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7 신급 아이템
[마스터, 알람입니다. 마스터, 알람입니다. 레벨 2의 진동으로…….]
“윽, 제길. 일어났다.”
차가운 미네르바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들이켜자 몽롱했던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자다 일어난 것 때문인지 식욕은 없었기에 대충 영양제와 함께 우유를 마시고 헬스 기계에 몸을 실었다.
요즘 들어 물렁해지는 몸을 의식해서 오늘은 오랜만에 운동하기로 마음먹었기에 게임 접속을 미뤘다.
끼익끼익.
“흐읍, 흐읍.”
내 호흡에 맞춰 근육과 헬스 기계가 비명을 질렀다.
별로 하지 않았음에도 금세 몸이 땀으로 번들거렸다.
잠시 휴식을 하고 다시 헬스 기계에 몸을 올리고 반복 운동을 시작했다.
끼익끼익.
쾅.
“크핫.”
가벼운 경련이 이는 팔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며 욕실로 움직이자 자동으로 온수가 흘러나왔다.
땀에 전 옷을 벗어던지고 욕조에 몸을 누이자 금세 노곤해졌다.
“휴우.”
촤악.
아직도 저리는 팔을 주무르며 욕조 밖으로 나오자 낯선 싸늘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벽에 걸린 수건을 꺼내 몸을 닦고 속옷과 옷을 걸치고 나와 다시 한 번 영양제를 먹고 우유를 들이켠 뒤 캡슐로 걸음을 옮겼다.
익숙하다 못해 친숙한 장비들을 일일이 착용하고 게임 접속을 중얼거리자 곧 내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익숙하게 게임 접속 과정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게임 속의 나, 블러드의 손을 잡자 환한 빛이 나를 덮쳤다.
* * *
“조금 늦으셨네요.”
접속하자마자 들리는 목소리에 흐릿한 눈을 비비고 앞을 바라보자 변함없이 살랑거리는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폭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으음…….”
신음을 흘리며 몸 이곳저곳을 움직여 적응한 뒤 등 뒤에 있는 도를 한 번 쓰다듬고서야 내 마음이 가라앉았다.
현실 시간으로 12시간이 조금 넘게 지났으니 아마 게임 시간으로는 하루가 넘었을 터였다.
모임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
여기서 절망의 숲의 중앙까지 가는 데 대충 하루가 조금 넘게 걸렸으니 지금 출발하면 시간이 딱 맞았다.
내 생각을 눈치 챈 것인지 나를 바라보던 폭스가 입을 열었다.
“절망의 숲으로는 언제 출발하실 건가요?”
“조금 후에 출발하겠다.”
“누구랑 가실 생각이세요?”
어차피 모두 내 손바닥 위에 있는 것들이기에 따로 족장들을 데리고 갈 필요가 없었다.
만약의 상황에는 내가 진정한 암흑투마군단장이라는 직위를 밝히고 모두 굴복시키면 되니 문제 또한 없었다.
“혼자 가겠다.”
“흐음… 알겠습니다.”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폭스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폭스가 ‘후훗’ 하며 작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마스터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약속 시간은 3일 뒤, 장소는 이번에 새로 만든 탑이다. …이상입니다.”
“새로 만든 탑이라니?”
“예, 저희가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마스터가 탑을 부수고 던전을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필드에 탑을 세웠습니다.”
“다른 필드라면?”
“거인의 계곡입니다.”
“아!”
거인의 계곡이라면 거인왕이 나오는 필드로 이브젤 평원에 위치한 고레벨의 필드였다.
고레벨의 필드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마을이 없어 몇 개의 파티를 제외하면 인적이 드물었다.
거기다 본래 움직임이 둔한 거인족이 있어 장거리에서 마법을 시전하는 마법사들이 사냥하기에도 제격인 필드였다.
“으음, 알겠다.”
“예. 후훗. 그럼 3일 후에 뵙지요.”
마법사가짱이얌에게 먼저 가 있으려고 함인지 고개를 꾸벅인 폭스의 신형이 서서히 그림자에 먹혀들어갔다.
마침내 폭스의 몸체를 완전히 집어삼킨 폭스의 그림자가 점차 옅어지는가 싶더니 곧 사라졌다.
저 말도 안 되는 스킬 또한 스페셜 스킬이 분명했다.
육체적 능력이 상승한 내 스페셜 직업과는 달리 스페셜 스킬과 함께 육체적 능력까지 강한 폭스는 확실한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상대 중 한 명이다.
그렇다고 내가 질 상대도 아니었다.
70%.
이 숫자가 바로 내가 확실하게 폭스의 숨통을 끊을 확률이다.
그리고 과거에 내가 폭스와 싸웠다면 내가 이길 확률이 50%고, 최악의 가정으로 무라사마가 포 스타라고 한다면 40%다.
여기에 베팔까지 합세한다면 내가 이길 확률은 30% 정도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터무니없이 적은 확률이지만 겨우 50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레벨 40짜리 씨 스파이더 킹에게 골골대던 나를 생각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지금의 나에게 씨 스파이더 킹 정도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죽일 수 있는 몬스터다.
꽝!
‘그런데 대체 뭐냐. 이 불안감은…….’
강한 힘을 얻고 강한 세력을 얻고 또 암흑투마군단장이라는 막강한 자리까지 얻었음에도 내 가슴 한편에 머무는 묘한 불안감에 탁자를 내려치자 탁자가 ‘우직’ 하며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탁자가 주저앉는 소리에 문 밖에서 대기하던 백발의 장정이 들어와 물었다.
카인이 나에게 붙여준 백사단의 전사였다.
“아무것도 아니다. 카인과 티나를 불러라.”
“아, 알겠습니다.”
살기 어린 목소리에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보던 수인족이 황급히 몸을 날려 사라졌다.
그렇게 가슴 한편에서 꿈틀거리는 불안감을 애써 짓누르고 있기를 잠시, 내 명령을 받고 나갔던 수인족과 카인, 그리고 티나가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대, 대 족장, 무슨 일이십니까. 그리고 이 탁자는…….”
