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챕터1 족장 시험 1
위이잉.
푸슉.
익숙하다 못해 친숙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내 머리를 옥죄이던 헬멧 안으로 시원한 공기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휴우…….”
낮은 한숨과 함께 심장에 붙은 벨크로를 떼고 장갑을 벗고 캡슐 안의 붉은 버튼을 누르자 다시 한 번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캡슐 문이 열리며 캡슐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후끈한 열기를 배출했다.
“현재 시간.”
[현재 시간은 오후 9시 37분입니다.]
“1번 정식 준비.”
[예.]
미리 주입한 영양제만으로 밥을 해결하며 3일 연속으로 게임을 했기에 어쩔 수 없이 12시간 수면을 취하러 게임에서 나왔다. 썩 좋지 않은 기분으로 창문을 열자 어두운 밤하늘이 나를 맞이했다.
잔뜩 낀 스모그 때문에 별이 보이기는커녕 칙칙한 빛을 발하는 하늘에 인상을 구기며 창문을 닫고 주방으로 가자 따끈한 김을 뿜어내는 구수한 된장찌개와 몇 가지 반찬, 그리고 푸짐한 밥이 나를 맞이했다.
“TV 재생. 판타즈마 월드 공식 채널로 이동.”
[예.]
파밧.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숟가락을 들어올리는 내 앞에 커다란 홀로그램이 생겨나며 판타즈마 월드 공식 채널을 밝혔다.
TV에서는 내가 처음 게임을 시작하기 전부터 시끄러웠던 무협 대륙의 업데이트에 대해 떠들고 있었는데 그 업데이트가 바로 오늘이라 그 덕에 서버가 24시간 동안 열리지 않겠다는 빌어먹을 내용을 알리고 있었다.
“제길.”
하루 빨리 족장이 되기 위한 레벨 업이 급한 나에게는 최악에 가까운 기사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무협 대륙의 보너스에 판타지 대륙의 유저들이 항의를 해서 몇 개의 무공과 3개의 유니크 아이템 말고도 일주일 동안 1.5배의 경험치 보너스를 준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0일이 지났군.’
내가 처음 데스 랜드에 가서 웨어라이언으로 종족 변화를 한 뒤 족장 퀘스트를 받은 것이 정확히 현실로는 10일, 게임 시간으로는 20일 전이었다.
한마디로 남은 시간 또한 10일이라는 소리였다.
지난 10일 동안 내 레벨은 거의 폭렙에 가까울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판타즈마 월드 캐릭터 정보.”
파밧.
이름: 블러드. 레벨: 178. 속성: 혈(血).
성향: 악(惡). 종족: 웨어라이언(Werelion)
명칭: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 후보생.
체력: 125000. 마력: 5000. 신성력: 0.
힘: 637. 민첩성: 50. 체력: 50.
지혜: 30. 신마력:10. 행운: 10.
캐릭터 창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거의 미친 듯이 사냥을 하며 올린 레벨이었다. 그 누가 10일 만에 78업이라는 엄청난 레벨 업을 하겠는가. 전에도 말했다시피 원 스타부터는 레벨이 잘 오르지 않기 때문에 나와 같은 레벨 업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노가다의 결과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할 성과를 음미하는 내 귀에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띠리링.
[카나리아 님께서 화상 전화를 신청하였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거절. 음성 전화로 전환.”
[음성 전화로 변경되었습니다.]
“왜 화상 전화를 받지 않는 거냐!”
내 수락이 끝나기가 무섭게 터져 나온 불만의 외침은 지겹도록 들어온 카나리아의 목소리였다.
카나리아는 내가 데스 랜드에서 사냥을 시작한 3일 뒤, 폭스와 함께 데스 랜드로 건너와 나와 함께 사냥을 한 뒤로 제법 친해졌는데, 망자의 던전에서 파티를 한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두 명과의 파티 사냥은 나에게 거의 2배에 가까운 경험치를 주었다.
그래도 그 둘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기에 가끔 음성 전화로 게임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정도였다.
카나리아는 실제로 직업 군인이라고 했는데 음성 전화를 한 결과, 현실의 성격 또한 게임 속의 성격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얼굴은 보기도 싫다는 거냐? 앙!”
“연락한 이유나 말해라.”
내가 만약 화상 전화를 수락하면 내 얼굴을 본 카나리아는 단번에 내 정체를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도 몇 개의 게임 채널에서 게임 속 내 얼굴을 올리며 사기 사건에 대해 떠들고 있으니 모르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내 싸늘한 말투에 잠시 신음을 흘리던 카나리아가 말을 이었다.
“네가 나가고 난 뒤, 나와 아우도 업데이트 때문에 게임을 나왔다. 한마디로 내일 밤 10시까지는 접속하지 못한다는 거지.”
“알고 있다.”
“그때까지 뭐 할 거냐?”
“뭐 하다니?”
의문 섞인 내 물음에 카나리아가 힘찬 목소리를 이었다.
“이따 저녁 11시에 아우와 만나서 한잔하기로 했는데 아우가 너도 한번 불러보라고 해서 이렇게 연락을…….”
“안 간다.”
“…….”
잠시 침묵을 지키던 카나리아가 곧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커다란 목소리를 토해냈다.
“야이 빌어먹을 자식아! 아우가 나오라면 나오는 것이지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음량 조절.”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점점 작아지는 카나리아의 목소리에 내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말을 해봐라! 이 빌어먹을 놈! 툭하면 멋있는 척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말이야, 이 자식아! 네놈이 무슨 영화 주인공이냐?”
“…카나리아.”
이내 점차 작아지던 카나리아의 목소리가 싸늘한 내 말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침묵했다.
다훈을 생각나게 만드는 카나리아의 반응에 내 입가에 걸린 웃음이 짙어졌다.
“그 성격으로 영창 안 간 것이 신기하다. 크큭!”
“뭐, 뭐야? 야이 빌어먹을 자식아……!”
“음성 전화 취소.”
파밧.
카나리아의 마지막 절규에 웃음을 흘리며 남은 밥을 먹자 허기진 배가 만족스럽게 차오르며 참았던 잠기운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자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판타즈마 월드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이번에 업데이트되는 3개의 유니크 아이템에 대해 검색.”
파르르륵.
수천 장의 책장이 한꺼번에 넘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홀로그램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곧 수만 개의 검색 결과를 뽑아냈다.
“추천을 가장 많이 받은 게시물 검색.”
파밧.
역시나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게시물은 운영자가 작성한 글이었다.
-에피소드3: 달의 나라(月國)-
작성자: 운영자
내용: 이번 에피소드 3에서 추가될 3개의 유니크 아이템에 관한 간단한 정보입니다.
1. 도검류: 블러드 문 소드.
2. 둔기류: 묠니르의 망치.
3. 스태프 류: 그랑데시아의 스태프.
운영자가 작성한 게시물은 말 그대로 ‘간단한’ 정보였다.
블러드 문 소드는 내가 가지고 있던 영광의 검과 같은 장검 종류의 아이템이었고 벼락의 신 토르가 만든 해머, 그리고 전설적인 NPC인 파이브 스타의 대마법사 그랑데시아의 이름을 딴 스태프가 하나. 이렇게 총 3가지 아이템이었다.
무엇 하나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이미지가 아닌 이름만 공개되었지만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대충 떠올랐다. 아마 이 3개의 아이템으로 루안 대륙은 한동안 전쟁에 휩싸일 것이다.
“휴우…….”
다 먹은 식기들을 처리하고 머리를 옥죄어 오는 두통에,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없이 침대에 몸을 눕히자 곧 참을 수 없이 잠이 쏟아졌다.
[마스터, 오늘이 계정 갱신일입니다. 오늘 12시가 지나면 벌금이 부과됩니다.]
“크윽.”
점차 무거워지던 눈이 미네르바의 싸늘한 말에 번뜩 뜨였다. 판타즈마 월드를 하기 위해서라면 필수인 갱신이 바로 오늘이었다니! 할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계정 갱신이란 게임 속의 모습을 현실의 모습과 최대한 일치하게 만드는 것으로 6개월에 한 번씩 하는 것이었다.
