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2 붉은 낙타 게리롱
시끌시끌.
와글와글.
아무것도 없던 발밑으로 무언가 묵직한 느낌이 전해져옴과 동시에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목소리와 피부를 찌르는 열기에 천천히 눈을 뜨자 사막에 있는 거대 도시인 ‘유토리안’이 그 장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주르륵.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유토리안에 온 지 5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이미 갑옷 안의 몸 또한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소란스러운 유토리안의 모습과 몸을 옥죄는 후끈한 열기에 입술을 씰룩거리자 나를 바라보던 티나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 족장,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마스터’에서 ‘대 족장’으로 나를 바꿔 부르는 티나 또한 유토리안의 이 열기가 익숙하지 않은 듯,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움직인다.”
“예.”
바닥에 질질 끌리는 망토의 느낌을 음미하며 게리롱이 마스터로 있는 도둑 길드의 아지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보를 다루는 비밀스러운 길드답게 거의 모든 도둑 길드들의 아지트는 다른 건물로 위장하고 있고, 또 정보를 얻기 위해선 복잡한 암호를 알아야 한다.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과거에 게리롱에게서 절대 변하지 않는, 대기만 하면 바로 그와 연결되는 암호를 알아 둔 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도둑들의 천국, 혹은 보석의 도시라고 불리는 유토리안은 그 이름에 걸맞은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다른 수도들에 비해 거의 2배는 발달한 듯한 유토리안의 모습은 진정 루안 대륙 최고의 시장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몸을 찌르는 후끈한 열기를 피해 그늘 쪽으로만 움직여 내가 도착한 곳은 ‘황천의 보석’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작은 보석 가게였다.
보석의 도시라는 유토리안에 지천으로 널린 보석 가게였다.
끼이익.
딸랑.
기름칠 좀 해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문소리에 이어 허름한 가게 안에 울리는 방울소리에 카운터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던 붉은 머리의 유저가 화들짝 놀라며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았다.
보통 어디에나 있을 법한, 아니 오히려 다른 가게보다 훨씬 수준이 떨어지는 보석을 진열한 가게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긴, 애초의 목적은 보석 판매가 아니지.’
이내 카운터에서 나온 유저가 손을 비비며 야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남 미녀 손님들, 무엇을 찾으십니까? 저희 가게의 명물이라면 당연히 황천보석이라 불리는 검은색의…….”
“피처럼 붉은색의 루비를 사러 왔다.”
멈칫.
단번에 말을 자르고 내뱉은 내 말에 떠벌리던 유저의 얼굴이 굳은 것도 잠시, 이내 전의 야비한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루비는 쉽게 구할 수 없습니다. 그것보단 저희 가게의 명물인…….”
“눈물처럼 맑은 다이아몬드도 좋지.”
“그것 또한…….”
“물처럼 맑은 사파이어도 좋다. 바람과도 같은 에메랄드도 좋지. 또 태양과 같은 호박 또한 아름답다. 그러니 게리롱에게 안내해라.”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낸 내가 무심한 표정으로 유저를 바라보자,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그는 야비한 웃음을 흘리며 카운터 뒤쪽에 있는 작은 방을 가리켰다.
“그런 보석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지요. 라흐라에 살고 있는 전설의 붉은 낙타의 눈물이라 불리는 보석인데, 보시겠습니까?”
“안내해라.”
막 몸을 돌리려던 유저가 내 뒤에 있는 티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뒤쪽의 숙녀 분은…….”
“내 가디언이다.”
“아!”
내 말에 작은 탄성을 토한 유저가 카운터 뒤의 방으로 나와 티나를 안내했다.
“이곳입니다.”
방 한구석에 있는 장롱의 문을 열자 옷가지 대신 검은 계단의 입구가 보여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다른 도둑 길드들에 비해 허술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유토리안 최강의 도둑 길드라는 길드다.
어쩌면 게리롱은 이미 내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이곳 유토리안에서는 그가 황제와 같은 힘을 지녔으니까.
“제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과장된 움직임으로 몸을 빼는 유저를 뒤로하고 장롱으로 위장한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자 기다랗게 연결된 계단을 따라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좁았던 계단은 그 높이와 넓이가 점점 넓어져 마침내는 거대한 복도의 형식으로 변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마침내 은은한 불빛이 뿜어져 나오는 낡은 나무문이 나를 맞이했다.
반가운 마음에 문의 손잡이를 돌리려는 내 손이 멈칫했다.
‘2명.’
웨어라이언이 되고 나서부터 극도로 발달한 감각이 말해주는 문 건너편에 있는 사람의 수였다.
거기다 2명 모두가 무시 못 할 막강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티나.”
스윽.
낮게 깔린 내 목소리에 티나가 내 말 뜻을 알아채고는 등에 있는 창을 꺼내 움켜쥐었다.
끼익.
“흡!”
느릿한 동작으로 문을 열던 내 얼굴이 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향기에 무참히 구겨졌다.
장미향치고는 너무나 지독한 향기.
언젠가 맡아봤던 향기였다.
내 머릿속으로 수백 개의 생각이 교차되는 순간, 번쩍하는 빛과 함께 강한 힘이 내 몸을 강타했다.
콰과광.
“크헉!”
“대 족장!”
붉은 피를 토하며 허공을 날아 복도에 처박힌 내 모습에 티나가 비명을 지르며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나를 부축하는 티나의 손을 뿌리 치고는 재빠른 동작으로 포션을 마시는 내 눈에 살기와 함께 이제는 의문에서 확신으로 변한 어떠한 감정이 떠올랐다.
으드득.
“로즈마리!”
살기 어린 내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을 열고 나타난 투구가 없는 은색의 갑옷을 걸친 금발의 미남이 나를 향해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선착장에서 보고 2번째지요? 블러드, 아니 헤라클래스 님? 그때는 몰라서 그랬다지만 이미 공식적으로 저희 길드 간부들에게 척살명이 내려진 지금은 이야기가 다를 겁니다.”
차캉.
날카로운 웃음을 흘리며 은은한 장밋빛이 감도는 검을 휘두른 로즈마리의 모습에 내 얼굴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제길, 설마!
“설마 게리롱도 너희 편이냐? 그런 거냐!”
게리롱의 배신이라는 최악의 생각에 절규하는 내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로즈마리가 검을 들어 자세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아쉽게도 그 낙타는 겁쟁이 낙타였나 봅니다. 이미 모습을 감췄더군요. 당신에게 ‘황혼의 오아시스’에서 보자는 메모를 남기고 말입니다.”
으드득.
내 입에서 서늘하게 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다행히 게리롱이 무라사마에게 붙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로즈마리의 말이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 그렇다면… 크허어엉!”
쉬시식.
돌연 내 입에서 터진 제왕의 포효에 검을 들고 자세를 취하던 로즈마리가 비틀거렸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로즈마리와의 거리를 좁힌 내 도가 궤적을 그리며 로즈마리를 노렸다.
“죽어라!”
“보티스!”
까강!
갑작스런 로즈마리의 외침에 로즈마리의 머리 위 천장에서 나타나 내 도를 막는 검은 덩어리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설마…….’
