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챕터1 힘의 증명
짹짹짹.
“도착했군.”
단단한 땅에 발이 닿는 느낌과 동시에 들려오는 맑은 새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자 여태껏 지겹게 누볐던 마성의 숲과 같은 숲이 나를 맞이했다.
바로 루안 대륙에서 가장 커다란 산, 아니 산맥이라는 타이나루스 산맥이었다.
고대에 살았던 그린 드래곤이 잠들어 있다는 이 산맥에는, 과거에 루키아논에 의해 사라진 드워프들의 천국이라는 가루아 산맥보다 많은 드워프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찾는 해파토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검은 모루 일족’의 족장이다.
이내 내 뒤를 이어 나타난 티나와 폭스, 카나리아 또한 경외의 눈으로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산맥을 바라봤다.
“대단하구만.”
“그러네요.”
“모두 움직인다.”
감탄을 흘리는 카나리아와 폭스, 그리고 가디언의 본분도 잊은 채 멍한 눈으로 산맥을 바라보던 티나가 내 말에 화들짝 놀라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내 뒤를 따랐다.
해파토스가 살고 있는 곳은 산맥의 초입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말이 동굴이지 동굴 안에는 타이나루스 산맥 최대의 드워프 세력이라는 검은 모루 일족이 땅굴을 파고 만든 거대한 지하 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예전 헤라클래스 시절에 자주 와봤던 곳이기에 혹시 모를 몬스터의 공격에 대비해 도를 꺼내들고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제길, 몬스터는 그림자도 안 보이네.”
조용히 일행을 따르던 카나리아가 얼굴을 찌푸리며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비록 산맥의 초입이라고는 하지만 타이나루스 산맥은 쓰리 스타들이 즐겨 찾는 사냥터로 막강한 위력을 가진 몬스터들이 나오는 곳이다.
기본적으로 나오는 골렘(Golem)의 종류만 해도 가장 기본적인 스톤 골렘(Stone golem)을 시작으로 온몸이 강철인 아이언 골렘(Iron golem)까지 그 종류가 다양했다.
하지만 가장 까다로운 몬스터는 바로 타이나루스 산맥 곳곳에 살고 있는 그리폰(Griffon)이었다.
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그리폰은 타이나루스 산맥 곳곳에 살고 있으며 지능까지 높아 원 스타 이전의 마법은 거의 다 사용할 줄 안다.
그깟 독수리 대가리가 머리가 좋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하지만, 다친 척 위장해서 저레벨의 유저들을 계곡으로 유인해 마법을 난사해 죽이는 것은 기본이었다.
물론 그리폰 몇 마리가 나온다고 해서 우리에게 위협이 될 리는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기에 동굴로 움직이는 일행의 발걸음이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거기다 검은 모루 일족이 사는 동굴의 근처라는 것 때문에 주변에는 그 흔한 곰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2시간 정도를 아무 말 없이 걷자 마침내 저 멀리서 거대한 동굴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설로는 이 산맥에 잠들어 있는 그린 드래곤의 레어라고 알려진 저 동굴의 입구는 현재 검은 모루 일족이 사는 지하 도시의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내 도를 집어넣고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밖과는 확연히 다른 후끈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동굴의 내부는 입구에 어울릴 정도로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잘못 보면 동굴이 아니라 거대한 건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얼마 있지도 않았는데 서서히 흐르기 시작하는 땀을 닦으며 동굴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검은 모루 일족이 사는 지하 도시로 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없는 땅을 파고 계단을 쑤셔 박은 듯한 계단의 주위에는 입구에서는 볼 수 없었던 4명의 드워프 경비병들이 서슬 퍼런 도끼를 들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수고하십니다.”
“껄껄껄. 계단 조심하게, 인간 친구!”
드워프 특유의 호탕한 성격을 자랑이라도 하듯, 폭스의 인사를 받은 드워프 경비병 NPC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주의를 주었다.
드워프의 말대로 계단은 드워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보통 계단보다 폭이 2배 가까이 좁았다.
그렇게 총총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데 질렸을 때쯤, 날카로운 망치소리와 함께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저 밑바닥에서부터 들렸다.
이내 속도를 높여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나를 따르던 일행 또한 걸음을 빨리했다.
가장 먼저 검은 모루 일족이 사는 마을에 도착한 것은 카나리아였다.
“대단하네요!
깡깡깡!
화르르륵.
폭스의 말대로 계단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모루 일족의 마을의 모습은 몇 번 와본 나까지 놀랄 정도였다.
“검은 모루 일족의 마을이자 세계 최고의 장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 ‘고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껄껄껄.”
한 손에는 망치를, 또 한 손에는 술병을 들고 붉은 얼굴로 입을 여는 어느 술꾼 드워프의 말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화려함을 자랑하는 베이거스와는 달리 검소하면서도 뜨거운 정열을 품고 있는, 내가 그리던 이상적인 마을이었다.
지하에 있는 마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게 넓고 편했는데 마을 곳곳에는 우물과 마을 외곽을 따라 흐르는 냇물도 있었다.
몇 천 개는 될 법한 대장간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솟고 각자 다른 아이템을 만드는 드워프들의 모습이 보였다.
인간의 2분의 1쯤 되는 키와 북슬북슬한 털, 근육질의 몸과 고약한 얼굴의 생김새는 드워프들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하 도시 고곤은 땅 위에 있는 다른 마을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천장에 하늘 대신 있는 돌과 곳곳의 돌 틈에서 흐르는 용암의 강이 아니라면 지하에 있는 도시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곤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판타즈마 월드에서 가장 많은 아이템들이 돌아다니는 마을답게 고곤에는 드워프들을 제외한 수많은 족종의 유저들이 서로 짝을 맞춰 몰려다니며 대장간들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휴먼과 엘프로 시작해 보기 힘들다는 투칸족까지 있는 각 종족 유저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는 일행에게 제법 늙어 보이는 드워프 한 명이 다가와 일행의 앞을 막았다.
“혹시 지상에서 온 블러드 님과 일행이십니까?”
“맞다.”
“껄껄껄. 족장님이 찾으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족장님께서 이제 오실 때가 되었다고 고곤에 있는 드워프들에게 블러드 님을 찾으면 모셔오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내가 블러드인 줄은 어떻게 알았지?”
날카로운 내 물음에 호탕한 웃음을 흘리던 드워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동굴 입구로 들어오시기 전에 저희 일족의 어쌔신들이 이미 조사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고곤으로 통하는 입구에서 경비병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을 겁니다.”
‘드워프 어쌔신?’
순간적으로 폭스와 같은 가죽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드워프 어쌔신의 모습이 떠올라 내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그건 폭스 또한 마찬가지인지 조용히 드워프의 말을 듣고 있던 폭스가 당황한 목소리를 흘렸다.
