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5 데스 랜드의 일통 (13/34)

챕터5 데스 랜드의 일통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짙은 검은색 자이언트 베어의 가죽을 중심으로 갖가지 다른 동물들의 뼈와 가죽, 그리고 아름다운 깃털이 치장되어 있는 거대한 나무 의자는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들만이 앉을 수 있는 영광의 자리다.

그런 내 앞으로 이제는 화이트 라이언 일족의 족장인 카인과 새롭게 뽑힌 블랙 라이언 족장을 비롯해 다른 일족들의 족장과 버본, 그리고 나의 호위 자격으로 참가한 폭스와 카나리아가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족장이여, 우리를 소집한 이유를 말해주십시오.”

하늘 나무를 가득 메운 지루한 침묵을 깬 것은 새롭게 뽑힌 블랙 라이언 족장이었다. 이십대 후반의 모습과 약간은 마른 몸, 그리고 등에 달린 활이 그의 전투 방식을 말해주고 있었다.

“맞습니다. 어서 소집한 이유를 말해주십시오.”

블랙 라이언 족장의 말에 다른 일족의 족장들로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본래 족장에게 이렇게 대드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나 또한 그들의 불만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불만을 받아주었다. 그들이 이렇게 불만을 토하는 이유는 바로 축제 때문이었다.

본래 축제와는 거리가 먼 웨어라이언 일족인 만큼 축제라는 것은 말 그대로 아주 가끔 있는 행사였다. 그 아주 가끔 있는 행사 중, 가장 커다란 축제는 바로 새로운 족장이 뽑혔을 때였다. 헌데 갑작스런 내 소집 명령에 예정되었던 축제가 모두 취소됐기에 족장들의 입에서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조용하라.”

“…….”

내 입에서 흘러나온 나직한 목소리에 불만을 토해내던 족장들이 입을 다물고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티나, 현재 다른 일족들의 상황을 말해라.”

이내 자리에서 일어선 티나가 족장들과 내가 한눈에 보이는 위치로 나와 다른 족장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현재 웨어베어 일족은 갑작스러운 우두머리의 죽음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웨어카우 일족 또한 마찬가지이며 웨어래트 일족은 아직 까지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소수 일족 연합을 해체 직전입니다.”

갑작스런 티나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던 버본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은?”

“그건…….”

“그들은 나에게 종속되었다.”

버본의 물음에 막 대답하려던 티나가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입을 다물고는 나를 바라봤다. 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족장들에게, 양팔을 감싼 토시를 벗어 불사조 문양의 문신을 보여주었다.

문신의 의미를 알고 있는 몇 명의 족장들이 ‘아!’ 하는 탄성을 토해냈다.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의 맹세의 증표다.”

“오오!”

“과연……!”

내 말에 몇은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또 몇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티나, 계속해라.”

“예, 현재 웨어울프 일족은 웨어울프 일족의 진정한 힘이라 불리는 블랙 울프 일족의 반란으로 ‘바람의 움직임’ 드라칸이 죽음을 당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그에 분노한 나머지 일족의 족장들 또한 각자 세력을 들고 일어나 블랙 울프 일족에게 맞서고 있습니다.”

“으음.”

이미 폭스를 통해 사냥 도중 틈틈이 정보를 들은 나와는 달리 다른 족장들에게는 꽤나 충격이었는지 족장들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다음으로는 웨어타이거 일족에 관한 정보인데, 현재 웨어타이거 일족이 모종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뭐, 뭐라?”

“웨어타이거 일족이!”

티나의 말에 카인을 비롯해 나머지 족장들이 눈을 치켜뜨며 경악을 토해냈다. 예상대로의 반응에 보이지 않는 미소를 흘리며 손을 치켜들자 소란스러웠던 좌중이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지금 한쪽에서는 적들이 우리의 자식들과 아내, 그리고 친구를 위협하려 하고 있다. 또 한쪽에서는 우리들의 노예가 되어야 할 종족들이 활개를 치며 마성의 숲의 주인을 자청하고 있다. 다른 곳도 아닌 우리들의 숲에서!”

있는 힘껏 살기를 흘리며 말하자 카인을 제외한 족장들이 침을 삼키며 두려움을 흘렸다.

“그런데도 지금 축제를 하자는 것인가! 적과 노예의 살을 씹어 먹고 피를 마시는 살육의 축제 대신 내 살을 뜯어 먹고 동료의 피를 마시는 축제를 하자는 것인가! 크허어엉!”

[폭스: 와아, 말 잘하시네요.]

귓가로 들리는 폭스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다시 한 번 포효를 터트리자 자리에 앉아 있던 족장들이 그 자리에서 몸을 꼬며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직 카인과 티나만이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금방이라도 적을 향해 포효를 터트릴 듯, 입가를 씰룩이고 있었다. 역시 붉은 어금니와 숲의 마녀라는 건가.

일단 기선을 제압했을 때 몰아붙이라는 염환의 말을 생각하며 몸을 추스르는 족장들을 향해 포효를 터트린 뒤, 말을 이었다.

“카인은 일족에서 가장 발이 빠른 자를 뽑아 모든 일족에게 공표해라! 내일 정각까지 지도자를 보내 노예를 자처하지 않는 일족에게는 숲의 진정한 지배자의 분노가 갈 것이라고! 동맹 따위가 아니다! 우리는 노예를 원하는 것이다!”

현재 시간은 저녁 6시. 18시간이라면 고민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예!”

책임감으로 불타는 얼굴로 힘차게 대답을 하는 카인을 뒤로하고 족장들에게 시선을 돌리자 저마다 카인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이트 라이언족은 일족의 전사들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부대의 이름을 백사자단으로 한다! 블랙 라이언 일족의 부대는 흑사자단으로! 레드 라이언 일족은 적사자단으로! 블루 라이언 일족은 청사자단으로! 옐로 라이언 일족의 부대는 황사자단으로 정한다! 각자의 부대는 나와 각 족장들의 명령만을 따를 것을 명한다! 크허어어엉!”

“크허어엉!”

“크허엉!”

미리 생각해놨던 것을 일사분란하게 내뱉은 뒤 제왕의 포효로 끝을 맺자 나머지 족장들 또한 우렁찬 포효로 내 말에 복종했다.

[폭스: 무슨 생각이십니까?]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리는 얼굴과는 달리 폭스의 목소리는 잔뜩 굳어 있었다. 지금 내 행동을 전달하는 폭스와 폭스의 말을 듣고 당황하고 있을 마법사가짱이얌의 모습에 미소를 흘리며 연신 무슨 생각이냐고 묻는 폭스를 무시하고 나를 바라보는 족장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라! 가서 부대를 정비하고 내일 정각까지 하늘 나무 앞으로 모여라!”

“크허엉!”

우렁찬 포효와 함께 족장들은 몸을 날렸다. 이내 마지막으로 남은 티나와 버본마저도 내게 인사를 하고 사라지자 옆에 있던 폭스가 내 팔을 잡았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조력은 저희 탑만으로 충분할 텐데요.”

“무슨 소리냐. 힘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은 거지. 크큭.”

잔뜩 굳은 표정인 폭스를 뒤로하고 하늘 나무의 입구로 다가가 양팔을 하늘로 치켜들고 마나를 주입하자 ‘웅웅’ 하는 소리와 함께 불사조 문신이 꿈틀거렸다. 그것도 잠시, 이내 ‘후우웅!’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불사조 문신이 내 팔에서 뛰쳐나와 하나로 모이는가 싶더니 곧 붉은 깃털을 가진 아름다운 붉은 새로 변했다.

꾸르륵, 꾸륵.

영롱하게 빛나는 붉은 깃털을 흔들거리며 무언가를 바라는 듯 내 곁을 날아다니는 새의 모습에 내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크란, 내일 정각에 일족들을 이끌고 마을로 와라.”

끼루륵.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곁을 맴돌던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날아올라 이내 모습을 감췄다. 크란에게 간 것이다. 허전해 보이는 양팔에 토시를 착용한 뒤 자리에 앉자 그동안 참아왔던 긴장감이 풀어졌다.

“휴우, 캐릭터 창.”

이름: 블러드. 레벨: 218. 속성: 혈(血).

성향: 극악(極惡). 종족: 웨어라이언(Werelion).

명칭: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

체력: 300000. 마력: 20000. 신성력: 0.

힘: 800. 민첩성: 100. 체력: 100.

지혜: 100. 신마력: 100. 행운: 100.

“크큭.”

말 그대로 ‘먼치킨 캐릭터’라고밖에 볼 수 없는 수치였다. 힘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거의 50 이상 올랐고 힘 또한 거의 30이나 올라 있었다.

거기다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명칭의 변화였다. 육체적 능력을 중요시하는 웨어라이언 일족답게 스킬은 늘어나지 않았지만 기존 스킬들의 위력이 거의 3배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해져 있었다.

“블러드 님?”

폭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전과 같은 웃음을 흘리고 있던 폭스가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설마 이대로 내일 정각까지 아무것도 안 하시겠다는 것은 아니겠죠?”

“쉰다.”

이곳 시간으로 18시간이라면 현실로는 7시간 30분 정도.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카나리아의 말대로 사냥을 하고 싶었지만 데스 랜드 통일이라는 계획 앞에 사냥을 할 수는 없었기에 쉬는 수밖에 없었다.

이내 내 말에 ‘혹시?’ 하는 얼굴로 나를 보던 카나리아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폭스 또한 조금 구겨진 얼굴을 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전 형님하고 사냥을 하고 오겠습니다. 정확히 7시간 뒤에 보도록 하죠.”

“마음대로.”

“으하하! 사냥이다! 레벨 업이다!”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폭스를 껴안는 카나리아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뒤 게임 종료를 중얼거리자 곧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게임을 종료하시겠습니까?]

“종료.”

[감사합니다. 새로운 세상, 판타즈마 월드였습니다.]

여인의 목소리를 끝으로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기다렸습니다.”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들리는 굵직한 목소리에 흐릿한 눈을 뜨자 백발의 거한, 카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고개를 돌리자 카인을 비롯한 나머지 족장들과 폭스, 카나리아가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늦었군.”

“괜찮습니다.”

[폭스: 정확히 5분 넘었습니다.]

아직 파티를 해체하지 않았기에 귀를 울리는 폭스의 목소리와 카인의 굵직한 목소리에 몸을 돌리자 나를 바라보던 족장들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일족의 전사들은?”

“하늘 나무 앞에 모여 있습니다.”

내 옆으로 다가와 말하는 티나를 지나쳐 하늘 나무의 입구로 다가서자 티나의 말대로 제법 많은 숫자의 웨어라이언들이 모여 있다가 나를 보고는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다. 각자 소속에 따라 옷 색을 구별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아도 머리색이 튀기 때문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른 일족들은?”

“현재 웨어와일드보어 일족과 웨어카우 일족이 마을 밖에서 족장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블랙 울프 일족의 족장인 알카 또한 족장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블랙 울프 일족의 족장이?’

웨어와일드보어와 웨어카우야 그렇다 치고 그 긍지 높다고 알려진 웨어울프 일족까지 나에게 왔을 줄은 몰랐다. 이내 나를 바라보던 티나가 말을 이었다.

“웨어베어 일족은 웨어래트 일족의 밑으로 종속되었습니다.”

“웨어래트 일족?”

현재 숨어서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던 웨어래트 일족의 이름에 내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예, 정확히 5시간 전에 웨어래트 일족의 족장이 모든 일족에게 보낸 전서입니다.”

스윽.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티나가 내놓은 것은 호화스럽게 치장된 문서였다. 어린애가 쓴 것 같은 악필이었다.

<나는 웨어래트 일족의 족장인 해골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수인족들아, 나의 밑으로 모여라. 내가 곧 새로운 힘을 부여해 이 마성의 숲을 누빌 강력한 힘을 주겠다. 이미 웨어베어 일족은 나와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 나와 뜻을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피의 언덕으로 모여라!>

와락.

“쓸모없는 내용이군.”