“지금 당장 떠나겠다. 너에게 나 대신 야수연합을 맡기겠다.”
“그게 무슨…….”
갑작스레 떠나겠다는 내 말에 주저앉은 탁자를 보던 카인이 의문을 흘렸다.
“지금 당장 절망의 숲으로 떠나겠다는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이어지는 내 말을 듣고서야 이해한 카인이 힘찬 대답을 토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카인의 옆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티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티나, 넌 나와 함께 간다. 지금 당장 채비를 갖추고 마을 입구로 와라.”
“예!”
타닥.
몸을 날리는 티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폭스에게는 혼자 간다고 했지만 티나를 데려간다고 해도 문제는 없었다.
이내 나를 바라보는 카인의 어깨를 두드린 뒤 마을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타다닥.
군단장으로 바뀌며 상승된 힘도 힘이지만 민첩성 또한 상당히 많이 상승했기에 내 몸놀림은 힘에 투자한 전사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였다.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일부러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으로 움직여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경비를 서던 전사들과 몇 명의 수인족이 나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대 족장을 뵙니다!”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예전에는 소수이기는 했지만 야수연합에 속한 수인족 유저들이 있었다.
하지만 전부 꼬투리를 잡아 추방했기에 내 휘하에 있는 전사들은 모두 NPC였다.
물론 어떠한 경로로 새로 유저가 들어올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에는 바로 나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잡생각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비를 챙기러 갔던 티나가 내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절망의 숲은 야수연합이 머무는 마을처럼 외곽에 위치한 곳이라 숲을 가로질러 갈 필요 없이 외곽을 따라 쭉 걷기만 하면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다 외곽이라 할지라도 몬스터가 나왔기에 경험치를 올릴 수도 있었다.
포션 또한 웬만큼은 있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가자.”
“예!”
내 뒤를 따르는 티나의 손에 들린 단창이 날카롭게 빛났다.
후우웅.
퍽.
-퀴에엑!
-취익! 칙!
거친 파육음과 함께 목부터 시작해 어깨가 으깨진 오크 워리어의 모습에, 막 검을 들어올린 다른 오크 워리어가 공포에 질린 음성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 오크 워리어도 곧 내 뒤에서 나타난 티나의 단창에 머리가 터져 뇌수가 보였다.
나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오크들을 향해 조소를 흘린 뒤 몸을 날려 파천기에 휩싸인 도를 휘둘렀다.
“크하압!”
까강!
-취이익?
허무할 정도로 쉽게 부러지는 검을 멍하게 바라보던 오크의 머리가 곧 2배의 힘을 머금은 내 도와 만나 피 분수를 뿌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피 분수에 근 20마리는 되어 보이는 오크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취익! 도, 도망…….
휘이잉.
우득.
도망이라는 말을 내뱉으며 몸을 돌리던 오크의 뒤에서 뻗어 나온 털북숭이 손이 오크의 목을 간단하게 부러트렸다.
-크워! 도망치면 죽는다! 죽더라도 죽여라!
-취, 취익!
-취익!
숲을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에 막 도망치려던 오크들이 몸을 떨며 무기를 들어 나와 티나를 겨눴다.
그와 동시에 이제껏 오크들의 뒤에서 구경을 하던 거구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이프(Ape)!”
내 외침에 대답이라도 하듯, 숲에서 나온 에이프가 나와 티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크워! 이 멍청한 오크들아! 무기를 던지란 말이다!
-취익! 아, 알겠습니다!
에이프란 고릴라 형태의 몬스터로, 고릴라보다는 한 단계 높고 인간 보다는 한 단계 낮은 유인원 비슷한 몬스터였다.
인간보다는 지능이 낮은 대신 고릴라보다 강한 힘과 체력을 가지고 있고, 웬만큼 머리를 쓸 줄 알아 주로 오크들을 이끌고 나타나는 몬스터다.
2m가 조금 넘는 키게 털과 근육으로 뒤덮인 몸과 어른 허벅지 굵기만 한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는 에이프는 생긴 것답지 않게 레벨이 300이나 하는 강한 축에 속하는 몬스터다.
어쨌든 이 에이프는 모임 장소인 절망의 숲 중앙에 도착하기 직전에 만난 몬스터였다.
평소라면 경험치 덩어리라고 좋아했겠지만 모임을 앞둔 지금은 그저 귀찮은 몬스터일 뿐이었다.
-쿼어! 어서 던지란 말이다!
-취익! 아, 알겠습니다!
에이프의 호통에 공포에 떨고 있던 오크들이 각자 손에 무기를 들고 나와 티나를 향해 힘껏 던졌다.
오크 특유의 무식한 힘에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는 무기에 한 발 앞으로 나선 티나가 손에 들고 있는 단창을 현란하게 휘둘렀다.
까가가강!
-취익! 마, 막혔다!
너무나 쉽게 막혀 바닥을 구르는 무기를 본 오크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결국 에이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인지 숲 속으로 마구 달렸다.
“티나, 처리해라.”
“예.”
그럴 일은 없지만 혹시나 오크들이 다른 에이프를 데리고 온다면 골치 아프다.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티나가 단창을 고쳐 잡고 오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뒤로는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레벨이 낮은 오크들이, 그것도 무기도 없는 오크들이 티나를 이길 리가 없었다.
-쿼어!
휘잉, 휘잉.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충실한 노예였던 오크들이 죽어가는 모습에 털로 뒤덮인 얼굴을 잔뜩 구긴 에이프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분노 섞인 괴성을 질렀다.
-빌어먹을 인간! 죽여주마! 쿼어어!
“인간이 아니라 수인족이다. 멍청한 고릴라야!”
쿠왕!
에이프의 몽둥이와 내 도가 부딪치며 커다란 폭음을 터트렸다.
나무로 만든 몽둥이와 쇠로 만든 도가, 그것도 마도가 부딪치며 낸 소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폭음에 콧구멍을 벌름거리던 에이프가 입을 열었다.