[폭스: 드워프 어쌔신이라… 한번 보고 싶네요.]
‘끄응.’
“해파토스에게 안내해라.”
“껄껄, 따라오시죠.”
호탕한 웃음을 흘리며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리는 드워프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고곤에서 가장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는 ‘영광의 망치’라는 대장간이었다.
대장간으로서는 흔치 않게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대장간, 2층은 아이템을 판매하는 곳, 3층은 건물의 주인이 쓰는 공간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이내 영광의 망치에 도착한 드워프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안에 족장님과 일족의 장로님들이 계시니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을 돌려 짧은 다리로 재빨리 걸음을 옮기는 드워프를 뒤로하고 갑옷과 망토에 묻은 먼지를 털며 수수하게 장식되어 있는 문을 열자 ‘딸랑’ 하는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해파토스의 성격을 반영한 것인지 다른 대장간과는 달리 조용한 분위기의 대장간에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가 내 몸을 휘감았다.
건물 뒤쪽에 있는 대장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분명했다.
커다란 건물을 사이에 뒀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엄청난 열기에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2층의 계단에서 한 명의 드워프가 뒤뚱거리며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나를 보고는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헤라클래스!”
“오랜만입니다.”
과거의 내 아이디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오는 드워프의 모습에 나는 환하게 웃었다.
만약 보통 사람이 저 이름을 불렀다면 분노하며 도를 휘둘렀을 테지만 해파토스는 그 분노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보통 드워프들과 같은 키와 근육질의 몸, 그리고 타는 듯한 붉은 수염과 머리카락을 가진 사십대 초반의 얼굴을 가진 드워프가 바로 드워프 일족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진 검은 모루 일족의 족장인 해파토스이다.
“오랜만이군. 거의 4개월 만인가?”
“조금 더 됐습니다. 그리고 이젠 헤라클래스가 아니라 블러드입니다.”
“아아, 그렇지. 미안하군. 습관이 돼서… 하핫.”
“괜찮습니다.”
드워프 특유의 호탕한 웃음이 아닌 조용한 웃음을 흘리는 해파토스의 모습에 나 또한 꾸밈없는 웃음을 지었다.
나를 보며 마주 웃음을 흘리던 해파토스가 내 뒤에 멀뚱히 서 있는 일행을 보고는 소개해달라는 눈빛을 흘렸다.
“일단 저기 검은 옷을 입은 어쌔신은 폭스라고 하고 저기 붉은 머리의 몽크는 카나리아라고 합니다. 또 여기 있는 초록색 머리의 여자는 전에 말한 티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으하하!”
꾸벅.
반가움을 표하는 폭스나 카나리아와는 달리 그저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인사를 마친 티나를 바라보는 해파토스의 눈이 작게 번뜩였다.
[해파토스: 네가 전에 말한 가디언이냐?]
귓가로 들려오는 해파토스의 목소리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나를 바라보던 해파토스가 인자한 웃음을 흘리며 나와 일행을 3층으로 이끌었다.
[블러드: 약간의 문제가 뭡니까?]
해파토스의 뒤를 따르며 귓속말을 하자 잠시 움찔한 해파토스가 걸음 속도를 늦췄다.
[해파토스: 네가 부탁한 물건은 모두 완성되었다. 거기다 전사들까지 모두 준비가 완료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장로회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상태다.]
해파토스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내가 부탁한 물건을 만들고 전사들까지 준비를 완료한 상태에서 겨우 장로회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움직이지 않다니!
[블러드: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해파토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밀어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내 밑에 있는 수많은 부족들이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네 부탁대로 비밀리에 소집한 전사들은 모두 NPC로 구했다. 수는 거의 2천에 가까울 거다. 네가 부탁한 물건을 만든 대장장이들 또한 모두 NPC로 선택해 철저하게 입막음을 시켰다. 남은 것은 장로회의 허락뿐이지.]
[블러드: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방금 전과 조사 하나 다르지 않은 내 말에 묵묵히 계단을 올라가며 귓속말하던 해파토스가 3층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황금색 명패가 달려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이 방 안에 장로님들이 계시니 모두 언행에 주의하십시오.”
[해파토스: 일단 들어가 보면 안다.]
그답지 않게 무책임한 말을 내뱉은 해파토스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방 안을 향해 작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한쪽으로 비켜서 일행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었다.
해파토스의 안내로 들어간 방 안에는 총 4명의 드워프들이 의자에 앉아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4명 모두 NPC인지 형형하게 빛나는 이름을 가진 드워프들의 모습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이 드워프들이 해파토스가 말한 장로회인가?
당장에 베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하며 살짝 목례하자 의자에 앉아 있던 장로들 중 푸른 머리의 드워프가 눈을 부릅뜨고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
“어디서 건방지게 그따위 인사를 하는 거냐!”
꿈틀.
철저하게 나를 무시하는 듯한 푸른 머리의 드워프 달단의 말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꿈틀거렸다.
싸늘해지는 분위기를 느낀 해파토스가 막 달단을 향해 다가가려는 순간, 나는 최대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방진 드워프야, 너야말로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군.”
“뭐, 뭐야?”
우우우웅.
내 몸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마기와 함께 티나가 은은히 흘리는 살기가 어우러져 낮은 공명음을 흘렸다.
훗날을 생각하면 참는 것이 옳겠지만 상대의 반응을 보니 이미 나에게 힘을 주고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둘! 굴복시키거나 죽여 버리는 것뿐이었다.
이내 붉어진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달단을 향해 나는 위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난 데스 랜드의 지배자다. 일만의 전사들 위에 군림하는 제왕이다! 그러나 너는 한낱 장로일 뿐인데 겨우 장로 따위가 제왕에게 건방짐을 논하는가!”
쿠구궁.
“크윽.”
내 몸에서 쏟아지는 살기에 내 살기를 정면으로 받고 있던 달단이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숙이자 나머지 3명의 드워프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악왕의 기운’을 사용해 모두 굴복시키고 싶었지만 루키아논의 부하인 라데스와 드워프들은 철저한 앙숙이었기에 괜히 사용해서 피를 볼 일은 없었다.
뭐, 벌써 일은 터졌지만.
“들어라! 나는 저 멀리 데스 랜드의 지배자! 그대들의 힘을 빌리고자 이곳으로 왔다. 하나를 선택해라! 나와 같은 편이 되든지 아니면 영원히 적이 되든지! 만약 적이 된다면 1만에 달하는 전사들이 고곤을 습격해 단 하나의 생명체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나 데스 랜드의 지배자 블러드의 이름을 걸고 내뱉는 말이다!”