“보티스냐?”
끄덕.
도를 들어올려 자세를 잡으며 묻자 보티스라고 생각되는 검은 물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티스.
일명 ‘검은 그림자’라 불리는 어쌔신 유저로 무라사마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유저이기도 하다.
제길! 로즈마리에 이어 보티스라니!
“티나! 검은 놈을 상대해라!”
“예!”
쉬시식.
깡!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공을 난 티나의 단창이 검은 물체의 중앙에서 나온 단검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몸을 회복한 로즈마리가 분노에 찬 외침을 토하며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감히 이 따위 잔재주로 저를 농락하다니. 사자왕이라는 이름을 버렸군요!”
“그 이름은 너희들이 버린 것 아니었나!”
까가강!
내 도와 로즈마리의 검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토해냈다.
지하 깊숙한 곳이라 그런지 제법 커다란 소리에도 위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꽈과광!
짙은 핏빛의 도기에 휘감긴 도가 복도를 찢어발기며 흉한 상처를 남겼다.
폭이 좁은 복도는 대도를 이용하는 나에게는 최악의 장소다.
“죽어라!”
“치잇.”
꽈앙!
무지막지한 위력을 가진 내 도에 로즈마리가 신음을 흘리며 거리를 벌렸다.
그와 동시에 문으로 가는 길이 만들어졌다.
“흐아압!”
꽈강!
혹시 모를 로즈마리의 공격에 대비해 도기를 무차별적으로 날린 뒤, 반쯤 부서진 문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서자 나를 따라 움직이는 짙은 향기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게리롱의 방은 도둑 길드의 마스터의 방이라는 것을 부정이라도 하 듯 아가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한쪽에 있는, 대체 연기가 어디로 나가는지 모를 벽난로에는 채 꺼지지 않은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곧 게리롱이 ‘황혼의 오아시스’라는 곳으로 출발한 지 얼마 안 됐다는 말이었다.
부스럭.
이내 반쯤 부서진 문을 밀치고 들어온 로즈마리가 검을 들어 나를 겨누자 방안에 감돌던 독한 향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크윽.”
비틀.
자이언트 베어마저 중독시키는 데스 랜드의 독화보다 훨씬 더 지독한 향기에 비틀거리는 몸을 도로 지탱하자 나를 바라보던 로즈마리가 짙은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거 아십니까? 태고의 숲에 사는 ‘타이난’이라는 투칸족의 땅 근처에는 ‘사마루’라는 꽃이 핍니다. 그 꽃의 향기는 너무나 향기롭고 짙어서 많은 사람들의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마화(魔花)’라 불리며 저주의 대상이 됐지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스윽.
“크윽.”
점점 짙어지는 독한 향기를 참을 수 없던 나는 신음을 흘렸다.
그런 내 모습에 ‘전상의 신사’라는 별명에 절대 어울리지 않는 비열한 웃음을 흘린 로즈마리가 말을 이었다.
“바로 너무 향기롭기 때문이지요. 수많은 투칸들이 그 향기에 중독되었습니다. 사마루가 없으면 살지도 못할 정도가 됐지요. 제 검은 바로 마화라 불리는 사마루의 꽃의 정령들을 잡아 ‘지옥의 염화’로 녹여 만든 검입니다.”
쾌락에 들뜬 붉은 혀를 내밀어 자신의 검을 핥은 로즈마리가 사마루의 꽃향기를 연상케 하는 짙은 살기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아, 말 안 한 것이 있습니다. 사마루의 서식지인 타이난의 투칸족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계십니까? 모두 자신들이 너무나 사랑한 사마루의 양분이 되었답니다. 크큭, 바로 당신처럼!”
쉬시식.
푸욱.
“크아악!”
미처 방어할 생각도 못하고 팔을 파고든 검으로 인한 통증에 혼미하던 정신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그와 동시에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내 얼굴에 살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크큭, 정신 차리게 해줘서 고맙군!”
“무, 무슨…….”
이 말과 함께 팔에 박힌 검을 빼기는커녕 더 밀어 넣는 내 모습에 경악한 로즈마리가 곧 내가 다른 손에 든 마기를 내뿜는 도에 얼굴을 굳히며 재빨리 검을 빼내려고 했지만, 팔을 관통하고도 뒤로 길게 삐져나온 검이 쉽게 뽑힐 리가 없었다.
“크큭, 빌어먹을 자식. 파천기!”
우우웅.
다급한 외침과 함께 손목 부분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파천기의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도를 휘감았다.
“죽엇!”
우르릉!
천둥소리 같은 소음과 함께 공기를 찢어발긴 검붉은 핏빛의 도가 검을 포기하고 뒤로 몸을 날리는 로즈마리의 어깨에 작렬했다.
콰지직.
“크아악!”
검 대신 로즈마리의 어깨 부분의 갑옷을 부순 도가 파천기의 기운을 받아 2배의 힘이 되어 막 몸을 날리는 로즈마리의 어깨 근육을 자르고 뼈를 으스러트리며 섬뜩한 소리를 터트렸다.
챙캉!
“크윽, 마지막이다!”
나는 팔에 박힌 검을 뽑아 뒤로 던지고는 도를 고쳐 들고 막 몸을 던지려 했다.
그런데 나를 향해 어깨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던 로즈마리가 오른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갑작스런 로즈마리의 행동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이내 로즈마리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붉은색 반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빛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매직 아이템?”
“화산의 마나여, 염화의 마나여, 폭염의 마나여!”
잔득 얼굴을 구기며 애써 주문을 외우는 로즈마리에 맞춰 점차 빛을 키워가는 반지에 내 얼굴에 다급함이 서렸다.
이내 막 도에 맺힌 도기를 로즈마리를 향해 뿜어내려는 순간, 로즈마리의 반지에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영혼의 사슬을 녹여버리는 마그마가 되어 나의 적을 멸하라! 마그마 볼!”
마그마 볼이라는 다소 유치한 이름의 마법은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화염계의, 그것도 쓰리 스타급 마법이었다.
이내 로즈마리의 반지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빛이 점차 크기를 키워가며 거대한 구 모양의 형상을 잡았다.
화르르륵.
쿠구궁!
용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크기의 공 모양의, 말 그대로 마그마 볼의 모습에 내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화끈한 정도가 아니라 살이 익을 정도의 열기와 함께 주르륵 흐르면서도 용케도 형상을 유지하는 2m는 가뿐히 넘어 보이는 크기에 게리롱의 사무실에 있던 종이와 물건들이 타올랐다.
이내 마그마 볼을 유지하지 않는 다른 손으로 포션을 꺼내 마시던 로즈마리가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타 죽으십시오!”
꽝!
콰르르르.
로즈마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30cm 정도 허공에 떠 있던 마그마 볼이 땅에 떨어지더니 곧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나를 향해 굴러오기 시작했다.
“하하하핫!”
“빌어먹을!”
이미 승리를 확신한 듯, 나를 보며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는 로즈마리의 모습이 마그마 볼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에 춤을 추듯 일그러졌다.
‘벤다? 아니, 부순다!’