만약 정해진 기간 안에 갱신을 하지 않으면 하루에 1만원이라는 벌금과 함께 하루 동안 접속불가라는 페널티가 주어졌기에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었다.
‘크윽. 그 옷을 또 입어야 하다니…….’
“미네르바, 갱신 전용 옷 준비.”
[예.]
치이잉.
천장이 갈라지며 나타난 은색의 기계 팔이 건네는 검은색 옷을 받아들었다.
갱신을 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옷을 입어야 하는데 그 옷은 바로 몸의 굴곡을 가장 잘 보이게 하는 검은색 타이즈였다.
스윽.
몸을 압박하는 타이즈의 감촉에 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미네르바, 갱신.”
[예.]
치이잉.
이내 실내의 조명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붉은 빛이 내 몸을 한번 훑고는 사라졌다.
그와 함께 불이 켜지며 미네르바의 목소리가 들렸다.
[갱신을 완료했습니다.]
“갱신 파일 판타즈마 월드 본사에 전송. 양식은 그대로.”
위이잉.
띵동.
[파일 전송이 완료되었습니다.]
‘제길. 갱신 한번 하기 힘들군.’
휙.
귀찮은 갱신에 욕을 중얼거리며 타이즈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버리자 몸을 죄이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휴, 이제 정말 자볼까.’
“미네르바. 내일 알람 오후 9시 50분으로 설정.”
[예.]
깨우지 않으면 하루는 물론이고 이틀도 자는 내 고약한 잠버릇 때문에 알람을 맞추며 침대에 눕자 미네르바의 차가운 대답이 마치 자장가처럼 내 몸을 덮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띠리리링.
[마스터, 알람입니다! 마스터, 알람입니다! 진동 레벨 2로 시작하겠습니다.]
우우우웅.
덜컹덜컹!
미네르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덜컹거리는 침대에 인상을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마스터, 알람입니다! 진동 레벨 3으로…….]
“일어났다. 알람 취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덜컹거림을 멈추는 침대에서 내려와 침대 옆의 탁자 위에 있는 물을 마시자 상쾌한 기분이 남은 잠기운을 몰아냈다.
“휴우.”
낮게 한숨을 내쉬며 시계를 바라보니 시간은 9시 52분이었다. 이제 8분 후면 유니크 아이템 3개를 비롯해 무공서, 그리고 무협 대륙 등 모든 업데이트가 끝나는 것이다.
한 가지 캐릭터밖에 키울 수 없는 판타즈마 월드이니 루안 대륙의 많은 유저들이 캐릭터를 삭제하고 월국에서 시작할 수도 있었다.
‘내가 알 바 아니지.’
작은 웃음을 흘리며 탁자 위에 있는 영양제를 먹고 몸을 씻자 마침내 시계에 ‘10:00’가 떴다.
삑.
퓨슉.
대충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채 캡슐의 붉은 버튼을 누르자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캡슐 안의 공간이 나를 반겼다.
캡슐 안에 자리 잡은 헬멧과 벨크로, 그리고 장갑을 착용하고 작게 실행을 중얼거리자 곧 환한 빛이 내 몸을 덮치듯 세상을 가득 채웠다.
사아아아.
둥둥둥!
마치 거대한 모래성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판타즈마 월드 오프닝 특유의 북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지며 오랜 잠으로 풀어졌던 내 긴장을 빳빳하게 곧추세웠다.
이내 한차례 어둠이 휩쓸고 간 주위의 모습은 더 이상 칙칙하고 어두운 캡슐 안이 아닌 아름다운 숲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계정과 비밀 번호를 말해주십시오. 계정이 없으신 분은…….]
“악어는악어새. 새는악어새.”
띵.
[계정이 확인되었습니다. 지문 검사와 함께 홍채 검사를 하겠사오니 사용자께서는 약간의 충격에 대비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지이잉.
여인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눈을 현혹시키는 붉은 빛이 내 눈을 한 번 스쳐지나갔고 그와 동시에 따끔 하는 무언가가 장갑을 통해 내 열 손가락에 느껴졌다.
그것도 잠시, 이내 숲이 배경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밤하늘 위로 커다란 노란 색의 실선이 생겼다. 이내 노란 실선이 점차 그 크기를 넓혀가자 노란 선의 중앙에 자리 잡은 1%라는 숫자 또한 점차 그 수를 키웠다.
마침내 노란 실선이 커다란 보름달이 되고 숫자가 100%를 가리키자 ‘콰가강!’ 하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다시금 태고의 숲으로 모습이 바뀌며 내 앞에 커다란 알림창이 나타났다.
-에피소드3 : 달의 나라(月國)-
-루안 대륙에 퍼진 3가지의 유니크 아이템.-
이 3가지 아이템을 소유하는 자는 새로운 대륙의 주인으로 떠오를 수 있다!
첫 번째- 주인의 생명력을 담보로 검강을 만들어 주인을 피에 미친 마인(魔人)으로 만든다는 저주받은 마검(魔劍), ‘블러드 문 소드’.
두 번째- 다른 차원의 원석으로 다른 차원의 벼락의 신, 토르가 제련했다고 알려지는 망치, ‘묠니르의 망치’.
세 번째- 과거, ‘악령의 재앙’이라 불리던 300년 전에 활약하던 인간 최초의 파이브 스타 대마법사 그랑데시아가 쓰던 스태프, ‘그랑데시아 스태프’.
-어떠한 경로를 통해 루안 대륙으로 흘러들어 온 월국의 11가지 무공 비급.-
이 11가지 무공 중, 단 하나라도 배운 자가 있다면 그자는 이미 왕의 조건을 갖추었다!
초절정 무공서
-검존(劍尊) 백무극(白武極)의 백팔광은천검법(百八光銀天劍法).
사령마존(邪靈磨尊) 양유평(良誘枰)의 역천불살술법(逆天佛殺術法).
절정 무공서
-신수괴의(神手怪醫) 왕각(王角)의 대천대의법(大天大醫法).
파산도왕(破山刀王) 철두심(鐵頭深)의 대력파산도법(大力破山刀法).
유령음마(有靈音魔) 유혼금(有魂琴)의 천귀소소공(千鬼笑訴功).
독행혈랑(獨行血郞) 무명(無名)의 단명검법(斷命劍法).
일류 무공서
-녹림마왕(綠林魔王) 만금평(卍金平)의 삼살도법(三殺刀法).
일절신창(一絶神槍) 위지천(衛之天)의 위가십육섬(衛家十六閃).
부동살검(不動殺劍)의 삼무보(三無步).
사사요록(邪邪妖鹿) 적혼접(赤魂蝶)의 사림요록무(死林妖鹿舞).
소림소승(小林小僧) 일각(一角)의 백보신권(百步神拳).
“꿀꺽.”
이름만 들어도 가히 그 위력이 짐작되는 무공의 이름에 침이 절로 넘어갔다.
그 밑에 월국의 업데이트 내용이 더 있었지만 루안 대륙에서 게임을 하는 나에게는 필요 없었다.
‘그저 그런 무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군.’
내 앞쪽에는 이름만 들어도 대단할 것 같은 무공서들이 낡은 책의 이미지로 그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만약 이 중에 하나라도 검은 사자 길드에 들어간다면 내 복수는 그만큼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이 무공서들 중 하나가, 아니면 유니크 아이템이 나에게 온다면 그만큼 복수에 가까워진다는 말이 되었다.
어쨌든, 현재로서 복수에 가까워지는 최선의 행동은 바로 게임에 접속하는 것이다.
“접속.”
입을 열기가 무섭게 바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던 검은 가죽 갑옷의 인영이 나에게 다가왔다. 검은 가죽 갑옷은 검은 용병의 갑옷을 입고 다니며 짙은 쇠 냄새를 풀풀 풍겨 적을 유인하는 나를 위해 티나가 특별히 만들어준 갑옷이었다.
티나는 웨어라이언족의 장로인 블루 라이언 일족이다. 장로들 중에서는 가장 어리면서도 카인 다음으로 강한 그녀에게는 ‘숲의 마녀’라는,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별명이 있다.
