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5 퀘스트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던전을 울렸다.
“아버지여! 파멸은 창조의 또 다른 뜻! 모든 파멸을 담당하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이 앞에서 신음하는 아버지의 자식에게 또 다른 이름의 안식을 주소서! 리스토어(Restore)!”
이내 여인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체력이 급속도로 차올랐다.
리스토어는 힐(Heal)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치료 마법이다.
‘라그아노의 성직자?’
여인이 외치는 주문은 분명 다아리엘이 아닌 라그아노를 따르는 성직자의 주문이었다.
치료의 성향을 많이 띠고 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는 다아리엘을 따르는 성직자들과는 달리 공격용 스킬과 공격 보조 스킬을 많이 가지고 있는 라그아노의 사제들은 전투 사제라는 설정 상, 주문이 간결하고 짧았다.
그렇다고 치료용 마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 또한 몇 개의 치료용 마법은 가지고 있다.
“큭.”
거친 손놀림으로 목에 박힌 침을 뽑아 부러트리는 내 눈으로 나에게 해독 마법과 치료 마법을 걸어준 라그아노의 사제를 포함해 4명으로 이루어진 파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유저는 나와 같은 대도를 휘둘러 커다란 망치를 들고 있는 게르맨더 전사를 견제하는 붉은 머리의 전사 유저였다.
게리롱과 비슷할 정도로 작은 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적발의 사내가 들고 있는 거대한 대도에 사내의 키가 작은 것인지 대도가 큰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대도를 한손으로 휘두르는 사내의 힘에 놀라는 것도 잠시, 사내의 입에서 터져 나온 외침에 내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낙격참산(斬山斬山)!”
푸화악.
-크륵!
사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은한 붉은 빛으로 빛나던 사내의 도가 허공에서 직격으로 떨어져 게르맨더 전사의 몸을 양단했다.
이마에서 시작해 턱까지 가로지르는 한 줄기 혈선을 시작으로 피분수룰 뿜어대는 게르맨더 전사의 모습에 내 입에서 경악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대력파산도법(大力破山刀法)!”
작은 키의 사내가 쓴 초식은 분명 내가 배운 삼살도법보다 한 단계 위인 파산도왕(破山刀王) 철두심(鐵頭深)의 대력파산도법이 분명했다.
내 놀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나를 치료한, 라그아노를 따르는 사제 특유의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는 금발의 여인을 제치고 나온 10대 중반의 여자아이가 손에 들린 하프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음귀소소후(淫鬼笑笑吼)!”
깔깔깔깔!
호호호호!
-크르륵!
-크엑!
여자아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던전 곳곳에서 음산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한참을 던전을 진동시키는 여인들의 웃음소리에 8마리는 되어 보이는 게르맨더족들이 거품을 물며 무릎을 꿇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음유시인에게 저런 스킬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있다면 단 하나, 대력파산도법과 마찬가지로 절정무공으로 분류 되어 있는 천귀소소공(千鬼笑訴功)뿐이었다.
“유령음마(有靈音魔) 유혼금(有魂琴)의 천귀소소공까지……!”
“괜찮으세요?”
경악에 빠져 있는 나를 향해 다가온 여인의 목소리에 경악으로 번졌던 내 얼굴이 굳었다.
나에게 다가온 금발의 여인은 바로 나를 도와 준 라그아노의 사제였다.
“괜찮…습니다.”
평소대로 무심코 반말을 내뱉으려다 곧 실수를 깨닫고는 말을 고치며 덤덤한 얼굴로 포션을 꺼내 들이켜는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여인의 반응에 내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에게 한차례 더 치료 마법을 시전한 여인이 뒤를 힐끗 돌아보자 조용히 서 있던 푸른 머리의 사내가 앞으로 나서 게르맨더족을 처리하는 붉은 머리의 사내를 도왔다.
비교적 가벼운 옷차림과 장검을 보니 아마 워리어 계열의 직업을 가진 유저인 듯했다.
뒤늦게 나간 푸른 머리의 사내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는지 짙은 검기를 두른 검으로 게르맨더족의 목을 가르며 가끔 게르맨더 주술사가 소환한 벌레들을 쳐내고 있었다.
미친 듯이 도를 휘두르는 붉은 머리 사내와 한 번의 검으로 확실하게 처리하는 푸른 머리 사내의 뒤에는 음유시인으로 보이는 소녀가 연신 성가(聖歌)를 부르며 능력치를 높여주고 있었다.
내 옆에 있는 여인이 하는 일이라고는 가끔 치료 마법을 걸어주는 것뿐이었다.
“횡격참산(橫山斬山)!”
서걱.
-크륵!
붉은 머리 사내의 초식을 끝으로 허리가 갈라진 게르맨더 주술사가 처연한 비명과 함께 모래가 되어 사라지자 그제야 소란스러웠던 던전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으하하! 어떠냐! 루안 대륙 파산도왕의 실력이!”
“시끄럽다.”
‘카나리아에 이어 또 한 명 있군.’
염환과 닮은 사람을 한 명 더 있다는 생각에 내 입가가 비틀렸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익숙한 동작으로 도를 갈무리한 붉은 머리 사내가 다시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이 형님의 무공이 부러워서 그러는 거냐? 으하하하.”
“시끄럽다.”
“맞아요. 발록 오빠는 너무 시끄러워요!”
“허억. 팅커벨, 너마저……!”
소녀의 말에 붉은 머리 사내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푸른 머리 사내를 노려봤다.
‘재미있는 일행이군.’
절정무공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떠나 폭스와 카나리아만큼이나 재미있는 일행의 모습에 내 얼굴에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말하는 것을 보니 붉은 머리 사내의 아이디가 발록인 듯했고 천귀소소공을 익힌 소녀의 아이디가 팅커벨인 듯했다.
“넌 너무 시끄럽다.”
“우코바치 님은 좀 닥치셈.”
“큭! 내가 그런 말투 하지 말라고 경고 했을 텐데……!”
장난스러운 발록의 말투에 우코바치라 불린 푸른 머리의 사내가 으르렁거리며 차가운 눈을 번뜩였다.
“모두 그만 해! 거기다 발록! 내가 그런 말투 쓰지 말라고 했지! 팅커벨이 보고 배우면 어쩌려고!”
“헉! 아, 알겠어, 누나.”
어느새 다가와 여인을 향해 멋쩍은 웃음을 흘리는 발록의 모습에 내 얼굴이 다른 의미로 구겨졌다.
‘누나라고?’
발록의 얼굴을 보면 아무리 적게 봐줘도 25살이 넘어 보였다.
