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4 무공서, 그리고 족장
“티나, 폭스를 도와라.”
“예, 마스터!”
쉬식.
힘찬 대답을 토하며 신형을 날리는 티나를 뒤로하고 무공서를 줍자 낡은 책 특유의 뻣뻣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무공서에 가려 보지 못한 웨어카우 족장의 머리를 줍자 맑은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어째서 카드리안에게 무공서가… 아!’
본래 무공서는 몬스터들에게 랜덤으로 나뉘게 되어 있는데, 같은 일족인 내 입장에서 카드리안이 몬스터가 아닐 뿐이지 다른 유저들의 입장에서 보면 카드리안 또한 몬스터였다. 그것도 거의 중급 보스에 달하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무공서를 아이템 창에 넣은 뒤, 무공서를 클릭한 다음 아이템 설명을 누르자 ‘파밧’ 하는 소리와 함께 무공서에 관한 간략한 설명이 나타났다.
-삼무보(三無步)-
살수계의 전설적인 살수 부동살검(不動殺劍)의 은형보법(隱形步法). 사람들이 이 보법에 대해 말하길, ‘소리도 없다(一無), 흔적도 없다(二無), 하다못해 사람마저 없으니(三無), 하늘 아래 그 누가 그를 잡을 것이더냐!’라 한다. 소리, 흔적, 사람. 이 3가지가 없다고 하여 ‘삼무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보법이다.
종류- 보법(步法), 은형술(隱形術).
‘보법인가…….’
학교에 다닐 때 무협지에 거의 광적으로 빠져 있었기에 보법이 무엇인지 대략이나마 알고 있었다.
분명 민첩성이 떨어지는 나에게 필요한 것이기도 했지만 확실히 말해 폭스와 같은 어쌔신에게 더 필요한 무공서였다. 그렇다고 폭스에게 이 보법을 아무런 대가 없이 줄 마음은 없었다. 이에 걸맞은 아이템이나 그런 것과 교환하면 모를까.
“헉, 헉, 제길… 간신히 죽였네.”
마침내 블랙 라이언 족장의 숨통을 완전히 끊고 온몸에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카나리아가 나에게 다가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우를 안 도와줘도 되는 거야?”
“지금…….”
“우어어어!”
퍼억.
입을 열기가 무섭게 울려 퍼지는 우렁찬 함성에 이은 묵직한 타격음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무언가 검은 물체가 허공을 날아 나와 카나리아의 옆 땅에 떨어졌다.
몸에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 옷을 입은 ‘검은 물체’의 정체는 바로 폭스였다.
“하하. 역시 일격필살은 무리였네요. 민첩성이 높아서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일격필살이라고? 저 둔카에게? 포션을 입에 털어 넣으며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리는 폭스의 모습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웨어베어 일족 특유의 엄청난 방어력과 체력 때문에 내가 바로 앞에서 칼을 박아 넣어도 일격필살이 될 가능성이 채 10%를 넘지 않는 것이 바로 둔카였다.
거기다 빌어먹을 야수화 때문에 그 확률은 3%가 채 안 될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방금 카드리안이 드롭 한 것이 무공서 맞지요? 저도 공지로 보고 실제로는 처음 보네요. 뭐예요? 초절정 무공서? 절정 무공서?”
제길. 또 그건 언제 본 거냐. 3번째 포션을 마시며 장난스럽게 묻는 폭스의 모습에 내 얼굴이 다시 한 번 구겨졌다. 마음 같아서는 마법서라고 우기고 싶었지만 무공서라고 확신하는 폭스의 태도에 어쩔 수 없었다.
“삼무보다.”
내 입에서 나온 무심한 목소리에 잠시 실망스러운 표정을 흘린 폭스가 다시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부동살검의 은형보법 말인가요? 어쌔신들의 꿈이라는 그 무공서요?”
자신이 어쌔신이라는 것을 강조라도 하듯, ‘어쌔신들의 꿈’이라는 대목에서 목소리를 높인 폭스가 마법사가짱이얌과 똑같은 뱀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흥, 그런다고 내가 멍청하게 건네줄 줄 아냐.’
멍청하게 살던 과거였다면 거절 못하고 줬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 나 같은 전사에게도 제법 유용하게 쓰이지. 그건 그렇고, 슬슬 끝을 내야겠군. 모두 준비해라.”
스스슥.
검을 들어올리며 말하자 폭스가 똥 씹은 표정으로 자세를 취하며 내 옆으로 다가섰다. 티나와 카나리아 또한 무기를 들어 자세를 취한 뒤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이제 호수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나와 일행, 그리고 둔카와 탕가뿐이었다.
“폭스, 나를 엄호하면서 카나리아와 함께 주변에 있을 다른 족장 후보들을 경계해라. 티나, 야수화를 해라.”
“크허어엉!”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몸을 날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렁찬 제후의 포효를 터트린 티나의 몸이 들썩이며 점점 크기가 커졌다.
“비켜라! 크허어엉!”
“허억.”
“우엉!”
탕가와 둔카의 몸이 뒤섞여 전투를 치르는 중간에 끼어들어 제왕의 포효를 터트리자 둔카에게 검을 휘두르던 탕가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열심히 도끼를 휘두르던 둔카 또한 제왕의 포효에 충격을 입고 멍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우어어어!”
“크허엉!”
푸욱.
이내 커다란 포효와 함께 나를 향해 도끼를 내려찍으려던 둔카의 어깨에 웬만한 성인 남자의 허벅지 굵기만 하게 커져버린 티나의 단창이 꽂혀 둔카의 가죽을 찢어발기고 근육을 헤집었다.
“우어어!”
한 손으로 검끝을 잡고 검을 뉘인 채, 검면으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짓누르는 엄청난 압력에 신음을 삼키며 몸을 빼자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둔카의 팔이 박혔다.
퍽.
웬만한 갑옷 정도는 손쉽게 뚫는 날카로운 손톱을 모은 둔카의 손에 땅이 뒤집히며 흉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저려오는 팔을 내려 검을 고쳐 잡는 내 곁으로 다가온 탕가가 거친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크윽, 카드리안은 확실하게 죽인 건가?”
“물론이다.”
나는 둔카를 중심으로 천천히 돌며 자세를 잡았다. 일그러졌던 탕가의 얼굴이 순식간에 웃음으로 뒤덮였다.
“그, 그럼 웨어카우 일족의 머리는?”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묻는 탕가의 모습에 내 얼굴에 싸늘한 웃음이 맺혔다.
슬슬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탕가는 둔카와의 전투로 만신창이. 적어도 2번의 공격이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어서 빨리 머리를 넘겨라!”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탕가에게 다가가자 연신 나를 재촉하던 탕가가 내가 머리를 건네주려고 다가오는지 알고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미안하지만 머리는 못 주겠군.”
“뭐? 그게 무슨… 헉!”
퍼억.
무심한 내 말에 의문을 토하던 탕가가 순간 숨을 삼키며 몸을 날리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내 검이 탕가의 가슴을 찌른 후였다.
