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2 족장 시험 2 (10/34)

챕터2 족장 시험 2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검은 동공.

그 동공 안에는 수십, 수백에 이르는 커다란 홀로그램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화면은 작게는 어느 동물의 모습부터 크게는 어느 한 파티가 거대한 몬스터를 사냥하는 모습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거대한 동공이 바로 판타즈마 월드 지역 ‘Z-15~Z-50’을 관리하는 10명의 운영자들에게 주어진 그들만이 공간이다.

지금 그곳에는 오직 2명의 운영자만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천급 운영자인 시리우스고 또 다른 한 명은 붉은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이십대 초반의 남자였다. 남자 또한 시리우스와 마찬가지인 천급 운영자로 게임 상에서는 현무라는 아이디로 통하고 있다.

지금 그 둘이 주시하는 모니터는 바로 데스 랜드의 웨어라이언 일족 마을, 그것도 론이 막 블러드에게 행운의 실마리라는 아이템을 건네주는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타다닥.

“어때, 이제 만족해?”

“물론. 충분히 만족해. 크큭.”

신경질적으로 홀로그램 자판기를 두드리는 현무의 머리를 쓰다듬은 시리우스가 곧 손을 뻗어 싸늘한 표정을 흘리고 있는 모니터 속의 블러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런 친구의 모습을 보던 현무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었다.

“대체 저 자식이 어떤 인간이기에 너 정도 되는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는 거냐? 랭킹 1위였던 무지막지한 천재라고 운영팀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던 놈 맞지? 한때는 정식 직원으로 고용한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그건 그렇고 S급 퀘스트 하나 주려면 내가 보고서를 얼마나 써야 되는 줄 알아? 장장 20장이다! 너 같은 부르주아 놈들이야 이 일을 심심풀이로 하는 거지만 나 같은 서민은 다 먹고살기 위해 하는 짓이라고.”

“…….”

“야!”

신경질적인 현무의 부름에 멍한 표정으로 블러드를 바라보던 시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진실이 알려면 한 가지가 꼭 필요해.”

“그게 뭔데?”

“네 목숨.”

썩은 시체의 그것마냥 생기 없는 눈빛으로 이죽거리는 시리우스의 모습에 현무는 몸에 돋아난 소름을 쓰다듬었다. 그런 현무를 바라보던 시리우스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농담이다. 크큭! 그냥 모르는 게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라. 알아봤자 좋을 것 없으니까.”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시리우스의 모습에 커피 타임기를 누르려던 현무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너 설마…….”

“그만.”

싸늘한 말투로 현무의 말을 끊은 시리우스가 몸을 돌려 출구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계속 지켜보면서 뭔가 특별한 일이 있으면 나한테 바로 연락 줘.”

“이 자식아! 내가 친구지 부하냐! 거기다 보너스 수당은 쥐꼬리만큼도 안 주면서 어떻게 팀장보다 더 부려먹어! 아버지가 회사 높은 사람이면 다냐!”

“아버지한테 운영 4과에 일 잘하는 사람 하나 있다고 내가 잘 말해주마.”

“맡겨만 주십시오, 도련님!”

“하핫, 수고해라.”

치잉.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인사를 하는 친구를 뒤로하고 낮은 웃음을 흘린 시리우스가 은백색의 복도를 지나쳐 어느 방 앞에 멈춰 섰다.

<드래곤 룸>

휘황찬란한 금빛 명패가 붙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독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술 냄새에 시리우스가 바닥에 있는 술병을 지나쳐 거대한 침대 위에서 커다란 홀로그램을 주시하는 한 무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좀 치우면서 살아라. 돼지가 보면 형님이라고 하겠다.”

“노노, 돼지라니! 우리는 드래곤, 용이라고! 고귀한 혈통!”

미국계 혼혈로 보이는 금발 머리에 선글라스를 쓴 가무잡잡한 피부의 사내가 유쾌하게 지껄이자 그 뒤를 이어 몇 명의 젊은이들의 술에 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홀로그램에서는 알아듣지 못할 노래가 흘러나오고 아름다운 여자가 다 벗은 몸으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젊은이들 중에는 여자도 몇 명 보였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헤이, 철중! 게임 안 해?”

어느 사내의 말에 철중이라 불린 남자, 시리우스가 침대 옆에 있는 탁자 위에서 자그마한 고글을 들어 작게 흔들었다. 시리우스의 이름 또한 블러드와 같은 철중이었다. 성(姓)까지 ‘강’으로 완벽히 일치하는 이름이었다.

“조금 뒤에 접속할 거다.”

놀랍게도 철중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주)한신이 개발한 최신 게임기기로, 커다란 캡슐이 아니라 들고 다니면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만든 초소형 게임 고글이었다.

아직 발명 단계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미 5개월 전에 완성된 기계다.

다만 그 가격이 엄청나 웬만한 사람들은 꿈도 못 꿀 정도였다. 물론 사고 싶어도 유통이 되지 않았지만. 하지만 이 드래곤 룸에 있는 젊은이들은 놀랍게도 모두 이 고글을 가지고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꾸민 고글을 들고 장난을 치던 젊은이들이 하나 둘 고글을 끼고 게임에 접속했다.

모두 접속하고 나자 남은 사람은 가무잡잡한 피부의 혼혈인과 철중 그리고 붉은 머리의 여인 한 명뿐이었다.

“헤이, 철중! 그 자식은 지금 뭐 하고 있어?”

혼혈인의 말에 조용히 방을 치우던 철중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떠올랐다.

“우리 룰을 잊었나? 그 누구도 제물의 정보를 알지 못한다. 알고 싶으면 게임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알아내라. 규칙을 어길 시 드래곤 클럽에서 영구 제명. 알고 있겠지?”

서슬 퍼런 철중의 말에 혼혈인이 어깨를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오케이, 오케이. 퍽킹 룰. 알겠어. 너 잘났다.”

반짝거리는 보석이 박힌 금반지로 도배한 가운데손가락을 철중을 향해 들어 보인 혼혈인이 곧 옆에 굴러다니는 술병의 뚜껑을 따 한 모금 들이켠 뒤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는 바로 고글을 써 게임에 접속했다.