손에 들린 문서를 그대로 구겨 바닥으로 던져버리자 족장들이 통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족장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런 해골의 말은 고려할 가치도 없었다. 웨어베어 일족이 정말 해골의 밑으로 종속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적이라면 철저히 밟아버리면 그만이니까.

이내 천천히 하늘 나무 밑으로 내려가자 하늘 나무 밑에서 대기하던 전사들과 다른 웨어라이언 일족들 또한 박수를 치며 나를 환영했다.

척.

이내 곧이어 내려오는 나머지 족장들과 함께 웨어와일드보어와 블랙 울프 족장이 있다는 마을 입구로 걸음을 옮기자, 거의 천에 가까운 웨어라이언 일족의 전사들이 내 뒤를 따르는 장관을 그려냈다. 그 장관 아닌 장관에 전사가 아닌 웨어라이언들이 커다란 포효를 토해냈다.

마을 입구에는 거의 500명에 가까운 웨어와일드보어 일족과 웨어카우 일족으로 보이는 400명, 그리고 블랙 울프로 보이는 근 200명에 달하는 인영들이 모여 있었다.

“마스터를 뵙니다.”

“마스터를 뵙니다!”

나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나를 향해 몸을 숙이는 크란의 행동에 크란과 함께 있던 웨어와일드보어 일족들이 크란과 같은 말을 외치며 몸을 숙였다.

내가 크란에게 다가가 손수 크란의 몸을 세우자 크란이 감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원래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의 완벽한 충성을 얻기 위해 생각해낸 한 방법이다. 그 어떤 자가 오로지 명령만 내리는 주인을 진정으로 따르겠는가.

“다른 자들도 몸을 들어라.”

“예!”

수백의 웨어와일드보어가 크게 대답하며 몸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모두 주술사로만 데리고 왔는지 손에 들린 각양각색의 완드가 빛을 받아 번뜩였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웨어와일드보어의 옆쪽에 위치한 웨어카우 일족에게 시선을 돌리자 수백의 전사들이 내 눈에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이내 족장들과 폭스, 카나리아와 함께 느릿한 걸음으로 웨어카우 일족의 진형으로 다가가자 웨어카우 일족의 진형에서 붉은 머리의 거한 NPC가 나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족장으로 뽑힌 텍사스라고 합니다. 저희 일족은 이번에 새로 뽑힌……!”

“다른 말은 필요 없다. 나는 노예를 원한다. 그것을 알고 온 것인가?”

내 말에 텍사스의 안색이 굳었다. 그것도 잠시, 이내 뭔가 결심한 표정을 지은 텍사스가 힘차게 말했다.

“약해빠진 웨어래트 일족의 노예가 될 바에는 차라리 웨어라이언 일족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좋다. 그럼 너희 모두에게 종속의 인을 새기겠다. 찬성하는가?”

내 말에 텍사스를 비롯한 나머지 웨어카우 일족들의 얼굴이 굳었다.

‘종속의 인’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상대가 나에게 완전히 종속되는 것을 증명하는 증표로, 이를 배신하면 죽음에 이르도록 설정되어 있는 무시무시한 것이다.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처럼 진심으로 맹세하여 충성의 맹세를 새기지 않는 이상, 티나와 같은 종속의 인을 새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내 각 카우 일족의 장로들로 보이는 인물들과 몇 마디 말을 나누던 텍사스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이게 웨어카우 일족의 모든 자들인가?”

“아닙니다. 싸움을 할 줄 아는 전사들의 수입니다.”

“총 수는?”

“516명입니다.”

“좋다. 텍사스를 비롯한 516명의 웨어카우 일족의 전사들은 나 블러드에 종속되는 노예로서 종속의 인이 새겨질 것이다. 동의하는가?”

“예!”

“종속은 성립되었다.”

우우우웅.

스스슥.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온 은은한 기운이 크기를 불리더니 조각조각 나뉘어 웨어카우 일족들의 이마로 쏘아져 붉은 색 소용돌이 모양을 만들고는 사라졌다.

“나의 가족이자 노예가 된 것을 환영한다.”

기묘한 내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텍사스의 어깨를 토닥거린 뒤, 블랙 울프 일족을 향해 몸을 돌리자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블랙 울프들이 몸을 움찔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오직 한 명, 삼십대 초반의 냉정한 인상의 전사만이 두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전과 같은 느릿한 걸음으로 블랙 울프들에게 다가가자 그 전사가 나를 향해 마주 걸어왔다.

“내가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인 블러드다.”

자연스러운 내 반말에 잠시 움찔한 전사, 알카의 눈썹이 꿈틀하는가 싶더니 곧 이어 그의 입에서도 얼굴과 같은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전 블랙 울프 일족의 족장인 알카라고 합니다.”

“알고 있다. 나를 찾아온 이유는?”

“저희에게 힘을 빌려주십시오.”

“난 분명 노예가 될 자만 이곳으로 오라고 했을 텐데?”

“그건……!”

싸늘한 내 말에 뭔가 말하려던 알카가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족장이 되는 것을 도와주신다면 저희 일족과 함께 블러드 님께 종속되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지?”

“블랙 울프 일족의 긍지를……!”

“한 번 주인을 문 개가 다시 물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안 그런가?”

살기를 흘리며 묻자 굳은 표정의 알카가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분위기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나는 지금 여기서 너희를 죽일 수도 있다.”

“그게 무슨!”

스윽.

채채챙.

내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로들과 거의 1000명에 가까운 웨어라이언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웨어와일드보어 일족 또한 완드를 들어 커다란 불꽃이나 얼음 창, 혹은 기묘한 생물을 소환해 블랙 울프를 겨냥했고, 웨어카우 일족 또한 각자 무기를 꺼내들고 블랙 울프 일족을 노려보았다.

근 2000명에 가까운 수인족들이 흘리는 살기에 무기를 꺼낸 블랙 울프 일족들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던 알카가 비웃음이 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성의 숲의 지배자라는 분이 고작 자신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고 힘으로 해결하려 하다니, 그런데 어찌 마성의 숲의 주인이라 하겠습니까?”

“무슨 소리냐. 난 너희가 내 노예가 되지 않아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그게 무슨…….”

천연덕스러운 내 말에 당황하는 표정을 흘리는 알카의 모습에 내 입가에 짙은 웃음이 걸렸다.

“난 ‘바람의 움직임’ 드라칸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평소 난 그를 전사로서 존경해왔다. 그런 그가 비겁한 자의 손에 죽어 분노하던 차에 네가 나타난 것이다. 틀렸는가?”

“그건…….”

이내 뭔가 말하려던 알카가 말끝을 흐리며 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솔직히 드라칸은 알지도 못하지만 그를 들먹이며 알카를 죽인다면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말대로 알카는 족장을 죽이고 그 자리를 뺏으려는 비겁한 자이니까.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고 뭔가를 생각하던 알카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웨어울프 일족의 족장 자리뿐. 그러나 나는 그대가 나를 그 자리에 앉혀줄 힘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나에게는 엄청난 수의 전사가 있다.”

“그건 그 전사들의 힘이지, 당신의 힘이 아닙니다.”

당연하다는 듯한 알카의 말에 내 얼굴이 굳었다. 확실히 개인의 힘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수인족이라면 모두 알카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내 힘을 증명하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저런 건방진……!”

“멈춰라, 카인.”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알카를 향해 호통을 치는 카인을 제지한 뒤, 다시 몸을 돌리며 온 힘을 다해 살기를 내뿜자 나를 바라보던 알카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가 싶더니 이내 얼굴을 붉히며 두 발짝 앞으로 나왔다.

크큭! 꼴에 자존심은 있다 이거냐. 그런 알카의 행동에 내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검을 들어라.”

스윽.

마치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던 알카가 허리춤에 달린 검을 꺼내 나를 겨눴다. 평범한 장검이 알카의 손에 들어가자 순식간에 차가운 살기를 담고 꿈틀거렸다. 빨리 끝내려는 생각인지 알카의 장검에서 검기가 일렁였다.

스르릉.

나 또한 등에 꽂힌 칠흑의 도를 뽑자 도가 짙은 검은빛을 발하며 마기를 흘렸다. 도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한 마기에 주변의 수인족들이 몸을 떨었다.

우우웅.

이내 도에 서서히 마나를 주입하자 알카의 것과 같은, 짙은 핏빛의 기가 도를 중심으로 일렁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파천기.”

츠츠츳.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핏빛의 도기와 어우러져 기묘한 색을 만들었다.

우우우웅.

도를 울리는 엄청난 기운에 나를 노려보던 알카는 물론 주변의 수인족들 또한 침을 삼키며 두려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최대한 빨리, 그리고 강하게 끝낸다!’

내 인지도가 부족한 지금, 다른 수인족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관건이었다. 거기다 상대는 웨어울프 일족의 진정한 힘이라 불리는 블랙 울프 일족의 족장. 상대로는 안성맞춤이었다.

‘한방으로 끝낸다!’

만약 여기서 내가 알카를 죽인다면 블랙 울프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무기를 들고 나를 공격할 것이 분명했고 그러면 웨어라이언들을 비롯한 나머지 일족들 또한 블랙 울프 일족을 공격할 터였다. 한마디로 괜한 피해만 입은 꼴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알카를 죽이지 않고 최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방법을 택했다. 바로 무기를 부수는 것이었다.

이내 잔뜩 숨을 들이마신 내 입에서 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제왕의 포효가 뛰쳐나왔다.

“크허어어엉!”

“크윽.”

숲을 울리는 커다란 포효에 알카의 몸이 멈칫하는 순간, 내 몸을 흐르던 힘이 일순간 폭발하며 팔과 다리에 쏠렸다.

후우웅.

깡!

도기와 파천기의 기운이 어우러져, 짙은 핏빛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가른 도가 멍하니 있는 알카의 검을 부수고 땅에 처박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다른 수인족들은 물론 당사자인 알카마저도 믿기지 않는 눈으로 나와 자신의 검을 번갈아 보았다.

“난 강하다!”

“와아아아!”

뒤로 들리는 엄청난 환호성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도를 뽑고 마나를 거두자 짙은 핏빛의 도가 곧 원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쨍그랑.

“져, 졌습니다.”

허망한 표정으로 부러진 검을 떨어뜨리는 알카의 모습에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도를 도갑에 꽂은 뒤, 아주 약간의 살기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블랙 울프 일족의 족장 알카여, 내 노예가 되겠는가? 난 너에게 웨어울프 일족 족장의 자리를 줄 힘이 충분하다!”

과거의 카인과 같은 위엄을 흘리며 묻자 잠시 멈칫한 알카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알카의 모습에 참을 수 없는 희열이 솟구쳤다.

“알카여, 그대가 이끄는 전사들의 수는 몇인가?”

“저를 비롯해 410명입니다.”

“좋다. 알카를 비롯한 410명의 웨어울프 일족의 전사들에게 나 블러드에 종속되는 노예로서 종속의 인이 새겨질 것이다. 동의하는가?”

장엄함마저 느껴지는 내 말에 잠시 멈칫한 알카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종속은 성립되었다.”

우우우웅.

스스슥.

조금 전에 웨어카우 일족에게 인을 새길 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폭스: 축하드립니다.]

[카나리아: 좋겠구만. 으하하하!]

진심으로 기뻐하는 카나리아와는 달리 폭스는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모든 수인족들이 보이는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가자, 근 2500에 가까운 수인족들이 나를 바라봤다.

“잘 들어라, 나의 전사들아!”

뻗어나가는 우렁찬 목소리에 나를 바라보던 수인족들의 시선이 한층 더 짙어졌다.

“너희는 나 블러드의 이름 밑에 새롭게 모인 전사들이다!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에게는 백성단(白星團)이라는 이름을! 웨어카우 일족에게는 혈우단이라는 이름을! 블랙 울프 일족에게는 흑랑단이라는 이름을 주겠다! 각자 조직에 걸맞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너희들은 오직 나와 각 일족의 족장의 명령으로만 움직일 것이며 불복하는 자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크허어어엉!”

“크허엉!”

“우어엉!”

“워우우!”

일족들이 자신들의 일족 특유의 포효로 내 포효에 답했다. 마성의 숲을 울리는 포효가 잠잠해질 때쯤, 내 입이 다시 열렸다.

