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6 웨어라이언(Werelion)
푸슉.
“크으…….”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내 머리를 옥죄는 지독한 두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헤드셋을 벗고 그 밖의 장비들을 벗은 뒤 캡슐을 나서자 캡슐 밖의 상쾌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제법 늦은 시간이라 집 안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말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미네르바. 점화. 욕실 온수 가동. 현재 시각.”
팟.
[현재 시간은 오후 8시입니다.]
집 안을 밝히는 환한 불빛과 함께 들려오는 미네르바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땀에 전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서자 새하얀 김이 솟아오르는 욕조가 나를 반겼다.
“으음.”
약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기분 좋은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미네르바. 판타즈마 월드 홈페이지 접속.”
[예.]
파밧.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욕실의 조명이 조금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내 앞으로 가로, 세로 1m 크기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둥둥둥둥.
귀에 익숙한 판타즈마 월드의 테마곡을 들으며 홀로그램의 지도를 클릭하자 홀로그램이 잠시 일렁거리는가 싶더니 곧 다른 화면으로 바뀌어 모습을 드러냈다.
바뀐 화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바로 현 판타즈마 월드의 지도였다.
“현재 내 위치.”
스윽.
곧 판타즈마 월드의 전체를 보여주던 지도가 바다 부근의 한 항구 도시로 축소되어 그 모습을 나타냈다. 내가 처음 판타즈마 월드를 이용하면서 입력한 바코드 덕에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기능이다.
작은 웃음을 흘리며 혼돈의 바다 쪽으로 손을 움직이자 혼돈의 바다에 자리 잡은 몇 개의 섬의 모습이 확대되어 나타났다. 그중 제법 커다란 섬을 클릭하자 섬의 이름과 함께 섬에 대한 설명이 작은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데스 랜드-
죽음의 섬이란 이름과 다르게 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문제점은 그들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웨어베어(Werebear), 웨어래트(Wererat), 웨어울프(Werewolf), 웨어타이거(Weretiger), 웨어라이언(Werelion) 등이 서식하며,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웨어울프와 웨어타이거, 웨어라이언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위험한 섬이기도 하다.
특산물: 동물 가죽.
주요 인물:
웨어울프, 레드 울프 일족의 ‘바람의 움직임(지도자)’ 드라칸.
웨어타이거, 블랙 타이거 일족의 ‘사나운 이빨(지도자)’ 윤.
웨어라이언, 화이트 라이언 일족의 ‘붉은 어금니(지도자)’ 카인.
보통 수인족의 기본 레벨은 투 스타 이상. 이제 막 원 스타가 된 내가 이곳으로 사냥을 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난 사냥을 위해 이곳에 가는 것이 아니니까.
“붉은 어금니 카인…….”
웨어라이언 일족의 지도자이며 화이트 라이언 일족인 그는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어금니 덕에 붉은 어금니라는 살벌한 별명을 얻었다.
수인족은 몬스터로 분류되어 있지만 또한 NPC로 분류되어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다크엘프와 같은 존재랄까? 하지만 어떠한 방법으로도 변할 수 없는 다크엘프와는 달리 이 수인족은 약간의 고통만 참으면 충분히 수인족으로 종족을 바꿀 수 있었다.
내가 이 데스 랜드에 가는 이유가 바로 스페셜 직업에 꼭 필요한 과정인 ‘종족 변환’을 위해서였다.
과거, 나와 검은 사자 길드의 간부 몇 명이 이 데스 랜드로 사냥을 온 적이 있는데 그때 만나 인연을 맺은 것이 바로 카인이다. 철저히 인간을 배척하는 다른 종족과는 달리 카인은 인간을 배척하지 않고 맞아들였다.
물론 그들 일족에 피해를 주는 자라면 그자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잔인하게 보복을 했기에 그 누구도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도 단 한 번의 위기가 있었는데 바로 웨어타이거를 제외한 나머지 수인족의 기습 공격이었다.
그때 멸족 당할 뻔한 웨어라이언 일족을 보다 못한 나는 아지트에 있는 나머지 간부들을 불러 카인을 도와주었고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카인과 1대 1로 독대를 한 나는 바로 카인에게 스페셜 직업을 제의 받았다. 아니, 스페셜 직업이라 부르기가 뭐할 수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스페셜 직업을 뛰어넘는 것이기도 했다.
촤악.
머릿속을 가득 채운 잡생각을 마치며 몸을 일으키자 차갑게 식은 물방울이 내 몸을 따라 솟구쳤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크큭.”
곧 전직할 스페셜 직업 때문을 생각하니 내 입에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과거의 헤라클래스만 기억하는 카인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해결할 방법이 있기에 걱정은 없었다.
“옷 준비.”
[예.]
입맛이 없어 미네르바의 기계 팔이 건넨 옷을 받으며 식탁 위에 있는 영양제를 삼키자 달콤한 영양제의 맛이 내 입을 가득 메웠다. 이제는 반밖에 남지 않은 우유를 들이켜고 빈 우유팩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시 캡슐 안으로 들어서자 밖과는 다른 후끈한 열기가 나를 맞이했다. 바로 어제 3일의 제한 시간이 지나 12시간 수면을 취했기에 전직 도중에 강제 종료를 당할 걱정은 없었다.
“후우, 시스템 가동.”
철컥. 위이잉.
천장에 연결된 붉은 줄을 잡아끌어 헤드셋에 있는 구멍에 연결한 뒤 접착 벨크로 형태로 되어 있는 부착기를 심장 부근에다 붙인 다음 검은 장갑을 착용하자 곧 캡슐의 문이 닫히며 익숙한 어둠이 몰려왔다.
“판타즈마 월드 접속.”
사아아아.
둥둥둥둥!
마치 거대한 모래성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판타즈마 월드 오프닝 특유의 북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주위는 더 이상 칙칙하고 어두운 캡슐 안이 아닌 아름다운 숲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계정과 비밀 번호를 말해주십시오. 계정이 없으신 분은…….]
“악어는악어새. 새는악어새.”
띵.
[계정이 확인되었습니다. 지문 검사와 함께 홍채 검사를 하겠사오니 사용자께서는 약간의 충격에 대비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지이잉.
여인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눈을 현혹시키는 붉은빛이 내 눈을 한 번 스쳐 지나갔고 그와 동시에 따끔 하는 무언가가 장갑을 통해 내 열 손가락에 느껴졌다.
[사용자를 확인하였습니다. 총 1개의 캐릭터가 있습니다. 접속하시겠습니까?]
처음 접속했을 때와는 달리 태초의 공간에는 나 말고도 온몸을 검은 갑옷 속에 숨긴 한 인영이 바위 위에 앉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몸 전체에서 풍기는 강력한 패기와 강렬한 광기.
바로 게임 속의 또 다른 나인 블러드였다.
“접속.”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던 검은 갑옷의 인영이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이내 한기를 머금은 손을 잡는 순간, 세상을 가득 메우는 빛이 나를 집어삼켰다.
* * *
와글와글.
내 귀를 괴롭히는 소음에 인상을 구기며 눈을 뜨자 음침한 망자의 던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나를 맞이했다. 활기찬 항구 도시의 모습은 생기를 온몸으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쓸데없이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저 멀리 배가 보이는 항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는 나오지 않는 켄타우루스(Centaur)의 ‘매혹의 피리’ 팝니다!”
“수중 던전으로 사냥 가실 투 스타 전사 구합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유저들의 활기찬 목소리를 무시하며 간 항구에는 시장에 뒤지지 않는 엄청난 인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스 버드 섬으로 갑니다! 쓰리 스타 선장이 모십니다!”
“눈물의 섬으로 갑니다!”
“눈물의 섬으로 가는 배 얼마요?”
유저들을 끌어 모으는 선장 NPC와 간혹 보이는 선장 유저들, 그리고 목적지로 가는 배를 찾는 유저들의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선장들이 목적지를 외치지만 그중 내가 원하는 데스 랜드를 가는 선장은 한 명도 없었다.
“데스 랜드 갑니다! 출발 5분 전입니다!”
