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2 격돌 1 (23/34)

챕터2 격돌 1

“정말 이 미친 짓을 하자는 거냐?”

제발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듯 울상을 하는 염환을 향해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염환이 한숨을 내쉬며 욕을 중얼거렸다.

그건 마리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직 티나만이 나를 향해 존경스럽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확실히 인간에 대한 적대심이 강한 티나는 몬스터 사냥보다 인간을 사냥할 때 더 열성적으로 움직였다.

“모두 이걸 착용하고 장비를 점검해라.”

일행을 향해 두건을 내밀자 염환과 마리아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내가 내민 두건은 바로 밤손님 길드의 트레이드마크 두건이었다. 얼굴을 가리기에는 적격인 아이템이기도 했다.

“크큭.”

골목 어귀에 있는 ‘파라다이스’라는 커다란 술집을 보는 내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술집은 밤손님 길드의 아지트 중 한곳으로 제법 커다란 축에 속했다.

한시라도 빨리 밤손님 길드와 검은 사자 길드의 눈을 피해 나이트메어의 신전으로 움직여야 할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바로 밤손님 길드의 아지트를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누구든 간에 아지트 내부에 있는 마스터 집무실 벽의 아지트 증표를 파괴하면, 그 아지트는 아지트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이 기능은 공성전을 하는 대규모 길드가 아닌 아지트 쟁탈전을 하는 소규모 길드들을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뭐, 지금에는 나를 위한 시스템이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바로 저 파라다이스라는 밤손님 길드의 아지트를 파괴하기 위해서다.

예전이라면 현상금을 걸고 나를 죽이려 해도 그냥 지나쳤겠지만, 밤손님 길드는 검은 사자 길드의 동맹 길드다. 훗날 나의 적인 셈이다.

조금이라도 적의 힘을 줄인다면 나에게는 좋은 것이기에 기꺼이 귀찮음을 감수하고 일을 감행하려는 것이다.

“모두 준비됐냐?”

“그래.”

일행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역시 굳은 얼굴로 파라다이스를 펴다봤다.

내가 이런 상태를 보이는 것은 바로 게리롱이 파라다이스의 위치와 함께 건네준 정보 때문이다.

바로 밤손님 길드를 도와주기 위해 검은 사자 길드에서 강자를 보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긴장하는 이유였다.

검은 사자 길드에서 밤손님 길드를 도와 발정 난 낙타들 길드를 몰락시키기 위해 보낸 강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검은 사자 길드가 이미 내 정체를 알고 게리롱이 내 편이 되었다는 것을 안 이상, 절대 만만한 사람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마스터.”

“음?”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 내 귀에 걱정이 가득 담긴 티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티나가 손에 망토를 감아 들어 내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그 모습에 마리아가 질투가 났는지 손을 들어 있지도 않은 땀을 닦는 시늉을 하고는 ‘흥’ 하며 티나를 흘겨봤다.

“큭.”

우스꽝스러운 마리아의 모습에 웃음을 흘리자 긴장이 풀어졌다.

‘그래. 뭘 고민하는 거냐. 난 강하다.’

“모두 준비해라.”

등 뒤의 도를 잡은 내 손에 힘이 실렸다.

도둑 길드의 아지트라는 특성상, 파라다이스 또한 골목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판타즈마 시간으로는 낮이다. 보통 도둑들은 활동을 접고 휴식을 취할 시간이기에 파라다이스 주변은 지나가는 NPC들만 있을 뿐 한산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나를 잡기 위해 밤손님 길드의 길드원들이 소집되었다.

일단 게리롱에게 들은 정보에 따르면 파라다이스 지하 1층부터 지하 3층까지가 진짜 아지트고, 지상은 단순한 주점 겸 정보를 파는 곳이다. 지하로 가는 입구는 바텐더가 밟고 있는 발판의 밑이라고 했다.

“일단 염환, 지하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마법은 사용하지 마라. 그리고 모두 소란스러운 기술은 금지다.”

모두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염환과 마리아는 우리에게 보조 마법을 사용해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리아는 손을, 염환은 스틱을 들고 중얼 거렸다.

“질풍의 마나여, 내 동료에게 깃들어 땅을 도약하라, 헤이스트! 강철의 마나여, 내 동료의 갑옷에 깃들어 적의 검을 쳐내어라, 디펜스 아머! 대지의 마나여, 내 동료의 몸에 깃들어 땅을 뒤흔드는 힘을 주어라, 스트랭스! 불꽃의 마나여, 내 동료의 검을 휘감아 적을 불사르는 검날이 되어라, 파이어 웨폰!”

앞의 세 가지 마법은 마법사들이 쓰는 평범한 보조 마법이고, 마지막 마법은 화염 속성의 마법사가 쓰는 무기에 화염 속성의 데미지를 부여하는 마법이다.

그 뒤를 이어 마리아의 축복이 일행을 뒤덮었다.

“아버지여! 파멸은 창조의 또 다른 뜻! 모든 파멸을 담당하는 아버지의 힘을 빌려 간절히 바랍니다. 파멸의 길을 거부하고 사도의 길을 걷는 무지한 적들에게 심판의 철퇴를, 파멸의 길을 걷는 당신의 자식에게 용기의 방패와 승리의 갑옷을! 블레스!”

우우웅.

마리아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은은한 기운이 내 몸으로 스며들어 또 다른 힘으로 변해 꿈틀거렸다.

“악왕의 기운.”

우우웅.

은은하게 빛나는 몸 위로 칠흑의 마기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마기에 마리아와 염환이 움찔했다.

“파천기.”

스으으.

이어지는 내 말에 내 손목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도를 휘감았다.

도가 내 등에 걸려 있었기에, 도에서 뿜어져 나온 파천기 때문에 학살자의 망토가 작게 펄럭였다.

“가자.”

스윽.

조용하게 움직이는 내 뒤로 일행이 따라 붙었다. 내 뒤로 마리아와 염환이 붙고 그 둘을 호위하는 형식으로 티나가 따라 붙었다.

끼익.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선 파라다이스 내부는 한산했다.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는 게리롱의 정보대로였다.