“전사들아! 웨어래트 일족이라는 약해빠진 쥐새끼들은 족장 과제 때 겁에 질려 굴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지금은 둔해빠진 곰들과 함께 감히 우리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여 버리자!”

“갈아 먹어버리자!”

“기름에 튀기자!”

듣기만 해도 끔찍한 욕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블러드: 폭스, 웨어래트 일족의 본거지가 어디냐?]

[폭스: 현재 여기에서 약 5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피의 언덕에 막사를 치고 기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블러드: 수는?]

[폭스: 그 흑마법사 때문에 가까이 가지는 못했지만 대충 500명에서 700명 정도입니다.]

[블러드: 항상 고맙군.]

작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폭스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흘렸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만약 폭스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오는 것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내 고개를 돌려 살기를 흘리며 무기를 들고 있는 수인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자, 전사들아! 각 일족의 대표들은 바로 내 뒤를 따르고 나머지 전사들은 각자 대형을 맞춰 그 뒤를 따르라! 크허엉!”

[블러드: 폭스, 내 옆으로 와서 길을 안내해라.]

“우와와아아!”

좀 떨어진 곳에서 카나리아와 함께 나를 바라보던 폭스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 또한 폭스의 옆에 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뒤로 카인과 티나를 비롯한 각 웨어라이언 일족의 족장들과 크란, 텍사스, 알카가 따라붙었다. 그 뒤로는 2500명에 가까운 수인족들이 따라붙었다.

최소 투 스타 이상에서 쓰리 스타 중급까지 이른 강자들이 모였기에 당연히 뜨거운 뒤의 분위기와는 달리 일행의 선두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려 있었다.

“알카.”

“예.”

내 부름에 나에게서 약간 떨어져서 걷던 알카가 내 곁으로 다가와 대답한 뒤 일정한 간격으로 걸음을 맞추며 내 말을 기다렸다. 문득 아무것도 없는 허전한 알카의 허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검을 부러트렸으니 하나 선물해야겠군.”

“예? 아, 아닙니다.”

“폭스, 쓸 만한 검 하나만 찾아봐라.”

연신 사양하는 알카를 무시하고 폭스에게 말하자 잠시 아이템 창을 뒤지는 듯, 허공을 향해 헛손질을 하던 폭스가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색 장검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폭스: 그거 엄청 좋은 겁니다.]

[카나리아: 아깝군, 아까워!]

검을 살펴보니 폭스와 카나리아의 말대로 좋은 검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검갑에 꽂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화려한 붉은 보석이 장식되어 있는 기다란 장검. 내 기억대로라면 이 장검은 얼마 전, 족장 후보 사냥 때 카나리아의 주먹에 맞아 죽은 웨어울프 일족의 것이 확실했다.

“받아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하다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들어 검을 받는 알카의 모습에 나를 따르던 수인족 대표들이 부러운 표정으로 알카를 바라봤다.

알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자 내 도처럼 검은 검날이 빛을 받아 번뜩이며 차가운 살기를 흘렸다.

“다시 움직이지.”

“예, 예!”

내가 다시 움직이자 검에 빠져 있던 알카는 물론이고 그런 알카를 향해 부러운 눈길을 보내던 다른 족장들까지 화들짝 놀라 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것으로 그들 또한 내가 오직 힘만을 추구하는 족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 분명했다. 상을 받을 만한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그리고 무언가를 받을 대가를 치른 자에게는 그 무언가에 해당하는 물건을! 이것이 내가 그리는 족장의 모습이었다.

폭스와 티나를 선두로 움직이는 행렬에는 그 흔한 킬러 비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3천에 가까운 수인족들이 흘리는 살기에 마성의 숲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숨을 죽이고 몸을 숨겼기에 본래 5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4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족장님, 저곳이 피의 언덕입니다.”

티나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보니 제법 커다란 언덕이 숲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핏빛에 가까운 붉은 꽃들이 언덕을 가득 뒤덮고 있어 왜 ‘피의 언덕’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숲속에 언덕이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언덕 주위에 그 흔한 나무 한 그루 없는 것이 더 이상했다.

“티나, 왜 언덕 근처에는 나무가 없지?”

“전설에 따르면, 과거에 이 데스 랜드를 최초로 통일한 어떤 수인족이 죽어서 묻힌 곳이라 합니다. 죽어서도 기가 너무 강해 주위에 아무런 생물도 자라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커다란 언덕은 바로 그 수인족의 무덤이지요.”

‘그냥 설정이군.’

강자를 존경하는 수인족 특성대로 존경의 빛을 흘리는 티나를 무시하고 크란을 향해 손짓하자, 다른 족장들과 서 있던 크란이 나에게 다가와 자세를 취했다.

“주술을 이용해서 웨어래트 일족을 살펴라.”

“예!”

힘차게 대답하며 고래를 숙인 크란이 곧 완드를 흔들며 입을 열자 크란의 완드를 중심으로 마나와는 다른 기운이 모여들었다. 주술사들이 사용하는 일명 차크라라고 불리는 자연의 기운이었다.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나와는 다른, 오직 주술사들만이 사용하는 것이 바로 차크라였다.

“창공의 차크라여, 질풍의 차크라여, 질풍의 자식을 보내 내 눈으로 삼을지니!”

쉬이익.

끼룩.

크란의 주문이 끝나자 완드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한곳으로 모이는가 싶더니 이내 새하얀 매의 형상으로 변했다. 크란의 주위를 돌며 힘찬 울음을 토해낸 하얀 매는 힘찬 날갯짓을 하며 피의 언덕으로 날아갔다.

크란의 어깨를 다독인 뒤 몸을 돌리자 각자 자세를 풀고 휴식을 취하던 수인족들이 자세를 취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런 수인족들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린 내 입에서 살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저 피의 언덕 너머에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은 겁쟁이들이 있다! 모두 전투를 준비해라!”

“와아아아!”

우렁찬 고함을 지른 전사들이 각자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자세를 취하며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듯한 모습으로 살기를 피워 올렸다. 본래 조용히 습격해야 옳겠지만 숲 입구부터 살기를 피워 올리며 이동한 우리를 해골이 발견하지 못할 리 없었기에 나 또한 도를 뽑아 들고 살기를 흘렸다.

끼룩.

이내 언덕 너머로 정찰을 갔던 매가 돌아와 크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매와 눈을 마주친 크란이 다시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우자 매가 다시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은 크란이 내게 다가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덕 너머에 대충 700명 정도로 보이는 웨어래트와 웨어베어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웨어래트 일족의 족장과 정체불명의 흑마법사 또한 있었습니다.”

“음.”

내가 불편한 신음을 흘리자 크란이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상대가 해골이라면 이렇게 무방비로 적을 기다릴 리가 없었다. 적어도 함정을 설치하거나 하다못해 비굴하게 도망치는 것이 정상이었다. 내가 아는 해골은 그런 놈이었다.

그런데 당당히 우리를 기다리다니? 분명 평상시의 해골이 취할 행동은 아니었다. 결론은 단 하나, 뭔가를 믿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티나, 현재 웨어타이거 일족의 움직임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정보를 담당하는 블루 일족의 족장답게 바로 대답을 하는 티나의 말에 내 얼굴이 굳었다. 웨어타이거 일족과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 또한 사라진 지금, 해골이 믿을 것은 없었다. 아니, 단 하나가 있기는 했다.

‘그 정체불명의 흑마법사를 믿고 있는 거군.’

크란의 주술은 물론이고 티나마저 애를 먹인 정체불명의 흑마법사. 해골이 믿고 있는 것은 그 흑마법사가 분명했다.

‘제길.’

점점 더 꼬여가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리자 내 눈치를 보던 카인이 다가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족장님, 적이 무슨 비겁한 방법을 썼든 간에 우리는 적보다 거의 4배나 많습니다. 전사들을 믿고 전투를 치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족장을 했던 연륜을 발휘해 의견을 말하고 뒤로 빠지는 카인 덕에 고민이 사라졌다. 크란의 말대로 병력의 차이는 거의 4배였다. 해골이 함정을 설치했든 무언가 비겁한 술수를 썼든 간에 수로 밀어붙인다면 우리의 승리는 확실했다.

‘결론은 하나군.’

마침내 머릿속에 하나의 결론을 생각해낸 내가 몸을 돌려 도를 들어올리자 웅성거리던 전사들이 일제히 숨을 삼키며 내 말을 기다렸다. 그건 족장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기를 꺼내 들고 살기를 흘리는 전사들의 모습에 내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백성단과 백사자단을 제외한 모든 전사들은 출전하라! 백성단은 뒤에서 주술을 이용해 전사들을 보조하고 백사자단은 혹시 모를 적의 기습에 백성단을 보호하라! 크허어엉!”

“크허어엉!”

“워우우우!”

“우어어어!”

우렁찬 포효를 터트리며 족장들과 함께 언덕 너머로 몸을 날리자 그 뒤로 수천에 이르는 포효와 함께 거대한 살기 덩어리가 나를 따라 움직였다.

두두두두.

약 1800여 명에 이르는 수인족들의 질주에 숲이 진동하며 땅이 불안한 울음을 흘렸다. 5분도 걸리지 않아 올라선 언덕 너머로 적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내 뒤로 뭉쳐 있던 살기들이 한순간에 폭발하며 언덕 아래를 향해 쏘아졌다.

우우우웅.

이미 전투 준비를 하고 있는 적들에게 돌진하는 전사들의 몸 위로 이제는 백성단이라 불리는 웨어와일드보어 일족의 주술이 새하얗게 뒤덮이며 전신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우리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지워버려라! 크허어엉!”

내 입에서 터진 전사의 외침에 탄력을 받은 전사들과 웨어래트 일족과 웨어베어 일족이 뒤섞인 적들이 충돌하며 거대한 굉음을 터트렸다.

콰아아앙!

“우와와아!”

살기와 투기가 난무하는 전장에서도 아무런 기운도 흘리지 않는 적의 모습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이내 내 도에 어깨가 갈린 웨어베어 전사가 시커멓게 썩은 피를 쏟아내며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로 도끼를 휘둘렀다. 재빨리 피하긴 했지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웨어베어의 공격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웨어베어는 어깨가 갈라지면 통증을 느꼈고 무엇보다 시커멓게 죽은 피가 아닌 붉은 피를 흘리게 설정이 되어 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며 상처에서 썩은 피를 흘리는 몬스터는 한 종류밖에 없다. 망자의 던전에서 지겹도록 상대한 저주받은 마물들!

“으드득, 언데드!”

“크아악! 사, 살려줘!”

“괴, 괴물이다!”

무기를 휘두르며 날뛰던 전사들이 적들의 거침없는 공격에 당황하며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언데드!

루키아논을 따르는 여섯 왕 중, 불멸왕(不滅王) 루키페노돈의 창조물로 이미 한 번 죽었던 생물들이 아크 리치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 살아 있는 생명체의 목숨을 노리는 괴물이 바로 언데드였다. 은이나 미스릴, 혹은 신성마법에 약한 힘을 보이지만 지금 그런 것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마법사의 탑 밑에 있던 망자들의 던전의 몬스터들 또한 언데드였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언데드 군단은 그 언데드들과 강함을 달리하는 것들이었다. 쓰리 스타 이상의 네크로맨서에 의해 언데드가 될 시 본래 가지고 있던 능력의 1.5배의 힘을 가지게 되는데, 해골과 같이 있는 흑마법사는 쓰리 스타 이상의 네크로맨서가 분명했다.

[폭스: 블러드 님! 언데드입니다!]

귓가로 울리는 폭스의 외침에 언데드 전사들의 끝에 위치한 거대한 천막을 노려보는 내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믿었던 것이 이것이었나!’

아크 리치의 힘을 빌려 죽었던 시체들을 조종하는 것을 공격 방법으로 삼는 네크로맨서는 그 직업 자체가 드루이드처럼 희귀했지만 공격적인 위력 면에서는 소환술사와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최강이었다.

그어어어.