어느 지점에 도착하면 폭발하여 시전자를 제외한 모든 생물들에게 강력한 데미지가 담긴 마그마 덩어리를 폭사하는 마그마 볼의 특성상 피한다 하더라도 커다란 데미지를 입는 것은 당연했다.
방법은 단 하나! 부숴버리는 것뿐이었다.
“크크큭.”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마그마 볼에 오랜만에 뜨거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이군.’
음모와 음모가 소용돌이치는 현재에서 맛볼 수 없는, 음모에 목숨을 맡기는 것이 아닌 오직 내 힘에 목숨을 맡기는, 종이 한 장 차이의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위험한 내기에 내 몸 안에서 참을 수 없는 흥분이 끓어올랐다.
“야수화!”
몸 안 가득한 흥분감에 내 몸이 빠른 속도로 분해와 결합을 반복하다 마침내 거대한 은빛 털을 가진 야수를 만들었다.
2m 50cm는 되게 거대해진 내 앞으로 이제는 겨우 목까지 오는 마그마 볼이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괴, 괴물?”
“크르르.”
갑작스레 모습을 바꾼 나를 보고 경악하며 소리치는 로즈마리의 모습에 내 입에서 불편한 기색을 담은 목울림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이제는 마그마의 흐름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마그마 볼 덕에 갑옷 밖으로 삐져나온 새하얀 털과 머리털이 순식간에 그슬렸다.
“크르릉. 대지의 마나여, 내 동료의 몸에 깃들어 땅을 뒤흔드는 힘을 주어라. 스트랭스. 악왕의 기운. 파천기!”
우우우웅.
스으윽.
내가 가지고 있는 보조 스킬을 모조리 사용하자 강인한 힘으로 가득 했던 육체가 한층 더 강인함 힘을 머금고 맹렬하게 끓어올랐다.
내 손에 들린 도 또한 핏빛의 도기와 검은빛의 악왕의 기운과 파천기의 기운이 섞여 불길한 검붉은색의 도기를 피어 올렸다.
“베시겠다고요? 마그마 볼을요? 하하핫. 그따위 괴물로 변했다고 쓰리 스타의 마법을 벨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하하!”
세찬 비웃음을 터트리는 마그마 볼 너머의 로즈마리의 모습에 도를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무한참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마그마 볼을 부수고 그 뒤의 로즈마리까지 죽일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죽인다고 하더라도 게임오버 직전의 체력 상태에서 보티스의 단검이 스치기라도 한다면 바로 로그아웃이었다.
마침내 마그마 볼이 내 도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내 입에서 제왕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허어엉!”
쐐애애액.
콰광!
온힘을 다해 머리 위에서 내려찍은 도의 검은 궤적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도와 마그마 볼이 부딪치며 커다란 폭음을 터트렸다.
카가가각.
“크윽!”
도와 마그마 볼이 부딪치며 내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온몸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와 힘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얼굴의 털은 이미 다 타버린 지 오래였다.
수인족 특유의 엄청난 재생력으로 자랐다 타기를 반복하는 털이 짙은 노린내를 풍겼다.
“하하핫! 자, 더 발악해보시지요!”
으드득.
이죽거리며 나를 놀리는 로즈마리의 모습에 사자의 형상을 한 내 얼굴에 힘줄이 솟아났다.
그와 동시에 힘을 잃고 밀리던 도가 다시 힘을 되찾고 마그마 볼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쩌적.
‘응?’
시간이 지나 터지려는지 힘을 잃는 마그마 볼에 내 얼굴에 살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
그와 동시에 마그마 볼 뒤의 로즈마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서, 설마!”
창백한 얼굴로 설마를 중얼거리며 자신의 검을 향해 눈을 번뜩이는 로즈마리의 모습에 내 몸속에 있던 마지막 힘이 다시 한 번 폭발했다.
“개…자식!”
콰지직.
꽈강!
“으아악!”
수많은 균열과 함께 폭음을 터트리며 산산조각으로 나뉘는 마그마 볼에 마그마 볼 뒤에 있던 로즈마리가 신음을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전장의 신사라고 불리는 로즈마리의 비참한 모습에 가벼운 화상으로 일그러진 내 얼굴에 흉측한 미소가 떠올랐다.
“크크큭. 죽어라!”
“허억!”
꽈광!
로즈마리의 목을 노리던 도가 순간적으로 몸을 굴린 그의 목을 가르지 못하고 애꿎은 바닥을 때리며 자욱한 먼지를 피워 올렸다.
“크윽.”
시야를 가리는 먼지에 당황한 것도 잠시, 배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재빨리 도를 들어 막자 ‘째쟁’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미약한 충격이 느껴졌다.
“죽엇!”
쉬시식.
살기 어린 외침과 함께 먼지를 뚫고 나온 로즈마리가 어느새 찾은 검을 들고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야수화로 몇 배는 더 좋아진 후각으로 느껴지는 사마루의 향기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후각보다 몇 배는 좋아진 해독 능력으로 몸속에 스며든 사마루의 독향이 순식간에 내 힘으로 변했다.
“크허어엉!”
“큭.”
몸을 날림과 동시에 터져 나온 제왕의 포효에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던 로즈마리가 신음을 삼키며 멈칫하여 틈을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내 손에 들린 도가 검붉은 궤적을 그리며 로즈마리의 손을 훑었다.
투둑.
“……?”
무언가 떨어지는 작은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잠시간의 정적.
그리고 곧이어 로즈마리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악! 파, 팔! 내 팔!”
양팔을 보며 비명을 토해낸 로즈마리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익숙한 손을 보고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육체적 고통보다는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인지 침을 흘리며 비명을 지르던 로즈마리가 내 몸에서 풍기는 짙은 마기와 살기에 뒷걸음질 쳤다.
“전장의 신사가 도망을 치는군. 지금 이 모습을 동영상 촬영하고 있는데, 과연 이걸 게시판에 올리면 네 팬들이 무슨 말을 할까? 응? 크큭.”
멈칫.
음침한 내 목소리에 등을 돌리고 도망치려던 로즈마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나를 바라보는 로즈마리의 눈에는 두려움과 갈등이 섞여 있었다.
여기서 도망을 쳐서 망신을 당하느냐, 아니면 죽더라도 덤벼서 동정을 사느냐.
‘멍청한 놈!’
사실 동영상 촬영 따위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아니, 할 틈이 없었다는 것이 옳았다.
혼란스러운 눈빛의 로즈마리를 향해 비웃음을 흘리며 한 걸음 내딛자 마침내 로즈마리의 눈에 어떠한 결심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자식! 난 비록 지금 네놈에게 죽지만 검은 사자 길드가 너를 찾아내 철저하게 죽일 것이다! 너에게 협력하는 빌어먹을 낙타 자식도……!”
“빌어먹을 낙타가 아니라 붉은 낙타다, 멍청아.”
“헉!”
분노 섞인 저주를 토해내던 로즈마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푸욱.
“꾸르륵.”
