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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4/34)

외전

“…스터? 마스터?”

왠지 모를 멍한 느낌과 함께 환한 빛이 내 몸을 휘감았고 그와 동시에 언제 들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몸을 돌리자 영롱하게 빛나는 은빛 갑옷을 걸친 전사가 나를 향해 작게 고개를 숙이더니 곧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스터, 때까치가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 무라사마.”

멍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나를 바라보는 무라사마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어디 아프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몇 년간 함께 게임을 한 사이인데도 여전히 존댓말을 사용하는 무라사마의 모습에 작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자 머리를 짓누르던 멍한 느낌이 조금 사라졌다.

“그런데 정보라니?”

“용의 계곡에 살고 있는 ‘더블 헤드 드레이크’ 바르크가 나타났다는 정보입니다.”

“아!”

내 입에서 터진 탄성에 무라사마가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현재 길드원들이 최대한 유저들을 통제하며 바르크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10분이 한계입니다.”

“간부들을 소집해! 오랜만에 바르크 사냥이라고!”

“예!”

작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사라지는 무라사마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더블 헤드 드레이크, 바르크.

내가 길드 마스터로 있는 검은 사자 길드의 아지트가 자리 잡고 있는 ‘용의 쉼터’라는 필드에 출몰하는 보스 급 몬스터다.

레벨은 400이며 드레이크 특유의 거대한 몸과 끊임없이 뜨거운 불꽃을 쏟아내는 2개의 머리, 그리고 쓰리 스타의 강철 갑옷을 종잇장마냥 찢어버리는 2개의 손은 가히 공포 그 자체였다.

보통 드레이크들보다 1.5배 크게 설정된 몸집에 다른 드레이크들처럼 날아다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더블 헤드 드레이크라는 악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2번의 사냥에 간신히 잡은 바르크는 알려진 악명답게 주는 아이템 또한 만만치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유니크 아이템인 ‘영광의 검’ 또한 바르크가 드롭 한 것이다. 이내 아이템과 포션을 정비한 뒤 아지트 앞으로 나가자 무라사마를 비롯한 나머지 간부들이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쓰리 스타의 성직자이자 성녀(聖女)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월향. 포 스타에 근접한 마법사인 베팔. 로빈훗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때까치. 붉은 기사라 불리는 율칸. 검은 그림자라 불리는 보티스. 마지막으로 나의 절친한 벗이자 동반자인 무라사마.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해졌다.

“모인 인원이 이게 다인가?”

“예, 모두 임무를 수행중이거나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냥 우리끼리 끝내자고! 킬킬킬.”

무라사마의 말에 베팔이 진득한 웃음을 흘리며 손에 들린 스틱을 휘둘렀다. 나까지 포함해 7명인 파티였다. 조금 모자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 정 밀리면 뒤에서 대기하는 길드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니 충분했다.

“바르크가 있는 장소는?”

“붉은 오아시스입니다.”

“베팔 님, 포탈을 열어주시죠.”

“킬킬! 우주의 마나여, 세계의 마나여, 창천의 마나여, 공간의 마나여. 지금 나에게 다른 장소로 가는 차원의 틈을 허락하라. 워프 포탈!”

판타즈마 월드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필드에 마력석을 심었다는 베팔답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뭔가 조작을 하는 듯싶더니 바로 워프 포탈을 열었다.

“마스터부터 가시죠. 낄낄!”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는 베팔을 뒤로하고 포탈을 타고 도착한 붉은 오아시느는 이미 초토화 직전이었다.

오아시스에 있던 4명의 NPC들은 이미 죽었는지 보이지 않았고 NPC들의 짐으로 보이는 물건을 물어뜯는 바르크만이 나를 맞이할 뿐이었다.

크르르? 크륵?

이제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마차를 물어뜯던 바르크가 돌연 나타난 나를 보고는 두 개의 머리를 동시에 갸웃하며 낮은 울음을 흘렸다.