이성과 사고를 잃어버린 채, 오직 파괴와 살육을 행하는 언데드답게 괴이한 외침을 토해낸 웨어베어가 갈라진 어깨를 덜렁거리며 나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깡!

“큭.”

언데드가 되면서 더욱더 강력해진 힘을 이용해 나를 짓누르는 웨어베어의 공격에 도를 흘리자 웨어베어의 몸이 기우뚱하며 바닥에 처박혔다. 이내 잘린 어깨 때문에 중심을 잡지 못하는 몸으로 뒤뚱거리는 웨어베어의 뒤통수에 도를 박아 넣자 발광을 하던 웨어베어의 움직임이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곧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족장님! 전사들이 밀리고 있습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합니다!”

짓뭉개진 하체를 질질 끌며 끈질기게 따라붙는 웨어래트의 머리를 갈라버린 카인이 다급한 표정으로 내게 대책을 구했다.

“제길! 폭스, 가지고 있는 성수의 양은?”

“겨우 10개 정도입니다!”

섀도우 아머를 두른 채 내 곁에서 열심히 단검을 날리는 폭스의 대답에 얼굴이 구겨졌다. 성수 10개라면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다. 전사들은 고사하고 각 족장들이나 쓸 수 있을지 모르는 양이다.

“제길! 일단 후퇴……!”

“자연의 차크라여, 성스러움의 차크라여, 순리의 차크라여, 내 손을 떠나 불행한 영혼들에게 안식의 대지를 내주어라!”

우우우웅.

어쩔 수 없이 후퇴를 명령하려는 내 말을 끊는 힘찬 주문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이내 언덕 위에서 뿜어져 나온 은색 빛이 전장의 한 부분에 서려 거대한 실드와 같은 형상을 취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내 두 번, 세 번 연속으로 들려오는 주문에 전장 전체가 은빛 막에 휩싸인 듯한 모습으로 변했다.

내가 알기로 이런 효과를 가진 주술은 단 하나뿐이었다.

“성지화(聖地化)!”

오염된 땅을 성스럽게 해주어 그 은빛 막 안에서만큼은 언데드의 위력이 2배 가까이 감소하며 반대로 아군의 무기에 저절로 성 속성의 보너스 데미지가 붙는 주술. 엄청난 주술력 소비를 감안한다면 언데드 몬스터에게는 최강의 주문으로 손꼽히는 쓰리 스타 이상의 주술이었다.

“적들이 약해졌다! 모두 반격해라! 크허어엉!”

내 입에서 터진 제왕의 포효에 주춤하며 몸을 사리던 전사들이 다시 무기를 고쳐 잡고 괴로움에 몸을 떠는 언데드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뒤로는 처음 내 예상과 같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언데드 특유의 질긴 생명력 덕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뒤바뀐 상황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주술이 시전된 언덕으로 고개를 돌리자 백성단으로 보이는 인영들이 백사자단의 보호를 받으며 연신 신성(神聖) 계열의 주술을 사용하는 것이 보였다.

[블러드: 폭스! 네크로맨서의 위치는?]

[폭스: 저 커다란 천막입니다.]

폭스의 눈이 향하는 천막에서는 네크로맨서의 것으로 보이는 짙은 어둠의 마나가 끊임없이 흘러 나와 언데드들에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방식이라면 언데드들의 근원인 네크로맨서를 죽이는 것이 상황을 정리하는 가장 간편한 방법이었다.

“카인! 티나! 알카! 폭스! 카나리아! 나를 따라라!”

[블러드: 내가 멈추면 바로 나를 보호해라!]

[폭스: 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폭스를 뒤로하고, 천막을 방어하는 형상으로 늘어서 있는 언데드 무리를 향한 내 도에 짙은 핏빛의 도기가 서렸다. 그것도 잠시, 이내 내 입에서 뜨거운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무한참.”

츠츠츠츳.

콰앙!

도 위로 짙은 검은색의 기운이 맺히는 순간, 온몸을 흐르던 힘이 일순간에 폭발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많은 언데드 무리를 향해 쏘아진 몸에서 짙은 검은색 기운이 폭사되는가 싶더니 곧 내 손에 들린 도가 허공을 누볐다.

스으응.

퍽!

“그억!”

가장 먼저 도에 부딪힌 것은 작은 체격의 웨어래트였다. 언데드 특유의 딱딱한 움직임으로 검을 휘두르던 웨어래트의 머리가 핏빛과 검은색이 섞인 도에 맞아 터져 썩은 뇌수를 뿌렸다. 이내 썩은 살 조각으로 뒤범벅이 된 도가 멈추지 않고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그 다음 제물은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웨어래트를 제치고 앞으로 나서며 도끼를 휘두른 언데드 웨어베어였다.

후우웅. 까강!

퍽.

너무나 쉽게 도끼를 부러트린 도가 파천기의 영향으로 힘이 2배가 되어 웨어베어의 목덜미에 박혔다.

푸화악.

“큭!”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썩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내 몸과 손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놀며 전장을 누볐다.

후우웅. 까강.

퍽!

“그억!”

도를 감싼 기운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내 몸에 묻는 썩은 피와 썩은 살점들의 양이 점차 불어났다.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며 도를 휘두르는 광전사와 같은 내 모습에 지성이 없는 언데드들마저도 두려움을 느끼며 주춤했다.

간혹 가다 운 좋게 무기를 이용해 막은 언데드들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무기를 부순 도가 곧 2배의 힘으로 언데드의 머리를 짓뭉갰다.

도의 날은 이미 썩은 피와 살 때문에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마치 둔기처럼 언데드의 머리를 짓뭉개며 앞으로 나아가는 내 모습에 뒤를 따라오던 족장들은 물론이고 전투를 치르던 전사들마저 경악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노오옴!”

이내 처음으로 언데드가 아닌 보통 웨어래트가 분노 섞인 외침을 토해내며 내 앞을 막아섰다. 오십대 중반의 모습으로 짙은 마나가 흐르는 검과 보석으로 치장한 은빛 갑옷을 보니 아마 해골의 심복인 듯했다. 리치나 특수한 언데드를 제외하고는 마나를 다룰 수 없는 언데드의 특성 상, 언데드로 만들지 않은 듯했다.

“내가 상대… 헉!”

후우웅.

까강!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들이닥치는 도에 기겁을 한 웨어래트가 몸을 피하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도가 웨어래트의 무기를 부순 후였다. 웨어래트의 무기를 부순 도가 2배의 힘을 가지고 웨어래트의 갑옷과 부딪쳤다. 웨어래트의 은빛 갑옷이 불꽃을 토해내며 갈라지자 이내 4배의 힘을 담은 도가 웨어래트의 허리에 박혔다.

퍼억!

부우욱!

“크아악.”

갑옷을 찢고 박힌 도가 힘을 얻어 웨어래트의 허리를 양단했다. 두꺼운 종이를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내장과 붉은 피에 뒤에 있던 카나리아가 인상을 구기며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다시 전장을 누비며 썩은 피와 살의 축제를 벌였다. 체력은 이미 바닥을 보였고 몸 여기저기에는 제법 커다란 상처들이 생겼다. 마음 같아서는 멈춰서 상처를 치료하고 싶었지만 한 번 발동하면 체력이 1이 남을 때까지 멈추지 못하는 무한참의 특성 탓에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미친 듯이 도를 휘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금이나마 공격의 방향을 정할 수 있어서 뒤를 제외한 다른 각도에서 나를 공격하려는 언데들에게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귀를 울리는, 레벨 업을 알리는 여인의 목소리 따위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해골과 흑마법사가 있는 거대한 붉은 천막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마기에 도를 감싼 핏빛 도기와 파천기의 흑빛 기운, 그리고 도 특유의 마기가 ‘웅웅’ 짙은 울음을 토해냈다.

그어어어.

퍼억.

이내 30이었던 체력이 1이 되며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휘두른 도가 웨어베어의 머리를 짓뭉개고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췄다. 멈춘 것은 도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대상의 움직임과 시간을 정지시키는 포 스타의 마법인 ‘타임 스톱’에 걸린 것처럼, 내 몸이 멈췄다.

최대한 도의 사정거리에 들지 않으면서 나를 따라붙던 폭스가 재빨리 내 곁으로 다가와 얼마 남지 않은 언데드들에게 단검을 던졌다. 그러자 폭스와 함께 나를 뒤따르던 카인과 티나, 알카와 카나리아 또한 무기를 쥐며 주변의 언데드들을 정리했다.

[블러드: 나에게 포션을 사용해라.]

다급함이 섞인 내 목소리에 곁에서 단검을 날리던 폭스가 황급히 다가와 아이템 창에서 포션을 꺼내 내 몸에 들이부었다.

치이익.

언데드에게 당한 상처와 성스러운 기운의 포션이 만나며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렸다. 빠른 속도로 회복되어 가는 상처에 폭스가 포션을 더 꺼내 바르고는 몇 개는 뚜껑을 따서 내 입에 흘려보냈다. 재빠른 폭스의 조치 덕에 체력이 반 이상 차오르자 그제야 굳었던 몸이 움직이며 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크윽! 폭스, 현재 상황은?”

무한참의 영향으로 온몸이 욱신거려 낮게 신음을 흘리자 곁에 있던 폭스가 짐짓 걱정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거의 모든 상황이 정리가 됐습니다.”

“음.”

폭스의 말에 내 입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폭스의 말대로 거의 모든 언데드들이 정리가 된 상태였다. 기껏해야 수 십 마리만이 남아 약한 저항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천막 주위의 언데드들은 천막에서 나오는 마기에 더욱더 힘을 얻어 날뛰고 있었다. 이내 주변의 언데드들을 정리하고 돌아온 족장들이 내 명령을 기다리며 나를 바라봤다.

“모든 병력은 뒤로 물러나 각 족장들과 함께 천막을 넓게 포위하고 내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움직이지 마라! 백성단을 보호하던 백사자단은 나와서 나와 함께 공격한다!”

“예!”

족장들은 우렁찬 외침을 토해내며 각자 자신들의 부대로 사라졌다. 시선을 돌려 근 100m 밖에 있는 천막을 바라보니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붉은 천막이 기분 나쁘게 꿈틀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전사들을 동원해서 천막을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처럼 좁은 간격으로 모여 있는 것은 대 범위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마법사에게 죽여 달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시체를 주로 사용하는 네크로맨서지만 흑마법사는 흑마법사, 대 범위 마법 하나 정도는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소수 정예로 가야 한다. 백사자단은 백성단을 보호하느라 피해가 없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스스슥.

내 손짓에 맞춰 어느새 뒤로 다가온 백사자단이 무기를 꺼내 들고 흉흉한 기세를 뽐냈다. 카인의 직속 전사들인 만큼 다른 일족의 전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강력한 힘을 가진 전사들과 내 가디언으로서 내 곁에 남은 티나와 백사자단의 족장인 카인. 그리고 카나리아와 폭스 또한 언제라도 뛰쳐나갈 듯한 자세를 취했다.

휘이이잉.

마침내 한줄기 바람이 전해준 역한 피비린내가 내 코를 자극하는 순간,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공격해라! 크허어엉!”

“크허어엉!”

“크허어엉.”

내 뒤에서 조용히 도끼를 쓰다듬던 카인이 내 포효에 뒤지지 않는 포효를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파천기.”

츠츠츳.

이미 마력과 체력을 회복한 지 오래였기에 도기와 함께 파천기를 시전하자 핏빛 도기와 함께 짙은 검은색 기운이 도를 휘감으며 짙은 마기를 피워 올렸다.

가장 먼저 천막에 도착한 폭스가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이 손을 휘두르자 천막이 부욱 찢겨 나풀거렸다.

후우웅.

천막을 찢을 필요도 없이 한 번에 걷어내겠다는 생각에 천막 속에 깊숙이 도를 박아 넣고 크게 휘두르자 제법 무거운 천막이 내 도에 딸려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천막 안이 드러나는 순간, 음침한 목소리와 함께 하늘로 솟구치던 마기가 요동쳤다.