로즈마리의 목을 꿰뚫은 단검이 막 비틀어지던 로즈마리의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로즈마리 뒤의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새하얀 손이 로즈마리의 목과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문질렀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이 새하얀 치아가 보일 정도로 환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네놈의 피처럼 붉은 낙타. 하지만 네놈의 피처럼 더럽지는 않지.”
“끄억? 끅?”
촤악.
콰당.
‘쑤욱’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뽑힌 단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꾸역꾸역 피를 토해내는 로즈마리의 목을 반쯤 가르자 비틀거리던 로즈마리의 몸이 요란하게 바닥에 처박혔다.
“오오, 이게 누구야? 친구에게 배신당한 멍청이 아닌가!”
꾸욱.
“컥.”
부들부들 몸을 떨며 서서히 모래가 되는 로즈마리의 머리를 그대로 밟고 나에게 다가온 어둠의 팔로 보이는 것이 쭉 늘어나며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연출했다.
폭스의 ‘섀도우 아머’와 같은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는 나를 향해 어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멍청이가 나에게는 무슨 볼일로 왔지? 그것도 엄청난 괴물로 변해서 말이야.”
“모습을 보여라. 게리롱이 맞는지 확인하면 말해주마.”
스르릉.
도를 들어 자세를 취하는 살기 어린 모습에 이죽거리던 그림자가 멈칫하더니 전과 같은 환한 웃음을 흘렸다.
“얼굴은 몰라도 성격은 더 좋아졌군. 좋아, 마음에 들어.”
츠츠츳.
이내 옷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있던 어둠이 발끝에서부터 점차 모습을 갖춰 가는가 싶더니 곧 내가 익숙한 모습으로 변했다.
“게리롱!”
“오랜만이다, 멍청아.”
성인 남자치고는 작은 160cm 정도의 키와 통통하게 옆으로 퍼진 몸.
화려한 색의 장발이 판을 치는 게임에서는 보기 힘든 반 삭발 스타일과 통통한 얼굴과는 다르게 호랑이의 그것처럼 살기를 풀풀 날리는 매서운 얼굴을 가진 인영은, 바로 유토리안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도둑 길드 ‘발정 난 낙타들’을 이끄는 붉은 낙타 게리롱이었다.
도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통통한 몸을 움직인 게리롱이 느긋하게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복수를 위해 복귀했다는 건 검은 사자 길드에 박아놓은 첩자로부터 들었다.”
“그래.”
무심한 목소리로 반가움을 표하는 내 모습에 게리롱의 얼굴이 작게 구겨졌다.
“젠장, 정말 헤라클래스가 맞기는 한 거냐? 등신 같던 예전보다는 낫지만 이거 원, 무라사마를 상대하는 것 같구만.”
“말조심해라.”
내 입에서 흘러나온 서늘한 목소리에 웃음을 흘리던 게리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흘린 게리롱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반쯤 부서진 문을 완전히 부순 검은 물체가 나와 게리롱의 사이로 떨어졌다.
갑작스레 나타난 물체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물체의 정체를 파악한 내 입에서 경악 섞인 외침이 흘러나왔다.
“티나!”
“대, 대 족장!”
“대 족장?”
티나의 입에서 나온 대 족장이란 단어에 눈을 번뜩이는 게리롱을 뒤로한 채, 재빨리 품속에서 포션을 꺼내 상처투성이의 티나의 몸에 쏟아 붇자 상처들이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으윽.”
“칫.”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는 티나를 뒤로하고 재빨리 몸을 날려 복도로 나가자, 폐허를 방불케 하는 복도가 나를 맞이했다.
복도 벽에 금이 간 것은 기본이었고 어떤 곳은 내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보티스는?’
다급함에 물든 내 눈이 재빨리 복도를 휩쓸었지만 보티스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티나의 것으로 보이는 짙은 혈향과 싸움의 흔적만이 있을 뿐이었다.
“제길.”
으득, 우두둑.
콰지직.
야수화가 풀리며 높아졌던 시야가 점차 낮아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온몸을 울리는 저릿한 통증과 변한 신체를 쓰다듬으며 방으로 들어서자, 주저앉아서 티나를 바라보던 게리롱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여자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수인족이냐?”
“황혼의 오아시스에서 나를 기다리겠다는 메모는 어떻게 된 거냐?”
대답 대신 질문을 하는 나를 바라보며 얼굴을 구긴 게리롱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쯤 타버린 의자에 앉아 말을 이었다.
“물론 거짓말이지. 네가 날 우습게보는 모양인데, 저놈들이나 너나 유토리안에 도착한 순간부터 이미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았다. 거기다 놈들이 날 회유하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말이야. 멍청한 네놈은 모르겠지만 네놈이 쫓겨나기 전부터 무라사마는 은밀하게 나에게 제의를 했다고. 크크큭.”
낮은 비웃음을 흘리는 게리롱의 말에 내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그런 내 반응을 즐기듯이 나를 바라보던 게리롱이 웃음을 지우고 입을 열었다.
“이제 내 차례인가? 이 여자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진짜 수인족이냐?”
“그래, 웨어라이언이다.”
“하하! 사자왕이 진짜 사자가 됐네?”
낮은 웃음을 터트리는 게리롱의 장난스러운 모습에 내 미간이 작게 구겨졌다.
한참을 웃던 게리롱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나를 찾아온 용건은?”
“복수를 도와줘라. 모든 것이 준비됐다. 부족한 것은 정보력뿐!”
마법사의 탑에서 정보를 얻어 쓰는 지금, 나에게 부족한 것은 정보력이었다.
전력이야 수인족 전사들과 드워프 전사들만 있어도 가능했지만 정보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계속 정보 길드에서 정보를 사다 쓰기에는 그 요금이 만만치 않았다.
또한 상대가 아예 그 정보를 산다면 나로서는 그 정보를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게리롱은 최적의 조건을 가진 아군이었다.
비록 게리롱의 길드가 사담 제국에 있기는 하지만 각 제국에 퍼져 있는 수많은 지부들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흐음… 그렇게 해서 나에게 얻어지는 것은?”
“대륙의 모든 정보와 엄청난 양의 돈 그리고 즐거움!”
오만하다 못해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는 내 말에 게리롱의 얼굴이 멍하게 풀리는 것도 잠시, 곧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크크큭! 좋아, 그걸로 만족이다.”
평소에도 ‘재미없는 인생! 재미없는 인생!’이라고 중얼거릴 정도로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게리롱에게 대륙의 정보와 엄청난 양의 돈 따위는 재미에 비하면 아무 가치가 없었다.
그런 것 따위는 게리롱이 마음만 먹는다면 1년도 안 돼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즐거움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면 황당하겠지만 게리롱이 도둑을 선택한 이유 또한 바로 스릴과 즐거움을 알기 위해서였다.
“으음… 대 족장…….”
이내 죽은 듯이 누워 신음을 흘리던 티나가 얼굴을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된 거냐?”
“죄송합니다.”
싸늘한 내 물음에 반쯤 몸을 일으켜 바닥에 주저앉은 티나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보티스는?”
“저와의 접전 끝에 팔 하나를 잃고 도망쳤습니다. 뒤쫓으려고 했지만 마지막 공격이 너무 강해서… 죄송합니다.”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티나의 모습에 내 얼굴 위로 아쉬움이 떠올랐다.
