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3 족장 시험 3 (11/34)

챕터3 족장 시험 3

웨어울프 일족의 족장 후보생인 ‘발정난늑대’는 4일만 기다리면 족장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현재 죽지 않고 살아남은 족장은 웨어베어와 웨어래트, 그리고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이었다.

수인족 중에서 가장 약하다고 알려진 웨어와일드보어가 살아남은 것은 의외였지만 그것은 발정난늑대에게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발정난늑대의 기분을 한껏 올려주고 있었다.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의 족장을 처리한 뒤 적어도 한 명의 족장만 더 죽인다면 족장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바이탈, 레드.”

스르륵.

발정난늑대의 부름에 온몸을 검은색으로 도배한 어쌔신 두 명이 소리 없이 발정난늑대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각자 투 스타 중급의 어쌔신으로 발정난늑대와 같은 웨어울프 일족이었다. 현실에서도 절친한 친구인 두 명은 선뜻 자신의 퀘스트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발정난늑대 또한 이제 쓰리 스타를 코앞에 두고 있는 무투가로 웨어울프 일족의 족장 후보생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였다.

“가자.”

발정난늑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이탈과 레드가 침묵의 폭포를 지나쳐 동굴 안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가볍게 몸을 날려 동굴 앞에 도착한 발정난늑대가 막 동굴 안으로 몸을 날리고 그 뒤를 이어 바이탈과 레드가 동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두둑’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바이탈의 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뭐, 뭐야!”

채채챙!

당황할 틈도 없이 쏟아지는 단검 세례에 레드가 손에 들린 검을 휘두르며 단검을 쳐내자 뾰족한 징이 달린 너클로 사방을 위협하던 발정난늑대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갑작스런 기습으로 바이탈이 당하기는 했지만 문제없었다. 더군다나 레드가 혼자서 저 많은 공격을 쉽게 막아내고 있지 않은가.

잔뜩 경계하며 사방을 살피던 발정난늑대의 입에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크크. 바이탈! 이제 그만 끝…….”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에 발정난늑대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어……?”

우지직.

발정난늑대의 입에서 의문 섞인 신음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발정난늑대의 가슴을 뚫고 나온 ‘그것’이 다시 한 번 깊숙이 찌르고 들어와 마지막 숨통을 끊었다. 점차 희미해져가는 시야에 억지로 눈을 뜨려는 발정난늑대의 귀로 여인의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웨어울프 일족 족장 퀘스트’가 자동으로 소멸합니다.]

“제…길!”

* * *

쑤욱.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놈의 가슴에서 검을 꺼내 거칠게 휘두르자 검에 묻어 있던 피와 살점들이 떨어져나갔다. 이내 레벨 업을 알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발정난늑……!”

휘리릭.

퍼억.

폭스가 던진 단검을 쳐내던 어쌔신이 놈의 죽음에 놀라며 빈틈을 보이기가 무섭게, 동굴의 천장에 매달려 어쌔신의 목을 꺾어 죽였던 카나리아가 몸을 날려 팔꿈치로 어쌔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어쌔신의 머리가 너무나 쉽게 터지며 뇌수를 뿌렸다.

“후우, 드디어 끝났네요.”

“제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찝찝하구만.”

아무것도 없던 검은 그림자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웃음을 흘리는 폭스와 동굴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며 불평을 토하는 카나리아를 바라보는 내 얼굴에 폭스와 같은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정확히 5일 전, 폭스가 자신 있게 말한 좋은 생각의 정체는 바로 족장 후보생 사냥이었다. 같은 레벨의 후보만 잡아도 기본 2업은 가뿐하니 며칠만 투자하면 거의 광렙에 가까울 정도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 폭스의 의견이었다.

결과는 모두의 찬성이었다. 이미 전대 크란의 머리를 입수한 이상, 내가 다른 후보생들보다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확실했다. 최소 한 명의 족장만 더 처리한다 해도 내가 족장이 될 확률은 90%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남은 9일 중, 5일을 족장 후보생 사냥에 투자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는 레벨이 안 올랐네요.”

“난 올랐는데? 으하하.”

보너스로 받은 스탯을 올리는 것인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을 가져다대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카나리아의 모습에 작은 웃음을 흘린 폭스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블러드 님은 레벨이 얼마나 오르셨죠?”

“200이다.”

‘정확히는 202이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내 말투에 카나리아와 폭스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겨우 15업 조금 넘게 한 두 사람에 비해 직접적으로 족장 후보생들만을 죽인 나는 광렙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엄청난 레벨 업을 하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거기다 사냥감이 몬스터가 아닌 고위 인공지능을 가진 NPC나 경험이 풍부한 유저였기에 무기를 다루는 컨트롤 또한 예전보다 훨씬 더 발전해 모처럼 훈련 아닌 훈련 또한 할 수 있었다.

“캐릭터 창.”

파밧.

이름: 블러드. 레벨: 202. 속성: 혈(血).

성향: 상악(上惡). 종족: 웨어라이언(Werelion).

명칭: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 후보생.

체력: 189000. 마력: 7000. 신성력: 0.

힘: 712. 민첩성: 80. 체력: 50.

지혜: 30. 신마력:10. 행운: 10.

성향은 대표적으로 선(善)과 악(惡)으로 나뉘는데 그 구분이 상(上), 중(中), 하(下), 극(極)이었다.

현재 내가 띠고 있는 성향은 극악의 바로 전 단계인 상악으로 데스 랜드가 아닌 다른 마을의 NPC들이라면 내 눈빛만으로 오줌을 지릴 정도로 사악한 기운을 내뿜었다.

현재 카드리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마을로 간 티나의 성향이 바로 극악이었는데 그 정도 성향이면 같은 일족의 NPC 또한 말하기를 꺼릴 정도였다.

초보 섬에서 검은 사자 6진이라는 놈들을 죽일 때부터 쌓였던 악의 성향이 이번 족장 후보 사냥에서 갑작스레 커져 상악으로 변한 것이라 나 또한 당황스러울 다름이었다.

헤라클래스 시절 성향은 극선(極善)으로 길거리에 있는 NPC들이 먼저 다가와 친분을 표하고 귀족 NPC들이 아부를 떨 정도였다.

