 (7/34)

챕터5 망자의 던전

“이곳이 어디지?”

“망자의 던전.”

딴에는 음침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지팡이를 얼굴 밑에 가져다 대고 말하는 염환의 모습에 내 미간이 구겨졌다. 그것은 철없는 염환의 행동 때문만은 아니었다.

‘망자의 던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 던전과 퀘스트 용 던전을 제외하고는 이름과 공략법, 심지어 각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종류마저도 외웠다고 자부하는 나였기에 망자의 던전이라는 생소한 이름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망자의 대지라는 초보자 필드에 존재하는 던전이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던전 위에 탑을 세울 이유가 없었다.

초보자들의 입장에서는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마법사의 탑의 도움보다는 평생 그 자리에 있는 던전 하나가 더 고마운 법이다.

초보유저들에게 환심을 얻기 위해 망자의 대지에 탑을 세운 마법사가짱이얌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라이트.”

파앗.

이내 내 잡생각을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염환의 지팡이에서 제법 커다란 빛의 구가 생겨나 공동을 가득 채운 어둠을 날려버리자 그제야 공동의 모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폭스, 그리고 염환이 있는 맞은편에는 던전의 입구로 보이는 동굴 입구가 있었는데 동굴 입구에 박혀 있는 기묘한 모양의 나무 조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이 동굴의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토템?”

“어라? 알고 있냐?”

독백에 가까운 내 물음에 염환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나무 조각상의 정체는 바로 드루이드들이 사용하는 토템이었다. 드루이드란 마나가 아닌 자연의 힘을 사용해 마법과 같은 것을 행하는 직업이다. 그들은 나무 조각상에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넣을 수 있다. 어떤 조각에는 주변 사람들의 능력을 올려주는 것을, 또 어떤 조각상에는 용기를 북돋아 사기를 올려주는 것을 넣을 수 있고 넣는 힘의 종류 또한 다양하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드루이드라는 직업 자체가 희귀하고 또 전직하는 방법 또한 드루이드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여 직업 자체가 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검은 사자 길드 내에서조차 드루이드는 한 자리 수를 넘지 않았을 정도였다.

“토템의 역할은 던전의 봉인인가요?”

폭스 또한 토템을 아는지 토템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색 빛을 쓰다듬으며 염환에게 물었다.

“그래, 바로 맞췄다.”

던전 특유의 낮은 사기(邪氣)가 토템에서 나오는 빛에 막혀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염환은 아예 이 김에 폭스에게 반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거침없이 반말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이 던전은 마스터가 퀘스트를 하다 우연히 알게 되어 아직 아무도 들어가 보지 못한 곳이지. 한마디로 너희들을 위한 미공개 던전이라 이 말이다.”

“그게 무슨… 아!”

염환의 말에 반문하려던 내 입에서 곧 알겠다는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1주일 동안 경험치 2배와 아이템 드롭 확률 2배.

이 모든 것이 미공개 던전을 처음 발견한 파티에게 주어지는 1주일 동안의 보상이었다. 어차피 아이템이야 탑에서 주는 것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이템 드롭 확률 2배는 그렇다 쳐도 경험치 2배는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설마……?”

눈치 빠른 폭스가 말끝을 흐리며 염환을 쳐다보자 염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던전이 바로 너희들이 원 스타 이전까지 레벨 업을 할 장소다. 어떠냐? 감동 좀 먹었냐? 으하하하!”

어떻게 보면 호탕하다고 표현될 커다란 웃음을 터트린 염환이 토템의 뒤쪽에 쌓여 있는 재를 발로 슥슥 치우며 막 토템에 손을 대려는 순간, 가만히 있던 폭스가 염환이 발로 치워 이제는 흔적만 남아버린 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근데 이 재는 무엇이죠?”

“이 재가 바로 아까 너희들이 들었던 폭음의 정체다. 원래 이 던전은 2중 결계로 이루어져 있었거든. 첫 번째가 바로 저 토템이고 두 번째가 바로 마력석으로 이루어진 결계였지. 내가 아까 모은 마나를 이용해 이 마력석에 걸린 봉인을 풀었기에 그런 엄청난 소리가 났던 거다. 이제 이해가 가냐?”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이 말하는 염환의 대답에 폭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나자 염환이 로브 속에서 괴상한 모양의 동물 조각을 꺼내 던전의 입구를 중심으로 박혀 있는 나무 조각의 틈에 아무렇게 던져 넣었다.

‘치지직’ 하는 스파크와 함께 던전의 입구를 봉인하고 있던 토템들이 맥없이 바스라지자 토템에서 흘러나오던 빛 또한 사라졌다. 이내 던전의 입구에 가득 고여 있던 음침한 사기가 터지듯이 밀려 나와 공동 안을 가득 메웠다.

“끝인가요?”

탑 전체를 울리던 첫 번째 봉인 해제와는 다르게 겨우 약간의 스파크를 끝으로 봉인이 해제되자 폭스가 기운 빠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이제 너희 둘이 파티를 맺어서 던전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너희들을 보조할 원 스타 성직자를 찾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렸다 같이 파티를 맺고…….”

“성직자는 필요 없다.”

염환의 말을 자르고 끼어드는 나를 폭스와 염환이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체력은 포션으로 회복하면 된다. 괜히 쓸데없이 인원수를 늘려 없는 경험치 나눠 가질 생각 없다.”

“그, 그래도 보조 마법은…….”

“투 스타 마법사라면 어느 정도의 간단한 보조 마법은 배우고 있단 거 안다.”

“끄응.”

거침없는 내 말에 염환은 앓는 소리를 내고 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염환에게 말한 것처럼 쓸데없이 인원수를 늘려 가뜩이나 적은 경험치를 나눠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쓰리 스타의 고위 성직자를 파티에 넣어 보조를 받고 싶지만 그러면 사냥을 해서 받은 경험치의 거의 대부분이 고위 성직자에게 갈 터였다.

그렇다고 뛰어난 효과도 없는 원 스타 성직자의 보조를 받고 경험치를 나누기에는 경험치가 아까웠다. 그러기에는 차라리 보조 마법이 없더라도 마법사의 탑에서 포션을 무한대로 공급받으며 사냥을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터였다. 내 말에 불만의 기색을 표하던 염환이 구겼던 얼굴을 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철중이 네 말대로 하자. 지금 당장 포션과 보조 마법을 걸어줄 마법사를 데리고 오마. 더 필요한 건 없지?”

“그래.”

거인의 단검은 포션과 보조 마법을 받고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받아도 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폭스를 향해 고개를 돌린 염환이 뭐 필요한 거 없냐는 듯 눈초리를 보내자 조용히 있던 폭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쓸 만한 무투가 지망생 한 명 데려와도 될까요?”

