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3 격돌 2
라이트를 앞세워 거침없이 나가던 염환이 멈칫하며 순식간에 내 뒤로 물러섰다.
“왜?”
“몬스터다.”
그르르륵.
염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앞 어둠에서 가래 끓는 불쾌한 목 울림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라이트의 불빛에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르르륵.
스르르.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곪아 터진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나타난 것은 바로 좀비보다 한 단계 위의 몬스터인 구울이었다. 레벨 150에서 200 사이의 몬스터인 구울은 언데드 몬스터로 보통은 죽은 시체가 강력한 마력을 머금고 살아난 것으로 설정이 되어 있는 몬스터다.
하지만 이곳 판타즈마 월드에서는 아니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전사나 일반인이 나이트메어의 유혹에 빠져 끝없는 악몽을 헤매는 존재로 타락하면 탄생하는 존재가 바로 구울이라고 설정이 되어 있다.
구울은 좀비와는 달리 이성을 가진 존재다.
그들은 썩어 문드러진 몸을 이끌고 영원히 악몽을 헤매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만나면 공격하는데, 그들의 악몽 속에서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괴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구울 정도의 몬스터라면 일행에게는 쉬운, 마리아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의 몬스터였다.
스윽.
‘응?’
점차 거리를 좁히는 구울을 처리하기 위해 도를 들어올린 내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일행을 향해 다가오던 구울이 돌연 움직임을 멈췄기 때문이다.
“무슨…….”
구와아악!
퍼억.
의문을 흘림과 동시에 한 발 내딛자 우리들 앞에 있던 구울이 비명을 지르는가 싶더니 곧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터져 썩은 뇌수를 사방으로 튀겼다.
“미친!”
“꺄악!”
갑작스런 구울의 죽음에 일행이 놀랄 틈도 없이, 비틀거리던 구울이 한차례 거세게 떨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토해냈다.
콰드득. 콰득.
우드득.
팔이 뒤틀리고 다리가 부러졌다. 뼈들이 부러져 몸 이곳저곳에서 튀어 나와 끔찍한 몰골을 만들었다.
투두둑.
이내 순식간에 걸레 조각으로 변한 구울이 모래가 되어 쓰러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휘이잉.
그리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구울의 모래가 사라지고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큐버스!”
“후훗.”
염환의 외침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 존재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170cm은 되어 보이는 키에 육감적인 몸매, 몸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주는 검은 가죽옷과 등에서 솟아난 매혹적인 붉은 박쥐 날개,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은 몽마(夢魔)라 불리는 서큐버스가 분명했다.
레벨 330에서 360 사이의 서큐버스는 남성 몽마인 인큐버스와 함께 나이트메어의 수족으로 불리는 몬스터다.
그들은 마법과 함께 특별하게 염력이라는 것을 사용하는데, 염력이란 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초능력이다.
쓰리 스타급의 몬스터이지만 데스나이트와 함께 웬만한 던전의 보스 몬스터로 등장하는 몬스터가 바로 서큐버스다.
이내 육감적인 몸매를 자랑한 서큐버스가 일행을 향해, 아니 정확히 나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형제의 대리자이시자 암흑투마군단의 군단장께 인사를 드립니다. 소녀는 아버지의 신전을 지키는 미천한 신관인 리나라고 합니다.”
“으음…….”
자신을 리나라고 칭하는 서큐버스가 가리키는 자는 내가 분명했다.
서큐버스의 아버지라면 육악왕 중 한 명인 악몽왕 나이트메어고, 나이트메어의 형제라면 암천왕 라데스다. 그리고 그의 대리자이자 암흑투마군단의 군단장이라면 바로 나다.
“블러드다.”
“존귀한 분이시여.”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린 서큐버스 리나가 말을 이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이따위 비천한 존재들이 감히 존귀한 분을 해하지 못하게 저희 신전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리나가 말하는 비천한 존재는 끔찍하게 사라진 구울이 분명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구울을 죽인 것은 리나의 힘일 확률이 높았다.
내 뒤에 있던 염환이 날카로운 눈초리를 하고 입을 열었다.
“잠깐. 대체 어떻게 블러드가 이곳에 온 줄 안 거지?”
날카로운 염환의 지적에 일행의 얼굴에도 의문이 떠올랐다.
확실히 내가 이곳으로 오면서 누군가에게 온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날카로운 염환의 눈초리를 정면으로 받은 리나가 고혹적인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존귀한 분께서 가지고 계신 존귀한 분의 증표로 깨달았습니다. 혼을 당기는 기운을 가진 갑옷과 혼을 멸하는 기운을 가진 무기는 존귀한 분밖에 사용할 수 없으니까요. 더군다나 갑옷과 무기가 아니더라도 저희 대신관님께서는 이미 존귀한 분께서 오시리란 것을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대신관?”