주변을 보니 예상대로 밤손님 길드원으로 보이는 유저들은 없었고 몇 명의 NPC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흥. 유저들은 모두 지하에 있겠지.’

차가운 조소를 흘리며 바텐더에게 다가가자 조용히 컵을 닦던 바텐더가 나에게 인사를 하려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바텐더는 유저, 거기다 밤손님 길드원이었다.

바텐더가 막 나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너, 넌!”

“닥쳐라.”

부우우웅.

콰직.

내 등을 떠난 도가 허공에서 검은 궤적을 그리고는 바텐더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반쯤 짓이겨진 바텐더의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꾸르륵.”

털썩.

“으윽.”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것을 끝으로 무릎을 꿇고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바텐더의 모습을 본 마리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염환 또한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확실히 이 둘에게는 내가 하는 행동이 지나쳐 보일 것이 분명했다.

오직 티나만이 끓어오르는 눈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티나, 모두 처리해라.”

“예!”

휘리릭.

날카로운 대답을 토한 티나가 어느새 빼어든 단창을 휘두르며 경악한 NPC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쐐애액.

퍽.

“으악!”

“크악. 살려줘!”

평범한 NPC들 사이에서 티나는 말 그대로 양 떼에 뛰어든 야수와 같았다.

열 명 남짓했던 NPC들이 순식간에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한산했던 내부에 풍기는 짙은 피비린내와 모래 더미만이 누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티나, 문을 열어라.”

“예.”

작게 고개를 끄덕인 티나가 단창을 정리하고 방금 전까지 바텐더가 밟고 있었던 나무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염환, 다른 놈들이 못 들어오게 건물을 부숴라.”

염환에게 말한 뒤 계단으로 몸을 날리는 내 뒤로 마리아와 티나가 따라붙었다.

잠시 후, ‘콰가가강’ 하는 엄청난 폭음을 뒤로하고 염환 또한 따라왔다. 아지트 지하에도 워프 존이 있어 워프 존을 통해 올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위에서 오려는 놈들의 발을 잡아둘 수 있을 것이다.

계단은 입구와는 달리 제법 폭이 넓었다.

점차 넓어지는 계단의 폭에 맞춰 마침내 커다란 돔 형태의 지하 1층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이 지하 1층에 발을 들여놓자 중간 중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석상들이 ‘끼기긱’ 하며 붉은 안광을 토해냈다.

석상 몬스터인 가고일과 비슷한 종류지만, 몬스터가 아닌 NPC로 설정되어 있는 바빌론이라는 석상 전사 NPC 몬스터였다.

나도 잘 알고 있는 이 NPC 몬스터들은 보통 250에서 300 사이의 레벨로, 머릿수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일행에게 그리 위협적인 몬스터는 아니었다.

바빌론은 총 다섯 마리.

나와 티나가 전방에서 공격하고 염환의 보조 마법과 마리아의 치료 마법이라면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티나, 따라와라. 염환, 지하 공간이다. 가급적이면 여파가 작은 마법을 사용해라.”

“맡겨만 줘라. 크크크.”

음침한 웃음을 흘리는 염환과 걱정스러운 표정의 마리아를 뒤로하고 티나와 함께 앞으로 나서자,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던 바빌론들이 갑자기 빠른 움직임으로 나와 티나를 향해 쇄도했다.

쉬이잉.

깡!

2m는 가뿐히 넘는 돌석상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몸놀림으로 나를 향해 달려든 바빌론 두 마리가 커다란 대검을 나를 향해 내리찍었다.

카가각.

푸스스.

돌로 된 대검과 도가 부딪치며 돌가루를 흘렸다.

-인간. 죽어라. 침입자. 죽어라!

부르르.

스으응.

쾅.

두 마리 바빌론 중 한 마리가 내 도를 짓누르며 봉쇄하는 틈을 타 다른 한 마리가 대검을 치켜들어 나를 다시 한 번 내리찍었다.

손목을 울리는 저릿한 통증에 내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큭. 빌어먹을 것들!”

텅!

두 개의 대검이 얹혀 있는 도를 그대로 튕기자 대검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타닷.

“타핫!”

쉬시식.

퍽.

그 틈을 타 뒤로 몸을 날리며 도기를 날리자, 도기에 부딪힌 바빌론들의 가슴이 갈라지며 푸스스 돌가루를 뿌렸다. 보통 몬스터였다면 가슴을 부여잡으며 쓰러져야 정상이지만 상대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석상 몬스터였다.

방금 전의 공격이 오히려 바빌론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 바빌론의 눈에서 붉은빛이 형형하게 뿜어져 나왔다.

철크덩.

-인간. 죽어라. 침입자. 죽어라.

“칫.”

스으응.

꽝꽝.

짧게 혀를 차며 도기를 날리자 또다시 도기에 격중당한 바빌론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비틀거리며 돌가루를 뿌린 바빌론이 붉은 안광을 뿌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보통 몬스터가 아닌 바빌론 같은 상대는 꽤나 까다롭다. 보통 몬스터가 공포심을 가지면 시스템의 영향을 받아 능력치가 대폭 감소되지만, 바빌론 같은 종류는 그런 것을 모른다.

오직 전진뿐이었다.

그렇기에 나 같은 전사 타입에게는 상당히 까다로운 상대다.

고민에 빠져 있는 내 귀에 염환의 목소리가 꽂혔다.

“비켜라! 화염의 마나여, 폭염의 마나여, 불꽃의 마나여, 무지한 적에게 바다마저 가물게 하는, 태양마저 태워버리는 잔혹한 자비를 내려라. 인시너레이트(Incinerate)!”

부우우.

염환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검을 치켜 든 바빌론 두 마리의 사이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곧 보이지 않는 엄청난 열기에 바빌론의 몸이 쩍쩍 갈라졌다.

화염 마법 특유의 주변으로 번지는 불꽃이 아닌 한곳을 중심으로 모여 초고열을 발산하는 불꽃에 바빌론 두 마리가 순식간에 기능을 잃고 픽 쓰러져 꿈틀거렸다.

“고맙다.”

“으하하하! 어떠냐! 이 몸의 실력이!”