팅커벨이라 불리는 소녀는 십대 중반처럼 보였고 우코바치라 불리는 사내 또한 20살이 갓 넘어 보일 정도였다.
거기다 아직 이름을 모르는 여인은 많이 봐줘야 25살이었다.
“누나는 매일 우코바치 편만 들어주고…….”
“내가 언제! 네가 먼저 이상한 소리만 하니까 그렇지!”
날카로운 여인의 말에 여인의 옆에 있던 우코바치라 불리는 사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시끄러운 소리다.”
“일단 우코바치 님은 좀 닥치라니까염?”
“얘가 정말……!”
“으음.”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자기들끼리 서로 말싸움을 벌이는 모습에 내 입에서 절로 불편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이내 그제야 나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발록이라 불리는 사내를 향해 눈치를 주던 여인의 목례를 하며 입을 열었다.
“전 마리아라고 합니다. 이거 정말 죄송해요. 동생들이 조금 소란스러워서…….”
“동생?”
정말로 동생이냐는 듯, 의구심을 담은 내 말에 잠시 멈칫하던 금발의 여인 마리아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모두 같은 고아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 제 동생이지요.”
“누나! 왜 처음 보는 자식한테 그런 것까지……!”
“넌 조용히 해! 흠흠, 죄송해요.”
“아닙니다.”
오랜만에 하는 존댓말에 불편한 신음을 흘리자 나를 바라보던 마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기, 어디 편찮으세요? 치료 마법이라도……?”
“아닙니다. 근데 요즘 고아원에서는 캡슐까지 지원합니까?”
“그건…….”
갑작스런 내 질문에 마리아가 말끝을 흐렸다.
게임을 즐기기 위한 캡슐기 한 대 값은 100만 원.
거기다 계정 값까지 하면 거의 110만원이다.
아무리 복지 시설이 발달했다지만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그 비싼 캡슐기까지 사주면서 게임을 하라고 할 고아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저희는 게임을 하면서 모은 아이템을 현금으로 팔아서 고아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4대의 캡슐기를 샀지요. 이제 궁금증이 풀리셨나요?”
새침한 표정으로 말을 맺는 마리아의 모습에 내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제길.’
내 앞에 있는 이 여인은 내가 상대했던 NPC가 아니라 정말로 살아 있는 유저였다.
지금 내가 한 질문은 상당히 실례되는 질문이었다.
“미, 미안합니다.”
어눌한 사과에 여인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며 여인의 뒤에서 경계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두 사내와 소녀의 눈빛 또한 풀어졌다.
“아니에요. 근데… 혼자서 4층까지 오시다니. 레벨이 높으신가 봐요?”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에 마리아의 뒤에서 도를 만지작거리던 발록이 얼굴을 찌푸리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누나 설마……?”
“넌 조용히 해! 어차피 크레이언 님이 없어서 가뜩이나 전사가 모자란 판인데!”
이내 발록을 향해 따끔한 일침을 가한 마리아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쓰리 스타 초급 이상은 되시는 거 같은데, 다른 파티가 없다면 저희랑 함께 파티 하시겠어요?”
“난…….”
“오늘이 바로 일주일에 한 번씩 용마인이 출몰하는 날인데 저희 쪽 전사 한 분이 모자라서 그러는데 같이 사냥해주세요. 아이템은 님이 보시는 앞에서 배분할 테니까요.”
레벨 업을 위해 막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던 내 입이 용마인이라는 단어에 멈췄다.
용마인이라면 과거에 잡으려다 잡지 못한 보스 몬스터가 아닌가.
레벨 업과 호기심이 팽팽히 겨루다 마침내 호기심이 레벨 업을 이기고 위로 떠올랐다.
“음, 알겠습니다.”
[마리아 님이 파티를 신청하였습니다. 동참하시겠습니까?]
“동참.”
내 앞에 나타나는 홀로그램의 메시지에 동참 여부를 밝히자 ‘띠리링’ 하는 종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파티명 ‘아름다운 마리아 공주님 만세’에 동참하였습니다.]
“큭.”
우스꽝스러운 파티명에 내 입에서 절로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리는 나를 바라보던 마라이가 그제야 파티명을 생각해냈는지 얼굴을 붉혔다.
“푸하하하! 샘통이다.”
붉어진 얼굴을 애써 가리는 마리아를 제치고 앞으로 나선 붉은 머리의 사내, 발록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며 호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발록. 보다시피 절정무공인 대력파산도법을 익히고 있지. 남자라면 역시 도지! 푸하하하!”
마치 오래된 친구라도 되는 양, 익숙하게 반말을 하며 손을 내미는 발록의 모습과 염환 그리고 카나리아의 모습이 겹쳐져 나 또한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내 나와 악수를 나눈 발록이 한쪽으로 비켜서자 발록과 말싸움을 하던 푸른 머리의 사내, 우코바치가 작게 목례를 하며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딱딱한 목소리를 흘렸다.
“우코바치라고 합니다. 클래스는 프리 나이트(자유 기사)입니다.”
간단한 소개를 끝으로 우코바치가 자리를 비키자 핑크빛 머리를 가진 소녀, 팅커벨이 다가와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난 팅커벨이라고 해요. 클래스는 음유시인! 보다시피 저기 발록 오빠랑 같은 절정무공인 천귀소소공을 익혔으니까 알아서 잘하라고요!”
절정무공서라면 현금으로도 유니크 아이템과 맞먹는 가격의 아이템이 분명했다.
만약 절정무공을 판다면 고아원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팔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계속해서 게임을 하면서 돈을 벌겠다는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렇다면 돈으로 유인을 하더라도 발록과 팅커벨은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검은 사자 간부들을 상대하기에는 현재 내 밑의 족장들로는 어림도 없었다.
카인이나 티나는 충분히 강했지만 다른 족장들은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검은 사자의 간부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강함을 가진 유저를 끌어들여야 한다.
‘그 유저가 무공을 익혔다면 더 좋고 말이야.’
“이름은 블러드, 직업은… 용병입니다.”
약간 멈칫하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발록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남자라면 용병이지! 거기다 도까지! 으하하! 이거,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났구만!”
발록의 직업 또한 용병인지 용병이라는 직업에 한바탕 칭찬을 늘어놓던 발록이 마리아의 날카로운 눈빛에 찔끔하며 재빨리 팅커벨의 뒤로 물러섰다.
그런 발록을 향해 눈을 흘기던 마리아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직업이 용병이신가요?”
과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마리아가 약간은 불만이라는 듯, 우코바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용병이라는 직업 자체가 별달리 쓸 만한 스킬도 없고 그렇다고 체력이 많은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 막강한 공격력뿐이다.