이번에 반문한 것은 마리아였다. 클래스가 성직자인 마리아가 대신관이라는 말이 궁금한 것은 당연했다.
“예. 그런데 이 기운은…….”
뭔가를 말하려던 리나가 말끝을 흐리며 마리아를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리나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천박한 어둠의 기운이군요.”
방금 전의 매력적인 여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차가운 살기를 흘린 리나가 그 살기만큼이나 차가운 눈으로 마리아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아!”
마리아의 클래스는 성직자. 그것도 라그아노를 섬기는 성직자다.
라그아노라면 루키아논의 앙숙이었다. 곧 육악왕인 나이트메어와도 앙숙이라는 소리였다.
우우웅.
리나의 몸에서 유형화한 기운이 뭉클뭉클 솟아났다. 분명 마리아를 향한 살기였다.
“으음…….”
점차 날카로워지는 분위기에 염환이 스틱을 들고 불꽃의 창을 소환했다.
마리아 또한 가만히 서서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들고 어둠의 마나를 몸에 둘렀다.
오직 티나만이 긴장한 눈빛으로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제기랄.’
더 이상 보고 있다가는 금방이라도 전투할 분위기에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난 퀘스트를 깨러 온 것이지 전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모두 그만해라. 염환, 마리아. 마법을 취소해라. 리나, 너도 기운을 거둬라.”
“…….”
내가 말렸지만 염환과 마리아는 물론 리나마저도 기운을 거두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큭. 이것들이!’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모두 기운을 거둬라.”
쿠와아앙!
섬혼기와 마기를 내뿜으며 한 자, 한 자 끊어 말하자 그제야 마리아와 염환, 리나가 움찔하며 기운을 거뒀다.
마리아를 제외한 두 명이 나보다 약할 리는 없지만 내가 내뿜는 기운은 포 스타의 유저라 해도 위축될 만큼 강맹한 것이었다.
“리나, 바젤에게 안내해라.”
퀘스트에서는 나이트메어의 신전에 있는 바젤에게 자세한 사항을 들으라 했으니, 리나가 말하는 대신관 또한 바젤이 분명할 터였다.
과연 내 예상대로 고개를 끄덕인 리나가 몸을 돌려 등에 달린 날개를 접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과연 서큐버스인 리나가 앞장을 서서 그런지 그 어떤 몬스터도 감히 일행을 위협하지 못했다. 던전의 모든 몬스터가 일행을, 아니 정확히 말해 리나를 피해 다니고 있었다.
‘하긴, 서큐버스니.’
고고한 자태로 걸음을 옮기는 리나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골이 변한 데스나이트만큼이나 희귀한 것이 바로 서큐버스다.
더군다나 데스나이트는 유저가 변할 수 있지만 서큐버스는 그럴 수 없기에 더 희귀하다.
그리고 육체적 능력이 강조된 데스나이트와는 달리 서큐버스는 마법과 함께 염력이라는 특수능력을 사용해, 어떻게 본다면 데스나이트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몬스터다.
데스나이트는 언데드 몬스터지만 서큐버스는 마족, 그것도 제법 강한 축에 속하는 악몽왕의 직계 혈통인 몽마족(夢魔族)이다.
대체로 마족들은 보통 종족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몽마족의 경우에는 그들의 이름에 걸맞게 다른 종족들이 꿈을 꾸는 한밤에 거의 두 배 가까이 힘이 강해진다.
그렇기에 마족을 사냥하는 유저들은 마족의 혈통과 특징 등을 파악하고 마족이 강해지는 시간대를 피해 사냥을 가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나이트메어를 부활시킨다면 대륙의 모든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은 두 배 이상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내 전력 또한 강해지겠지. 크크큭.’
스토리로 보자면 나이트메어와 라데스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아니, 앙숙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지금은 대륙 진출이라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힘을 합쳐야 하는 때다.
그리고 라데스의 대리자인 내가 나이트메어를 깨운다면 아무리 라데스와 앙숙인 나이트메어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힘을 합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리나를 선두로 걸음을 옮긴 일행의 위치는 어느새 지하 1층을 지나 지하 2층, 지하 3층을 거쳐 지하 4층의 입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구울과 스켈레톤 나이트, 스켈레톤 아처와 스켈레톤 메이지가 나오는 지하 1, 2층에서는 별다른 격돌이 없었다. 지하 3층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지하 3층에서는 몬스터들의 경배를 받으며 이동했다.
지하 3층에서는 꿈과 공포를 먹는 마수 ‘섀도우 비스트’와 꿈과 절망을 먹는 마수 ‘그레고리’가 나왔다. 이 두 몬스터는 둘 다 정신계 마법에 능통한 마수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서큐버스의 상대는 되지 못하는지, 고개를 조아려 리나를 경배했다.