“으하하! 동생, 오랜만이야!”

“네, 형님.”

공동을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와 그 목소리에 대답하는 폭스의 살랑거리는 목소리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제길, 쓸 만한 무투가라는 게 저놈이었나?’

비록 투구를 쓰고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는 폭스가 눈웃음을 치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선착장에서 죽었을 때는 정말 어떻게 동생을 찾나 아찔했었다고. 아무리 귓속말을 해도 대답이 안 오고. 혹시 무슨 일 당했을까봐 이 형님 마음이 바싹 타들어갔다고!”

눈을 부라리며 폭스를 향해 으름장을 놓는 ‘쓸 만한 무투가’의 정체는 바로 선착장에서 해골의 검에 죽음을 당한 카나리아였다.

폭스를 말리지 못한 후회감이 물밀듯 밀려왔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거기다 빠른 사냥을 위해서라면 어차피 공격 중점의 유저나 한 명 더 있어야 할 판이었다.

경험치가 아깝긴 했지만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조금 떨어지는 공격력을 지닌 카나리아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처지였다.

귀를 간질이는 폭스와 카나리아의 수다를 애써 무시하며 사냥에 앞 서 아이템 창에서 꺼낸 숫돌로 염환에게 받은 거인의 단검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거인의 단검(A급)-

1.2m라는 무지막지한 크기지만 엄연히 단검의 종류이다. 쌍수(雙手) 어쌔신이 거인의 단검 2개를 착용하면 무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크기로 암살은 무리다. 그리고 이것은 양손 단검이다.

공격력- 180/210. 내구력- 300/300.

특수능력- ‘전사의 외침’ 사용 가능.

아이템 착용 시, 거인족이 사용자를 적대시 함.

민첩성 5하락.

힘 5증가.

길이 1.2m, 폭 30cm.

대검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이 검은 엄연히 단검 종류로서 과거 나와 염환이 ‘자이언트 킹(Giant King)’이라는 보스 몬스터를 잡고 나온 아이템이다.

“으하하하!”

염환의 웃음소리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웃음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거인의 단검을 검갑에 넣은 뒤, 폭스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이템 창에 남은 포션을 꺼내 상처에 붓자 무수히 많은 붉은 실선으로 이루어진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폭스가 카나리아를 데려오면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공동에 도착한 카나리아가 처음 한 행동은 바로 내 어깨를 치며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것이었다. 나중에 설명해주겠다는 폭스의 말이 아니었다면 다시 한 번 한바탕 싸움이 크게 벌어질 수도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이 어떻게 하다 이렇게까지 꼬이게 된 걸까.

원래대로라면 나는 지금 이 시간에 쓰리 스타의 고위 성직자와 무라사마, 그리고 길드 내의 친한 사람들과 함께 콜로세움에서 몬스터 결투를 구경하거나 길드의 하위 사람들이 물어준 보스 몬스터 정보를 듣고 보스 몬스터 사냥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상냥한 미소와 함께 보스 몬스터가 드롭 한 아이템을 월향에게 넘기겠지.

‘그 빌어먹을 년의 더러운 속도 모르고 말이야.’

“크크크.”

내 입을 비집고 나온 낮은 광소에 신나게 수다를 떨던 폭스와 카나리아가 흠칫하며 나를 바라봤다.

“후욱, 후욱…….”

한바탕 미친 듯이 날뛰어야 진정될 것 같은 기분에 내 입에서 절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일하게 투구 밖으로 보이는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눈 주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블러드 님?”

내 모습을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폭스가 내 이름을 부르자 폭스의 뒤에 있던 카나리아 또한 경계의 빛을 보이며 폭스의 곁에 붙었다.

“후욱, 후욱. 괜찮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내 대답에 무언가 더 말하려던 폭스가 카나리아의 제지에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제길, 더는 못 기다리겠군.’

5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염환에게 짜증을 느끼며 막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치이잉’ 하는 소음과 함께 은빛 파장이 공동 안에 나타나는가 싶더니 이내 염환과 염환과 같은 마법사로 보이는 초록색 로브의 유저를 한 명 토해내고는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천천히 사라졌다.

“여어, 오래 기다렸냐?”

“그래.”

“미안하다. 탑의 마법사들이 모두 홍보를 나가서 말이다.”

“홍보?”

“그런 게 있다.”

대답하기 싫다는 듯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흔들어 대답을 피한 염환이 자신과 같이 온 마법사에게 무언가 말하자 지팡이를 들고 앞으로 나선 마법사가 나를 시작으로 한 명, 한 명 모두에게 보조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

“질풍의 마나여, 내 동료에게 깃들어 땅을 도약하라, 헤이스트! 강철의 마나여, 내 동료의 갑옷에 깃들어 적의 검을 쳐내어라, 디펜스 아머! 대지의 마나여, 내 동료의 몸에 깃들어 땅을 뒤흔드는 힘을 주어라, 스트랭스! 순리의 마나여, 내 동료의 검에 깃들어 역천(逆天)의 존재에게 순리의 길을 내주어라, 홀리 웨폰!”

가장 먼저 시전한 마법은 잠시 동안 대상의 속도를 올려주는 헤이스트다.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짙은 녹색의 빛이 내 몸을 훑는가 싶더니 이내 내 다리로 스며들었다. 그 다음으로 시전된 마법은 대상의 방어력을 올려주는 디펜스 아머고 다음은 대상의 힘을 올려주는 스트랭스, 그리고 마지막은 무기에 성(聖) 속성을 부여해 암흑 계열의 몬스터에게 추가 데미지를 주는 홀리 웨폰이었다.

나를 시작으로 폭스와 카나리아 또한 자신들의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드는 초록색의 마나를 보며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우리 모두에게 보조 마법을 시전한 마법사가 하급 마나 포션을 마시며 마법사 스킬인 ‘명상’을 통해 마나를 모으기 위해 눈을 감자 그제야 조용히 있던 염환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이제 아무나 파티장이 돼서 파티를 개설해라. 아, 포션은 폭스에게 줄 테니 던전 안에 들어가서 알아서 배분해라.”

[폭스 님이 파티를 신청하였습니다. 동참하시겠습니까?]

“동참.”

염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앞에 나타나는 홀로그램의 메시지에 동참 여부를 밝히자 ‘띠리링’ 하는 종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파티명 ‘떠나자, 던전 탐험!’에 동참하였습니다.]