-킁킁, 가장 딱딱한 나무에 물을 먹인 몽둥이다! 쇠보다 단단하다! 네 검도 못 벤다! 쿼어!
그그극.
에이프의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도를 짓누르던 몽둥이가 한층 더 강한 힘을 머금고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에이프와는 달리 내 얼굴은 평온했고 내 손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에이프가 힘이 세다고는 하지만 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거기다 몽둥이가 아무리 단단하고 해도 내 도가 부수지 못할 리 없었다.
“멍청한 고릴라야. 베지 못하면 부수면 그만이다. 그리고 검이 아니라 도다!”
-쿼어?
빠직.
작은 소리를 시작으로 서서히 몽둥이를 파고드는 도에 에이프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빠지직.
-쿼어?
꽈광!
반쯤 갈라져 휘청거리는 몽둥이에 질겁한 에이프가 막 입을 여는 순간, 마침내 몽둥이를 완전히 부숴버린 내 도가 에이프이 가슴을 갈랐다.
서걱.
-크워어어!
두툼한 가죽을 베는 느낌이 든다 싶더니, 쩍 갈라진 에이프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피가 쏟아지는 가슴을 부여잡은 에이프가 나머지 한 손으로 반쯤 부서진 몽둥이를 들고 내 머리를 향해 내려쳤다.
부우웅.
꽝!
공기를 찢어발기는 섬뜩한 파공음에 이어 들려오는 커다란 폭음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던 에이프가 몽둥이에 도의 날이 박힌 것을 알고 얼굴을 구겼다.
그러나 곧 그대로 나를 짓누르려는 생각인지 몽둥이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그그극.
학습능력이 없는 것인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몽둥이에 힘을 가하는 에이프의 모습에 조소를 흘리며 발을 들어 가슴을 걷어차자, 무방비 상태로 가슴을 맞은 에이프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죽어라!”
푸욱.
-쿼억!
상처를 지혈하는 손과 함께 에이프의 가슴을 꿰뚫은 도가 전해주는 묘한 쾌감에 웃음을 흘리며 거칠게 도를 뽑자 푸확 피가 튀겼다.
-크르륵.
결국 피 거품을 뿜어대던 에이프가 약간의 금화를 남기고는 모래로 변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오크들을 처리하러 갔던 티나 또한 피가 뚝뚝 흐르는 단창을 늘어트리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모두 처리하고 왔습니다.”
“음.”
피가 흐르는 단창을 정리하는 티나의 모습에 내 입에서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 또한 도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도를 잘 갈무리 한 뒤 저 멀리 보이는 모임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근처에서 다크엘프의 것으로 보이는 기척들이 느껴졌지만, 그들은 공격하지 않고 방관했기에 나 또한 그들의 감시를 방관하고 있었다.
다행이 이 에이프가 근처에 있는 마지막 몬스터였는지, 다른 에이프나 몬스터가 전진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보통 동굴 형태와는 달리 이 동굴은 지하로 이어지는 동굴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다크엘프로 보이는 인영 4명이 동굴의 입구를 지키듯 서 있었다.
차분히 걸어 나가자 드디어 모임 장소로 보이는 동굴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인영의 모습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내 예상대로 다크엘프였는데 모두 키가 1m 80cm는 넘을 듯했고 대충 걸친 가죽 갑옷 사이로 보이는 꽉 잡힌 근육과 허리춤에 매단 장검은 그들 모두가 뛰어난 전사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내 내가 다가가자 동굴을 지키던 4명의 다크엘프들이 날카롭게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태초의 숲의 야수왕 님이 맞으십니까?”
“맞다.”
철컹!
“어둠의 다섯 별 중 한 명이신 야수왕 님을 뵙니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발을 굴리며 고개를 숙이는 다크엘프들의 모습에 내 입에서 의문 섞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둠의 다섯 별?”
“예! 암천왕 라데스 님의 영원한 노예인 암흑투마군단 중, 대장의 직위를 가진 5명의 위대한 전사들을 칭하는 이름입니다. 물론 지금은 6명이긴 합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다크엘프의 모습에 의문이 떠오르는 것도 잠시, 내 입에서는 곧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현재 수인족은 크게 2무리로 나뉜 상태다.
바로 야수왕이라 불리는 나와 수인왕이라 불리는 카나리아의 무리로.
그렇기에 수인족 대표는 나와 카나리아, 이렇게 2명이 모여 이 모임에 참여하는 수는 총 5명이 아닌 6명이 될 터였다.
잡념에 빠져 있는 나를 향해 한 다크엘프가 입을 열었다.
“벌써 수인왕 님과 용마인, 다크자이언트 로드와 다크엘프 로드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카나리아가 벌써 왔다고?’
평소 바보 같은 성격으로 늦을 줄 알았던 카나리아가 빨리 온 것에 의외라는 표정으로 동굴 속으로 들어서자 나를 따라오려던 티나가 다크엘프들의 검에 막혀 걸음을 멈추고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 동굴 안에는 어둠의 별들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단호한 다크엘프의 말에 내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끄응… 티나, 밖에서 대기해라.”
“예.”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은 티나가 살기 어린 눈으로 다크엘프를 스윽 쳐다본 뒤 동굴의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음울한 사기와 차가운 냉기가 나를 맞이했다.
높은 레벨과 암천섭혼갑 덕에 영향을 받아 상태가 변하지는 않았지만 꺼림칙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동굴은 좁고 천장이 높았는데 얼마 걷지 않아 모임 장소로 보이는 곳으로 가는 길을 볼 수 있었다.
“흐음…….”
그렇게 한참을 길을 따라 걷던 내 입에서 난감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길의 끝에는 모임 장소 대신 6개의 입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입구의 위에는 어설픈 글씨로 각자 어둠의 전사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수인족만 1과 2라는 숫자로 구별되어 있었다.
바로 나와 카나리아를 위한 배려인 듯했다.