본래 조금의 알코올이라도 감지되면 게임 접속이 불가능했지만 이 고글은 쾌락을 즐기는 이들에게 맞게 개조되어 알코올은 물론 마약을 복용해도 접속할 수 있었다.

이내 철중마저도 고글을 쓰고 게임에 접속하려 하자 혼자 남은 여자가 철중을 향해 쿠션을 던지며 투덜거렸다.

“또 다 게임하러 가는 거야? 그게 대체 뭐가 재미있다고…….”

“너도 한번 해보는 게 좋을 거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들의 아버님들이 만든 돈벌이 기구니까 말이야. 크크큭.”

낮은 웃음을 흘리는 철중을 향해 묘한 표정을 흘리던 여자가 탁자 위에 있는 고글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나도 시작해볼까? 흐음, 처음부터 약한 건 싫은데…….”

“접속하자마자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라. 초보 섬에서 아는 사람을 보내서 너를 도와줄 테니까.”

“헤헤, 난 철중 오빠가 직접 도와주면 좋겠는데?”

“미안하지만 나도 바쁜 일이 있어서 말이다. 내가 직접 도와주는 건 대륙으로 넘어온 뒤다.”

“칫, 알겠어. 그런데 오빠 아이디가 뭐야?”

술을 너무 마셔 떨리는 손으로 고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여인을 향해 비릿한 비웃음을 흘린 철중이 고글을 쓰며 입을 열었다.

“무라사마.”

이곳은 드래곤 룸.

쾌락에 찌른 젊은이들이 ‘유희’라는 수단을 만들어낸 마지막 비상구.

이곳에서만큼은 그들은 판타지 소설 속에 나오는, 인간을 조롱하며 유희를 즐기는 드래곤이었다.

* * *

“헉, 헉… 크합!”

콰드득.

꿰에에엑.

거친 숨을 내뱉으며 무서운 기세로 뻗은 카나리아의 주먹이 바닥에 쓰러져 숨을 몰아쉬는 자이언트 와일드보어의 두개골을 바스러트렸다.

단 한 번의 주먹질로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자이언트 와일드보어를 노려보던 카나리아가 기다란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닥은 방금 전에 죽은 자이언트 와일드보어와 그 밖에 우리가 처리한 자이언트 와일드보어의 피로 질퍽하게 젖어 있었지만 일행의 누구도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하하, 비록 1시간 정도 늦기는 했지만 정말 도착했네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어가는 폭스의 모습에 티나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방금까지 우리가 지나온 길을 바라봤다.

우리가 가로질러 온 숲은 ‘황폐하다’는 말이 어울리게 변해 있었다.

곳곳에 흩뿌려진 몬스터의 피와 부러진 나무들 그리고 바닥을 구르는 돌덩이와 전투의 잔해들은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비록 목표로 삼았던 6시간에서 1시간이 넘은 7시간이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엄청난 기록이었다. 더군다나 멍청한 카나리아가 이번 기회에 티나에게 잘 보일 심산으로 더욱 날뛰어줬기 때문에 그나마 7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일행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쉰 티나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터는 웨어와일드보어가 나오는 영역입니다. 이제까지의 그런 무식한 방법은 금지하겠습니다.”

의기양양하던 카나리아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티나, 지금 우리의 위치에서 와일드보어 일족의 족장이 사는 곳까지의 거리는?”

“길어도 1시간을 넘지 않습니다.”

“주술사라는 와일드보어 일족의 특성 상, 그들은 뭉쳐 살지 않고 10명 내지 20명 단위로 동굴에서 기거합니다. 물론 그 무리에는 전사도 5명 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폭스가 재차 말을 이었다.

“와일드보어 일족의 족장인 크란은 인적이 드문 ‘침묵의 폭포’ 옆에 위치한 동굴에서 자신의 친위대 10명과 함께 기거하고 있습니다. 말이 친위대지 실상은 보통보다 약간 뛰어난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투 스타 초급이나 높아봤자 투 스타 중급 정도일 것이다. 웨어와일드보어 족장인 크란조차 알려진 바로는 투 스타 상급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른 일족의 후보생들과 카드리안을 생각하면 하루 빨리 크란을 처리하고 다음 족장에게 가야 한다.

“크란에게로 간다. 폭스, 길 안내를 해라.”

“예에.”

폭스 또한 시간을 끌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조용히 단검을 꺼내 양손에 잡고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다.

이내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폭스의 몸이 아래부터 시작해 점차 그림자에게 먹혀 들어가는가 싶더니 곧이어 완벽한 그림자 인간이 되어 숲을 누볐다.

스페셜 클래스인 섀도우 어쌔신의 기술 ‘섀도우 아머’.

일명 그림자 갑옷이라 불리는 이 스킬은 방어력을 높여줌과 동시에 저절로 은신 효과까지 내는 스킬로 보통 은신 스킬을 가진 어쌔신들은 꿈에서나 그리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이 스킬의 효과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악.

툭.

폭스가 지나친 수풀이 마치 날카로운 칼에 잘린 듯 차례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바로 섀도우 아머가 가진 능력 중 하나였다. 약간의 방어력과 동시에 약간의 공격력을 가진 그림자 갑옷. 그것이 바로 섀도우 아머였다.

스슥.

나와 카나리아의 속도에 맞춰 숲을 누비던 폭스가 돌연 멈춰 서서 손을 들어 정지 표시를 보냈다.

그는 앞을 가린 거대한 수풀의 일부분을 살짝 들춰보더니 손을 끄덕여 일행을 불렀다.

부스럭.

폭스가 들춘 수풀의 틈새로 보이는 것은 자그마한 폭포였다. 아무리 작은 폭포라지만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야 정상인데 이 폭포는 그저 시냇물이 흐르는 정도의 소리밖에 나지 않아 이 폭포가 어째서 ‘침묵의 폭포’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소리 없이 쏟아지는 폭포의 옆에는 성인 남자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높이의 입구가 있었는데 크란이 기거하는 곳인지 갈색 머리털을 가진 장한 둘이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한 명의 허리춤에는 커다란 몽둥이가 걸려 있고 다른 한 명의 허리에는 작달막한 완드가 걸려 있어 그 장한의 직업이 바로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의 주 병력인 주술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폭스: 어떻게 처리할까요?]