크기와 데미지는 도이면서도 도와는 달리 끝이 날카롭게 서 있는 거인의 단검이 파고든 탕가의 가슴이 순식간에 걸레가 되며 피를 쏟아냈다.
“커컥, 제, 제길… 크르릉.”
야수화 하려는지 피를 토해내며 욕을 내뱉는 탕가의 가슴이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후우웅.
퍽!
난폭하게 뽑아낸 검에 탕가가 눈을 까집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이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낼 시간도 없이 탕가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가볍게 허공을 가른 검이 부들부들 떨리는 탕가의 목에 박혔다.
“크하압.”
부욱.
“꾸르륵.”
힘찬 기합과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아래로 당기자 두꺼운 공책을 찢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탕가의 입에서 가래 끓는 소리와 피 거품이 쏟아져 나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구토를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끔찍한 모습을 무시 하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보너스 스탯을 올린 뒤 검을 고쳐 잡고 티나와 열띤 공방을 벌이는 둔카에게 몸을 날렸다.
“우우우…….”
“키하앙!”
몸 여기저기에 폭스가 던진 단검을 덜렁거리며 간신히 티나의 공격을 막는 둔카가 나를 바라보며 위협적인 울음을 흘리자 조용히 기회를 엿보던 티나가 사납게 울며 둔카에게 달려들었다. 이제 싸움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는지 티나는 물론이고 둔카의 무기에서도 각자 속성에 맞는 검기가 피어올랐다.
본래 다른 종족에 비해 마나가 터무니없이 적은 수인족의 특성 상, 검기를 끌어올리는 것은 일격필살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나 또한 얼마 있지 않은 마나를 끌어올리자 군데군데 날이 빠진 검에서 짙은 핏빛의 검기가 조용히 피어올라 검을 휘감았다.
“크허어헝!”
“키하아앙!”
“우어어엉!”
내 입에서 제왕의 포효가 터져 나오기가 무섭게 티나의 입에서는 제후의 포효가, 둔카의 입에서는 이름 모를 우렁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야수화한 3명의 족장 급 수인족이 토해낸 포효에 단검을 날리던 폭스는 물론 카나리아 또한 신음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죽어라!”
“우엉!”
쿠구궁.
힘찬 기합과 내려친 검과 둔카의 도끼가 부딪치며 커다란 굉음을 토해냈다. 야수화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야수화를 한 지금 나와 둔카의 힘은 거의 동급이었다. 거기다 나에게는 티나까지 있단 말이지!
“공격해라!”
“키하앙!”
깡!
날카로운 울음을 토해내며 달려든 티나를 본 둔카가 황급히 도끼를 회수해 티나를 향해 휘둘렀다. 둔카의 도끼와 티나의 단창이 부딪치며 낸 날카로운 쇳소리에 호수가 울렸다.
검기와 검기가 부딪치는 격돌에 검과 도끼의 교차점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졌다.
팔이 두 개라면 모르지만 팔이 하나인 둔카가 나와 티나의 합공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푸욱.
“우어엉!”
베기에서 찌르기로 바뀐 내 공격에 배를 허용한 둔카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자 둔카의 배에 박힌 검이 마구 요동치며 둔카의 속을 헤집었다.
둔카 또한 완전히 멍청이는 아닌지 한 손으로는 티나를 견제하면서 뒤로 물러나 몸에 박힌 검을 뺀 뒤, 커다란 몸을 굴려 나와 티나와 간격을 벌렸다.
이내 상처를 추스르는 둔카에게 맹렬하게 회전하는 마나를 두른 티나의 창이 내리꽂혔다. 티나의 주특기인 토네이도 스피어였다.
콰가가각.
“우어엉!”
극적인 차이로 몸을 피한 둔카의 옆구리를 스친 단창이 그대로 땅에 꽂히며 주변의 땅을 헤집어 엄청난 먼지를 일으켰다.
갑작스레 시야를 가리는 먼지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이내 먼지를 가르며 다가오는 엄청난 기운에 황급히 검을 들어 방어하자 ‘쿠왕!’ 하는 소리와 함께 내 검과 부딪힌 무언가가 ‘철크덩’ 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검은빛을 내뿜는 짧은 창. 바로 티나의 단창이었다.
쩌적.
가뜩이나 손상이 많이 된 검이 둔카의 힘을 실은 티나의 단창을 맞은 덕에 자잘한 금이 가며 위태로운 빛을 발했다.
‘제길.’
최근 며칠 동안 족장 퀘스트에 신경 쓰느라 검을 수리하지 못한 것이 커다란 실수였다.
“우어엉!”
멈칫하는 나를 본 둔카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나를 향해 몸을 날리며 도끼를 휘둘렀다. 묵직한 파공음을 내는 도끼에 인상을 구기며 재빨리 몸을 빼자 도끼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며 나를 위협했다.
“마스터!”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하는 나를 지켜보며 기회를 노리던 티나가 비명을 지르며 뛰어들어 단창으로 둔카의 도끼를 막았다.
“우엉!”
챙.
갑작스레 나타난 티나의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고 티나의 공격을 여유롭게 받으며 거리를 벌리던 둔카가 도끼에 힘을 주며 이번에는 티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둔카의 모습에 내 입에서 부득부득 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쳇, 족장은 족장이라 이거냐.’
점점 아무는 둔카의 상처에 따라 티나를 몰아붙이는 둔카의 도끼질도 점차 빨라졌다.
‘큭, 제길!’
[블러드: 모두 합공해서 둔카를 처리한다!]
파바박.
파티 음성을 남기기가 무섭게 한껏 뛰어올라 허공을 날아 둔카의 근처로 착지하자 무섭게 티나를 몰아붙이던 둔카가 이번에는 타깃을 바꿔 나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까강!
쩍.
둔카의 도끼와 부딪친 검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토해냈다. 검면에 떠오른 얇은 금이 한층 더 벌어졌다.
쩌저적.
도끼에 가해지는 둔카의 힘이 강해질수록 검에 간 금이 점차 굵어지며 날카로운 소음을 흘렸다.
“크허어엉!”
“우욱.”
퍼버벅.
내 입에서 터진 전사의 외침에 잠시 움찔한 둔카의 몸에 수십 개나 되는 폭스의 단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꽂혔다. 어떠한 스킬을 썼는지 손잡이만 남겨두고 박혀버린 수십 개의 단검에 막 도끼를 치켜든 둔카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휘청거렸다.
“우어어엉!”
“으랏차!”
퍼억.
몸에 박힌 단검을 빼내려고 미친 듯이 몸을 비틀던 둔카의 등 뒤로 우렁찬 기합과 함께 내뻗은 카나리아의 주먹이 작렬하며 은색의 빛을 뿌렸다.
카나리아 또한 특수한 스킬을 썼는지 둔카의 몸에 작렬한 주먹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이 둔카의 몸을 휘감자 빠른 속도로 아물던 상처가 다시 피를 쏟아냈다.
“키하앙!”