아동 프로그램의 제목을 연상케 하는 유치한 파티명에 인상을 구기는 것도 잠시, 얼굴 한가득 미소를 보이는 염환에게 손을 흔들고 폭스의 뒤를 따라 던전 안으로 들어서자 ‘띠리링’ 하는 맑은 종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미공개 던전을 발견하였습니다.]

[미공개 던전 발견 보상으로 경험치 2배, 아이템 드롭 확률 2배가 적용됩니다.]

기분 좋은 알림음을 음미하는 내 귀로 염환의 귓속말이 울렸다.

[염환: 아, 마스터가 던전 관련 퀘스트 도중에 던전에 관한 힌트를 조금 얻었는데 던전의 최종 보스는 하급 리치라고 한다. 레벨은 별로 높지 않으니까 알아서 잘해보라고. 크크크!]

‘미친 자식!’

웃음소리로 끝을 맺는 염환의 귓속말에 내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리치란 죽은 마법사가 어떠한 특수 조건에 의해 생전의 마법 능력을 가진 채 부활한 몬스터로 언데드 몬스터 중에서는 중상위권에 속하는 막강한 몬스터다.

하급 리치라고 해도 레벨이 150 이상이다. 거기다 갖가지 흑마법에 능통하며 수많은 좀비들을 거느리기 때문에 상대하기 짜증나는 몬스터다.

“하급 리치라… 뭐, 실험실에 처박혀 실험만 하는 몬스터이니 어떻게 잘 피해서 사냥하면 만날 확률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일단은 그냥 가죠.”

폭스 또한 염환에게 리치에 관한 말을 듣고 약간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상대방이 거래를 승낙하였습니다. 거래를 승낙하시겠습니까?]

“승낙.”

[중급 체력 회복 포션 50개와 초급 해독 포션 10개를 받았습니다.]

카나리아에게도 포션을 전해준 폭스가 단검을 고쳐 잡고 던전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이어 너클을 쓰다듬은 카나리아와 내가 던전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어어어.

“벌써 환영 인사를 해주는데요?”

던전 앞쪽에서 들리는 음침한 신음소리에 폭스가 짓궂은 목소리로 말하며 뒤로 물러나 자세를 잡았다.

폭스는 민첩성을 주로 올렸으므로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나와 카나리아가 시간을 끄는 동안 몬스터의 허점을 노려 일격을 가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전투 방법이었다.

그워어어.

“온다.”

던전을 메아리치는 소름 끼치는 신음 소리의 주인은 바로 언데드 몬스터의 기초라 불리는 좀비였다. 여기저기 찢긴 옷가지를 걸치고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손톱과 이빨을 가진 좀비 3마리의 등장에 카나리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나와 폭스와는 달리 게임을 처음 시작하는 카나리아는 아무리 포션이 많고 상대가 하급 몬스터라도 처음 보는 몬스터가 두려울 것이 분명했다. 나 또한 처음에는 그랬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처리합니다!”

쉬익.

푸푸푹.

그억!

날카로운 폭스의 외침과 함께 폭스의 손을 떠난 3개의 단검이 3마리 좀비의 몸에 꽂히며 둔탁한 소리를 토해냈다. 반쯤 박혀 덜렁거리는 단검을 몸에 꽂은 좀비들이 가래 끓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어 일행 중 가장 앞에 있던 카나리아와 부딪쳤다.

“크하압.”

퍽.

그억!

힘찬 주먹과 함께 내뻗은 카나리아의 주먹에 배를 맞은 좀비가 거북한 신음 소리와 함께 몸을 기역 자로 꺾자 카나리아의 무릎이 그대로 좀비의 머리를 쳐올렸다. 양 주먹으로 밀치듯 좀비의 양팔을 쳐올리자 이미 썩어버린 좀비의 팔이 쉽게 부러지며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덜렁거렸다.

“잘하시네요.”

그나마 경험이 많은 폭스가 자신의 본래 클래스인 마법사가 아님에도 여유로운 몸짓으로 좀비를 농락하며 말했다.

본래 이동 속도가 느린 좀비가 스피드로 먹고 사는 폭스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꺼져라, 쓰레기.”

푸욱.

그어…억.

싸늘한 중얼거림과 함께 순식간에 좀비의 뒤를 점한 폭스의 손에 들린 성 속성의 단검이 좀비의 뒤통수에 꽂혀 입을 뚫고 나와 한바탕 머릿속을 헤집자 곤죽이 되어버린 머리를 부여잡은 좀비의 신형이 실 끊어진 연처럼 고꾸라졌다.

그어?.

바닥을 구르던 좀비가 모래가 되어 사라질 때쯤 카나리아 또한 허전하게 비어 있는 양팔로 발광을 하는 좀비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있었다.

콰드득.

그억!

강철 너클로 무장한 카나리아의 주먹과 좀비의 이마가 부딪치면서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의 썩은 뇌수를 터트리며 완전히 바스러졌다. 이내 서서히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좀비 위로 제법 많은 양의 구릿빛 동전이 모습을 나타냈다.

이제 남은 것은 나 혼자뿐!

구워어!

자신의 동료가 허무하게 당해서 화가 나는지 내 주위를 맴돌던 좀비가 나를 향해 가래 끓는 괴성을 토해냈다. 초보 존에서 씨 자이언트 킹과의 싸움에서, 그리고 폭스와의 싸움에서 나를 끓어오르게 했던 뜨거운 무언가가 내 몸을 서서히 잠식하기 시작했다.

“크크큭! 그래, 덤벼라.”

커다란 소리를 내며 뽑히는 대검 종류와는 달리 거의 무음(無音)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검갑에서 나오는 거인의 단검을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워어!

무지막지한 검의 크기에 잠시 멈칫한 녀석이 곧 우렁찬 괴성과 함께 양팔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말이 돌진이지 본래 속도가 느린 녀석이라 어린아이가 뛰는 정도의 속력밖에 나오지 않았기에 놈이 출발하는 순간 내가 먼저 치고 들어갔다.

머리 위로 치켜들었던 검을 좀비의 어깨부터 시작해 사선으로 내리 꽂자 ‘부우욱’ 소리와 함께 좀비의 몸에 검이 박혀들었다.

푸확.

구에엑!

어깨를 가르고 가슴까지 파고든 검이 만든 상처 사이로 진물이 잔뜩 쏟아 나왔다. 좀비의 몸을 발로 차며 검을 뽑아내자 좀비가 반쯤 갈라진 어깨를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죽어라.”

퍼억.

바람 가르는 소리마저 없는 고요한 검 놀림에 반대쪽 어깨마저 갈린 좀비가 모래가 되어 사라지며 네크로맨서의 소환 재료 아이템으로 보이는 누런 손톱과 검은 이빨 몇 개를 남겼다.