그렇게 데스 랜드 가는 배를 찾기를 10여 분, 마침내 데스 랜드에 간다고 외치는 십대 후반의 소년의 외침에 재빨리 소년에게 다가섰다.
“데스 랜드 가시게요?”
“그래.”
“10골드입니다!”
보통 뱃삯보다 거의 5배나 비싼 가격이었지만 목적지가 데스 랜드인 만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이 안내한 배는 제법 커다랗지만 물고기를 잡던 배를 개조해서 만든 것인지 조금은 허접한 티가 나는 여객선이었다.
배의 선장은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옷 사이로 힐끗힐끗 보이는 근육과 날카로운 눈초리는 중년인이 노련한 선장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소년의 안내를 받아 탄 허름한 배에는 평범한 상인으로 보이는 NPC가 전부였다.
“출발합니다!”
뿌우우우.
내가 마지막 손님인지 아직도 빈 공간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소년의 힘찬 외침과 함께 정착해 있던 배가 천천히 움직여 항구를 벗어났다.
“그, 그쪽은 데스 랜드에 왜 가십니까?”
그냥 있기는 무료했는지 콜튼이라는 이름을 가진 NPC가 나에게 물었지만 깨끗이 무시하고 바다만 바라보자 그도 이내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봤다.
현실 시간으로는 30분, 게임 시간으로는 거의 1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저 멀리 데스 랜드가 점차 윤곽을 드러냈다.
커다란 삼각형 모양인 데스 랜드의 위쪽에는 웨어라이언 일족이, 오른쪽에는 웨어울프 일족이, 왼쪽에는 웨어타이거 일족이 살고 섬의 중간에 위치한 ‘마성(魔性)의 숲’에는 나머지 수인족과 함께 몇 종류의 몬스터들이 살고 있었다. 배가 정착한 곳은 바로 웨어라이언 일족이 살고 있는 위쪽 지점이었다.
그곳에는 카인이 데스 랜드로 오는 인간들을 위해 만든 작은 선착장이 있고 선착장 근처에는 몇 십 명의 인간 장사꾼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약간의 대가를 지불하고 웨어라이언 일족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간혹 데스 랜드로 사냥을 오는 유저들에게 아이템을 팔고 또 그들이 마성의 숲에서 수거한 아이템을 구입해 대륙에서 비싼 값에 팔아 이익을 보는 그들은 개개인의 레벨 또한 높아 웬만한 쓰리 스타에 버금갈 정도였다. 죽음의 섬이라는 데스 랜드에 정착을 하고 장사를 하는 자들이니 만큼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끼이익.
소년의 힘찬 외침과 함께 작은 배가 낡은 비명을 지르며 선착장에 정착하자 선장의 옆에서 선장의 심부름을 하던 소년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커다란 나무판자를 놓아 선착장과 배를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언제 목숨이 달아날지 모르는 데스 랜드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 소년과 불안한 눈초리로 주변을 살피는 콜튼을 뒤로하고 웨어라이언 일족이 사는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꾸르르르. 꾸르르.
끼엑. 끼리엑.
유저들이 많은 선착장 근처라서인지 숲에는 정체불명의 동물들의 웃음소리를 제외하고는 몬스터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유저들과 NPC들이 이루고 있는 작은 마을에 들러 장비를 점검했을 테지만 장비라면 탑에서 받은 ‘무한의 주머니’라는 레어 아이템에 충분히 있었기에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무한의 주머니(A급)-
거의 무한에 가까이 아이템을 보관할 수 있는 주머니. 엄청난 가치를 지닌 아이템으로 일설에 따르면 어느 파이브 스타의 대마법사가 전설의 마법인 ‘무한 공간’ 마법을 걸어 심심풀이로 유포한 주머니라고 한다.
내구력- 무한/무한.
특수능력- 자신의 힘의 5배에 달하는 무게의 아이템 보관 가능.
내 힘의 5배라면 웬만한 쓰리 스타 중급의 전사가 들 수 있는 아이템의 수였기에 막 원 스타 이전의 내가 들고 있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였다.
아우우우. 쿠워엉.
조용히 웨어라이언의 마을로 움직이는 내 귀에 웨어울프의 것으로 들리는 기다란 울음소리와 웨어베어의 것으로 들리는 거친 울음소리가 꽂혔다. 보통 수인족은 평범한 사람과 같은 모습이며 자신이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흥분한 상태이거나 강력한 적을 만났을 때, 수화, 즉 변신을 하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은 내가 찾아가고 있는 웨어라이언 일족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붉은 어금니라고 불리는 카인은 2m에 육박하는 거대한 덩치와 새하얀 장발, 그리고 지독하게 하얀 눈(目)이 특징인 화이트 라이언이자 웨어라이언 일족이었다. 평소에는 거대한 양날 도끼를 사용하고 변신하면 웨어라이언 일족 특유의 강력한 힘으로 맨손을 사용해 상대를 찢어 죽이는 그의 힘은 당시 포 스타였던 나조차 전율할 정도였다.
‘도착했군.’
울창한 숲 너머로 피어오르는 연기에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역시 지독히 아픈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게임을 오래 해서인지 거의 미치기 직전까지 갔던 과거보다는 훨씬 더 나아진 기분을 느끼며 재빨리 숲을 벗어나자 작은 도시 크기의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 안에는 각양각색의, 그러나 약간의 통일성이 있는 머리색을 가진 인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웨어라이언 일족이었다.
철컹.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갖가지 동물의 뼈와 새의 깃털로 장식한 마을 입구에 다가서자마자 날카롭게 빛을 발하는 두 자루의 창이 내 앞을 막아섰다. 절도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회색빛 거대한 갑옷으로 무장한 거한의 경비병이었다.
본래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수인족의 경비병은 방어에 취약한 천 쪼가리와 자신이 잘 다루는 무기 하나만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과거에 내가 이곳에 들러 잠시 생활을 하면서 카인에게 건의해 경비병의 복장과 무기를 고치게 했다. 처음에 반대하던 장로들과 카인도 실용성을 따지기 전에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고 강력한 힘을 과시해야 한다는 내 말에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륙에서 처음 이곳에 도착한 길입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블러드라고 합니다.”
본래 자존심이 강한 웨어라이언 일족에게 처음부터 반말을 사용해 사건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곧 갑옷에 매달린 종이에 무언가를 써내려간 경비병이 작게 고개를 숙이며 나를 가로막던 창을 치웠다.
“데스 랜드를 지배하며 마성의 숲을 누비는 라이언 일족의 마을에 오신 것을 진정으로 환영합니다. 여행자가 이곳, 데스 랜드에서 동족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한 붉은 어금니의 영광이 함께할 것입니다.”
힘찬 경비병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선 마을은 발달이 덜 된 시골의 도시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조악하게나마 돌로 만든 집과 낮은 성벽, 그리고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물이 마을의 수준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나마 시간이 흘러 이렇게 나아진 것이지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하더라도 이들은 얇은 나무를 쌓고 진흙을 발라 집을 만드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일단 마을로 들어서면 거의 500m에 이르는 민가들이 늘어서 있었고 곳곳에는 상점과 대장간으로 보이는 곳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성인 남자 20명이 손을 맞잡아야 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 나무’라고 불리는 이 나무의 기둥에 족장인 붉은 어금니를 비롯해 마을의 주술사, 그리고 여러 장로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목적지로 삼은 곳이 바로 이 하늘 나무였다.
철컹!
“인간이여, 무엇 때문에 하늘 나무를 오르려 하는가.”
북적거리는 수인족들을 피해 하늘 나무의 중간에 있는 거대한 구멍으로 가는 사다리에 오르려던 내 앞에 날카로운 도가 나타나 위협을 가했다. 방금 전 마을 입구에서와 같은 상황이 연출됐지만 마을 입구의 경비병과 하늘 나무를 지키는 경비병은 레벨 차이가 엄청났다.