“어둠의 마나여, 부정한 마나여, 불멸의 마나여, 나의 손에 깃들어 하늘로 올라 죽음의 비로 변해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에게 죽음의 축복을 내리소서! 호러 오브 레인!”

쏴아아아.

흑마법사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을 맴돌던 마기가 진득한 액체로 변해 일대를 휩쓸었다. 호러 오브 레인이라면 쓰리 스타 이상의 네크로맨서가 가진 거의 유일한 대범위 마법으로 공격력보다는 그 비를 맞음으로써 얻는 효과가 큰 저주 계열의 공격 마법이다.

“모, 몸이 안 움직여!”

“눈이 안 보인다!”

“으아악! 사, 살려줘!”

몸이 안 움직이고 눈이 보이지 않는 기초적인 저주로 시작해 환각을 보고 두려움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구르는 전사들의 모습에 카인과 내 얼굴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분노가 떠올랐다. 비교적 저항력이 강해 저주를 버티며 차가운 살기를 내뿜었다.

“해골!”

“낄낄낄! 오랜만이다!”

분노 섞인 내 외침이 채 여운을 남기기도 전에 나풀거리는 천막 사이로 제법 많은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언데드로 구성된 웨어베어들과 익숙한 해골, 그리고 정체불명의 흑마법사였다.

이내 도를 들고 해골을 향해 달려들려던 내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언데드나 흑마법사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해골의 검을 타고 흐르는 짙은 검은색의, 내 도와 같은 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해골의 얼굴이 환자와 같이 창백했고 몸 전체에서 흐르는 귀기 또한 불길한 예감이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보통 사람과 같이 말을 하고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검기를 다룰 줄 아는 언데드는 단 한 종류밖에 없었다.

“데스나이트(Death Knight)!”

“자, 한바탕 놀아보자! 키하하핫!”

스으응.

퍽.

“크악!”

소름끼치는 웃음을 흘리며 무차별적으로 휘두른 해골의 검에 앞에서 공격을 준비하던 전사 한 명의 가슴이 쩍 갈라지며 피를 쏟아냈다. 전에 봐왔던 해골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강함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전사의 목에 검을 박아 넣어 마무리를 한 해골이 번들거리며 빛나는 화려한 갑옷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죄를 짓고 죽은 위대한 기사가 신에게 저주를 받아 언데드가 된 경우로, 죽기 직전에 가지고 있던 검술과 긍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허울 좋은 성명과는 다르게 유저들이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언데드 10순위 안에 드는 것이 바로 데스나이트였다.

보통 언데드에게 부족한 기술은 물론이고 언데드 특유의 재생력을 가지고 있는데다 거의 사기에 가까울 정도로 높은 항마력은 쓰리 스타 이상의 신성 마법이 아니면 데미지를 줄 수조차 없었다. 웬만한 던전의 보스로 나오는 것이 바로 데스나이트였다. 보통 유저가 데스나이트가 되려면 불멸왕에 관련된 퀘스트를 깨거나 나처럼 아예 종족을 바꾸는 퀘스트를 깼어야 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 데스나이트가 되려면 쓰리 스타 이상의 네크로맨서의 마법과 갖가지 재료들을 사용해 10일 동안 제련을 해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보통 몬스터로 나오는 데스나이트의 2분의 1 정도의 힘을 가지는 데스나이트가 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족장 과제 때 숨어 있었군!’

족장 과제 기간인 9일간은 해골이 데스나이트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키키키!”

“흐압!”

까강.

기묘한 웃음을 흘리는 해골의 검과, 힘찬 기합과 함께 휘두른 내 도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토해냈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백사자단과 언데드 웨어베어가 격돌하며 썩은 피와 살아 있는 피를 뿌렸다. 이내 자신의 몸에 겹겹이 실드를 두른 흑마법사가 주문을 웅얼거리자 백사자단과 격돌하는 언데드들의 기운이 한층 거세졌다.

“키키키. 어떠냐? 내 작품들이. 응?”

“네 작품이 썩어빠진 네 얼굴을 말하는 거라면 최악이다.”

“뭐, 뭐야!”

능숙하게 맞받아치는 내 말에 폭스가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며 거세게 검을 휘둘렀다.

‘흥. 멍청한 놈. 내가 예전처럼 이성을 잃을 줄 알았냐?’

데스나이트가 되었어도 예전의 무식함은 버리지 못했는지, 마기가 휘감긴 검을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해골의 모습에 나는 차갑게 비웃었다.

“아지트에 숨어서 삼류 에로영화나 보고 있어야 할 네놈이 어째서 여기 있는 거냐? 혹시 정말 쥐에게 반한 건 아니겠지?”

“죽엇!”

쉬시식.

능숙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흘리며 이죽거리자 해골이 고함을 지르며 휘두르던 검을 회수하는가 싶더니 곧 내 목을 향해 날카롭게 찔렀다.

까강.

“크윽.”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넓은 도면을 이용해 막자 해골이 신음을 삼키며 거리를 벌렸다. 긴장된 모습으로 검을 고쳐 잡는 해골의 모습에 내 얼굴에 미미한 웃음이 서렸다.

“크큭! 저 뒤의 흑마법사는 누구냐? 혹시 숨겨둔 애인? 끼리끼리 논다더니, 저 마법사는 리치냐?”

“이익! 저분이 누군지 알고 함부로 떠드는 거냐! 베팔 님이 이끄는 검은 불꽃에서도 순위를 다투는 네크로맨서 ‘체어맨’ 님이시다!”

“정보 고맙군. 크큭.”

내 입가에 흐르는 노골적인 비웃음에 해골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흑마법사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곧 분노 섞인 괴성을 흘리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크로맨서 체어맨이라면 나 또한 조금은 알고 있는 유저다. 베팔이 이끄는 검은 불꽃에서도 뛰어난 마법사로, 그림자들의 아버지라 불렸던 폭스와는 달리 ‘시체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자였다.

[폭스: 호오, 저자가 그 유명한 ‘시체들의 아버지’군요.]

“키아악!”

까강.

귓가로 울리는 폭스의 음성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재빨리 몸을 흘리며 도를 휘두르자 묵직한 압력이 손목을 울렸다. 손목을 부러트리려는 기세로 쏟아지는 압력에 순순히 손잡이를 놓듯, 살며시 손바닥 위에 걸치자 도가 손바닥 위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도신에 묻어 있던 피와 살점을 털어냈다.

후드득.

“크악.”

얼굴에 튀긴 썩은 살점에 황급히 손을 휘젓는 해골의 행동에 다시 내 손에 잡힌 도가 한줄기 빛이 되어 해골의 배를 노렸다.

쉐에엑.

서걱.

“큭!”

아무리 무식해도 데스나이트인지, 배를 노린 찌르기를 가까스로 피한 해골이 배 대신 허용한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피와 내장 대신 흘러나오는 짙은 마기에 해골의 창백한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블러드: 폭스, 카나리아와 함께 체어맨을 맡아라.]

[폭스: 예.]

“흐아압!”

타다닥.

폭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기합을 지르며 해골에게 몸을 날리자 부상을 챙기던 해골이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검을 들어 막았다.

까강!

검과 도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쇳소리에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도 잠시, 이내 서서히 힘을 주자 ‘카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해골의 검의 이가 빠지며 불꽃을 튀겼다.

“죽어라!”

깡! 깡! 깡!

“커헉.”

아무런 초식 없이 오직 내려찍는 내 공격에 황급히 검을 들어 막은 해골이 연이어 터지는 공격에 신음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크아압!”

후우웅.

깡!

“크악.”

우렁찬 기합과 함께 온 힘을 다해 휘두른 도를 가까스로 막은 해골이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몸을 날렸다. 몸을 사리며 나를 노려보는 해골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모든 전사들은 총공격하라! 크허어엉!”

“우와아아!”

마지막으로 터진 제왕의 포효에 해골이 주춤하는 사이, 백성단을 제외한 모든 전사들이 얼마 남지 않은 언데드들에게 쏟아졌다. 거의 학살에 가까운 전투에 참담한 표정을 흘리던 해골이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틀어진 것, 네놈이라도 죽여야 속이 풀리겠다! 키키킥!”

우우웅.

음침한 얼굴로 웃음을 흘리는 해골에 맞춰 해골의 검 또한 짙은 마기와 칠흑의 검기를 뿜어내며 불길한 울음을 토해냈다.

처억.

“와라!”

우우웅.

자세를 낮추며 양손으로 도를 잡아 짙은 핏빛의 도기와 짙은 검은색의 파천기의 기운이 만나 탁한 핏빛 검기를 만들었다. 해골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불길하게 울며 마기를 토해내는 도에 나를 노려보던 해골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멈칫한 해골이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며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키야아앗!”

파파박.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을 베며 달려오는 해골의 모습에 모처럼 긴장이 몸을 휘감았다.

죽음 대 죽음.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족장 자리는 물론이고 모든 것을 잃는 것이고, 해골이 여기서 죽는다면 해골 또한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뒈져라!”

“죽어라!”

까가강!

살기를 담은 외침과 함께 무기가 불꽃을 토해내며 부딪치고, 잠시 동안 해골과 나는 대치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잠시간의 대치!

“크아아악.”

쩌적.

“헉!”

힘찬 기합과 함께 도에 힘을 더하자 해골의 검에 실 같은 금이 가더니 마침내 갈라졌다.

쨍그랑.

검이 맥없이 부러지자 기겁한 해골이 황급히 몸을 날렸다. 그러나 순간, 파천기에 의해 2배의 힘을 머금은 도가 해골의 가슴을 강타했다.

콰광!

쩌저적.

쇠가 갈라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해골의 갑옷이 갈라지며 해골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4배의 힘을 담은 도가 갑옷의 갈라진 틈을 쑤시고 들어가 해골의 가슴을 헤집었다.

“크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마기가 새어나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는 해골의 모습에 내 얼굴에 진득한 미소가 걸렸다.

스윽.

“사, 살려줘! 아니, 살려주세요! 제, 제발… 죽이지만 말아줘! 나를 살려주면 웨어래트 일족의 족장으로 너에게 복종하겠다! 조, 종속의 인을 새겨도 좋아!”

여유롭게 도를 들어올리는 내 모습에 상처를 돌보던 해골이 비굴한 얼굴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내가 동요할 리가 없었다.

“제, 제발…….”

“놈에게 전해라.”

내 발을 부여잡고 목숨을 구걸하던 해골이 고개를 들어 비굴함이 어린 찢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는 해골의 모습에 나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와 동시에 내 손에 들린 도가 살기를 토하며 울부짖었다.

“왕이 돌아왔다고.”

“그게 무슨……!”

후우웅.

서걱.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무런 저항 없이 목이 잘려 서서히 모래가 되는 해골을 뒤로하고, 머릿속에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와 작은 복수를 음미하며 몸을 돌리자 어느새 다가온 폭스가 피투성이의 얼굴로 환한 미소를 흘렸다.

“시체들의 아버지는 시체로 만들어줬습니다. 하하핫.”

만족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폭스와 내 주변을 감싼 강자들, 그리고 이 숲을 빼곡히 메운 나의 전사들의 모습에 광기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하하하…! 크하하하!”

내가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리자 폭스와 카나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족장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속을 모르는 인간과는 달리 배신을 모르는 NPC 전사들의 모습에 내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자, 가자! 더러운 계략으로 우리의 동료인 알카를 쫓아낸 웨어울프와 우리 가족들의 목숨을 노리는 웨어타이거만 처리하면 우리가 진정한 제왕이다!”

‘더불어 나의 복수의 시작이지! 크크큭.’

내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크큭, 크하하하!”

휘이이잉.

거친 바람에 섞여 풍기는 지독한 혈향에 내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곧 저 앞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다가오는 한 무리의 인영에 내 입에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척.

“대(大) 족장! 도망쳤던 윤의 자식들을 모두 잡았습니다!”

“놔라! 놔!”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내 앞에 고개를 숙인 알카의 손에 들린 15세가량의 남자아이가 거칠게 반항하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내가 약간의 살기를 흘리자 아이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이내 알카의 뒤를 이어 카인과 티나, 그리고 폭스와 카나리아, 나머지 족장들이 각자 손에 어린아이나 청년을 잡고 내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는 힘찬 외침을 토해냈다.