자신의 단창을 만진 것에 보복이라도 하듯, 날카로운 울음을 토해낸 티나의 손에서 다시 한 번 토네이도 스피어가 쏘아졌다.
쑤우우웅.
푸확!
“우어어억!”
공기를 찢어발기며 쏘아진 단창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둔카의 오른쪽 무릎을 뚫고 바닥에 박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릎 뼈가 바스러진 엄청난 통증에 둔카의 입에서 여태껏 나온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끼를 감싼 검기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쿠궁.
둔카의 육중한 몸이 쓰러지며 생긴 커다란 진동에 근처의 땅이 들썩였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일행을 경계하는 둔카를 향해, 주먹에 은은한 은광(銀光)을 두른 카나리아가 도약했다.
순간, 하나밖에 남지 않은 둔카의 팔이 막 허공에서 주먹을 뻗으려는 카나리아를 향해 쏘아졌다.
“피해라, 카나리아!”
“헉?”
쉬시식.
콰드득.
도끼를 들지 않은 둔카의 손이 무방비 상태의 카나리아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힘을 주자 카나리아의 머리가 너무나 쉽게 터지며 하얀 뇌수와 피를 뿌렸다.
털썩.
“우우. 주인, 무섭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카나리아의 몸을 땅에 팽개친 둔카가 붉게 물든 자신의 손을 할짝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는 한 발로 몸을 지탱했다.
어떠한 각오마저 느껴지는 둔카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내 귀로 폭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폭스: 카나리아 님이 빠진 이상, 빨리 끝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 다른 족장 후보들이 올지 모릅니다.]
폭스의 말대로 언제 다른 종족의 족장 후보나 소수 일족 연합의 수인족들이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거의 모든 힘을 다 쓴 지금, 다른 후보나 수인족을 만나면 죽을 것이 뻔했다.
“티나, 속전속결이다.”
“예.”
스윽.
둔카를 향한 티나의 창에서 차가운 살기가 뻗쳐 나와 호수를 잠재웠다.
폭스 또한 비장한 눈빛으로 섀도우 아머를 두른 채 한 손에는 몇 개의 단검을, 또 한 손에는 기묘한 모양의 단검을 들고 서서히 몸을 움직여 둔카의 주위를 맴돌았다.
나 또한 흉하게 망가진 검을 들어 자세를 취하며 둔카와의 거리를 좁혔다.
“후욱, 후윽. 으르릉!”
둔카 또한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멈추고는 낮은 목울림을 흘리며 서서히 거리를 좁히는 일행을 향해 살기를 흘렸다.
피부를 찌릿하게 울리는 살기의 홍수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폭스였다.
“흐아압.”
쉬시시식.
채채챙.
힘찬 기합을 내며 몸을 날린 폭스의 손에서 쏘아진 단검이 둔카의 도끼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토해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폭스의 손에 들린 단검이 둔카의 무릎을 찌른 후였다.
푸욱.
“우어어엉.”
“이크.”
타닥.
손잡이만 보일 정도로 깊게 단검을 박아 넣은 폭스는 고함을 내지르며 손을 휘두르는 둔카의 행동에 숨을 삼키며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하압!”
쉬식.
그 다음으로 이어진 공격의 주인은 바로 티나였다. 힘찬 기합과 함께 푸른 털을 날리며 둔카의 품속으로 파고든 티나가 손에 들린 단창을 그대로 위로 추켜올려 둔카의 코를 한 움큼 뜯었다.
본래는 다른 곳을 공격하려 했는지 둔카의 도끼를 피해 거리를 벌리는 티나의 얼굴에 짙은 아쉬움이 깔려 있었다.
“후욱, 후욱. 우어어어!”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둔카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몸을 일으켜 피투성이 몸으로 나에게 달려들어 도끼를 휘둘렀다.
필살의 기습이었지만 한쪽 무릎이 부서진 상태였기에 자연히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챙!
검이 받는 충격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다른 면에 팔을 대고 둔카의 도끼를 막자 팔을 타고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곧 이어지는 도끼질에 황급히 몸을 빼자 내 머리 옆으로 ‘후우웅’ 하는 강함 바람이 일었다 사라졌다.
“크허어엉!”
“우욱?”
내 입에서 터진 제왕의 포효에 막 도끼를 회수하려던 둔카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머리 위에 있던 내 검이 그 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해 둔카의 턱과 목 사이, 두툼한 가죽이 덮인 곳을 베었다.
서걱.
푸화악.
“우어어억!”
머리 위로 쏟아지는 미지근한 피의 느낌에 인상을 구기며 이제는 완전히 부러진 반쪽 검을 방금 전에 베었던 상처에 박아 넣자 뭐 하나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검이 둔카의 목을 헤집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맴돌며 기회를 노리던 폭스와 티나의 공격이 둔카의 등으로 쏟아졌다.
콰드드득.
퍼버벅.
토네이도 스피어에 둔카의 등 근육이 찢어지며 사방으로 고기 조각을 뿌렸고 그 뒤를 이은 단검이 둔카의 목 뒤에 깊숙이 박히며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쉬익쉬익.
쿠구궁!
잘린 목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던 둔카의 몸이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땅 위로 엎어지며 커다란 굉음을 만들었다.
이내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둔카의 몸 사이로 무공서가 확실한 낡은 책과 둔카의 머리, 그리고 둔카가 쓰던 것으로 보이던 도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타닷.
“하핫. 실례하겠습니다.”
머릿속에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만족할 새도 없이 무언가가 내 앞을 지나 모래 더미에 있던 낡은 책을 낚아챘다.
“폭스!”
분노 가득한 내 외침에, 거리를 벌리고 손에 들린 무공서를 살펴보던 폭스가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블러드 님도 무공서가 하나 있으니 이건 제가 가져야 공평한 거 아닌가요?”
으드득.
손에 들린 무공서를 이리저리 흔들며 웃음을 흘리는 폭스의 모습에 이를 갈았지만 확실히 폭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 아이템 분배 방식을 자동으로 가는 방식이 아닌 스스로 줍는 자동 분배로 했기에 내가 마땅히 할 말도 없었다.
“개자식!”
쉬식.
후우웅.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폭스에게 달려들어 부러진 검을 휘두르자 여유롭게 검을 피한 폭스가 거리를 벌린 뒤, 낡은 무공서에 손을 대고 눈을 감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무공서를 중심으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다 이내 사그라졌다.
“이런…….”
한참 뒤, 짙은 아쉬움이 담긴 신음을 흘리는 폭스의 모습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도법(刀法)입니다.”
“아!”
내가 놀라 함성을 지르자 폭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음흉해졌다.
“녹림마왕(綠林魔王) 만금평(卍金平)의 삼살도법(三殺刀法)입니다.”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분도 잠시, 내 입에서 전과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절정 무공에 속한 파산도왕(破山刀王) 철두심(鐵頭深)의 대력파산도법(大力破山刀法)이 아닌 것이 불만이었지만 삼살도법 또한 강한 위력을 가진 일류 무공이었다. 거기다 거인의 단검이 완전히 부서진 지금, 어차피 무기를 바꿔야 할 터였다.