“이제 4층입니다.”
일행 앞에서 걷던 리나가 돌연 걸음을 멈춰 한쪽으로 비켜섰다.
[염환: 4층은 처음 와보는걸.]
염환이 파티원에게만 들리는 음성 채팅으로 말했다.
“흐음…….”
나 또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판타즈마 월드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필드와 던전에 가본 나조차 처음 오는 곳이었기에 호기심이 일었다.
“와아, 멋지네요.”
내 뒤를 따라오던 마리아가 고개를 내밀어 지하 4층으로 통하는 입구를 보고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티나 또한 화려한 입구의 모습에 감탄하며 바라봤다.
“화려하군.”
“아버지께서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십니다.”
지나가는 투로 던진 내 말에 리나가 대답했다.
확실히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가진 나이트메어는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고 설정이 되어 있었다. 그런 설정을 증명이라도 하 듯, 4층으로 가는 입구는 보통 신전으로 가는 입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이 되어 있었다.
맨 바닥에 계단으로 통하는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석상들이 구멍을 보호하듯 세워져 있었다.
석상의 주변도 화려한 장식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더욱더 황당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바로 모두 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마리아: 저거 가져다 팔면 한 달 치 분유는 걱정 없겠네요.]
[염환: 분유라니?]
마리아가 그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황금 동상을 보며 말하자 마리아의 사정을 모르는 염환이 의문을 흘렸다.
“아래로 내려가시죠.”
리나가 먼저 지하 4층으로 내려가자 나 또한 거침없이 리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지하 4층으로 통하는 계단 또한 화려하게 치장돼 있었다. 천장을 비롯해 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빛을 내뿜는 마나석이 박혀 있었고 언뜻언뜻 여러 보석이 보였다.
[블러드: 군침 흘리지 마라, 마리아.]
[마리아: 쳇. 알았어요.]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벽에 박힌 보석을 빼낼 것 같은 마리아를 향해 일침을 가하자 마리아가 입술을 내밀고는 투덜거렸다.
화려함을 뽐내는 계단을 따라 얼마 걷지 않아 마침내 나이트메어를 모시는 제단이 있는 지하 4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도착했습니다!”
가장 먼저 신전에 도착한 리나가 곱게 접힌 날개를 활짝 펴고는 힘차게 말했다.
“으음…….”
“과연 대단하군.”
“히야…….”
가장 먼저 도착한 내 입에서 놀라움 섞인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염환과 마리아의 감탄하는 말이 이어졌다.
티나 또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놀란 표정으로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낸 신전을 바라봤다.
4층은 다른 층과는 다르게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거대한 돔 형태였다.
100m 정도 크기의 돔 중앙에는 지상에 있는 탑의 중앙에 자리 잡은 그 피라미드 구조물과 유사한 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피라미드 표면에는 나이트메어를 상징하는 반쯤 감긴 눈의 조각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조각의 중심에는 둥그렇게 모여 있는 인영들이 있었는데, 인영들의 정체는 바로 서큐버스와 인큐버스였다.
“어서 오십시오, 존귀한 분이시여.”
“존귀한 분이시여!”
한 서큐버스의 말에 나머지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중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은 유일하게 붉은 로브를 걸치고 있는 인큐버스였다. 몬스터로 설정이 되어 있는 다른 인큐버스들과는 달리 이 이십대 중반의 미남 얼굴을 가지고 있는 이 인큐버스의 머리 위에는 ‘바젤’이라는 이름이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제가 바로 바젤입니다. 부족하지만 아버지를 따르는 자식들의 수장을 맡고 있습니다.”
“블러드입니다. 부족하지만 아버지를 따르는 암흑투마군단의 군단장의 자리를 맡고 있습니다.”
공손한 바젤의 어투에 나 또한 공손하게 답했다.
내가 라데스의 대리자라면 바젤은 바로 나이트메어의 대리자였다. 다른 서큐버스와 인큐버스 따위와는 격이 다른 것이다.
나의 공손한 어투에 바젤이 잘생긴 얼굴 위로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공손하게 대할 줄 몰랐다는 것 같았다.
‘흥.’
스토리에 따르면 육악왕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악왕이 바로 라데스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악왕 또한 라데스다.
그에 비해 나이트메어는 특유의 어린아이 같은 성격 때문에 별다른 세력도 없는, 그저 육악왕 중 가장 마법을 잘 사용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별 달리 볼 것도 없는 위치였다.
그렇기에 내가 바젤에게 하대를 한다고 해도 바젤은 나에게 어쩔 수 없었다. 따지고 본다면 말만 힘을 합치는 것이지 바젤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내 바젤이 내민 손을 마주 잡자 머릿속으로 맑은 종소리와 함께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띠리링.
[S급 퀘스트 ‘나이트메어의 부활’ 제1장을 완료하였습니다.]