우렁찬 웃음을 터트리는 염환을 뒤로 한 채 꿈틀거리는 바빌론들의 머리를 부수어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바빌론 세 마리 속에서 고전하는 티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바인드!”

스스슥.

간간히 마리아가 구속 마법으로 바빌론들을 묶어주거나 티나에게 치료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역시 바빌론 세 마리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것은 티나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몇 개의 도기를 날린 뒤 난전 속으로 뛰어들자 바빌론들과 사투를 벌이던 티나가 내 옆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아니다. 충분히 잘했다.”

풀이 죽어 있는 티나를 위로한 뒤 도를 들어올리자, 티나 또한 언제 풀이 죽어 있었냐는 듯이 단창을 잡고는 살기어린 눈으로 마리아의 마법에 묶인 바빌론들을 바라봤다. 방금 전에 망신당한 것을 톡톡히 보상해주겠다는 표정이었다.

“왼쪽을 맡아라.”

“예!”

타앗.

내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힘찬 대답을 토해낸 티나가 땅을 박차고 왼쪽의 바빌론을 향해 몸을 날렸다.

“키하아아앙!”

-인간. 죽어…….

부르르.

감정이 없는 바빌론일지라도 티나의 포효를 피할 수 없었다.

티나의 입에서 터져 나온 제후의 포효에, 말을 내뱉던 바빌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을 하다 말고 몸을 떠는 바빌론을 보는 티나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죽엇!”

콰가가가가.

날카로운 일갈을 내뱉은 티나가 단창을 찔렀다.

티나의 단창을 중심으로 모여든 토네이도에 돌가루가 마구 휘날렸다.

막강한 기세를 담은 단창. 티나의 주 스킬인 토네이도 스피어였다.

-인간. 죽어라. 침입자. 죽어…….

콰르르르.

꽈강!

맹렬한 토네이도를 동반한 티나의 단창이 바빌론의 가슴에 꽂히며 커다란 폭음을 터트렸다. 가슴을 파고들며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단창에 바빌론의 가슴이 쩌적 갈라졌다.

투두둑.

티나의 공격을 받아 돌멩이로 변해 무너진 바빌론이 모래가 되어 사라질 때쯤, 나 또한 다른 두 마리 바빌론의 코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인간. 죽어라. 침입자. 죽어라.

부우웅.

꽝!

“큭.”

하늘로 치솟았던 두 개의 대검이 내 도를 때렸다. 한 팔로 버텼지만 쩌릿한 통증이 전달되고 약간의 체력이 떨어졌다.

“큭.”

텅!

전과 같이 도를 튕기자 도면에 얹혀 있던 대검이 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내 도가 바빌론의 가슴을 그었다.

카가각.

-그욱!

돌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바빌론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새어 나왔다. 고통에 내뱉은 비명이 아닌, 단순히 전진하지 못한 것이 원통하다는 신음이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도에 잠시 멈칫한 바빌론들이 그대로 밀고 나가려는 듯,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인간. 죽어라. 침입자. 죽어라.

“닥쳐라!”

콰드득.

꽝꽝꽝.

재빨리 뽑아 든 도를 연거푸 내려치자 앞으로 나아가려던 두 마리의 바빌론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 인간. 죽어라. 치, 침입자. 주, 죽어라.

꽝꽝꽝.

반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연신 물러서며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바빌론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힘을 다해 도를 휘두르자 바빌론들이 뒤로 넘어져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꽈강.

-그욱.

마지막까지 꿈틀거리는 바빌론의 가슴에 도를 박아 넣은 내 곁으로 다가온 마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괜찮아요?”

“괜찮다.”

서서히 차오르는 체력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는 내 옆으로 어느새 온 티나가 나와 같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바빌론을 처리한 것이 꽤나 만족스러운 듯했다.

“1층은 이게 끝이냐?”

바빌론들에게서 나온 마나석을 모은 염환이 안타까운 투로 말했다.

확실히 바빌론 같은 고급 NPC 석상들을 움직이는 마나석은 꽤나 고가의 아이템이었다.

가뜩이나 돈을 밝히는 염환이라면 더 이상 바빌론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운 게 당연했다.

“다음 층으로 가자.”

“쩝.”

내 말에 입맛을 다신 염환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내 뒤를 따라붙었다.

2층으로 가는 입구는 다섯 마리의 바빌론이 나온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 모습은 1층과 같았다.

먼저 나아가 문을 열려던 티나가 문을 열다 말고 멈칫하더니 곧 고개를 돌려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마스터…….”

“알고 있다.”

“응? 무슨 일이냐?”

나와 티나의 대화에 염환이 다가와 물었다.

“2층에 상당히 많은 수의 유저가 있다.”

“캑. 진짜냐?”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염환이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내 감각에 걸리는 이 느낌은 2층에 있는 적들이 최소 30명 이상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모두 레벨이 높은 도적 유저들인지 존재감 또한 뚜렷한 것이 아니라 흐릿했다.

“그래.”

“제기랄.”

내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염환이 욕을 중얼거리며 얼굴을 구겼다.

“하는 수 없다. 내려간다.”

“뭐? 밑에 놈들이 깔렸다며!”

단호한 내 말에 염환은 물론이고 마리아마저도 눈을 치켜뜨며 날 쳐다봤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나이트메어의 신전으로 가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이상, 약간이라 할지라도 피해를 줘야 했다.

“염환, 내가 내려가서 바로 방패 역할을 할 테니까 바로 내려와 대 범위 마법으로 한방 갈겨라. 마리아, 너는 여기서 50까지 센 다음 내려와라. 티나, 넌 나를 따라라.”

굳은 얼굴의 일행을 뒤로하고 아이템 창을 열어 포션을 마신 뒤 반쯤 열린 문을 타고 2층으로 몸을 날렸다.

1층과는 달리 짧은 길이의 계단을 타고 2층으로 몸을 날리자, 계단 입구를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모여 있던 유저들이 나를 반겼다.

유저의 수를 확인할 시간도 없이 내 입에서 커다란 포효가 뛰쳐나와 지하를 진동시켰다.

제왕의 포효였다.

“크허어엉!”

“큭.”

“으윽.”

지하를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에 막 나를 향해 단검을 던지려던 유저들이 비틀거렸다.