힘 위주 전사인 내가 쓸 무기라고 해봤자 대검(大劍)이나 대도(大刀), 아니면 자이언트 엑스 정도였다.
만약 내가 대도를 사용하며 삼살도법을 쓴다면 그 위력 또한 엄청나게 강할 것이 분명했다.
폭스가 교환을 해줄지가 의문이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삼무보와 교환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폭스 또한 그것을 바라는지 한 손에는 삼살도법의 무공서를 들고 또 한 손은 나에게로 내민 채,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교환하자는 거냐?”
“역시 블러드 님은 말이 잘 통하네요. 후훗.”
당장 달려들어 역겨운 면상을 짓이기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하며 놈에게 다가가자, 혹시 모를 내 공격에 놈이 빈손에 단검을 쥐고는 나를 경계했다.
“흥.”
쨍그랑.
낮은 코웃음을 치며 손에 들린 검을 거칠게 던지자 단검을 갈무리한 폭스가 민망한 듯,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볼을 긁적였다.
“그럼 교환을 해볼까요?”
[폭스 님께서 교환을 신청하였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고개를 끄덕이자 ‘파밧’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 한쪽에 제법 커다란 거래 창이 떠올랐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아이템 창을 열어 삼무보를 꺼내 거래 창에 올려놓자 곧 폭스의 거래 창에 삼살도법이라는 이름의 낡은 책이 하나 나타났다.
‘흥, 거짓말은 아니었군.’
[폭스 님께서 거래를 수락하였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띠리링.
[폭스 님께 일류 무공서 삼살도법을 받았습니다.]
맑은 종소리와 함께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재빨리 아이템 창을 열어 낡은 무공서를 누른 뒤, 아이템 설명을 누르자 다시 한 번 내 앞에 작은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삼살도법(三殺刀法)-
산적들의 단체인 녹림십팔채(綠林十八砦)의 총채주(總砦主)이며 산왕채(山王砦)의 채주(砦主)인 만금평(卍金平)의 독문도법(獨聞刀法). 어릴 때부터 엄청난 신력(神力)을 타고남. 힘 위주의 패도적인 도법을 사용하며, 도를 막는 무기는 물론이고 갑옷까지 부숴버리는 강맹한 도법에 대해 말하길, ‘그의 도는 적의 무기를 죽이며(一殺), 그 다음으로는 적의 갑옷을 죽이며(二殺), 마지막으로는 적을 죽인다(三殺)’, 이렇게 총 3번을 죽인다고 하여 ‘삼살도법’이라 불린다.
거기다 별다른 초식이 없는 도법 특유의 특이한 성질 때문에 상대의 검을 부수면 도의 힘이 2배가 되어 상대의 갑옷을 부수며, 갑옷을 부수면 도의 힘이 4배가 되어 상대의 목숨을 부순다.
종류- 도법(刀法).
“크크큭.”
엄청난 위력을 가진 도법의 설명에 내 입에 절로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그건 폭스 또한 마찬가지인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는 폭스의 입에도 숨길 수 없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만족스러운 거래였습니다. 하핫.”
“나 또한. 크큭.”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를 하는 폭스를 향해 웃음을 흘린 뒤 차가운 땅을 구르는 둔카의 머리와 자이언트 엑스를 주워 티나에게 귀환 주문서를 건네주었다.
귀환 주문서를 찢자 발밑에서 뿜어져 나온 밝은 빛이 내 몸을 집어삼켰다.
마을에 도착한 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바로 버본에게 간 것이었다. 군데군데 찢어진 학살자의 망토는 물론이고 지금 입고 있는 갑옷 또한 수리하기 위함이었다.
데스 랜드를 나간다면 가죽 갑옷보다 가볍고 질 좋은 강철 갑옷으로 바꾸겠지만 여기에 있는 동안은 입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수리를 해야 했다.
거기다 현재 소수 일족 연합 족장의 머리를 3개나 가지고 있는 지금 내가 족장이 되는 것은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유일한 라이벌이던 카드리안 또한 내 손에 죽었으니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버본에게 학살자의 망토와 갑옷을 맡기고 간단한 갑옷을 차려입자 어느새 다가온 티나가 이름 모를 검은 망토와 커다란 검을 내게 건넸다. 그리 좋지 않은 검과 망토였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착용했다.
거주지로 가니 폭스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폭스 또한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밖으로 사라지자 자그마한 집에는 나와 티나, 단 둘만 남아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집 안을 감도는 어색한 분위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티나를 쳐다보자 조용히 나를 바라보던 티나가 명령만 내려달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거처에 가서 내 호출을 기다려라.”
“예, 마스터!”
힘찬 대답과 함께 몸을 날린 티나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방 안을 메웠던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휴우.”
덜커덩.
낮은 한숨을 내쉬며 이제까지의 사냥에서 얻은 아이템들을 상 위에 올려놓자 수십 개의 아이템들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아이템은 당연 호랑나비가 드롭 한 반지와 둔카가 드롭 한 도끼였다.
익숙한 손길로 나머지 아이템들을 정리한 뒤, 반지와 도끼에 대한 아이템 설명을 누르자 ‘파밧’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크기의 홀로그램이 차례대로 내 앞에 나타났다.
-검은 광전사의 반지(C급)-
전장을 돌아다니며 살육을 펼치는 검은 광전사의 광기가 스며든 반지. 원래는 신성한 반지였다고 하는데…….
내구력- 65/70
특수능력- 공격 속도 10% 상승.
방어력 5% 감소.
-갈색 곰의 앞발(A급)-
대대로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에게만 물려주는 엄청난 위력을 가진 도끼. 그 위력은 능히 곰의 앞발에 버금간다.
공격력- 270/310 내구력- 280/300
특수능력- 힘 25 상승.
체력 30 상승.
민첩성 10 하락.
공격력 10% 상승.
방어력 10% 상승.
공격속도 5% 감소.
3% 확률로 3배의 데미지.
야수 계열 몬스터에게 20% 보너스 데미지.
‘갈색 곰의 포효’ 하루 3회 가능.
겨우 매직 급인 반지에 비해 도끼는 거의 레어 급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무공이 도에 관한 무공이 아니라 도끼에 관한 무공이었다면 충분히 욕심을 내고 사용할 만한 도끼였지만 아쉽게도 내가 원하는 것은 도였기에 검은 광전사의 반지는 착용하고 갈색 곰의 앞발을 아이템 창에 돌려 넣자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이내 몸을 돌려 집을 나가려던 내 몸이 멈칫했다. 갑옷과 망토를 수리 맡긴 탓에 지금 입고 있는 갑옷과 망토, 그리고 검으로는 사냥이 턱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허접한 장비를 착용하고 나갔다가 다른 족장 후보들을 만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물론 티나와 함께 움직이면 안전하겠지만 그럼 사냥을 하는 의미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사용할 무기나 알아보려고 웨어라이언 일족이 사는 마을을 벗어나 항구 근처에 유저들이 모여 만든 상점가로 걸음을 옮겼다. 장사꾼이 쓰리 스타급이니 물건 또한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돈이라면 창고에 있는 것들과 마법사의 탑에서 조달받은 돈이 있었기에 자금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웨어라이언 마을이 항구와 가까워 채 5분도 안 돼서 상점가에 도착했다. 10개가 조금 넘는 초라한 작은 건물이 나를 맞이했다. 그중 무기 표시가 되어 있는 건물로 들어서자 딸랑거리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이십대 중반의 로도스라는 NPC가 나를 맞이했다. 이 무기점의 본 주인이 다른 일을 보러 간 사이 NPC에게 가게를 맡긴 듯했다. 이 데스 랜드에서 이렇게 약해 보이는 NPC가 상점을 차릴 리가 없으니까.