내 뒤에 나타난 간부들이 각자 무기를 점검하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릴 바라보는 바르크를 견제했다.

“파티는?”

“그냥 가죠. 아이템이야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 아닙니까? 하하핫.”

“그렇긴 하지. 하핫!”

유쾌한 웃음을 흘리는 때까치의 말에 나도 웃었다. 우리를 바라보던 바르크가 통나무를 연상케 하는 두 다리를 놀려 천천히 다가오자 각자 거리를 벌리며 무기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최전선으로 빠져 있던 월향이 기다란 스태프를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는 힘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나의 어머니여! 당신의 목소리를 빌려 제가 당신의 자식들이 승리할 수 있는 노래를 하게 하시옵소서! 성스러운 노래를 불러 적들이 당신의 자식을 해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샤이닝 송 오브 더 마더!”

라라라라.

아아아아.

우우우웅.

월향이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붉은 오아시스 전체가 환한 신성력에 휩싸였다. 대 공성전용 보조 마법인 샤이닝 송 오브 더 마더였다.

시전자를 중심으로 50m 안의 모든 유저들의 모든 능력치를 30씩 증가시켜주는 이 스킬은 성녀라는 스페셜 직업을 가진 월향과, 대교주와 교황이라는 스페셜 직업만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다.

“나의 희생은 동료들로 하여금 뒤를 맡기게 만든다!”

시전자의 체력을 소진하여 반경 10m 안의 유저들의 공격력을 10% 올려주는 ‘희생의 외침’을 시전한 율칸이 역시 붉은 기사답게 우렁찬 포효를 터트리며 바르크를 향해 방패를 앞세워 실드 챠징을 시전했다.

꽈강!

크왁! 콱!

붉은빛이 감도는 율칸의 방패와 바르크의 다리가 부딪치며 터트린 엄청난 폭음에 오아시스가 울리며 울음을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내 옆에서 화살을 장전한 때까치가 힘찬 외침을 토해내며 시위를 잡고 있던 손을 놨다.

“나의 화살은 적의 눈을 노리는 사악한 뱀의 독니가 될지니! 데블 스네이크 샷!”

쉬시식.

퍽!

때까치의 활을 떠난 검붉은 기운이 휘감긴 화살이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막 율칸을 물어뜯으려던 바르크의 눈에 박혔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맹렬한 기세로 마구 회전하는 화살에 하나의 머리가 마구 발광하며 율칸을 후려쳤다.

꽈강!

“끄헝!”

거센 바람을 일으키는 바르크의 머리를 방패로 막은 율칸이 신음을 흘리며 오른손에 들린 붉은 검을 꺼내 마나를 주입하자 웅웅거리는 진동과 함께 율칸의 검이 붉은 기운에 휩싸였다.

“크하압!”

푸욱.

힘찬 기합과 함께 내찌른 율칸의 검이 바르크의 무릎에 파고들어 뼈를 헤집었다. 나 또한 포 스타의 권능이라 불리는 검강을 시전해 바르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율칸! 피해라!”

스걱.

크롸아악! 키아아악!

바르크의 무릎을 반쯤 잘라버린 내 검에 바르크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흘러 나왔다. 내 귀마저도 얼얼하게 만드는 비명에 멀리 있던 나머지 하위 길드원 중 몇 명이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하나하나가 내 허벅지 굵기와 맞먹는 물의 창 수십 개가 나와 바르크를 덮쳤다.

꽈가가강!

크롸락!

“크악!”

내 몸을 강타하는 물의 창에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몸을 날리자 나와 마찬가지로 물의 창을 맞던 바르크가 기다란 팔을 뻗어 내 몸을 낚아챘다.

땅이 순식간에 멀어지는 걸 보며 숨을 삼키고 고개를 들자 이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바르크의 얼굴이 나를 노려보며 이빨을 번뜩이고 있었다.

크롸아악!

“크윽.”

절대 복종의 위력을 가진 드래곤 피어보다는 약한 드레이크 피어에 내 얼굴이 구겨지며 일정만큼 능력치가 감소되며 입에서 한 움큼 붉은 피를 토해냈다.