이번 족장 후보 사냥에서 얻은 것은 경험과 레벨뿐만이 아니었다. 올리지 않았음에도 무려 30이나 올라가 있는 민첩성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바로 이틀 전, 웨어타이거족의 족장 후보를 죽이고 나온 장갑 덕분이었다.

일명 ‘풍마의 장갑’이라 불리는 장갑은 짙은 검은색의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옵션이 거의 ‘학살자의 망토’에 버금 갈 정도였다.

-풍마(風魔)의 장갑(A급)-

‘악계(惡界)’에 살고 있는 장난꾸러기 풍마가 지나친 장난으로 루키아논의 미움을 받아 그 벌로 장갑에 갇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재질을 알 수 없는 장갑. 가끔 장갑 속에 봉인된 풍마 때문에 손이 제멋대로 노는 수가 있으니 조심하자.

방어력- 110. 내구력- 75/90.

특수능력- 민첩성 30 상승.

이동 속도 5% 증가.

언뜻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민첩성 30증가라는 옵션은 보통 레어 아이템에서조차 보기 힘든 옵션이다.

“그럼 이제 진짜 사냥을 할 차례인가요?”

제법 진중한 폭스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나리아 또한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너클을 쓰다듬었다. 폭스의 말대로 이제는 족장 후보가 아닌 진짜 족장을 잡아야 할 시간이었다.

지속적으로 마을을 왕복하며 정보를 전해주는 티나의 말에 따르면 현재 남은 족장은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과 웨어래트 일족의 해골, 이 2명뿐이었다.

물론 족장 후보들을 유인하기 위해 티나를 시켜 아직까지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의 족장이 살아 있다는 헛소문을 퍼트리라고 해뒀기에 몇몇은 아직까지 남은 족장이 3명인 줄 알고 또다시 이곳을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아무도 없는 텅텅 빈 동굴이겠지만.

“일단 마을로 가서 장비를 점검한다.”

지익.

다른 말을 들을 것도 없이 귀환 주문서를 찢자 화악 퍼진 빛이 내 몸을 삼켰다.

와글와글.

시끌시끌.

귀를 찌르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뜨자 활기찬 시장이 나를 맞이했다. 내가 나타나자 시장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혹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을 했다. 이내 내 뒤를 이어 나타나는 폭스와 카나리아의 모습에 또다시 환호를 지르며 환영했다.

[블러드: 하늘 나무로 간다.]

타다닥.

풍마의 장갑 덕분인지 한층 더 가벼워진 몸놀림으로 하늘 나무를 향해 몸을 날리자 주변의 웨어라이언들이 기겁을 하며 비켜섰다.

이내 수많은 인파들을 제치고 도착한 하늘 나무에는 불같은 성격을 자랑하는 카인도, 또 그 카인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는 나머지 일족의 장로들도 없었다. 그저 차가운 얼굴로 나를 기다리는 티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웨어래트 족장에 대한 정보는?”

“죄송합니다.”

“이유는?”

절로 싸늘해진 내 목소리에 티나가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웨어래트 족장의 옆에 강력한 힘을 가진 암흑 주술사가 있었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는 티나의 대답에 내 얼굴 또한 티나처럼 얼굴이 굳었다. 티나에게 주어진 2개의 임무 중 하나가 바로 해골에 대한 조사였는데 그것을 실패한 것이다.

거기다 티나가 말한 암흑 주술사는 바로 크란의 주술을 방해한 그 흑마법사가 분명했다.

겨우 투 스타 중급에 이른 크란의 주술을 없앤 것은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숲의 마녀라 불리며 쓰리 스타인 티나마저도 쩔쩔맨다면 분명 해골보다 위험한 상대였다. 물론 직접적인 전투가 아닌 단순한 염탐이었지만 쓰리 스타를 애먹인다는 것은 상대가 최소 쓰리 스타 중급이라는 소리였다.

‘제길.’

지끈거리는 머리에 얼굴을 찌푸리기가 무섭게 ‘타닥’ 하는 발소리와 함께 카나리아의 우렁찬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내가 먼저 도착했다! 크하하하.”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 내기라도 했는지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좋아하는 카나리아와 그와 겹쳐 보이는 염환의 모습에 내 입에 작은 웃음이 맺혔다.

이내 뒤늦게 도착한 폭스가 아쉬움을 토해내며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숨을 헐떡거리는 카니라아와는 달리 아무렇지 않은 표정인 폭스를 보니 폭스가 일부러 져준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애초부터 나와 같은 스타일로 힘에 투자한 카나리아가 민첩성에 투자한 폭스를 이길 리가 없었다.

“카드리안은?”

내가 티나에게 지시한 두 가지 명령 중 남은 하나가 바로 현재 카드리안의 상황을 알아오는 것이었다. 현재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 후보는 단 둘, 나와 카드리안뿐이기에 카드리안에게 신경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현재 웨어카우 일족의 족장을 처리하고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에게 가는 중입니다.”

“으음.”

내 입에서 나온 무거운 신음에 하늘 나무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되면 느긋하게 해골을 감시하며 과제를 하겠다던 계획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바로 웨어베어 일족에게 간다.”

갑작스런 내 말에 일행이 눈을 치켜뜨며 나를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웨어래트 일족으로 가서 해골을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크란의 주술을 소멸시키고 티나마저 애를 먹인 흑마법사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가봤자 개죽음을 당할 확률이 높았다.

“그럼 5분 뒤에 마을 입구에서 모이기로 하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폭스와 카나리아가 하늘 나무를 벗어나 각자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사라졌다.

아직 무한의 주머니에 아이템들이 제법 남아 있었기에 나는 따로 준비할 필요 없이 마을 입구를 향해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자 티나도 내 뒤를 따라왔다.

남은 시간은 4일. 충분하다면 충분하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거기다 남은 4일 중에 1일은 빼야 했다. 판타즈마 월드 안에서 적용되는 시간 제약에 따라 나를 비롯한 폭스, 카나리아 모두는 게임 시간으로 2일 뒤, 현실로는 내일 게임을 종료하고 최소 12시간을 쉬어야 했다.

“메시지 작성. 받는 이, 염환. 비 접속 시, 최다훈으로 발송.”

[메시지를 작성해주십시오.]