파티원들에게만 들리는 귓속말에 내 미간이 구겨졌다.

여기서 뛰쳐나가 저 둘을 처리하는 것은 쉽다. 상대는 수인족 중에서도 가장 수준이 낮은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이 아닌가.

주술사가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우리 파티에는 티나가 있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블러드: 일단 이쪽으로 유인한다.]

[폭스: 후훗. 네.]

묘한 웃음을 흘린 폭스가 돌연 손으로 수풀을 잡고 거칠게 흔들기를 반복하자 경계를 서던 두 명 중, 주술사가 아닌 쪽이 허리춤에 달린 몽둥이를 손에 쥐고 서서히 다가왔다.

동물의 소행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서서히 다가오는 장한이나 그 장한을 지켜보는 주술사 또한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부스럭.

“제기랄, 잡아서 간식으로 먹어치워…….”

휘리릭.

곰보자국이 선명한 코를 벌렁거리며 수풀 속으로 상체를 밀어 넣은 장한의 몸이 폭스의 손에서 나온 검은색 줄에 묶여 수풀 속으로 끌려왔다.

“스, 습… 꾸르륵!”

뒤늦게 주술사에게 습격을 알리려던 장한의 입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나왔다.

폭스는 장한의 목에 박힌 단검을 그어버리고 장한의 옷에 단검을 슥슥 문지른 뒤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장한이 드롭 한 아이템을 수거해 태연한 표정으로 일행을 바라봤다.

‘미친…….’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상대는 인간과 똑같이 생긴 유사인종이다. 그런 유사인종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죽이는 것도 모자라 그 시체에다 피를 닦다니. 이건 간이 크고 작고를 떠나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나 또한 수없이 많은 유사인종들을 사냥했지만 폭스처럼 저렇게 태연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도, 동생…….”

카나리아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인지 식은땀을 흘리며 태연한 폭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폭스: 그럼 저 주술사가 문제인데요…….]

“죽어라!”

꽈강강!

“크허억!”

폭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행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있던 수풀에서 엄청난 크기의 불덩이가 날아와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주술사에게 작렬했다.

슈우우욱.

퍼버벅.

불덩이에 이어 나타난 커다란 곤봉에, 지글거리며 타오르는 몸을 부여잡고 폭포로 뛰어들던 주술사의 머리가 ‘퍽’ 하고 터져나가 하얀 뇌수와 피를 뿌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학살 아닌 학살에 어리둥절한 우리 일행의 뒤에 마침내 이 학살을 자행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총 4명이었는데 온몸을 검은 갑옷으로 가리고 거대한 도(刀)를 들고 있는 자와 막 주술사의 머리를 터트리고 바닥에 처박힌 검은 몽둥이를 집어든 전사 계열로 보이는 2명, 온통 붉은색으로 치장한 이십대 중반의 남자와 그와는 반대로 온몸을 푸른색으로 치장한 십대 중반의 아이였다.

“웨어타이거 일족…! 크르르.”

강한 적대심을 담은 티나의 말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이내 커다란 도를 들고 있는 사내가 정확히 우리 일행이 있는 수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만 모습을 드러내지.”

‘나가야 하나?’

두 개의 의견이 내 머릿속에서 충돌했다. 그러나 망설일 틈이 없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등에 멘 도를 손에 잡고는 천천히 수풀을 헤치고 나가자 내 뒤를 따라 일행이 걸음을 옮겼다.

“호오, 다른 일족의 족장 후보생인가?”

“그런가 본데? 키킥.”

도를 든 인영의 말에 그의 옆에 있는 붉은 인영이 불쾌한 웃음을 흘리며 동조했다.

상대가 나와 같은 후보생이라면 상당히 짜증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 나를 보며 웃음을 흘린 도를 든 인영이 손에 든 도를 바닥에 늘어트리며 천천히 나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유저 같은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투구 속 인영의 목소리가 한껏 달아올랐다.

이내 몇 미터 거리까지 다가온 인영이 도를 들지 않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오오, 그거 다행이야. 그럼 우리 다 같이 힘을 모아서… 뒈져라!”

휘이익.

퍽.

“큭.”

손에 들린 도를 그대로 비틀어 찌르는 인영의 공격에 명치를 허용한 덕에 숨 막히는 통증이 몰려오고 체력 게이지가 약간 깎였다. 그와 동시에 허리를 굽히고 있던 내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티나가 나를 안고 거리를 벌린 것이었다.

“대체 왜…….”

“왜냐고? 크하하! 이봐, 솔로대령. 이 자식이 왜냐고 묻는데?”

인영의 말에 솔로대령이라 불리는, 붉은 인영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멍청한 자식, 족장 후보끼리는 서로 죽일 수 있다. 물론 보상 또한 아주 푸짐하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몸을 흔드는 솔로대령의 손에 들린 완드에서 작은 불덩어리 3개가 생겨났다.

그와 동시에 내 곁을 지키던 일행 또한 각자 무기를 챙겨들고는 공격에 대비했다.

그런 우리를 가소롭다는 듯이 보던 솔로대령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승자에게는 엄청난 경험치가! 패자에게는 족장 후보생 자리 영구 제명이! 크하하, 죽어라!”

후우우웅? 꽈강.

“쳐라!”

카강!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작렬한 불덩어리를 시작으로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날카로운 고함에, 자신의 새하얀 너클을 부딪치며 전의를 불태우던 카나리아가 주문을 외우며 마주 달려오는 적에게 달려들었다. 폭스 또한 잠시 풀었던 섀도우 아머를 두르고는 빠른 속도로 단검을 날렸다.

“티나, 붉은 머리 자식을 죽여라!”

“예!”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티나가 굳은 표정으로 등에 멘 단창을 들고는 허공으로 도약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아마 도를 들고 있는 놈이 족장 후보생인 듯, 푸른 머리칼을 가진 아이가 연신 놈에게 보호 마법과 보조 마법을 걸어주고 있었다. 개자식! 너를 죽여서 경험치를 먹어주마!

“…그리하여 나의 자식의 주먹에는 내 의지가 스며들리니!”

“죽어라!”

가장 먼저 부딪친 것은 일행의 선두에 선 카나리아와 상대의 앞에서 돌격하던 몽둥이를 든 인영이었다.