[나이트메어의 대리자 바젤에게 자세한 사항을 들으십시오.]
“블러드 님.”
머릿속으로 울리는 목소리에 미처 반응할 시간도 없이 내 손을 꽉 잡은 바젤이 입을 열었다.
“과거 100년 전, 간악한 인간과 엘프의 손에 봉인당하신 아버지의 부활을 도와주십시오!”
띠리링.
[S급 퀘스트 ‘나이트메어의 부활’ 제2장이 발동되었습니다.]
내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종소리와 함께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잔뜩 상기된 얼굴의 바젤을 바라보는 내 머릿속에 거의 외우다시피 한 판타즈마 월드의 스토리 중 나이트메어의 봉인에 관한 부분이 촤르륵 떠올랐다.
루키아논과 여섯 악왕들이 다아리엘과 라그아노, 그리고 두 신의 창조물들에게 패해 악계로 숨어들고 200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를 만들어 갖가지 종족들의 악몽 속으로 들어가 괴롭히는 것으로는 더 이상 재미를 느끼지 못한 나이트메어가 힘의 2분의 1을 소진하는 차원계 마법을 사용해 봉인된 악계의 차원을 열고 중간계로 나왔다.
그것이 악몽의 시작이었다.
200년 전보다 훨씬 더 악독하게 변한 나이트메어는 200년 동안 놀지 못한 것에 대해 분풀이하듯 세상을 마구 휩쓸고 다녔다.
오죽하면 나이트메어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한때 대륙에서는 잠을 자지 말자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였다.
악몽이야말로 나이트메어의 힘의 근원! 모든 생물은 괴로운 상황에서 악몽을 꾼다. 그렇기에 나이트메어는 모든 생물들에게 좀 더 괴로운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보다 못한 인간과 엘프가 힘을 합쳐 나이트메어를 소멸하기 위해 모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이트메어를 봉인했다.
그때 당시 가장 커다란 공을 세운 마법사가 그 유명한 마법사인 ‘그랑데시아’다. 현재 무공서와 함께 나온 천 급 아이템인 ‘그랑데시아 스태프’의 전 주인이자 인간과 엘프의 혼혈인 ‘하프 엘프’의 마법사!
“블러드 님!”
내가 막 대답하려는 순간, 내 말을 제지한 바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악계에 봉인되신 아버님에게서 신탁이 내려 왔습니다.”
“신탁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바젤이 말하는 신탁이란 흔히 이벤트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이내 바짝 굳은 얼굴의 바젤이 입을 열어 장엄한 목소리를 흘렸다.
“인간의 탈을 쓴 야수가 돌아올 것이니, 그는 어둠의 마귀일 것이다. 또한 내 형제의 자식일 것이라. 혼마저 태우는 불꽃의 무기일지라. 혼마저 먹어치우는 부정한 어둠의 갑옷일지라. 네 개의 별이 새겨진 심장을 바쳐라. 악몽의 탑에 심장을 꽂아라. 그로 인해 악몽은 다시 부활할지니. 현실이 악몽이 될 것이고 악몽이 현실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탁의 내용입니다.”
“으음…….”
바젤의 말을 끝까지 들은 내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탈을 쓴 야수는 수인족인 나고 어둠의 마귀는 암흑투마군단을 칭하는 것이다. 또한 형제의 자식이라는 것은 라데스의 대리인이라는 것이고 혼마저 태우는 불꽃의 무기는 천살멸혼도를, 혼마저 먹어치우는 부정한 어둠의 갑옷은 암천섭혼갑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네 개의 별이 새겨진 심장을 바치라는 말!
이것은 말 그대로 포 스타 유저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미친!’
과거 내가 포 스타였다. 현재는 누가 포 스타 유저인지 알 수는 없지만, 검은 사자 길드에서는 무라사마와 베팔이 유일할 터였다.
‘베팔!’
방금 전 파라다이스에 베팔이 있었다. 베팔과 1대 1로 대결한다면 이길 가능성은 충분했다. 비록 베팔이 바다의 마도사라 불리는 마법사지만 나는 그를 뛰어 넘는 유저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간부들이었다.
붉은 기사라 불리는 율칸과 검은 그림자라 불리는 보티스, 그리고 해골과 빌어먹을 성녀인 월향까지! 그리고 그 밖의 밤손님 길드의 유저들도 문제였다.
확실히 나와 티나, 그리고 염환과 마리아로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흐음…….”
복잡한 눈빛을 흘리며 바젤을 바라보는 내 입에서 묘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확실히 우리끼리는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바젤과 서큐버스, 인큐버스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몰랐다.
바젤의 자세한 능력은 모르지만 나이트메어의 대리자로서의 능력으로만 따지자면 나와 동급이고, 서큐버스와 인큐버스 또한 수는 적지만 데스나이트인 해골 이상의 강함을 가지고 있다.