“다훈아, 검은 사자 길드에 대한 최근 정보 좀 모아줘라. 그 밖에 떠오르는 강한 길드나 원래부터 강했던 길드나 단체에 대한 정보도 부탁하마. 특히 음지 쪽 길드는 자세하게 부탁하마. 메시지 완료. 전송.”

띠리링.

[메시지가 전송되었습니다.]

맑게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를 음미하며 도착한 마을 입구에는 폭스와 카나리아가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쌔신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 대신 봄 바람마냥 살랑거리는 분위기를 풍기는 폭스와, 경건하고 조용한 성직자의 분위기 대신 나보다 훨씬 더 수인족 같은 난폭한 분위기를 뽐내는 카나리아. 어느 모로 보나 누구 하나 평범한 사람이 없었다.

“폭스, 둔카가 기거하고 있는 곳은?”

“침묵의 폭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야산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이 때가 때인지라 자신이 믿는 3명의 심복만을 곁에 두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으음.”

나는 무겁게 신음을 쉬었다.

“일단 최대한 들키지 않게 도착한 뒤, 폭스가 먼저 가서 숨어 있을 곳을 찾고 모두 그곳에 숨어 기회를 노린다.”

우리가 무지막지한 속도로 앞의 장애물들을 쓸어버리며 전진했던 것을 생각하면 최대한 들키지 않게 가려면 적어도 하루의 시간이 필요했다.

거기다 폭스가 숨을 곳을 찾고 그곳에서 기회를 노리려면 적어도 하루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한마디로 시간 제약에 걸리기 전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야 했다.

“제길.”

생각 외로 촉박한 시간에 인상을 구기며 욕을 내뱉자 커다란 빵과 꿀, 그리고 우유를 꺼내 먹던 카나리아가 찔끔하며 먹던 음식들을 재빨리 아이템 창에 집어넣었다.

“저번처럼 침묵의 폭포 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 반대쪽으로 가는 게 어떨까요?”

“왜지?”

“몇 남지 않은 족장 후보들은 아직도 크란이 살아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괜히 그쪽으로 가서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폭스의 말에 카나리아는 물론 티나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하긴, 일부러 마찰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물론 족장 후보들을 처리하고 얻을 경험치와 아이템도 탐이 나기는 했지만 지금은 일단 둔카를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럼 슬슬 움직여볼까요?”

폭스의 말을 시작으로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마성의 숲에 들어선 우리를 환영이라도 하듯 짙은 마기가 일행을 휘감았다.

성향이 악으로 치우쳐 있어서 그런지 몸을 휘감는 마기가 오히려 친근하게 다가왔다.

온몸을 휘감는 마기를 떨치기라도 하듯, 폭스의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며칠 전 침묵의 폭포로 갈 때보다는 느린 속도였지만 보통 걸음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였다.

그렇게 몇 시간을 걸었을까. 지루함을 참다못한 카나리아가 투덜거리며 불평을 토해냈다.

“제길, 하다못해 몬스터라도 떼거리로 몰려 나왔으면 좋겠구만. 이거 지루해서 영…….”

“하핫! 이번 족장 선발 과제가 끝날 때까지 그런 기대는 일치감치 접어두는 게 좋을 겁니다. 데스 랜드의 몬스터들은 다른 곳의 몬스터들보다 감각이 뛰어나 지금 섬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느끼고 은신처에 숨어서 나오지 않는 것이니까요.”

카나리아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말한 폭스가 카나리아를 달래듯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폭스의 말대로 지능이 현저히 낮은 몬스터나 레벨이 월등히 높은 몬스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은신처에 숨어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후우, 도착했습니다.”

털썩.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달로 바뀔 때쯤, 마침내 커다란 바위 앞에 멈춘 폭스가 한숨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른 게임처럼 스테미너라는 개념이 없는 판타즈마 월드지만 보통보다 월등히 많은 운동을 하면 저절로 숨이 차고 체력이 떨어지게 설정이 되어 있다. 거기다 체력과 힘보다 민첩성에 거의 모든 스탯을 투자한 폭스는 다른 사람들보다 숨이 더 차는 것이 당연했다.

잠시 숨을 고른 폭스가 바위 너머를 가리켰다.

“이 바위 너머에 작은 동산이 하나 있고 그 동산 뒤에 작은 산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산꼭대기에 작은 호수가 있는데 그 호수에 둔카를 비롯한 3명의 호위들이 살고 있습니다.”

꼭대기에 있는 호수라면 사방이 뚫린 평지라서 기습하기에도 시원치 않았다.

거기다 우리 말고도 둔카를 노리고 있는 족장 후보는 많았다. 특히 그중 가장 위험한 후보는 바로 카드리안이었다.

“폭스, 먼저 가서 숨을 곳을 찾아봐라.”

“예.”

스으윽.

이내 섀도우 아머를 몸에 두른 폭스가 그림자에 스며들듯 사라지자 묘한 침묵이 일행을 덮쳤다. 혼자 말하고 혼자 웃는 카나리아야 그렇다 쳐도 나와 티나는 원래부터 말이 없으니 일행의 침묵은 폭스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내 호수를 염탐하고 온 폭스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적당히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았습니다.”

“다른 후보들은?”

갑작스런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던 폭스가 말을 이었다.

“우리를 제외하면 3팀 정도가 더 있습니다. 한 팀은 카드리안의 팀이고 또 한 팀은 웨어울프족으로 보이는 팀, 또 한 팀은 웨어타이거족으로 보이는 팀이었습니다.”

“으음.”

예상했던 것보다 나쁜 상황에 내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카드리안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2팀이 문제였다. 웨어울프와 웨어타이거, 거기다 카드리안. 이 3팀이 서로 싸우다 자멸했으면 고맙겠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방법은 3가지뿐이다.

3팀에게 서로 시비를 붙여 자멸하게 하는 것. 1111 파티가 단독으로 3팀 모두를 처리하는 것. 다른 팀들이 서로 둔카를 처리하려 할 때쯤 나가서 다른 팀들을 처리하고 둔카도 처리하는 것.

언뜻 보면 쉽지만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이건 확실히 나 혼자 고민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일행에게 의견을 구했다. 모두 잠시 고민하더니 하나 둘 답했다.

“아무래도 세 번째가 가장 괜찮군요.”