그리고 곧 내 뒤를 이어 나타난 티나가 다시 한 번 커다란 포효를 터트렸다. 제왕의 포효와 같은 스킬인 제후의 포효였다.

“키하아앙!”

푸스스스.

묵직한 내 포효와는 달리 날카로운 티나의 포효에 천장이 푸스스 돌가루를 떨어트렸다.

“비켜라!”

어느새 나타난 염환이 스틱을 들어 비틀거리는 유저들을 향해 겨누며 입을 열었다.

“화염의 마나여, 폭염의 마나여, 노하라! 그리고 뻗어나가 적을 멸하라! 부스터 온(Buster On)!”

쿠구구궁!

주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염환의 스틱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빛이 거대한 불꽃 기둥이 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콰가가각.

“으아악!”

“크악!”

땅을 헤집으며 사방에서 터지는 불꽃에 근 30에 가까웠던 유저들 중 열 명 가까이가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갑작스런 공격으로 공황에 빠져 있는 유저들을 향해 짙은 웃음을 흘린 염환이 다시 스틱을 흔들며 주문을 외웠다.

“크큭. 끝이 아니다! 폭염의 마나여, 화염의 마나여, 폭염의 권능을 머금은 안개로 변해 무지한 적에게 징벌의 공포를 내려주어라. 인센디어리 클라우드!”

우우우우.

“윽?”

“큭?”

염환의 스틱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붉은빛에 움찔했던 유저들이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의아한 얼굴로 염환을 바라봤다.

염환의 스틱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빛은 그저 은은한 붉은 안개로 변해 유저들의 중심에 퍼져 있을 뿐, 그 어떤 폭발도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의 정체를 알고 있는 염환이나 나, 그리고 몇 명의 밤손님 길드원들은 아니었다.

의아한 표정의 유저들 뒤에 서 있던 밤손님 길드의 간부로 보이는 붉은 옷의 도적 한 명이 경악하여 외쳤다.

“피, 피해! 도망쳐라!”

“크크. 늦었다, 병신아! …마리아!”

밤손님 길드의 간부를 향해 조소를 흘린 염환이 마리아의 이름을 외치자, 어느새 2층으로 내려온 마리아가 은은하게 빛나는 손을 들어 밤손님 길드의 간부를 겨누며 힘차게 외쳤다.

“블레이즈!”

라그아노의 성직자들이 배우는 초보 공격 마법 중 하나인 블레이즈(Blades)가 시전되자, 곧 마리아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나가 1m 길이의 두 개의 커다란 검으로 변했다.

완만하게 날이 선 시미터 같은 칼이 마주보며 마구 회전하는가 싶더니 곧 밤손님 길드의 간부를 향해 쏘아졌다.

위이이잉.

카강. 카가강.

서로 마찰하며 불꽃을 튀겨대는 시미터에 밤손님 길드 간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두 피해라! 가, 강철의 마나여!”

실드가 부여된 매직 아이템으로 보이는 반지를 들고 뒤늦게 주문을 외우는 밤손님 길드 간부를 향해 싸늘히 조소를 흘린 뒤, 나 또한 재빨리 곧 이어질 폭풍에 대비해 도를 바짝 세워 몸을 가렸다.

인센디어리 클라우드(Incendiary Cloud)라면 화성이 있는 구름으로 목표 주위를 덮어버리는 마법으로, 불꽃이 튀거나 기타 불계열의 마법으로 공격하면 주위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블레이즈는 마나로 실체화된 칼을 만들어 마찰을 시켜 적에게 쏘아 보내는 마법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쇠끼리 강하게 마찰하자 불꽃이 튀겼다.

위이잉.

까강.

티나와 마리아가 염환이 만든 실드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인화성을 가진 안개 속에 들어가 마찰하던 시미터를 중심으로 엄청난 폭발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꽈가가가강!

쿠구구궁.

푸스스스.

“으아아악!”

“크아악!”

엄청난 폭음과 건물이 떨리는 소리, 그리고 갖가지 비명이 어우러져 진정 지옥이라 부를 만한 장면을 그려냈다.

쿠구궁.

“크윽.”

나 또한 도를 짓누르는 커다란 압력에 신음을 삼키며 온 힘을 다해 도면을 이용해 폭발의 여파에서 피했다. 다행히 도기를 덮었기에 별다른 피해는 입지 않았다.

‘크윽. 끝인가?’

저려오는 팔에 인상을 구기며 막 일어서려는 순간, 먼지구름 너머에서 날카로운 빛이 터져 나왔다.

“개자식들!”

까강!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밤손님 길드의 간부인 붉은 옷의 도적이 단검을 쏘았다.

카가각.

단검이 도면에 막혀 날카로운 소리를 흘렸다.

“죽어라!”

스스슥.

자신의 기습이 나에게 쉽게 막힌 것이 의외였는지 잠시 흠칫한 붉은 옷의 도적이 단검을 고쳐 잡고 몸을 흔들자 붉은 옷의 그림자가 두 개에서 세 개로, 곧 세 개에서 다섯 개로 변해 사방에서 나를 향해 치고 들어왔다.

‘크윽. 도적 스킬인가?’

스윽.

따다당.

사방을 어지럽히는 잔영에 인상을 구기며 도를 들어 휘두르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노란 불꽃이 튀겼다.

“큭. 백 스텝.”

쉬식.

한 번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재빨리 단검을 갈무리한 붉은 옷이 백 스탭을 사용해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걸 쉽게 허용할 내가 아니었다.

“어딜!”

타닥.

“허억.”

내가 무릎을 굽혔다 펴는 반동을 이용해 몸을 날리자, 여유로운 표정으로 백 스텝을 사용한 붉은 옷이 숨을 삼켰다.

쿵.

“큭.”

붉은 옷을 향해 어깨를 들이박자 황급히 다시 한 번 백 스텝을 사용하려던 그가 신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때 그의 밑에서 솟아나온 검은 넝쿨이 붉은 옷과 내 하체를 휘감았다.

아마 마리아가 붉은 옷을 겨냥하고 마법을 사용했지만 잘못해서 나에게까지 여파가 온 듯했다.

“미, 미안해요!”