겹겹이 강철 갑옷으로 무장한 마을 입구의 경비병과는 달리 달랑 가죽 옷 한 장을 입고 완만하게 휘어진 ‘유엽도(柳葉刀:버드나무 잎의 모양을 본 딴 도)’를 든 하늘 나무의 경비병은 최소 쓰리 스타였다. 거기다 차가운 한기마저 느껴지는 그들의 모습은 절로 데스 랜드 최고의 종족이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붉은 어금니를 만나러 왔습니다.”
“뭐라?”
태연한 내 말에 나를 향해 도를 겨누던 수인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인간이 자신들의 족장인 붉은 어금니를 만나겠다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눈빛을 주고받던 수인족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다른 종족과 전쟁 중이라 붉은 어금니를 만날 수 없다.”
‘전쟁 중이라고? 데스 랜드가?’
홈페이지에는 당연히 그런 정보가 나오지 않았기에 미간을 찌푸리자 나를 바라보던 경비병이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중요한 일이라면 나에게 말해라. 나중에라도 붉은 어금니를 만나 뵙고 말씀드리겠다. 이것은 웨어라이언 일족의 전사이자 붉은 어금니의 아들인 나, 카드리안이 맹세한다!”
‘카인의 아들이라고?’
카드리안의 말에 내 얼굴에는 황당함이 떠올랐다.
만약 이 경비병이 정말 붉은 어금니의 아들이라면 지금 고작 경비 따위나 서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 당장 붉은 어금니에게 가서 노란 어금니를 뽑은 거인의 후예가 다시 나타났다고 전해주십시오.”
“노란 어금니? 거인의 후예?”
“그냥 그렇게 전하면 될 것입니다.”
단호한 내 말에 카드리안이 자신의 동료를 향해 무언가 말하는가 싶더니 재빨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나무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우렁찬 소리와 함께 나무 구멍 속에서 거대한 검은 인영이 튀어나왔다.
쿠궁.
인영이 사다리를 타지 않고 바닥에 뛰어내리자 바닥이 울리며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우렁찬 울림에 버금가는 걸걸한 목소리가 하늘 나무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누군가! 대체 누가 노란 어금니를 뽑은 거인의 후예를 자청하는가!”
쩌렁쩌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을 발하는 카인이라는 이름의 수인족이었다.
온몸을 덮을 듯한 새하얀 장발과 백안, 간단하게 걸친 호피 무늬의 가죽 옷과 등에 걸친 거대한 도끼가 바로 그가 화이트 라이언 일족의 족장이자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인 붉은 어금니 카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크허어엉!”
우스스스.
갑작스런 흥분 때문인지 사방을 향해 외치는 카인의 입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대기를 울리는 엄청난 울음소리에 하늘 나무의 나뭇잎들이 몸을 떨었다.
“바로 나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멀리 떨어져 울음소리를 토하던 카인이 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쿠궁.
고개를 숙여 부리부리한 백안으로 내 몸 이곳저곳을 바라본 카인은 곧 실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진정 노란 어금니를 뽑은 거인의 후예인가?”
“그렇다.”
자존심이 강하면서도 남자다운 것을 좋아하는 카인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 반말을 하자 어느새 나무 구멍에서 내려와 카인의 옆에 서 있던 카드리안의 새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카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돌아가라. 그대는 아직 시험을 받을 자격이 되지 않는다. 거기다 지금은 전쟁 중, 그대 같은 약자에게 시험을 내려줄 만큼 한가하지 않다.”
내 눈이 꿈틀거리며 열기를 뿜어댔다. 어차피 예견했던 일, 생각한 대로 사건이 흘러가는 것에 만족하며 입을 열었다.
“약하다고? 내가? 붉은 어금니 카인이여! 그대의 새하얀 눈은 진정 내가 약하다고 보는 것인가!”
“크허어엉!”
절규하듯 외치는 내 말에 대답하듯, 카인이 울음을 토해내며 몸을 비틀었다. 나는 그런 카인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하늘 나무의 옆에 있는, 하늘 나무보다는 못하지만 성인 남자 5명 정도가 손을 맞잡아야 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 앞에 멈춰 섰다.
‘대지의 마나여, 내 동료의 몸에 깃들어 땅을 뒤흔드는 힘을 주어라, 스트랭스.’
스르릉. 철컹.
염환에게 받은 반지에 저장되어 있는, 시전자의 힘을 1.5배 상승 시키는 스트랭스(Strength) 마법을 시전하며 검을 뽑자 갑작스런 소란에 주변에 모여 있던 웨어라이언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 들고 경계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여행자여, 그 이상의 무례는 용서하지 않는다. 무기를 집어넣어라.”
조용한 말투로 경고하는 카드리안을 무시하고 나무를 향해 검을 날렸다.
후우웅. 퍼억.
후우웅. 퍼억.
후우웅. 퍼억.
우지끈.
“오오!”
“대단한 힘이다!”
단 3번의 검에 산산조각으로 부러져 바닥을 구르는 나무의 모습에 주변의 모여 있던 웨어라이언들은 물론이고 카인과 카드리안마저도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압.”
콰드득.
힘찬 기합과 함께 다시 허공으로 치솟았던 검이 나무의 뿌리를 부수며 바닥까지 파고들자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카인의 표정이 경악으로 변했다.
‘큭! 빌어먹을 카인 자식. 처음부터 허락을 해줬으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거 아니냐.’
스윽.
내가 조각으로 나뉜 나무뿌리에서 꺼내 올린 것은 내 팔뚝만 한 노란 이빨이었다.
“어떻게……!”
경악 섞인 카인의 목소리에 나는 투구 속에서 미소 지었다.
노란 어금니를 뽑은 거인, 그것은 바로 과거의 나 헤라클래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노란 어금니란 과거 웨어라이언 일족의 기습을 주도했던 웨어래트 일족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나온 이빨로 내가 스페셜 직업을 제의 받은 계기가 된 아이템이었다. 가장 강한 번식력을 가진 웨어래트족이 다시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카인은 이 ‘더러운 코의 증표’라는 아이템을 나와 함께 나무 밑에 묻으며 나에게 스페셜 직업을 제의했다.
그때 내가 스페셜 직업을 거절하며 훗날 노란 어금니를 뽑은 거인의 후예를 자청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에게 스페셜 직업으로 전직할 시험을 치를 기회를 주기로 약속했다.
“붉은 어금니 카인이여, 그대는 나에게 시험을 치를 기회를 주겠는가?”
“물론이다!”
한 손에는 거대한 검을, 또 한 손에는 노란 어금니를 든 내 물음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 카인이 나에게 다가와 내 손에 들린 노란 어금니를 받아 들고는 나머지 손으로 내 투구를 벗겨 바닥에 내던졌다.
철크렁.
바닥을 구르는 투구와 갑작스런 행동을 하는 카인,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카인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나를 바라보는 웨어라이언 일족들의 눈가에 호기심이 서렸다.
그것도 잠시, 호기심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콰직.
“커헉!”
내 목에 얼굴을 묻은 카인이 날카로운 이빨로 내 목을 물어뜯었다. 살이 뜯기고 힘줄이 뜯기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내 목의 살이 한 움큼 카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커헉. 컥……!”
콰직, 콰지직.
내 입에서 나오는 신음 소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내 목에 고개를 처박고 피를 빠는 카인의 모습에 카드리안이 카인을 말리기 위해 다가왔지만 곧 웨어라이언 일족의 장로들로 보이는 노인들에게 제지당했다.
스르릉. 스걱.
자신의 등에 달린 도끼를 내려 손목을 그은 카인이 거친 숨을 헐떡이는 내 입에 피가 철철 흐르는 손목을 가져다 대자 주변의 경악은 절정에 다다랐다.
꿀꺽꿀꺽.
현실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흡혈을, 그것도 수인족의 피를 빠는 내 입놀림에 맞춰 내 몸속의 심장 소리가 점차 빨라졌다.
스으으윽.
핏빛 머리카락과 검은 눈썹이 빠른 속도로 자라는가 싶더니 이내 쏙 빠져버렸고 그 자리를 핏빛 섞인 하얀 색 털이 채워나갔다.
“크으.”
털썩.