그런 주제에 전투의 가장 앞에서 싸우니 가장 손이 많이 가는 클래스가 바로 용병이다.
“몇 급 용병이신가요?”
“…B급 용병입니다.”
원래 레벨은 투 스타 후반이지만 마리아가 오해하는 레벨인 쓰리 스타 초급의 용병이라면 B급 정도가 적당했기에 대충 B급 용병이라고 둘러대자 일행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5층으로 가볼까요?”
“으하하! 드디어 용마인인가? 이번에는 빵빵한 아이템 좀 주려나?”
커다란 웃음을 터트린 발록이 도를 들고는 일행의 가장 앞에서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이어 일행이 하나 둘 움직였다.
처음 오는 길이 아닌지 익숙한 움직임으로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 곳만 골라 이동한 발록이 어느새 도착한 5층 입구에 멈춰서 득의양양한 미소를 흘리며 우코바치를 바라봤다.
정작 당사자인 우코바치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손에 든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포지션을 짜볼까요? 일단, 블러드 님과 발록이 가장 선두에 서는 것으로 하죠.”
“맡겨만 달라고!”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는 발록과는 달리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 동의에 작은 웃음을 흘린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 다음은 우코바치, 팅커벨. 그리고 제가 가장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겠습니다. 모두 알겠지만 보스 몬스터를 잡는 데는 무엇보다 팀플레이가 중요하니까 개인행동은 금물입니다.”
흠잡을 데 없는 마리아의 명령에 일행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나와 발록이 선두에 섰고 그 뒤에는 우코바치와 팅커벨이, 그리고 마지막에는 파티의 치료를 담당하는 마리아가 서서 제법 그럴싸한 진영을 만들었다.
수가 적은 것이 걱정이지만 일행 모두 레벨은 쓰리 스타 초급 이상은 되어 보이니 적어도 허무하게 죽을 일은 없었다.
“그럼 움직이죠.”
마리아의 말을 시작으로 일행의 선두에 있는 발록과 내가 가장 먼저 5층으로 내려가 혹시 모를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했다.
역시 보스 몬스터가 나오는 층이라서 그런지 4층처럼 무작위로 몰려다니는 게르맨더족은 물론이고 혼자 다니는 게르맨더족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발록: 몬스터 없음. 내려와.]
5층의 안전함을 확인한 발록의 말에 4층에 남아 있던 우코바치와 팅커벨, 마리아가 나무 계단을 지나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5층을 슬쩍 둘러 본 마리아가 발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용마인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고 있어?”
“물론! 입구에서 10분 정도만 가면 되니까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가자!”
자신 있는 목소리로 소리친 발록이 도를 들어 전방을 겨누며 걸음을 옮겼다.
나 또한 도에 묻은 살점과 피를 털어내고는 발록을 따라붙었다.
이내 긴장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던 발록이 손을 들어 일행을 제지하고는 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전방에 게르맨더 5마리.”
조심스러운 발록의 모습에 뒤에서 따라오던 팅커벨이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해요?”
“물론. ‘식스 센스’에 정확히 잡혔다고. 아니면 내가 장을 지진다! 그렇지?”
식스 센스라면 궁수와 용병에게만 주어지는 특별 퀘스트로 주어지는 스킬이었다.
아마 내가 식스 센스를 배웠다고 생각했는지, 발록이 나를 향해 확인하듯 물었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발록을 보던 팅커벨이 ‘쳇’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들린 하프를 튕기자 맑은 소리와 함께 낮은 하프 소리가 던전을 맴돌았다.
디리링, 디리리링.
“아파하지 말아요, 그대를 바라보는 간절한 내 소망. 슬퍼하지 말아요, 그대를 바라보는 간절한 내 소망. 바람의 정령이 전해준 내 소망, 그대의 품으로 스며들어 한 줌의 용기로 변하길 간절히 바랄게요. 모든 것이 그대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내 소망…….”
아직 사춘기가 지나지 않은 여자아이 특유의 높은 목소리에 맞춰 은은하게 뿜어져 나온 빛이 나와 발록, 그리고 우코바치의 몸으로 스며들며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아버지여! 파멸은 창조의 또 다른 뜻! 모든 파멸을 담당하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간절히 바랍니다. 파멸의 길을 거부하고 사도의 길을 걷는 무지한 적들에게 심판의 철퇴를, 파멸의 길을 걷는 당신의 자식에게 용기의 방패와 승리의 갑옷을! 블레스(Bless)!”
우우우웅.
축복이라는 이름답게 팅커벨의 성가로 상승한 능력치가 다시 한 번 대폭 상승했다.
몸을 타고 흐르는 충만한 힘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도를 고쳐 잡자 나와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던 발록이 도를 들고 조용히 읊조렸다.
“천지패력(天地敗力)의 술(術).”
우우웅.
발록의 몸을 뒤덮는 짙은 황색의 기운에 내가 막 의문을 토하려는 순간, 발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건 대력파산도법을 익히면 익힐 수 있는 술법인데, 시전자의 힘을 일정만큼 올려주는 술법이지. 아쉽지만 이건 대력파산도법을 익힌 사람만 사용가능한 거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흘리는 발록의 말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격 무공에 저런 술법이 있었나?’
업데이트된 11가지 무공 중, 술법은 초절정무공서인 역천불살술법(逆天佛殺術法)뿐이었다.
내가 익히고 있는 삼살도법 또한 발록이 익히고 있는 대력파산도법과 같은 시전의 능력을 올려주는 보조 술법이 없었다.
‘절정무공은 절정무공이란 말인가.’
“으음.”
아쉬움에 낮은 한숨을 흘리는 내 반응에 탄력을 받은 발록이 팅커벨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팅커벨이 익힌 천귀소소공은 오로지 공격용 노래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데미지가 거의 투 스타 전사와 맞먹을 정도지. 거기다 전사와는 다르게 노래 자체가 대 범위 공격도 가능하고 지속적 데미지까지 주지. 거기다 정신적 데미지까지 주니까 실질적으로 나와 우코바치보다 더 많은 데미지를 입히는 사람이 바로 팅커벨이라고 할 수 있어. 거기다 천귀소소공뿐 아니라 본 직업인 음유시인 또한 레벨이 높아서 성가나 저주를 퍼붓는 노래 또한 무시할 수 없지.”
“흥, 알아서 모시라고요!”
고개를 치켜드는 팅커벨을 향해 콧방귀를 뀐 발록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봤자 한 번 맞으면 피가 반이나 떨어지는 주제에 말이 많구나! 으하하! 나를 봐라. 막강한 데미지! 강인한 체력!”