얼굴을 붉히는 마리아를 뒤로하고 고개를 돌리자 안간힘을 다해 덩굴을 빠져나가려던 붉은 옷과 내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이 없이 동시에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큭.”

“윽.”

거의 동시에 들린 타격음과 함께 붉은 옷과 내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주먹이 오로지 힘에 투자한 강한 주먹이라면, 붉은 옷의 주먹은 민첩성에 투자한 급소를 때리는 주먹이었다.

덩굴에 묶여 붙어 있으니 도를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재빨리 도를 떨어트린 뒤 양팔을 세워 토시를 이용해 붉은 옷의 얼굴을 긁어내렸다.

그러자 붉은 옷이 토시에 박힌 가시에 숨을 삼키며 재빨리 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찌지지직.

“크아아악.”

토시에 박혀 있는 가시가 붉은 옷의 팔을 훑으며 살점을 한 움큼 뜯었다.

꽤나 커다란 상처였는지 붉은 옷이 손에 든 단검을 떨어트리며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양팔을 보며 비명을 지르는 붉은 옷의 목을 향해 토시를 박으려는 순간,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옷의 머리가 터지며 내 얼굴로 뇌수를 튀겼다.

“꾸르륵.”

부들부들.

거세게 몸을 떠는 붉은 옷의 머리를 날린 것의 정체는 바로 티나의 단창이었다.

“죄송합니다.”

내 얼굴에 피를 튀긴 것이 미안한지 고개를 숙인 티나가 자신의 망토로 내 얼굴을 닦았다.

“괜찮냐?”

“괜찮아요?”

어느새 다가온 마리아와 염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다.”

찝찝함이 남아 있는 얼굴을 만지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같이 고개를 끄덕인 염환이 주변을 둘러봤다.

폐허.

주변은 폐허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상태였다.

열 명의 유저들이 남아 있었지만 전투 불능에 가까운 상태였고, 그나마 싸울 수 있는 몇 명의 유저들 또한 전의를 잃은 듯했다.

“티나, 처리해라.”

“예!”

티나에게 명령을 내리고 모래가 되어 사라진 붉은 옷을 뒤로 한 채 나 또한 유저들을 정리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휘이익.

서걱.

“으악!”

유저들을 도륙하는 내 도가 다급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2층에 있던 유저들이 이 파라다이스에 있던 밤손님 길드의 모든 병력일 터였다. 한 지부의 모든 병력이 당했다면 분명 본부나 다른 지부에서 나머지 병력을 보낼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밤손님 길드는 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 5분도 지나지 않아 나머지 유저들이 모일 것이 분명했다.

“파이어 볼!”

콰가강.

염환 또한 비교적 여파가 작은 하위 마법을 사용해 로그아웃 직전의 유저들을 처리하며 틈틈이 유저들이 드롭한 아이템을 챙겼다.

마리아만이 내 곁에 붙어 간간히 치료 마법이나 보조 마법을 사용 할 뿐이었다.

“휴유… 끝인가?”

2층을 한 바퀴 돌며 아이템을 수거한 염환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티나, 문을 찾아라.”

고개를 끄덕인 티나가 몸을 날려 2층 곳곳을 살폈다. 나머지 일행 또한 각자 흩어져 3층으로 가는 입구를 찾았다.

“찾았습니다.”

티나가 반쯤 열린 문을 들고 일행을 향해 외쳤다.

확실히 아지트에 하나씩 있는 아지트의 증표가 있는 마지막 층으로 가는 입구라 그런지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가자.”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해 도를 들어 자세를 취한 뒤 입구로 몸을 날렸다.

저벅저벅.

얼마를 걸었을까. 마침내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문이 나를 맞이했다.

“티나, 앞장서라.”

“예!”

갑작스런 기습에는 나보다는 민첩성이 높은 티나가 훨씬 더 대응하기 쉽기에 티나를 앞세우고 나 또한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내 집무실에 가까워질수록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로 집무실에서 느껴지는 존재감 때문이었다.

‘존재감이 없다?’

아지트의 증표가 존재하는 마지막 층이라면 오히려 1층이나 2층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병력이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엄청난 수의 함정을 설치해야 옳다.

그런데 분명 내 감각이 말해주는 집무실의 존재감은 ‘0’이었다.

즉 그 누구도 없다는 말이었다.

쾅!

“제길.”

거칠게 문을 열치고 들어간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이게 뭐야?”

내 뒤를 이어 집무실로 들어선 염환 또한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뒤늦게 들이닥친 티나와 마리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아, 아무도 없네요?”

수수한 장식이 돼 있는 커다란 방에는 말 그대로 아무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이 지부의 지부장이 사용했을 법한 거대한 책상 위에 있는 약 1m 정도의 허공에서 둥둥 떠다니는 초승달 문양의 조각상, 바로 밤손님 길드의 길드 증표뿐이었다.

“이게 대체…….”

길드 증표를 파괴하기 위해 막 책상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계단으로 통하는 입구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티나가 돌연 다급하게 뛰어들었다.

“티나, 무슨 일…….”

“마스터! 함정입니다!”

“뭐?”

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다급한 음성을 토해낸 티나가 재빨리 마나를 끌어 올려 단창에 기운을 덮어씌웠다.

“2층에서 많은 유저들이 계단을 통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큭. 제길! 염환, 마리아! 마법으로 계단을 부숴라!”

입구에 서서 마법을 시전하는 염환과 마리아를 뒤로하고 재빨리 도를 휘둘러 아지트의 증표를 파괴했다.

그러자 ‘쿠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초승달 모양의 조각이 빛과 함께 바스러졌다.

‘5분!’

아지트의 증표가 파괴되었으니 5분이 지나면 저절로 아지트가 붕괴될 것이다. 그전에 이곳을 빠져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염환! 뒤로 빠져 나이트메어의 신전 근처로 가는 곳에 있는 워프 포탈을 열어라! 아무 곳이나 상관없다!”

“크윽. 제기랄!”

거칠게 욕을 내뱉으며 내 곁으로 다가온 염환이 스틱을 들고 마나를 끌어 모으며 입을 열었다.

“너도 나가서 시간을 때워라. 마리아 혼자로는 안 될 것 같다.”