신음을 삼킨 카인이 내 입에서 손목을 떼어내자 카인의 손목에 의지하던 내 몸이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두근, 두근, 두근……!
“크으으으.”
이제는 점차 빨라지는 심장 소리와 어지러운 시야, 그리고 어린아이 수백 명이 달라붙어서 꼬집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 귀에 수백 명의 웨어라이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절로 기분 좋은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크허어어엉!”
“크허어엉!”
[종족이 ‘웨어라이언’으로 변화했습니다.]
[스페셜 직업, ‘웨어라이언 일족 족장’ 퀘스트가 발동했습니다. 자세한 조건은 붉은 어금니 카인에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데스 랜드를 공포에 떨게 하는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이라는 스페셜 직업.
고통에 몸을 떠는 내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 * *
칙칙한 갈색 나무껍질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동 안에 백발의 거한과 검은 머리의 노인, 붉은 머리의 노인, 푸른 머리의 여인과 노란 머리의 중년인이 자리를 지키고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검은 머리의 노인, 블랙 라이언 일족의 장로였다.
“생전 처음 보는 인간에게 손수 혈족(血族)계승을 해주신 것도 모자라 족장 후보에 올리겠다니요! 저는 반대입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떠는 블랙 라이언 족장의 말에 나머지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혈족계승이 어떤 것인가! 보통 인간이 웨어라이언이 되는 일은 마성의 숲에 존재하는 사자들에게 물려 변화하는 극악한 확률뿐이었다. 물론 장로급 이상의 웨어라이언이라면 혈족계승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거의 금기에 가까웠다.
마성의 숲에 물든 사자의 저주가 스며든 이빨로 웨어라이언이 된 자가 아닌 혈족계승자는 보통 웨어라이언의 5배가 넘는 강력한 능력을 갖게 된다. 그것을 두려워한 장로들은 그것을 금기로 정했다.
그런데 그것을 깬 것이다! 바로 자신들이 두려워하며, 또 존경하는 붉은 어금니가!
“조용하라.”
소란스러운 공동을 단 한 마디로 침묵시킨 백발의 거한, 붉은 어금니 카인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데스 랜드를 지배하며 마성의 숲을 누비는 웨어라이언 일족이다. 난 그중에서도 붉은 어금니라 불리는 너희들의 족장이다! 그런 내가 내 입으로 한 약속을 저버리라는 것인가! 진정 그것이 장로들이 원하는 것인가! 크허어엉!”
“우욱.”
“윽.”
공동을 울리는 카인의 울음에 몇 몇 장로들이 신음을 삼키며 귀를 막았다.
“고정하세요, 붉은 어금니.”
살벌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공동 안의 인물들 중 유일한 여자인 이십대 초반의 여인, 블루 라이언의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머지 장로들과 카인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붉은 어금니의 약속은 곧 이곳, 데스 랜드의 법. 저희 장로들은 그 법을 따를 뿐입니다.”
블루 라이언 장로의 말에 나머지 장로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어금니 혼자라면 모르지만 저 블루 라이언 일족의 장로가 나선 이상 허락해야 했다.
그녀는 장로들 중 가장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붉은 어금니 다음으로 강한 무력으로 ‘숲의 마녀’라 불리며 나머지 종족들은 물론 같은 웨어라이언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오로지 강한 힘만으로 서열을 정하는 웨어라이언 일족!
강한 힘 앞에서는 나이나 연륜 따위는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허락했으니 곧 장로들 모두가 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좋다. 크르르.”
블루 일족의 장로와 나머지 장로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목울림을 흘린 카인이 새하얀 장발을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 모든 혼란을 가져온 원흉인 인간이 기거하고 있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휴우.”
“휴.”
카인이 나간 공동 안에 나머지 장로들의 한숨이 맴돌았다.
붉은 어금니 카인, 그는 너무나 강력한 족장이었다.
한바탕 온몸을 헤집던 고통이 끝난 뒤 처음 본 내 몸은 더 이상 예전의 내 몸이 아니었다.
핏빛과 새하얀 빛이 적당히 섞인 머리와 눈썹, 그리고 눈동자의 변화는 기본이었고 온몸에 새로운 힘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새롭게 변했을 능력치를 기대하며 캐릭터 창을 부르자 ‘파밧’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상태를 알려주는 캐릭터 창이 앞에 나타났다.
이름: 블러드. 레벨: 99. 속성: 혈(血).
성향: 악(惡). 종족: 웨어라이언(Werelion)
명칭: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 후보생.
체력: 30000. 마력: 2000. 신성력: 0.
힘: 400. 민첩성: 50. 체력: 50.
지혜: 30. 신마력: 10. 행운: 10.
좋아진 것은 능력치만이 아니었다.
‘전사의 외침’을 제외하고는 스킬이 존재할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깜빡이는 스킬 창을 열자 처음 보는 2개의 스킬이 나를 맞이했다.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형상의 스킬과 두 발로 일어선 사자, 바로 웨어라이언의 모습이 새겨진 스킬이었다.
“스킬 설명.”
-제왕의 포효-
백수(百獸)의 제왕(帝王)이라는 사자의 포효를 본 딴 웨어라이언 일족만의 기술이다. 하루에 3회 가능.
마나 소모- 없음.
특수능력- 10m 안의 적의 능력 5% 하락.
3%의 확률로 10m 안의 적 이상상태에 빠트림.
10m 안의 아군 능력 5% 상승.
2%의 확률로 10m 안의 아군에게 스트랭스 효과.
-야수화(野獸化)-
수인족의 고유 능력인 야수화. 각자 일족에 맞는 모습으로 변한다. 웨어라이언의 경우 자신의 일족의 색을 띤 야수의 형태로 변한다. 혈족계승자의 경우 보통 웨어라이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얻게 된다. 하루 1회 사용 가능.
마나 소모- 2000.
조건- 시전자의 체력의 3분의 1이 남았을 때.
시전자의 감정 상태가 흥분 혹은 공포일 때.
특수능력- 제왕의 포효 시전 시, 3배의 위력 발휘.
능력치 20% 상승.
공격력 20% 상승.
방어력 20% 상승.
저주에 대한 내성 20% 상승.
독에 대한 내성 20% 상승.
항마력(抗魔力) 20% 상승.
힘 30 상승.
민첩성 10 상승.
“으음.”
보통 유저들이 봤다면 까무러칠 만한 능력치와 스킬에 내 입에서 만족스러운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보통 웨어라이언의 야수화라면 이 정도는 되지 않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혈족계승’이라는 것 때문인 것 같았다. 이 정도면 투 스타에 막 접어든 캐릭터 하나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캐릭터 창을 닫자 저 멀리서 거대한 하얀 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이 잘되었나 보군.’
카드리안에게 안내 받은 숙소의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앉아 있는 내 눈에 저 멀리서부터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카인의 모습이 점점 커졌다. 다른 일족들의 인사를 여유롭게 받아주는 카인의 모습을 보니 아마 장로들과의 일이 잘 된 것 같았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수인족과 이종족들은 언령(言靈)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자신들이 한 약속은 서로의 언령으로 묶여 맹약이 된다고 믿고 있어 만약 자신이 약속을 어길 경우 그 언령이 언령으로서의 힘을 잃어 자신들이 죽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유저들의 입장에서는 한심하게 보였지만 그렇게 믿도록 설정되어 있는 그들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약속이었다. 그 예로 엘프 NPC들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붉은 어금니를 뵙습니다.”
손질하던 검을 검갑에 넣은 뒤, 이제는 내 앞으로 다가온 붉은 어금니 카인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카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장로들에게 그대가 족장의 시험을 치를 권한을 따왔다.”
“감사합니다.”
“그대가 거인의 후예라면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겠지. 하지만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무엇입니까?”
공손한 내 태도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린 카인이 바위에 걸터앉아 말을 이었다.
“현재 족장 후보는 그대와 내 자식인 카드리안을 포함해서 단 2명뿐이다. 물론 숲의 마녀가 참가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녀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아마 너희 2명이 확실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카드리안에 비해 턱없이 약하다. 그것은 알고 있겠지?”
“예.”