그러나 폭스와 카나리아가 오기 전 웨어베어 2마리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내 앞에서 웨어베어 2마리를 순식간에 찢어 죽이는 그녀의 모습은 숲의 마녀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블랙 라이언의 가죽으로 만든 이 갑옷은 방어력과 내구력은 검은 용병의 갑옷을 웃돌 정도고 그 밖의 기능은 검은 용병의 갑옷을 능가했다.
사아아아.
둥둥둥둥.
또 다른 내가 내민 손을 맞잡자 밝은 빛과 함께 기묘한 음악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 * *
띠리링.
[폭스 님에게서 음성 메시지가 왔습니다.]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나를 반기는 맑은 알림음에 눈을 뜨자 한산한 호수의 모습이 나를 반겼다.
‘마지막 호수’라고도 불리는 이 호수는 말 그대로 마성의 숲에 있는 마지막 호수였다.
그 덕에 마성의 숲에 기거하는 많은 소수 일족들이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으로 모였기에 소수 일족 사냥 퀘스트를 받은 나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폭스: 블러드 님! 저희는 먼저 마을에 가 있겠습니다. 붉은 어금니가 블러드 님과 저희를 소집했더군요. 메시지를 받는 즉시 오세요!]
활발한 폭스의 목소리에 인상을 구기며 막 귀환 주문서를 찢으려는 순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덩치 큰 붉은색 자이언트 베어가 날 발견하고는 울음을 토해내며 앞발을 휘둘러 강한 풍압을 만들었다.
크허엉.
걸쭉한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오는 3m의 거대한 곰, 자이언트 베어의 모습에 손에 쥐었던 검을 바닥에 꽂으며 양팔을 내뻗자 내 가슴팍을 향해 박치기를 하려던 자이언트 베어의 머리가 내 손에 잡혔다.
크흐응!
야수화도 하지 않은 내가 자신을 힘으로 누르려는 것이 우스웠는지 거친 콧바람을 내뿜은 자이언트 베어가 성난 울음을 토해내며 네 발로 대지를 박찼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크헝?
야수화를 하지 않은 웨어베어와 대등한 내 힘 앞에 자이언트 베어의 짧은 발이 애꿎은 흙을 뿌렸다.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연신 헛발질을 해대는 자이언트 베어의 모습이 우스웠다.
빠악.
끄허엉.
쿠웅.
콧잔등을 찍는 강력한 팔꿈치 찍기에 거친 숨을 몰아쉬던 자이언트 베어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끄으응?
그것도 잠시, 이내 거친 울음을 토해내며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자이언트 베어가 양손으로 잡은 검을 최대한으로 비튼 나를 보고 의문 섞인 울음소리를 흘렸다.
그것이 자이언트 베어의 마지막 울음소리였다.
우지직.
텅!
거친 파육음과 함께 뜯긴 자이언트 베어의 머리가 호수를 적시는 붉은 피 분수에 맞춰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머리를 잃은 자이언트 베어의 몸 또한 몇 번 경련을 일으키고는 곧 모래가 되어 몇 개의 금화와 커다란 가죽을 남기며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운이 좋군.’
자이언트 베어가 드롭 한 커다란 가죽을 수거하는데 연신 웃음이 나왔다.
웨어라이언의 마을에 살면서 그들에게 신임을 얻기 위해 내 사냥에 방해되지 않는 한도에서 몇 가지 퀘스트를 받았는데 그중, 유독 해결하지 못한 것이 바로 자이언트 베어의 가죽을 가지고 오는 퀘스트였다.
다행히 기간 무제한 퀘스트였고 아직 퀘스트를 취소하지 않았기에 이 가죽을 가져간다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오랜만에 무척 즐거웠다. 역시 게임은 현실을 잊게 해주는 영약이라도 되는 듯, 거의 광증에 가까웠던 내 상태는 많이 괜찮아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무라사마나 월향과 관련된 것을 보면 눈을 뒤집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달려들지는 않을 정도였다.
찌이익.
가벼운 손놀림으로 귀환 주문서를 찢자 밝은 빛과 함께 발밑이 쑥 꺼지는 듯한 느낌이 내 몸을 휘감았다. 그것도 잠시, 이내 눈을 뜨자 활기찬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블러드 님.”
“예, 수고하십니다.”
고기를 한가득 들고 가는 사십대 중반 웨어라이언족의 인사에 고개를 꾸벅여 답례를 하자 중년 여인 또한 고개를 꾸벅이고는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나에게 친분을 표하는 몇 명의 웨어라이언 일족에게 인사를 하며 걸음을 옮기니 어느새 하늘 나무 근처의 있는 붉은색 나무 지붕 집 앞에 도착했다.
바로 나에게 자이언트 베어의 가죽을 요구한 NPC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쾅쾅.
“버본! 저 왔습니다.”
거칠게 나무문을 두드리며 외치자 문이 열리며 오십대 후반의 붉은 머리 거한의 얼굴을 비비며 나와 기지개를 폈다.
“블러드 아닌가? 아침부터 웬일이지?”
졸음이 가시지 않은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여는 버본의 모습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화를 내어 다된 밥에 코를 빠트릴 생각은 없었기에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입을 열었다
“자이언트 베어의 가죽을 가지고 왔습니다.”
“자이언트 베어의 가죽…? 아! 그래. 내가 자네에게 분명 그것을 부탁했지. 허허, 내가 나이가 들어서 가끔씩 깜빡한다네. 자, 집 안으로 들어오게.”
그는 반짝반짝 빛을 내는 자신의 대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집 안으로 이끌었다.
‘크윽.’
버본의 집 문턱을 넘어서기가 무섭게 코를 찌르는 강렬한 약품 냄새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버본은 오히려 그 냄새가 익숙한 듯, 기분 좋은 표정으로 주변에 있는 의자를 끌어 와 앉으며 나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가죽 세공사 버본.
이곳 마을의 웨어라이언들은 모두 버본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쇠를 다듬어 갑옷과 무기, 그리고 그 밖의 작품을 만드는 대장장이와는 달리 가죽을 다듬어 방어구나 장식품을 만드는 직업이 바로 가죽 세공사였는데 버본은 그중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가죽 세공사다.
“내가 이번에 새로운 망토를 만드는데 자이언트 베어의 가죽이 없어서 골치를 앓고 있었다네. 정말로 고맙구만. 내가 약속대로 자네에게도 내가 만든 망토를 하나 주겠네. 자, 어서 가죽을 주게.”
“여기 있습니다.”
스윽.
띠리링.
아이템 창에서 꺼낸 자이언트 베어의 가죽을 버본에게 건네주기가 무섭게 머릿속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퀘스트 ‘자이언트 베어의 가죽’을 완료하였습니다.]
[경험치 50000과 상급 해독 약초 5개, ‘학살자의 망토’를 취득하였습니다.]
“역시 블러드군! 아주 좋은 가죽이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이언트 베어의 가죽을 쓰다듬는 버본을 뒤로하고 아이템 창에 들어온 학살자의 망토라는 짙은 검정색 망토를 클릭하자 아이템 설명란이 나타났다.
-학살자의 망토(A급)-
수많은 동물들의 혈향과 원한이 짙게 스며든 가죽을 다듬은 뒤, 그것을 기워서 만든 망토. 웬만한 동물들이 아니면 감히 가까이 올 생각도 하지 못한다. 말 그대로 동물을 학살한 자에게 주어지는 증표. 학살자의 망토를 사용하는 여행자여, 밤을 조심해라. 동물들은 원한을 철저히 갚는 존재니까.
방어력- 45. 내구력- 85/85.
특수능력- 야수 계열 몬스터들에게 적대심 유발.
착용자보다 20 이하 야수 계열 몬스터에게
10% 추가 데미지.
착용자보다 20 이하 야수 계열 몬스터에게
방어력 5% 증가.
착용자보다 20 이상 야수 계열 몬스터에게
3% 추가 데미지.
착용자보다 20 이상 야수 계열 몬스터에게
방어력 2% 증가.