“나도 아우처럼 세 번째가…….”

“두 번째가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힘을 추구하는 티나만이 두 번째 방법을 추천했다.

“세 번째로 한다.”

쐐기를 박듯이 떨어진 내 말에 움찔한 티나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등에 있는 단창을 쓰다듬었다.

이내 잠시간의 휴식을 끝으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폭스가 미리 봐둔 장소로 일행을 안내했다.

방금 전처럼 빠른 속도가 아니라 느릿한 움직임이었지만 다른 후보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기에 카나리아 또한 아무런 불평 없이 폭스를 따라 움직였다.

폭스가 봐둔 곳은 말 그대로 숨어서 상황을 살피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목표인 호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었고 산이 원래 그런지 몰라도 주변에 새가 많아서 자그마한 소리를 내도 들킬 염려가 없었다.

거기다 바위가 많고 지형 자체가 다른 곳보다 높아서 자세히 보면 둔카가 기거하는 움막은 물론이고 그 곁에서 기회는 엿보는 나머지 다른 후보들도 보였다.

문제점이라면 주변에 ‘킬러 비’라는 몬스터가 앵앵거리며 돌아다녀 조금 시끄러운 것뿐이었다.

킬러 비는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는 벌로 크기가 5cm 정도로 짙은 노란색을 띠며 보통 100마리 단위로 몰려다니는 것들이었다. 일정한 거처가 없이 사방으로 몰려다니며 좋아하는 먹이를 먹는 몬스터였다.

지능이 낮은 몬스터라 그런지 호수 주변에 흐르는 살기에도 윙윙거리며 돌아다닐 뿐이었다.

[블러드: 멋진 곳이군.]

모처럼 떠오른 만족스러운 미소에 폭스 또한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폭스: 다른 곳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로그아웃하고 휴식을 취하고 올까요?]

폭스의 말에 나와 카나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폭스: 그럼 정확히 12시간 뒤에 보도록 하죠.]

스윽.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서서히 옅어지는 폭스를 시작으로 나에게 손을 흔든 카나리아 또한 서서히 몸이 옅어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완전히 사라졌다.

나 또한 싸움 중간에 시간 제약으로 강제 로그아웃을 당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로그아웃을 해야 했다.

“티나, 12시간 동안 이곳을 잘 지켜라. 혹시나 다른 일족이나 카드리안이 공격을 하면 생각할 필요 없이 도망쳐라.”

“예, 마스터.”

어떻게 설정이 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판타즈마 월드의 NPC들은 유저들의 로그아웃과 로그인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였다.

* * *

익숙한 동작으로 게임을 종료한 뒤 질척거리는 옷을 벗어던지며 캡슐을 나서자 시원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휴우. 미네르바, 스테미너 음식 준비. 온수 가동.”

[예.]

스테미너 음식은 내가 2달 동안 운동을 하는 중간에 근육을 불리기 위해 먹은 음식으로 양이 아닌 질을 우선으로 한 음식이었다. 덕분에 맛은 그저 그랬지만 영양 면에서는 보통 영양제 몇 알보다 훨씬 더 효과가 뛰어났다.

욕실에서 샤워를 한 뒤, 미네르바가 건네주는 옷을 받아 갈아입고 주방으로 가니 김이 솟아나는 스테미너 음식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콩을 갈아 만든 것부터 시작해 갖가지 전통 요리들이었는데 현대 음식에 찌든 내가 먹기에는 당연히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달그닥.

“후우.”

짙은 포만감에 부른 배를 부여잡고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자 그제야 불렀던 배가 보통처럼 돌아왔다. 맛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한 과식에 인상을 찌푸리며 헬스 기계 위에 앉자 차가운 금속이 나를 반겼다.

끼익, 끼익.

철컹.

“휴우.”

그렇게 1시간 정도를 운동하자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어쩔 수 없이 샤워를 한 번 더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샤워를 한 뒤 침대에 눕자 참을 수 없는 수면욕구가 내 몸을 덮쳤다.

“미네르바. 10시간 30분 뒤에 알람 설정.”

[예.]

미네르바의 차가운 목소리와 동시에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마스터, 알람입니다. 마스터, 알람입니다.]

“으음.”

전처럼 진동 기능에 당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축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세수를 하자 그제야 몽롱했던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창밖에는 한쪽으로 지는지 뜨는지 모를 태양이 주홍빛 노을을 빛내고 있었다.

“현재 시간.”

[오전 8시 56분입니다.]

내가 접속하기로 했던 시간은 오전 9시. 촉박한 시간에 인상을 구기며 책상 위의 영양제를 먹은 뒤 캡슐 안으로 들어가 게임 보조 장비를 착용하고 게임에 접속했다.

* * *

나보다 먼저 와 있던 폭스가 나를 맞이했다.

“시간 딱 맞춰 오셨네요. 하하.”

웃음을 흘리며 나를 반기는 폭스와는 달리 그저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인사를 한 티나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눈으로 호수 쪽을 바라봤다.

이내 원래 약속했던 시간에서 5분 정도가 지나자 카나리아가 특유의 과장된 행동을 보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벼, 변비가 심해서…….”

변명 아닌 변명에 작은 한숨을 내쉰 폭스가 티나와 같은 호수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1시간 전부터 3곳 모두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늦어도 30분 안에는 시작할 것 같습니다.”

1시간 전부터 호수를 봐왔다면 적어도 1시간 전에 접속을 했다는 말이었다. 철저한 폭스의 행동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폭스의 입에 보이지 않는 작은 웃음이 맺혔다.

“아마 웨어울프…….”

“움직인다.”

사사삭.

폭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울리는 티나의 말에 재빨리 호수 쪽을 바라보니 역시나 폭스의 예상대로 웨어울프 일족으로 보이는 4명의 거한이 호수 끝자락에 위치한 커다란 움막을 향해 천천히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온몸에 가득한 단단한 근육과 2m는 가뿐히 넘어 보이는 몸집, 그리고 손에 들린 도끼와 대도, 대검은 그들이 모두 나와 같은 힘 위주의 전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둔카는 나와서 웨어울프 일족의 위대한 전사인 나, 호랑나비의 검을 받아라! 으어어어!”

[폭스: 이름 참 유치하네요.]