거창한 주문과 함께 환히 빛난 카나리아의 주먹이 상대의 몽둥이와 부딪치며 커다란 폭음을 터트렸다.

퍼벙!

“크윽!”

피와 살로 이루어진 주먹과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진 몽둥이의 격돌이 낳은 결과는 놀랍게도 몽둥이의 패배였다. 몽둥이를 든 인영이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비틀자 그 뒤를 이어 카나리아의 현란한 발차기가 투구의 턱 부분을 가격했다.

“솔로중령!”

비틀거리는 놈에게 연신 주먹질과 발길질을 퍼붓는 카나리아의 모습에 도를 든 놈이 기세 좋게 폭스의 단검을 막고는 움찔하며 솔로중령에게 달려가려고, 연신 단검을 던지는 폭스를 향해 거칠게 도를 휘둘렀다.

“크허어엉!”

카가각.

내 입에서 터져 나온 제왕의 포효와 함께 휘둘러진 검이 거칠게 공기를 찢어발기며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놈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곧이어 쏟아질 피에 떠오른 미소도 잠시, 이내 내 검과 놈의 옆구리가 부딪치는 순간, 놈의 몸을 중심으로 펼쳐진 옅은 푸른색의 기운이 일렁이며 내 검을 막았다.

“크으윽.”

가가각.

쨍그랑.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당황하는 놈의 옆구리를 그대로 양단할 심산으로 푸른 기운을 무시하고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자 마침내 유리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이 가해진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놈의 허리를 갈랐다.

아니, 막 가르려고 했다.

까강!

“크윽.”

손목에 전해지는 시큼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자 내 검을 막기 위해 도를 잡은 손에 온 힘을 다한 놈의 모습이 보였다.

“하핫, 수고하십시오.”

파밧.

대치하는 우리를 보며 낮은 웃음을 흘린 폭스가 한 손으로는 검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사방을 향해 단검을 날리며 솔로대령의 옆에서 주문을 외우는 푸른 머리의 아이에게 쇄도했다.

폭스의 검이 아이의 지척에 다다른 순간, 아이가 외우던 주문이 끝나고 환한 빛과 함께 2m는 될 법한 물로 이루어진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의 중급 성수(聖獸)인 아실리네였다.

“크어어엉!”

“크윽.”

내가 아실리네에게 시선을 빼앗긴 틈을 타 놈의 입에서 터져 나온, 제왕의 포효와 비슷한 기운을 가진 포효가 방심하던 내 몸을 덮쳤다.

몸은 물론이고 머리마저 진동시키는 짜릿한 통증과 멍해져가는 정신에 놀랄 틈도 없이, 내 입에서 두 번째 제왕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허어어엉!”

방금 놈의 것이 파도였다면 내 포효는 말 그대로 해일이 되어 공터를 휩쓸었다.

모르긴 몰라도 동굴 안에 있는 크란 또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준비를 하거나 원군을 요청할 것이었다.

“속전속결이다!”

내 외침을 들은 일행이 각자 고개를 끄덕이며 공격에 속도를 붙였다. 숲의 마녀라 불리는 티나는 그녀답지 않게 고전을 하고 있었는데 상대인 붉은 머리가 소환한 것이 바로 최상급 불의 성수라 불리는 요한나였다.

3m에 이르는 거대한 덩치에 뜨거운 화염으로 이루어진 몸은 보통 영화 속에서나 보던 인디언의 모습이었다.

요한나는 거의 2m나 되는 장창으로 티나를 밀어붙였다. 언뜻 보면 티나가 밀리는 것처럼 보였는데 조금이라도 전투에 대해 해박한 사람이 봤다면 티나의 움직임이 여유롭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유로운 몸과는 달리 티나의 눈은 마치 사냥 전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응차카!

“토네이도 스피어!”

마침내 두 창수의 입에서 터져 나온 우렁찬 기합과 함께 검붉은 화염을 뿜어내는 장창과 맹렬한 기세로 공기를 찢어발기며 회전하는 단창이 부딪쳤다.

꽈가가강!

-으아아악!

“커헉!”

커다란 폭음과 함께 요한나의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아직도 회전을 멈추지 않은 티나의 창이 붉은 머리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반쯤 날아가 버린 목을 부여잡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붉은 머리가 마침내 상체부터 천천히 모래가 되어 사라지며 바닥에 몸을 뉘였다.

“솔로대령!”

싸움 중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솔로대령이 쓰러지는 것을 본 놈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남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까가강.

“커흑!”

갑작스레 들이닥친 내 힘에 그나마 대치를 이루던 놈의 도가 볼품없이 기울어지며 놈의 살을 한 움큼 뜯어냈다.

“아아악!”

그와 동시에 온몸이 선혈로 낭자한 아이가 바닥에 몸을 뉘이며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아이가 소환한 아실리네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으랏차!”

콰드득.

“컥……!”

다른 한편에서는 카나리아가 막 솔로중령의 목을 투구째 비틀어버리고 있었다. 솔로중령의 사지는 이미 볼품없이 구부러져 속수무책으로 목이 부러졌다.

“크아아아!”

솔로중령의 목을 부러트린 카나리아가 마치 제왕의 포효를 흉내라도 내듯이 거친 함성을 토해냈다.

“크윽. 솔로중령, 솔로대령, 솔로소령……!”

상급으로 보이는 체력 회복 포션을 마시며 이제는 모래가 되어버린 자신의 동료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놈의 입가에 한줄기 웃음이 걸렸다.

‘웃어?’

갑작스런 놈의 미소에 내 미간이 구겨졌다. 이 최악의 상황에 웃음을 흘리다니?

“크큭! 빌어먹을 자식들. 다 죽여 주마… 크크크!”

낮은 웃음으로 시작해 광소(狂笑)로 끝을 맺는 놈의 말에 의문을 가지기가 무섭게 놈의 몸에 난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어갔다. 변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상처가 재생된 부분에서는 짙은 검은색 털이 빠른 속도로 자라났다.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놈의 얼굴이 점차 변하며 마침내 어떠한 동물의 모습을 보이는 순간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듯, 강렬한 충격이 나를 덮쳤다.

‘야수화!’

“폭스! 놈을 죽여라!”