“대 족장께 인사드립니다!”

끄덕.

여기서 대 족장이란 바로 나를 칭하는 말이다. 다른 일족이나 부족들의 지도자 또한 족장이라 불려 헷갈리지 않기 위해 다른 부족이나 족장들은 ‘족장’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나만이 ‘대 족장’이라는 칭호를 쓰게 되었다.

[폭스: 이제 제법 폼이 나네요.]

귓가에 울리는 폭스의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티나를 바라보자 10세가량의 아이를 붙잡고 있던 티나가 내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웨어타이거 일족의 족장 ‘사나운 이빨’ 윤의 자식 8명을 모두 잡아왔습니다.”

“으음.”

티나가 고개를 꾸벅이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현실시간으로는 30일, 게임 시간으로는 60일이라는 시간 동안 이 곳 데스 랜드에는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중 가장 커다란 변화는 역시 데스 랜드의 통일이었다.

웨어래트와 웨어베어 일족의 전사들을 전멸시키는 것으로 시작한 나의 계획은 곧 데스 랜드 전체로 퍼져 나갔다. 남아 있는 웨어래트와 웨어베어의 세력을 흡수해 바로 전사들을 이끌고 웨어울프들이 사는 곳으로 진격했다. 2일 만에 웨어울프의 반을 전멸시키고 나머지 반에게 충성을 다짐받아 종속의 인을 새겼다. 물론 웨어울프 일족의 지도자는 알카가 되었다.

그 다음 목표는 바로 마지막으로 남은 웨어타이거 일족이었다.

마성의 숲의 최강 종족이라 불리는 웨어라이언 일족과 대등한 힘을 가진 웨어타이거 일족은 역시나 강적이었다. 30일. 이 숫자가 바로 웨어타이거 일족이 ‘야수연합’이라 불리는 내 휘하의 전사들과 싸운 날짜였다. 야수연합이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는데도 거의 대등할 정도로 싸운 웨어타이거 일족의 힘에 많은 전사들이 죽고 다쳤다.

하지만 역시 수의 차이는 이기지 못했는지 정확히 31일째 되는 날, 내 도에 웨어타이거 일족의 지도자인 사나운 이빨 윤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웨어타이거 일족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승기가 급속도로 우리를 향해 기울었고 마침내 거의 모든 부족들이 나에게 종속되었고 그나마 윤이 족장으로 있던 블랙 타이거 일족만이 윤의 자식들을 믿고 끝까지 대항해왔다.

‘뭐, 그것도 오늘로 끝이지만.’

“가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이동하는 내 뒤로 족장들이 조용히 움직였다.

뭉클.

“으으.”

내 발에 느껴지는 뭉클한 감각과 이어지는 신음에 아래를 보니 하체가 거의 뜯긴 웨어타이거 일족 전사 한 명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 블랙 타이거의 정체는 바로 뒤에서 족장들이 잡고 있는 윤의 자식들을 보호하던 호위대였다. 처음에는 20명이었지만 지금은 겨우 1명이, 그것도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웨어타이거를 바라보는 내 눈이 싸늘하게 빛나고 내 손에 들린 도가 살기를 흘렸다. 그와 동시에 절망으로 물들었던 웨어타이거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아, 악마……!

푸욱.

[레벨이 올랐습니다.]

‘또 레벨 업이군.’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웨어타이거를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옮기며 작게 캐릭터 창을 중얼거리고는 힘에 보너스 스탯을 찍은 뒤 앞을 보니 60일 동안의 결과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 블러드. 레벨: 278. 속성: 혈(血).

성향: 천악(天惡). 종족: 웨어라이언(Werelion).

명칭: 데스 랜드의 지배자.

체력: 770000. 마력: 45000. 신성력: 0.

힘: 1030. 민첩성: 100. 체력: 100.

지혜: 100. 신마력: 100. 행운: 50.

이름과 종족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성향은 이번에 새로 업데이트가 된 단계, 극악을 뛰어넘는 천악(天惡)으로 변했고 명칭 또한 ‘데스 랜드의 지배자’로 바뀌었다. 거기다 엄청나게 올라간 레벨과 체력, 그리고 힘은 이 피곤한 일상에서도 절로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거기다 내가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 또한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입고 있는 갑옷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마기에 칠흑의 마도가 ‘웅웅’ 울며 공명음을 토해냈다.

칠흑의 갑옷.

바로 내가 입고 있는 갑옷의 이름이다. 내가 들고 있는 ‘칠흑의 마도’와 세트로 이루어진 이 갑옷은 웨어타이거 일족의 지도자인 윤을 죽이고 나온 아이템이다.

-칠흑의 갑옷(A급)-

악계(惡界)의 육악왕(六惡王) 중 한 명인 암천왕(暗天王) 라데스가 칠흑의 마도와 함께 사용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갑옷. 칠흑의 마도와는 세트 아이템이다. 세트 착용 시, ‘악왕의 기운’이라는 스킬 사용이 가능하다. 별다른 기능은 없지만 능력만으로는 최상급의 갑옷이다.

방어력- 950. 내구력- 1500/1500.

특수능력- 행운 50 감소. 힘 50 상승.

세트 아이템 착용 시, ‘악왕의 기운’ 사용 가능.

(칠흑의 세트- 칠흑의 마도. 칠흑의 갑옷.)

-악왕의 기운-

육악왕(六惡王) 중 최강, 최악이라 불리는 암천왕(暗天王) 라데스의 기운을 잠시간 사용할 수 있다. 온몸에 라데스의 기운을 두른다. 하루 1회 사용 가능. 지속 시간 5분.

마나 소모- 5000.

특수능력- 방어력 50% 상승. 공격력 10% 상승.

‘살기’ 사용 시, 위력 50% 상승.

3% 확률로 모든 물리 공격 무시.

3% 확률로 모든 마법 공격 무시.

3% 확률로 모든 저주 무시.

3% 확률로 모든 신성 공격 무시.

칠흑의 갑옷과 칠흑의 마도가 세트 아이템이 되어 나에게 준 이 스킬은 꽤나 쓸 만한 것이었다. 지속적인 사냥에는 쓸 일이 없겠지만 갑작스러운 전투나 1대 1전투에서는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스킬이었다. 칠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갑옷은 짙은 검은색으로 되어 있고, 배와 어깨에는 흉악한 마귀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한층 더 강해진 내 모습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것도 잠시, 이내 느껴지는 수많은 기운에 표정을 관리하며 내 앞에 있는 커다란 단상 위로 올라가자 내가 느꼈던 수많은 기운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근 1만에 가까운 엄청난 수의 수인족들이었다. 물론 모두 전사들은 아니지만 1만에 가까운 수인족들이 내뿜는 위압감은 상당한 것이었다.

“와아아아!”

내가 단상에 올라감과 동시에 울리는 함성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손을 몇 번 흔들자 함성이 한층 더 커져 마성의 숲을 울렸다.

“조용하라.”

이내 음성 증폭 마법이 걸려 있는 마이크 모양의 아이템에 말하자 내 목소리가 수백 배로 커져 웅웅 울렸다.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좌중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뒤를 향해 손짓을 하자 윤의 자식을 들고 있던 족장들이 모두 단상 위에 올라왔다. 엄청난 좌중에 윤의 자식들이 몸을 떨며 움찔거렸다.

“웨어타이거 일족의 차기 족장인 젤다는 내 앞으로 올라와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좌중의 앞쪽에서 이십대 초반의 적당한 근육을 가진 붉은 머리의 웨어타이거 일족이 나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단상 위로 올라왔다. 내가 임시로 지정한 웨어타이거 일족의 족장인 젤다였다.

“동지들이여! 내 뒤에 있는 이 더러운 피의 자식들이 보이는가!”

“우와아아!”

윤의 자식들을 가리키며 외치자 조용했던 좌중이 순식간에 끓어오르며 함성을 토해냈다.

“내가 오늘 그대들을 모은 이유는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더러운 피들을 처형하기 위함이다!”

우와아아아!

공개 처형.

바로 내가 오늘 수인족들을 모은 두 가지 이유 중 한 가지였다. 이렇게 수인족들 앞에서 족장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처형시킨다면 감히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각 종족의 사람들에게 종속의 인을 새겼지만 각 일족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종속의 인을 새길 수는 없다. 그러기에 바로 내가 선택한 것이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아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젤다, 네가 직접 처형해라.”

“예!”

스르릉.

내 호명에 조용히 서 있던 젤다가 허리춤에 달려 있는 날카로운 장검을 꺼내 들고는 티나의 손에 잡혀 있는 아이의 앞으로 섰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아이의 모습에 잠시 주춤하던 젤다는 내가 싸늘한 살기를 보내자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사, 살려……!”

서걱.

툭.

아무런 저항 없이 매끄럽게 잘린 아이의 머리가 바닥을 구를 때쯤, 굳은 얼굴의 젤다의 검은 이미 다른 아이의 목을 자르고 있었다.

“으아아악!”

서걱.

마구 고함을 지르며 발광을 하던 청년을 끝으로 총 8개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다 모래가 되어 사라지자 시끄러웠던 좌중이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폭스: 지금입니다!]

[블러드: 알고 있다.]

“동지들이여!”

폭스의 재촉에 인상을 구기며 재빨리 마이크 모양의 아이템을 잡고 외치자 수인족들의 눈이 나에게로 꽂혔다. 공포에 휩싸인 수인족들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 그대들에게 커다란 계획을 말하고자 한다!”

갑작스런 내 말에 나를 바라보던 수인족들의 시선에 의아함이 어렸다. 내 뒤에서 기립하고 있는 몇 명의 족장들만이 흥분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수인족의 대륙 진출이다!”

“…….”

내 입에서 나온 말에 좌중이 방금 전과 같은 침묵에 휩싸였다. 몬스터로 분류되어 대륙에서 사냥을 당하는 수인족들과는 달리 데스 랜드의 수인족들은 NPC의 역할도 같이 하며 데스 랜드 안에서만 살고 있었다. 그것은 곧 그들의 법칙이기도 했다.

“우리가 무엇이 부족해서 이 열악한 숲에 숨어 살아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저 대륙의 쓰레기들보다 훨씬 월등한 힘을 가지고 있다! 허나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우리보다 강한 자들 마냥 우리의 가족들을 사냥해 가죽을 가지고 또 우리를 경멸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대로 우리보다 하등한 인간들에게 평생 핍박을 받으면서 살 것인가!”

[폭스: 누워서 침 뱉기인 거 아시죠?]

[카나리아: 맞아, 맞아.]

서로 떠드는 폭스와 카나리아의 말에 내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블러드: 닥쳐라.]

“동지들이여!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가! 우리는 저 하등한 인간들 위에 군림할 자격이 충분하다! 그렇지 않은가?”

“옳소!”

“맞다! 우리가 더 월등한 종족이다!”

“하등 종족을 죽여 버리자!”

어느 한 수인족의 외침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랑스러운 숲의 일족들이여! 대륙으로 나가자! 인간의 피와 살을 제물로 받으며 대륙을 재패하자! 크허어엉!”

“우와아아!”

내 입에서 터진 제왕의 포효를 시작으로 좌중에서 엄청난 환호와 함께 갖가지 일족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모두 각 일족의 마을에서 야수들과 함께 기다려라! 대륙의 역사를 다시 쓰자!”

“우와아아아!”

숲을 울리는 환호를 뒤로하고 몸을 돌리자 뒤에 있던 족장들이 연설에 감동 받은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중에서 가장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티나가 내 앞으로 다가와 몸을 숙여 내 발등에 입을 맞추자 각 족장들 또한 티나처럼 내 발등에 입을 맞췄다. 오직 폭스와 카나리아만이 그 자리에 서서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몸을 돌려 단상 뒤에 있는 천막에 들어가 가장 위에 있는 커다란 의자에 앉자 각 족장들이 내 밑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폭스, 배는?”