광오하다 못해 미쳤다고 할 만한 내 말에 해파토스마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협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폭스와 카나리아 또한 심상치 않게 흐르는 분위기를 느끼고 조용히 자세를 취하며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했다.
그건 티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방을 휘감았다.
그것도 잠시, 장로들 중 해파토스와 같은 붉은색 머리를 가진 늙은 드워프 바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실례했소. 하지만 젊은 제왕이여, 우리의 심정을 이해해줄 순 없겠소?”
“무슨 심정 말인가?”
차가운 내 말에 바실이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부족할 것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제의를…….”
“말은 똑바로 해라.”
내가 그의 말을 끊자 바실이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인간들은 그 추악한 욕심으로 그대들의 광산을 빼앗고 그대 일족을 잡아 노예로 부리며 무기를 만들고 있다. 그 무기는 인간의 손에 들려 또 그대들을 잡아가고 있지. 위선으로 가득한 엘프들은 자연보호를 외치며 광산을 보호하고 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텐가. 언제까지 지하에서 목을 움츠리고 살 것인가!”
박력 넘치는 내 말을 조용히 듣던 바실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힘을 증명해보십시오.”
“내 힘을 증명하라?”
“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바실이 말을 이었다.
“고곤에서 벗어나 1시간쯤 길을 따라 올라가면 광산이 있습니다. 원래는 저희 일족이 철을 캐던 곳이지요. 하지만 일주일 전에 갑자기 나타난 거인 덕에 계속 작업을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 광산의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스톰 자이언트(Storm giant)를 처리하고 그 증표로 스톰 자이언트의 목걸이를 가지고 오십시오.”
[퀘스트 ‘힘의 증명’이 발동되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스톰 자이언트라면 거인족 중에서도 제법 강한 축에 속하는 거인으로 폭풍의 거인이라는 이름이 걸맞게 번개의 속성을 띠고 번개가 흐르는 망치를 사용하는 거인이다.
키는 거인치고는 작은 5m 정도로 혼자서 생활하는 거인들과는 달리 자이언트 배트(Giant bat), 즉 거대한 박쥐와 함께 산다.
나와 티나, 그리고 폭스와 카나리아 정도면 충분히 할 수 있는 퀘스트였다.
“수락.”
[수락하였습니다.]
“아, 그리고 이 퀘스트는 오로지 혼자 하셔야 합니다. 동료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바실의 말에 안도감이 흐르던 내 얼굴이 굳었다.
나 혼자서 퀘스트를 한다면 성공할 확률은 50%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퀘스트를 수락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리자 막 나를 바라보던 티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내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장로여, 이 여전사는 나의 가디언이다. 동료는 불가능해도 가디언과 함께해도 되겠지?”
“으음…….”
당당한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작은 신음을 흘린 바실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움은 그녀 한 명뿐이지 다른 자들은 불가능합니다.”
“알고 있다.”
미련 없이 등을 돌리자 문을 막고 있던 폭스가 한쪽으로 비키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
“성공하시길 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티나 님이 블러드 님의 가디언이었다니 전혀 몰랐네요. 하핫.”
“시치미 떼지 마라.”
싸늘한 내 말에 폭스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폭스라면 분명 티나가 내 가디언이라는 것쯤은 예전에 알았을 것이 분명하다.
오직 카나리아만이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나와 티나를 번갈아 보았다.
카나리아의 멍청한 반응에 얼굴을 구기며 계단을 내려가자 내 뒤에 서 있던 티나 또한 나를 따라 움직였다.
“헤라… 아니, 블러드!”
거침없이 산중턱에 있는 광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내 뒤로 다급한 해파토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리자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리며 나에게 다가온 해파토스가 푸른빛이 감도는 보석이 박힌 목걸이 2개를 건네주었다.
티나의 것도 함께 준비한 듯했다.
“뇌전(雷電) 속성 방어력을 올려주는 목걸이다. 큰 도움은 안 돼도 약간의 도움은 줄 테니 가져가라.”
“감사합니다.”
[해파토스 님에게서 ‘여신의 푸른 눈물’을 받았습니다.]
머릿속으로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를 음미하며 해파토스에게 받은 목걸이 중 하나를 티나에게 건네주었다.
다른 하나를 클릭하고 아이템 설명을 누르자 작은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여신의 푸른 눈물(B급)-
다른 차원의 여신이 흘린 눈물.
모든 속성 방어력을 올려주지만 특히나 뇌전(雷電) 속성 방어력을 많이 올려준다.
방어력- 5.
내구력- 35/35.
특수능력- 모든 속성 방어력 10% 상승.
뇌전(雷電) 속성의 방어력 20% 상승.
오직 뇌전 속성 방어력만을 보자면 상당히 좋은 축에 속하는 아이템이었다.
이내 목걸이를 착용하고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나와 같이 목걸이를 착용한 티나가 목걸이 줄에 낀 녹색 머리칼을 정돈하며 해파토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꾸벅였다.
“아름답군.”
“가, 감사합니다.”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머리칼을 정돈하던 티나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무심결에 나온 말이기는 했지만 ‘여신의 푸른 눈물’을 착용한 티나는 정말 아름다웠다.
탄탄하게 잡힌 몸매와 날카롭지만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고운 머리칼과 약간 그을린 피부를 장식한 푸른색의 보석은 절로 감탄이 나오게 만들 정도였다.
“하하하! 정말 아름답군. 부디 조심해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티나에게 칭찬을, 나에게는 경고를 한 해파토스가 손을 흔들며 다시 영광의 망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미련 없이 발을 놀려 지하 도시 고곤을 빠져나오자 고곤의 지키던 경비병 드워프들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나와 티나를 배웅했다.
똑같은 대사를 내뱉고 낮은 지능을 지녔지만 어떠한 한 가지 분야를 이룬 것으로 설정이 되어 A급 NPC로 분류되는 존재가 바로 저 경비병이다.
바실이 알려준 대로 동굴 입구 왼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자 광산의 입구로 보이는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 철을 캐는 데 쓰는 것으로 보이는 기구들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아 아마 바실이 말한 곳이 이곳인 듯했다.
광산의 크기가 보통 광산보다 거의 5배는 커서 그런지 광산 안에 스톰 자이언트가 살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스르릉.
“악왕의 기운. 파천기.”
우우우웅.
스으윽.
등에 달린 도를 꺼내 들며 작게 중얼거리자 파천기의 검은 기운이 손에 들린 도를 휘감고 갑옷에서 뿜어져 나온 사이한 기운을 풍기는 검은 기운이 내 몸을 휘감았다.
칠흑의 마도와 칠흑의 갑옷을 착용하면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인 악왕의 기운이었다.