로즈마리를 죽인 이 시점에 보티스마저 죽인다면 무엇보다 훌륭한 기선제압이었다.
이내 아쉬움을 토하는 나를 바라보던 게리롱이 메시지를 보내는 듯 입을 웅얼거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3명의 검은 복면인이 들이닥쳤다.
“정리해라.”
게리롱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복면인들이 흉하게 타버린 가구들을 들고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스러운 의자를 가져와 놓고는 다시 사라졌다.
나와 티나에게 자리를 권한 게리롱이 자신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
“그래, 이미 네 복수를 도와주기로 약속했으니 네가 가지고 있는 전력이나 앞으로의 계획을 모두 나에게 말해봐라.”
“내가 어떻게 널 믿지?”
“뭐야?”
우직!
게리롱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에 맞춰 게리롱이 앉아 있던 의자의 다리가 부러졌다.
부러진 다리 덕에 한쪽으로 기우는 의자를 거칠게 내던진 게리롱이 살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냐!”
“솔직히 말해 그렇다. 아니, 너뿐이 아니라 세상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겠다는 게 지금 내 심정이다.”
“그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내 말에 뭔가 반박을 하려던 게리롱이 말을 흐리며 인상을 구기며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 잠시 후 나를 노려보던 게리롱이 말을 이었다.
“그럼 왜 나를 찾아와서 도움을 청했지?”
“너를 믿으니까.”
“그게 무슨…….”
먼저와는 정반대의 말에 게리롱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말 그대로 나는 게리롱을 믿지만 또 한편으로는 믿지 않았다.
“말 그대로다. 너를 믿지만 완전하게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지.”
솔직한 심정을 담은 내 말에 인상을 구기던 게리롱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날 믿을 수 있겠냐? 뭣하면 검은 사자 길드의 비밀 정보까지 다 구해주랴? 아니면 이 길드를 넘겨줄까?”
“그런 것까지는 필요 없다.”
“그럼 대체 어쩌란 거냐.”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불만을 토해내는 게리롱의 모습에 내 얼굴에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종속의 인을 새겨라.”
“뭐?”
“종속의 인을 새기라고 했다.”
멍한 표정을 짓던 게리롱의 얼굴이 갑작스런 내 말에 단번에 구겨졌다.
“설마 네가 말하는 종속의 인이 내가 생각하는 종속의 인은 아니겠지?”
“맞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이마의 중앙에 소용돌이 모양을 그리는 게리롱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판타즈마 월드의 기본 시스템으로 시작해 거의 모든 정보를 알고 또 관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 바로 게리롱이다.
그런 게리롱이 종속의 인에 대해 알지 못할 리 없었다.
“안 해! 아니, 못해! 내가 미쳤다고 종속의 인을 새기냐!”
스르릉.
은은한 살기와 함께 도를 뽑는 내 모습에 광분하던 게리롱이 얼굴을 굳히며 나를 바라봤다.
“못하겠다는 거냐?”
스윽.
어느새 일어나 내 옆에 나란히 서 창을 들고 은은한 살기를 내뿜는 티나의 모습에 게리롱의 얼굴이 한층 더 굳었다.
게리롱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만약 게리롱이 거절한다면 단숨에 게리롱을 베고 도망을 칠 생각이었다.
진짜 믿음으로 이어진 해파토스나 염환과는 달리 게리롱은 그저 약간의 친분을 가진 유저에 불과했다.
물론 게리롱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게리롱이 엄청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도둑 길드의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게리롱에게 도움을 청할 일도 없었다.
티나와 내가 동시에 공격한다면 100에 99는 확실하게 게리롱을 죽일 수 있다.
다만 그 뒤가 문제였다.
만약 게리롱이 나에게 앙심을 품고 무라사마에게 붙는다면 최악에 가까운 상황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마법사의 탑과 그 외의 세력들도 있었지만 그 세력들은 진심으로 나를 믿고 후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를 쓰다 버릴 장기 말로 생각하고 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의 표정으로 게리롱이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아 입을 열었다.
“그래, 종속의 인을 새기든 구워 먹든 네 마음대로 해라. 제길, 내가 종속의 인을 새기게 되다니…….”
종속의 인을 새기는 것이 불만인지 연신 투덜거리는 게리롱의 모습에 반쯤 꺼낸 도를 집어넣는 내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발정 난 낙타들의 길드 마스터 게리롱은 나 블러드에 종속되는 노예로서 종속의 인이 새겨질 것이다. 동의하겠는가?
“동의한다, 제기랄.”
쓴웃음을 흘리며 투덜거리는 게리롱의 모습에 내 얼굴에 걸린 미소는 한층 짙어졌다.
“종속은 성립되었다.”
우우웅.
스슥.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온 은은한 기운이 투덜거리는 게리롱의 이마로 쏘아져 붉은색 소용돌이 모양을 만들고는 사라졌다.
이내 붉은 소용돌이 모양이 새겨진 이마를 쓰다듬던 게리롱이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자식, 이제 만족하냐?”
“크큭, 그래.”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나를 향해 뭔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투덜거린 게리롱이 짐짓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날 믿겠냐?”
“그래,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게 최선의 방법이다.”
“이해한다. 그건 그렇고… 이제 말해줘도 되지 않냐?”
‘무엇을?’이라고 묻는 듯한 내 표정에 진지한 얼굴을 하던 게리롱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가 가진 전략과 계획 말이다. 그걸 알아야 앞으로 전략을 짜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냐.”
“아!”
내 입에서 터진 감탄에 게리롱이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평소 게리롱의 성격을 본다면 믿기지 않겠지만 게리롱이 짜는 전략은 거의 성공을 기록하는 기막힌 작전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리롱의 말로는 현실 세계에서는 커다란 사립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전략을 가르치는 교사라고 하는데 전략 따위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을 리가 없었다.
어쨌든 검은 사자 길드의 군사이자 부길드 마스터인 무라사마에 비견될 정도의 기막힌 전략을 짜는 유일한 유저가 바로 게리롱이었다.
‘뭐부터 말해줘야 하나.’
내 표정을 보고 마음속 갈등을 눈치 챈 것인지 바닥에 앉아 나를 바라보던 게리롱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모두 말해라. 처음부터 끝까지! 흐흐흐.”
게리롱의 입가에 걸린 음흉한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으음, 대단한데? 이거 오랜만에 할 맛 나는 전쟁이겠는걸. 크큭.”
초보 존에서 나온 뒤부터 지금까지의 내 이야기를 들은 게리롱이 낮은 웃음을 터트리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먹이를 앞에 두고 어디부터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는 야수를 연상시키는 게리롱의 모습에 나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이로써 복수를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만약 검은 사자 길드가 적당한 이유로 다른 길드들을 끌어들인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것은 마법사의 탑과 나머지 정체불명의 2개의 길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문제없었다.
내가 할 일은 다른 길드들 몰래 차근차근 힘을 비축하여 세 길드에 의해 힘이 빠진 검은 사자 길드와 검은 사자 길드를 공격하느라 힘이 빠진 마법사의 탑과 그 밖의 길드들을 함께 처리하는 것이다.