“어떤 물건을 찾으십니까?”
“대도.”
“으음.”
로도스가 계산대에서 나와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는 한쪽 벽으로 나를 이끌었다.
건물의 크기에 비해 제법 크기를 자랑하는 진열대에는 기본적인 검을 시작으로 수없이 많은 무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대체로 크기가 커다란 것들은 벽에 걸려 있었고 단검 종류의 작은 것들이 그 틈을 메워 한껏 날카로움을 뽐내고 있었다.
이내 나를 커다란 도들이 나열되어 있는 쪽으로 이끈 로도스가 작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실례지만 수준이 어느 정도이신지?”
“힘 위주의 투 스타 전사.”
“흐음.”
잠시 고민한 로도스가 곧 짙은 붉은색의 대도와 짙은 검은색의 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 가게에서 가장 비싸고 성능이 좋은 대도입니다. 천천히 보시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는 로도스를 뒤로하고 먼저 짙은 붉은색의 대도에 손을 올려놓고 아이템 설명을 누르자 작은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홍염(紅炎)의 대도(B급)-
파이어 자이언트가 사용하는 대도. 사용자에 의지에 따라 데미지를 줄 수 없는 단순한 위압 용 불꽃을 뿜어낼 수 있다.
공격력- 190/220. 내구력- 330/330.
특수능력-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불꽃 소환.
화염 계열 10% 보너스 데미지.
화염 계열 방어력 10% 상승.
도의 설명란 가장 밑에 보이는 가격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한 성능에 내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짙은 검은색의 도 위에 손을 올려놓고 방금 전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자 다시금 작은 홀로그램이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의 마도(A급)-
악계(惡界)의 육악왕(六惡王) 중 한 명인 암천왕(暗天王) 라데스가 사용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마도(魔刀). 태초의 책에 따르면, 백광신(白光神) 다아리엘과 흑광신(黑光神) 라그아노가 몸을 합하여 나온 자식이 바로 루키아논인데, 루키아논의 악한 심성을 눈치 챈 다아리엘이 루키아논을 땅으로 던졌을 때 태어나 처음으로 통증을 느낀 루키아논의 눈에서 나온 여섯 방울의 눈물이 바로 악계의 ‘육악왕’으로 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중, 암천왕으로 불리는 라데스는 육악왕 중에서 단연 으뜸인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군대는 가히 악계 최강, 최악으로 불린다.
공격력- 240/260. 내구력- 250/250.
특수능력- 암흑 계열 10% 보너스 데미지.
신성 계열 데미지 10% 감소.
암흑 계열 방어력 30% 상승.
신성 계열 방어력 30% 감소.
턱.
“이것으로 하겠다.”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칠흑의 마도를 짚었다.
로도스가 환한 표정으로 칠흑의 마도를 들고 계산대에 올려놓고는 다시 환한 웃음을 흘렸다. 힘 하나 없어 보이는 NPC가 어떻게 커다란 도를 가뿐히 드는지가 의문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무시하고 무한의 주머니를 꺼냈다.
“11만 골드입니다.”
쩔렁.
“감사합니다.”
조금 비싼 가격이기는 했지만 도가 마음에 들었기에 군말 없이 가격을 지불하자, 굳은 미소를 흘리던 로도스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꾸벅였다. 이내 거인의 단검의 검갑을 팔아서 약간의 돈을 받은 뒤 칠흑의 마도를 꽂을 만한 검갑을 샀다. 칠흑의 마도를 들고 상점 밖으로 나오자 간간히 보이던 NPC나 유저들이 나와 내 손에 들린 도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130cm의 크기에 거의 30cm가 되는 커다란 도면과 도면의 양쪽에 존재하는 날카로운 양날. 대도로써는 흔치 않은 양날 대도였다. 거기다 끝은 거인의 단검과 마찬가지로 날카롭게 되어 있어 유사시에는 찌르기 또한 할 수 있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수수한 검은색 손잡이와 손잡이의 끝에 박혀 있는 검은색 마귀의 얼굴과 도 전체에서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검은 마기는 이 도가 진짜 마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본래 마도나 마검은 어떠한 예외도 없이 봉인이 되어 있는데 그 봉인이 풀리기 전까지는 그저 약간의 마기를 흘리는, 조금 꺼림칙한 무기일 뿐이다. 다만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마검이다 뭐다 소문을 부풀려 낸 것이지.
마도나 마검의 진정한 위력은 바로 봉인이 풀렸을 때 드러나는 것인데, 여태껏 판타즈마 월드에서 마검의 봉인을 푼 유저는 단 한 명, 소울 브레이커, 혹은 영혼의 파괴자라 불리는 쓰리 스타의 간츠라는 전사 유저뿐이었다.
후우웅.
가볍게 도를 휘두르자 무거운 파공음과 함께 도의 궤적에 검은색 실선 형태의 마기가 나타나 도를 따라왔다.
철컹.
칠흑의 마도와 같은 짙은 검은색으로 표면에 흉측한 마귀들이 조각되어 있는 검갑에 도를 꽂아 넣자 도가 ‘웅웅’ 만족스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만족스러운 기분에 갑옷을 찾으러 버본의 집으로 갔지만 나를 기다리는 것은 완성된 갑옷이 아니라, 10분만 더 기다리라는 버본의 말이었다.
남은 10분 동안 할 것도 없었기에 폭스와 교환한 삼살도법을 익힐 겸, 버본의 집 뒤에 있는 공터로 갔다. 아무것도 없는 아담한 공터는 수련을 하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었다.
스윽.
이내 아이템 창에서 삼살도법의 무공서를 꺼내자 내 손에 낡은 책 한 권이 잡혔다.
나는 무공서 위에 손을 올렸다.
“익힌다.”
[일류 무공 삼살도법을 익히시겠습니까? 익힐 시, 삭제하지 않는 한 다른 무공을 익힐 수 없습니다.]
“익힌다.”
띠리링.
[일류 무공 삼살도법을 익히셨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무공창에 있습니다.]
[삼살도법의 영향으로 힘이 20 상승했습니다.]