‘이 정도라면 해볼 만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승부였다.
거기다 신탁에 따르면 포 스타 유저의 심장을 악몽의 탑에 바치라고 하지 않던가.
“근데 악몽의 탑이 무엇입니까?”
“아, 이 탑이 악몽의 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멈칫한 바젤이 내 물음에 답하고는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본래는 단순히 아버지를 숭배하는 탑이었지만 인간과 엘프의 손에 대륙에 존재하던 모든 신전들을 잃고 이 탑을 신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으음…….”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현재 이 근처의 포 스타 유저라면 염환과 베팔뿐이다. 하지만 염환에게 나를 위해 죽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바로 포 스타로 레벨 업을 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죽을 시에 주어지는 페널티 때문이었다.
바로 레벨 399로 하락!
그것도 현재 레벨에 상관없이!
레벨이 499라 할지라도 죽는다면 무조건 레벨 399로 하락!
이것이 내가 레벨 400, 포 스타가 됨과 동시에 운영진으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물론 그 당시 말도 안 된다며 항의했지만, 이 페널티는 게임 오픈 전부터 계획된 것이라 바꿀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운영진 측의 말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염환에게 죽음을 부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베팔이 있었다.
더군다나 베팔은 지금 이 근처인 유토리안에 있는 상태!
만약 이곳의 위치를 알려주고 유인한다면 만사를 제치고 올 것이 분명했다.
물론 다른 간부들이 문제기는 했지만 일행과 바젤이 내가 베팔을 처리할 시간만 끌어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한 나이트메어와 함께 나머지 간부들을 처리하면 되는 것이고.
‘좋아. 크크큭.’
짙은 웃음을 흘림과 동시에 막 바젤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인큐버스가 바젤에게 다가가 굳은 얼굴로 귓속말을 했다.
그 인큐버스는 엄청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화려한 금발과 새하얀 피부, 붉은 입술과 오뚝한 코, 그리고 커다란 눈은 과연 꽃미남 몬스터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마음이 약한 여성 유저라면 공격할 마음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다 입고 있는 옷은 검은 정장이었는데 위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에 검은 양복 상의를 걸치고, 맨살에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거기다 등에는 날개까지 달려 있어 그 모습 그대로 뮤직 비디오를 찍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런 인큐버스의 모습에 마리아마저도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이럴 수가!”
손짓으로 인큐버스를 물러나게 한 바젤이 커다란 탄식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유토리안의 밤손님이라는 비천한 도적들이 탑의 2층을 넘어 3층을 지나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뭣?”
“뭐야?”
경악 섞인 나와 염환의 외침에 바젤이 다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삼백여 명 정도인데 그중 막강한 기운을 내뿜는 자가 여섯 명이라고 합니다.”
“여섯 명이라!”
강한 기운을 내뿜는 여섯 명이라면 분명 베팔, 월향, 보티스, 율칸, 해골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밤손님 길드의 길드 마스터나 부길드 마스터가 분명했다.
“제길.”
내 입에서 절로 욕이 흘러나왔다.
이내 굳은 표정의 염환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일단 준비하자. 어차피 포 스타 한 놈 죽여야 하잖냐. 제 발로 들어오면 오히려 환영해야지. 크크큭. 바다의 마도사인지 시냇물의 마도사인지 이 폭염의 마도사만 믿어라!”
“크크큭.”
넉살 좋은 염환의 말에 일행은 물론 바젤과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 또한 웃음을 흘리다 곧 놀란 눈으로 염환을 바라봤다.
바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염환에게 물었다.
“다, 당신이 그 유명한 폭염의 마도사?”
“푸하하! 나를 알아보는 NPC가 또 있구만. 이거 너무 유명해도 탈이야. 푸하하하!”
“폭염의 마도사라면, 예전에 한 서큐버스가 팬티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마법을 난사하고 도망친 미친 마법사인데… 당신이 정말 그 폭염의 마도사?”
“푸하하! 그래. 내가 팬티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미친놈처럼 마법을 난사한 폭염의… 뭐? 미, 미친놈? 패, 팬티?”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던 염환이 곧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젤을 쳐다봤다. 그리고 곧 얼굴을 붉히며 내 뒤로 몸을 숨겼다.
[마리아: 뭐요? 팬티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마법을 난사하고 도망쳐요?]
[염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블러드: 질려서 중간에 포기했다고 하지 않았냐?]
[마리아: 실망이네요.]
[염환: 내 말을 좀 들어봐!]
파티 채팅창으로 실랑이를 벌이는 마리아와 염환을 무시한 채 바젤을 향해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비록 멍청하지만 폭염의 마도사라면 대륙에서도 손에 꼽는 강지이니 과거의 잘못은 용서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내 사과에 바젤이 멍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한 명이라도 힘을 모아야 하는 이때에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후훗.”