대검을 휘두른 호랑나비의 입에서 터져 나온 늑대 울음소리가 여운을 남기기도 전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호랑나비의 반대편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불끈거리는 근육으로 몸을 감싼 웨어울프와는 달리 빈약한 몸을 가진 이들이었는데 전사가 2명, 궁수가 2명이었다. 유저들로 이루어진 호랑나비와는 달리 모두 NPC들로 이루어진 그들의 머리 위에는 모두 그다지 밝지 않은 이름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무리에 긴장하며 대검을 쓰다듬는 호랑나비를 지켜보던 검은 머리의 전사 한 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나는 웨어타이거 일족의 전사인 탕가라고 한다. 호랑나비여, 명을 재촉하고 싶지 않거든 당장 사라져라.”

스윽.

탕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탕가의 뒤에서 기립하고 있던 궁수들이 자이언트 보우에 커다란 화살을 걸치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대검을 쓰다듬는 호랑나비를 바라봤다.

갑작스레 펼쳐진 상황에 굳은 얼굴의 내 귀로 폭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폭스: 웨어타이거 일족의 족장, 윤의 아들인 탕가입니다. 탕가와 함께 있는 전사와 궁수가 바로 탕가의 호위입니다. 순수한 실력으로는 카드리안과 비슷한 정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으음.”

이내 살기 어린 표정의 호랑나비를 무시한 탕가가 다른 쪽의 수풀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나와라, 카드리안! 네놈이 울부짖던 웨어라이언의 힘이 고작 토끼처럼 숨어 기회를 노리는 것이더냐!”

“크허어엉!”

탕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수를 뒤흔드는 포효와 함께 수풀에서 차가운 살기를 내뿜는 카드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드리안의 뒤로는 단 한 명만이 있었는데 그 한 명은 바로 블랙 라이언 일족의 족장이었다.

[폭스: 단순하네요. 나오라고 나오다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폭스의 말에 나는 차갑게 웃었다. 아무리 강한 카드리안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NPC다. 조작된 본능대로 움직이는 가련한 인공지능.

내가 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순간에도 호수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둔카가 있는 움막 속에서까지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와 호수는 말 그대로 지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오직 지능이 낮은 킬러 비만이 호수 근처에 있는 꽃에 몰려 꿀을 빨고 있었다.

우우우웅.

호수를 가득 메우는 살기에 호수 근처에 있는 풀들이 미세하게 떨리며 울음을 토해냈다.

호수에 모여 있는 수인족들만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기 스킬을 조절할 줄 아는 강자들. 그럼에도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살기를 흘리는 이유는 바로 기선제압을 위해서였다.

[폭스: 호랑나비가 움직입니다!]

“워우우우우!”

“막아!”

채채챙!

쐐애액.

“크억!”

폭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호랑나비 일행이 둔카가 있는 움막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떨어진 탕가의 명령에 대궁에서 떠난 두 대의 화살이 호랑나비의 일행 중 한 명의 머리와 배를 관통했다. 배를 관통한 화살은 그 위력을 잃지 않고 뻗어나가 나머지 한 명의 유저의 다리에 박혔다. 거기다 기세 좋게 뛰쳐나간 호랑나비는 돌연 사납게 공격하는 엄청난 수의 킬러 비 무리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미친 듯이 검만 휘둘렀다.

“죽어라!”

“어딜!”

까강.

호랑나비의 몸을 양단할 기세로 쏘아진 카드리안의 도가 탕가의 검에 부딪치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토해내자 그 소리를 시작으로 호랑나비의 무리와 탕가의 무리, 그리고 카드리안의 무리가 한곳에서 뭉쳤다.

그리고 엄청난 수의 킬러 비 무리에 갇혀 발버둥치는 호랑나비의 모습에 쓸 만한 생각이 떠올랐다.

“카나리아! 아까 먹던 것을 내놔라!”

“아, 아까 먹던 것?”

“아까 마을 입구에서 먹던 것 말이다!”

격한 외침을 토해내는 내 모습에 움찔한 카나리아가 급한 손놀림으로 반쯤 뜯어먹다 남긴 빵을 던졌다.

“제길, 빵 말고 꿀!”

“아!”

짜증 섞인 내 외침에 그제야 이해하고는 카나리아가 내 머리만 한 단지를 건넸다.

뽕.

단지의 뚜껑을 열어보니 3분의 2 가량 차 있는 꿀이 특유의 단내를 풍기며 질퍽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킁킁.

꿀단지를 옆에 두고, 가지고 있는 포션을 몽땅 꺼내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일행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드디어 특히 달콤한 향이 나는 포션을 발견하고 꿀단지 속에 부었다. 뚜껑을 닫고 거칠게 흔든 다음 다시 뚜껑을 열자 방금 전보다는 부드럽게 풀린 꿀이 출렁이며 나를 반겼다.

갖가지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포션과 조합된 꿀을 들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자 잠자코 나를 지켜보던 일행 또한 나를 따라 일어섰다.

“자, 시작하자.”

“뭘?”

눈치 없게 반문하는 카나리아의 모습에 인상을 구기기가 무섭게 호수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니 블랙 라이언 일족의 족장이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던 인간의 탈을 벗고 거대한 사자의 모습으로 변해 양손에 잡힌 궁수들의 목을 서서히 조이고 있었다.

“크허어엉!”

우드득.

블랙 라이안 일족 족장의 포효가 터지기가 무섭게 다급하게 야수화하려던 궁수들의 목이 너무나 간단하게 부러지며 혀를 빼물었다.

“우탕가! 우랑가!”

카드리안과 치열한 접전을 나누던 탕가가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부하들의 이름을 외치며 블랙 라이언 일족의 족장에게 몸을 날리려고 했지만 곧이어 쏟아지는 카드리안의 도에 신음을 삼키며 검을 들어 카드리안을 견제했다.

“우어어어!”

쿠구궁.

거기다 움막 속에 있던 둔카 또한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웨어베어 일족 특유의 커다란 몸을 날려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손에 들린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둔카의 호위라는 3명의 웨어베어 일족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의문스러웠지만 현재 그런 것을 신경 쓸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타다닥.

점점 더 치열해져가는 상황에 한 손에는 검을, 또 한 손에 단지를 들고 호수를 향해 몸을 날리자 일행 또한 각자의 무기를 손에 쥐고 내 뒤를 따라붙었다.