맑은 종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여인의 목소리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재빨리 창을 열자 평소보다 20이 더 높은 힘과 함께 스킬창 말고 무공창이라는 처음 보는 창이 노란 불을 반짝이고 있었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무공창을 클릭하자 ‘촤르륵’ 하는 효과음과 함께 평소와는 다른 책 형태의 홀로그램이 내 앞으로 나타났다.
<본왕은 의기 높은 사나이들의 모임인 녹림십팔채(綠林十八砦)의 총채주(總砦主)이며 산왕채(山王砦)의 채주(砦主)인 만금평(卍金平)이라고 한다. 이 비급을 보고 있는 운 허벌나게 좋은 새끼야. 다른 것 필요 없다. 힘! 남자는 힘 하나면 장땡이다! 그냥 휘두르고 보는 거다! 능유제강(能柔制强)? 다 개소리다. 내가 휘두르는데 제깟 놈이 막는다고 되냐? 그냥 무기, 갑옷 할 것 없이 부숴버리면 끝인 거다. 그러므로 나의 삼살도법에는 단 두 개의 초식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파천기(破天氣)라는 것인데 이것은 주술사들이 자신들의 무기에다 요상한 기운을 불어넣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이 파천기를 도에 불어넣고 상대를 공격한다고 치면, 가장 먼저 상대의 무기를 부수는데 무기를 부술 시, 도의 힘이 2배가 되어 상대의 갑옷을 공격한다. 만약 여기서 2배의 힘을 가진 도가 갑옷을 부수면 파천기의 효과로 도는 평소보다 4배의 위력으로 상대의 모가지를 ‘댕겅!’ 잘라버리는 거다. 솔직히 말해 초식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이 파천기지만, 멋있어 보이려면 초식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부하들의 말에 만든 것이다. 불평 말아라.
두 번째이자 마지막 초식은 무한참(無限斬)이라는 초식인데, 이것 또한 초식이랄 것도 없는, 그냥 뭐 빠지게 베고 보는 공격이다. 무한참을 사용하면 저절로 파천기가 사용되는데, 파천기가 흐르는 도로 오직 전방의 적들을 베면서 전진하는 것이 바로 이 무한참이다. 체력이 다해 죽기 직전까지는 멈출 수도 없는 것이 이 무한참이기에 웬만하면 쓰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어쨌든 이 비급을 보고 있는, 운 허벌나게 좋은 새끼야. 네놈이 이 비급을 보는 순간부터 넌 의기 높은 사나이들의 단체인 녹림십팔채의 가족이 된 것이다. 돼지처럼 잘 처먹고 개처럼 잘살아라.>
만금평이라는 인물 자체가 호탕한 성격으로 설정이 되어 영화 속에서나 보던 걸쭉한 욕을 동반한 무공 설명이 나왔다. 이내 무공창에서 반짝이는 2개의 무공을 클릭한 뒤, ‘무공 이미지 보기’를 클릭하자 제법 커다란 홀로그램이 나타나며 두 인영을 비췄다.
칠흑의 마도를 들고 있는 나와 평범한 오크의 인영이었다. 홀로그램 속의 내가 작게 ‘파천기’라고 중얼거리자 검은빛의 기운이 내 도를 타고 올라와 스멀거렸다. 그와 동시에 내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홀로그램 속 나에게 달려들었다.
오크가 바로 코앞까지 오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던 내가 빠른 동작으로 도를 휘두르자 오크의 무기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내 도를 감싼 검은 기운이 한층 더 짙어졌다. 이내 오크가 입은 갑옷이 부서지자 마침내 완전히 검은색으로 뒤덮인 도가 오크의 머리에 작렬했다.
꽈아앙!
홀로그램을 지켜보는 나마저도 놀라게 하는 엄청난 폭음과, 함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오크의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부터 시작해 가슴 중앙까지 완전히 걸레가 되어버린 오크의 모습에 내 입에 희열에 들뜬 미소가 걸렸다. 아무리 데미지가 강력해도 마법이 아닌 이상 저렇게 강한 데미지가 나올 리 없었다. 저 강력한 위력의 정체는 파천기가 분명했다.
상대 몬스터가 몬스터 중에서 약한 축에 끼는 오크였지만 저 정도 위력은 충분히 대단한 것이었다. 적어도 쓰리 스타의 검기가 아닌 이상 저 정도 파괴력이 나올 수는 없었다. 저 홀로그램 속의 내가 현제의 나와 같은 수준이라면 저 정도 공격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무한참을 클릭한 뒤, 전과 같이 ‘무공 이미지 보기’를 클릭하자 곧 홀로그램의 화면이 검은빛에 휩싸이더니 배경을 바뀌었다.
이번에는 1대 1이 아닌 1대 50이었다. 상대 또한 전과 같은 오크였다. 홀로그램 속의 내 입에서 ‘무한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손에 들린 도가 검은색 기운으로 물들었다.
그것도 잠시, 마치 광전사의 버서커 스킬 마냥, 앞으로 나가며 미친 듯이 휘두르는 도에 50마리의 오크가 순식간에 걸레 조각이 되어 허공을 날았다. 이내 50마리 오크가 모두 쓰러지고 나서야 홀로그램 속, 내가 움직임을 멈추고는 공허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아!”
마지막으로 도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끝을 맺는 홀로그램에 내 입에서 아무런 사심 없는 순수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저 정도 위력이라면 포 스타의 검강의 위력과 맞먹을 정도였다. 겨우 일류 무공서가 이 정도 위력인데 초절정 무공서는 어떤 위력일까! 척추를 타고 흐르는 전류를 만끽하며 무공이라도 써볼 겸, 도를 꺼내 들자 빛을 받은 도가 날을 번뜩이며 마기를 피워 올렸다.
“파천기.”
우우우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손에 들린 도에서 낮은 진동과 함께 스멀스멀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도를 휘감았다. 겉으로 보이는 약간 짙은 안개가 도 주위에만 낀 것 같은 모양이지만 도를 잡은 손목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의 압력은 도에 깃들 파천기의 위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스으응.
꽝!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찢어발기며 검은 궤적을 만드는 도를 그대로 한 바퀴 돌려 바닥에 꽂자 커다란 폭음과 함께 돌 조각과 흙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무한참 또한 써보고 싶었지만 마땅히 사용할 상대가 없었기에 다음을 기약하며 몸을 돌리자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버본이 인상을 구기며 소리를 질렀다.
“남의 집 뒤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죄송합니다.”
내가 족장 후보로서 제법 영향력이 있기는 했지만 마을의 상점 대표인 버본만큼은 아니었기에 순순히 사과를 하자 씩씩거리며 분을 삼킨 버본이 몸을 움직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 또한 공터에 남은 흉한 상처를 한번 본 뒤,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익.
비명을 지르는 문을 지나쳐 버본의 작업장에 들어서자 가죽을 처리하는 약 특유의 독한 냄새가 코를 괴롭혔다.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자 작업장 한편에서 내 갑옷과 망토를 가지고 나오던 버본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호오, 카드리안의 라이벌이라는 말이 헛소문은 아니었나보군. 자, 갑옷과 망토일세!”