“처음치고는 상당히 좋은데요?”

좀비들이 드롭 한 아이템을 수거한 폭스가 환히 웃으며 말하자 조용히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던 카나리아가 이제 자신감이 붙은 듯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또한 검은 진물이 묻은 검을 털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속 가볼까요?”

“좋지. 으하하.”

어느새 파티의 리더가 되어버린 폭스가 웃으며 입을 열자 자칭 폭스의 형님인 카나리아가 파티의 가장 앞에서 목을 좌우로 꺾으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차라리 이런 부드러운 분위기가 지나치게 굳은 분위기보다는 던전 탐험에 좋기에 나 또한 별말 없이 검은 고쳐 잡으며 카나리아의 뒤에서 줄을 맞췄다.

“잠깐만요.”

눈을 번뜩이며 일행의 맨 앞에서 이동하던 카나리아가 폭스의 말에 멈췄다. 조용히 앞으로 나선 폭스가 목에 걸린 동그란 은빛 목걸이를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목걸이는 매직 아이템 같았다.

“진실의 마나여, 내 앞에 거짓된 자들의 정체를 밝혀라, 디텍션!”

후우웅.

팡!

폭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걸이에서 터져 나온 빛이 허공에서 뭉치는가 싶더니 이내 팡 하고 터지며 던전을 가득 메울 정도로 밝아졌다.

갑작스런 빛에 손으로 눈을 보호하며 옆을 보니 목걸이를 든 폭스가 나머지 손으로 재빨리 단검을 꺼내 뒤로 빠지는 것이 보였다.

디텍션이라면 은신하고 있는 몬스터나 적의 은신을 강제로 해제하는 스킬!

“설마……?”

키에에엑.

그오오.

불안함을 잔뜩 머금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5m 정도 앞의 흙바닥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좀비 2마리와 스켈레톤 2마리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스켈레톤이란 흔히 말하는 해골 병사로서 좀비보다 한 단계 높고 온몸이 단단한 뼈로 이루어진 언데드 몬스터다.

보통 인간이었던 좀비와는 다르게 약간이나마 훈련을 받은 병사가 죽어 원한을 가지고 부활한 것이 스켈레톤으로, 조악하게나마 과거에 자신이 가진 무기를 다룰 줄 알았기에 무식하게 팔만 휘둘러대는 좀비보다는 훨씬 더 위협적이다.

키에엑!

카강.

좀비보다 훨씬 빠른 스피드를 가진 스켈레톤 한 마리가 몸을 덜거덕거리며 달려와 날이 빠진 장검을 휘두르자 멍하니 몬스터를 바라보던 카나리아가 숨을 삼키며 재빨리 너클을 이용해 검을 막았다.

“한 마리는 네 몫이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음에 인상을 찌푸리며 스켈레톤을 상대하는 카나리아를 향해 말을 던지고 검을 들어 막 카나리아에게 손을 휘두르려는 좀비의 양팔을 절단하며 그 반동을 이용해 검을 꺾어 양다리를 부숴버리자 ‘우드득!’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좀비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그워어어.

처참하게 뭉개진 사지에서 썩은 진액을 쏟으며 비명을 지르는 좀비를 뒤로하고 재빨리 몸을 돌려 나를 향해 검을 찌르는 스켈레톤의 장검을 검으로 흘리며 어깨로 스켈레톤의 가슴을 들이박자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스켈레톤의 가슴을 이루고 있던 뼈가 움푹 주저앉았다.

“수고하세요.”

사지가 절단 당한 좀비의 머리에 단검을 박아 넣어 마무리를 한 폭스가 응원의 말과 함께 시원한 웃음을 흘리며 마지막 좀비를 향해 단검을 던지며 내 곁을 지나쳤다.

‘저 망할 자식!’

“으득, 죽어라!”

크에엑.

맞서서 비명을 지르는 스켈레톤의 쇄골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스켈레톤 또한 딱딱한 움직임으로 검을 들어 내 검을 막았다. 이내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강렬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쩌적.

팽팽히 힘을 겨루는 것도 잠시, 스켈레톤이 들고 있던 낡은 장검의 중간 부분이 쩌적 갈라졌다.

키엑?

“리스폰 되면 검 좀 바꾸는 게 좋을 거다.”

후우웅.

콰드득.

온 힘을 다해 휘두른 내 검에 자신의 부러진 검을 멍하니 바라보던 스켈레톤의 머리뼈가 단숨에 바스러지며 파편을 튀겼다. 무조건 힘에다 투자한 덕인지 머리를 부숴버린 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거의 절반에 달하는 갈비뼈까지 부순 다음에야 멈췄다.

키에에!

“크윽, 제기랄!”

‘카나리아는 아직 멀었나?’

뒤쪽에서 들리는 스켈레톤의 고함 소리와 카나리아의 욕설에 몸을 돌리자 역시나 예상대로 스켈레톤과 카나리아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상대의 몸에 직접 타격을 가해 데미지를 주는 카나리아에게 온몸이 뼈로 이루어져 타격 부위가 적은 스켈레톤은 최악의 상대였다.

‘저대로 두면 끝이 없겠군.’

스윽.

스켈레톤의 검을 피하며 간간히 주먹을 날리는 카나리아를 보다 못한 내가 도와주러 가려는데 조용히 카나리아를 지켜보던 폭스가 손을 들어 나를 저지했다.

“카나리아 님에게는 중요한 경험입니다.”

방금 전까지 ‘형님, 형님’ 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차가운 목소리였다.

인상을 구기며 잡았던 검을 내려놓자 그제야 웃음을 지은 폭스가 다시 카나리아의 전투로 시선을 돌려 양손을 입에 대고 소리쳤다.

“급소를 노리세요!”

힘껏 외친 폭스의 말에 스켈레톤을 피한 카나리아가 뒤로 몇 발짝 물러나며 울상을 지었다. 온몸이 뼈로 이루어진 저놈에게 급소가 어디 있냐고 외치는 듯한 카나리아의 태도에 폭스가 스스로 알아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키에에엑!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듯 힘찬 비명을 지른 스켈레톤이 생각에 잠긴 카나리아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찾았다!”

깡.

녹슨 장검이 막 카나리아의 머리를 가르려는 순간, 힘찬 외침과 동시에 팔을 들어 검을 막은 카나리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막 검을 들어 두 번째 공격을 하려는 스켈레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죽어라!”

콰지직.

여태껏 자신을 고생시킨 것에 대한 보복인지 살기 어린 외침과 함께 곡선을 그리며 쳐올린 어퍼컷이 그대로 스켈레톤의 턱뼈를 부수며 치고 올라가 완전히 머리를 부숴버렸다.