“대지의 마나여, 내 동료의 몸에 깃들어 땅을 뒤흔드는 힘을 주어라. 스트랭스.”
악왕의 기운과 함께 스트랭스까지 사용하자 전에 없던 새로운 힘이 내 몸 곳곳을 돌아다녔다.
악왕의 기운의 시전 시간은 5분.
바실의 말로는 스톰 자이언트가 있는 곳은 광산의 초입이라 했으니 3분 이상은 걸리지 않을 터였다.
꽈악.
도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티나.”
“예!”
나직한 내 부름에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티나가 장창을 든 손을 아래로 내리며 나를 바라봤다.
잠시 후에 있을 전투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차가움을 뿜던 티나의 눈에는 이전과 다르게 적의 살을 뜯고 피를 마실 듯한 뜨거운 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수인족은 수인족이라 이건가.’
“너는 자이언트 배트를 처리하고 나를 도와라.”
“예!”
힘차게 대답한 티나를 이끌고 광산으로 들어가자 광산 천장에 박힌 라이트 스톤, 즉 야광석이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나를 맞이했다.
드워프들이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박아놓은 것인지 3m 간격으로 천장에 박혀 있는 야광석 덕에 기습당할 걱정은 없었다.
푸드드득.
스윽.
광산 입구에서 채 오십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들려오는 커다란 날갯짓소리에 슬그머니 손을 들자 내 뒤를 따르던 티나가 걸음을 멈추고는 자세를 낮췄다.
“으하하하하!”
날갯짓소리에 뒤질세라 들려오는 커다란 웃음소리에 내 얼굴에 슬며시 긴장감이 서렸다.
‘스톰 자이언트인가.’
광산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의 웃음소리를 가진 몬스터라면 거인족, 그것도 강한 축에 속하는 거인족일 것이다.
보통 거인족은 덩치가 크면 힘도 강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그 예로 거인의 단검을 드롭한 거인왕은 그 크기가 4m가 조금 넘을 뿐이다.
오히려 까다로운 것은 거인왕처럼 몸집이 작은 거인족들이다.
몸집이 작아 이동속도나 공격속도도 빠른 데다 보통 거인족이 가지고 있는 무지막지한 힘까지 가지고 있으니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거인왕만 하더라도 나와 염환 그리고 무라사마와 간부 유저들이 모여 간신히 잡은 몬스터였다.
물론 스톰 자이언트가 거인왕만큼은 강하지는 않지만 나 또한 그때만큼은 강하지 않다.
스윽.
이내 광산의 벽에 최대한 몸을 밀착하며 고개를 내밀자 스톰 자이언트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와 자이언트 배트의 것으로 보이는 2개의 그림자가 광산의 벽을 메웠다.
광산의 길 중간에 불을 피웠는지 광산 벽에 비친 스톰 자이언트와 자이언트 배트의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시야 한쪽으로 보이는 악왕의 기운의 시전 시간은 이미 2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단 3분뿐이었다.
“티나, 스톰 자이언트의 다리를 노려라.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자이언트 배트를 노려라.”
“예.”
타다닥.
티나의 대답이 떨어짐과 동시에 몸을 날리면서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스톰 자이언트가 있을 법한 방향을 향해 우렁찬 포효를 토해냈다.
모든 생명체들을 압도하고 전의를 잃게 하는 제왕의 포효였다.
“크허어어엉!”
“으하하… 억!”
키에엑!
광산을 울리도록 포효하며 웃음을 터트리던 스톰 자이언트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기침을 토해냈다.
스톰 자이언트의 주변을 배회하던 자이언트 배트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티나!”
쉬시식.
퍽!
“크아아아.”
내 뒤를 따라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티나의 단창이 맹렬한 기세로 회전하며 마른기침을 토해내는 스톰 자이언트의 오른쪽 허벅지에 박혔다.
갑작스런 공격에 기침을 하던 스톰 자이언트가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커다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워낙 몸이 커서 티나의 특기인 토네이도 스피어가 스톰 자이언트의 허벅지를 꿰뚫지 못하고 그저 깊은 상처만 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기습인데 그 정도 데미지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죽어라!”
푸욱.
푸드득.
끽!
이내 스톰 자이언트의 허벅지에 박힌 단창을 빼 몸을 날리는 티나를 뒤로한 채, 바닥에 고꾸라진 자이언트 배트의 머리에 도를 박아 넣자 커다란 날개를 퍼덕거리며 발광하던 자이언트 배트가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푸화악.
끼엑.
이내 바닥에 꽂힌 도를 뽑음과 동시에 나머지 자이언트 배트를 향해 휘두르자 막 날아오르려던 자이언트 배트의 날개가 쭉 찢어지며 짙은 녹색의 피를 뿌렸다.
“처리해라!”
“하아압!”
힘찬 기합과 함께 파닥거리는 자이언트 배트를 향해 몸을 날리는 티나를 뒤로하고 스톰 자이언트에게 몸을 날리자, 피가 흐르는 허벅지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던 스톰 자이언트가 광산 벽에 기대어 놓은 커다란 은빛 망치를 들고는 나를 향해 휘둘렀다.
콰아앙!
“아, 아프게 했다! 나를! 싫다! 아픈 거!”
지능이 낮은 거인족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듯 잘못된 어순으로 살기 어린 말을 한 스톰 자이언트가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커다란 고함을 내질렀다.
거인족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거인의 외침’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 입에서도 2번째 제왕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우어어엉!”
“크허어엉!”
우르르릉.
광산을 울리는 거인과 제왕의 포효에 막 자이언트 배트를 처리하려던 티나가 뒷걸음치며 얼굴을 찌푸렸다.
반으로 잘린 날개를 퍼덕거리던 자이언트 배트 또한 보랏빛 눈을 까집으며 피거품을 흘렸다.
“죽어랏!”
“우어엉!”
꽈광!
칠흑의 도와 거대한 망치가 부딪치며 낸 소리에 광산이 우르릉 몸을 떨었다.
거의 3m 가까이 차이 나는 키 덕분에 스톰 자이언트가 나를 내리찍는 듯한 형태로 잠시간의 대치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톰 자이언트의 망치에서 뿜어져 나온 짙은 전류가 도를 통해 내 손을 찌릿하게 울렸다.
그나마 파천기의 기운과 악왕의 기운, 그리고 여신의 푸른 눈물 덕에 찌릿한 정도로 그친 것이다.
보통 유저였으면 백이면 백, 무기를 떨어트리고 발작할 정도로 강력한 전류였다.
“으엉?”
자신의 전류가 먹히지 않은 것이 의외인지 회심의 미소를 흘리던 스톰 자이언트가 신음을 내뱉으며 망치에 준 힘을 풀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손에 들린 검이 우아하게 춤을 추며 스톰 자이언트의 무릎에 박혔다.