“티나가 카드리안과 탕가의 싸움에 끼어들어 둘의 발을 붙잡아라. 카나리아는 블랙 라이언 일족의 족장을 맡고 폭스는 나와 함께 둔카를 친다!”

“네!”

“나보고 저 괴물을 처리하라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불평을 토해내는 카나리아를 뒤로하고 마침내 호수에 도착해 잔뜩 숨을 들이마신 내 입에서 제왕의 포효가 폭발했다.

“크허어어엉!”

“크허어엉!”

“우어어엉!”

내 포효에 맞서기라도 하듯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지는 포효를 무시하고 한 손에 든 단지를, 접전을 치르고 있는 카드리안과 탕가의 머리 위로 던지며 폭스에게 눈짓을 주자 섀도우 아머를 몸에 두른 폭스가 날카로운 기합을 내뱉으며 단지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쨍그랑.

촤악.

“뭐, 뭐냐!”

단지가 산산조각이 나며 쏟아지는 찐득한 꿀을 무방비로 맞은 탕가와는 달리 폭스가 단검을 던질 때부터 이미 내 눈치를 보고 있던 카드리안은 재빨리 몸을 날려 꿀이 쏟아지는 범위 밖으로 피했다.

보통 꿀이었다면 그 특유의 찐득함으로 넓게 퍼지지 않았겠지만 액체 상태의 포션을, 그것도 킬러 비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냄새가 나는 포션을 넣고 흔들어 섞었기에 상태는 물보다 조금 더 끈적거리는 정도였다.

“네놈은 누군데 감히 무슨……!”

위이이잉.

몸을 타고 흐르는 꿀을 거칠게 닦으며 나를 향해 살기를 흘리던 탕가가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킬러 비 무리에 얼굴을 굳혔다.

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꿀이다. 거기다 달콤한 포션의 냄새까지 추가되어 있었으니 킬러 비들에게는 호랑나비보다 탕가가 훨씬 더 먹잇감으로 보일 터였다. 윙윙거리며 탕가의 주변을 맴돌던 킬러 비들이 이내 탕가를 덮쳤다.

위이이이잉.

“크허어엉!”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탕가의 주위로 더욱더 많은 킬러 비들이 모여들어 탕가를 괴롭혔다. 레벨 10도 되지 않는 킬러 비라도 그 수가 100을 넘어 200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엇보다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더 커다란 킬러 비를 검으로 죽이는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있다면 단 한 가지, 검면으로 쳐 죽이는 것뿐이었다.

탕가 또한 그 사실을 깨닫고 검을 기울인 채 열심히 휘둘러 킬러 비들을 죽이고 있었지만 탕가의 몸에 있는 꿀을 먹기 위해 달려드는 킬러 비는 점점 늘어나 이제 600마리가 넘어 보였다.

그런 탕가의 모습을 주시하던 카드리안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도를 들어올려 나를 가리켰다.

“신성한 시험을 어설픈 수작으로 더럽히다니. 이번 시험이 끝나면 붉은 어금니께 네 잘못을 고하고 너를 일족에서 추방시킬 것이다.”

“그건 불가능할 거다.”

의문 섞인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카드리안을 바라보며 나는 차갑게 웃었다.

“넌 여기서 죽을 테니까.”

“감히… 허억.”

꽈가강!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둔카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내 등을 노리고 도를 들어올렸던 카드리안이 다급히 숨을 삼키며 재빨리 몸을 날리자 방금까지 카드리안이 있던 자리에 무언가 검은 물체가 꽂히며 엄청난 폭음을 터트렸다.

주변의 공기를 찢어발기며 작은 토네이도를 만드는 단창. 바로 티나였다.

“수, 숲의 마녀……!”

쉬익.

챙!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추스르는 카드리안의 검과 티나의 단창이 부딪치며 토해낸 날카로운 금속음에 내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됐으니 이제 남은 것은 둔카를 처리한 뒤 카드리안을 죽이고 귀환하는 것뿐.

은은하게 빛나는 주먹으로 블랙 라이언 일족 족장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는 카나리아를 뒤로하고 둔카를 향해 몸을 날리는 내 옆으로 섀도우 아머를 걸친 폭스가 따라붙었다.

“후욱, 후욱. 너희들은 또 어떤 놈들이냐!”

“웨어라이언 일족의 블러드. 네 목을 가지러 왔다.”

“우어어어!”

갑작스레 전개된 상황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둔카가 우렁찬 고함을 토해내며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둘렀다.

죽기 직전의 발악과도 같은 둔카의 행동에 내 얼굴에 의문이 흐르는 것도 잠시, 이내 점점 몸집을 불려가는 둔카의 모습에 폭스의 입에서 경악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야수화!”

“우워어어!”

폭스의 외침에 대답이라도 하듯 기다란 포효를 터트린 둔카의 몸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커졌다.

“폭스, 왼쪽을 맡아라!”

타다닥.

힘만 보자면 거의 카인에 버금가는 둔카였다. 그런 둔카가 야수화를 한다면 적어도 나와 폭스 그리고 티나와 카드리안, 이 4명이 합공을 해야 겨우 상대가 될 것이다.

“크허어엉!”

까강.

몸을 비비며 도끼를 휘두르는 둔카의 품속으로 몸을 굴려 파고든 뒤 전사의 외침과 함께 휘두른 검이 ‘까강!’ 하는 소리를 내며 둔카의 도끼에 막혔다.

이내 도끼를 들지 않은 손을 하늘로 치켜드는 둔카의 행동에 황급히 몸을 굴리자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커다란 손이 박혔다. 짙은 갈색 털이 빼곡히 자리 잡은 커다란 손에 인상을 구기는 것도 잠시, 이내 들려오는 폭스의 기합에 황급히 몸을 피하자 야수화하지 못한 둔카의 몸 위로 단검이 쏟아졌다.

퍼버버벅.

“우어억!”

가슴 부근에 꽂힌 단검을 거칠게 떼어낸 둔카가 커다란 포효를 내지르며 양팔을 휘두르자 간신히 킬러 비 무리에서 빠져 나와 포션을 먹고 있던 호랑나비가 둔카의 팔에 맞아 바닥에 처박혔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이 꺾여 거친 숨을 몰아쉬는 호랑나비의 모습에 내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폭스! 엄호해라!”