옵션으로만 보자면 거의 레어 급에 가까운 아이템이었다.
‘이런 아이템을 그런 허접한 퀘스트로 주다니…….’
절로 떠오르는 미소를 지우며 버본에게 인사를 한 뒤 집을 나서 학살자의 망토를 착용하자 내 발목까지 오는 망토가 순식간에 내 몸을 휘감았다.
검은 윤택을 내뿜는 고급스러운 가죽 망토에 만족하며 폭스와 카나리아, 그리고 카인을 비롯한 나머지 장로들이 있는 하늘 나무로 걸음을 옮겼다.
철컹.
“안녕하십니까.”
하늘 나무를 지키던 경비병들이 나를 보고는 검을 부딪치며 우렁찬 인사를 토해냈다.
보통 같은 웨어라이언 일족이라면 이런 행동은 하지 않겠지만 나는 카드리안과 같은 족장 후보생이었기에 나를 대하는 몇 몇 웨어라이언들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카드리안은 없군.’
도를 들고 하늘 나무를 지키던 카드리안의 부재에 고개를 갸웃하며 하늘 나무를 올라가자 구멍 속의 동공에 자리 잡은 여러 인영들이 나를 반겼다.
붉은 어금니 카인과 그의 아들이자 나의 라이벌인 카드리안, 그리고 티나를 비롯한 나머지 장로들과 폭스, 염환이었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인사 대신 나를 질책하는 카인에게 고개를 숙인 뒤 공동 안의 의자 중, 유일하게 비어 있는 의자에 앉자 카인이 고개를 돌려 좌중을 둘러보고는 커다란 주먹으로 탁자를 내려치며 시선을 모았다.
“오늘 이렇게 그대들을 부른 이유는 바로 족장 선발이 9일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대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
“예.”
나와 카드리안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 대답에 카인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대대로 우리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은 가장 강한 자가 되어왔다. 그건 전쟁 중인 지금도 예외일 수 없다. 그 점을 감안하여, 내가 족장 후보생들에게 주어진 과제를 바꾸도록 하겠다. 크허엉!”
우렁찬 울음소리로 끝을 맺는 카인의 말에 카드리안을 비롯한 장로들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카인을 바라봤다. 그건 숲의 마녀라 불리는 티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용하라. 크허어엉!”
다시 한 번 내지른 포효로 좌중을 침묵시킨 카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재 우리 거대 일족을 제외한 나머지 소수 일족들이 웨어베어 일족을 중심으로 뭉쳐 ‘소수 일족 연합’이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내가 내는 과제는 단 하나! 족장 시험이 끝나는 9일까지, 소수 일족 연합에 속한 일족 족장의 머리를 최대한 많이 가져와라! 최고 3명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그 밖의 인원은 내가 직접 척살한다! 이 과제는 나머지 다른 일족의 족장 후보생들에게도 공표되었으며 기간은 지금 이 순간부터 정확히 9일 후까지다!”
“예! 크허어엉.”
[‘웨어라이언 일족 족장’ 퀘스트의 마지막 장입니다. 앞으로 9일 동안 ‘소수 일족 연합’에 속한 소수 일족 우두머리를 죽이고 그 증거로 그들의 머리를 가지고 돌아오십시오. 경험치 1.5배, 아이템 드롭 확률 1.5배가 적용됩니다.]
카인의 말에 티나를 비롯한 나머지 장로들이 길게 울부짖으며 카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나와 카드리안의 얼굴은 창백히 굳었다. 본래 족장 퀘스트는 족장 후보생들끼리 밀림에 들어가서 서로 죽이는 결투를 통해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가 족장으로 선발되는 배틀 로얄 형식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바뀐 과제가 소수 일족 연합의 우두머리들을 죽이라는 거라니.
[폭스: 블러드 님, 이건 오히려 블러드 님에게 유리한 조건입니다.]
폭스의 귓속말에 나는 슬며시 폭스를 바라보았다.
[폭스: 블러드 님이 아무리 강해지셨다고 하더라도 최소 쓰리 스타인 카드리안에게는 무리였습니다. 그와 정면으로 싸우는 것보다는 이 과제가 승률이 높습니다.]
거의 확신하는 듯한 폭스의 말에 굳었던 내 얼굴이 풀리며 냉정함을 찾았다.
확실히 폭스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내가 9일 동안 아무리 레벨을 올린다고 하여도 투 스타 중반이 한계였다. 그런 내가 최소 쓰리 스타인 카드리안을 이길 리 없었다.
조용히 나를 바라보며 웃음을 흘리던 폭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간편한 복장과는 달리 눈과 머리 윗부분을 제외한 전신을 검은색 가죽 옷으로 감싼 폭스의 모습은 단순한 어쌔신(암살자)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나와 카나리아 그리고 폭스가 함께한 전투에서 보여줬던 폭스의 능력은 단순한 어쌔신의 그것이 아니었다.
섀도우 어쌔신.
말 그대로 ‘그림자 암살자’라는 스페셜 직업을 가지고 돌아온 폭스의 강함은 종족까지 변한 나와 거의 대등할 정도였다. 거기다 스페셜 스킬을 쓰지 않고도 웨어베어를 간단히 처리하는 그의 강함은 일종의 위기감까지 느끼게 할 정도였다.
‘그림자의 아버지가 그림자가 되어 돌아왔군.’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지우고, 몸 군데군데를 가린 새하얀 강철 갑옷을 입고 폭스의 옆에서 주위의 눈치를 보며 새하얀 강철 너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카나리아를 보았다.
단순한 무투가로 전직할 것이라 예상했던 카나리아 또한 내 예상을 깨고 몽크로 전직했다.
몽크는 초보자의 섬에 있던 존과 같은 신성 무투가로, 기공을 단련하여 신성 마법과 함께 사용하는 존재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검을 사용하지 않는 성기사라고 할까?
어쨌든 스페셜 직업을 가진 나와 폭스에 비해서는 조금 딸리는 저력이지만 카나리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내 퀘스트를 도와줄 3명 중에서 2명은 이미 확정된 셈이니 나머지 1명이 문제였다. 막 나머지 1명에 대해 생각하려는 내 귀로 낮은 울음소리와 함께 카인의 목소리가 꽂혔다.
“가거라! 자랑스러운 웨어라이언족의 족장이 될 전사들이여!”
“크허어엉!”
카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카드리안이 긴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하늘 나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제야 카인을 비롯한 장로들도 하늘 나무를 빠져나가 자신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휴우, 이제 우리만 남았네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입을 열던 폭스가 천상계의 장군을 연상시키는 카나리아와, 그런 카나리아와는 대조되는 악계의 장군을 연상 시키는 나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로써 2명은 확정된 건가요? 나머지 1명이 문제인데…….”
“염환을 부른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다훈을 부르겠다는 내 말에 조금이나마 판타즈마 월드가 흘러가는 것에 대해 공부한 카나리아가 함박웃음을 흘리며 동의했다.
포 스타의 다훈이라면 9일까지 갈 필요도 없이 5일 안에 족장들의 머리를 가져다줄 것이 분명했다. 폭염의 마도사는 그 정도 강함이 있으니까.
“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폭스가 나와 카나리아에게 찬물을 뿌리고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현재 마법사의 탑은 다크템플러 길드와 길드 전쟁 중입니다. 폭염의 마도사 님은 고사하고 원 스타의 마법사도 지원해드릴 수 없습니다.”
다크템플러라면 초보 유저들만을 노리는 것으로 유명한 악질 PK 길드였다. 한순간에 마법사가짱이얌의 생각을 알아채고 나는 작게 비웃었다.
내 얼굴에 맺히는 차가운 웃음을 본 폭스가 난처한 듯, 가죽 복면에 싸인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폭염의 마도사 님은 아니더라도 이 데스 랜드에도 폭염의 마도사 님과 비견할 만한 사람이 있잖습니까. 후훗, 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지요.”
의미심장한 폭스의 말에 내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 데스 랜드에서 다훈과 비견할 만한 사람이라면 각 일족들의 족장과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인 카인, 그리고…….