“뭐?”

“나가보면 안다! 빨리!”

다급한 염환의 말에 몸을 날려 입구로 다가간 내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율칸!”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유저들의 선두에 서서 거대한 방패로 모든 마법을 막아내는 기사는 바로 검은 사자 길드의 간부인 붉은 기사라 불리는 율칸이었다.

스으윽.

꽈가강!

“빌어먹을!”

무차별적으로 도기를 날리는 내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 나왔다.

폭이 좁은 계단이라면 염환과 마리아만으로도 충분히 유저들을 상대할 수 있다. 좁은 지형은 마법을 사용하기에 최적이기에 엄청난 열세에도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엄청난 방어력을 가진 기사가 없다는 가정 하에 가능한 일이다.

폭이 좁다는 말은 곧 사용하는 마법 또한 범위가 크지 않은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마법은 높은 클래스가 아닌 이상 위력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정도 마법이라면 율칸 혼자서도 충분히 방패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아이언 나이트. 일명 강철 기사!

이것이 바로 붉은 기사라 불리는 율칸의 별명이었다.

다른 클래스에 비해 월등히 방어력이 높은 클래스인 기사가 ‘아이언 드래곤’이라는 사각 방패를 착용하면 쓰리 스타의 화염계 마법까지 버틸 수 있는 엄청난 항마력와 방어력을 가지게 되는데, 율칸이 그 경우였다.

더군다나 율칸이 사용하는 사각 방패인 아이언 드래곤은 여타 검은 사자 길드의 아이템을 이용해 업그레이드를 해서 여타 아이언 드래곤에 비해 몇 단계나 더 높은 방어력과 항마력을 가지고 있다.

계단을 통해 꾸역꾸역 몰려오는 유저들의 수는 100을 넘어 200은 돼 보였다.

좁은 폭의 복도로 들어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아무리 체력이 적은 도적 유저들이라지만 그 수가 200이라면 공격에도 한계가 있다.

‘제길. …응?’

이내 무차별적으로 도기를 날리던 나는 유저들의 후방에 서서 유저들을 격려하는 한 무리를 발견했다.

“보티스, 해골, 베팔, 월향!”

“예?”

내뱉은 내 말에 곁에서 마법을 난사하던 마리아가 도기를 난사하지 않고 멍하니 서서 복도의 끝을 바라보는 나를 쳐다봤다.

“블러드 님, 대체 왜…….”

“월향! 크허어어엉!”

“꺄악!”

내 입에서 터져 나온 커다란 포효에 마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인 마리아가 아니었다.

월향!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율칸도, 보티스도, 해골도, 베팔도 아닌 월향 뿐이었다.

“월향! 으아아악!”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내 입에서 살기어린 괴성이 튀어 나와 복도를 진동했다.

쿠와아아앙.

우우우우웅.

“허억.”

“큭.”

주체하지 못할 분노에 내 몸에서 섭혼기와 마기가 솟구쳐 복도를 타고 올라 분노의 근원인 월향을 향해 쏘아졌다.

아이언 나이트라 불리는 율칸의 방패조차, 200명 가까운 유저조차 섭혼기와 마기를 막지 못했다. 진득한 섭혼기는 거칠 것이 없었다.

쿠와아아앙.

“으아악!”

“크악!”

섭혼기와 마기가 계단을 거슬러 오르면 오를수록, 유저들의 비명이 커지면 커질수록 내 체력이 빠른 속도로 차올랐다.

콰가가가.

이내 검붉은 섭혼기가 막 월향 일행과 부딪치려는 순간, 나에게까지 들릴 정도의 ‘우웅’ 하는 커다란 소리가 나며 월향 일행 앞으로 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그와 동시에 섭혼기와 투명한 막이 부딪히며 커다란 폭음이 발생했다.

콰아앙!

“크윽.”

섭혼기가 소멸되자 찌릿한 통증이 몸 내부에 퍼졌다.

그리고 멈칫했던 율칸과 유저들이 다시 들이닥쳤다.

“크윽. 제길!”

“야! 포탈 열었다. 가자!”

내가 욕을 내뱉으며 도기를 끌어올리는데 염환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은빛 기운이 넘실거리는 워프 포탈 앞에 선 염환이 초조한 표정으로 다시 외쳤다.

“가자니까! 이대로 있으면 다 죽는다!”

“제기랄!”

내 입에서 터져 나온 거친 욕에 마리아가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큭. 이대로 가야 한다니!’

원수 중 한 명이 저 앞에 있는데도 그냥 가야 한다니!

뿌드득.

내 입에서 서늘하게 이 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가 진득한 미소를 흘리자 곁에 있던 마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블러드 님, 괜찮…….”

“먼저 가라.”

“예?”

“포탈로 먼저 가라고 했다. 티나, 너도 먼저 가라.”

단호한 내 말에 뭔가를 말하려던 마리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탈 속으로 사라졌다.

“마스터…….”

“가라, 티나. 가서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티나가 워프 포탈 속으로 사라졌다.

그 동안에도 율칸과 유저들은 거침없는 기세로 계단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염환, 너도 먼저 가라.”

포탈을 시전한 시전자가 사라져도 1분 정도는 유지되는 포탈의 특성상, 내가 포탈에 탈 시간은 충분했다.

이내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염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믿으마.”

휘익.

그 말을 끝으로 염환이 거침없이 포탈 속으로 몸을 날렸다.

“크큭.”

염환을 끝으로 점차 크기를 줄여가는 포탈을 바라보는 내 입에서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내 몸을 돌려 계단을 향해 도를 겨눈 내 입에서 다시 한 번 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율칸, 보티스, 해골, 베팔. 그리고 월향!’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이름을 한차례 중얼거린 나는 계단을 훑어봤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유저의 수는 이제 200을 넘어 300 가까이 되고 있었다.

유저의 선두에는 율칸이 서 있었고, 계단의 입구에는 율칸을 제외한 나머지 간부들이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한줄기 기다란 한숨이 끝나는 순간, 계단을 향해 도를 겨눈 내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살(千殺).”

후우웅.

어디선가 불어온 미세한 바람이 내 머리칼을 스쳤다.