“예!”

쉬시식.

호랑나비를 향해 몸을 날리는 내 뒤로 따라붙으며 단검을 날리는 폭스 덕에 거칠게 발광하는 둔카 또한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아직 끝나지 않은 야수화 과정을 거치며 사방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꺼억, 꺼억…….”

스르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향해 손을 내뻗은 호랑나비가 서서히 하늘로 솟구치는 내 검에 절망적인 눈빛을 흘렸다.

휘익. 퍽.

[레벨이 올랐습니다.]

내 얼굴을 적시는 기분 좋은 미지근함과 함께 울려 퍼지는 여인의 목소리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캐릭터 창을 열어 보너스 스탯을 힘에 투자하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 바람에 휘날리는 호랑나비의 모래에서 무언가가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빛의 정체는 작은 흑요석(黑曜石)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반지였다.

“우어엉!”

“블러드 님!”

‘제길!’

둔카의 고함과 함께 들리는 폭스의 다급한 목소리에 반지의 설명을 볼 생각도 못하고 재빨리 아이템 창에 넣은 뒤 몸을 돌리자 이제는 완벽하게 야수화한 둔카를 향해 미친 듯이 단검을 던지며 거리를 벌리던 폭스가 나를 보며 외쳤다.

“블러드 님, 야수화를!”

“제길……!”

확실히 둔카를 상대하려면 야수화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욕설을 내뱉으며 주변의 위험을 살핀 뒤, 재빨리 검으로 내 배를 그어 체력을 3분의 1로 만들어 야수화를 시전하자 내 몸을 타고 흐르던 기운들이 한층 더 빨라지며 몸을 헤집었다.

우드득. 우득.

콰직. 콰지직.

“크윽……!”

비록 아이가 꼬집는 정도의 통증이라 아프지는 않았지만 온몸의 뼈가 자리를 이탈하고 근육들이 따로 노는 기분은 좋지 않은 것이었다. 마침내 제자리를 이탈한 뼈들이 각자 변한 모습으로 다른 자리를 찾아가고 근육 또한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머금고 자리를 잡자 전보다 몇 배는 강력해진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크르르.”

내 입을 비집고 흘러나온 나직한 울음소리가 살기와 어우러져 바람을 타고 호수 전체에 퍼졌다.

“우엉?”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웨어베어 일족 특유의 둔한 몸놀림으로 도끼를 휘두르던 둔카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잠시, 이내 우렁찬 고함을 터트리며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쿵쿵쿵!

푸드드득.

호수 수면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커다란 땅울림에 호수 주변에 있던 새들이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내 몸에 달라붙는 킬러 비들을 모두 쳐낸 둔카가 묘한 감정이 섞인 눈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어…! 주, 죽인다! 주, 주인 무섭다. 죽지 않으려면… 죽인다아아!”

후웅. 우지끈.

절규하듯 마지막 말을 토해낸 둔카가 커다란 팔을 휘두르자 팔에 맞은 나무가 수수깡마냥 맥없이 부러져 바닥을 굴렀다. 그는 다시 ‘주인, 무섭다. 죽인다.’ 하는 말을 되풀이하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길!’

후우우웅. 꽈강!

힘과 힘의 대결! 허공에서 내리꽂히는 둔카의 도끼와 바닥에서 올려 치는 내 검이 부딪치며 커다란 굉음을 터트렸다. 그 엄청난 굉음에 호수 근처에서 전투를 하던, 심지어 광분해 킬러 비를 쳐 죽이던 탕가마저도 놀란 눈으로 나와 둔카를 바라봤다.

“으어어어!”

“큭.”

카가각.

우렁찬 포효와 함께 일순간 검을 누르는 힘이 불어나며 검을 긁어 내렸다. 보통 사람과 보통 검이라면 그대로 양단되어 피를 쏟을 정도의 강력한 힘에 인상을 구기며 최대한 얼굴을 들어올려 둔카의 얼굴을 향해 제왕의 포효를 토해냈다.

“크허어엉!”

“우억.”

바로 얼굴 앞에서 터진 제왕의 포효에 둔카가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뒤뚱거렸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을 양단할 기세로 내리누르던 도끼의 힘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으아아!”

일격필살은 무리였기에 검을 들어 둔카의 오른팔을 내려치자 멍하니 침을 흘리던 둔카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왼팔을 들어 내 검을 막았다.

후우웅.

퍽.

“컥.”

살이 짓뭉개지는 소리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것도 잠시, 내 가슴을 강타하는 둔카의 오른팔에 250cm에 가까운 내 몸이 붕 떠올라 바닥에 처박혔다. 순식간에 바닥을 보이는 체력에 재빨리 무한의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내 입에 들이붓자 재빨리 반쯤 차오른 체력이 서서히 차올랐다.

“우어어어!”

다시 이어질 둔카의 공격에 재빨리 일어나 검을 고쳐 잡았지만 둔카는 내 검에 맞아 거의 잘리다시피 한 팔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둔카가 비명을 지를 때마다 새하얀 뼈가 보이는 둔카의 팔꿈치가 덜렁거렸다.

‘기회다!’

“폭스! 바로…….”

“죽어라!”

서걱.

“우어어억!”

검을 고쳐 잡은 내가 둔카의 뒤에 있는 폭스에게 신호를 보내며 둔카를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여태까지 그 존재를 잊고 있었던 탕가가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은은한 검기가 서려 있는 탕가의 검에 마침내 왼쪽 팔꿈치가 완전히 잘려 나간 둔카가 고함을 지르며 몸을 빼는 탕가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이내 재빨리 몸을 빼낸 탕가가 내 옆으로 다가와 둔카를 향해 자세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네놈이 한 짓을 생각하면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지만 지금은 일단 동맹을 하는 것이 어떠냐?”

“동맹?”

“그래, 네놈도 카드리안이 족장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을 테지?”

“물론이다.”

내 대답에 살기 어린 미소를 흘린 탕가가 말을 이었다.

“내가 둔카를 붙잡아둘 동안 최대한 빨리 카드리안을 죽여라.”

‘호오, 탕가가 이런 캐릭터였나?’