“나는 강한 자가 내 다음의 족장이 되는 것을 원한다. 내 아들이라고 해서 카드리안을 잘 봐주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지.”
“알고 있습니다.”
카인의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아니, 만약 카드리안이 카인이 자신을 도와줄 거라 믿고 족장 시험을 받아들인 것이라면 카드리안은 아마 진작 카인의 손에 찢겨 죽었을 것이다.
“족장 선발은 정확히 20일 후. 과연 그대가 그 안에 카드리안보다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은가?”
카인의 말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20일 후라니, 현실 시간으로 따지자면 겨우 10일밖에 남지 않았다. 짧아도 너무 짧은 시간이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카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가 짧은 시간에 강해질 방법이 있다. 비단 그대뿐만이 아니라 카드리안에게도 해당되는 방법이라는 것이 문제지만…….”
말끝을 흐리던 카인이 나를 한번 보고는 입을 열었다.
“현재 데스 랜드의 상황은 거의 최악에 가깝다. 한때 우리의 지배를 받던 나머지 소수 일족들이 단합하여 독립을 했고 그건 웨어타이거 일족과 웨어울프 일족 또한 다를 바 없지. 갑작스런 소수 일족의 봉기에 우리 거대 일족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황스러움이 사라지기도 전에 소수 민족들은 웨어베어 일족을 중심으로 마성의 숲에 아지트를 만들어 하나로 뭉쳐 거대 일족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어린아이, 노인, 가릴 것 없이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것이 바로 현재 데스 랜드의 상황이다.”
“으음.”
전쟁 중이라는 카드리안의 말에 설마 했지만 상황이 이 정도였다니. 웨어라이언 일족 마을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 카인의 말이 거짓말 같았다.
“현재 우리 거대 일족들은 암묵적인 동맹을 맺고 소수 일족들의 사냥에 나섰다. 크르릉.”
분노가 가득 담긴 울음을 끝으로 말을 맺는 카인의 말에 내 머릿속에 카인이 했던 ‘짧은 시간에 강해질 기회’라는 것의 윤곽이 잡혔다.
‘설마…….’
“저보고 그 소수 일족들을 사냥하라는 것입니까?”
의문 반, 확신 반의 내 물음에 카인이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할 텐가?”
띠리링.
[특별 퀘스트가 발동되었습니다. ‘소수 일족 사냥’ 수락하시겠습니까?]
[‘웨어라이언 일족 족장’ 퀘스트의 부가 퀘스트로 인정되어 보너스 경험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수락.”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맑은 종소리와 함께 카인의 얼굴에도 시원한 웃음꽃이 피었다.
“크하하! 잘 생각했다. 특별히 필요한 장비는? 내가 한번 구해보지.”
“자유롭게 마을을 이동할 수 있는 증명패만 하나 있으면 됩니다.”
내 말에 카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는 이제 우리 새하얀 갈기 일족의 일원이자 웨어라이언 일족의 당당한 전사다! 그런 것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데스 랜드의 모든 일족들이 그대를 알아볼 것이다.”
“알겠습니다.”
복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족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성의 숲으로 몸을 날려 천천히 마을의 입구를 향해 움직이자 내 곁에서 알짱거리며 나를 구경하던 나머지 웨어라이언 일족들이 소란한 소리를 내며 나를 따라 움직였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미간이 구겨졌다.
‘빌어먹을…….’
현실에서도 지겹게 받아온 관심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현실 세계의 악의에 찬 관심이 아니라 순수한 관심이라는 점이랄까?
그래도 썩 좋지는 않았기에 발걸음에 막 박차를 가하려는 순간, 나를 따라 걷던 주변의 인파 속에서 검은색의 무언가가 튕겨 나와 내 갑옷에 부딪히고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악.”
수많은 인파에 휩쓸려 튕겨 나온 것은 바로 검은 머리의 어린 웨어라이언이었다. 이제 막 10살이나 되었을까? 블랙 라이언 일족인 듯,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
스윽.
“일어나라.”
웅성웅성.
어린아이가 우는 것은 질색이기에 잔뜩 구겨진 얼굴을 투구 속에 감추고 어린아이를 일으켜 세우자 주변의 웨어라이언들이 웅성거리며 놀람을 표했다. 아이 또한 나의 호의에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곧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하긴, 정통 일족이 아닌 혈족계승자가 자신들을 깔보지 않는 것이 신기하기도 할 것이다.
보통 인간이었다가 수인족이 되거나 아니면 혈족계승을 받아 수인족이 된 유저, 혹은 NPC들은 철저히 그들을 무시하고 배척했다.
솔직히 나 같은 인간을 제외하고는 어떤 인간이 반 강제적으로 평범한 삶을 버리고 수인족이 되었는데 그 원흉에게 친절하게 대하겠는가.
하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인간보다는 절대 배신하지 않는 NPC가 훨씬 더 좋았다. 그들은 오직 정해진 데이터로만 움직이며 배신을 모른다.
본래 데이터가 배신으로 지정된 NPC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런 캐릭터는 악역을 맡은 NPC밖에 없다고 했으니 적어도 과거의 나처럼 멍청하게 당할 리는 없었다.
내가 막 과거를 되씹으려는 순간, 아이가 사라진 인파 속에서 아이와 함께 아이보다 더 커다란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 내 앞에 멈춰 섰다.
“감사합니다. 론, 너도 아저씨한테 감사하다고 해야지! 웨어라이언 일족은 은혜를 잊지 않는단다.”
“가, 감사합니다!”
방금 전 내가 일으켜 세운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우람한 근육을 가진 블랙 라이언이 론이라 불리는 아이를 데리고 나와 고개를 숙이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 또한 고개를 숙이며 힘차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그러고는 다시 아버지의 커다란 등 뒤로 쏙 숨는 것이 절로 웃음을 흘리게 만들었다.
“…별로.”
요즘 현실의 아이들에게는 절대 볼 수 없는 순진함에 좋아진 기분을 감추며 고개를 숙이자 아이의 아버지와 아이가 환한 웃음을 보였다.
“자, 잠깐!”
“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갑작스런 내 부름에 막 인파 속으로 몸을 돌리려던 아이의 아버지와 아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 또한 갑작스런 충동으로 부른 것이기에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이 나와 두 부자(父子)를 휘감았다.
“마, 만약 아이가 다쳤으면 이것을…….”
더듬는 말투와 머뭇거리는 움직임, 누가 봤다면 바보로 봤을 법한 행동으로 무한의 주머니에서 꺼낸 상급 체력 회복 포션을 건네는 내 손이 세차게 떨렸다.
‘빌어먹을, 강철중! 갑자기 무슨 변덕이냐! 설마 저 아이의 순진한 행동에 감동이라도 한 거냐!’
‘단순히 데이터로 설정되어 있는 행동을 한 것뿐이다! 그것뿐이다!’
스스로 다짐하며 포션을 건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의 아버지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지나친 호의는 동정으로 보여 부담스럽습니다. 그건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도, 동정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론, 이만 가자!”
내 행동을 동정으로 오해한 아이의 아버지가 얼굴을 구기며 아이의 뒷목을 잡고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거짓말처럼 내 손의 떨림이 멈췄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실망감이 내 몸을 휘감았다. ‘대체 왜 실망하는 거냐! 내가 준 포션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으드득.
“제길……!”
내 입에서 흘러나온 서늘한 소리에 주변의 웨어라이언 일족이 움찔하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쨍그랑.
손에 들린 포션을 거칠게 내동댕이친 뒤 바로 몸을 날려 마을의 입구를 벗어나자 그나마 나를 따라다니던 웨어라이언들이 아쉬움을 토하며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사라졌다.
평소 같았으면 조용해졌다고 좋아했을 테지만 지금 내 기분은 최악에 가까웠다.
‘대체 왜……!’
가슴을 울리는 복잡한 감정을 애써 무시하고 내 가슴팍까지 자라난 기묘한 풀을 헤치며 숲에 들어서자 마을 주변과는 확연히 다른 음침한 한기가 갑옷을 뚫고 내 피부를 찌르르 울렸다.