상황이 내 계획대로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시간을 두고 차차 게리롱과 의논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계획이었다.
남은 날짜는 47일.
판타즈마 월드로는 94일이 남은 셈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충분히 길다고 느껴지는 날짜에 내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 그리고 기대가 어렸다.
얼마 남지 않은 복수를 꿈꾸는 나를 바라보던 게리롱이 입을 열었다.
“이젠 어디로 갈 거냐? 난 네가 여기 남아서 나랑 계획을 짰으면 싶은데.”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것 같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다.”
“그 폭스라는 놈 말이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바라보던 게리롱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놈도 보통 놈은 아닌 거 같은데 조심해라. 멍청하게 저번처럼 뒤통수 맞지 말고.”
“걱정 마라.”
내가 게리롱과의 작전회의를 뒤로하고 떠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폭스 때문이었다.
폭스는 마법사의 탑에서 나를 감시하는 역할이지만, 한편으론 나와 마법사의 탑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마법사의 탑이 폭스를 통해 나를 보고 있다면 난 폭스를 통해 마법사의 탑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불리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마법사의 탑에는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염환이 있다.
염환이라면 내가 부탁만 하면 기꺼이 마법사의 탑을 배신하고 내 편이 될 친구다.
다만 염환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그런 부탁을 하지 않는 것뿐이지.
거기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폭스가 야수연합 사이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였다.
폭스는 언젠가 배신하고 처리해야 하는 상대.
그런 그를 따르는 인물들이 야수연합 사이에서 생겨난다면 훗날 내 일에 지장을 줄 것이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 스파이가 나타나는 경우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내가 폭스를 귀찮아하면서도 데리고 다닌 것이었다.
뭔가를 더 말하려던 게리롱이 희미하게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멍청이 같기는 해도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는 너니까 믿는다.”
“크큭. 그래, 이제 넌 어떻게 할 거냐?”
“어떻게 하긴. 아지트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지. 이곳의 위치가 들통 난 이상, 오늘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른 도둑 길드들이 보낸 어쌔신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 거다.”
장난 반, 원망 반인 표정을 하는 게리롱의 모습에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게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있지만 한 길드의, 그것도 철저히 어둠속에서 사는 도둑 길드 마스터의 아지트가 알려지는 것은 그것은 상당히 심각한 일이다.
일단 그 길드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은 기본이고 적대 길드의 암습이나 공격의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길드 마스터들의 아지트, 특히나 음지쪽 길드 마스터들의 아지트는 철저히 기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미안하군.”
“아니다. 그것보다 이제 어디로 갈 거냐? 그 빌어먹을 드워프 자식한테? 아니면 태초의 숲으로?”
“일단 타이나루스 산맥에 가서 일행을 데리고 태고의 숲으로 가야지.”
“그래? 흐음, 알겠다.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하니까 여기서 워프를 타고 나가라.”
“밖이 위험하다고?”
“그래, 부하들의 말에 따르면 벌써 주변에 검은 사자 길드원으로 보이는 것들이 모이기 시작했단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게리롱이 집무실 한편에 있는 사슴 장식의 뿔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 한쪽의 벽이 열리며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작은 공간의 바닥에는 워프 마법진으로 보이는 마법진이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것이지.”
우우웅.
게리롱의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마법진이 진동하며 한층 더 짙은 빛을 흘렸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마법진을 바라보던 게리롱이 허공에 손을 들어 뭔가를 조작하더니 곧 비켜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곤으로 가도록 조작했다. 최대 2명까지 가능하니까 너랑 네 가디언이 같이 올라가도 될 거다.”
“너는?”
“난 남아서 저 위에 있는 부길드 마스터 놈하고 같이 정리하고 예비 아지트로 옮겨야지. 어휴, 이게 무슨 고생인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리는 게리롱이 말하는 저 위에 있는 부길드 마스터라면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보석 가게의 주인이다.
“그 보석 가게의 주인이 부길드 마스터라고?”
내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기운이 담긴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현실에서는 모르지만 이곳 판타즈마 월드의 도둑들은 심계가 깊어야 한다.
무작정 물건을 훔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정보를 훔치고 또 정보를 원하는 자에게 파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심계다.
내가 알고 있는 보석 가게의 주인은 나의 말에도 쉽게 동요해 마음을 드러내는, 도둑으로서는 최악에 가까운 도둑이었다.
“그래, 비록 5명의 부길드 마스터 중 한 명이기는 하지만. 정보 쪽보다는 전투 쪽으로 뽑은 부길드 마스터다. ‘빅 나이프’ 그레텔이라고 하면 알려나?”
“아!”
빅 나이프 그레텔.
도둑 중에서는 유일하게 1대 1 대결로 전사를 이길 수 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유저였다.
도둑 특유의 민첩성으로 기습이나 현혹이 아닌 당당하게 검을 맞대고 싸우는 전투방식과 도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나이프를 사용하는 그레텔의 별명이 바로 빅 나이프였다.
그런 그레텔이 발정 난 낙타들의 부길드 마스터였다니.
“어쨌든 검은 사자 길드에 관한 정보는 수시로 부탁하마.”
“나만 믿어라. 음하하하!”
자신 있다는 얼굴로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는 게리롱을 뒤로하고 티나와 함께 마법진으로 올라가자,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던 밝은 빛이 나와 티나의 몸을 집어삼켰다.
깡깡깡깡!
화르르륵.
눈을 뜨기도 전에 들리는 날카로운 망치소리와 뜨거운 열기를 담고 있는 불이 이는 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자, 고곤 특유의 작고 넓은 건물들과 여러 종족의 유저들이 나를 반겼다.
내가 워프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바로 구석진 골목에 있는 ‘뜨거운 밤’이라는 허름한 술집의 뒷문이었다.
뒷문에는 고의로 쌓은 듯한 짐들이 워프 순간 나오는 빛이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었다.
“티나, 위치를 확인해라.”
“예.”
타닥.
살짝 고개를 끄덕인 티나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짐을 타고 뜨거운 밤의 지붕 위로 올라, 현재 위치와 목적지인 영광의 망치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내 위치 확인을 마친 티나가 내 곁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티나가 재빨리 내 앞으로 와 주변을 경계하며 영광의 망치로 걸음을 옮겼다.
스르륵.
바닥에 끌리는 망토의 느낌과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영광의 망치에 도착하자 저번에 봤던 드워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했다.
“벌써 오셨습니까?”
“그래, 내 일행은?”
“안에 있습니다. 이리로 모셔올까요?”
“아니다, 해파토스에게 가겠다. 그리고 일행에게 그쪽으로 오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내 명령을 들은 드워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짧은 다리를 놀려 종종걸음을 옮겼다.
티나를 대동하고 3층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뭔가를 쓰고 있던 해파토스가 나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접대용으로 제작된 커다란 의자를 끌어 자리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벌써 일이 해결된 거냐?”
“예, 약간의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좋게 끝났습니다.”
“약간의 사고?”