“문제없습니다. 연락을 하면 언제든지 올 수 있습니다. 항구 또한 언제든지 통제할 수 있고 이미 30개가 넘는 워프 포탈을 설치 완료했습니다.”

싸우지 못하는 수인족들을 빼더라도 전사들의 수는 거의 5천에 가까웠다. 그들 모두가 간혹 가다 오는 배를 타고 가려면 한 달이 넘게 걸릴지도 몰랐기에 폭스를 통해 마법사가짱이얌에게 연락해 수인족들을 나를 배를 부탁했다.

또한 엄청난 수의 수인족들이 나타나면 유저들이 동영상을 찍거나 소문을 낼 수도 있기에 미리 베이거스 항구를 통제할 것과 5천에 가까운 수인족들이 머물 인적 드문 곳의 작은 숲, 그리고 그 숲으로 통하는 30개가 넘는 워프 마법진까지 부탁했다.

이 모든 것이 수인족들의 대륙 진출을 위한 준비였다.

물론 마법사가짱이얌이 처음부터 순순히 내 말에 응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미친 인간이 이용해먹을 놈에게 힘을 내주겠는가. 하지만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나 혼자 따로 복수를 하겠다는 내 말에 어쩔 수 없이 내 조건을 들어준 것이다. 이내 만족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돌려 족장들을 바라보자 족장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내 말을 기다렸다.

“각 일족들은 전사들에게 각각 한 마리의 야수를 보급해라.”

“예!”

내가 말한 야수란 마성의 숲에서 나오는 몬스터를 지칭하는 말로, 실제로는 자이언트 베어나 자이언트 라이언, 자이언트 래트 등의 몬스터들이었다.

이들 야수들은 자신과 비슷한 수인족과는 친밀도가 높아서 약간의 훈련만 하면 말처럼 이동 수단으로 타고 다닐 수도 있고 공격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거기다 보통 레벨이 90 내지 100정도인 데다가 각 야수들은 각자의 특성에 맞게 모두 다른 공격 패턴을 가지고 있어 공격용으로도 쓸모가 많았다.

그 예로 자이언트 베어는 속도는 느리지만 엄청난 힘을, 자이언트 래트나 자이언트 울프는 체력은 약하지만 빠른 스피드를, 자이언트 와일드보어는 간단한 하급 주술을, 자이언트 라이언이나 자이언트 타이거는 엄청난 힘과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다.

나 또한 5일 전부터 백구라는 이름의 새하얀 자이언트 라이언을 기르고 있었다. 백구라는 이름은 폭스가 지어준 것으로 마땅히 다른 이름으로 할 것도 없어서 바꾸지 않고 사용하는 중이었다.

폭스와 카나리아를 제외한 모든 족장들 또한 각자 일족과 맞는 야수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럼 이틀 뒤, 오후 2시까지 일족의 전사들과 야수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모여라.”

“예!”

우렁차게 대답을 하고는 각자의 일족들이 있는 마을로 몸을 날리는 족장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폭스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이틀이라. 현실 시간으로는 하루군요. 그동안 사냥이라도 할까요?”

“저 자식이랑 가면 몬스터가 안 오는데…….”

카나리아의 투덜거림에 내 얼굴이 작게 구겨졌다. 카나리아의 말대로 내가 숲으로 가면 몬스터는커녕 자이언트 라이언을 제외한 그 어떤 야수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수인족들이야 모두 통일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야수들까지 그러는 것은 의외였다. 거기다 킬러 비들 또한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에 가까이 오기만 해도 미쳐 날뛰며 나를 피해 도망치니, 사실상 내가 이 데스 랜드에서 사냥할 몬스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너희끼리 다녀와라.”

“미안하군. 으하하하!”

내 말이 떨어지자 전혀 미안하지 않는 얼굴로 웃음을 터트리며 폭스를 잡아 이끄는 카나리아의 모습에 나의 얼굴이 한층 더 구겨졌다.

“웬만하면 야수 계열이랑 수인족은 건드리지 마라. 죽여도 흔적 없이 처리하고.”

“걱정 말라고. 으하하! 한두 번 해보나.”

[블러드: 탑에 연락해서 배를 보내라. 출발은 2일 후다.]

[폭스: 알겠습니다.]

바보 카나리아를 무시하고 못 이기는 척 카나리아에게 끌려가는 폭스를 향해 귓속말을 하자 폭스가 나를 향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전사들에게 바람을 불어넣었으니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휴우…….”

카나리아와 폭스마저 나가 주위가 조용해지자 내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 어떤 때보다 바쁜 60일이었다. 거기다 3일에 한 번 씩 있는 12시간의 수면 시간 덕에 빼앗긴 시간만 해도 상당했다.

밥이야 영양제를 먹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고 가끔 나가서 진짜 밥을 먹고 운동을 해줬기 때문에 건강에 무리는 없었지만 문제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였다.

거기다 염환에게 부탁해서 받은 검은 사자 길드의 상황은 지친 내 정신을 궁지에 몰기 충분했다. 다른 길드를 흡수해 세력을 늘리고 본래 있던 간부들과 새로 영입한 간부들이 축을 이뤄 제2의 전성기 아닌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 염환이 본 검은 사자 길드의 현재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도 나를 믿고 있는 간부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중, 내가 대륙으로 나가서 가장 먼저 만나야 할 간부는 해파토스라 불리는 드워프 유저였다. 대장장이 직업을 가지고 있고 현재 드워프 일족 중 가장 커다란 세력인 ‘검은 모루 일족’의 족장으로 있는 해파토스는 염환처럼 솔로 플레이를 하며 아이템을 만들다 내 권유에 어쩔 수 없이 검은 사자 길드에 가입한 유저였다.

현실의 나이는 사십대 초반으로 자신이 만든 아이템을 팔아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애 둘 딸린 애 아빠다. 현실에서도 나와 약간 친분이 있었지만 내가 아무 말 없이 이사를 하면서 연락이 끊인 사람이다.

며칠 전부터 메시지를 보내 내 복수의 의지를 밝히고 혹시나 해서 마법사가짱이얌에게 부탁해 해파토스의 주변에 스파이 몇 명을 배치해서 혹시나 해파토스가 무라사마와 연락을 하나 지켜봤지만 결론은 해파토스는 무라사마의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메시지 작성. 받는 이, 해파토스. 게임 시간으로 적어도 5일 안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부탁한 것은 모두 완성했는지 연락 부탁드립니다. 메시지 종료. 전송.”

띠리링.

[메시지가 전송되었습니다.]

머릿속에 울리는 종소리를 음미하며 눈을 감자 편안함이 몰려왔다. 모처럼 만끽하는 평온함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로그아웃을 했다.

* * *

철컥.

몸을 짓누르는 갖가지 장비들을 떼어내고 캡슐 밖으로 나가자마자 느껴지는 싸늘한 공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미네르바, 난방 가동. 온수 가동. 10분 뒤, 보통 정식 2번.”

[예.]

땀에 젖은 옷을 벗고 훈훈한 기운이 느껴지는 욕탕에 몸을 담그자 따스한 물이 내 몸을 휘감았다. 그렇게 간단하게 샤워를 끝낸 뒤, 미네르바가 준비한 간단한 옷을 입고 주방으로 가서 보통 정식 2번을 먹자 포만감과 피로가 내 몸을 덮쳤다.

육체적 피로보다는 거의 정신적인 피로였다.

“미네르바, 23시간 후 알람.”

정말 내가 23시간을 잘 리는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알람 설정을 해놓고 침대에 곧 포근한 기분과 함께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사용자를 확인하였습니다. 총 1개의 캐릭터가 있습니다. 캐릭터 명, 블러드. 접속하시겠습니까?]

잠에서 깨어나 다시 접속절차를 밟았다.

여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 주위로 짙은 검은색 기운과 새하얀 장발을 휘날리는 인영이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내가 손을 뻗어 인영의 손을 잡자 손을 중심으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접속!”

둥둥둥둥.

피를 끓어오르게 하는 힘찬 북소리를 음미하며 어렴풋이 보이는 눈을 치켜뜨자 내 앞에 모여 있던 족장들이 허리를 숙이며 힘찬 외침을 토해냈다.

“대 족장을 뵙니다!”

“앉아라.”

타닥.

각자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족장들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는 내 귀에 장난기를 담은 폭스의 목소리가 울렸다.

[폭스: 설마 늦으실 줄을 몰랐습니다.]

[블러드: …닥쳐라.]

우습게도 꼬박 하루를 자고 혹시나 해서 설정한 알람 덕에 일어나 간신히 시간에 맞춰 올 수 있었다.

‘설마 정말로 하루를 꼬박 잘 줄이야. 이것 참.’

나를 바라보는 족장들의 시선에 내 입에서 절로 불편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크음! 카인, 전사들의 준비는?”

“모두 준비를 완료하고 밖에 대기해 있습니다.”

“좋아. 티나, 백구는?”

“밖에 있습니다.”

백구를 담당하고 있는 티나의 대답에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을 나서자 천막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야수들 중, 거대한 자이언트 라이언이 나에게 다가와 내 몸에 자신의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보통 자이언트 라이언들보다 거의 1.5배는 더 커다란 몸과 눈처럼 새하얀 털, 그리고 풍성한 갈기가 절로 제왕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자이언트 라이언이 바로 내 야수인 백구였다.

크르르릉.

할짝할짝.

“크큭! 전사들에게로 가자.”

낮은 목울림을 흘리며 내 얼굴을 핥는 백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단상에 올라서자 단상 밑에 대기하고 있던 전사들이 커다란 환호를 지르며 나를 반겼다.

“크워어어엉!”

“우워어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전사들에 맞춰 야수들 또한 커다란 머리를 치켜들고 커다란 포효를 터트렸다. 살며시 손을 들었다 내리자 함성을 토해내던 전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야수들 또한 주인들을 따라 포효를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일심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사와 야수들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단상에 있는 마이크 아이템에 입을 대고 말했다.

“전사들이여! 대륙으로 뻗어나가 하등한 종족들을 지배할 준비를 끝마쳤는가!”

“우와아아!”

대답 대신 우렁찬 함성을 토해내는 전사들의 모습에 내 얼굴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전사들이여! 우리는 오늘 이 시간을 시작으로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대륙을 지배하여 대륙에서 억압받는 일족들과 열악한 섬에서 고통 받는 가족들에게 따스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우와아아아!”

전사들은 뜨거운 살기를 뿜어대며 환호했다.

“좋다! 모두 서쪽의 선착장으로 이동해서 각 일족에게 정해진 배에 탑승하라!”

“우와아아아!”

전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서쪽으로 몸을 날렸다.

나는 단상에서 내려와 각자 자신의 야수와 함께 대기하고 있는 족장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도 이동한다.”

“예!”

본래 선착장은 웨어라이언 일족이 사는 곳에만 있었는데 내가 데스 랜드 통일을 실행함과 동시에 폐쇄시키면서 새로 만든 곳이 바로 서쪽 선착장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대륙에 알려질 시에는 엄청난 파장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기에 유저들이 오는 선착장을 폐쇄하고 장사를 하는 유저들에게 돈을 쥐어주고 입막음을 시켰다.

마음 같아서는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들 모두가 쓰리 스타 이상의 유저들. 모두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그들 또한 장사꾼이기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아이템을 사고 거기다 돈을 더 주겠다는 내 제의를 거절할 리가 없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우리가 대륙으로 나가기 전까지 종속의 인을 새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또 섬 안에 있는 극소수의 수인족 유저들을 이유를 만들어서 추방하고, 뛰어난 전사들을 붙여 게임을 접거나 다른 캐릭터를 키워야 할 정도로 로그아웃을 시켰다. 혹시나 운영자 쪽에서 제재가 들어올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어서 마음 놓고 계획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 모든 것이 내 복수를 위한 일이기에 독한 마음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거의 대부분의 수인족 유저들이 족장 과제 때 나에게 죽임을 당해 수인족에서 추방을 당했기에 섬에 있는 유저는 별로 없었다.

어느새 도착한 선착장에는 크기가 엄청난 30척의 배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오로지 많은 인원을 태우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져 별다른 장식은 없이 크기만 했지만 만족스러웠다.