겉으로는 진정한 수인족인 척 위선을 떨던 탕가가 내 앞의 비열한 웃음을 흘리는 모습에 나는 비웃음이 나왔다. 분명 끌리는 제안이기는 했지만 탕가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런 내 생각을 눈치 채고 탕가가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웨어카우 일족의 머리다. 너는 둔카의 머리를 가져라. 이만하면 좋은 조건 아닌가? 이 동맹은 나 탕가의 말 속에 살아 숨 쉬는 언령으로 이루어진 동맹이다.”

“으음.”

“하겠는가?”

탕가가 웃음을 흘리며 내 고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지금까지 소수 일족 연합의 족장을 처리한 웨어타이거 족장 후보가 없는 지금, 탕가는 웨어카우 일족의 머리만 있어도 족장이 되는 것이기에 탕가의 얼굴에는 한줄기 기대가 깔려 있었다.

어느 족장 후보가 머리를 가진 다른 족장 후보를 죽일 경우, 그 머리가 드롭 되는 설정이 있는데 탕가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확실히 NPC인 탕가가 언령의 이름을 빌려 동맹을 한 것이면 적어도 배신당할 걱정은 없었다. 물론 그 뒤의 일이 문제겠지만 그 전에 내가 배신을 하면 되니 상관없었다. 난 약속에 연연하는 멍청한 NPC와는 다르니까.

“좋다.”

“좋아, 동맹은 성립됐다. 크허어엉!”

파박.

기세 좋게 포효를 토해낸 탕가가 검을 휘두르며 둔카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나 또한 동맹의 내용을 이수하기 위해 티나와 혈전을 치르는 카드리안에게 가기 전에 둔카에게 단검을 날리는 폭스에게 파티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블러드: 폭스, 탕가와 잠시간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너무 적극적으로 도와주진 마라. 그리고 탕가가 둔카에게 허튼 짓을 하지 못하게 막아라.]

[폭스: 하핫. 예.]

바쁘게 움직이며 둔카의 도끼를 피하는 와중에도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는 폭스를 뒤로하고 포션을 하나 더 들이켠 뒤 카드리안을 향해 몸을 날리자 티나의 창을 막기에 급급하던 카드리안이 숨을 삼키며 나에게 도를 휘둘렀다.

카강!

도와 검 그리고 창, 3가지 무기가 부딪치며 내는 쇳소리에 카나리아를 몰아붙이던 블랙 라이언 일족의 족장이 막 카드리안을 향해 몸을 날리려다 말고 티나의 눈치를 보고는 다시 카나리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야압!”

진정한 강자존이 무엇인지 보여주기라도 하듯, 블랙 라이언 일족의 족장을 눈빛으로 물린 티나가 재빨리 빼낸 단창을 들어 내 검과 얽혀 있는 도를 빼내려는 카드리안을 향해 던졌다.

퍽. 서걱.

“크악!”

“카드리안 님!”

단창이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한 카드리안의 배를 꿰뚫고 땅에 박혀 부르르 떠는 사이 내 검이, 멍한 표정으로 티나를 바라보는 카드리안의 옆구리를 스쳤다.

신음을 삼키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카드리안의 모습에 카나리아를 몰아붙이던 블랙 라이언 족장이 비명을 지르며 카드리안에게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죽어라, 개새끼야!”

“허억!”

푸욱.

잔뜩 독이 오른 카나리아의 외침과 함께 블랙 라이언 족장의 목에 카나리아의 손이 꽂혔다. 목을 헤집는 이물질에 잠시 움직임을 멈춘 블랙 라이언 족장의 얼굴에 카나리아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이 개새끼! 아니, 사자새끼! 나를 가지고 놀아? 죽어, 죽어, 죽어!”

퍽퍽퍽퍽!

콰지직.

이제껏 쌓인 분노를 폭발시키기라도 하듯, 광기에 휩싸인 얼굴로 블랙 라이언 족장의 얼굴을 때리던 카나리아가 손가락을 모아 블랙 라이언 족장의 눈에 쑤셔 박았다.

쑤욱.

“크크크……!”

블랙 라이언 족장의 눈에 쑤셔 박은 손가락을 꺼내 낮은 광소를 흘리는 카나리아의 모습에 피가 쏟아지는 상처를 지혈하던 카드리안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이내 땅에 박힌 단창을 뽑은 티나가 카드리안의 목에 창을 들이대자 분한 표정으로 나와 티나를 노려보던 카드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따르지 않던 숲의 마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다니… 역시 아버지가 기대를 걸 만도 하군.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자라는 것 또한 알겠어.”

“할 말은 그게 다인가?”

스르릉.

피가 덕지덕지 묻은 검을 들어올리는 내 모습에 무언가 말하려던 카드리안이 눈을 감았다.

언제 야수화를 할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검을 잡은 내 손에 강한 힘이 실렸다. 티나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인지 단창의 날 부분을 카드리안의 관자놀이 부분에 댄 채, 무언의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죽여라.”

순수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듯,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카드리안의 목소리에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끓어올랐다.

“왜 야수화하지 않는 거냐. 만약 야수화를 했다면 상황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을 텐데?”

나직한 내 물음에 카드리안이 감았던 눈을 떠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죽음마저 받아들이는 고귀한 야…….”

“미친 새끼.”

휘이익.

퍽!

단번에 카드리안의 목을 끊은 검이 다시 한 번 회전해 바닥에 쓰러지는 카드리안의 등에 꽂혔다. 흙에 얼굴을 처박고 거세게 몸을 떠는 카드리안의 모습에 나는 차갑게 웃었다.

‘죽음마저 받아들이는 고귀한 야수? 크큭. 개자식아, 네놈이 말한 고귀한 야수가 이런 모습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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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둔카와 카드리안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도 잠시, 머릿속에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내 보너스 스탯을 투자한 뒤 검을 고쳐 잡으며 둔카에게 몸을 날리려는 내 발 밑에 ‘툭’ 하고 무언가가 걸렸다. 바로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카드리안의 몸에서 나온 낡은 책이었다.

‘무공서!’

마법서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마법서 특유의 오망성이 없고 않고 알아듣지 못할 한자가 그려져 있는 책은 바로 얼마 전 업데이트된 무공서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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