“별일 아니었습니다.”
[블러드: 로즈마리와 보티스가 게리롱을 회유하기 위해 왔다가 저와 부딪쳤습니다.]
갑작스런 내 메시지에 멈칫한 해파토스가 쓰고 있던 서류를 들고 나를 향해 펄럭이며 입을 열었다.
“으으… 이거 봐라. 매일 이 짓만 하느라 대장장이 숙련도를 올릴 시간도 없다. 제길, 괜히 족장한 건 아닌지…….”
[해파토스: 그래서 어떻게 됐냐?]
“그래도 제 예전보다는 적어 보입니다. 전 일주일 동안 사냥도 못하고 종이만 본 적도 있습니다.”
[블러드: 로즈마리는 저와 싸움 끝에 도망치려다 게리롱에게 죽었고 보티스는 티나와 싸우다 한 팔을 잃고 도망쳤습니다.]
“말만 들어도 지겹군!”
짐짓 과장된 얼굴로 너스레를 떨던 해파토스가 막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닫혀 있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싱글거리는 폭스와 폭스의 곁에 붙어 있는 카나리아 그리고 내 명령을 받고 그 둘을 데리러 간 드워프였다.
“하하. 블러드 님, 퀘스트가 쉬웠나보지요? 예상보다 빨리 오셨네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눈웃음을 흘리는 폭스의 모습에 웃음이 떠올라 있던 내 얼굴이 전과 같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쉽게도 자격이 안 되더군. 쓰리 스타 이상부터인 퀘스트라 레벨 제한에 걸렸다.”
“아아, 그러셨군요. 안타깝네요. 하핫.”
역겨운 웃음을 흘리는 폭스를 보다 고개를 돌려 해파토스에게 시선을 돌리자,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던 해파토스가 살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태초의 숲으로 갈 거냐?”
“그래야지요. 폭스.”
“예?”
나직한 내 부름에 카나리아와 노닥거리던 폭스가 내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사가짱이얌에게 말해서 고곤에서 전사들이 있는 곳까지 아이템을 운반할 수 있는 워프 마법진을 만들어달라고 해라.”
“아이템을 운반하는 마법진이요?”
담담한 내 말투에 폭스의 표정에 기묘하게 변했다.
설정 상 사람이 이동하는 마법진에 비해 아이템이 이동하는 마법진의 마력 소모는 거의 5배에 달했다.
거기다 마법진을 구성하는 재료 또한 3배에서 5배 정도로 비쌌다.
거기다 마력이 소모되는 양은 아이템의 수준에 따라 달랐다.
아이템으로 대량의 이익을 벌어들이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제재였다.
현재 고곤에 있는 아이템의 수는 약 만 개.
거기다 그 수준이 모두 높아서 마법진을 만들 때 필요한 재료값이나 마법진을 구성하는 데 소모되는 마법사의 수가 상당할 터였다.
모르긴 몰라도 베이거스의 항구에서 전사들을 이동할 때보다 몇 배는 더 들 것이 분명했다.
“부탁하마.”
“끄응… 알겠습니다.”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자 폭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멍청한 놈.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을 애써 지우며 해파토스를 바라보자, 나와 폭스의 관계를 알고 있는 해파토스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지 얼굴을 붉히며 나를 향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그럼 무기는…….”
“마법사의 탑에서 마법사들이 와서 조치를 취할 겁니다.”
“그, 그래. 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는 해파토스와는 반대로 구겨지는 얼굴을 애써 펴며 웃음을 흘리는 폭스의 모습에 내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그래, 태고의 숲에는 언제 갈 거냐?”
“지금 가려고 합니다.”
“벌써?”
“예,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요.”
“그건 그렇지.”
살짝 고개를 끄덕인 해파토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을 워프 마법진이 있는 작은 방으로 이끌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보자. 도착점은 너희 전사들이 자리 잡은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수다.”
[해파토스: 뭔가 더 부탁할 게 있으면 연락 줘라.]
동시에 들리는 같은 목소리의 다른 말.
두 개의 내용에 막 워프 마법진 위로 올라서려던 내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장장이 숙련도를 하루 빨리 마스터하시기를 빌겠습니다.”
[블러드: 20일 안에 자리를 잡겠습니다.]
“하핫! 그래, 이왕 대장장이를 했으니 마스터해봐야지. 잘 가라.”
“예, 다음에 뵙겠습니다.”
전과 같은 웃음을 흘리며 손을 흔드는 해파토스를 뒤로하고 마법진에 발을 올려놓자 ‘후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
“이제 오셨네요?”
게임을 접을 때까지 익숙해지지 않을 듯한 워프 후의 현기증에 눈을 비비고 나자 한가로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폭스가 나를 향해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으음…….”
폭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점검하는 내 입에서 짜증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숲보다는 늪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태고의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칙칙한 기운과 찝찝한 습기는 뜨거운 열을 토해내는 유토리안보다 짜증을 높여주고 있었다.
워프의 도착점이 작은 호수임에도 불구하고 찝찝함은 전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폭스, 마을의 위치는?”
“잠시만요.”
마을의 좌표와 현재 일행의 좌표를 확인하는 듯 혼자서 뭔가를 중얼거리며 허공에 손짓을 하던 폭스가 오른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네요. 대충 10시간 정도만 걸어가면 될 것 같은데요?”
“으윽, 10시간…….”
정말 다행이라는 듯한 폭스의 말에 연신 투덜거리던 카나리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카나리아를 향해 힘내라는 듯 웃음을 흘린 폭스가 말을 이었다.
“다행히 마을이 숲의 외곽에 있어서 별다른 몬스터를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오크나 수인족만 제외하면 말이죠.”
티나를 바라보며 수인족을 운운하는 폭스의 말에 나는 물론이고 티나와 카나리아의 얼굴에도 놀란 기운이 서렸다.
“태고의 숲에 수인족이 살고 있나?”
“예, 데스 랜드보다는 적은 수가 살고 있지만 그래봤자 겨우 1천 명 차이입니다. 거의 20%가 유저들이라는 점을 본다면 어떤 면에서는 데스 랜드의 수인족들보다 강합니다.”
“더 말해봐라.”
“현재는 ‘남림야수왕’이라는 웨어타이거 유저에 의해 통일된 상태입니다. 레벨이 높은 유저는 남림야수왕뿐이며 중요한 자리는 거의 NPC들이 맡고 있습니다. 종류는 데스 랜드와는 달리 웨어울프와 웨어타이거, 이 두 종류가 거의 9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으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폭스를 보는 내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 밑에 있는 전사들 말고도 수인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갑작스런 수인족의 등장은 당황스러웠다.
거기다 그 수가 적다면 모를까 겨우 1천 명 차이였다.
거기다 폭스의 말에 따르면 그중 유저가 20%였다.
정해진 명령에만 따르는 NPC와 갑작스런 상황에도 좀 더 좋은 결과를 위해 움직일 줄 아는 유저는 그 차이가 명확하다.
‘제길! 어쩔 수 없이 일시적으로 동맹해야 하나.’