키에!

툭.

마지막 발악으로, 머리를 잃은 스켈레톤의 줄어드는 비명과 함께 치켜들었던 검을 내리쳤지만 고작해야 10의 데미지를 주는 약한 공격이었다.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어깨에 걸쳐진 녹슨 장검을 치워내고 폭스를 향해 승리의 V자를 그린 카나리아가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동생, 이 형님의 솜씨가 어때?”

“대단해요. 역시 형님입니다.”

“그렇지? 으하하하.”

아부성 짙은 폭스의 말에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는 카나리아의 모습에 인상을 구기며 캐릭터 창을 열어보니 무려 18% 올라간 경험치가 보였다.

스켈레톤 한 마리 잡은 것치고 지나치게 높은 경험치는 아마 좀비 한 마리를 죽인 것과 방금 전에 좀비에게 치명타를 준 것, 그리고 스켈레톤을 죽인 경험치가 경험치 2배라는 보상과 함께 올라간 듯했다.

“형님은 라운 파이터로 전직하시려면 고생 좀 하시겠네요.”

“남자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으하하!”

스켈레톤의 검에 긁힌 상처에 하급 해독 포션을 바르는 폭스의 말에 폭스와 같이 하급 해독 포션을 바르던 카나리아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는 동생도 고생 좀 하겠는데? 도적 전직 시험에 대해서는 알아봤어?”

“아뇨. 후훗.”

“엥? 아니라니? 도적이 되고 싶다더니, 시험 대비도 하지 않는 건가?”

“후훗, 도적 지망이라는 건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해서 대충 지어낸 말이었습니다. 대놓고 밑천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요.”

폭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폭스가 보여준 스피드와 단검술은 도적이나 어쌔신에 어울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니? 내가 아는 직업 중에는 그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지금 폭스와 같은 능력을 가진 직업이 없다. 설마…….

“스페셜 직업?”

“역시 블러드 님이시네요.”

의심 반, 확신 반의 내 물음에 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했지만 스페셜 직업이라니.’

카나리아 또한 스페셜 직업에 대해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의 눈길로 폭스를 바라봤다.

스페셜 직업.

흔히 ‘지존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도 불리는 이 직업은 보통 직업과는 확연히 다른 종류의 직업으로 직업의 스킬, 전직 방법, 무기, 그 밖의 모든 것이 비밀이며 심지어 스페셜 직업을 가진 유저조차 거의 비밀에 가까웠다. 알려진 것은 단 한 가지, 그 직업이 가진 위력이 막강하다는 것뿐이다.

과거 검은 사자 길드에 언령사(言靈士)라는 스페셜 직업을 가진 ‘고추가침퉤퉤’라는 유저가 있었는데 마법과 비슷하지만 마법과는 위력도, 또 그 방법도 다른 막강한 힘에 감탄한 적이 있다.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스타급의 유저와 대등하게 전투를 할 수 있을 정도이니 그 위력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블러드 님 또한 스페셜 직업 아니신가요?”

‘역시 알고 있었군.’

살랑거리는 폭스의 물음에 투구 속 내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폭스의 말대로 나 또한 스페셜 직업을 노리고 있었다.

폭스는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과거, 헤라클래스 시절에 어떠한 방법으로 스페셜 직업으로 전직하는 방법을 알 수 있었고 이미 직업을 가진 나는 아쉬움을 표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고 그것을 가슴 속에 품었다.

‘그때는 내 처지가 이렇게 될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야. 크큭.’

“어서 빨리 사냥이나 하지.”

“어라? 블러드 님! 대답해주셔야죠. 블러드 님이 아는 스페셜 직업은 뭐죠? 블러드 님? 블러드 님!”

뒤에서 들리는 폭스의 재촉을 뒤로하고 깊숙한 던전을 향해 움직이는 내 눈에 뜨거운 기운이 몰렸다.

‘일주일! 일주일 안에 원 스타까지 간다!’

“크허어어엉!”

거인의 단검에 딸린 스킬인 ‘전사의 외침’이 내 입을 통해 뛰쳐나와 던전을 진동시켰다.

푸욱.

쿠워어억.

[레벨이 올랐습니다.]

듣기 거북한 비명 소리와 함께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검은 로브를 걸친 기체 형태의 섀이드(Shade)의 모습과 동시에 들리는 알림음에 모처럼 내 얼굴이 미소가 떠올랐다.

“블러드 님!”

크으으. 그그극.

레벨 업의 기쁨을 만끽할 틈도 없이 보채는 폭스의 외침에 재빨리 몸을 날리자 방금까지 내가 서 있던 곳이 짙은 어둠의 손톱에 가루로 변했다.

‘제길.’

“죽어라!”

후우웅.

픽.

절로 흘러나오는 욕을 삼키며 재빨리 검을 휘두르자 공기를 찢어발기며 섀이드를 향해 쇄도했던 검이 허무하게 섀이드이 몸을 지나쳐 허공을 갈랐다.

“제길. 폭스, 성수!”

본래 본체가 암흑 계열의 기체로 이루어져 평범한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섀이드. 특별한 마법 속성이 담긴 매직 아이템이나 흔히들 성검(聖劍)이나 마검(魔劍)이라 불리는 것들만이 섀이드의 소울 에너지, 즉 본체를 공격할 수 있다.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는 바로 지금 우리 일행처럼 특수한 능력을 가진 아이템으로 무기에 어떠한 속성을 부여하는 방법이었다.

“블러드 님!”

쨍그랑.

정확히 나를 향해 날아든 주먹만 한 유리병을 검을 이용해 그대로 깨버리자 유리병 속에 담겨 있던 성수가 그대로 쏟아져 내려 내 검을 적시는가 싶더니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은은한 빛과 함께 내 검에 스며들었다.

[사용자의 무기에 성 속성이 부여되어 암흑 속성의 몬스터에 한해 공격력이 10% 증가합니다. 지속 시간은 30분입니다.]

쿠웨에엑!

은은한 빛을 내뿜는 검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잠시 주춤한 섀이드가 거친 비명과 함께 어두운 기체로 이루어진 손을 뻗으며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데미지를 줄 수 없었던 방금 전이라면 몰라도 성수의 능력으로 성 속성이 부여된 이 검이라면 섀이드 한 마리 정도는 위협도 되지 않았다.

“크하압.”

쿠웨엑.

성 속성의 검이 암흑 속성의 섀이드의 몸을 가르며 보랏빛 스파크를 튀겼다. 1.5m의 크기로 짙은 검은색의 로브 안에 어두운 연기가 가득 들어차 있는 형상을 한 레벨 80대의 섀이드는 성 속성의 검 앞에 너무나 쉽게 모래가 되어 은빛 동 전 몇 개를 드롭 하며 사라졌다.