“티나?”
경악 섞인 내 말에 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숲의 마녀라 불리는 티나라면 충분히 블러드 님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도움뿐이겠는가. 블루 일족의 족장이자 다른 일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인 티나가 나를 도와주기만 한다면 내가 족장이 될 확률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했다.
장로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는 말도 없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과연 그녀가 할까?”
처음 이곳에 오자마자 티나에게 찝쩍대다 죽을 뻔한 적이 있는 카나리아가 아직도 그때의 공포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거야 블러드 님이 해결하셔야죠.”
무책임한 폭스의 말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폭스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제가 티나에 대해 조사한 것이 있습니다. 블러드 님이 미끼를 던져보시죠.”
“조사?”
“예. 후훗.”
폭스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흘렸다.
“티나가 어렸을 적, 티나가 유독 아끼던 티론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 동생이 인간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살해당한 이유는 바로 웨어라이언 일족의 피 때문이고요.”
내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웨어라이언 일족뿐만이 아니라 수인족들의 피는 연금술사들에게 고가에 팔리는 비약 중의 비약이었다. 피를 얻기 위해 그런 짓을 하는 일 따위는 검은 사자 길드에서도 일어나던 평범한 일 중의 하나였다.
“역겹군.”
“역겨워.”
거의 동시에 나와 같은 말을 내뱉은 카나리아가 나와 마찬가지로 구겨진 얼굴로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역시나 게임을 처음 접한 유저들이 보일 법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내가 역겹다고 느낀 것은 그런 인간들의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이기적인 인간들이야 어차피 깔리고 깔렸으니까.
내가 역겹다고 느낀 것은 그것을 미끼로 티나를 같은 편으로 끌어 들이라는 폭스의 조언이었다. 그렇다고 그 이상의 행동을 하거나 폭스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좋다, 티나가 기거하는 장소는?”
내가 수락한 것이 의외였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폭스가 씨익 닳고 닳은 미소를 흘렸다.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을 거꾸로 올라가시면 동굴이 나옵니다. 그곳에 혼자 살고 있다고 합니다.”
“폭스는 소수 일족 연합에 속한 부족들의 족장에 대한 정보를 모아라.”
휘익.
뭐라 말하려던 폭스에게 일방적인 명령을 한 뒤 거칠게 몸을 돌리자 학살자의 망토가 내 몸을 따라 거친 바람을 일으켰다.
철컹.
검을 부딪쳐서 인사하는 경비병을 뒤로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 티나가 살고 있는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강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았기에 10분 정도 걷자 티나가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작은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휘리릭.
“무슨 일이십니까?”
동굴의 근처에 다가가기가 무섭게 주변의 수풀 속에서 푸른 머리칼을 휘날리는 이십대 초반의 여인 2명이 튀어나와 나를 견제하며 물었다.
“티나를 만나러 왔다.”
족장 후보자가 된 순간부터 내 신분은 이미 장로들보다 위였기에 아무런 호칭 없이 티나의 이름을 말하자 여인의 고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블러드 님, 말을……!”
“들여보내라.”
여인의 말을 끊는 차가운 목소리에 뭔가 말하려던 여인이 동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다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방금 전의 목소리는 티나가 분명했다.
동굴의 주인인 티나가 허락했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동굴에 발을 들여놓자 내 발자국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동굴은 입구만큼이나 작은 크기였는데 동굴의 끝에는 푸른 잎사귀로 만든 침실과 벽의 한쪽을 가득 메운 무기, 그리고 그 무기의 주인인 티나가 자이언트 베어의 것으로 보이는 가죽 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한 푸른빛을 내는 기다란 머리칼, 머리칼과는 어울리지 않게 약간 그을린 피부, 먹이는 노리는 매와 같은 날카로운 눈과 앙 다문 입에서 그녀의 고집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다 여자치고는 큰 키에 빼곡히 자리 잡은 탄탄한 근육은 그녀가 ‘숲의 마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말해주고 있었다.
“블루 라이언 일족의 족장인 티나가 족장 후보를 뵙니다.”
털썩.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이며 자기소개를 한 티나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손을 뻗어 나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나온 티나의 물음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알면서 묻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인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 나에게 묻는 티나의 눈은 진심이었다.
“그대가 소수 일족 연합의 족장들을 처치하는 내 과제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거절합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거절하는 티나의 반응에 내 얼굴이 굳었다.
“무엇 때문이지? 붉은 어금니는 장로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붉은 어금니 때문이 아닙니다. 제 의지로 정한 일입니다.”
“의지라…….”
티나가 한 말을 되씹는 내 몸에서 일순 차가운 한기가 불꽃처럼 타올라 동굴을 가득 메웠다.
웨어라이언 일족이 원 스타가 되면 가장 먼저 배우는 패시브 스킬인 ‘살기’였다.
동굴을 가득 메우는 차가운 살기와 함께 내 몸에서 감히 범접하지 못할 기운이 폭사되어 긴장의 빛을 보이는 티나를 집어삼켰다.
“오만하구나, 숲의 마녀야! 나는 너의 주인이 될 자. 그런 내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냐! 크허어엉!”
작은 동굴이 떠나갈 정도로 메아리치는 내 울음소리에 잠시 움찔한 티나의 눈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그것도 잠시, 이내 다시금 차가운 눈빛을 되찾은 티나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훗날 나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자여, 지금 그대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에게 명령을 할 분은 오직 한 분, 붉은 어금니뿐이다! 크허어엉!”
나를 뛰어넘는 살기를 흘리는 티나의 포효에 내 체력이 일정량 깎이며 갑작스런 어지러움이 나를 덮쳤다.
‘크윽, 제길!’
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숨을 헐떡이는 나를 바라보던 티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를 향해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주인이 될 자격을 갖춘 자여, 조금 더 수련하기를…….”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하는가?”
멈칫.
스쳐가듯 울려 퍼진 내 말에 입구를 지나치던 티나의 신형이 우뚝 멈춰 섰다.
“지하에 잠들어 있는 티론의 영혼이 행복할 것이라 믿는가?”
“크르릉……!”
우우웅.
방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살기가 티나의 몸에서 폭사되자 벽에 걸린 무기들이 울음을 토해내며 티나와 공명했다. 이내 살기를 거두지 않은 채 몸을 돌린 티나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티론을……?”
“지금 이 상황에 만족하냐고 물었다. 지금 그대의 원수는 그대와 같은 하늘 아래에, 티론이 묻힌 땅 위에서 또 다른 일족의 동생을, 누이를, 부모의 피를 호시탐탐 노리며 침을 흘리고 있다!”
“크허어어엉!”
퍼억.
콰드득.
커다란 울음소리를 토해내던 티나의 몸이 사라졌다고 느낀 순간, 엄청난 힘이 내 목을 잡고 동굴의 벽까지 끌고 가 그대로 벽에 처박았다.
우드득.
“커헉!”
“더 이상 그 더러운 입에 티론의 이름을 담지 마라. 그대도 한때는 그 더러운 인간이었던 자.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라.”
털썩.
내 목을 잡은 손에 엄청난 힘을 가하며 한 자, 한 자 끊어 말한 티나가 손을 풀며 몸을 돌려 동굴의 입구로 가자 동굴을 가득 채우던 살기 또한 사라졌다.
‘제길,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단 말이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백 개의 묘책이 내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훑으며 지나가는 순간, 가장 명쾌한 묘책이 정해지기가 무섭게 내 입이 열리며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나 또한 소중한 사람을 잃고 이곳으로 왔다!”
멈칫.
절규에 가까운 내 외침에 동굴을 나서려던 티나가 다시 한 번 멈춰 섰다. 그 자리에서 멈춘 티나를 확인하기가 무섭게 내 입에서 처절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난 원래 크라센 제국의 작은 귀족이었다! 비록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농지의 평민들과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남자는 모두 죽었고 그나마 남은 여자들은 다른 귀족 집안에 하녀나 성노로 팔려갔다! 그건 나의 어머니와 동생 또한 마찬가지다!”