수인족들을 데스 랜드처럼 점령하자니 복수를 앞두고 쓸데없이 전사들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방법은 일시적인 동맹뿐이다.
물론 그쪽 수인족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다행히 우두머리가 우직하다 못해 무식한 수인족 NPC가 아닌 유저라면 말이 통할 것이 분명했다.
그 어떤 우두머리라도 뻔한 결과를 가진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도움을 받는 것은 무리일지라도 적어도 방해만 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일단 마을로 이동한다.”
스르릉.
혹시 모를 몬스터의 습격을 대비해 도를 꺼내 들고 폭스의 곁으로 다가서자, 나와 마찬가지로 단검을 손에 쥔 폭스가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손으로 가리킨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한 마리 뱀을 연상시키는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호수를 벗어나 숲을 누비는 폭스의 모습을 본 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질퍽한 진흙임에도 불구하고 폭스가 움직인 곳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거기다 소리 또한 나지 않았다.
‘삼무보인가.’
내가 폭스와 교환한 삼무보가 분명했다.
아무리 스페셜 직업인 섀도우 어쌔신이라고 할지라도 저 정도 움직임은 무리였다.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숲을 누비던 폭스가 자리에 멈춰 손을 들자 폭스의 뒤를 따르던 나를 비롯한 일행 또한 걸음을 멈췄다.
[폭스: 몬스터입니다. 10m, 8m, 6m, 4m!]
긴장감이 담긴 목소리를 내뱉은 폭스가 단검을 잡은 손을 가슴 높이로 들고 점차 다가오는 적을 경계했다.
대형 몬스터인지 쿵쿵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지금입니다!”
쿠워어엉!
우드드득.
꽝!
묵직한 비명과 함께 수풀을 헤치고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의 정체는 바로 우드 골렘(Wood golem)이었다.
나타나자마자 손에 든 거대한 통나무로 바닥을 헤집어놓은 우드 골렘의 모습에 카나리아의 입에서 경악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우드 골렘?”
우드 골렘이라면 주술사 유저가 소환할 수 있는 소환수로 몸집은 3m가 조금 넘고 몸이 단단한 나무다.
언뜻 보면 NPC인 엔트를 연상시키는 이 소환수는 소환수 중에서도 중하급으로 힘의 원천인 주술사만 재빨리 처리한다면 상대하기 쉽다.
“근처에 주술사가 있다! 폭스, 티나. 찾아라!”
소환수가 있다면 멀지 않은 곳에 주술사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와 카나리아보다 이동속도가 빠른 폭스와 티나가 주술사를 찾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카나리아! 오른쪽을 맡아라!”
“믿음이여, 나의 주먹에 깃들어라! 믿음이여, 나의 몸에 깃들어라! 믿음이여, 나의 발에 깃들어라! 믿음이여, 나의 심장에 깃들어라!”
우우웅.
몽크가 처음으로 배우는 기본적인 보조 마법을 몸에 시전한 카나리아가 그 여세를 몰아 우드 골렘을 향해 질풍처럼 몸을 날렸다.
나 또한 우드 골렘을 향해 몸을 날리며 도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은은한 마기를 내뿜던 도가 짙은 마기를 내뿜으며 붉은색 기운에 휩싸였다.
가장 먼저 우드 골렘과 부딪친 것은 기세 좋게 앞으로 나간 카나리아였다.
쿼어어어!
“크하아압!”
꽈강.
퍼엉!
은은한 빛을 뿌리며 공기를 가른 카나리아의 주먹이 통나무와 부딪치자 우드 골렘이 들고 있던 통나무가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조각으로 나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와 동시에 핏빛 도기에 휩싸인 내 도가 우드 골렘의 무릎을 파고들며 두꺼운 종이를 찢는 듯한 거친 소음을 흘렸다.
우지직.
콰당.
쿼어어어!
섬뜩한 소리와 함께 오른쪽 무릎이 통째로 뜯긴 우드 골렘이 피 대신 짙은 녹색의 기운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은은한 신성력이 흐르는 주먹을 부여잡고 주변을 돌며 기회를 노리던 카나리아가 날카로운 기합을 내뱉으며 무방비 상태의 우드 골렘의 등에 주먹을 내질렀다.
“끼야압!”
퍼엉.
퀴엑!
카나리아의 주먹이 부딪친 곳은 등이건만 우드 골렘은 그 반대편인 배가 터져 녹색의 기운을 뿌리고 비명을 질렀다.
재빨리 주먹을 거둔 카나리아가 몸을 날려 일정 거리를 벌리고는 다시 신성력을 짜내어 주먹에 둘렀다.
[블러드: 내가 놈을 유인하마. 마지막 일격을 가해라.]
“파천기.”
우우웅.
짐짓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카나리아를 뒤로하고 파천기를 시전하자 손목 부근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빛이 핏빛 도기와 어우러져 기묘한 빛을 그려냈다.
꾸욱.
우우웅.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도를 감싼 도기와 파천기가 내 힘에 공명하듯 낮게 울부짖었다.
마침내 충만한 힘을 머금고 팽창한 몸이 우드 골렘을 향해 쏘아지는 순간, 내 입에서 제왕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허어어엉!”
퀴익!
우지지직.
짙은 녹색의 기운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던 우드 골렘이, 사람으로 치자면 배꼽 부근부터 파고들어 정확히 일직선으로 가슴까지 가르는 내 도에 비명을 지르며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와 동시에 빛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곧 엄청난 폭음과 함께 일그러진 우드 골렘의 머리가 산산조각으로 나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크윽, 빌어먹을 자식.”
온몸을 때리는 우드 골렘의 몸을 이루었던 나뭇가지들을 피하며 인상을 구기고 도를 회수하려는 순간, 폭스와 티나가 사라졌던 방향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흘러 나왔다.
소환수가 죽었다면 그것을 소환한 주술사 또한 엄청난 타격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카나리아! 따라와라.”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우드 골렘의 몸을 신기한 듯 툭툭 건드리는 카나리아를 뒤로한 채 도를 들고 재빨리 비명의 근원지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막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흑발의 이십대 중반 NPC의 배에 박힌 단검을 뽑은 폭스가 기묘한 웃음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다 곧 내 시선을 피했다.
티나 또한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가 묻은 단창을 등 뒤로 숨기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이해하지 못할 둘의 행동에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막 모래가 되어 사라지던 달트란이라는 이름의 NPC가 입을 열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남림야수왕께서 너희들에게 복수를… 쿨럭.”
쿵!
“그, 그게 무슨…….”
달그닥.
달트란의 말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생전에는 달트란이었던 모래 더미에서 편지로 보이는 짙은 검은색의 가죽 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가죽 뭉치의 표면에는 투박하게 쓴 글과 붉은색의 인장이 있었다.
그것을 본 내 입에서 앓는 신음이 절로 흘러나옴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허무함과 분노가 몸을 휘감았다.
“끄응… 폭스, 티나. 설명해라!”
“하, 하하… 그게 말이죠…….”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것인지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폭스를 지나쳐 검은색 가죽 뭉치를 주은 카나리아가 표면에 써 있는 투박한 글씨를 읊조렸다.
“동…맹…요청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