크워어엉!
찌이익.
숲에 들어선 지 10초도 되지 않아 울려 퍼지는 처절한 비명 소리에 재빨리 검을 꺼내 자세를 잡자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세찬 바람이 한차례 나를 지나쳤다.
가장 자연에 가까운 존재들이 살고 있는 양육강식의 세계.
꿀꺽.
파티로 안전한 사냥을 해왔던 망자의 던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온몸이 절로 긴장으로 물들었다. 내가 여기서 다른 일족에게 죽는다면 그것은 비단 내 손해뿐만이 아니었다.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 후보가 다른 일족에게 죽임을 당하다니! 강함을 최고로 꼽는 웨어라이언 일족이라면 나에게 준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기본이고 심하면 일족에서 추방할 수도 있었다.
크르르르.
마성의 숲에 들어와 가장 먼저 날 맞이한 몬스터는 바로 거대한 사자였다. 보통 알고 있던 사자와는 크기부터가 다른, 거의 3m에 육박하는 몸집과 사방으로 뻗친 붉은 갈기를 가진 자이언트 라이언이 수풀에서 나타나 아무렇지 않게 내 옆을 지나쳐 반대편 수풀로 사라졌다.
사자와 연관성이 있는 웨어라이언 일족이라 그런지 숲의 외곽에서 몇 번 더 다른 종류의 사자들을 만났지만 그저 친근함을 표하며 몸을 부대낄 뿐, 공격하지는 않았다.
찌이익. 찍찍.
숲의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짙어지던 소음이 이제는 바로 옆에서 나는 것처럼 큰 소리로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스윽. 찌찍.
수풀로 몸을 위장하고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자 커다란 사자, 자이언트 라이언의 시체에 주둥이를 파묻고 게걸스럽게 식사를 하고 있는 3마리의 자이언트 래트가 보였다. 그마나 가죽이 약한 배에 구멍을 뚫어 그곳에 주둥이를 처박고 내장을 빨아먹는 2m에 달하는 거대한 쥐의 모습에 내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자이언트 래트라면 레벨 100대의 몬스터. 상대가 3마리라면 조금 문제겠지만 웨어라이언으로 종족이 바뀌며 증가한 능력치와 속된 물약 발, 아이템 발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후욱, 후욱.
찌익?
투구 속을 울리는 거친 숨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처박고 있던 3마리의 자이언트 래트 중 한 마리가 고개를 들어 살덩어리가 덕지덕지 붙은 붉은 코를 내 쪽으로 돌려 킁킁거렸다.
찌직.
‘후우…….’
그러기를 잠시,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식사에 열중하는 자이언트 래트의 모습에 낮은 한숨을 쉬었다.
웨어라이언으로 종족이 변하면서 능력이 대폭 상승했다 해도 자이언트 래트 3마리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쉽게 끝내려면 기습을 하는 수밖에 없었기에 점차 거리를 좁히는 내 발걸음이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사방이 몸을 은신할 수 있는 수풀로 이루어져 있어서 겨우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에서 은신을 하고 있음에도 자이언트 래트는 자이언트 라이언의 시체에서 고개를 들 줄 몰랐다. 거기에는 자이언트 라이언의 짙은 혈향이 자이언트 래트의 후각을 마비시킨 것도 한몫하고 있었다.
찌찍?
나란히 한 줄로 식사에 열중하는 자이언트 래트의 배후에서 막 검을 드는 순간 왼쪽에 있던 자이언트 래트가 고개를 돌려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는가 싶더니 거대한 몸을 돌려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제길!’
파바박. 콰드득.
찌…익!
잔뜩 팽창한 사자의 근육과 2m에 달하는 도약력이 실린 거대한 검이 내가 있는 수풀에 코를 막 박으려던 자이언트 래트의 머리를 부수고 축축한 땅을 헤집었다. 쥐 특유의 번식력의 영향으로 특히 체력이 높은 자이언트 래트지만 가장 중요한 급소인 머리가 부서졌기에 비명과 함께 가뜩이나 축축한 땅에 피와 뇌수를 한 바가지 쏟으며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찌이익. 찍!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머지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씹던 내장을 입에 그대로 물고 기다란 갈색 꼬리를 휘두르며 ‘취잇’ 하는 위협을 가하자 나머지 한 마리도 황급히 몸을 돌려 ‘췻췻’ 하며 위협을 가했다.
“와라, 쥐새끼.”
취이잇!
앞으로 내뻗은 검을 까닥거리자 조용히 나를 노려보던 자이언트 래트가 날카로운 울음을 토해내며 낮은 자세로 달려들었다.
“합.”
쉬식. 퍽.
찍!
힘찬 기합과 함께 내뻗은 날카로운 찌르기에 놈의 눈앞의 땅에 검이 꽂히자 겁 많기로 소문난 쥐답게 경기를 일으키며 황급히 발놀림을 멈췄다.
푸화악.
찌엑!
땅에 꽂힌 검을 그대로 비틀어 허공으로 들어올리자 넓은 검면에 걸렸던 대량의 흙이 검과 함께 튀어 올라 경기를 일으키는 자이언트 래트의 시야를 가렸다.
다시 한 번 주어진 기습의 타이밍에 들어올린 검을 거꾸로 돌리자 날카로운 검끝이 바닥을 향했다. 약간 불편한 자세로 검을 잡던 내 손이 그대로 자이언트 래트의 머리 위에 내리꽂혔다.
스걱.
키야악.
자이언트 래트의 목을 꿰뚫을 기세로 꽂힌 검이 막 얼굴을 돌리는 자이언트 래트의 코를 반쯤 가르고는 애꿎은 땅을 헤집었다. 다른 일족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후각과 번식력으로 마성의 숲을 누비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자이언트 래트라 그런지 겨우 코가 잘린 것임에도 미친 듯이 몸을 굴리며 자신의 동료까지 무참히 할퀴기 시작했다.
키야악! 콰직.
그렇게 한참을 발광하던 자이언트 래트가 진정했을 무렵, 다시 한 번 허공으로 치솟았던 검이 바닥에 꽂히며 정확히 자이언트 래트의 등에 박혀 척추를 부수고 내장을 헤집었다.
콰드득.
자이언트 래트의 등에 꽂은 검을 돌리자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검끝에 걸린 각종 장기가 찢기는 느낌이 생생히 전해졌다.
취아앗!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함께 만찬을 즐기던 동료들이 사라지자 마지막 남은 자이언트 래트가 거친 쇳소리를 내며, 짙은 노란색 내장이 묻은 검을 들어 자세를 잡는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 또한 멍청하게 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주변의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며 전사의 외침이 아닌 제왕의 포효를 토해냈다.
“크허어엉!”
찌에엑?
숲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우렁찬 포효에 달려들던 자이언트 래트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커다란 쇳소리를 토해내며 다시 달려들었다.
치잇.
카강.
무작정 달려들어 짧은 다리를 휘두르는 자이언트 래트의 공격에 검면을 경사지게 해 방어하자 거의 1m에 달하는 꼬리를 교묘하게 휘둘러 내 다리를 후려쳤다.
“크윽.”
찌에엑.
각반을 울리는 찌릿한 통증에 작은 신음을 흘리자 자이언트 래트가 그 틈을 이용해 내 목을 노리며 몸을 내던졌다.
찍!
검을 잡지 않은 손을 이용해 팔을 휘두르자 자이언트 래트가 내 팔에 맞아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틈을 놓칠 내가 아니었기에 뻗은 손을 재빨리 회수해 검을 잡은 뒤 낮은 자세에서 검을 돌려 위로 올려 치자 자이언트 래트의 얼굴 가죽과 근육이 갈라지며 피를 뿜어냈다.
“끝이다!”
찌익!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배를 까뒤집으며 발광을 하는 자이언트 래트의 배에 검을 박아 넣자 피 분수가 솟았다.
부우욱.
배에 박힌 검으로 자이언트 래트의 속을 한바탕 헤집고 나서야 몸을 떨던 자이언트 래트가 ‘췻췻’ 하는 소리와 함께 모래가 되며 몇 개의 은화와 수염으로 보이는 아이템을 드롭 했다.