쉬식.

퍼억.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뛰쳐나간 폭스가 손에 들린 단검을 놈의 목을 향해 내려찍기가 무섭게 파란 힘줄이 돋아난 놈의 팔이 허공에 있는 폭스의 몸을 후려쳤다.

콰가강!

“크윽…….”

바닥에 처박힌 폭스가 충격에 꿈틀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생각도 못한 폭스의 실패에 얼굴을 구기고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놈을 향해 뛰어가려는 순간, 완벽하게 야수화한 놈의 모습에 내 입에서 절로 욕이 흘러나왔다.

“제길…….”

“크허어어엉.”

별다른 스킬을 쓰지 않았음에도 온몸을 저리게 만드는 강맹한 포효에 티나를 제외한 모두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쿠궁.

“크허엉.”

거의 230cm는 될 법한 거대한 몸집과 그 몸을 뒤덮은 윤기 나는 검은 털. 그리고 그 털 속에 숨겨져 있는 꿈틀거리는 근육과 홀로그램에서나 보던, 약간은 인간의 그것이 남아 있는 호랑이의 얼굴이 살기 어린 포효를 터트렸다.

후우웅.

야수화한 자신의 몸을 적응시키려는지 가볍게 휘두른 놈의 도에서 내 것과 비슷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꿀꺽.

“도, 동생. 저, 저걸 어떻게 처리하지?”

“글쎄요… 하핫.”

주변을 가득 메우는 강력한 위압감에 카나리아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그런 카나리아를 외면한 폭스가 나와 티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저쪽이 괴물로 변했는데 우리 쪽에서도 괴물이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뭐라? 네놈이……!”

“티나, 그만 해라.”

괴물이란 폭스의 말에 거친 일갈을 토해내려던 티나가 내 저지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티나의 모습이 의외였는지 잠시 의문 섞인 표정을 흘린 폭스가 다시금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폭스, 카나리아. 내가 야수화할 때까지 놈을 막아라.”

야수화한 놈을 막기 위해서는 나나 티나, 둘 중 한 명이 야수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티나가 야수화한다면 충분히 놈을 제압하고 동굴 속에 있는 크란 또한 손쉽게 처리할 수 있겠지만 티나의 야수화는 마지막 비장의 카드와 같은 것이다.

차라리 내가 야수화해서 놈을 처리한 다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일행과 협공하여 크란을 처리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하하, 농담이시겠죠?”

“부탁하지.”

최근 들어 가장 커다란 미소를 흘리며 몸을 돌려 약간 거리를 벌리자 폭스의 얼굴이 똥 씹은 것 마냥 굳었다.

확실히 야수화한 놈을 막기에는 폭스와 카나리아가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티나를 붙이지 않고 폭스와 카나리아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은 일종의 작은 복수였다.

나까지 괴물 취급하는 놈을 어떻게 곱게 보겠는가. 거기다 만약 지금 폭스가 한 말을 조용히 넘어간다면 티나의 반감을 살 수도 있다. 물론 가디언이 배신을 할 리는 없지만 반감이 커지면 티나 스스로 떠나갈 수도 있는 법이다.

티나 또한 내 말의 속뜻을 눈치 채고 은근히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럼 최대한 빨리 괴물로 변신 부탁드리겠습니다.”

타닥.

폭스 또한 그냥 가지는 않겠다는 듯이 끝까지 괴물 소리를 붙이고는 울상을 흘리는 카나리아를 끌고 무차별적으로 도를 휘두르는 놈에게 몸을 날렸다.

“티나, 넌 동굴에 가서 크란을 제외한 나머지 웨어와일드보어를 말살해라. 체력의 3분이 1이 남았을 경우 무조건 후퇴하며 야수화는 허락하지 않는다.”

“예, 마스터!”

쉬시식.

힘찬 외침을 토한 티나가 단창을 꺼내들고는 동굴 속으로 몸을 날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속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소리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스윽.

푹.

“큭……!”

손에 들린 검을 거꾸로 잡은 뒤 옆구리를 긋자 가죽 갑옷이 쩍 갈라지며 남은 체력의 3분의 1 이상을 깎아먹었다. 현재 분노나 공포 그리고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야수화할 유일한 방법은 바로 체력을 깎아먹는 것이었다.

스윽.

푹.

다시 한 번 그어진 검에 찌릿한 통증과 함께 마침내 체력 게이지가 3분의 1을 가리켰다.

“크크큭. 야수화!”

낮은 웃음과 함께 발동된 야수화 스킬에 내 옆구리를 메운 흉한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철철 흐르는 피가 멈췄고 갈라졌던 살이 저절로 하나로 뭉치자 이내 그 위로 새하얀 털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갑작스레 강맹하게 끓어오르는 힘에 내 온몸이 떨려왔다.

우드득, 우득.

콰지직.

가장 먼저 온몸의 뼈들이 조각조각 나뉘는가 싶더니 방금 전보다 훨씬 더 견고한 모습과 크기로 변화했고 온몸을 가득 메운 근육 또한 그 크기를 불려 새하얀 털 속에 모습을 감췄다.

“크르르.”

인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한 구강구조에 내 입에서 야수의 그것과 같은 목울림이 흘러나왔다.

참을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치는 몸과는 다르게 머리는 싸늘히 식었다.

후우웅.

우지끈.

마침내 가죽 갑옷을 터트릴 듯 부풀어 오른 몸과 높아진 시야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손에 들린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무거운 파공음과 함께 허공을 가른 검이 어른 허리 굵기의 나무를 파고들었다. 반쯤 파고든 것으로도 모자라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를 꺾어버리는 강력한 힘에 내 입에서 우렁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제왕의 포효가 아닌 전사의 외침이었다.

“크허어어엉! 크어어엉!”

폭포를 가득 메우는 포효에 폭스와 카나리아의 합공에 팔을 휘두르며 저항을 하던 놈이 나를 마주보며 포효를 터트렸다. 찌릿찌릿하게 울리던 방금 전과는 달리 아무 이상 없는, 아니 오히려 끓어오르는 투기에 내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크와앙. 주거라아!”

쿵쿵쿵!