과연 바젤 또한 인큐버스인지라 살짝 미소를 짓자 내 얼굴이 절로 후끈거렸다.
이런 내 반응에 바젤이 작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비천한 것들이 신성한 곳까지 온 이상, 살아서 내보내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놈들의 심장을 뽑아 아버지의 부활을 축하드려야 합니다!”
곱상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섬뜩한 말을 내뱉는 바젤의 로브가 마구 펄럭였다.
곱상한 얼굴이지만 바젤 또한 염력과 마법을 사용하는 인큐버스.
대신관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만 흑마법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족이다. 바젤의 레벨은 최소 쓰리 스타 중급에서 쓰리 스타 후반. 그 정도라면 충분히 자기 몫을 할 수 있다.
“대신관님! 비천한 것들이 3층을 지나 4층으로 오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리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리나의 보고를 들은 바젤이 뒤에 기립하고 있던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을 향해 소리쳤다.
“인큐버스들은 입구를 중심으로 마법을 준비해라! 라르센과 아논, 겔톤은 소환 마법을 준비해라! 서큐버스들은 뒤로 빠져 몸을 숨기고 있다 놈들이 마법에 당황할 때 두 번째 공격을 감행해라!”
“예!”
서슬 퍼런 눈빛을 내뿜으며 명령을 내리는 바젤의 모습은 진정 대신관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았다.
인큐버스들이 입구를 중심으로 약간 거리를 벌리고 마나를 끌어 모으자 어둠의 마나들이 솟아나 검은 안개 같은 기운을 형상화했다.
서큐버스들 또한 인큐버스들이 있는 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가 공격하기 위해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런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자세를 잡는 세 명의 인큐버스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젤이 말한 라르센과 아논, 그리고 겔톤이라는 소환 마법을 사용하는 인큐버스인 듯했다.
앞으로 나선 세 인큐버스들이 정장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한가득 꺼냈다. 라르센은 붉은색의 철침 같은 털과 뱀의 머리를, 아논은 손가락만 한 이빨 수십 개와 양의 뿔을, 마지막으로 겔톤은 붉은색 까마귀의 머리 박제를 꺼내 허공에 휙 뿌렸다.
타닥.
괴이한 재료들이 입구의 중앙에 떨어지는 순간, 꼼짝 않고 서 있던 세 인큐버스가 입을 모아 주문을 외웠다.
“지옥의 불꽃을 내뿜는 뱀의 머리, 지옥의 바람을 쏘아내는 양의 머리, 지옥 물을 토해내는 까마귀의 머리! 악몽의 비늘을 뒤집어쓴 몸! 지금 이곳에 존재의 유무에 상관없이 부르노라! 악몽의 끝에서 태어난 혼돈의 마수를 부르노라!”
우웅 우웅 우웅.
우렁찬 주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구를 중심으로 모였던 재료 아이템들이 스멀스멀 땅을 기어 한곳으로 모였다.
꾸르릉 꾸릉.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한곳으로 모였던 재료 아이템들이 점차 그 크기를 불려 나갔다. 재료 아이템들이 크기를 키워 나가면 키워 나갈수록 소환 마법을 시전하는 인큐버스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꽤나 고위 마법인가 보군.’
별다른 재료가 필요 없는 소환 마법에 비해 지금 인큐버스들이 시전하는 소환 마법은 꽤나 고위 마법인 듯했다. 특히나 저 붉은 까마귀의 머리는 구하기 힘든 소환 아이템 재료였다.
인큐버스 세 명의 마력을 먹은 재료 아이템들이 크기를 불려 나가는 것을 멈추고 모양새를 갖추었는데, 그 크기가 가히 엄청났다.
머리는 총 세 개였다. 왼쪽 머리는 새하얀 뱀의 형상을 닮았는데 붉은 눈이 번뜩였다. 중간의 머리는 양의 머리로 머리에 달린 뿔이 무려 여섯 개였다. 뿔은 푸른빛이고 얼굴은 검은색에 눈은 새하얀 색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른쪽의 머리는 까마귀의 머리로 붉은색에 눈이 무려 세 개였는데 이마 중앙에 박힌 눈에서 쉴 새 없이 검은빛이 번뜩였다.
몸은 투명한 비늘로 덮여 있었는데, 투명한 비늘의 아래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눈알이 꿈틀거리며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꼬리는 없었는데 기묘한 모습의 괴수였다. 그 크기가 10m에 가까워 한 마리만으로도 입구 근처가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라, 라노톤!”
쿠오오오오.
경악 섞인 염환의 외침에 대답하듯 라노톤이라 불린 거대한 마수가 세 개의 머리를 치켜들고 포효를 터트렸지만, 공허한 바람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포효를 토하는 형상을 취하는 라노톤의 모습에 마리아가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였다.