“휴우…….”
낮은 한숨과 함께 자이언트 래트가 드롭 한 아이템을 수거한 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피에 젖어 그런 것인지 축축한 땅이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달콤한 포도 맛 포션을 마시고 빈 포션 병을 수거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자이언트 래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존재감이 내 뒤에서 느껴졌다.
치잇!
퍼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미연에 있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낮추며 검을 올려 쳤으나 가슴팍에서 강력한 통증이 느껴졌다. 신음을 토해내며 정신없이 바닥을 구르는 내 위로 차가운 한기가 담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자 새끼로군.”
강렬한 적의를 담고 있는 차가운 말투에 내 몸이 절로 반응했다.
바닥을 굴러 거리를 벌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잔뜩 들이마신 공기가 하나의 스킬이 되어 마성의 숲을 울렸다
“크어어어헝!”
“쮜에에엑!”
제왕의 포효가 터지기가 무섭게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고음에 제왕의 포효가 그 위력을 잃으며 점차 사그라졌다.
그와 동시에 내 입에서 거친 기침과 함께 한 덩어리의 검은 피가 튀어나왔다.
“크윽……!”
신음하는 내 모습에 내 앞의 정체불명의 인영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너의 몸에서 나는 사자의 지독한 노린내와 쇠 냄새, 그리고 아이들의 피 냄새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찌찍.”
자이언트 래트를 생각나게 하는 울음소리를 끝으로 말을 맺는 살기 어린 목소리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웨어래트!’
올라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앞을 바라보자 짙은 노란빛 머리를 가진 이십대 중반의 남자가 머리색과 같은 노란빛의 눈동자로 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를 바라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감히 우리 일족에게 피해를 주다니……!”
스르릉.
웨어래트의 허리에 달려 있던 장검이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빠져나와 나를 위협하듯 날을 번뜩였다. 전체적으로 가볍고 방어력이 좋다고 알려진 가죽 종류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는 웨어래트가 특유의 날렵한 움직임으로 거리를 좁혔다.
타다닥.
“크윽.”
나 또한 멍청하게 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재빠른 손놀림으로 포션을 꺼내 뚜껑을 따 입에 부으며 거리를 벌렸다. 포션의 효과로 방금 전의 내상으로 상당히 많이 깎였던 체력이 서서히 차올랐다.
쉬식.
깡!
입 안을 감도는 매운맛에 인상을 구기는 찰나 밝은 빛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이마의 강렬한 통증과 함께 쓰고 있던 투구가 맥없이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나마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기에 투구가 날아가는 데 그쳤지 내 반응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투구와 함께 내 머리가 쪼개졌을 터였다.
“미친……!”
“죽어라!”
쉬시식.
폭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스피드로 웨어래트의 손에 들린 검이 다시 빛을 번뜩였다. 가까스로 검면을 이용해 검을 흘리자 승리를 확신했던 웨어래트가 작은 감탄사를 뱉으며 거리를 벌렸다.
“무식하게 힘만 자랑하는 사자들 중에도 그런 기술을 쓸 줄 아는 자가 있었나?”
“죽어라!”
놈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어 제자리에서 도약해 거리를 좁히며 검을 커다란 X자로 휘두르자 나와 똑같은 방법으로 검을 흘리려던 웨어래트가 당황하며 검을 거둬들였다.
“크허어엉!”
“찌직!”
서로의 기량에 따라 달라지는 수인족들의 포효와는 달리 자신의 능력치를 향상시켜주는 전사의 외침에, 거둬들인 검을 회전시켜 나를 향해 뻗으려던 웨어래트가 움찔하며 빈틈을 만들었다.
“크허엉!”
이제는 완벽하게 수인족의 시스템이 적용되는 것인지 내 입에서 기합 대신 우렁찬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며 바람을 가르는 검의 소리를 대신했다.
서걱.
“찌이익!”
아름다운 은빛 궤적이 웨어래트의 옆구리를 훑자 가죽 갑옷이 웨어래트의 노란 살과 함께 쩍 갈라지며 피를 쏟아냈다.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피와 언뜻 보이는 내장에 안색을 굳히던 웨어래트가 나를 죽이고 나서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왼손으로 옆구리를 대충 막고는 나머지 한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카강!
옆구리의 상처 때문에 방금 전에 비해 확연히 느려진 검에 나 또한 검으로 검을 막으며 힘을 이용해 밀어붙였다. 웨어래트의 입에서 거친 신음 소리와 함께 옆구리의 상처에서 더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왔다.
“찌직.”
“크윽.”
그그극.
그렇게 한동안 힘 대결을 한 끝에 마침내 웨어래트의 검이 점차 기우는가 싶더니 그에 맞춰 웨어래트의 몸이 점차 뒤로 밀려났다. 질펀한 진흙이라 그런지 발째로 뒤로 밀려나는 웨어래트의 얼굴이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변했다.
“찌에엑!”
쨍그랑. 우당탕.
마침내 버티다 못한 웨어래트가 검을 떨어트리고 내 힘에 못 이겨 바닥을 구르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처음 나타났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상황에 희열을 느끼며 검을 들어 놈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끝이라 생각했던 놈의 몸이 처음 나타났을 때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속도로 몸을 일으켜 나와 거리를 벌렸다.
적당히 거리를 벌린 웨어래트가 미친 듯이 몸을 떨며 입을 열었다.
“찍, 찌직. 너, 너는 끝이다! 찌직.”
한눈에 보아도 정상이 아닌 웨어래트의 마지막 울음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웨어래트의 몸이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크게 출렁였다. 그리고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고음과 함께 웨어래트의 몸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찌이이익!”
고통스러운 비명과는 반대로 웨어래트의 옆구리에 난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고 그 자리에 흉측한 노란 털이 솟아올랐다. 비단 그곳뿐만이 아니라 웨어래트의 몸 전체에서 털이 솟아오르고 꽤나 미남형이었던 웨어래트의 얼굴이 길쭉하게 늘어나며 방금 전 내가 죽인 자이언트 래트와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야수화!’
웨어래트가 보인 괴상한 행동에 대한 답이 나왔을 때쯤, 마침내 웨어래트의 떨림이 멈추는가 싶더니 웨어래트의 노란 눈이 번뜩였다.
방금 전, 생기를 잃고 모든 것을 체념한 눈빛이 아니라 살기 어린 눈빛이었다. 그리고 검을 잡은 내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찌이익.”
근 2m에 달하는 키와 거대한 몸집, 그리고 그 몸에 맞춰 커진 갑옷조차 웨어래트의 몸에 꽉 끼어 상당히 징그러웠다. 방금까지 검을 들고 있던 손에는 검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녹색 손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게 야수화한 자신의 몸을 한참이나 감상하던 웨어래트가 고개를 돌려 검을 잡고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느릿한 움직임으로 거리를 좁혔다. 보통 야수화가 되면 스피드가 더 빨라지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웨어래트의 뚱뚱한 몸으로 보건대 스피드보다는 힘에 중점을 둔 야수화인 듯했다. 본래 나보다 레벨이 높은 웨어래트가 야수화했다면 막을 방법은 단 하나, 나 또한 야수화를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약간의 레벨 차이가 있겠지만 상대는 보통 웨어래트고 나는 붉은 어금니에게 직접 혈족계승을 받은 웨어라이언!
당연히 능력으로는 내가 위였다.
후우웅.
퍼억.
“크헉!”
약간은 거리가 있기에 안심하며 야수화하려던 내 다리를 2m에 가까운 웨어래트의 꼬리가 매서운 채찍으로 변해 후려쳤다. 자이언트 래트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강력한 일격에 내 무릎이 털썩 굽었다.
스으윽.
천천히 내 다리를 감는 굵다란 꼬리에 숨을 삼키며 재빨리 검을 들어 내려치려는 순간,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붕 떠올라 한참 뒤에 수풀에 처박혔다.
묵직한 갑옷과 땅이 부딪치며 낸 커다란 소리에 나무 위에 있던 새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윽, 제기랄!’