1의 옆에는 ‘야수왕’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 바로 내가 가야 할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입구를 통해 들어선 동굴은 전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입구 전의 동굴보다 훨씬 더 짙은 사기와 냉기가 휘몰아칠 뿐이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동굴 저 끝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던 빛이 바로 앞에서 느껴졌을 때, 눈앞에 있는 장막을 헤치고 앞으로 나서자 호화롭게 치장된 방이 나를 반겼다.
이 음침한 동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은 갖가지 장신구로 장식이 되어 있었고, 훌륭한 그림들도 벽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에는 얇은 천이 덮여 있었는데, 그 천을 통해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벽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하지만 구멍이 뚫렸어도 천으로 막혀 벽 저편의 공간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천이 덮인 벽 앞에는 커다란 의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 저 의자에 앉아 회의를 하는 듯했다.
‘이런 장치로 서로의 모습을 가리는 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정체를 숨겨야 하는 나는 이런 장치가 고마울 뿐이었다.
“흐음… 이번에 온 사람은 누구지?”
“나도 궁금하군.”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천 너머에서 들려오는 두 목소리에 내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정말 보이지 않는 건가?’
어둠의 다섯별이라고 불리는 각 일족의 우두머리라면 이 정도의 천쯤은 무시하고 그 너머에 누가 있는지 정도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다.
그럼에도 보지 못한다면 저 천에 무언가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다는 말이었다.
‘어쨌든 편하군.’
지금 나에게 중요한 이 천에 걸려 있는 마법보다 이 천의 기능이었다.
“이봐, 누군지 모르지만 정체를 밝히는 게 어때?”
“맞아! 남자라면 정정당당히 정체를 밝혀야지!”
가느다란 목소리에 이어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카나리아군.’
얇은 목소리의 주인은 누군지 모르지만 뒤이어 들린 익숙한 목소리는 카나리아가 분명했다.
“야수왕이다.”
“…….”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거운 침묵이 동굴을 휘감았다.
“그, 그렇군!”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는 카나리아의 목소리에 이어 카나리아와 죽을 맞추던 얇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음… 소문으로만 듣던 야수왕이라… 난 다크엘프 로드인 키블릭이라고 한다.”
“그래서?”
“…….”
싸늘한 내 대답에 동굴은 전과 같은 침묵에 휘감겼다.
하지만 곧 키블릭의 것으로 추정 되는 살기가 침묵을 갈아 치우고 공간을 메웠다.
우우웅.
“네놈이!”
-크르릇! 그만 해라.
수천 마리의 벌떼가 날갯짓을 하는 듯한 소음과 함께 막 살기 어린 목소리를 토해내는 키블릭의 목소리를 자른 용마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키블릭이 다시 한 번 입을 열려는 순간, ‘둥둥둥’ 하는 북소리와 함께 천 너머에서 검은 불꽃이 ‘푸화악’ 하고 타올랐다.
그와 동시에 키블릭이 앓는 소리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다크워리어 로드가 왔나보군.”
6명 모두가 모이면 불꽃이 타오르게 조작된 것인지 다크워리어 로드 운운하는 키블릭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둥둥둥둥!
동굴을 울리는 기묘한 북소리가 점차 사그라지자 다크워리어 로드의 것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늦어서 미안하군.”
‘응?’
움찔.
카나리아의 것과 같은 굵은 목소리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귀가 이상하지 않는다면 이 목소리는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리 긴 시간을 함께하지는 않았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아니 절정무공의 주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내 기억 속에 남은 한 남자!
‘발록?’
분명 발록의 목소리였다.
물론 발록과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이 없을 리는 없겠지만 이 목소리는 발록의 것이 분명했다.
‘발록이 다크워리어 로드라니!’
그때 발록은 분명 자신의 직업이 용병이라고 했다.
‘나를 속인 건가?’
내가 의혹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거친 숨소리와 함께 용마인이 입을 열었다.
-크르릇. 일단 서로 소개를 하도록 하지. 나는 게르맨더 일족을 이끄는 용마인이라고 한다.
“난 다크엘프들을 이끄는 다크엘프 로드 키블릭이다.”
“나, 나는 수인왕이라 불리는 카나리아다.”
“다크자이언트 로드 스톤이다.”
“다크워리어 로드인 발록이다.”
‘역시 발록이었군!’
왜 정체를 숨긴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발록이 분명했다.
어쨌든 발록의 정체를 안 이상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블러드. 야수왕이다.”
“뭐?”
간단명료한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 너머에서 경악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작스런 발록의 목소리에 잠시 멈칫했던 용마인이 말을 이었다.
-크르릇. 무슨 일이지?
“아, 아무것도 아니다.”
-크르릇. 모두 주목해라!
둥둥둥!
용마인의 목소리에 맞춰 다시 한 번 힘찬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으로 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바로 발록이었다.
[발록: 블러드? 정말 블러드냐?]
[블러드: 그래.]
[발록: 컥! 설마 네가 야수왕이었다니! 정말 세상일은 모르겠군!]
정말 놀라고 있는 것인지 채 경악이 가시지 않은 발록의 목소리에 작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움직였다.
[블러드: 네가 다크워리어 로드인 것보다는 아니다. 나에게는 분명 용병이라고 하지 않았나?]
[발록: 그, 그건…….]
[블러드: 일단 이야기는 회의가 끝난 뒤에 계속 하도록 하지.]
[발록: 그, 그래.]
당황한 발록의 목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힘찬 북소리와 함께 용마인의 거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둥둥둥!
-크르릇! 그럼 지금부터 모임을 시작하겠다! 수인족을 대표하는 전사들이 2명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이건 암흑투마군단장님 또한 동의한 것이다!
‘내가 동의한 적이 있던가?’
함부로 나를 팔아먹는 용마인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좀처럼 말을 하지 않던 굵은 목소리가 용마인의 뒤를 이었다.
바로 다크자이언트 로드인 스톤이었다.
“말투가 묘하군. 나는 용마인 당신이 암흑투마군단징인 줄 알고 있었는데?”
“나 또한 그렇게 알고 있다. 설마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용마인이 감히 암흑투마군단장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이라도 된다는 건가?”