유일하게 문이 열려 있는 배에 올라타자 NPC로 보이는 수십의 선원들이 분주하던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더니 곧 다른 족장들까지 나타나자 긴장된 표정으로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다른 전사들은?”

“모두 탑승했습니다.”

티나의 말대로 갑판 위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전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야수들은?”

“전사들과 함께 있습니다. 멀미를 대비해서 마모루를 전사들과 야수들에게 복용시켰습니다.”

티나가 말하는 ‘마모루’는 구토 증세를 치료하는 약초로 멀미에도 뛰어난 효과를 지녔다. 티나의 조치에 고개를 끄덕이며 배의 내부에 들어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이 뻥 뚫려 있어 커다란 원룸을 연상케 했다.

대충 앉자 어느새 다가온 티나가 붉은빛이 감도는 약초, 마모루를 두 뿌리 건넸다.

“고맙군.”

“아닙니다.”

티나는 얼굴을 붉히며 물러나 나머지 족장들에게도 두 뿌리씩 마모루를 건넨 뒤, 자신의 야수에게 마모루를 먹였다. 내 손에 들린 두 뿌리의 마모루 중 하나를 들어 내 옆에 앉아 있는 백구의 입에 넣자 스윽 하고 스며들 듯 마모루가 사라졌다. 나 또한 손에 들린 마모루를 입 안에 넣자 약간 쓴맛이 느껴지더니 입속에 있던 마모루가 사라졌다.

이내 뒤늦게 선내로 들어온 폭스가 티나가 건네준 마모루를 먹고는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원래는 3시간 뒤에 출발하려고 했는데 주변 바다가 심상치 않아서 지금 출발한답니다.”

뿌우우우.

그그긍.

폭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렁찬 나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배가 서서히 움직였다.

배가 크다보니 자연히 움직이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가까운 곳에 있는 유스논이 아닌, 멀리 떨어진 베이거스까지 가는 것이니 적어도 게임 시간으로 하루 이상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로그아웃을 하고 조금 더 쉬고 싶었지만 차마 족장들을 놔두고 그럴 수 없기에 몇 개 남지 않은 숫돌을 꺼내 들고 도를 손질했다. 그러자 나를 따라 나머지 족장들 또한 각자 자신들의 무기를 손질했다.

오직 야수들만이 지루한 분위기를 참다못해 코를 골며 잠을 잘 뿐이었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얼마를 지루함에 빠져 있었을까. 귓가에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잠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현재 나에게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단 둘, 염환 아니면 해파토스였다. 염환과는 현실에서도 만나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메시지의 주인은 해파토스일 확률이 높았다.

“메시지 확인.”

파밧.

역시나 내 예상대로 편지지 모양의 홀로그램의 메시지에는 해파토스라는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손을 들어 메시지를 클릭하자 ‘촤르륵’ 하는 효과음과 함께 홀로그램이 커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주문한 물건은 모두 완성이 되었다. 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자세한 말은 이곳으로 와서 하자.>

내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말이 ‘약간의 문제’이지, 타이나루스 산맥에 있는 드워프 일족 중 가장 커다란 일족의 족장인 해파토스에게 약간의 문제라면 그건 이미 커다란 문제였다.

‘재료는 충분했을 텐데…….’

부탁한 물건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마법사의 탑과 염환이 가지고 있던 재료들을 탈탈 털어서 넘겨주었기에 남으면 남았지 절대 부족할 리는 없었다.

‘도대체 왜…….’

“선착장이 보입니다!”

선원의 목소리에 고민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백구와 함께 갑판으로 향했다. 어차피 해파토스가 있는 곳은 코앞이니 메시지를 보낼 필요도 없이 직접 가서 확인하면 될 터였다.

벌컥.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바다 냄새 섞인 시원한 바람을 만끽할 시간도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던 선원의 팔을 낚아채자 팔이 잡힌 선원이 흠칫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저곳이 베이거스인가?”

“예, 옛!”

겁에 질린 듯, 커다랗게 대답을 한 뒤 재빨리 모습을 감췄다.

[폭스: 혹시 군침을 흘리면서 선원을 보셨나요?]

[카나리아: 그럴지도 모르지. 크크큭.]

귀를 울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내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빌어먹을 놈들.’

[블러드: 잡아먹으려고 했다.]

[카나리아: 헉.]

[폭스: …네?]

경악 섞인 카나리아의 신음과 당황한 듯한 폭스의 물음을 무시하고 난간에 다가가자 작은 점으로 보이던 베이거스가 점차 그 호화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며 나를 맞이했다.

그르릉.

옆에 붙어 애교를 떠는 백구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나를 따라 배 위로 나온 각 일족의 족장들도 멍한 눈으로 찬란한 빛을 뿌리는 베이거스를 바라봤다. 밤이라 베이거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조명 덕에 낮보다 2배는 현란한 베이거스의 모습은 나 또한 시선을 뺏길 정도였다.

“모두 정신 차려라.”

“예, 옛!”

나직한 내 말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족장들을 뒤로하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내가 초보 존에서 나와서 봤던 베이거스 선착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사의 탑에서 나온 몇 명의 마법사로 보이는 유저들 말고는 그 어떤 유저들도 보이지 않았다.

쿠구궁.

“도착했습니다!”

낮은 진동과 함께 울려 퍼지는 선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실에 있던 전사들이 갑판 위로 쏟아져 나와 베이거스의 모습에 탄성을 흘렸다. 사전에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라고 명령을 내렸기에 섬에서처럼 환호를 지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내려서 정렬한다!”

타다다닥.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의 5천에 이르는 전사들과 4천에 이르는 야수들이 선원들이 준비한 사다리를 타고 선착장에 내려 각자 자신의 부족들과 모여 대열을 정비했다. 사다리를 타지 못하는 야수들은 커다란 나무를 이용해 배를 내려 각자 자신들의 주인의 옆 자리를 지켰다.

나 또한 사다리를 타고 선착장에 내려서자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 중, 짙은 초록색 로브를 입고 있던 이십대 중반의 남자가 나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호프만이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향해 생긋 미소를 흘린 마법사 호프만이 고개를 돌려 가벼운 몸놀림으로 배에서 내린 폭스에게 다가가 살며시 포옹했다. 폭스 또한 그런 호프만을 거부하지 않고 포용하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이네요.”

“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설마 호프만 님만큼 했을까요.”

“언제까지 세워둘 참이지?”

서로 안부를 묻는 폭스와 호프만을 보다 못해 한마디 하자 뭔가 말을 하려던 폭스가 짙은 웃음을 흘리며 호프만을 끌고 나에게 다가왔다.

“제가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오행마왕 중 녹마왕(綠魔王)의 직위를 가지고 계신 호프만 님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부족하지만 녹마왕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편안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한 번 인사하는 호프만의 모습에 내 얼굴이 살짝 굳었다. 녹마왕이라면 마법사의 탑의 오행마왕이라는 다섯 명의 간부 중 한 명으로 제라스 시절의 폭스만큼이나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유저였다.

그렇기에 내가 처음 호프만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호프만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외부의 적을 처리했던 폭스와는 달리 내부의 배신자를 처벌하는 검은 사자 길드로 보자면 베팔과 같은 존재가 바로 호프만이었다.

웃는 사신, 예의바른 마왕.

이 모든 것이 내 앞에서 웃음을 흘리는 초록색 로브의 사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철저히 위선으로 만들어진 웃음을 흘리는 마법사가짱이얌이나 폭스와는 달리 카나리아의 그것처럼 꾸밈없는 웃음을 흘리던 호프만이 선착장의 한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선착장을 통제하고는 있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언제 검은 사자 길드에서 눈치를 챌지 모르니까요. 자, 이쪽으로 오시죠.”

호프만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선착장의 구석에는 거의 30여 개에 가까운 워프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발동한 지 얼마 안 되어 휘황찬란한 빛을 뿌려댔다.

“일 하나는 확실하군.”

“마스터는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좋아, 마법진의 도착지는?”

“태초의 숲의 외곽에 위치한 숲입니다.”

“그쪽의 준비는?”

“예, 숲에 살고 있는 오크족의 마을을 빼앗았습니다. 적어도 5천 명 이상이 거주할 수 있는 마을이고 근처에 작은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거기다 비상시를 대비해 5개의 마법진을 설치했습니다.”

“좋군.”

흠잡을 데 없는 준비에 숨길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말이 쉽지, 저 정도 준비를 하려면 약간의 노력과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거기다 5천 명 이상이 거주할 수 있는 오크족의 마을이라면 그 오크족과 근처의 오크족을 처리하기 위해 수많은 마법사들이 동원됐을 것이 분명했다. 말이 하급 몬스터지,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강해지는 오크들 때문에 꽤나 커다란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족장들은 마을에 도착해 주변의 몬스터들을 토벌하고 내 명령을 기다려라. 그 임무는 카인, 너에게 맡기겠다. 또한 나의 야수와 티나의 야수의 관리도 너에게 맡긴다.”

“목숨을 걸고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카인이 우렁차게 답했다.

“모든 족장들 또한 카인을 나라고 생각하고 따르도록!”

“예!”

각 족장들의 우렁찬 대답을 뒤로하고 카나리아와 티나를 이끌고 폭스와 잡담을 나누는 호프만에게 다가가자 줄기차게 이야기를 하던 호프만이 맘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다른 일이라도?”

“타이나루스 산맥으로 가는 마법진이 필요하다.”

“타이나루스 산맥이요?”

내 말에 답한 것은 호프만이 아니라 잠자코 있던 폭스였다. 이내 호프만을 제치고 앞으로 나온 폭스가 말을 이었다.

“거기는 왜 가려고 하십니까? 태초의 숲에 있는 마을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준비 못 하겠다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타이나루스 산맥으로 가는 이유를…….”

“준비하겠습니다.”

폭스의 말을 끊고 입을 연 호프만이 손을 흔들자 주변에 있던 마법사 한 명이 다가와 호프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타이나루스 산맥 입구로 가는 마법진을 하나 만들도록.”

“예.”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마법사를 향해 웃음을 흘리던 호프만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타이나루스 산맥에는 어떤 일로 가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가 아는 사람에게 부탁한 것을 찾으러 간다.”

“아는 사람이라…….”

말끝을 흐리던 호프만이 웃음을 거두며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갑작스레 변한 호프만의 모습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나 또한 피하지 않고 호프만을 노려보자 잠시 나를 바라보던 호프만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신의 존재가 적에게 알려져 봤자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튀는 행동은 삼가줬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걱정 말고 마을에 있는 마법진의 좌표나 불러라.”

“그건…….”

이내 뭔가 말하려던 호프만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 좌표를 알려드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왜지?”

날카로운 물음에 호프만이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쪽의 마법진은 제 휘하에 있는 마법사들이 설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아내려면 적어도 하루 이상이 걸립니다. 폭스와 함께 행동하시면 폭스를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좋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호프만 또한 굳었던 얼굴을 풀고 웃음을 흘리며 다시 폭스와 잡담을 나눴다. 카나리아 또한 나와 있는 것보단 폭스와 있는 것이 낫겠다 싶었는지 폭스의 옆에 붙어 멀뚱히 폭스를 바라보았다. 오직 티나만이 내 옆에 붙어 단창을 손에 쥐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역시 가디언은 가디언이군.’

티나의 경계 속에 편안한 마음으로 베이거스의 선착장을 구경하는 것도 잠시, 어느 마법사의 보고를 들은 호프만이 나에게 다가와 5명의 마법사들이 서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마법진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호프만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에는 전사들이 들어가는 마법진보다는 약간 더 작은 마법진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변의 마법사들이 각자 스태프를 잡고 땀을 흘리는 것이 다른 마법진들처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마법사들에 의해 시전된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길어야 3분입니다. 어서 가시죠.”

“고맙군.”

“아닙니다. 모든 것은 마스터가 시키신 일입니다.”

끝까지 마법사가짱이얌을 두둔하는 호프만을 뒤로하고 마법진에 올라서자 ‘파앗’ 하는 소리와 함께 마법진에서 나온 밝은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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