쿵쿵쿵!
“찌이익.”
커다란 땅울림과 함께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웨어래트가 커다란 울음을 토해내며 몸에 비해 긴 팔을 휘둘렀다. 간신히 몸을 굴려 피했기에 망정이지 돌을 부수며 30cm 넘게 땅을 헤집어놓는 웨어래트의 힘에 내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찌익!”
쿠궁.
이제는 본격적으로 나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는지 주변에 있는 작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 올린 웨어래트가 노란 이가 보이보록 웃으며 막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향해 나무를 휘둘렀다.
퍼억!
“컥!”
말이 작은 나무지 내 양팔로 잡아도 손이 닿지 못할 두께였기에 강력한 통증과 함께 다시 한 번 허공으로 날아오른 내 몸이 깊숙한 수풀에 처박혔다. 시야에 따라 어지럽게 흔들리는 체력 게이지는 3분의 1에 못 미치는 수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쿵쿵쿵!
“제기랄……!”
점차 가까워지는 땅울림에 욕설을 내뱉으며 포션을 꺼내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자 방금 전에 마셨던 매운맛 포션과 같은 것인지 코를 톡 쏘는 강렬한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인상을 절로 구겨지게 만드는 냄새에도 내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검에 손바닥을 긋자 상당한 피가 흘러 바닥을 적셨다.
“이크.”
후드득.
혹시라도 다른 곳에 튈까 손바닥에 고인 피와 함께 멀쩡한 손에 들린 포션을 사방으로 뿌리자 곧이어 매콤한 냄새와 함께 옅은 혈향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 내 코까지 얼얼하게 만드는 냄새에 만족하며 무거운 몸으로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서자 그제야 뚱뚱한 웨어래트가 숨을 헐떡이며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 바로 내 밑에 도착해 사방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키야약!”
망할 쥐새끼의 발광하는 모습에 터지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야수화 전의 웨어래트만 해도 보통 수인족들보다 몇 배는 뛰어난 후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 웨어래트가 야수화하면 후각 또한 대폭 상승할 것이 당연했다. 보통 사람의 몇 십 배의 후각을 가진 웨어래트가 내 코조차 얼얼하게 만드는 냄새에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사방으로 뿌린 피 때문에 얼얼한 코로는 나를 찾는 것은 고사하고 내 위치조차 잡아낼 수 없었다.
내 체력은 정확히 3분의 1을 넘지 못하는 상태.
야수화를 쓰기 위한 조건은 충족된 상태다.
“야수화.”
낮게 읊조리자 긴박한 상황에 두근거리던 내 심장이 몇 배의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크으……!”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리는 심장 소리에 바로 밑에 웨어래트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낮은 신음을 내뱉자 누군가가 내 얼굴을 잡고 힘껏 늘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갑작스레 시야가 넓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머리카락은 등을 뒤덮을 정도로 자라 손을 뒤로 뻗기만 해도 만질 수 있을 정도였다.
이내 입 안에 나란히 나열되어 있던 이빨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이는 느낌과 함께 입이 절로 벌어지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혀로 느껴지는 날카로운 감촉만 하더라도 보통 인간의 이빨이 아닌 날카로운 육식 동물의 이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드득. 우득.
내 몸을 구성하고 있던 뼈들이 수천 개로 나뉘는가 싶더니 방금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모습으로 변해 내 몸을 재구성했다. 근육 또한 백수의 제왕이라는 말이 어울리게 우람하게 변해 내 온몸을 뒤덮었다. 근육만 보자면 웨어베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거기다 갑작스레 높아진 시야는 내 몸이 커졌다는 것을 충분히 실감하게 해주었다.
우지직.
갑자기 늘어난 몸무게 때문에 이제껏 나를 지탱하던 나무줄기가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끝내 부러졌다.
우지끈! 쿠궁.
웨어래트에 뒤지지 않는 커다란 몸이 떨어지며 내는 커다란 소리에 코를 부여잡으며 나를 찾던 웨어래트가 몸을 돌려 나를 보고 노란 이를 드러내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내가 한 짓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커다란 울음을 토해내며 달려드는 웨어래트의 모습에 나 또한 손에 들린 검을 집어던지고는 마주 달려 나가 팔을 뻗으면서 다시 한 번 제왕의 포효를 토해냈다.
“크허어어엉!”
“찌에엑!”
이번에는 ‘제왕의 포효’가 제대로 먹혀 나를 향해 달려오던 웨어래트가 몸을 멈추고 미친 듯이 자기 배를 긁으며 경기를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을 중심으로 새하얀 기운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다시 내 몸으로 스며들어 새로운 힘으로 변했다.
“찌직.”
내 몸에 나타난 변화를 눈치 챈 웨어래트가 짧은 울음을 지르며 내 목을 움켜잡으려는 듯 양 손톱을 곧추세우며 손을 뻗었다. 고개를 살짝 젖히자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갈기 몇 가닥이 웨어래트의 손톱에 잘려 나갔다.
“죽어라! 크허엉!”
혈족계승자여서 그런지 짐승 같은 울음소리만을 내는 웨어래트와는 다르게 유창한 인간의 언어가 튀어나왔다. 발음이 조금 이상한 것이 문제였지만 지금 그런 것 따위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찌찍!”
“크허엉!”
우지끈.
쿠궁. 끼에엑.
츄앗.
거대한 두 수인족의 싸움에 주변의 나무들이 흉한 모습으로 뒤집혀 굉음을 토해내자 주변의 동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허어엉!”
“꾸르륵.”
제왕의 포효가 아닌 단순한 고함에, 나에게 양손을 잡힌 웨어래트가 일시적인 스턴에 걸린 듯 거품을 물며 경기를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 웨어래트의 손을 한쪽으로 흘리며 날카로운 손톱을 곧추세워 웨어래트의 가슴을 찌르자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내 손을 흥건히 적셨다.
“찌이익!”
손목까지 파고들어간 내 손이 주는 고통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웨어래트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나를 밀어내려고 털이 무성한 내 가슴에 손을 얹고 낑낑댔다.
하지만 본래 강력한 힘과 야수화가 되며 20% 상승한 신체 능력과 더불어 30이나 증가한 힘이 고작 웨어래트 따위에게 밀릴 리가 없었다.
쉬리릭. 꽈악.
“큭…….”
웨어래트는 다급함에 꼬리로 내 목을 휘감아 서서히 조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웨어래트의 반격에 나머지 손의 손가락을 모아 내 어깨쯤에 위치한 놈의 얼굴에 쑤셔 박자 ‘푸욱!’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노란 눈이 짓뭉개졌다.
“찌이익!”
“크윽.”
미친 듯이 발광하는 웨어래트를 밀쳐내며 황급히 거리를 벌리자 목을 조르던 웨어래트의 꼬리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쉬익, 쉬익…….”
쿠구궁.
이제 한계에 도달했는지 한쪽밖에 남지 않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웨어래트의 몸이 비틀대더니 차가운 바닥에 몸을 뉘었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내뱉으며 점차 거리를 좁히는 나를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웨어래트가 이내 눈을 감았다. 그런 웨어래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웨어래트의 입에서 마지막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찌익……!”
콰드득.
[레벨이 올랐습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곤죽이 되어 새하얀 뇌수를 쏟아내는 웨어래트를 뒤로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근처에 있는 호수로 다가가자 호수 주변에 있던 동물들이 내 모습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
“크크크.”
호수에 비치는 거대한 괴물의 모습에 내 입에서 자조 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충 봐도 2m를 가뿐히 넘는 거대한 키와 검은 갑옷에 둘러싸인 근육질의 몸, 홀로그램에서나 보던 사자의 형상을 가진 얼굴, 은빛에 가까운 새하얀 갈기, 뾰족하게 솟아난 어금니, 온몸을 가득 채우는 충만한 힘!
‘후회는 없다. 이 모든 것이 내 복수를 위해 얻은 것들이니까!’
“크허어어엉!”
다시 한 번 터진 제왕의 포효가 사냥의 시작을 알렸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