광기마저 섞인 내 절규에 티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모든 것은 우리 가문의 집사 때문이었다! 돈이 탐났던 집사는 우리보다 훨씬 강한 귀족 세력에 붙어 우리 가문을 모함했고 그 대가로 거금을 챙겨 도망쳤다. 돼지우리에 숨은 난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복수를 꿈꾸며 이곳 데스 랜드로 왔다! 난 나와 같이 복수로 타오르는 그대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나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마침내 몸을 돌린 티나가 힘겹게 말을 내뱉으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런 티나에게는 나를 향한 살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같은 종류의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연민마저 보였다.
티나가 내 거짓말에 걸려든 것은 의외였지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끌어나가야 했다.
“내 꿈이 겨우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으로 보이는가? 난 이곳 데스 랜드를 통일할 것이다. 그리고 대륙으로 뻗어나가 평화에 찌든 수인족들을 찾고 또 내 원수를 찾아 이 대륙의 모든 인간의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 크허어엉!”
우렁찬 포효를 끝으로 말을 맺는 내 모습에 티나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다가오던 걸음을 멈췄다.
내가 티나에게 한 모든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배신을 당했다는 것과 이곳, 데스 랜드를 통일하여 원수를 죽이기 위해 대륙으로 나갈 것이라는 점은 사실이니까.
“아…! 아……!”
자고로 같은 일을 당한 사람끼리는 마음이 맞는다고, 자신처럼 인간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고 복수하려 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묘한 신음을 흘리던 티나가 나에게 다가왔다.
털썩.
“티, 티나 님!”
동굴에서 일어난 엄청난 소란에 동굴의 입구에 서서 동굴 안을 경계하던 여인들이 갑작스레 나에게 무릎을 꿇는 티나의 행동에 깜짝 놀라 티나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주인이시여…! 그대의 복수에 저를 동참시켜주소서!”
아직 족장으로 선택되지 않았음에도 나를 주인이라 부르며 내 발등에 잎을 맞추는 티나의 행동에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곧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숲의 마녀 티나가 가디언으로 종속되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티나가 가디언으로 종속되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가디언’을 클릭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주인이시여……!”
가디언.
가디언이란 유저와 함께 파티를 이뤄 사냥을 하거나 유저를 방어하거나 혹은 다른 도움을 주는 NPC들을 말하는데, 특별히 유저가 원하지 않아도 유저와 NPC 사이의 친밀도가 높거나 어떠한 특별한 감정이 100%로 차오르면 저절로 종속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유저의 수락이 있어야 종속이 되는 것이지만 스스로 종속된 가디언은 다른 가디언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
“크큭, 크하하. 크하하핫!”
나와 같은 꿈을 부르짖는 티나의 이마에 키스를 하여 붉은색 소용돌이 모양의 ‘종속의 인(印)’을 남긴 내 입에서 참을 수 없는 희열의 광소가 터져 나왔다.
‘기다려라, 무라사마! 월향! 복수는 멀지 않았다!’
“크크, 크하하하!”
굵다란 나무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작은 집.
명목상 폭스가 기거하는 곳인 그 집 안에는 나를 제외한 3명의 인영이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3명은 폭스와 카나리아 그리고 나의 가디언이 된 티나였다.
처음 내가 티나를 이끌고 돌아왔을 때 폭스는 그저 약간 놀란 표정을 보였을 뿐,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로 나와 티나를 환영했다.
카나리아만이 온순해진 티나의 태도에 불안해하면서도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힐끗힐끗 티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다행히 새기는 즉시 사라지는 종족의 인의 특성 상, 그 누구도 티나가 내 가디언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에 읽었던 무협지에서 ‘실력의 30%를 숨기라’는 어느 악당의 대사에 크게 공감했던 난 폭스와 카나리아에게는 그저 티론의 복수를 조건으로 나와 티나가 잠시 손을 잡은 것으로 해두었다.
물론 티나에게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나를 주인으로 대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기에 걱정은 없었다.
“폭스, 소수 일족 연합의 족장들의 정보를 말해봐라.”
소수 일족 연합의 족장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라고 한 지 1시간도 되지 않았음에도 뻔뻔스럽게 정보를 요구하는 나를 향해 눈웃음을 흘린 폭스가 내 옆에 앉아 있는 티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일단 제 정보를 듣기 전에 예전부터 이곳에 거주하셨던 티나 님에게 먼저 듣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능글능글한 폭스의 모습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티나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뜨고는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내가 아는 소수 일족의 족장은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인 둔카뿐이다. 힘으로는 붉은 어금니와 대등할 정도라고 알려져 있지만 웨어베어 일족 특유의 아둔한 머리 때문에 연패를 당하는 능력 없는 족장이다. 나머지 소수 일족은 말 그대로 소수 일족이기에 신경을 쓰지 않아 모른다.”
재빨리 말을 마친 티나가 다시 눈을 감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자 티나의 말을 듣고 있던 폭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쳐 자신에게 시선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소수 일족 연합은 총 4개의 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수 일족 연합의 실질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웨어베어 일족 족장에 대한 정보는 그것이 다입니다. 그리고 웨어카우 일족의 족장인 투탄은 투 스타 상급 정도로 커다란 망치를 무기로 사용하며 주특기는 커다란 뿔을 이용한 돌격입니다.”
웨어카우 일족은 말 그대로 소와 관련된 수인족으로 야수화하면 미노타우르스와 같은 모습이지만, 미노타우르스보다는 크기가 훨씬 작고 힘도 약해 그저 그런 수인족의 하나로 취급당하는 일족이다.
“그 다음은 웨어와일드보어(Were-wild boar)족의 족장인 크란입니다. 레벨은 투탄보다 약간 낮은 정도로 무력보다는 웨어와일드보어 일족 특유의 주술을 사용하는 주술사입니다. 소수 일족 연합에 속한 일족 중, 가장 약한 힘과 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은 멧돼지와 관련된 수인족으로 무력보다는 주술을 행사하는 주술사가 많은 일족이었다. 그 덕에 오직 육체의 강함만을 최고로 꼽는 수인족들 사이에서는 배척을 받았고 자연히 가장 약한 세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능글능글한 목소리로 폭스가 작은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웨어래트가 있으며 현재 족장은… 블러드 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후훗.”
폭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 몸에서 감출 수 없는 살기가 폭사되어 작은 방을 가득 메웠다.
티나에게 보여줬던 살기와는 차원이 다른 뜨거운 살기에 티나가 눈을 뜨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 뜨거운 살기와는 달리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내 얼굴을 보고는 표정을 풀며 긴장된 시선을 던졌다.
“그래, 그 자식이 여기 있다는 말이지…….”
살기 어린 내 말에 연신 웃음을 흘리던 폭스가 웃음을 멈추고는 말을 이었다.
“예. 검은 사자 길드의 간부이며 현재 검은 사자 9단의 단주인 해골, 그가 바로 현재 웨어래트 일족의 족장입니다.”
“크크. 크크큭!”
내 몸을 타고 흐르는 참을 수 없는 쾌락이 마침내 커다란 웃음이 되어 살기와 함께 어우러졌다.
해골의 별명이 들쥐인 이유는 바로 해골이 쥐와 관련된 웨어래트 일족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정말 다급할 때가 아니면 야수화하지 않아서 나와 몇 명의 간부들을 빼고는 모두 해골의 행동이 쥐새끼 같이 약삭빠르고 재수 없어서 별명이 들쥐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망할 해골 자식이 바로 이 섬에 있다니! 그것도 웨어래트 일족의 족장으로!
해골 또한 내가 목표로 삼고 있는 스페셜 직업인 ‘족장’의 칭호를 얻었겠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선착장에서 당한 치욕의 패배만이 내 뇌리를 가득 채울 뿐이었다.
그건 폭스 또한 마찬가지인지 능글맞은 눈웃음 속에서 숨길 수 없는 승부욕이 빛을 번뜩이며 기회를 넘보고 있었다.
“스페셜 직업을 얻은 저와 형님 그리고 티나 님과 블러드 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일단 웨어래트 일족은 가장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하지. 그럼 처음 사냥감으로는 누가 가장 적당하지?”