근육을 자랑하는 보디빌더들처럼 갖가지 자세를 잡으며 ‘읏차! 읏차!’하는 소리를 흘리는 발록의 모습에 팅커벨은 물론이고 마리아와 우코바치, 그리고 내 얼굴마저 구겨졌다.
‘대체 이 자식은…….’
어떻게 보면 염환이나 카나리아보다 더 바보처럼 보이는 발록의 모습에 인상을 구기는 것도 잠시, 전방에서 느껴지는 짙은 마기에 손에 든 도와 내 몸을 감싼 갑옷이 웅웅 하고 낮게 진동했다.
“놈들이 온다.”
낮게 읊조리는 내 말에 방금까지 하하호호 하며 떠들던 일행들이 얼굴을 굳히며 각자 무기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방금 전의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분위기였다.
이에 놀란 마음을 감추며 낮게 우는 도를 고쳐 잡고 기묘한 표정을 하는 발록의 곁에 다가갔다.
“으음… 이상한데?”
“뭐가?”
낮은 신음을 흘리던 발록이 팅커벨의 물음에 짙은 마기의 근원지인 전방의 검은 안개 너머를 바라보며 미간을 구겼다.
“분명 방금 전에는 5마리였는데 지금은 6마리가… 어라? 7마리였나? 응? 지금은 8마린데?”
“똑바로 말해라.”
“제길! 잠깐만! 8마리? 9마리? 10마리?”
우코바치를 향해 거친 일갈을 토한 발록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의를 둘러봤다.
발록의 입에서 점차 늘어나는 수에 일행의 표정이 굳어졌다.
“모두 대열을 정비하고 팅커벨은 노래를 준비해라.”
“응!”
다른 일행에 비해 다소 침착한 모습으로 명령을 내리는 마리아의 모습에 팅커벨이 하프를 들고 우코바치의 뒤로 다가섰다.
우코바치 또한 푸른빛의 검기를 검에 일으켜 앞을 노려봤다.
“제길. 4마리… 5마리… 3마리… 30마리?”
우우웅.
긴장한 음성을 토해내는 발록의 말에 맞춰 내 손에 들린 도가 거센 진동을 흘렸다.
점점 거세져가는 진동에 의문을 흘린 순간, 불안한 기색으로 앞을 노려보던 발록이 붉은색의 도기를 일렁이며 도를 휘둘렀다.
“30마리?”
까강!
-크워어어!
검은 안개를 가르고 나타난 거대한 무언가와 발록의 도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토해냈다.
그와 동시에 던전을 진동하는 우렁찬 괴성을 터트린 검은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마인!”
-크워어!
긴장한 표정으로 용마인을 부르짖는 발록에게 대답이라도 하듯 우렁차게 울부짖은 검은 물체의 정체는 바로 용마인이었다.
3m는 가뿐히 넘는 거대한 덩치와 다른 게르맨더 족과는 다르게 중요한 부분만을 가린 갑옷을 걸친, 그리고 거의 용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2m는 될 법한 거대한 도를 휘두르는 용마인의 모습에 내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과연…….’
식인마의 거처의 최종 보스인 용마인이라면 게르맨더 전사 30마리 정도의 위압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적의 존재가 아닌 적이 내뿜는 기세로 수를 파악하는 식스 센스는 정확했다.
다만 발록이 잘못 해석한 것이지.
-크르르. 인간들! 짙은 피 냄새가 나는구나. 좋다, 너희들의 피로 나의 저주받은 병을 완전히 고쳐야겠다!
쿠구궁.
살기어린 외침을 토해낸 용마인이 한 발 내딛자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커다란 소리를 터트렸다.
[마리아: 내가 마법을 사용하면 모두 공격이다!]
“아버지여! 파멸은 창조의 또 다른 뜻! 모든 파멸을 담당하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간절히 바랍니다. 파멸의 길을 거부하고 사도의 길을 걷는 어리석은 적에게 단죄의 주먹을 내려치소서! 플라잉 피스트(Flying fist)!”
우우웅.
꽈앙!
-크허억.
마리아의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허공에 모인 검은색의 기운이 거대한 크기의 주먹으로 변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용마인의 상체를 후려쳤다.
갑작스런 공격에 꽤나 큰 데미지를 입었는지 도에 의지해 비틀거리는 용마인을 향해 발록의 공격이 이어졌다.
“횡격참산(橫山斬山)!”
휘리릭.
푸확.
커다란 도에 걸맞지 않은 가벼운 도 놀림에 비틀거리던 용마인의 허벅지에서 피가 솟구쳤다.
이내 횡격참산의 반동으로 한 바퀴 몸을 회전한 발록이 위로 치켜들었던 도를 내려찍었다.
내가 가장 먼저 본 초식인 낙격참산(落格斬山)이었다.
째쟁!
“헉.”
득의양양한 미소를 흘리는 것도 잠시, 재빨리 몸을 빼는 용마인 덕에 애꿎은 땅과 부딪힌 도가 불꽃을 흘리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토해냈다.
-크르릇!
쐐애액.
이내 한 손으로 허벅지를 감싼 용마인이 손에 든 도를 휘두르자 길이만 2m가 넘는 도가 공기를 찢으며 발록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갑작스런 용마인의 반격에 발록의 입에서 절로 헉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읍!”
까강!
낮은 기합과 함께 휘두른 도에 막 발록의 머리를 쪼개려던 용마인의 도가 힘을 잃고 튕겨 나갔다.
체계적으로 스탯을 투자한 발록과는 달리 오로지 힘에만 투자한 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크르릇! 강한 인간부터 죽여 그 힘을 먹어주마!
내 심장을 노리고 뻗어진 묵직한 손에 재빨리 거리를 벌리며 도를 휘두르자 단검을 연상케 하는 용마인의 손톱과 내 도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토해냈다.
이내 양손으로 도를 고쳐 잡은 용마인의 몸을 중심으로 짙은 녹색 기운이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허벅지에 난 상처는 이미 아물어 붉은 혈선만이 남아 그 자리가 상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크와앙!
타닥!
리자드맨을 연상케 하는 길쭉한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용마인의 난폭한 기세에 주춤하는 것도 잠시, 곧 나와 발록의 뒤에서 소름 끼치는 여인의 울음소리와 함께 사이한 기운이 던전을 가득 메웠다.
팅커벨의 천귀소소공이었다.
어흐흑, 어흐흑!
-크르륵!
한 맺힌 여인의 울음소리에 나를 향해 달려들려던 용마인의 기세가 잠시 멈칫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매서운 눈으로 용마인을 노려보던 마리아가 용마인을 향해 두 손을 내뻗으며 사납게 외쳤다.
“바인드(Bind)! 데스 스웜(Death swarm)!”
촤르르륵.