불분명한 발음으로 살기 어린 외침을 토해낸 놈이 손에 들린 도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나를 향해 달려오자 주변의 땅이 비명을 토했다. 나 또한 가만히 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마주 고함을 지르며 손에 잡은 검에 힘을 주며 놈을 향에 몸을 날렸다.

쩌저정!

“큭.”

“컥.”

대도(大刀)와 대검(大劍)이 부딪치며 토해내는 날카로운 소리에 주변에 있던 폭스와 카나리아가 귀를 부여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큭, 저 멍청한 놈들이……!’

[블러드: 동굴로 가서 티나를 도와라!]

짜증 섞인 내 외침에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폭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나리아와 함께 동굴 속으로 몸을 날렸다.

“크어엉!”

까강!

내가 파티 음성을 하는 틈을 타 교묘히 도를 끌어당긴 놈이 도를 돌려 내 머리를 향해 내려찍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황급히 손을 들어 막자 도와 토시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음을 터트렸다.

쩌적.

“크허어엉!”

퍼억.

“컥.”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쩍 갈라지는 토시를 뒤로하고 검을 바닥에 꽂은 뒤 재빨리 놈의 코를 내려치자 놈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 뒤를 이어 두 번, 세 번 이어지는 내 주먹질에 마침내 놈의 코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와 주먹을 적셨다.

“크르르……!”

피가 쏟아지는 코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놈과 거리를 벌리며 바닥에 꽂힌 검을 뽑아내려 치자 ‘썩뚝!’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왼 팔목이 잘려 나갔다.

잠시간의 고요 속에 땅에서 펄떡거리는 팔을 바라보는 놈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크허어엉!”

카가강!

“큭.”

가히 제왕의 포효와 맞먹는 외침과 함께 이어진 공격에 재빨리 검을 들어 막자 검신을 타고 짜릿한 통증이 내 몸을 울렸다.

나 또한 막 제왕의 포효를 토해내려는 순간, 놈의 커다란 발이 내 가슴을 강타했다.

퍼벅.

“크윽.”

강맹한 힘이 담긴 놈의 발차기에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약간의 속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능력치가 힘으로 가버린 내가 따라가지 못할 스피드로 나를 몰아붙이던 놈이 돌연 몸을 낮추더니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도를 휘둘렀다.

까가강!

“크아악.”

커다란 검면을 이용해 도를 흘리자 놈의 입에서 분노 섞인 괴성이 튀어 나왔다.

“닥…쳐! 크허어어엉!”

그런 놈을 향해 오늘의 마지막 제왕의 포효를 터트리자 놈의 눈동자가 멍하니 풀렸다.

놈의 얼굴과 내 얼굴 사이의 거리는 고작 30cm. 그 짧은 거리에서 직격으로 맞은 제왕의 포효는 음유시인이 부르는 공격용 노래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멍하니 풀린 눈으로 침을 흘리는 놈의 모습에 내 손에 들린 검이 살기 어린 울음을 토해냈다.

“죽어랏!”

콰드득.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내려친 검이 놈의 갑옷을 부수고 놈의 쇄골을 가른 뒤 놈의 폐를 갈가리 찢어버리자 멍하니 풀렸던 놈의 눈빛이 숨길 수 없는 고통과 공포로 물들었다.

딴에는 반항을 하려 했지만 온 힘을 다해 짓누르는 검에 반항을 하면 할수록 놈의 가슴 깊숙이 파고든 검이 폐를 찢어 발겼다.

“컥, 컥… 사, 살려……!”

서서히 풀려가는 야수화에 놈이 절망과 희망, 반대되는 2개의 감정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놈은 말 그대로 엄청난 경험치 덩어리. 검을 잡은 내 손에 힘이 더해졌다.

콰지직.

“크아아악!”

놈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반대쪽 옆구리로 나온 검이 놈의 내장을 흩어 뿌려 바닥을 적셨다.

그 뒤를 이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놈의 장기들이 좌르륵 흘러내렸다.

“큭?”

코를 찌르는 노린내에 고개를 내리자 하의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놈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서서히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자신의 몸과 나를 번갈아 보며 입을 웅얼거렸다.

‘씨…발…….’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놈의 입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후웅.

검으로 거센 바람을 일으켜 놈의 모래를 날려버리기가 무섭게 머릿속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무려 2나 올라간 레벨에 놀라는 것도 잠시, 캐릭터 창을 열어 스탯을 올리는 내 얼굴에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놈의 수준을 보건대 분명 투 스타 중반이나 후반 정도였다. 그런 놈이 무려 2레벨을 업 시켜주는데 다른 놈들은 어떻겠는가.

물론 족장 후보생이라는 것과 행운의 실마리라는 아이템의 영향으로 더 많은 경험치가 들어온 것이겠지만 적어도 내가 손해 보는 것은 없었다.

내가 점찍은 소수 일족 연합의 족장 근처에 숨어 다른 후보생들을 사냥하면 그만이니까.

“꾸에에엑!”

벅차오르는 희열에 몸을 떠는 내 귀를 덮치는 소름끼치는 비명에 검을 잡은 내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비명소리를 보건대 분명 일행은 아니었다.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이었다.

타다닥.

콰강!

내가 동굴의 끝자락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일행이 크란과 2명의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을 포위해서 서서히 간격을 좁히고 있었다. 일행의 뒤로 보이는 모래의 산들이 다른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의 행방을 말해주었다.

“어라? 빨리 오셨네요?”

족히 수십 개는 될 법한 단검을 들고 자세를 잡고 있던 폭스가 피 묻은 검을 털어내는 나를 발견하고는 웃음을 흘리며 인사하자 티나가 나를 보며 안도의 눈빛을 보냈다.

오직 카나리아만이 야수화한 내 모습에 움찔하며 약간 거리를 벌렸다.

“누가 크란인가?”

“바로 저기에 있는…….”

“내가 크란이외다.”

내 질문에 답하려는 폭스의 말을 끊고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3명의 웨어와일드보어 일족 중, 유일한 노인이었다.

얼굴에 세월의 상징인 주름살이 빼곡한 노인의 주위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이 노인과 나머지 2명의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용맹한 전사들을 부리는 자여,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블러드.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 후보생 블러드이다. 크허엉!”

크허엉… 크허엉…….