콰득!
“으어엉!”
도와 뼈가 만나며 내는 소름 끼치는 소리에 머리 위로 쏟아지는 피를 피해 재빨리 뒤로 몸을 날리자 내 뒤에서 기회를 노리던 티나가 제후의 포효를 내지르며 스톰 자이언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티나 또한 쓰리 스타 중급의 고수지만 강력한 전류와 함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스톰 자이언트를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티나를 야수화시키고 싶었지만 그것은 최후의 보루였다.
고민은 짧았고 결론 또한 나왔다.
‘망설일 필요는 없지!’
푸욱, 푸욱.
요리조리 몸을 피하는 티나에게 망치를 휘두르는 스톰 자이언트를 향했던 도의 방향을 틀어 갑옷이 닿지 않는 허벅지를 난도질한 내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야수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온몸의 뼈가 바스러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온몸의 근육이 요동치며 뼈와 함께 자리를 이탈했다.
그리고 잠시 후, 뼈와 근육들이 한층 더 강력해진 모습으로 다시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크윽!’
수백 개의 날카로운 바늘로 난도질당하는 듯한 고통에 감았던 눈을 뜨자 한층 더 넓어진 시야와 함께 몸 안에 흐르는 힘이 요동치며 나를 환영했다.
폭발할 듯 꿈틀거리는 몸속의 힘에 내 입에서 우렁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허어어엉!”
“우어엉!”
제왕의 포효가 아닌 단순한 포효를 하며 요리조리 피하는 티나를 향해 망치를 휘두르던 스톰 자이언트가 고함을 지르며 상처 입은 다리를 절뚝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야수화로 2m 50cm 정도의 몸으로 변했다지만 스톰 자이언트의 키는 5m.
거의 2배 차이가 나는 정도였기에 겉으로 봐서는 별 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다.
“티나, 피해라! 커허엉!”
“우어어!”
콰아앙!
파천기를 두르지 않고 휘두른 도가 위에서 내리꽂히는 거대한 망치와 부딪치며 커다란 굉음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스톰 자이언트의 망치에서 짙은 전류가 뿜어져 나왔다.
지지지직!
“우어엉!”
온힘을 다 쏟아내는 스톰 자이언트의 회색빛 머리칼이 허공으로 솟구친 채 마구 휘날렸다.
카가각.
망치와 도가 긁히며 노란 불꽃과 날카로운 쇳소리를 흘렸다.
거의 3배의 크기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혀 날이 상하지 않는 칠흑의 마도에 감탄하며 도를 잡은 손을 떼고 옆으로 몸을 피하자, 도를 부수기 위해 온힘을 다하던 스톰 자이언트가 중심을 못 잡고 뒤뚱거렸다.
“죽엇!”
푸욱.
웬만한 단검이 부럽지 않은 날카로움을 뽐내는 내 손톱이 내 도에 걸레가 된 스톰 자이언트의 무릎을 파고들었다.
“우어어억!”
콰드득, 콰직.
손을 통해 전해지는 소름 끼치는 느낌이 가시기도 전에 머리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재빨리 고개를 숙이자, 방금 내 머리가 있던 곳을 회색 피부의 스톰 자이언트의 손이 가르며 지나가 커다란 바람을 만들었다.
“티나!”
“예!”
스톰 자이언트의 무릎에 박아 넣었던 손을 빼냄과 동시에 티나를 부르자 내 뒤에서 단창을 들고 자세를 취하던 티나가 방금 전 내가 손을 박아 넣었던 무릎을 향해 두 번째 토네이도 스피어를 꽂아 넣었다.
콰드드득.
“끄어어엉!”
연이어 울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스톰 자이언트의 무릎을 중심으로 붉은빛의 피가 회오리치듯 광산의 벽을 때렸다.
몸이 커다란 거인족이라 그런지 나온 피의 양도 장난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온몸이 바싹 말라 미이라가 되었을 정도의 피를 쏟아낸 스톰 자이언트가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지르며 손을 둘렀다.
미처 피하지 못한 티나가 스톰 자이언트의 손을 맞고 허공을 날아 벽에 부딪혔다.
티나를 처리하기 위함인지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끌며 망치를 들고 티나를 향해 다가가는 스톰 자이언트를 향해 내 입에서 마지막 제왕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허어어엉!”
“우억!”
가뜩이나 지쳐 있던 스톰 자이언트가 내 제왕의 포효를 버티지 못하고 눈을 까집으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바닥을 뒹구는 도를 잡은 내 손이 짙은 핏빛의 도기에 휘감긴 도와 함께 현란한 움직임을 그리며 스톰 자이언트에게 쏟아졌다.
퍼버버벅.
“억! 으억!”
도기에 휘감긴 도가 몸을 가를 때마다 비명을 내지르던 스톰 자이언트가 바닥에 몸을 굴리며 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스톰 자이언트의 회색빛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본래 거인족은 천족이나 마족과 비견될 정도의 자존심을 가진 종족이다.
그런 거인족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는 스톰 자이언트가 살기 위해 바닥을 굴렀으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익, 나 구른 거! 비밀이다! 동족한테! 그러면 너 죽어야 한다! 저 여자는 안 죽인다! 내 색시 한다!”
후우웅.
콰광.
딴에는 위협적으로 보이겠다고 한 것인지 망치를 들지 않은 팔을 휘둘러 광산의 벽을 후려치는 스톰 자이언트의 모습에 조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멍청한 거인족아, 저 여자는 내 가디언이다. 감히 네놈 따위가 넘볼 여자가 아니다. 저 여자를 가지고 싶으면 거인왕이 되어서 나에게 충성을 맹세해라. 그럼 저 여자를 주마.”
“저, 정말? 정말이냐?”
씨익.
“물론 거짓말이지!”
파밧!
힘찬 기합과 함께 내 주변의 시야가 잠깐 흐려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내 손에 들린 도가 검은 궤적을 그리며 너덜거리는 스톰 자이언트의 무릎을 강타했다.
퍼어억.
시원한 소리와 함께 3분의 2쯤 뜯겨 덜렁거리던 스톰 자이언트의 무릎이 완전히 뜯기며 피의 폭포가 쏟아졌다.
“끄아아악!”
“닥…쳐라아!”
후우웅.
퍼억!
후드득.
짙은 붉은색의 피가 흥건히 묻은 도를 가볍게 털어내며, 뜯긴 무릎을 향해 뻗는 스톰 자이언트 손을 향해 휘두르자 보통 사람의 팔뚝 굵기만 한 스톰 자이언트의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4개의 손가락이 끊어져 바닥을 굴렀다.