‘빌어먹을 베팔……!’

거의 반 이상 떨어진 체력에 인상을 구기며 막 도움을 요청하려는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를 잡은 바르크의 손을 스쳐 지나가는가 싶더니 나를 움켜쥐고 있던 바르크의 손이 반쯤 갈라지며 피 분수를 뿜었다.

“마스터! 준비하십시오!”

무엇을 준비하라는지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반쯤 갈라진 바르크의 손에 검을 쑤셔 박은 무라사마가 검을 뽑아 몸을 날리자 덜렁거리던 바르크의 팔이 ‘꽈강’ 하고 떨어졌다.

“크윽!”

몸을 때리는 통증에 비명을 토할 틈도 없이 몸을 움직여 간신히 바르크의 손에서 벗어나자 방금까지 내가 잡혀 있던 커다란 손 위로 엄청난 굵기의 꼬리가 작렬하며 거대한 먼지를 만들었다.

“세계의 마나여, 바다의 마나여, 강의 마나여. 하늘로 올라가 적을 징벌하는 저주받은 붉은 비가 되어라! 블러디 레인!”

쿠구구궁.

먼지 속의 베팔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먼지 위로 검은 비구름이 서서히 모여 거대한 구름을 만들었다.

우르르릉!

쏴아아아.

이내 낮은 천둥과 함께 구름에서 붉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약간의 공격력을 가지고 있는, 대범위 공격 마법인 블러디 레인이었다.

“나의 화살은 청명한 물! 내 화살로 샤워해보는 게 어때? 에로우 샤워!”

푸푸푸푹.

끄롸라라라!

상황에 절대 어울리지 않는 주문과 함께 때까치의 활을 떠난 수십 개의 화살이 바르크의 몸에 작렬했다.

“나의 동료는 어둠. 나는 그림자. 내 검은 자신의 심장을 꿰뚫는 그림자의 검. 섀도우 크리티컬.”

푸욱.

어느새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바르크의 머리 뒤에 올라선 보티스가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스킬을 시전하며 바르크의 뒤통수를 향해 단검을 찌르자 ‘푸욱’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고통에 몸부림치던 바르크의 입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이내 영광의 검에 특수능력으로 딸려 있는, 오직 포 스타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막강한 스킬이 비틀거리는 바르크를 향해 쏘아졌다.

크라라락!

“마지막이다! 나의 검은 영광을 찾는 검, 곧 내가 영광의 주인이라! 나는 영웅이다! 나의 검은 영웅을 만드는 영광의 검이다! 소드 오브 더 히어로!”

“우와아아!”

두두두두.

히이이잉.

어디선가 들려오는 수많은 전사들의 함성 소리와 엄청난 수의 말발굽 소리, 그리고 우렁찬 말울음 소리와 함께 타나난 거대한 금빛 검이 소리 없이 바르크의 몸을 꿰뚫었다.

크롸라락.

쿠구궁!

배 한가운데 난 엄청난 크기의 구멍으로 피와 장기를 쏟아내던 바르크가 바닥에 몸을 쓰러트리며 마지막 비명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바르크의 몸이 서서히 모래가 되어 사라지며 바르크의 뼈와 가죽으로 보이는 아이템과 금빛 검을 드롭 했다.

“킬킬킬! 뼈와 가죽은 내 거… 헉! 여, 영광의 검?”

“뭐?”

“영광의 검?”

탐욕스러운 얼굴로 바르크가 드롭 한 아이템을 향해 다가가던 베팔의 외침에 일행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특별한 일 없이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거라는 친한 운영자의 말을 무시하듯 나온 영광의 검이 특유의 황금빛을 흘리며 일행을 유혹했다. 아이템에 가장 가까이 있는 베팔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영광의 검은 내 거… 크아악!”

후우웅.

영광의 검을 향해 몸을 날리려던 베팔이 무언가에 의해 하늘로 끌려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오아시스 곳곳에서 우렁찬 포효가 울려 퍼졌다.