스톤의 뒤를 이은 키블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굴 안에는 살기가 끓어올랐다.
철저히 라데스를 숭배하게 설정된 NPC인 키블릭과 스톤에게 있어 누군가가 라데스, 혹은 암흑투마군단장의 이름을 판 것은 이미 죽여 버려야 하는 큰 죄인 것이다.
솜털을 곤두세우게 하는 서늘한 살기에 침묵을 지키던 용마인이 거친 숨소리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크릇. 너희들의 예상대로 난 암흑투마군단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분께 너희를 모아 어둠의 힘을 모으라는 명령을 받은 두 명의 전사 중 한 명이다!
“두 명의 전사 중 한 명이라고? 그럼 한 명이 더 있단 말이냐?”
-크르릇. 그래!
의심 가득한 키블릭의 말에 용마인이 거친 목소리를 토해내며 긍정의 뜻을 밝혔다.
‘빌어먹을 NPC 자식! 대체 무슨 생각이냐!’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내 머리는 수많은 생각들로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지금 상황을 이롭게 이끌 수 있는 방법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내 다급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친 숨을 내쉰 용마인이 말을 이었다.
-크릇. 바로 여기에 있는 야수왕이 나와 함께 그분의 명령을 받은 전사들 중 한 명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나보다 훨씬 더 그분에게 인정을 받은 자가 바로 야수왕이다! 야수왕은 그분에게서 직접 너희에게 ‘종속의 인’을 받아옴과 동시에 어둠의 기운을 모아오라는 명령을 받았으니까!
‘으음?’
유수처럼 쏟아지는 용마인의 말에 내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 나왔다.
본래 높지도,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지능을 가진 보스 몬스터로 설정이 되어 있는 몬스터가 바로 용마인이다.
그런 용마인이 나조차 생각하지 못한 저런 방법으로 전사들을 설득하자 의심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뭐, 그래봤자 나에게 해는 없으니까.’
확실히 용마인의 말에는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득이라면 엄청난 이득이었다.
어둠의 기운을 모은다는 핑계로 칠흑의 마도의 봉인을 풀고 종속의 인을 새겨 노예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최상의 사니리오였다.
최상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는 것도 잠시, 곧이어 들려오는 키블릭의 목소리에 미소를 흘리던 내 얼굴이 굳어졌다.
“난 믿을 수 없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면 상관없겠지만, 네가 처음에 뭐라고 했지? 분명 네가 암흑투마군단장인 것처럼 행세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와서 사실은 암흑투마군단장은 따로 있고 너와 야수왕은 그저 그분의 명령을 받은 전사에 불과하다고? 흥! 나중에는 또 어떻게 말이 바뀔지 궁금하군!”
“나도 키블릭과 같은 의견이다.”
-크르릇! 암흑투마군단장이라면 라데스 님의 대리자! 감히 라데스 님을 부정하겠다는 것이냐!
우우우웅.
날카로운 용마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앞의 천이 유형화된 살기로 마구 들썩였다.
숨 막힐 듯한 살기 속에서 멀쩡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애초에 키블릭이든 스톤이든 종속의 인을 새기지 않았다 뿐이지 내 밑에 속한 전사다.
[발록: 제기랄,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상황이야!]
[카나리아: 빌어먹을!]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발록과 카나리아의 목소리에 인상을 구기며 손을 휘젓자 몸을 옥죄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내 몸에서 그 누구의 것과도 비교를 할 수 없는 강렬한 마기가 솟구쳐 나왔다.
푸푸푸풋.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천이 솟구치는 마기의 폭풍에 미친 듯이 펄럭였다.
쿠와와왕.
-크르릇?
“무, 무슨!”
동굴을 헤집는 마기의 폭풍에 말싸움을 하며 살기를 흘리던 용마인과 키블릭은 물론이고 스톤과 발록, 그리고 카나리아마저 숨을 죽였다.
비록 천이 펄럭여서 내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나머지 전사들을 가리고 있는 천막은 무사했기에 내가 보일 염려는 없었다.
‘어차피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다!’
내가 군단장이라는 것은 숨겨야겠지만 이미 카나리아나 발록 모두가 내 정체를 알고 있다.
거기다 용마인의 말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전사들에게 어둠의 기운과 ‘종속의 인’을 받아야 할 처지다.
그러자면 일단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 모습을 숨길 필요는 없었기에 내 행동이 절로 과감해졌다.
마침내 폭풍의 눈에서 마기를 뿜어내던 내 입이 천천히 열렸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분의 힘의 증명인가.”
쿠와와왕!
내 목소리와 어우러져 동굴을 메우는 지독한 마기에 용마인을 밀어붙이던 키블릭이 입을 다물었다.
그건 스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모습에 조소를 흘리며 암천섭혼갑에 마나를 흘려보내자 짙은 검은색의 마기에 이어 짙은 핏빛의 기운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바로 라데스의 기운인 섭혼기(攝魂氣)였다.
섭혼기라면 문자 그대로 ‘혼을 끌어들이는 기운’으로 마기와는 개념부터가 다른 기운이다.
상대의 혼을 흡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흡수한 혼을 내 마력과 체력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섭혼기의 유용한 점이다.
우우웅.
“크윽.”
“으음.”
-크릇!
동굴 안을 맴도는 검붉은 섭혼기에 나를 제외한 모든 전사들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방어력이나 항마력이 높다고 해도 섭혼기는 소울 에너지, 즉 말 그대로 영혼을 직접 흡수하는 것이기에 모두 무용지물이다.
더군다나 섭혼기는 오직 라데스만의 것!
내가 섭혼기를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암흑투마군단장에게 인정받은 전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뭐, 사실은 내가 바로 암흑투마군단장이지만. 크큭.’
내 손바닥 위에서 노는 전사들을 향해 조소를 흘리며 전사들을 향해 짐짓 무거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내가 사용하는 기운은 바로 그분께서 내게 주신 것! 감히 너희들이 그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냐!”
쿠와와왕!
“크윽!”