동굴에 메아리치는 내 포효에 잠시 움찔한 크란이 초라한 몸을 이끌고 결계 밖으로 나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조, 족장님!”

“아버지!”

갑작스런 크란의 행동에 일행은 물론 결계 속의 웨어와일드보어 또한 눈을 치켜뜨며 경악 섞인 비명을 질렀다.

그런 그들을 깨끗이 무시한 크란이 손에 쥔 완드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나의 목숨. 마왕을 닮은 전사여, 부디 부탁하건대 내 목숨을 가져가는 대신 나의 일족들을 보살펴줄 수 없는가?”

간곡히 부탁하는 크란의 말에 티나는 물론 내 눈썹이 꿈틀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런 내 모습에 움찔한 크란이 이어지는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수인족들은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종족이라 들었다. 지금 그대가 보이는 행동이 그 수인족들의 모습인가?”

적지 않은 실망감이 담긴 내 말에 크란이 작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자연을 파고들어 이치를 궁리하는 대지의 자식들. 다른 수인족과는 달리 현명한 선택을 할 줄 아는 일족입니다.”

“현명한 선택이 목숨을 구걸하는 것인가?”

“이익! 닥쳐라!”

이죽거리는 내 말에 보다 못한 웨어와일드보어 일족 한 명이 거친 고함을 내뱉으며 결계에서 나와 나를 향해 완드를 휘둘렀다. 아무런 주술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완드를 검으로 쳐내자 나에게 달려들었던 웨어와일드보어가 분한 표정으로 크란을 향해 소리쳤다.

“아버님! 저런 자에게 어찌 일족의 목숨을 구걸하신단 말입니까! 비록 몰락했지만 저희도 수인족! 저 무식한 자의 말대로 굽히느니 차라리 부러지겠습……!”

짜악.

“못난 놈!”

크란이 젊은 웨어와일드보어의 뺨을 후려쳤다.

나조차도 생각지 못한 행동에 당황하자 웨어와일드보어를 향해 노기 어린 시선을 주던 크란이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 자식이 미숙하여 훗날의 일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자식인가?’

나를 향해 공손히 고개 숙이는 크란의 말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크란의 자식이라면 족장 후보생이 분명했다. 아직도 분노가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크란의 자식을 보니 갈등이 생겼다. 여기서 저놈을 죽이고 크란을 죽인다면 적어도 2레벨 업은 분명했다.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묘한 살기를 느끼고 흠칫한 크란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블러드 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와일드보어 일족은 오직 육체적 힘만을 추구하는 수인족 사회에서 철저하게 핍박을 받아온 일족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저희 일족이 주술사라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그런 저희가 살아가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바로 더 강한 족장에게 빌붙어 삶은 연명하는 것이었지요.”

자신이 말하면서도 인정하기 싫은 듯, 크란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그것은 나머지 2명의 웨어와일드보어 일족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 그대는 지금 내가 강한 족장이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내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는 크란의 모습에 내 미간이 구겨졌다. 분명 내가 강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보통 수준의 수인족들에게나 적용되는 말이었다.

각 거대 일족의 족장이나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의 강함은 나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여기 있는 티나만 하더라도 대결해서 내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가장 강하다니?’

내 얼굴에 떠오른 의문에 크란이 조용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저희 일족은 족장 시험 10일 전부터 주술을 이용해 각 일족의 족장 후보생들과 기존의 족장들을 봐왔습니다. 그중 가장 강하고 또 가장 커다란 잠재능력을 가진 분은 블러드 님과 붉은 어금니, 그리고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 이 3명이었습니다. 붉은 어금니의 아들 또한 강했지만 그는 블러드 님과 같은 결단력이 부족하여 제외되었습니다.”

“왜 그 3명 중에 하필이면 나인 거지? 하다못해 지금 소수 일족 연합을 이끌고 있는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에게 가도 될 텐데?”

야수화가 풀리는 것인지 점차 정상적인 위치로 돌아가는 시야와 치아의 구조, 그리고 힘에 미간을 구기며 묻자 크란이 입을 열었다.

“현재 소수 일족 연합의 우두머리가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많이 다릅니다.”

“사실과 다르다고?”

의문 섞인 내 물음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크란이 말을 이었다.

“현재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은 웨어래트 일족 족장의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이 해골의 꼭두각시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크란의 말에 강한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본래 육체적인 능력으로는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을 제외한다면 수인족 중에 가장 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족이 바로 웨어래트 일족이었다.

그런 웨어래트가 수인족 중에서 웨어라이언 일족과 함께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을 꼭두각시로 부린다는 사실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물론 웨어래트 일족의 족장이 보통 웨어래트 NPC라면 상관없겠지만 현재 웨어래트 일족의 족장은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은 해골이었다. 내 얼굴에 절로 긴장감이 떠올랐다.

“자세히 말해봐라.”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주술을 이용해 웨어베어 일족을 염탐하던 도중에 우연치 않게 족장이 기거하는 곳을 보게 되었는데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이 무언가에 홀린 눈빛으로 웨어래트 일족 족장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사악한 힘에 주술이 깨어져서 그 이상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으음.”

내 입에서 흘러나온 낮은 신음에 조용히 크란의 말을 듣던 폭스의 안색 또한 굳었다. 크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상당히 커다란 문제였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설명을 했다고 하니 특수한 약물이나 정신 마법으로 지배했을 가능성도 높았고 크란의 주술을 방해한 사악한 힘은 흑마법사가 분명했다. 그것도 한 일족의 족장의 주술을 방해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졌다.

이내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던 크란이 자신의 앞에 있는 완드를 한쪽으로 밀어내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블러드 님, 제발 부탁하건대 제 목숨을 끝으로 저희 일족을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묻겠다. 왜 하필 나지?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이 아니라면 붉은 어금니가 있을 텐데?”

내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멈칫했던 크란이 돌연 슬픈 표정을 흘렸다.

“붉은 어금니가 우리 일족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과거의 일이 다시 반복되는 것뿐입니다. 저희 일족을 이끌어주실 분은 단 한 명, 블러드 님뿐입니다.”

“아……!”