“끄엉!”
쿠웅.
한쪽 무릎에 이어 한쪽 손가락을 잘린 스톰 자이언트가 신음을 흘리며 한쪽밖에 남지 않은 무릎을 꿇었다.
5m에 가까운 거인이 무릎을 꿇는 장관 아닌 장관에 감탄할 새도 없이 티나에게 몸을 날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티나가 비틀거리며 내 부축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나는 얼굴을 붉히며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말끝을 흐리는 티나의 모습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부러 얼굴을 굳히며 아이템 창에서 체력 회복 포션을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니다. 다만 너와 나의 복수는 아직 멀었고, 적들은 살아 있다. 그 점을 생각해 조금 더 몸을 아껴라.”
“예!”
티나에게 줬던 시선을 거둬 뒤를 돌아보자 바닥에 몸을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노려보던 스톰 자이언트가 입을 열었다.
“주, 죽여라! 긍지 있다. 전사다! 죽여라. 한칼에! 죽고 싶다! 고통 없이!”
우우웅.
“물론 죽여주마. 하지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어째서 이 광산에 터를 잡은 거지?”
핏빛의 도기를 휘감은 도를 들고 거리를 좁히는 나를 노려보던 스톰 자이언트가 말을 이었다.
“오신다. 곧! 그분이! 세상! 잠긴다! 피에! 순진한! 어린아이! 그렇기에 무섭다! 어차피 죽을 거! 뇌물 바친다! 모른다! 살지도!”
숨길 수 없는 공포에 찌든 목소리로 순서 없는 말은 내뱉는 스톰 자이언트의 모습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뇌물? 설마 고곤을 습격해서 빼앗은 전리품을 뇌물로 바칠 작정이었냐?”
“무섭다! 다 죽는다! 자연이 죽인다! 숨! 난 운 좋다! 안 봐서! 그 지옥을! 으아아아!”
두려움에 찌들어 비명을 지르는 스톰 자이언트의 모습에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스톰 자이언트의 말에 따르면 분명 무언가가 온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 무언가는 분명 새로운 에피소드나 이벤트 몬스터일 확률이 크다.
거기다 두려움을 모르는 거인족이 떨 정도의 몬스터라면 굉장한 몬스터일 것이 분명했다.
‘제길!’
복수할 기회가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이벤트나 에피소드는 결코 달갑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핑계로 검은 사자 길드가 힘을 모은다면 그만큼 내 복수는 힘들어지는 것이니까.
짜증에 물든 내 시선이 두려움에 떠는 스톰 자이언트에게 향했다.
“죽어라.”
“아, 악몽! 으아아아! 꾸르륵.”
후우웅.
퍼억.
마지막까지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지르던 스톰 자이언트가 목을 파고든 도에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숙였다.
부우욱.
푸화악.
힘을 준 뒤 거칠게 도를 흔들자 스톰 자이언트의 머리가 떨어지며 질퍽한 피를 뿜어냈다.
이내 머리부터 시작해 완전히 모래가 되어버린 스톰 자이언트의 흔적 위로 한 개의 목걸이와 많은 양의 금화, 그리고 은빛 셔츠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것이 분명 내가 입고 있는 씨 스파이더 킹의 가죽 셔츠 따위와는 격이 다른 아이템인 것이 분명했다.
의외의 행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바실이 가지고 오라던 목걸이로 보이는, 하지만 실상은 거의 허리띠에 가까운 목걸이와 금화, 그리고 셔츠를 주웠다.
셔츠를 클릭한 뒤 아이템 설명을 누르자 ‘파밧’ 하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홀로그램이 모습을 드러냈다.
-뇌전의 셔츠(B급)-
스톰 자이언트가 입고 있던 셔츠.
거인왕이 선물로 준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착용자의 몸에 맞추어 변형된다.
셔츠 자체에 흐르는 미약한 전류 덕에 가끔 꼭지가 따끔거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그 누구도 확인해본 바가 없다.
방어력- 30.
내구력- 73/80.
특수능력- 모든 뇌전(雷電) 저항력 5% 증가.
모든 속성 방어력 5% 증가.
힘 30 증가.
약간 우스운 설명이기는 하지만 능력은 분명 레어급 셔츠였다.
속성 방어력이 낮은 것이 문제지만 힘 30 상승은 그런 문제점을 없애고도 남을 정도다.
이내 입고 있던 셔츠를 벗고 손에 든 뇌전의 셔츠를 착용하자 한층 더 강해진 힘을 느낀 내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캐릭터 창.”
파밧.
이름: 블러드. 레벨: 278. 속성: 혈(血).
성향: 천악(天惡). 종족: 웨어라이언(Werelion).
명칭: 데스 랜드의 지배자.
체력: 700000. 마력: 45000.
신성력: 0. 힘: 1060.
민첩성: 100. 체력: 100.
지혜: 100. 신마력: 100.
행운: 50.
무려 30이나 오른 힘은 내 기분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거기다 손에 든 이 목걸이만 바실에게 가져다주면 거의 공짜로 2천에 달하는 드워프 전사들과 내가 부탁한 ‘그것’을 얻게 되는 것이기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돌려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티나에게 여태 입었던 셔츠를 건네자 티나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 셔츠를 받아 들었다.
“앞으로 네가 그것을 착용해라.”
“예!”
감격한 표정으로 내가 건넨 씨 스파이더 킹의 가죽 셔츠를 받은 티나가 품 안에 셔츠를 집어넣었다.
그런 티나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템 창에서 귀환 스크롤을 꺼내 반으로 찢자 광산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깡, 깡, 깡!
몸이 바닥에 부딪히는 느낌과 동시에 귀를 때리는 망치소리에 눈을 뜨자 뜨거운 불꽃을 연상케 하는 고곤의 모습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앞에 펼쳐진 고곤의 모습을 지나쳐, 내 뒤를 이어 환한 빛과 함께 나타난 티나를 이끌고 바실이 있을 영광의 망치로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영광의 망치에 도착해 바로 3층에 올라가자 계단 입구에서 수다를 떨던 폭스와 카나리아가 나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오셨어요?”
“설마 포기한 건 아니겠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카나리아를 무시하고 그대로 황금 명패를 밀고 방으로 들어가자 내가 떠나기 전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던 장로들과 장로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던 해파토스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 그들의 표정에는 카나리아와 같은 의심이 흐르고 있었다.
“스톰 자이언트의 목걸이다.”
“오오, 이렇게 빠른 시간에…….”
허리띠를 연상시키는 목걸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자 나를 바라보던 바실이 목걸이를 양손에 들고는 희열에 들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의 힘을 인정하겠소. 우리는 해파토스 족장의 말에 따라 그대와 동맹을 하겠소.”