참을 수 없는 기대감에 몸을 떨며 묻는 나를 바라본 폭스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의 족장인 크란입니다.”
‘역시 내 생각과 같군.’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폭스 또한 나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약한 것은 아예 상대도 해주지 않은 것이 수인족이다. 거기다 유저보다는 NPC들이 거의 압도적으로 많은 족장 후보생들은 가장 약한 웨어와일드보어보다는 웨어카우를 노릴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웨어래트 일족의 족장인 해골이나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인 둔카가 공격당할 위험이 있었지만 걱정은 없었다. 해골이야 위기가 닥치면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가는 잔머리가 있으니 절대 죽을 리 없었고 둔카 또한 우둔하기는 하지만 명색이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이다. 그렇게 쉽게 당할 리 없었다.
“좋아, 바로 사냥에 들어간다. 9일 동안은 마을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 모두 각자 필요한 물건을 챙겨서 정확히 10분 후 마을 입구에 모인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티나를 제외한 2명이 장비를 챙기기 위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직 티나만이 남아 나를 바라보며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티나, 너 또한 기거하는 곳으로 가서 필요한 물품을 챙겨 내가 말한 곳으로 와라.”
“예, 마스터!”
힘찬 대답과 함께 티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몸을 맡겼다.
“후우, 가디언 상태 창.”
촤르륵.
-블러드의 가디언-
이름: 티나. 레벨: 329. 속성: 숲(林).
성향: 극악(極惡). 종족: 웨어라이언(Werelion).
명칭: 숲의 마녀.
체력: 305000. 마력: 18000. 신성력: 0.
힘: 600. 민첩성: 1480. 체력: 40.
지혜: 50. 신마력: 30. 행운: 20.
주 무기: 단창(短槍).
주 스킬: 토네이도 스피어, 제후(帝后)의 포효.
힘이 나와 거의 비슷하면서도 엄청난 수치를 자랑하는 민첩성이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 능력이라면 나와 합공을 한다는 가정 하에 해골을 제압할 능력은 충분히 있었다.
거기다 족장에 오른 자가 다른 일족의 손에 죽으면 일족에서 추방을 당하는 것이 수인족의 전통이기에 나와 티나의 손에 죽임을 당한 해골은 자연히 일족에서 추방당할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내 예상이지만 나는 승리를 확신했다.
스르륵.
내게 필요한 아이템은 모두 무한의 주머니 안에 있었기에 여유롭게 마을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학살자의 망토가 나를 따라 출렁였다.
나를 중심으로 어느새 몰려 든 웨어라이언 일족의 주민들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혹은 내 몸을 쓰다듬으며 모두 응원의 인사를 전했다.
모두 지난 10일 동안 마을에서 기거하면서 사냥과 함께 쌓아온 친분도가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 중에는 나 말고 카드리안을 지지하는 자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지지’가 아니라 ‘절대적 복종’이니까.
“아, 아저씨!”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에게 한 명, 한 명 인사를 해가며 이동하는 내 앞으로 아직 앳된 목소리를 가진 작은 인영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커다란 눈동자. 바로 과거에 나와 부딪혔던 적이 있던 꼬마아이였다.
저번에는 미처 보지 못한 ‘론’이라는 이름이 꼬마의 머리 위에서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붉은 어금니 카인의 빛에 결코 처지지 않는 형형한 빛에 웃고 있던 내 얼굴이 굳었다.
‘이 아이가 내 게임 속 인생에 카인보다 더 커다란 영향을 끼칠 아이라고? 이 작은 아이가?’
“이, 이거 받으세요.”
혼란스러운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까스로 인파를 뚫고 내 앞으로 다가온 론이 수줍은 미소를 흘리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론이 건넨 것은 작은 나무패였다. 내 손바닥의 반을 채우는 조그만 크기에 형형색색의 물감이 칠해진 나무패는 충분히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판타즈마 월드 랭킹 1위까지 오른 나조차 처음 보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보며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인 론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블러드 님이 과제를 성공하시라고 기도하면서 직접 깎은 부적이에요. 비록 볼품없지만 받아주세요. 그럼 이만…….”
타다닥.
자신이 할 말만 냉큼 하고 사라지는 론의 발걸음 소리가 다시 인파의 소란 속에 묻히기가 무섭게 맑은 종소리가 내 머릿속으로 울려 퍼졌다.
띠리링.
[NPC 론에게 ‘행운의 실마리’를 받으셨습니다.]
-행운의 실마리-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가 자신의 손이 베이는 것도 참아가며 밤낮으로 고생해 만든 행운의 나무패.
내구력- 무한/무한
특수능력- 몬스터 사냥 시, 경험치 1.5배 증가.
독에 중독될 확률 10% 감소.
3% 확률로 3배의 데미지.
3% 확률로 한 번의 공격 무시.
“하, 하하…….”
한낱 어린아이가 줬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아이템에 웃음을 흘리다가 명패 종류로 분류되어 있는 행운의 실마리를 품에 넣고 마을 입구로 몸을 날렸다.
“블러드 님, 조금 늦으셨네요.”
마을 입구를 표시하는 기둥에 기대 날카롭게 날이 선 단검을 만지작거리던 폭스가 단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눈을 감고 있던 티나가 눈을 떠 나에게만 보일 정도로 작은 목례를 했다.
카나리아 또한 티나에게 주던 시선을 거둬 나를 바라보며 전의 그 호탕한 웃음과 과장된 몸짓으로 의욕을 과시했다.
“크큭.”
이 정도 파티라면 카인을 비롯한 거대 일족들의 수장이나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 혹은 한 일족 전체를 상대하지 않는 이상 이 마성의 숲에서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내 입에서 터진 만족스러운 미소에 폭스가 전의 그 살랑거리는 미소를 흘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럼 퀘스트의 주인공이신 블러드 님이 파티를 만드시죠?”
“파티 생성.”
띠리링.
[파티를 생성하시겠습니까?]
“그래.”
반투명한 홀로그램이 눈앞에 떠올랐다.
[파티의 이름을 정해주십시오.]
“1111.”
띠리링.
[파티가 생성되었습니다.]
“참 성의 없는 이름이네요.”
폭스가 얼굴을 구기며 말하자 카나리아 또한 동감한다는 듯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가디언인 티나는 자동으로 파티에 속했기에 티나를 제외한 나머지 2명에게 파티 신청을 하자 곧이어 파티를 수락했다는 알림음과 함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파티명: 1111 파티장: 블러드 파티 방식: 자동 분배.>
가장 기본적인 파티 방식이기에 따로 수정할 필요 없이 몸을 돌려 입구를 나서자 폭스와 카나리아, 티나가 파티의 리더인 내 뒤를 따라왔다.
물론 마성의 숲에 들어서면 누구보다 숲을 잘 알고 있는 티나에게 길 안내를 맡겨야 하겠지만 숲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가 이 파티의 리더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가장 앞에서 갈 필요가 있었다.
그 이유를 아는지 본래 길 안내와 함께 적의 존재를 살피는 역할을 맡은 폭스조차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라 걸었다.
이내 점차 짙어지는 마기에 발걸음을 멈추자 내 뒤를 따라 걷던 일행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멈추는 거지?”
나를 향해 묻는 카나리아를 무시하고 몸을 돌려 카나리아의 옆에 서자 그런 나를 보며 의아해 하던 일행이 멀지 않은 곳에서 특유의 진득한 마기를 풀풀 날리는 마성의 숲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부터는 티나가 길 안내를 할 차례였다.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스스슥.
작게 고개를 끄덕인 티나의 몸이 마치 한 마리 뱀처럼 최소한의 소리를 내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마성의 숲을 향해 움직였다. 그 뒤를 따라 나와 카나리아, 폭스 또한 조심스레 발을 움직였다.
사삭.
거의 무음에 가까운 폭스와는 달리 나와 카나리아가 움직일 때마다 나는 커다란 소음에 일행을 안내하던 티나가 움찔거리며 화들짝 놀랐다.