버본이 건네준 갑옷과 망토를 착용하는 내 입에 작은 비웃음이 맺혔다. 이내 무한의 주머니를 꺼내 돈을 주려고 하자 손을 들어 제지한 버본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보였다.
“잘하면 족장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돈은 무슨. 하하! 그냥 선물이라고 생각하게.”
“감사합니다.”
웃음을 흘리며 손에 묻은 약품을 털어내는 버본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 뒤, 버본의 집을 나서자 가벼운 바람이 망토를 펄럭였다.
[폭스: 블러드 님! 지금 어디세요?]
아직 파티를 해제하지 않았기에 파티 음성 창으로 들리는 폭스의 살랑거리는 목소리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삼살도법의 위력도 볼 겸 모처럼 혼자 사냥하려 했는데.
[블러드: 버본의 집이다.]
[폭스: 형님과 전 우리 집에 모여 있습니다. 블러드 님이 이리 오세요. 하핫.]
마음 같아서는 무시하고 싶었지만 앞으로 큰 동료가 될지 모르는 놈에게 밉상을 보인다면 앞으로의 일이 골치였기에 하는 수 없이 폭스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폭스의 집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본 것은 잔뜩 얼굴을 구기고 있는 카나리아였다.
“제길, 곰 같은 자식한테 죽다니! 빨리 사냥이나 가자고!”
둔카에게 어이없이 죽은 것이 분했는지 연신 욕을 중얼거리며 사냥을 가자고 보채는 카나리아를 무시하고 고개를 돌리자, 의자에 앉아 단검을 만지작거리던 폭스가 나를 향해 작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티나 님은 어디 가셨나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아아. 흐음, 그렇군요…….”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말끝을 흐리는 폭스의 모습에 내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폭스의 반응을 보건대, 나와 티나의 관계를 눈치 챘거나 약간의 실마리라도 잡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티나를 찾을 리가 없었다. 이내 인상을 구기며 의자에 앉는 나를 향해 폭스가 말을 이었다.
“무공은 배우셨나요?”
“그래.”
“와아, 한 번 보여주세요.”
“오오, 그래! 나도 한번 구경해보고 싶군.”
소란스러운 폭스에 이어 투덜거리던 카나리아 또한 가세해서 무공을 보여 달라며 재촉했다.
“나중에 보여주지.”
냉정하게 끊은 내 말에 칭얼거리던 폭스가 곧 ‘쳇’ 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카나리아 또한 의자에 앉아 불만을 토했다.
“아우,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야? 또 족장 후보생 사냥인가 뭔가 안 가?”
의욕이 넘치는 카나리아의 모습에 단검을 만지작거리던 폭스가 난처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3일만 기다리면 블러드 님이 족장이 되는 것은 확실한데 쓸데없이 밖에 나가서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기다 남은 족장이라고 해봐야 웨어래트 일족의 족장뿐인데 제가 들은 바로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더군요.”
“아마 구석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을 거다.”
강한 경멸을 담은 내 말에 폭스는 희미한 웃음을 짓고, 카나리아는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해골의 성격으로 볼 때, 이번 족장 시험이 끝날 때까지 자신밖에 모르는 곳에 가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족장 시험이 끝나야 모습을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정체불명의 흑마법사까지 있으니 조용한 곳에 숨어서 뭔가 계획을 꾸미고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것은 분명 나를 처리하기 위한 계획일 테고.
“사냥을 가자.”
“아?”
“으하하! 사냥이다, 사냥!”
장비를 점검하는 나를 향해 폭스가 약간은 당황한 기색이 담긴 웃음을 흘렸다. 카나리아만이 밝은 웃음을 터트렸다.
“현재 밖에는 족장 머리를 구하지 못해 다른 족장 후보들을 죽여서 머리를 뺏고자 하는 족장 후보들이 넘쳐납니다.”
“나도 알고 있다.”
단호한 내 말에 폭스가 ‘그런데 왜?’라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확실히 폭스의 입장에서는 이대로 마을에서 3일만 보내면 족장이 되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을 가려는 내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해를 바라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3일이라는 긴 시간을 이렇게 쓸데없이 보내는 동안 더욱더 강해지고 있을 적들을 생각하면 3일이 아니라 30일이라고 해도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할 수 있었다.
이내 마지막 검까지 점검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얼떨결에 나와 함께 장비를 점검하던 폭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가시려고요?”
“그래.”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내 말에 뭐라고 더 말하려던 폭스가 곧 멈칫 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티나는요?”
“필요 없다. 이번 사냥은 과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레벨 업을 위한 것이니까.”
“아!”
뭔가 말하려던 폭스가 이어지는 내 말에 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확실히 티나와 파티를 짜고 사냥을 하면 훨씬 더 수월하겠지만 거의 모든 경험치가 티나에게로 가기 때문에 레벨 업에는 약간 불편한 점이 있었다. 이내 난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폭스가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으하하! 잘 생각했어, 아우.”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카나리아를 향해 환한 웃음을 흘린 폭스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사냥의 사냥감은?”
“크큭! 벌써 알고 있지 않나?”
내 입가에 폭스와 같은 짙은 미소가 걸렸다.
“빌어… 쿨럭!”
콰드득.
나를 향해 막 욕을 하려던 웨어울프가 가슴을 헤집어놓는 내 도에 피를 쏟아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웨어울프를 뒤로하고 보너스 스탯을 올린 뒤 도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몸을 돌렸다. 막 웨어울프의 심장에 단검을 꽂아 넣은 폭스가 그대로 단검을 뽑아 웨어울프의 옷에 단검을 닦은 뒤, 웃음을 흘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카나리아 님은?”
“저쪽에 있다.”
“으랏차차!”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울려 퍼지는 우렁찬 고함에 폭스와 내 시선이 커다란 나무 밑으로 쏠렸다. 커다란 나무 밑에서는 카나리아와 거대한 덩치의 웨어울프 일족의 싸움이 한창이었다.
“워우우!”
“으아아!”
퍽.
길게 울부짖는 웨어울프를 향해 고함을 터트린 카나리아가 그대로 발을 올려 웨어울프의 사타구니를 올려 차자 막 손을 뻗으려던 웨어울프가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숙였다.
“죽어라!”
퍼버벅.
야수화를 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카나리아의 주먹이 쉴 틈도 없이 웨어울프의 머리에 작렬했다.
“이제 그만 죽어라!”
“워우우!”
글자 그대로 복날에 개 패듯이 웨어울프를 구타하던 카나리아의 움직임이 멈췄다고 생각하는 순간, 카나리아의 입에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주문이 흘러 나왔다.
“나의 주먹은 곧 그분의 뜻, 내 주먹은 참회의 주먹이다!”
우우웅.
꽝!
은은한 은색 빛을 감싼 카나리아의 주먹이 웨어울프의 머리를 때리자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웨어울프의 머리가 터져 사방으로 피와 뇌수를 쏟아냈다. 비명소리 없이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웨어울프를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린 카나리아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폭스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으하하! 자, 어서 다음 놈들 죽이러 가자고!”