“컥!”
내 호통에 맞춰 한층 더 강렬해진 섭혼기에 전사들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섭혼강기를 사용하고 싶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진짜 암흑투마군단장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만약 내가 그걸 사용한다면 전사들이 내 정체를 눈치 챌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가급적이면 섭혼강기를 사용하지 않고 섭혼기만으로 전사들을 압박하는 것이다.
나는 동굴을 가득 채운 섭혼기를 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진정 그분을 부정하겠다는 것이냐!”
[발록: 오오! 멋진데?]
폭스를 생각나게 하는 발록의 귓속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한 번 섭혼기를 내뿜자 나를 제외한 전사들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스톤의 것으로 보이는 굵은 목소리가 동굴에 울렸다.
“미안하다. 이 죄는 그분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것으로 갚겠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스톤의 말에 내 입가에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크큭. 좋아, 이 분위기를 몰고 가는 거다!’
“각 어둠의 전사들을 이끄는 너희 5명에게는 그분의 대리자인 내 노예가 되어 종속의 인이 새겨질 것이다. 동의하겠는가?”
여기서 그분의 대리자라는 것은 내 관점에서 보자면 라데스였고 전사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암흑투마군단장이었다.
저들은 끝까지 내가 암흑투마군단장이라는 것을 모르고 암흑투마군단장의 대리자라는 내 명령을 받고 움직일 것이다.
정 암흑투마군단장이 직접 나타나야 한다면 얼굴을 가릴 수 있는 투구를 쓰면 되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 방법이라면 위협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배신 또한 미리 읽고 대처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머리를 쓸 줄 아는, 예를 들어 폭스 같은 놈이 봤다면 바로 반문했겠지만 내 앞에 있는 전사들은 잔머리라고는 모르는 우직한 NPC들이다.
그나마 유저인 카나리아나 발록 또한 썩 좋은 머리는 아니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내 말에 전사들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도 잠시, 곧 굵직한 목소리가 내 요구에 답했다.
“동의하겠다!”
우우웅.
스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몸에서 뿜어져 나간 붉은 기운이 천 너머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천 너머에서 나타난 검은 기운이 내 등에 걸린 도로 스며들었다.
‘이것인가!’
라데스가 말한, 자신의 힘을 깨우기 위한 어둠의 기운이 바로 이 검은 기운이 분명했다.
이제 스톤의 것을 받았으니 나머지 4명의 것만 받으면 될 터였다.
그 다음으로 울려 퍼진 목소리는 카나리아였다.
“동의하겠다.”
우우웅.
이내 전과 같은 내 몸에서 뿜어져 나간 붉은 기운이 카나리아를 향해 쏘아졌고 카나리아에게서 쏘아진 검은 기운이 내 도에 스며들었다.
점차 짙어져가는 검은 기운에 어느새 내 손으로 이동한 도가 찌르르 떨렸다.
가장 마지막에 할 거라고 생각했던 카나리아가 동의한 것이 의외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마도 폭스가 시켰겠지.’
폭스의 말이라면 불에라도 뛰어드는 카나리아니 분명 저 행동도 폭스의 지시대로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든 나에게 손해인 것은 없었다.
-크르릇. 동의하겠습니다.
우우웅.
용마인마저도 동의하며 나에게 어둠의 기운을 보냈다.
5명의 전사들 중 3명이 했으니 나머지 전사들 또한 하지 않으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음… 인정하겠다.”
고민을 하는 듯 잠시 멈칫하던 키블릭이 순순히 동의하자 모두의 관심이 마지막으로 남은 발록에게로 모였다.
“…….”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발록은 침묵으로 전사들의 관심을 무시하고 있었다.
지독한 고요에 키블릭의 입에서 불만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다크워리어 로드! 어째서 말이 없는 거지? 설마 그분을 따르지 않겠다는 건가?”
“그런 건가?”
거인족으로서는 의외로 조용한 성격인 스톤이 키블릭의 말을 이었다.
그와 동시에 키블릭과 스톤, 그리고 용마인의 몸에서 은은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여태껏 뿜어왔던 살기가 그저 위압용이었다면 이번 살기는 진짜 죽이겠다는 살기였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나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에 내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제길, 빌어먹을 발록 자식!
[블러드: 발록, 무슨 생각이냐?]
[발록: 기다려라. 어느 쪽으로 결정해야 분유 값을 더 벌 수 있는지 누님과 상의 중이니까.]
[블러드: 뭐라고?]
황당한 발록의 말에 내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분유 값이라니? 발록의 누님이라면 마리아가 분명했다.
‘그게 무슨… 아!’
저번 식인마의 거처에서 마리아가 분명 고아원에 아이가 더 들어와서 분유 값이 모자란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끝까지 남아 아이템을 챙기지 않았던가.
‘겨우 분유 값 때문이라니.’
“하…….”
내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크르릇! 다크워리어 로드! 어서 선택해라!
“그분을 부정하겠다는 거냐!”
살기를 날리며 발록을 닦달하는 전사들과는 달리 나는 여유로웠다.
어쨌든 마리아라면 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 적어도 거절은 하지 않을 터였다.
그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잠시 멈칫했던 발록이 말을 이었다.
“동의하겠다.”
우우웅.
쿠구궁!
발록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손에 들린 도가 거칠게 요동치며 칠흑의 기운을 뿌렸다.
주체 못할 정도로 떨리는 도에 당황하는 내 머릿속으로 종소리와 함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띠리링.
[칠흑의 마도의 봉인이 풀렸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이템 확인을 사용해주십시오.]
[SS급 퀘스트 ‘나이트메어의 부활’이 발동되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악몽왕의 신전’에 있는 ‘바젤’에게서 확인해주십시오.]
“크크큭.”
머릿속에 울리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손에 든 도를 바라보는 내 입에서 들뜬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외양은 변함없었지만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여태껏 봐온 옅은 마기가 아니라 강맹한 섭혼기였다.
우우웅.