그러자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라노톤을 보던 바젤이 입을 열었다.
“라노톤은 침묵하는 꿈의 마수입니다. 그가 토해낼 수 있는 것은 불과 물, 바람과 절망뿐입니다.”
“으음…….”
바젤의 설명을 듣는 내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침묵하는 꿈의 마수 라노톤! 느껴지는 기세로 보건데 적어도 포 스타급에 해당하는 마수였다. 이 말은 곧 정령왕과 동급이라는 뜻이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나와 염환, 그리고 바젤 다음으로 강한 것이다.
‘대단하군!’
쿠오오오오.
한차례 고요한 포효를 터트린 라노톤이 쿵쿵거리며 인큐버스들의 앞에 자리 잡았다. 인큐버스들을 보호하며 공격을 가하려는 것 같았다.
라노톤을 소환한 세 명의 인큐버스는 멀찌감치 물러나 체력과 마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잠시간의 고요가 좌중을 짓눌렀다.
꿀꺽.
한 인큐버스의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긴장하고 있는 것은 바젤과 인큐버스, 서큐버스 무리만이 아니었다.
우리 일행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곳으로 오고 있는 유저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나에 필적하는 실력을 가진 검은 사자 길드의 간부 중의 간부들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는다면 그건 담이 큰 것이 아니라 미친 것이다.
“옵니다.”
단창을 쥐고 날카로운 살기를 흘리던 티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쿠오오오.
그와 동시에 라노톤 또한 적의 기세를 눈치 챘는지 침묵의 포효를 흘렸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나도 점차 가까워지는 적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많군.’
적의 수는 최소 250에서 300. 그중 강력한 기운을 내뿜는 유저가 여섯 명이었다. 그에 비해 우리 쪽의 수는 고작해야 80명 남짓이었다.
“응?”
날카로운 눈으로 입구를 지켜보던 바젤이 돌연 입구 근처의 어두운 부분을 향해 손을 뻗으며 날카롭게 외쳤다.
“진실한 모습을 보여라, 비천한 것아!”
스스슥.
“헉!”
바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구 근처의 어둠이 몰려 있던 곳에서 한 유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낸 유저 또한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에 상당히 놀랐는지 숨을 삼키며 당황한 감정을 흘렸다.
당황해서 미처 반응하지 못하는 유저를 향해 손을 뻗은 바젤이 차가운 목소리를 뱉어냈다.
“사지가 비틀려라, 비천한 것!”
우드득. 콰득.
“크아아악!”
바젤이 외침과 함께 유저의 양팔과 양다리가 괴이한 각도로 마구 꺾였다. 반항하던 유저는 시간이 흐르자 볼품없는 모습으로 팔다리가 부러진 채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죽여라.”
“예!”
팔락.
퍽!
“꺽.”
바젤의 명령에 곁에 서 있던 리나가 한 번의 날갯짓으로 유저 근처까지 날아가 가볍게 유저의 머리를 밟아 터트렸다.
질퍽한 뇌수와 피를 뿌리는 잔인한 광경에 일행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만은 예외였다.
“언령?”
경악한 내 물음에 바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염력이 한 단계 진화하면 얻을 수 있는 힘입니다. 일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저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버지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뿌듯한 모습으로 말하는 바젤의 말에 나는 물론이고 염환 또한 놀라움에 신음을 흘렸다.
언령이라면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또 다른 마법이다. 스페셜 클래스로 언령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언령은 한 단계 높은 레벨의 유저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과거 검은 사자 길드에 있던 고추가침퉤퉤라는 유저 또한 언령사였다.
“옵니다!”
생각에 빠져 있는 내 귀에 날카로운 티나의 목소리가 꽂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3층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입구에서 ‘퍼벙’ 하는 소리를 내며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피어올라 입구 주변의 시야를 가렸다.
‘이런 얄팍한 수를 쓰다니!’
“전격 계열의 마법이나 연계로 이어지는 마법을 사용해라! 어서!”
수증기를 틈타 밤손님 길드의 도적들을 지하 4층에 투입해 은신시키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내 황급한 외침에 잠시 멈칫하던 인큐버스와 서큐버스들이 곧 수증기를 향해 마법을 난사했다.
“어둠의 마나여, 폭풍의 마나여, 나의 손에 깃들어 생명을 베는 죽음의 날개가 되어 적을 베어라! 킬링 윙(Killing Wing)!”
“화염의 마나여, 폭염의 마나여, 철의 마나여, 나의 손에서 나와 넘을 수 없는 절망의 장벽이 되어 적을 멸하라! 월 오브 파이어(Wall of Fire)!”