위이잉.
단순히 발을 붙잡아두고자 함인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낮은 서클의 마법이 연속으로 용마인을 향해 쏟아졌다.
가장 먼저 땅에서부터 솟아나온 어둠의 넝쿨이 용마인의 발을 휘감자 넝쿨이 솟아나온 부분에서 튀어나온 기괴한 벌레들이 용마인에게 달려들었다.
게르맨더 주술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벌레 소환과 같은 종류의 마법이었다.
-이따위 하찮은 주술로! 키하합!
와그작, 와그작.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말 그대로 벌레들을 씹어 먹어버린 용마인이 발을 휘감은 넝쿨을 거칠게 뿌리치며 일행을 향해 도를 겨누며 입을 열었다.
-하찮은 인간들! 크릇. 순순히 나에게 먹혀라! 크르릇.
우우웅.
용마인의 분노에 동화된 것인지 용마인의 손에 들린 투박한 대도가 웅웅 하며 울부짖었다.
내가 막 도기를 끌어올리며 몸을 날리려는 순간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내 곁을 지나 용마인에게 쏘아졌다.
타오르는 듯한 발록과는 반대로 바다와 같은 푸른 머리칼.
바로 우코바치였다.
“나의 검은 자유의 검, 나의 동료는 바람, 방랑자의 벗은 자연, 나는 진정한 기사도를 찾아 떠도는 외로운 기사!”
조금은 닭살 돋는 주문과 함께 몸을 날린 우코바치가 전보다 빨라진 속도로 검을 휘두르자 용마인의 몸에 여러 개의 생채기를 남겼다.
-키아악!
쿵, 쿵, 쿵!
재빠른 몸놀림을 이용해 던전을 종횡무진하며 생채기를 남기는 우코바치를 향해 살기 어린 괴성을 토해낸 용마인이 귀찮은 것을 떨쳐버리기 라도 하듯 발을 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일행을 노려보며 숨을 들이키는 용마인의 모습에 내 얼굴이 급속도로 굳었다.
내 생각이 확실하다면 저 행동은 내가 제왕의 포효를 내뱉기 전에 하는 행동이다.
물론 용마인이 제왕의 포효를 사용할 리 없었지만, 쓰리 스타 후반의 레벨이 사용하는 스킬이라면 절대 제왕의 포효의 위력에 뒤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모두 피해!”
-크롸라라라!
쩌저저정.
까강!
“크악!”
데스 샤우트(Death shout), 일명 ‘죽음의 외침’이라고 불리는 이 음파 공격에 가장 먼저 당한 것은 용마인 앞에서 공격을 하던 우코바치였다.
허공에서 일렁이며 사방을 향해 쏘아진 음파와 우코바치의 검이 만나며 격렬한 진동을 흘리는 것도 잠시, 이내 우코바치의 검이 산산조각으로 부러져 허공으로 비산했다.
푸푸푹.
-크르륵!
그중 몇 개의 검 조각이 죽음의 외침을 토해내는 용마인의 몸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덕에 일행을 향해 쇄도하던 음파가 주춤하더니 곧 사라졌다.
“제기랄!”
타닥!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재빨리 용마인 앞에 쓰러져 있는 우코바치를 구해 온 발록이 거친 손놀림으로 도를 고쳐 쥐며 뒤에 있는 마리아와 팅커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작해!”
“응!”
부상당한 우코바치를 지나쳐 발록의 곁으로 다가온 팅커벨이 막 죽음의 외침을 토해내려는 용마인을 향해 스킬을 시전했다.
“천녀혈락소(千女血樂笑)!”
팅커벨의 입에서 나온 날카로운 목소리에 먼저 나타난 것은 바로 사이한 여인의 웃음소리였다.
깔깔깔깔, 깔깔깔!
호호호, 호호호!
머리카락은 모두 뱀으로 되어 있고 혀 또한 뱀의 혀로, 지나치게 붉은 입술과 새하얀 피부, 그리고 눈동자 없이 텅 빈 눈에 새하얀 소복을 입은 반투명한 여인들이 용마인의 곁을 맴돌며 연신 날카로운 웃음을 흘렸다.
정신적 데미지와 물리적 데미지를 함께 주는 것인지 내가 당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 체력이 급속도로 빠져 나갔다.
-크롸라라! 꺼, 꺼져라!
후우웅.
깔깔깔깔, 깔깔깔!
호호호, 호호호!
고통스럽게 외친 용마인이 도를 휘둘렀지만 반투명한 상태의 여인들이 맞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용마인의 반항이 재미있다는 듯이 더욱더 높은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전에는 볼 수 없던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통에 신음하는 용마인을 노려보던 마리아가 양손으로 용마인을 가리키며 힘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여, 파멸은 창조의 또 다른 뜻! 모든 파멸을 담당하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간절히 바랍니다! 사도의 길을 걷는 무지한 적의 발목에 억압의 족쇄를 채워주소서! 매스 디스토션(Mass distortion)! 바인드!”
대상의 몸을 몇 배에서 몇 십 배까지 랜덤의 무게로 무겁게 만드는 매스 디스토션을 시전한 것으로 모자라 바인드까지 시전해 완벽하게 용마인의 발을 묶은 마리아가 나와 발록을 향해 눈짓을 했다.
그리고 이에 고개를 끄덕인 발록이 짙은 도기가 일렁이는 도를 들고 용마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크르릇? 뭐, 뭐냐!
온몸으로 느껴지는 엄청난 무게에 몸을 비틀거리던 용마인이 난폭한 기운을 뿌리는 발록의 도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발록의 도가 용마인의 배와 만나기 직전이었다.
단단한 비늘로 무장한 용마인의 배와 발록의 도가 부딪히는 순간, 발록이 우렁찬 외침을 토해냈다.
“역산흑호조(逆山黑虎爪)!”
부우욱.
-크, 크아아악!
화려한 이름을 가진 초식과 함께 순식간에 몇 배로 부풀어 오른 도기가 3줄기로 나눠져 용마인의 배꼽 부근부터 가슴까지 흉한 상처를 만들었다.
흡사 거대한 호랑이가 할퀸 것 같은 용마인의 상처에 감탄할 시간도 없이 도기를 끌어 올려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용마인에게 몸을 날렸다.
-크르릇?
“크하압!”
콰드득.
뒤늦게 방어하는 용마인의 팔과 내 도가 부딪치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흘렸다.
본래부터 강도가 강한 용마인의 비늘이었지만 도기를 두른 도와 또 그 도를 사용하는 나의 막강한 힘 앞에는 쓸데없는 물건일 뿐이었다.
콰지직.
-크롸라라!