띠리링.
[퀘스트 ‘힘의 증명’이 완료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귀를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는 내 어깨를 두드린 해파토스가 장로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나를 이끌고 영광의 망치를 나섰다.
티나와 폭스, 카나리아 또한 내 뒤를 따랐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네가 부탁한 것을 보러 간다.”
“아!”
다정한 웃음을 흘리며 말하는 해파토스의 모습에 나는 감탄성을 질렀다.
내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나를 이끌던 해파토스가 웃음을 흘리며 걸음 속도를 빨리 했다.
마침내 고곤의 외곽에 있는 커다란 창고 앞에 도착한 해파토스가 아이템 창에서 금빛 열쇠를 꺼내 창고의 자물쇠를 열었다.
창고는 스톰 자이언트가 살던 광산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컸다.
“네가 주문한 물건이니 네가 먼저 봐라. 나는 만드는 과정에서 모두 봤으니까.”
한쪽으로 비켜서는 해파토스를 지나쳐 창고의 문을 열자 ‘끼이익’ 하는 낡은 소리와 함께 창고 안에서 짙은 쇠 냄새가 풍겼다.
그와 동시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내민 폭스가 나보다 먼저 감탄을 토해냈다.
“멋지군!”
“아아!”
흥분으로 가볍게 떨리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고 안을 본 티나가 쾌락에 들뜬 신음을 흘리며 내 발등에 입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뜨겁게 끓어오르는 내 시선이 창고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5천 개의 무기와 5천 개의 갑옷 그리고 4천 개에 가까운 야수들의 갑주를 훑었다.
모든 것이 내 전사들과 야수들의 능력을 올리기 위한 아이템이었다.
사전에 전사들이 사용하는 무기와 몸의 치수 그리고 야수들의 치수를 뽑아 대장장이인 해파토스에게 맡겨 제작한 전사들의 무기와 갑옷!
가볍고 단단한 흑철 특유의 검은빛을 번들거리는 아이템들을 바라보는 내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진격뿐!’
“모두 정렬!”
촤자작.
해파토스의 힘찬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돔에 모여 있던 2천의 드워프 전사들이 발을 놀리며 대열을 정비했다.
“음.”
2천의 전사들이 내뿜는 박력에 내 입에서 만족스러운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어떠냐?”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그렇지? 하하하. 저래 보여도 모두 투 스타 이상의 전사들이다. 거기다 모두 일당백의 힘을 가진 막강한 전사들이지! 하하핫.”
자랑스러운 듯 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해파토스의 모습에 내 얼굴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해파토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이 앞에 정렬한 2천의 NPC 드워프 전사들의 눈에서는 강렬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거기다 드워프 전사들의 주 무기라는 각양각색의 도끼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살기는 결코 수인족 전사들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해파토스의 뒤에서 해파토스와 함께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던 바실을 비롯한 장로들이 드워프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크하하핫! 결코 자네를 실망시키지 않을 걸세! 그건 내가 장담하지!”
“그렇고 말고! 누가 뭐래도 우리 드워프 전사들 아닌가! 으하하.”
바실의 말에 호탕한 웃음으로 맞받아친 어느 장로에 웃음에 이어 나머지 장로들도 호탕한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자화자찬을 하기 시작했다.
이내 장로들을 보던 해파토스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처음 폭염의 마도사에게서 네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다. 거기다 네가 복수를 하기 위해 웨어라이언이 되어서 족장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믿을 수 없었지.”
“염환의 말을 믿으셨군요.”
“믿을 수밖에 없었지. 무엇보다 네가 관련된 일인데.”
해파토스 또한 쓴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말해 내가 해파토스의 상황이라면 염환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게임 접속 거부를 당한 친인의 복수를 도와달라는, 거기다 그 적이 루안 대륙에서 가장 강한 10개의 세력 중 하나인 검은 사자 길드라는 말을 들었다면 절대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들릴 듯 말 듯한 내 말에 잠시 놀란 표정을 한 해파토스가 다정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새삼스럽게 무슨. 설마 네가 진짜 아이템 복사를 했다고 해도 난 네 편이었을 거다.”
“감사합니다.”
“그건 됐고, 네 동료들은 선물로 받은 아이템이 마음에 드는가보구나. 하하핫.”
“동료라…….”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자 해파토스에게서 선물로 받은 아이템을 착용한 카나리아가 드워프를 연상케 하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나와 해파토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으하하하! 이거 참 고맙군.”
“하핫,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리는 폭스와 차가운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는 티나 또한 해파토스가 준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었다.
카나리아는 은은한 주황빛이 감도는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보통 나이트나 워리어가 착용하는 전신 갑옷이 아니라 몸의 중요 부분만을 가린 갑옷이었다.
저 갑옷은 나 또한 잘 알고 있는 투 스타 후반의 몽크들과 쓰리 스타 중반의 몽크들이 주로 사용하는 ‘부동의 믿음’이라는 갑옷 세트 아이템이었다.
착용 시, 모든 스킬의 능력이 2 증가하는 이 갑옷은 하급 레어 아이템이었다.
본래 좋은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던 폭스는 특별히 드워프 장로인 바실이 만든 어쌔신 전용의 단검을 받았다.
‘불길한 어둠의 단검’이라는 이 아이템은 단검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엄청난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어쌔신의 주 스킬인 ‘은신’ 스킬의 위력을 올려주기 때문에 많은 어쌔신들이 애용하고 있는 아이템이다.
가장 많이 변화한 것은 티나였다.
“으음.”
몸을 옥죄는 갑옷이 어색한 듯, 티나의 눈썹이 꿈틀거리면서 입에서 낮은 신음을 흘렸다.
‘숲의 미녀 세트…….’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해파토스를 향해 대답하는 내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티나가 착용한 가죽 갑옷은 본래 ‘숲의 미녀 세트’라는 아이템으로 쓰리 스타 궁수들이 사용하는 갑옷 아이템이다.
본래 쇠를 제련하는 드워프 일족 중에서도 가죽을 제련하는 장인은 그 수가 매우 적었고 그 적은 수만큼 아이템의 질 또한 좋았다.
티나가 착용한 숲의 미녀 세트는 장로들 중, 가죽을 제련하는 라기아라는 장로가 만든 아이템이다.
‘숲의 마녀가 숲의 미녀 세트를 착용하다니.’
내 옆으로 몸을 붙인 해파토스가 드워프 특유의 작은 키를 의식해 발돋움하고는 속삭였다.
“이제 어디로 갈 거냐?”
이제 무투회까지 남은 기간은 50일 남짓.
그 안에 어떻게든 더 많고 더 강력한 세력을 모아야 했다.