“하핫.”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사냥을 재촉하는 카나리아의 모습에 모처럼 만에 내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캐릭터 창.”
이름: 블러드. 레벨: 218. 속성: 혈(血).
성향: 극악(極惡). 종족: 웨어라이언(Werelion).
명칭: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 후보생.
체력: 207000. 마력: 9000. 신성력: 0.
힘: 769. 민첩성: 50. 체력: 50.
지혜: 30. 신마력:10. 행운: 10.
상악에서 극악으로 바뀐 성향이 내가 얼마나 많은 족장 후보들을 죽였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3일 전보다 무려 12나 올라간 레벨에 내 입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럼 다시 사냥을…….”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옮기려던 폭스가 돌연 움직임을 멈추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정면의 수풀을 바라봤다.
“누군가 옵니다.”
스윽.
섀도우 아머를 두르며 단검을 들어올리는 폭스의 모습에 웃음을 흘리던 카나리아 또한 긴장하며 자세를 취했다. 나 또한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경계하며 도를 들어올렸다.
“옵니다.”
부스럭.
타닥.
“……?”
어이없게도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티나였다.
“붉은 어금니가 찾으십니다.”
‘카인이?’
“아!”
갑작스런 카인의 호출에 구겨졌던 내 얼굴이 순식간에 웃음으로 번졌다. 그건 폭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직 카나리아만이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티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족장 과제 때문인가?”
“예.”
카인이 족장 과제를 내준 것이 오늘부로 정확히 9일째였다. 한 마디로 오늘이 바로 과제가 끝나는 날이었다. 내 입가에 떠오른 만족스러운 미소에 폭스 또한 나와 같은 미소를 흘리며 축하한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죽은 카드리안이 좀비가 되어 살아오거나 카인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내가 족장이 되는 것은 확실했다.
“마을로 돌아간다.”
부욱.
익숙한 손놀림으로 귀환 주문서를 꺼내 찢었다.
“와아아아!”
발밑을 채우는 묵직함과 함께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내가 나타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계속 기다렸는지, 내가 나타나자마자 웨어라이언 일족들은 함성을 질러댔다. 할 수 없이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억지 미소를 흘리며,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하늘 나무로 걸음을 옮겼다.
곧 폭스와 카나리아가 도착하자 뒤에서 다시 한 번 커다란 함성이 들렸지만 무시한 채 하늘 나무 안으로 들어섰다. 카인을 비롯해 티나와 전에 카나리아의 손에 죽은 블랙 라이언 일족의 족장을 제외한 모든 족장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대표인 버본이 의자에 앉아 굳은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강해졌군!”
그 말로 인사를 대신한 카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전에 날 만난 버본을 제외한 나머지 장로들 또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 앉자 곧 폭스와 카나리아가 하늘 나무 안으로 들이닥쳤다. 모두 웨어라이언들에게 호되게 당했는지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고 흐르는 땀을 닦은 뒤, 카인을 비롯한 장로들에게 인사하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폭스: 저희를 버리고 가다니, 상당히 치사하시네요.]
[카나리아: 생긴 것 답지 않게 치사하군!]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파티 음성으로 불만을 토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내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블러드: 조용해라. 이제 곧 족장 취임 의식을 한다.]
“잘 들어라!”
우렁찬 카인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카인에게 향했다.
“30분 안에 카드리안이 오지 않으면 카드리안은 자동으로 탈락된다.”
‘죽은 카드리안이 올 리가 없지. 크큭.’
아쉬운 표정으로 말을 맺는 카인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폭스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인지 진득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나에겐 30시간 같은 30분이 지나가자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슬픔이 깔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30분이 지났다. 이로써 이번 족장 시험을 종료한다.”
“크허어엉!”
“크허엉!”
카인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를 지키던 장로들과 버본이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포효를 내질렀다. 하늘 나무를 뚫고 하늘을 진동시키는 포효에 하늘 나무 밖에 있던 나머지 웨어라이언들 또한 각자 커다란 포효를 터트리며 족장 시험의 끝을 알렸다.
“족장 후보 블러드여! 시험을 마쳤다는 증거를 보여라!”
“크허어엉!”
강자의 기백이 느껴지는 카인의 말에 우렁찬 포효를 터트리며 아이템 창에서 소수 일족 연합 족장들의 머리를 꺼내자 장로들과 카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두, 둔카!”
“저럴 수가!”
커다란 상 위에 올려진 웨어와일드보어 일족 족장의 머리와 웨어카우 일족 족장의 머리, 그리고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인 둔카의 머리를 바라보는 카인과 장로들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악이 어렸다.
고작 웨어와일드보어나 웨어카우를 죽일 줄 알았던 자가 힘으로는 카인과 맞먹는다는 둔카를 죽였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이내 침착성을 되찾은 카인이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머리들을 손으로 만지자 머리들이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사라지는 머리들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카인이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올려놓고 자신 또한 내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마성의 숲을 누비는 웨어라이언 일족의 전사 블러드여, 그대는 스스로 대대로 마성의 숲을 누벼온 제왕의 자리에 오를 자격을 갖추었다고 보는가?”
“물론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내 대답에 카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나의 심장에 깃든 전사들의 영혼은 ‘족장’이라는 무거운 이름으로 변해 그대의 심장에 깃들 것이다. 크허어엉!”
외침과 함께 카인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은은한 백색의 빛이 카인의 손을 타고 내 심장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우우웅.
낮은 소리를 내며 내 심장에 도착한 빛이 마침내 내 가슴 속으로 사라지자 처음 웨어라이언 일족으로 변할 때와 같은, 아니 전보다 더 심한 변화가 내 몸 내부에서 일어났다.
“크윽……!”
통증 완화 시스템으로 커다란 충격은 저절로 삭제되는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내 몸 안에서 들끓는 엄청난 통증에 입에서 절로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내 가슴 위의 카인의 손을 타고 카인의 몸으로 흘러갔다가 한층 더 부드러운 힘이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방금 전까지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가 싶더니 머릿속으로 어느 때보다 기분 좋은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웨어라이언 일족 족장’이 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일정만큼 상승했습니다.]
[폭스: 축하드립니다.]
폭스의 말에 이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족장들과 버본이 차례대로 내 발등에 입맞춤을 하고는 커다란 포효를 터트렸다. 이내 내 손을 잡아 하늘 나무의 입구로 이끈 카인이 수많은 웨어라이언들이 보는 앞에서 내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는 커다란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자 하늘 나무 아래에 있던 많은 웨어라이언들이 다시 한 번 포효를 터트렸다.
“족장께서도 이 마성의 숲에 사는 모든 존재들에게 족장이 되신 것을 알리십시오.”
방금 전까지의 반말 대신 존댓말을 하는 카인의 모습에 새삼스레 내가 족장이 된 것이 느껴졌다.
‘크크큭! 기다려라. 월향, 무라사마!’
“크허어어엉!”
내 입을 뚫고 나온 포효가 한층 더 강력해진 힘을 담고 마성의 숲을 진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