비늘이 짓뭉개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에 이어 들려오는 용마인의 비명.
그 소리를 들으며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곧 ‘부욱’ 하는 소리와 함께 용마인의 오른팔이 툭 떨어졌다.
-크아아악! 이, 인간!
“닥…쳐!”
후우웅.
퍼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반쯤 잘려 흔들리던 용마인의 어깨가 흉하게 짓뭉개졌다.
그 어깨를 부여잡고 기다란 비명을 토해내는 용마인의 옆으로 몸을 날린 발록의 거대한 도가 다시 한 번 허공을 찢었다.
“타오르는 정렬, 끓어오르는 힘!”
꽈앙!
-크르르릇!
용마인의 몸과 부딪혀 이글거리는 불꽃을 흘리는 발록을 흘긴 내가 막 공격을 하려는 순간, 어느새 몸을 회복한 우코바치가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발버둥치는 용마인의 품으로 파고들어 검을 휘둘렀다.
“기사도를 향한 나의 집념! 레이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기사의 마지막 검혼!”
우우우웅.
우코바치의 외침과 함께 우코바치의 검으로 모여든 푸른색의 기운이 하나의 거대한 검의 형태를 만들었다.
이내 전의 그 딱딱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독기 어린 목소리를 토해낸 우코바치가 용마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피피피핏.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에 맞춰 용마인의 몸에 수십 개의 검상이 생기고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환상의 콤비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둘의 공격에 온몸을 흉한 검상으로 도배한 용마인이 비틀거리며 손에 든 도를 힘겹게 들어올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와 동시에 검을 휘두르려던 우코바치의 얼굴이 싸늘히 굳었다.
우코바치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죽음의 외침이었다.
“피, 피해!”
뒤늦은 발록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용마인의 입에서 죽음의 물결이 터져 나왔다.
그에 뒤질세라 팅커벨의 하프가 날카로운 음을 토해내며 죽음의 외침을 향해 천귀소소공을 시전했다.
-크롸라라라!
“천귀비탄소(千鬼悲歎笑)!”
우우웅.
흐흐흐흑!
모든 생명체를 부숴버리는 죽음의 외침과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저주하는 죽은 자들의 울음소리가 던전의 중앙에서 부딪쳐 서로의 힘에 먹혀 사라졌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불길한 고요에 일행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드는 것도 잠시, 던전의 중앙으로 모여드는 짙은 마기에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길! 폭풍 전의 고요였단 말이냐!’
“모두 엎드려!”
“그게 무슨…….”
우우웅.
꽈아아앙!
갑작스런 내 외침에 발록이 막 의문을 던진 순간, 마리아의 마법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엄청난 폭음과 함께 던전의 중앙에서 생성된 짙은 마기가 사방에 퍼졌다.
던전 곳곳에 튀어 나온 나무뿌리와 돌들은 염두에 두지 않고 덮쳐오는 마기를 피해 가까스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내 위로 짙은 마기가 지나쳐 뒤에 있는 커다란 나무뿌리를 바스러트렸다.
한바탕 마기의 폭풍이 몰아친 던전에 적막이 감돌았다.
방금 전의 폭풍 전의 고요와 같은 불길한 고요가 아닌 모든 것이 지나간 후의 평온한 고요에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자 내 곁에서 몸을 숙이고 있던 발록 또한 몸을 일으켰다.
“큭, 방금 그게 뭔지 알아?”
“모른다.”
“제길.”
낮게 욕을 중얼거린 발록이 마기가 한층 더 짙어져 앞도 분간하기 힘은 검은 안개를 도로 흩어버리며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런 마기의 폭풍은 나에게도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용마인의 마기를 담고 있는 죽음의 외침과 죽은 자들의 기운을 담고 있는 천귀소소공의 기운이 서로 부딪치며 카오스 현상을 만들었고, 그 카오스에서 엄청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추리였다.
“누나, 괜찮아?”
“으음… 그래. 나머지 애들은?”
검은 안개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발록과 마리아의 대화에 도를 꺼내들어 안개를 헤치며 막 앞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귀청이 떨어질 듯한 괴성과 함께 무거운 무언가가 나를 향해 쏘아졌다.
방금 전 마기의 폭풍으로 죽었을 거라고 의심치 않았던 용마인의 죽음의 외침이었다.
안개를 흩어버리며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의 음파에 대항해 축축한 공기를 들이마신 내 입에서 우렁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허어어엉!”
쿠구구궁!
제왕의 포효와 죽음의 외침이 만나며 만들어낸 충격에 내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절로 흘러 나왔다.
포션을 꺼내 체력을 회복할 시간도 없이 안개를 가르는 거대한 도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제길!’
“파천기!”
우우웅.
제왕의 포효까지 사용한 이상 계속 속이는 것은 무리였기에 파천기와 함께 도기를 피워 올리자, 검붉은색의 기운이 내 도를 타고 올라 기묘한 색의 도기를 만들었다.
-크르릇! 이, 인간! 크르릇!
이내 안개를 가르고 모습을 드러낸 용마인의 모습에 내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나에게 당한 팔은 둘째 치고 용마인의 온몸에는 엄청난 수의 검상이 있었다.
붉은 피가 뾰족하게 솟아난 비늘 끝에 머물렀다 바닥에 떨어졌다.
-크르륵. 인간… 죽여…….
“죽어라! 폭산첨(爆山尖)!”
붉게 물든 눈으로 힘겹게 중얼거리는 용마인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검은 안개 너머에서 살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검은 물체가 용마인을 향해 쏘아졌다.
검은 물체의 정체는 마리아를 찾아 갔던 발록의 도였다.
푸화악.
-크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을 토해내는 용마인의 배에 파고든 도가 금방이라도 뽑힐 듯 휘청거렸다.
손에 들린 도를 투창처럼 상대에게 쏘아내는 폭산첨(爆山尖)이라는 초식에 안개 너머로 나온 발록이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놈을 죽여!”
“뭐?”
“제길, 놈을…….”
휘리리릭.
퍼억!
붉은 얼굴로 용마인을 가리키며 소리치던 발록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용마인이 던진 무언가가 무거운 파공음과 함께 날아와 발록의 배에 꽂혔다.
바로 발록이 폭산첨이라는 초식으로 던졌던 그의 도였다.
“쿠, 쿨럭!”
털썩.
피를 토해낸 발록이 털썩 주저앉자 도를 집어던진 용마인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바닥에 꽂힌 자신의 도를 들어올렸다.
스르릉.
-크르릇. 크릇! 인간! 죽인다!
“꺄아악. 미, 민철아! 아니, 발록!”
용마인이 살기 어린 목소리를 흘리며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안개 너머에서 나타난 마리아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발록에게 달려가 주저앉았다.