1만의 야수전사들과 2천의 드워프들로는 검은 사자 길드와, 언제 나를 배신할지 모르는 마법사의 탑에 대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유토리안으로 갈 생각입니다.”
“유토리안으로?”
내 말이 의외였는지 해파토스가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유토리안이라면 사막 제국인 사담 제국의 수도 말이냐? 보석의 도시라고 불리는?”
“예, 그와 동시에 도둑들의 천국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지요.”
말을 마친 내가 미소를 짓자 해파토스가 불만이라는 듯 얼굴을 구겼다.
도둑들의 천국 유토리안!
크라센 제국의 라이벌이자 태고의 숲 초입에 펼쳐진 거대한 사막인 ‘라흐라’에 있는 거대한 제국.
그리고 도둑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나라다.
그와 동시에 해파토스를 제외하고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간부 중 한 명이 활동하는 곳이기도 했다.
“혹시 ‘게리롱’을 만나러 가는 건 아니겠지?”
“거기에 게리롱 말고 누가 있겠습니다. 그래 봬도 ‘붉은 낙타’ 게리롱이라고 하면 알아주는 도둑이잖습니까. 하핫!”
내 입에서 흘러나온 나직한 웃음에 해파토스가 인정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낙타 게리롱.
내가 캐릭터를 삭제당하기 전까지 가입은 하지 않았지만, 검은 사자 길드의 간부로 있던 쓰리 스타의 도둑으로 ‘발정 난 낙타들’이라는 도둑 길드를 이끄는 유명한 도둑이었다.
항상 훔친 물건 대신 붉은 낙타 모양의 동상을 남긴다고 해 생긴 별명이 ‘붉은 낙타’ 게리롱으로 언젠가 그가 내 영광의 검을 훔치다 실패한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길드의 모든 일을 부길드 마스터에게 맡기고 내 곁에 머문 유저다.
내 아이템을 훔칠 때까지 옆에 있겠다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게리롱의 성격은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해서 어떻게 그런 자가 어둠의 세력인 도둑 길드의 마스터를 하나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어쌔신과 더불어 어둠의 양대 세력이라 불리는 도둑들의 거대 길드 마스터답게 게리롱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오죽하면 검은 사자 길드의 모든 간부들이 퀘스트에 대한 정보를 게리롱에게 물을 정도일까.
내가 캐릭터를 삭제 당하자마자 검은 사자 길드를 떠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게 연락을 했던 친인 중 한 명이 바로 게리롱이었다.
게리롱에 관한 것은 마법사의 탑과 연결되어 있는 폭스에게 들키면 안 되는 일이기에 유토리안으로는 티나와 함께 가는 수밖에 없었다.
“블러드 님, 이제 전사들이 있는 마을로 돌아가실 건가요?”
“아니, 난 티나와 함께 따로 움직인다.”
“따로 움직이겠다고요?”
만족스러운 듯 단검을 쓰다듬던 폭스가 눈을 치켜뜨며 내 설명을 기다렸다.
“스톰 자이언트를 사냥하며 레벨이 오름과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칠흑의 세트에 관련된 퀘스트가 발동되었다. 이번 퀘스트는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나 혼자밖에 할 수 없다. 기껏해야 가디언인 티나의 도움을 받는 것이 고작이다.”
“흐음.”
“그런 상황으로 나는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
“그럼 어디로 가실 건가요?”
“유토리안.”
순순히 대답하는 내 모습에 폭스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
마음 같아서는 목적지를 속이고 싶었지만 비록 NPC들이 운영하는 텔레포트 마법진이라 할지라도 마법사의 탑과 연결이 되어 있어 내가 간 곳을 알아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거기다 몰래 다른 마법사들을 통해 워프로 간다고 하더라도 곳곳에 심은 마법사의 탑의 첩자들에 의해 내 정체가 발각될 것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없는 믿음이지만 거짓말을 해서 깎아내릴 필요는 없었다.
이내 뜻 모를 신음을 흘린 폭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와 형님은 타이나루스 산맥 근처에서 레벨 업을 하고 있겠습니다. 퀘스트가 끝나면 연락해주세요.”
“알겠다. 그럼 해파토스가 준비한 아이템들은 모두 네가 관리하고 있어라.”
“허억! 창고의 아이템이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내뱉은 내 말에 웃음을 흘리던 폭스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말이 쉽지 5천 개의 무기와 5천 개의 갑옷 그리고 4천 개에 가까운 야수들의 갑옷을 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 아이템들이 모두 고급 아이템이라면 부담은 엄청난 것이다.
“그래, 부탁하마.”
“아, 알겠습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폭스의 모습에 내 얼굴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
비록 완전히 믿지는 못하지만 폭스라면 마음 놓고 아이템 관리를 맡길 수 있었다.
해파토스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많은 일로 바쁜 해파토스에게 그런 일까지 맡기기는 미안했다.
‘카나리아보다는 폭스를 더 믿을 수 있지.’
돌연 떠오른 카나리아의 바보 같은 모습에 내 입에서 피식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해파토스, 혹시 드워프 마법사 중 워프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가 있습니까?”
“몇 명 있기는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없다. 영광의 망치 안에 워프 마법진이 있으니 그걸 통해 가면 될 거다.”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해파토스의 말에 내 얼굴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본래 드워프 마법사는 극소수였다.
드워프 자체가 마법이라는 것과 반대되는 설정을 가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드워프를 하는 유저들이 마법사라는 직업 자체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상징이라는 수염은 그렇다 쳐도 가뜩이나 작은 키의 드워프가 바닥에 질질 끌며 스태프를 휘두르는 모습은 결코 좋지 않았기에 높은 클래스의 드워프 마법사는 극히 소수다.
날카로운 모습으로 정렬한 드워프 전사들을 뒤로한 채, 해파토스의 선두로 도착한 영광의 망치 3층에 위치한 황금 명패의 방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 방 곳곳에 박힌 마나석이 낮게 진동하며 은은한 빛을 뿌렸다.
가장 커다란 마나석에 양손을 올려놓고 뭔가를 중얼거리던 해파토스가 나를 향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유토리안으로 가기로 조작했다.”
“감사합니다.”
작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내 모습에 까치발을 들어 내 어깨를 토닥인 해파토스가 다정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세상 사람들이 널 뭐라고 불러도 난 너를 믿고 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온힘을 다해 도와주마.
“후훗, 감사합니다. 티나, 이동하자.”
“예.”
우우우웅.
다정한 웃음을 흘리는 해파토스를 뒤로한 채, 은은한 빛을 내뿜는 마법진 위로 올라간 순간, 발밑이 꺼지는 느낌과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밝은 빛이 나와 티나의 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