그와 동시에 내 손에 들린 도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허공을 그었다.

스으윽.

느릿하게 움직이는 내 도를 따라 요사한 마기와 섭혼기가 따라 움직이며 궤적을 만들었다.

쿠구궁!

커다란 발소리와 함께 거대한 덩치의 율칸이 10m 앞까지 다가온 그때, 마침내 십(十)자 형태의 검은 궤적을 그린 내 도가 멈칫했다.

그리고 내 앞의 공간이 ‘지직’ 하며 회색의 화면을 그렸다.

‘버그?’

당황한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겨우 내 몸통만 했던 십자 형태의 궤적이 크기를 불리는가 싶더니 곧 쫘악 아가리를 벌렸다.

푸화아악.

크에에엑!

그와 동시에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괴상한 생명체가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던 비명을 지르며 공간에서 튀어 나왔다.

크에에에엑.

1m 정도의 크기에 기묘한 촉수들이 달린, 뱀의 몸에 해골의 얼굴을 가진 소악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크에에엑!

키에엑!

뱀의 몸에 달린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촉수와 해골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의 짙은 귀화(鬼火)에 복도가 매캐한 마기로 가득 찼다.

크에에엑!

가장 먼저 소악령과 부딪힌 것은 율칸의 옆에 있던, 밤손님 길드의 길드원으로 보이는 붉은 머리의 유저였다.

“이게 뭐… 으아악!”

허공을 가르고 자신의 가슴을 파고든 소악령을 향해 단검을 휘두르던 붉은 머리 유저의 가슴이 순간 ‘퍽’ 하며 움푹 파였다. 그리고 다른 한 소악령이 붉은 머리의 가슴을 스치자 붉은 머리의 가슴이 쩍 갈라지며 피를 뿌렸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콰드득. 콰직.

“으아악.”

한 유저의 가슴을 그대로 꿰뚫은 소악령이 다른 희생자를 잡아 그대로 등을 꿰뚫고 가슴으로 나와 마기를 내뿜었다.

한 마리 소악령이 구멍 난 가슴에서 얼굴을 내밀며 혀를 날름거리는 끔찍한 모습에 유저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가슴을 타고 노는 소악령을 손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팔을 휘둘렀지만 헛수고였다. 오히려 해골 얼굴에 팔이 물려 피를 뿌릴 뿐이었다.

소악령들은 말 그대로 악귀가 되어 복도를 누볐다.

수십 마리의 소악령들이 한 유저를 먹이로 삼고 유저를 감싸면 유저의 몸이 움푹 움푹 파였다. 또 어떤 유저의 몸은 잘게 썰려 바닥을 굴렀다.

시스템으로 인해 고통은 제한이 되겠지만 그 잔인한 광경이 주는 정신적 공포감은 그대로 전달됐다.

사방에서 공포에 찌든 비명과 고함이 어우러져 장엄한 노래를 연주했다.

그리고 그 노래에 맞춰 소악령들이 춤을 추며 복도를 헤집었다.

소악령 한 마리가 가진 위력은 투 스타 검기의 위력이었다.

복도로 진입한 유저의 수가 300이라고 해도 천살로 인해 소환된 소악령의 수는 천 마리다. 근 한 명당 세 마리의 소악령이 달라붙었다.

거기다 내가 가진 섭혼기와 마기의 위력은 거의 투 스타 후반이나 쓰리 스타 초급의 검사가 사용하는 검기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천살이 발동된 복도는 지옥이라 봐도 무방했다.

“끄응.”

꽈가가강!

아이언 드래곤, 일명 강철의 용이라 불리는 사각 방패가 소악령과 만날 때마다 움푹 움푹 찌그러지며 흉한 모습을 보였다.

아이언 나이트 율칸조차 간신히 소악령들을 방어하고 있었다. 나머지 유저들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다.

“크아아악. 살려줘!”

“내 팔! 팔!”

“으아악! 도망쳐! 귀환해라!”

천 마리나 되는 소악령이 벌이는 피의 축제에 섭혼기와 마기가 미쳐 날뛰었다.

몇몇 유저들이 뒤로 도망치려 했지만 오히려 혼란을 가져올 뿐이었다.

“크크큭.”

지옥으로 변한 복도를 한차례 훑은 뒤 미련 없이 등을 돌리려는 순간, 복도 저 끝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라클래스!”

멈칫.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월향이었다.

“헤라클래스!”

다시 한 번 복도를 울리는 월향의 목소리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크윽.”

‘아직은 아니다! 참아야 한다!’

천살의 발동 시간은 30초. 이제 곧 그 30초가 끝나갈 때였다. 여기서 뛰쳐나간다면 오히려 명만 재촉하는 꼴이었다.

당장 달려들어 무한참을 사용하고 싶은 심정을 애써 누르며 도를 갈무리 한 뒤 재빨리 포탈 속으로 몸을 날렸다.

* * *

타닥.

땅과 발이 만나는 안락함을 느낀 순간 포탈이 끝나고 도착한 곳은 이글거리는 열기를 내뿜는 사막이었다.

“왔냐?”

염환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뜨자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풍경이 나를 반겼다.

‘라흐라인가?’

유토리안에 붙어 있는 거대한 사막이자 판타즈마 월드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막 필드인 라흐라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끝도 안 보이는 모래밭이 존재할 리 없었다.

“여기가 어디냐?”

“라흐라 중간의 어느 사막.”

내 물음에 아이템 창에서 물을 꺼낸 염환이 물을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30분 정도만 더 걸어가면 나올 거다. 뭐, 던전 근처라 별다른 몬스터는 없으니까 마음 놓고 가자. 휴우…….”

파라다이스에서 벌인 혈전이 꽤나 힘들었는지 염환이 폭염의 마도사라는 별명답지 않게 엄살을 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염환의 말대로 근처에는 별다른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동물 계열 몬스터인 사막 여우나 몇 마리 독사들이 전부였다.

“휴우… 가자.”

깊은 한숨을 내쉰 염환이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제길.”

내 입에서 흘러나온 욕에 일행이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저마다 불평을 내뱉었다.

파라다이스에서 빠져나와 라흐라에 도착해 나이트메어의 신전을 찾아 걸음을 옮긴 지 벌써 40분이 지났다.