푸푸푸푹.

쿠엑.

병 당 1골드짜리 성수를 잔뜩 머금은 단검을 보통 싸구려 단검 던지듯 마구 남발하는 폭스를 향해 손을 휘두르던 섀이드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퀴이익. 퀴엑.

“크아아아!”

그런 폭스의 옆에는 비명을 지르는 2마리의 섀이드를 향해 마주 비명을 지르던 카나리아가 손을 뻗어 1m 정도 허공에 떠 있는 섀이드를 힘으로 잡아 끌어내렸다.

딴에는 내려가지 않으려고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마구 손을 휘둘렀지만 성수를 잔뜩 바른 너클과 무지막지한 카나리아의 힘 앞에서는 무리였다.

퍼버벅.

퀴에!

손, 발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폭스의 난폭한 공격에 그나마 손을 휘두르던 섀이드가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퀴이이익.

어둠 속에 숨어 있다 나타난 처음의 6마리에서 혼자 남은 섀이드가 비명을 지르며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또 다른 섀이드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는 카나리아의 등을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퍽.

퀴엑!

어디선가 날아든 단검에 손톱은 고사하고 휘두르던 손까지 꿰뚫린 섀이드가 비명을 지르며 꿰뚫린 손을 재빨리 복구하며 단검을 던진 폭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챠압.”

슈슈슈슉.

퀵!

기합과 함께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폭스의 손을 떠난 4개의 단검이 순서대로 섀이드의 한가운데를 관통하자 폭스를 향해 들려들던 섀이드가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것도 잠시, 어느새 섀이드의 앞에 나타난 폭스의 단검에 세로로 이등분 당한 섀이드가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가히 환상의 파티 플레이였다.

“그럼 전 다시 몰이를 하러 다녀오겠습니다.”

포션을 꺼내 마신 폭스가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을 수거한 뒤 몬스터 몰이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나자 조용히 포션을 먹던 카나리아가 털썩 주저앉아 숫돌을 꺼내 주먹과 팔꿈치, 발 등과 무릎에 달린 강철 너클을 손질했다.

나 또한 포션을 마신 뒤 방금 전에 한 레벨 업을 생각하고는 조용히 캐릭터 창을 소환했다.

이름: 블러드. 레벨: 97. 속성: 혈(血).

성향: 중(中). 종족: 휴먼. 명칭: 초보자.

체력: 13000. 마력: 3500. 신성력: 2500.

힘: 333. 민첩성: 34. 체력: 35.

지혜: 30. 신마력: 30. 행운: 30.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달리 무지막지하게 올라간 힘은 절로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거기다 이제 2레벨만 업 하면 스페셜 직업으로 전직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오랜만에 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크크큭.”

참을 수 없는 희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런 나를 미친놈 보듯이 바라보던 카나리아가 이내 고개를 돌려 너클 관리에 열중했다. 나 또한 숫돌을 꺼내 막 검을 손질하려는 순간, 던전 저 너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아직 경험치 2배와 아이템 드롭 확률 2배의 보상이 끝나지 않았고 마법사의 탑에서 철저히 봉쇄하고 있는 이 던전에는 우리 말고 누군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블러드 님! 형님!”

요란스러운 소리의 정체는 바로 몬스터 몰이를 나갔던 폭스였다.

가끔 뒤를 향해 무작위로 단검을 던지며 달려오는 폭스의 뒤로 좀비 1마리와 스켈레톤 3마리, 섀이드 1마리 그리고 또 하나의 몬스터가 따라오고 있었다.

이 던전에서 처음 보는 몬스터는 생김새는 섀이드와 같지만 2m에 육박하는 커다란 덩치에 커다란 낫을 들고 무서운 기세로 낫을 휘둘러 닥치는 대로 방해물을 베어버리며 다가왔다.

“섀도우……!”

낮은 긴장감에 내가 신음처럼 저 몬스터의 이름을 말하자 조용히 자세를 취하던 카나리아 또한 얼굴을 구기며 나를 바라봤다.

섀도우(Shadow).

섀이드와 같은 종류의 몬스터로 강함에 있어서는 섀이드의 3배에 육박하는 몬스터다. 거기다 단순하게 팔만 휘두르는 섀이드와는 달리 거대한 낫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중급 언데드 몬스터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섀도우를 가장 잘 알려지게 한 것은 바로 섀도우가 하급 리치들이 주로 사용하는 언데드 몬스터라는 점이었다.

“제길…….”

현재 일행이 있는 던전의 위치는 거의 끝.

최악의 경우 몬스터 몰이를 나갔던 폭스가 염환이 말했던 하급 리치가 있는 곳을 실수로 건드려서 섀도우를 끌고 온 건지도 몰랐다.

“카나리아! 하급 리치가 올지도 모른다. 최대한 빨리 끝낸다!”

웬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냐는 듯, 의외의 표정을 짓던 카나리아가 내 말뜻을 파악하고는 아이템 창에서 성수 하나를 더 꺼내 온몸에 장착한 너클에 고루 바르고는 남은 성수를 자신의 몸에 뒤집어썼다.

쨍그랑.

나 또한 카나리아에게 받은 성수를 깨뜨려 검에 더 바른 뒤 몸에 뒤집어썼다.

우우웅.

“폭스! 최소한의 데미지라도 좋으니까 최대한 많은 수의 몬스터를 공격해라!”

성수의 효과로 은은하게 빛나는 검을 든 내 외침을 들었는지 달리는 와중에도 데미지를 노리며 한 놈만을 공격하던 폭스가 뒤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단검을 날려댔다.

그워어! 키엑!

폭스의 그런 공격이 통했는지 폭스의 뒤를 따르던 몬스터들이 한층 더 짙어진 흉포한 기세를 뿜어대며 속도를 높였다.

[블러드: 폭스, 우리를 그냥 지나쳐라.]

내 귓속말을 들었는지 열심히 단검을 날리며 달리던 폭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속도를 높였다.

몬스터들과의 거리가 10m 정도로 가까워질 무렵, 손에 든 검을 뒤로 넘기며 힘을 주자 부르르 하는 진동이 온몸을 울렸다.

스슥.

퀴에에엑. 쿠워억.

폭스가 우리를 지나치자 폭스의 단검에 맞아 흥분한 몬스터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폭스를 잡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속도가 빠른 스켈레톤과 섀이드가 카나리아를 지나칠 무렵 힘찬 기합을 터트리며 막 내 앞을 지나치는 좀비의 몸을 뜯어 발겨 검은 진액을 허공에 퍼트렸다.