크롸라라라!

크라라라!

“뭐, 뭐야!”

곳곳에 보이는 수십, 아니 수백 마리의 바르크에 내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뭐, 뭐야! 원래는 영광의 검을 주운 베팔이 내가 가진 8서클 마법서랑 바꾸는 걸로 끝나는……!”

무심결에 말을 내뱉던 내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혼란스러운 마음과 함께 갑자기 터질 듯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무라사마, 월향 말고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화염에 휩싸인 오아시스의 모습에 내 얼굴이 고통과 혼란으로 일그러졌다.

“무라사마! 대체……!”

“마스터, 증거가 있는데 그러실 겁니까?”

“뭐?”

갑자기 증거를 운운하는 무라사마의 말에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도 잠시, 무언가 희미한 기억이 척추를 울리며 내 머리를 향해 기어 올라왔다.

“마스터, 증거가 있는데 그러실 겁니까?”

“저자예요! 저자가 이 아이템을 나눠줬어요! 다른 길드의 간부들에게 지지 말라면서 아이템을 줬다고요! 난 아무 죄가 없어요! 흐흐흑.”

“무, 무슨 소리야!”

“마스터, 증거가 있는데 그러실 겁니까?”

“저자예요! 저자가 이 아이템을 나눠줬어요! 다른 길드의 간부들에게 지지 말라면서 아이템을 줬다고요! 난 아무 죄가 없어요! 흐흐흑.”

마치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무라사마와 월향의 모습에 내 얼굴에 혼란과 고통을 넘어선 공포가 자리 잡았다.

이내 월향과 무라사마의 입이 귀 밑까지 쭈욱 찢어지며 소름 끼치는 웃음을 토해냈다.

“깔깔깔! 저자가 줬어요! 저자가 범인이야!”

“크크크크! 네놈이 범인이다!”

“으으, 난 아니야! 난 범인이 아니야!”

투둑.

발작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뒷걸음질 치는 내 뒤로 느껴지는 둔탁함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무라사마나 월향과 마찬가지로 흉한 얼굴을 가진 해골이 영광의 검을 들고 침이 질질 흐르는 입을 기다란 혀로 핥으며 진득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패배자! 사기꾼! 낄낄낄! 죽어라!”

푸욱.

“커헉!”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내 가슴을 찌르는 검에 여태껏 받았던 그 어떤 것보다 심한 고통이 내 가슴을 휘감았다.

“깔깔깔깔.”

“크하하하.”

“낄낄낄낄.”

가슴을 부여잡으며 서서히 모래가 되어 사리지는 내 위로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짙은 어둠이 나를 휘감았다.

* * *

“나, 난 범인이 아니야!”

[마스터, 심리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노래를 재생하겠습니다.]

띠리리리.

화끈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일어난 곳은 바로 내 집이었다. 갑작스레 변한 풍경에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귀신같은 모습의 무라사마와 월향, 해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꿈…이었나.”

약간의 안도감이 흐르는 것도 잠시, 이내 참을 수 없는 설움과 슬픔이 나를 휘감았다.

“흐흑. 난 범인이 아니야! 난 범인이 아니야! 흐흐흑!”

그렇게 얼마를 울었을까. 귓가를 때리는 부드러운 노래에 슬픔으로 물들었던 눈이 번뜩였다.

“크크큭! 그래, 이제는 꿈에까지 나와서 나를 괴롭히겠다고? 좋다. 두고 보자. 크크큭! 몇 번이고 버텨주마. 이제 겨우 1주일이 지났을 뿐이지만 나머지 날들도 기쁜 마음으로 버텨주마. 크큭! 그리고 네놈들 앞에 가서 물어주마! 왜! 왜 나를 배신했냐고! 크흐흑! 크큭. 흐흐흑.”

웃는지 우는지 모를 내 얼굴 위로 서서히 스며드는 것은 무엇보다 짙은 광기였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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