내가 입고 있는 칠흑의 갑옷이 봉인이 풀린 칠흑의 마도와 짙은 공명음을 토해내며 마구 떨었다.
“오오!”
-크르릇!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기운에 전사들이 감탄을 토해냈다.
아마 저들은 지금 이 현상이 그저 자신들의 어둠의 기운이 모여 일어나는 현상으로만 알 터였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좋아. 크큭.’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아이템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내 앞의 전사들이었다.
“전사들은 들어라! 그분의 뜻을 전하겠다!”
“말하소서!”
-크릇! 말하소서!
기세를 죽이고 내 말을 기다리는 전사들의 행동에 내 입에서 절로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든 전사들은 각자 돌아가 일족들을 모으고 이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넣을 전쟁을 준비해라! 이 전쟁은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라 악몽왕과 악몽왕의 자식들 또한 참여하는, 말 그대로 마지막 전쟁이 될 것 이다!”
“우오오오!”
강력한 패기를 담은 내 외침에 전사들이 각자 고함을 지르며 살기와 마기를 흘려댔다.
“가라, 전사들아! 가서 죽이고 또 죽일 준비를 해라!”
“예!”
타다닥.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사들이 동굴 밖으로 몸을 날렸다.
동굴 안에 남은 기척이라고는 나와 카나리아 그리고 발록뿐이었다.
[카나리아: 잠시 만나지?]
[발록: 얼굴 좀 보지?]
귓가를 울리는 2개의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고 발록과 카나리아에게 동시에 귓속말을 보냈다.
[블러드: 밖에서 기다려라. 금방 나가마.]
[발록: 빨리 와!]
[카나리아: 빨리 와!]
조사 하나 다르지 않는 둘의 말에 작은 웃음을 흘리며 아이템 창을 클릭하자 전과 같은 모습인, 그러나 마기보다 더 짙은 섭혼기를 흘리는 칠흑의 마도가 나를 반겼다.
‘응?’
막 칠흑의 마도에 손을 올려놓은 내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바로 칠흑의 마도의 이름이 다른 것으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갑작스레 변한 칠흑의 마도에 아이템 설명란을 누르자 ‘파밧’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천살멸혼도(千殺滅魂刀)(S급)-
암천왕(暗天王) 라데스의 힘을 머금은 마도가 봉인을 깨고 드러낸 진정한 모습.
과거, 라데스가 다아리엘과 라그아노를 멸하기 위해 개발한 기술인 ‘천살(千殺)’과 ‘멸혼(滅魂)’을 자신의 힘과 함께 부여했다. 신을 죽이기 위한 기술이 부여된 탓에 무기 또한 점차 마도의 성향을 띠게 되었고 곧 신급 아이템으로 변했다.
오직 라데스의 뜻을 이어받은 암흑투마군단장만이 사용할 수 있으며 각 기술 모두 하루 1회 사용 가능하다.
공격력- 310/350.
내구력- 무한.
특수능력- 천살 하루 1회 사용 가능.
멸혼 하루 1회 사용 가능.
“하, 하하, 하하하! 크하하하!”
아이템 설명을 보는 내 입에서 거침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급 아이템이야 예상했던 것이지만 아이템에 부여된 2가지 스킬은 아니었다.
민첩성을 올려주고 힘을 올려주는 그런 특수능력이 아니라 진정한 특수능력인 것이다.
이내 노란 빛을 반짝이는 스킬 창을 클릭하자 섭혼강기와 마찬가지로 불꽃 모양의 스킬 두 개가 나를 반겼다.
순서대로 스킬 설명을 누르자 ‘파밧’ 하는 소리와 함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천살-
문자 그대로 천 명을 죽이는 기술.
열 십(十)자 형태로 전방의 공간을 갈라 악계로 통하는 차원의 틈새를 만들어 그 틈새로 악계를 떠도는 천 마리의 소악령(小惡靈)을 30초 동안 소환한다.
대 범위 기술이며 소악령 한 마리, 한 마리가 투 스타 검사의 검기 위력을 가지고 있다. 소악령들은 30초가 지나면 자동으로 소멸한다.
마나 소모- 없음.
특수능력- 없음.
-멸혼-
문자 그대로 혼을 멸하는 기술.
라데스가 다아리엘과 라그아노를 멸하기 위해 만든 기술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파괴적인 기술이다. 무엇이든지 부술 수 있으며 멸혼에 죽음을 당한 NPC는 부활이 불가능하며 유저는 만 24시간 동안 접속 금지를 당한다.
요란스러운 천살과는 다르게 발도(挬刀)의 형태를 가진 멸혼은 말 그대로 멸혼의 기운을 쏘아 보내는 것이다.
마나 소모- 없음.
특수능력- 멸혼에 죽임을 당한 NPC 부활 불가.
멸혼에 죽임을 당한 유저 24시간 동안 접속 불가.
무엇이든 부술 수 있음.
“크크크큭…….”
이제는 터져 나올 웃음도 없는 것인지 마지막에는 바람소리만 났다.
이 정도 기술이라면 30%에 가까웠던 내 승률은 순식간에 50% 이상으로 상승할 수 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멸혼의 특수능력인 24시간 접속 불가였다.
비록 하루에 한 사람에게밖에 사용하지 못할 테지만 무라사마나 검은 사자 길드의 중요 인물에게 사용한다면 톡톡히 이익을 볼 기술이었다.
거기다 도의 각성과 동시에 받은 SS급 퀘스트는 나에게는 또 다른 행운이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레벨을 올려봐야 무투회 전까지 포 스타는 무리였다.
그럴 바에는 수준 높은 퀘스트를 통해 좋은 아이템을 얻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SS급 퀘스트는 어떻게 본다면 도의 각성과 맞먹을 정도의 행운이었다.
“크큭. 캐릭터 창.”
팟.
이름: 블러드. 레벨: 301. 속성: 혈(血).
성향: 악중악(惡中惡). 종족: 웨어라이언(Werelion).
명칭: 암흑투마군단장(暗黑鬪魔軍團匠).
체력: 1750000. 마력: 85000. 신성력: 0.