“쿨럭. 누, 누나! 도망… 귀환… 빨리!”
피를 흘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도망을 권하는 발록의 모습에 마리아의 얼굴에는 발록과 같은 다급함이 떠올랐다.
“자, 잠깐만. 누나가 치료해줄게. 아버지여! 파멸은 창조의 또 다른 뜻! 모든 파멸을 담당하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크아아악! 죽어라!
마리아의 손에 모이는 신성력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용마인이 돌연 괴성을 지르며 치료 마법을 시전하는 마리아를 향해 몸을 날려 도를 휘둘렀다. 큭. 제길!
“피해!”
-크르릇!
까강!
2m 가까이 되는 용마인의 거도(巨刀)와 내 대도(大刀)가 만나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역시 내구성이 높은 도라 그런지 인상을 찌푸릴 만한 커다란 소리에도 날이 빠지기는커녕 흠집도 나지 않고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그그극.
“크윽.”
-크르륵!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힘겨루기에 나와 용마인의 입에서 절로 답답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보스 몬스터라는 이름이 허울은 아닌지 팽팽한 힘겨루기 도중에 내 도가 밀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우코바치와 팅커벨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전의 그 마기의 폭풍으로 로그아웃된 것이 분명했다.
이내 눈에 보일 정도로 기울어지는 힘에 내 얼굴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큭, 마리아! 빨리 치료해라!”
“이미 늦었어요!”
“뭐?”
분노 섞인 마리아의 외침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발록의 것으로 보이는 모래가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제길!”
마음 같아서는 레저렉션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발록은 유저다. 죽었다가 약간의 페널티만 입으면 살아 날 수 있는.
내 입에서 터져 나온 욕설에 멍한 표정의 마리아가 움찔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러는 와중에도 도에 가해지는 용마인의 힘은 점점 거세져 가고 있었다.
“큭! 제기랄! 정신 차려라! 그럴 시간에 마법 하나를 더 사용하란 말이다!”
날카로운 내 외침에 멍한 표정으로 사라지는 모래를 보던 마리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봤다.
“알고 있다구요! 잠깐 놀란 것뿐이에요!”
날카롭게 소리친 마리아가 벌떡 일어나 나와 힘겨루기를 하는 용마인을 향해 양손을 뻗으며 주문을 중얼거렸다.
“아버지여, 파멸은 창조의 또 다른 뜻! 모든 파멸을 담당하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간절히 바랍니다. 파멸의 길을 거부하고 사도의 길을 걷는 어리석은 적에게 단죄의 주먹을 내려치소서. 플라잉 피스트!”
우우우웅.
퍼엉!
-크엑!
거대한 주먹 형상의 기운과 충돌한 용마인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무거운 힘이 사라져 나는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휴우… 남은 신성력은 몇이지?”
“거의 바닥났는데…….”
미안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마리아의 모습에 내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제기랄. 하는 수 없군.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먼저 도망가라.”
“안 돼! 아, 아니 그건 안 돼요! 아이템이 코앞인데!”
짙은 살기를 흘리며 도를 고쳐 잡는 용마인이 정말 아이템으로 보이기라도 하는 것인지 안타까운 눈으로 용마인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에 내 얼굴이 황당함이 떠올랐다.
도망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아이템 때문이었다니!
황당하다는 내 기색을 느낀 것인지 용마인을 바라보던 마리아가 멋쩍은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운 아이가 들어와서 분유 값이 부족하단 말이에요! 적어도 레어 아이템 하나는 먹어야 적자가 아닌데…….”
이제는 용마인이 분유로 보이는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용마인을 노려보는 마리아의 모습에 내 얼굴에 떠오른 황당함이 짙어졌다.
레어 아이템이라면 적어도 수십만 원.
아이 분유 값으로는 차고 넘칠 정도였다.
내가 도망친다면 혼자서라도 용마인을 잡을 것 같은 마리아의 모습에 내 입에서 짜증 섞인 한숨이 흘러 나왔다.
“제길, 포션은?”
“최상급으로 3개 정도…….”
“내가 시간을 끌 동안 최대한 빨리 회복해라. 반 정도만 회복하면 바로 말해라.”
“자, 잠깐!”
뒤에서 나를 부르는 마리아를 무시하고 손에 든 도에 마나를 흘려보내자 얼마 남지 않은 마나가 핏빛의 도기로 변해 도를 휘감았다.
“파천기.”
우우웅.
핏빛의 도기 위를 휘감는 검은색의 기운.
그 두 기운이 어우러져 검붉은색의 불길한 색을 만들었다.
도를 감싼 짙은 마기에 나에게 다가오던 용마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노려봤다.
“악왕의 기운!”
우우웅.
내 몸을 완전히 휘감은 짙은 마기에 내 몸의 힘들이 어서 빨리 터트려 달라는 듯이 거세게 꿈틀거렸다.
-크르릇? 동료? 적?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하는 용마인의 모습에 내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용마인 또한 게르맨더족.
게르맨더족이 따르는 악왕이 바로 내 악왕의 기운의 원천인 라데스다.
용마인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내 아무런 공격을 당하지 않고 용마인의 근처까지 다가간 내 입에서 두 번째 제왕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허어어엉!”
-크에에엑!
“꺄아악!”
던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거대한 포효에 용마인은 물론이고 마리아마저 놀랐는지 내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하압!”
푸욱.
고함과 함께 날카로운 찌르기가 방금 전 발록의 도가 박혔던 자리를 또다시 파고들어 붉은 피 분수를 뿌렸다.
비늘이 뜯기고 살이 끊어지는 손끝의 감촉에 온 힘을 다해 손과 함께 몸을 밀어 넣자 3분의 1쯤 파고들었던 도가 용마인의 뱃속으로 미끄럽게 들어갔다.
이내 도와 함께 용마인의 품으로 파고 든 내 입에서 마지막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허어어엉!”
-크라락!
바로 코앞에서 터진 제왕의 포효에 부들부들 떨던 용마인이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물었다.
“회복했어요!”
뒤에서 들리는 마리아의 외침에 황급히 용마인의 배에 박힌 도를 뽑아내자 도가 뽑히는 충격으로 용마인의 눈이 경련을 일으키며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무리였는지 유유히 도를 빼내 몸을 날리는 나를 향해 도를 휘두르지도 못하고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우코바치가 만든 상처 따위는 이미 재생된 지 오래였고 그나마 발록과 내가 헤집어놓은 배의 상처와 팅커벨의 천귀소소공이 만든 정신적 상처, 그리고 내 제왕의 포효에 입은 상처만이 그나마 용마인이 입은 상처의 전부였다.