그것이 계속 반복되자 그나마 마스터인 내가 그랬기에 딱히 뭐라 하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숲을 누비는 티나의 몸놀림이 절로 짜증스러워졌다.
슥.
거침없이 숲을 누비던 티나가 돌연 걸음을 멈추며 손을 들자 티나의 뒤를 따르던 폭스가 나와 카나리아를 향해 멈추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이고는 티나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풀이 크게 흔들렸다. 티나의 입에서 날카로운 경고가 터져 나왔다.
“피해요!”
크워어엉.
퍼벅.
우렁찬 외침과 함께 방금 전까지 티나가 있던 땅을 후려친 자이언트 베어가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우렁찬 울음을 토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 맞춰 뒤에 있던 수풀에서 작은 소음과 함께 4마리의 자이언트 베어가 어슬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크워엉!
크르르.
가장 먼저 티나를 공격한 붉은 자이언트 베어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지 한쪽 눈에 있는 검상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울부짖자 어슬렁거리던 자이언트 베어들이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록 수준은 낮았지만 파티가 생성된 후 첫 전투였다.
“크하압!”
콰강.
힘찬 기합과 함께 몸을 날린 카나리아가 내뻗은 주먹과 우두머리 자이언트 베어의 발이 부딪치며 굉음을 토해냈다.
그 굉음을 시작으로 일행을 향해 달려들던 자이언트 베어들이 각자 짝을 맞춰 흩어졌다. 야수 계열 몬스터 중에서는 가장 낮은 지능을 가진 자이언트 베어가 했다고는 믿기지 않은 행동이었다.
당황할 틈 없이 파공음과 함께 내 어깨를 노리는 앞발에 숨을 삼키며 몸을 굴리자 ‘후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자이언트 베어가 휘두른 강한 바람에 내 머리칼이 마구 휘날렸다.
“간다.”
가가가각.
쿠허엉.
다른 일행들은 모두 한 마리를 상대하는데 나에게만 두 마리가 붙었다. 바닥에 끌리는 검을 그대로 긁으며 자이언트 베어들을 향해 달려들자 살기를 흘리며 어슬렁거리던 자이언트 베어들이 울부짖으며 무작위로 발을 휘둘렀다.
“흐읍!”
스으응.
제법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칼을 날릴 정도로 강한 풍압에 기합을 삼키며 검을 들자 그에 못지않은 강한 풍압이 자이언트 베어의 붉은 털을 휘날리게 만들었다.
이내 오른손에 든 검을 돌려 왼손으로 고쳐 잡고 온 힘을 다해 검을 올려 치자 작은 소음과 함께 3개의 발이 바닥에 떨어졌다.
투둑.
보통 사람이라면 한 손은 고사하고 두 손으로도 자유롭게 다루지 못하는 거인의 단검을 한 손으로 다루는 내 힘에 뿌듯해 하는 것도 잠시, 이내 내 피부를 찌르는 살기에 황급히 고개를 숙이자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발이 없으면 입이라는 거냐!”
휘잉? 퍽!
끄어엉.
내 머리칼을 적시는 진득한 액체에 인상을 구기며 날카로운 쇠가 박힌 건틀렛으로 머리 바로 위에서 입을 들썩이는 놈의 턱을 올려 치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발을 휘두르려던 놈이 날카로운 쇠에 박혀 피가 철철 흐르는 턱을 마구 문지르며 몸을 뒤뚱거렸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죽어라!”
후우우웅? 퍼억.
쿠궁.
성인 남자의 허리 굵기만 한 목의 3분의 2를 넘게 파고든 검의 위력에 피 분수를 뿜어댄 자이언트 베어가 신음을 흘리며 고꾸라져 덩치에 어울리는 굉음을 토해냈다.
크와아아!
동료가 죽었기 때문일까.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앞다리를 혀로 할짝대던 자이언트 베어가 커다란 울음을 터트리며 뒷다리를 휘둘렀다. 주변의 수풀마저 들썩이게 하는 강한 바람을 일으키는 뒷다리를 견제하며 거리를 벌리자 자이언트 베어 또한 움직임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티나는 이미 손에 든 1m 길이의 짙은 검은색 단창으로 자신에게 달려든 자이언트 베어의 심장을 꿰뚫은 지가 오래였고 가장 먼저 뛰쳐나간 카나리아 또한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자이언트 베어의 몸을 밟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이 자잘한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를 뒤집어쓴 자이언트 베어를 유린하는 폭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날 듯했다.
크허어엉!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내 행동에 자이언트 베어가 내가 겁을 먹은 줄 알았는지 커다란 괴성을 지르며 뒷다리를 이용해 뒤뚱뒤뚱 걸어왔다. 어떻게 보면 우스운 그 모습에 이를 깨물며 검에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새로운 힘이 내 몸 곳곳을 타고 흘러 근육에 넘쳐흐르는 힘을 제공했다.
“크하앗!”
타앗.
힘찬 기합을 지르며 땅을 박차 올라 뒤로 젖혔던 검을 앞으로 찌르자 허공에 뜬 나를 찢어 죽일 기세로 벌린 자이언트 베어의 입에 꽂혔다.
푸욱.
끄르르르.
귀까지 박혀버린 검 때문에 걸레처럼 변한 혀를 덜렁거리며 신음 비슷한 비명을 토해내던 자이언트 베어가 자신의 입에 꽂힌 검과 그 검을 잡은 나를 떨어트리기 위해 미친 듯이 고개를 휘둘렀다.
꾸욱.
애초부터 순수한 힘으로는 자이언트 베어를 능가하는 나였기에 검이 빠질 리가 없었다. 오히려 놈이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검이 깊게 박혀 들어갔다.
크릉…….
쿵.
마침내 커다란 굉음을 내며 쓰러지는 거대한 자이언트 베어와 함께 바닥에 착지한 뒤, 입에 꽂힌 검을 뽑자 날카로운 검을 따라 진득한 붉은 피가 딸려 나왔다.
“가지.”
피가 덕지덕지 묻은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내가 차갑게 말하자 그런 나를 보며 질렸다는 듯이 카나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티나 님, 와일드보어 일족이 사는 곳에 도착하려면 어느 정도 걸리죠?”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폭스가 묻자 손에 들린 단창을 다듬은 티나가 답했다.
“내 걸음으로는 12시간. 너희들의 발걸음으로는 하루가 걸린다. 이것도 가장 안전한 지름길로 계산한 것이다.”
“흐음.”
간결한 티나의 말에 폭스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복면 속의 턱을 쓰다듬었다.
“블러드 님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9일입니다. 그리고 웨어라이언 일족을 제외한 나머지 거대 일족들의 족장 후보들까지 계산하면 블러드 님이 모아야 할 최소한의 머리 수는 2개입니다. 와일드보어 일족의 족장 것과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 것. 이 두 가지이지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소 6시간 안에 와일드보어 일족이 사는 지역에 도착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조사한 와일드보어 족장의 패턴을 파악해서 사냥을 하고 잽싸게 도망쳐 나오는 것이죠. 족장이 끌고 다니는 호위들만 잘 처리하면 문제는 없습니다.”
자신이 조사한 패턴을 운운하는 폭스의 말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조사는 무슨. 다 엄청난 돈을 들여 정보 길드에서 구입한 것이겠지.’
이 사실은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조사하라고 한 지 1시간도 안 되어 티나에 버금갈 정도로 자세하게 조사하겠는가.
폭스는 이 데스 랜드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현실에서나 게임에서나 돈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니까.
“6시간 안이라니, 그건 불가능하다.”
“아니, 할 수 있다.”
단번에 말을 자르는 나를 바라보며 뭔가 말하려던 티나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고는 나를 바라보며 이어질 내 말을 기다렸다.
“지름길 따위는 필요 없다. 지금 이곳을 중심으로 와일드보어의 인영이 있는 곳까지 직선으로 뚫고 간다. 선두는 폭스가 선다!”
“그래야 블러드 님이죠! 하하핫.”
“크하하!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짓을 하는구만!”
무모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내 작전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는 카나리아와 폭스를 바라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흘린 티나가 곧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펴고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