힘: 1580. 민첩성: 700. 체력: 450.
지혜: 150. 신마력: 150. 행운: 200.
레벨이야 쓰리 스타가 넘었으니 강한 검기를 뽑아낼 수 있고 거기다 갖가지 기술과 함께 야수화도 있으니 걱정은 없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도를 집어넣고 길을 따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정한 군단장으로 각성한 탓인지 처음 동굴을 왔을 때 내 몸을 휘감던 사기는 나에게 있어 체력을 보충해주는 에너지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스윽.
얼마 걷지 않아 내 앞을 가로막는 인영에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지우고 앞을 바라보자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발록을 볼 수 있었다.
발록의 키가 나보다 작은 탓에 시선을 내리깔아 발록을 바라보자 발록의 입술이 씰룩였다.
“오랜만이군. 요즘 야수왕은 용병도 하나보지?”
“오랜만이군. 요즘 다크워리어 로드는 용병도 하나보지?”
발록의 말투를 조금 바꿔 비꼬듯 흉내 내자 발록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에잇! 난 너를 진짜 남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를 속이다니!”
짐짓 분한 표정으로 몸을 떠는 발록의 모습에 내 속에서 의문이 떠올랐다.
‘마리아가 말해주지 않은 건가?’
물론 헤어질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정말 지킬 줄은 몰랐기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곧 몸을 떠는 발록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너 또한 분명 나를 속이지 않았나?”
“그, 그건…….”
내 말이 정곡을 찔린 것인지 뭔가 말하려던 발록이 멈칫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너! 대체 우리 누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이라니?”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충분히 오해를 하고도 남을 말을 서슴없니 내뱉는 발록의 모습에 내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저 자식이 지금 무슨 말을…….
“너와 같이 사냥을 한 뒤로 누님이 이상하게 변했단 말이다! 내가 분유 100개짜리 레어 아이템을 먹어도 좋아하는 기색도 없고 또 모처럼 청소를 해도 칭찬을 해주지 않고 매일 매일 멍하니 있단 말이다!”
‘요점은 칭찬을 받지 못해서 화가 난 것이로군.’
단순하다 못해 아이 같은 발록의 생각에 헛웃음을 흘리자 나를 보며 불만을 토하는 발록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원래 이런 말도 안 되는 퀘스트는 하지 말라고 말리시던 누님이 네 이름이 나오자마자 바로 승낙한 것 자체가 이상하단 말이다! 솔직히 말해! 그날 누님에게 무슨 짓을 했냐!”
‘이놈, 바보로군.’
내 속마음을 들여 보기라도 한 듯, 열변을 토해내던 발록이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뭐, 뭐냐! 그 한심한 놈을 보는 듯한 표정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다.”
우우웅.
전과 똑같은 말을 내뱉으며 일으킨 마기에 나를 몰아붙이던 발록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발록에게 절절 무공인 대력파산도법이 있다면 나에게는 신급 아이템인 천살멸혼도와 암천섭혼갑 그리고 이 2가지 아이템에 딸린 특수능력이 있다.
이 정도라면 절정무공이 아니라 초절정무공을 가진 유저라도 내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무안한 듯 헛기침을 한 발록이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흠흠. 어쨌든, 누님이 최선을 다해서 너를 도와주라고 했으니까 다른 말은 안 하마.”
“고맙군.”
내 말이 의외였는지 멀뚱히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던 발록이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 말은 누님한테 하는 게 좋을 거다, 흠흠.”
“알겠다.”
“그리고 누님이 너 때문에 울면 그 순간부터 대륙의 모든 다크워리어들이 모두 네 적이 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라. 물론 그 군단장인가 뭔가 하는 이름만 그럴싸한 놈이 나선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제깟 놈이 루안 대륙의 파산도왕인 내 도를 버틸 수야 있겠냐. 푸하하하!”
허리까지 젖히며 통쾌한 웃음을 터트리는 발록을 바라보는 내 미간이 살며시 구겨졌다.
한참을 웃음을 터트리던 발록이 귀환 주문서를 꺼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 아! 누님이 시간 나면 메시지 보내달라고 하더…….”
후우웅.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빛 무리 속으로 사라지는 발록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동굴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서는 발록처럼 귀환 주문서를 이용하고 싶었지만 카나리아가 만나자고 했으니 싫어도 입구까지는 걸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스윽.
“이제야 왔군.”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저 너머에서 보이는 빛에 손으로 눈을 가리며 동굴의 입구를 나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동굴의 입구를 지키던 다크엘프 경비병들은 모두 사라졌는지 동굴 입구의 근처에는 카나리아 말고는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불렀냐? 쓸모없는 일로 불렀다면 그냥 가는 게 좋을 거다.”
“적어도 너한테는 쓸모없는 일은 아니니까 그런 목소리는 집어치우지. 블러드, 아니 헤라클래스라고 불러야 하나?”
쿠궁!
“무, 무슨!”
여태껏 봐왔던 멍청한 얼굴이 아닌 싸늘한 얼굴로 말을 내뱉는 카나리아의 말에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듯, 충격이 내 뇌리를 강타했다.
‘대체 저 자식이 어떻게…….’
“설마 폭스가 말해준 거냐?”
우우웅.
혼란스러운 내 기분에 맞춰 내 몸에서 강력한 마기와 섭혼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풀과 나무들이 급속도로 시들었다.
멀쩡한 것은 단 둘, 나와 카나리아뿐이었다.
그런 나를 향해 웃음을 흘린 카나리아가 말했다.
“아직까지 폭스 타령이냐? 멍청한 자식, 네가 상대해야 할 적은 폭스 따위보다 훨씬 더 막강하다. 고작 검은 사자 길드 따위가 아니라 이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카나리아의 모습에 내 얼굴에 서린 복잡함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와 동시에 폭스를 연상케 하는 역겨운 미소를 떠올린 카나리아가 진득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진실을 알고 싶나? 블러드, 아니 헤라클래스? 그것도 아니면… 강철중?”
카나리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