크란의 말에 내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확실히 본래부터 데스 랜드에 살던 수인족의 밑으로 들어간다면 결과는 뻔했다. 그들 또한 육체적 능력을 우선으로 할 테니까. 거기다 카인의 성격이라면 소수 일족 연합을 배신하고 자신의 밑으로 들어온 크란을 찢어 죽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좋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잠시간의 고민 끝에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자 노심초사 나를 바라보던 크란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간단합니다. 여기에서 제 목을 치신 다음 제 아들과 일족을 그냥 보내주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저희 일족은 블러드 님이 위기에 처할 때 나와 블러드 님을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울 것입니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스윽.

내 말이 떨어지지가 무섭게 나를 바라보던 크란이 품속에서 붉은색의 작은 돌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아, 아버님!”

“족장님!”

“조용해라!”

경악 섞인 외침을 토해내는 일족들에게 호통을 친 크란이 두 손으로 나에게 돌을 내밀었다. 손을 뻗어 그 돌을 집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내 팔목을 타고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올라왔다.

“크윽!”

철컹.

내 팔을 휘저으며 돌아다니는 후끈한 열기에 신음을 흘리자 옆에서 나를 바라보던 티나가 창을 들어 크란의 머리를 겨눴다. 갑작스레 돌변한 공기에 일행은 물론 크란을 제외한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이 완드를 들어 일행을 경계했다.

그런 그들의 행동에 티나의 얼굴이 싸늘히 굳으면서 티나의 몸에서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와 동굴을 가득 메웠다.

“크윽… 티나, 그만 해라.”

금방이라도 크란의 머리를 꿰뚫을 기세의 티나를 제지한 뒤 돌을 집었던 손을 펴자 붉은 돌은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 붉은 새의 문신이 내 오른팔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갑작스레 생긴 문신에 당황하는 내 머릿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란에게 ‘맹세의 증표’를 받았습니다. 맹세의 증표는 문신의 형상으로 사용자의 몸에 나타날 것이며 사용자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의 충성의 맹세 또한 소멸됩니다.]

-맹세의 증표-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의 족장인 크란에게 받은 충성의 맹세가 크란의 말 속에 살아 숨 쉬는 언령의 힘을 빌려 불멸(不滅)의 상징인 불사조(不死鳥) 형상의 문신으로 변한 것. 반감도가 100%가 되면 맹세의 증표는 자연 소멸한다.

특수능력-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의 충성.

주술 방어력 10% 상승.

“맹세의 증표……?”

나를 주시하던 크란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예, 그 맹세의 증표가 있는 한 저희 일족은 영원히 블러드 님을 따를 것입니다.”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맺는 크란의 행동에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웨어와일드보어족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 나를 경배하듯 두 손을 치켜들었다.

“블러드 님, 이제 제 목을 치십시오.”

굳은 표정으로 목을 내미는 크란의 모습에 웨어와일드보어 일족들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스르릉.

나에게 충성의 맹세를 했다고 해서 살려줄 마음은 들지 않았기에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크란이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

“부디 일족을…….”

휘익.

퍽!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잘린 크란의 목이 바닥을 굴러 동굴의 벽에 부딪쳐서야 멈추자 그제야 동굴을 가득 메우던 기묘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털썩.

“크흑, 아버지! 제가 꼭 아버지의 뜻을 이어 일족을 부흥시키겠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크란의 시체를 부여잡고 오열하는 웨어와일드보어를 뒤로하고 머릿속으로 울려 퍼지는 기분 좋은 소리에 작은 미소를 흘리며 캐릭터 창을 열어 보너스 스탯을 힘에 투자했다. 몸을 돌려 아직까지 형체가 남아 있는 크란의 머리를 들고 아이템 창을 중얼거리자 반투명한 홀로그램이 내 앞에 나타났다.

띠리링.

[소수 일족 연합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의 족장, 크란의 머리를 획득하였습니다.]

크란의 머리는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에서 사라진 뒤, 아이템 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크란을 보며 오열하던 크란의 아들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 이름은 크란. 전대 족장의 뒤를 이어 현재 와일드보어 일족의 족장이 된 크란입니다.”

[폭스: 원래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의 족장들은 이름을 물려 사용합니다.]

아버지와 같은 이름에 의아해하자 폭스가 눈치 빠르게 알려주었다.

“저희 일족은 맹세의 증표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영원히 노예로서 블러드 님을 모실 것을 맹세합니다.”

우우웅.

스슥.

크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란의 주위를 맴돌던 기운이 나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더니 이내 왼손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오른팔에 있는 것과 똑같은 문신이 왼팔에도 나타났다.

오른팔에 있는 것이 전대 크란의 맹세라면 왼팔에 있는 문신은 바로 현 크란의 맹세였다.

“우와, 멋지네요?”

무거운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가벼운 목소리를 내며 폭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 양팔을 바라봤다. 손목부터 시작해 팔꿈치까지 빼곡히 채운 불사조 모양의 문신은 절로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무심한 얼굴로 문신을 바라보는 나를 향해 티나가 불편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녀 또한 어쩔 수 없는 수인족. 그녀는 대체 왜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을 받아 들였냐고 책망하고 있었다.

“복수를 위해서다.”

“예?”

뜬금없는 내 말에 티나를 제외한 모두가 의문 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오직 티나만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수긍할 뿐이었다.

여차하면 나와 티나의 관계를 들킬 염려도 있었지만 눈치가 빠른 폭스라면 벌써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낼 곳은 있나?”

나직한 내 물음에 흐르는 눈물을 닦던 크란이 입을 열었다.

“저희 일족들만 알고 있는 비밀공간이 있습니다. 제가 신호를 하면 모든 일족들이 그곳으로 모일 것입니다.”

“비밀 공간에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10일 정도가 한계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앞으로 족장 시험이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9일. 10일이면 충분했다.

“너는 나머지 일족들을 이끌고 그 비밀공간으로 가서 내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버텨라.”

“예, 저희에게 따로 신호를 보내실 필요 없이 양팔에 있는 문신에 마나를 주입하시면 저희가 알아서 달려올 것입니다.”

아까 전과는 달리 부드러운 크란의 태도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리는 내 앞을 폭스가 가로막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여태껏 봐왔던 그 어떤 웃음보다 썩은 냄새를 풍기는 미소를 흘린 폭스가 입을 열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마치 착한 일을 해놓고 상을 바라는 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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