“지금이다!”

“크하압.”

콰지직. 챙캉.

검을 고쳐 잡으며 소리치자 긴장된 표정으로 몬스터들을 바라보던 카나리아가 막 앞을 지나치는 스켈레톤을 향해 뒤로 당겼던 주먹을 짧게 올려 쳤다.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골반이 부서진 스켈레톤 한 마리가 손에 들린 장검을 떨어트리며 비명을 질렀다.

[블러드: 섀이드는 폭스가, 스켈레톤은 카나리아가 맡아라!]

같은 파티원만이 들을 수 있는 파티 음성으로 소리를 지르며 느낀 오싹한 오한에 재빨리 고개를 숙이자 방금까지 내 목이 있던 자리에 휭 하는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존재를 잊고 있던 섀도우의 낫이었다.

크르르.

흡사 개와 같은 섀도우의 낮은 목울림에는 자신의 일격을 피한 나를 향한 숨길 수 없는 분노가 깔려 있었다.

크허어엉!

“크윽.”

마치 전사의 외침 스킬 같은 섀도우의 울음소리에 인상을 구기는 것도 잠시, 섀도우를 비롯한 나머지 몬스터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랏빛 기운에 내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제길, 그림자의 외침……!”

모든 어둠 계열의 몬스터의 능력을 10% 상승시켜주는 섀도우 특유의 스킬에 내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속전속결이다!’

까가강!

크헝.

재빨리 검을 들어 섀도우의 낫을 막자 육중한 압력과 함께 언데드 특유의 차가운 숨결이 느껴졌다.

크허어엉!

힘찬 울음과 함께 빈 허공에서 어지럽게 낫을 휘두르던 섀도우가 돌연 자세를 낮추며 내 무릎을 향해 낫을 휘둘렀다. 레벨 100대의 몬스터라 그나마 단순한 놈의 공격 패턴을 예측해 재빨리 몸을 날려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고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각반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크르르. 스으응.

까강.

낮은 바람과 함께 내 미간을 향해 내리꽂히는 낫을 검의 면으로 흘린 뒤 재빨리 몸을 돌려 섀도우의 옆을 점하자 막 바닥에 꽂힌 낫을 들어올리던 섀도우가 울음을 토해내며 낫을 들지 않은 손을 휘둘렀다.

퍼억.

“크윽… 크허어엉!”

팔로 방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에 신음을 삼키며 ‘전사의 외침’을 시전하자 내 입에서 섀도우와 같은 우렁찬 울음소리가 뛰쳐나와 던전을 울렸다.

오로지 대상의 능력치만 올려주는 ‘그림자의 외침’과는 다르게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는 부가능력을 가진 ‘전사의 외침’ 덕분에 낫을 휘두르려던 섀도우가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죽어라!”

끄어어엉.

쨍그랑.

살기 어린 외침과 함께 힘껏 휘두른 검에 섀도우의 하체가 갈라지며 짙은 보랏빛 스파크를 사방으로 튀겨댔다. 제법 타격을 입고 처절한 비명을 지르던 섀도우가 손에 들린 낫을 떨어트리며 미친 듯이 양손을 휘둘렀다.

원래 낫을 이용한 기묘한 공격법 덕분에 섀이드보다 한 수 위로 취급받는 섀도우에게서 낫을 빼면 그저 덩치가 크고 조금 더 레벨이 높은 섀이드에 불과했다.

“크하압!”

크허어엉.

부우욱.

두꺼운 책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비명을 토해낸 섀도우의 몸이 직선으로 그어진 검 앞에 한 줌의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이내 섀도우가 사라진 자리에 제법 많은 양의 은화가 나타났다.

키에에엑.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을 수거할 시간도 없이 바로 몸을 날려 검을 휘두르자 카나리아를 향해 검을 휘두르던 스켈레톤의 갈비뼈가 바스러지며 곧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크아악.”

거의 쏟아버리듯 포션을 들이켠 카나리아가 힘찬 기합을 지르며 폭스가 상대하고 있는 섀이드 무리에 뛰어들어 미친 듯이 주먹질을 해댔다. 나 또한 섀이드 무리에 뛰어들어 몇 번 검을 휘두르자 그마나 반항을 하던 섀이드 무리가 모두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휴우, 다행히 로그아웃은 면했네요.”

정말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땀을 훔치는 폭스의 모습에 인상을 구기며 거칠게 검에 묻은 썩은 진액을 털어내자 막 아이템을 수거하려던 폭스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내일이면 1주일도 다 되어가서 하는 수 없이 블러드 님과 형님을 위해 무리를 좀 했습니다. 하하하.”

“역시 동생은 마음씨도 좋아! 으하하하.”

나와 카나리아 핑계를 대는 폭스와 그런 폭스에게 웃음을 짓는 카나리아 덕분에 화낼 타이밍을 놓친 내가 좋지 않은 기분을 드러내며 검갑에 검을 꽂아 넣자 아이템 수거를 마친 폭스가 포션을 들이켜며 불길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우리 모두 레벨 업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모험 한 번만 해볼까요?”

모험? 다 마신 포션의 빈 병을 수거한 폭스가 방금 전, 대량의 몬스터를 몰고 온 던전의 깊숙한 곳을 가리켰다.

‘이 자식, 설마…….’

“리치를 발견했습니다. 하하.”

“뭐?”

짜증 섞인 내 물음이 곧 분노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리치도 저를 발견했고요. 섀도우는 리치의 다리에 단검을 던지고 도망치는 절 잡기 위해 리치가 보낸 몬스터랍니다.”

“…….”

그래도 꼴에 미안한지 약간은 표정이 굳은 폭스의 말에 내 속에서 감출 수 없는 분노가 흘러나왔다. 솔직히 말해 이대로 하루만 더 있으면 아무런 지장 없이 레벨 업을 할 수 있는 내가 어째서 그런 모험을 해야 하냔 말이다!

“절대 안 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작게 인상을 구긴 폭스가 자신의 심장 부근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리치가 저에게 ‘타켓 온 마나’를 사용했습니다.”

“미친……!”

내 입에서 나온 쌍소리에 잠시 몸을 움찔한 카나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폭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으하하. 괜찮아, 동생.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타켓 온 마나.

마법사나 사냥꾼이 원 스타 때 배우는 마법으로 시전자가 지정한 상대에게 시전자의 마나를 섞어 일정 시간 동안 상대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추적 마법의 일종이다.

상대가 하급 리치인 만큼 시전 시간이 짧겠지만 최소 하루다.

그리고 하루라면 경험치 2배의 보상이 끝나는 날이기도 하다. 다른 선택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내 머리가 빠른 속도로 돌아가며 이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만들어냈다.