내가 막 마리아를 향해 다가가는 순간에도 내가 헤집어 놓은 상처는 눈에 보일 정도의 빠른 속도로 아물어가고 있었다.
거의 포 스타 몬스터에 가까운 재생력을 가진 용마인을 재생하기 전에 죽이려면 방법은 단 하나, 삼살도법의 무한참뿐이었다.
“회복된 신성력의 양은?”
“거의 절반 정도 회복됐어요.”
자신 있는 마리아의 말에 내 얼굴에 모처럼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멈추는 즉시 나에게 치료 마법을 사용해라. 조금이라도 늦으면 안 된다.”
“그게 무슨…….”
전과 같은 멍한 표정으로 의문을 흘리는 마리아를 뒤로 한 내 몸에서 라데스의 기운을 띠고 있는 기운이 요동치며 아우성쳤다.
빨리 자신을 내보내달라고, 빨라 나가서 적의 살을 뜯고 피를 마시고 싶다고!
“크크큭. 그래, 날뛰게 해주마.”
우우웅.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학살자의 반지를 착용한 오른손을 용마인을 향해 뻗자, 학살자의 반지가 도와 마찬가지로 웅웅거리며 낮게 진동했다.
“어둠의 마나여, 무지한 적에게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의 공포를 내려주어라! 블라인드니스!”
우우웅.
-크르륵? 누, 눈이!
연이여 울려 퍼진 2번의 저주에 몸을 추스르던 용마인이 돌연 비명을 지르며 눈을 마구 문질렀다.
내 지혜가 높지 않아 걱정했는데 내 걱정과는 달리 저주가 통한 듯했다.
이내 짙은 웃음을 머금은 내 입이 천천히 열리며 흥분에 들뜬 목소리를 토해냈다.
“무한참!”
우우웅.
파앙!
낮은 진동과 함께 공기를 박차고 휘두른 도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르는 것도 잠시, 어느새 다시 돌아온 도가 다시 한 번 무언가를 절단했다.
이번에는 허공이 아닌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용마인의 팔이었다.
콰지직.
-크아악!
콰지직.
비명을 지를 시간도 없이 연이어 번쩍이는 도광(刀光)에 용마인의 몸이 너덜거리는 걸레로 변했다.
콰지직.
-크아악!
휘이잉.
콰지직.
점차 뒤로 물러나는 용마인에 맞춰 내 몸 또한 앞으로 나아가며 끊임없이 도를 휘둘렀다.
무한참의 특성상, 내 체력이 바닥이 나야 멈출 수 있다.
현재 내 체력은 절반을 조금 넘는 상태.
적어도 용마인보다 먼저 멈출 확률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도의 공격에 몸을 맡기던 용마인이 발악이라도 하듯 힘을 쥐어짜 자신의 도를 들어 내 도를 향해 마주 휘둘렀다.
까강!
까강!
깡, 쩌정!
-크르릇?
몇 번의 격돌 끝에 용마인의 도에 금이 가고, 곧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용마인의 도가 바스러져 허공으로 비산했다.
그와 동시에 파천기의 힘으로 2배의 파괴력을 머금은 도가 용마인의 옆구리를 감싼 갑옷과 부딪쳤다.
손에 걸리는 묵직한 느낌에 미친 듯이 움직이던 내 손이 멈칫하는 것도 잠시, 용마인의 갑옷이 내 도가 가하는 엄청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도와 마찬가지로 바스러졌다.
그와 동시에 4배의 파괴력을 담은 도가 용마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콰드득.
-크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도 끝에 걸리는 뼈의 감촉에 도가 멈칫하다가 곧 더 짙은 마기를 머금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화악.
-커헉!
매끄럽게 용마인의 옆구리를 빠져 나온 도가 공포 어린 신음을 흘리는 용마인의 반대쪽 옆구리를 다시 한 번 파고들었다.
콰드득.
-크아아악!
전과 똑같은 상황에 용마인의 입에서 또 전과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옆구리에서 빠져 나온 도가 X자로 휘둘러지며 용마인의 가슴을 걸레조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를 휘둘렀을까.
머릿속을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무차별적으로 도를 휘두르던 내 손이 누군가의 손에 막혔다.
새하얗고 고운 손.
바로 마리아의 손이였다.
“이제 그만 해요! 아이템도 다 부서지겠어요!”
“으음…….”
내 손을 꼭 잡는 마리아의 모습에 내 얼굴에 의문이 잠시 들다가, 곧 1이라는 숫자를 가리키는 체력 게이지에 내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와 동시에 양팔에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에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 나왔다.
“끄응… 치료나 해라.”
“알겠어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을 사용하려던 마리아가 돌연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왜 아까부터 반말해요?”
“그건…….”
뜬금없는 마리아의 말에 막 입을 열려는 내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그런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살짝 웃음을 흘린 마리아가 내 손을 잡았던 손을 놓고 나를 향해 팔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여, 파멸은 창조의 또 다른 뜻! 모든 파멸을 담당하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이 앞에서 신음하는 아버지의 자식에게 또 다른 이름의 안식을 주소서! 리스토어!”
우우웅.
푸스스.
마리아의 목소리에 맞춰 양손으로 신성력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주문이 끝나자 마리아의 손에 모여들었던 신성력이 바람에 흩어지는 모래처럼 흩어졌다.
갑작스런 현상에 마리아와 내 얼굴이 구겨졌다.
“어라? 이게 왜 이러지? 버근가? 기다려봐요. 아버지여, 파멸은 창조의 또 다른 뜻! 모든 파멸을 담당하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이 앞에서 신음하는 아버지의 자식에게 또 다른 이름의 안식을 주소서! 리스토어!”
우우웅.
푸스스.
전과 같이 흩어지는 신성력에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곧 마리아의 얼굴에 즐거운 웃음이 떠올랐다.
“앗싸! 버그 찾으면 3개월 무료 이용권인데! 계정 비용 절약했다! 동영상 촬영해야지!”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동영상 기능을 켜고 나를 향해 치료 마법을 시전하는 마리아의 모습에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온몸을 찌릿하게 울리는 엄청난 마기에 내 얼굴은 물론 해맑게 웃던 마리아의 얼굴 또한 딱딱하게 굳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내 손에 들린 칠흑의 마도는 물론이고 내가 입고 있는 칠흑의 갑옷 또한 거침없이 떨며 어디선가 나타나는 짙은 마기를 경고하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경고가 아니라 경배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무슨…….”
우우우웅.
검붉은 마기를 토해내며 떨리는 내 몸을 바라보던 마리아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용마인의 시체 위로 거대한 크기의 검붉은 포탈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