30분만 가면 나타날 거라 자신했던 염환은 연신 욕을 중얼거리며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화염 속성을 선택해 더위에 면역이 있는 염환이 저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참을성이 강한 티나가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티나의 얼굴에도 짜증이 나타나 있었다.

평소에는 환영했던 현실감이 지금은 오히려 짜증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다.

“염환, 아직 멀었냐?”

“다 왔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조금만.”

연신 ‘조금만 가면 된다, 조금만.’을 중얼거리는 염환의 모습에 인상을 구기고 고개를 돌리는 내 눈에 저 멀리 검은 점이 보였다.

‘설마…….’

설마 하는 심정으로 안력을 돋워 보자 거대한 건물이 모습을 나타냈다.

거대한 탑 모양의 건물 꼭대기에는 눈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나이트메어의 증표였다.

“어? 저기 보인다!”

염환 또한 탑을 본 것인지 짜증으로 가득한 얼굴을 풀고 웃음을 터트리며 탑을 향해 내달렸다.

나도 탑을 향해 내달리고 싶었지만 체력이 약한 마리아를 위해 일부러 걸음을 늦춰 마리아의 걸음에 맞췄다.

티나 역시 그런 내 곁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빨리 와라! 으하하하!”

먼저 탑에 도착한 염환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일행을 재촉했다.

“휴우, 드디어 도착했네요.”

한숨을 내쉬며 땀을 닦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내 입에서도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동 시간이 비록 40분이라지만 그 장소가 사막이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엄청난 고문이다.

살인적인 더위로 떨어졌던 체력을 포션으로 회복하며 고개를 들자 거대한 탑이 나를 반겼다.

저번에 망자의 대지에서 본 마법사의 탑보다 거의 서너 배 이상 더 높은 탑의 표면은 흑요석으로 처리되어 있었고, 탑의 꼭대기에는 하얀색의 금속으로 반쯤 감긴 눈이 조각되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휴식을 취하던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이네요?”

마리아의 말대로 탑, 그러니까 나이트메어의 신전 주변에는 다른 인적은 없었다.

“나도 그게 궁금하군.”

아무리 살인적인 더위를 자랑하는 사막 필드지만 나이트메어 신전 지상은 탑의 형태를, 지하는 몬스터들이 배회하는 미로 형태의 던전이다. 게다가 염환의 말대로라면 제법 높은 수준의 던전이다. 저레벨의 던전처럼 북적이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내가 사냥하던 살인마의 소굴처럼 제법 사람이 있어야 할 터였다.

“당연하지. 이 근처만 해도 던전이 네 개나 더 있다. 그곳에 비한다면 이곳은 경험치도 그저 그렇고 드롭되는 아이템도 그저 그런 던전이다. 솔직히 말해 나이트메어에 관련된 퀘스트가 아니라면 진작 사라졌을 곳이다.”

“으음…….”

나는 납득할 만한 염환의 말에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라흐라에는 다른 필드보다 던전이 많았다.

솔직히 라흐라에 던전이 많지 않았다면 그 어떤 유저가 오겠는가.

더운 것은 기본이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날씨는 살인적이었다. 더군다나 몬스터들의 구성 자체가 고레벨의 유저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하나같이 강력했다.

그나마 던전이나 보석들이 나는 곳이 많아 유저들이 모이는 것이다.

“후우… 가자.”

“그래.”

설마 밤손님 길드가 이곳까지 올 일은 없겠지만 괜히 밖에서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기에 탑의 유일한 입구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나이트메어의 부활 말고도 할 일은 많았다. 폭스의 초대로 새롭게 만든 마법사의 탑에 가서 마법사가짱이얌, 아니 크레이언도 만나야 할 터였다.

마침내 발을 들여 논 탑의 내부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속이 빈 대나무 같은 형태였다.

심지어 위로 올라가는 계단도 없었다. 그저 중앙에 있는 피라미드 형태의 조각상이 존재할 뿐이었다.

“여기다!”

내가 다른 입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릴 때 저 멀리 있던 염환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

“후우… 하도 예전에 와서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다행이다.”

염환이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보통 던전의 경우 입구가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게 된다면 자칫하다가는 사냥도 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입구를 찾다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다행히 던전으로 내려가는 입구의 위치는 바뀌지 않은 듯했다.

“크큭. 모두 조금만 뒤로 빠져라.”

우우웅.

그그그긍.

낮은 웃음을 흘린 염환이 나이트메어의 증표가 새겨진 바닥에 손을 대고 마나를 주입한 후 뒤로 물러서자, 돌이 맞물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쿠우웅.

푸스스.

마침내 약 3m 정도의 바닥이 열리며 회색 가루가 흩날렸다. 입구의 형태는 파라다이스처럼 계단을 통해 지하로 가는 형식이었다.

“기분 나쁘네요.”

“명색이 던전이니까. 크큭.”

계단의 끝이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에 마리아가 몸을 떨자 염환이 낮게 웃으며 답했다.

“염환, 마리아. 불을 밝혀라.”

“라이트.”

“바이올렛 라이트.”

푸화악.

염환과 마리아의 간단한 주문에 새하얀 빛의 광구와 보랏빛 광구가 ‘푸확’ 하고 빛을 뿌렸다.

평범하게 빛을 밝히는 염환의 라이트와는 달리 바이올렛 라이트는 주변 파티원의 체력과 공격력을 올려주는 보조 마법으로 쓸모가 많은 마법이다. 거기다 빛의 밝기 또한 라이트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다.

얼마 걷지 않아 계단이 끝나고 마침내 던전 지하 1층이 보였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미로 같은 복도가 어지럽게 얽혀 있어 어디로 가야 지하 2층의 입구가 나오는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여러 갈래로 나뉘는 길에서 멈칫하는 나를 제치고 앞으로 나선 염환이 자신 있게 걸음을 옮겼다.

“지하 3층까지는 나만 믿고 따라 와라.”

평소에는 덜떨어진 모습을 보여주지만 게임에 있어서는 나에 버금갈 정도로 천재성을 보여주는 놈이 바로 다훈, 폭염의 마도사 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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