“하는 수 없지. 리치를 잡는다.”

“예?”

“뭐라고?”

내 말이 의외였는지 서로 바라보며 웃음을 짓던 폭스와 카나리아가 눈을 치켜뜨며 나를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마법이 걸린 폭스 혼자 떨어져서 사냥하라고 하고 싶지만, 비록 위험한 동료일지라도 폭스는 훗날 내 복수에 커다란 도움이 될 존재다.

거기다 폭스가 없으면 카나리아가 나에게 동참할 리 없고 그러면 나 혼자 던전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해야 할 터였다. 사냥의 효율이 몇 배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위험한 모험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었다. 적어도 하급 리치라면 확률이 40%는 나오니까.

“하급 리치를 잡으러 간다. 모두 전력을 정비해라. 5분 뒤 리치를 잡으러 간다.”

-킬킬킬, 그럴 필요가 있나?

내 말에 막 장비를 재장비하려던 폭스의 위에서 들리는 갈라진 목소리에 거의 본능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검을 휘두르자 ‘쉬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친 웃음소리의 위치가 높아지면서 후끈한 열기가 던전을 가득 메웠다.

-대단하군. 킬킬! 염화의 마나여, 나의 손에 깃들어 적을 멸하는 불꽃이 되어라, 파이어 볼!

“리치!”

경악 섞인 폭스의 외침을 확인할 틈도 주지 않는 리치의 마법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카나리아를 잡고 바닥을 구르자 방금까지 카나리아가 있던 자리에 성인 남자의 몸통만 한 불꽃이 바닥과 만남을 고하며 거친 폭발음과 함께 사방으로 불꽃을 토해냈다.

“공격해라!”

쉬시식. 퍼버버벅.

-크윽, 건방진 인간 놈… 헉! 고, 공간의 마나여!

허공을 수놓는 폭스의 단검이 간만의 차이로 리치의 몸을 스치고, 막 폭스를 향해 마법을 시전하려던 리치가 허공을 찢어발기며 쇄도하는 내 검에 숨을 삼켰다. 리치는 재빨리 순간이동 마법인 블링크를 시전하려고 했지만 투 스타의 마법인 블링크의 스펠보다 내 검이 훨씬 빨랐다.

콰드드득.

치이익.

-크아아악!

뼈가 뜯기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리치의 몸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마 성 속성인 검과 언데드 리치의 몸이 서로 부딪치며 만든 연기인 듯, 피어오른 연기에서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생김새는 섀도우와 비슷하지만 섀도우보다 몸집이 작고 낫 대신 낡은 마법서를 들고, 검은 기체 대신 새하얀 해골이 몸을 이루고 있는 리치가 연기가 솟구치는 몸을 부여잡으며 일행에게서 상당히 먼 거리에 나타나 분노를 표했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염화의 마나여, 폭염의 마나여, 내 손을 떠나 하늘로 솟구치는 기둥이 되어라, 익스플로젼!

콰가가강.

“크아악!”

“형님!”

리치가 시전한 막강한 불꽃 기둥 앞에 막 공격을 가하려던 카나리아의 몸이 비명과 함께 불꽃 기둥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카나리아 님께서 로그아웃 하였습니다.]

‘제길!’

한 명이라도 아까운 이때에 나와 함께 데미지를 주는 카나리아가 빠진 공백은 컸다.

‘그 공백이 나타나기 전에 쓰러트린다!’

“폭스, 속전속결이다!”

“하압!”

슈슈슉.

-강철의 마나여, 나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라, 실드!

까가강.

힘찬 기합과 함께 폭스의 손을 떠난 단검을 실드로 막은 리치가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공격 마법을 시전하려는 순간, 어느새 리치의 앞으로 다가선 폭스가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를 리치를 향해 뻗으며 힘차게 외쳤다.

“나의 자식을 범하는 부정한 자는 성스러운 흙으로 돌아갈지니. 허나 성스러운 흙 또한 범한 자를 환영하지 아니할 것이라! 범한 자는 나의 품 안에서 회개하고 또 회개하여 흙으로 돌아가라, 홀리 익스플로젼!”

콰가가가강.

-크아아악!

방금 전 리치가 시전한 익스플로젼과 같은, 그러나 이글거리는 불꽃 대신 나타난 성스러운 빛의 기둥에 막 마법을 시전하려던 리치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빛의 기둥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성직자의 공격 마법 중, 쓰리 스타의 성직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홀리 익스플로젼의 막강한 위력 앞에 언데드인 리치가, 그것도 하급 리치가 버틸 리가 만무했다.

‘망할 자식, 그런 걸 가지고 있으면서 지금에야 쓰다니!’

우우웅.

이내 약간의 여운과 함께 사라진 빛의 기둥 안에서 리치의 것으로 보이는 약간의 모래와 원 스타의 것으로 보이는 마법서, 그리고 몇 개의 금화가 나타났다.

띠리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원하시는 직업의 길드에 가서 전직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분 좋은 종소리와 함께 들리는 알림음에 카나리아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마 카나리아의 죽음으로 카나리아에게 갈 경험치가 나와 폭스에게 간 듯했다.

“캐릭터 창.”

파밧.

이름: 블러드. 레벨: 99. 속성: 혈(血).

성향: 중(中). 종족: 휴먼. 명칭: 초보자.

체력: 13900. 마력: 3800. 신성력: 2800.

힘: 336. 민첩성: 34. 체력: 35.

지혜: 30. 신마력: 30. 행운: 30.

무려 2업을 하고 주어지는 보너스 스탯을 모두 힘에 투자한 뒤 만족한 웃음을 보이며 캐릭터 창을 닫자 막 리치가 드롭 한 아이템을 수거한 폭스가 힘든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이거 비장의 카드를 너무 허무하게 써버렸네요.”

“아니,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내 칭찬이 의외였는지 포션을 마시던 폭스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이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 스페셜 직으로 전직하러 가시는 건가요?”

“너도 전직하러 가는 거 아니었나?”

의문 섞인 내 물음에 빈 병을 수거한 폭스가 난처한 듯 입을 열었다.

“카나리아 님을 두고 갈 수야 없죠. 전 카나리아 님을 레벨 업 시켜드리고 같이 던전을 나가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부욱.

내가 특별히 부탁한 귀환 주문서가 빛을 발하자 바닥이 쑥 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엄청난 빛이 내 몸을 덮쳤다.

“로그아웃.”

[로그아웃 하시겠습니까? 귀환 중 로그아웃은 상당한 두통을 유발합니다.]

“로그아웃.”

전직 전에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에 로그아웃을 하자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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