“바람의 마나여, 폭풍의 마나여, 나의 손을 떠나 거친 폭풍이 되어 만물을 날려 보내라! 거스트 오브 윈드(Gust of Wind)!”
인큐버스와 서큐버스의 손에서 수십 개의 마법과 엄청난 양의 염력이 수증기를 향해 쏟아졌다. 날개 모양의 바람의 칼날을 비롯해 화염의 장벽과 엄청난 돌풍이 일어났다.
쿠오오오오!
콰가가강.
쿠구구궁.
라노톤 또한 들리지 않는 포효를 지르며 세 개의 머리에서 각각 검은 불꽃과 녹색 바람, 그리고 썩은 물을 쏟아냈다.
지옥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엄청난 공격들이 수증기가 오른 한곳을 향해 쏟아지는 광경은 실로 엄청났다. 그 효과 또한 엄청났다.
콰가가가강!
쿠쿠쿠궁!
“으아악!”
“크악!”
“살려줘!”
보이지 않는 수증기 속에서 갖가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밀지 마! 으아아악!”
“어떤 새끼… 크아악!”
확실히 좁은 입구를 통해 많은 유저가 몰려오는 것은 무리였는지 앞에서 뻔히 동료들이 죽는데도 뒤에서 미는 동료들 덕에 더 많은 수의 유저들이 어쩔 수 없이 지옥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뒤에서 밀린 유저들이 수증기로 빠져들었고, 곧 비명을 지르며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비명과 피, 모래가 난무하는 지옥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든 공격을 막는 강철의 장벽, 내 앞에 나타나라!”
스스스슥.
꽈가강!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어디선가 나타난 투명한 막이 수증기를 중심으로 마법과 라노톤의 공격에서 유저들을 보호했다.
“모두 멈춰라!”
더 이상 공격이 소용없음을 느꼈는지 언령을 이용해 얼음 기둥을 날리던 바젤이 다른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은 모두 마법을 멈추고는 마력을 회복했다.
라노톤의 세 개의 머리도 숨을 고르며 언제든지 다시 공격할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이내 수증기가 걷히며 투명한 장벽 너머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투지로 끓어올랐던 내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고추가침퉤퉤!”
“하핫. 오랜만입니다.”
경악한 내 외침에 이십대 중반의 유저가 웃으며 답했다.
그는 이십대 중반의 준수한 외모로 어깨까지 내려오는 황금색 머리에 황색 로브를 입고 노란 호박 보석이 박힌 기다란 스태프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언령사라는 스페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고추가침퉤퉤였다.
‘설마 놈이 직접 올 줄이야!’
보통 간부라면 어떻게든 상대하겠지만 나와 같은 스페셜 직업을 가진 고추가침퉤퉤는 아니었다. 그의 강함은 나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었다.
마력만 뒷받침해준다면 무한정으로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언령사라는 직업이었다.
“빌어먹을!”
휘익.
거친 욕설을 내뱉는 내 곁으로 어떤 인영이 휙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바로 바젤이었다. 차가운 눈으로 고추가침퉤퉤를 보던 바젤이 입을 열었다.
“강철의 장벽을 무너트리는 거친 해일!”
우우웅.
바젤의 말과 함께 나타난 푸른색 기운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고추가침퉤퉤가 만든 장벽을 때렸다.
콰아앙.
“크윽!”
“으윽!”
커다란 폭음에 이어 두 명의 언령사가 누가 먼저랄 것이 없이 신음을 흘렸다.
언령 대 언령의 대결!
나이트메어의 대리자인 바젤도 강한 언령사지만 스페셜 직업을 가진 고추가침퉤퉤 또한 무시 못 할 언령사다.
팽팽한 힘겨루기에 두 언령사가 다시 외쳤다.
“해일에도 무너지지 않는 철벽의 철옹성!”
“섬마저도 굴복시키는 절망의 해일!”
콰아아앙.
두 언령사의 격돌에 다시 주변의 공기가 출렁이며 거친 충격파를 만들어 사방으로 뿌렸다.
“크윽.”
“으악!”
날카로운 충격파에 고추가침퉤퉤가 만든 장벽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던 유저들이 피를 뿌리며 자리를 피했다.
수준이 높은 서큐버스나 인큐버스들은 마법으로 방어해 피해가 없었다.
“뭣들 하는 거냐! 나가서 죽여라!”
두 언령사의 격돌에 빠져 있는 좌중으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와 같은 칠흑의 갑옷으로 온몸을 도배한 전사, 바로 해골이었다.
“우와아아!”
“죽여라!”
해골의 외침에 장벽 뒤에서 움찔거리던 밤손님 길드의 유저들이 물밀듯 밀려나와 일행과 나머지 서큐버스, 인큐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길.”
마법의 난사로 인해 그 수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200명 가까이 남았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모두 정예만 데리고 온 것인지 거리를 좁히는 유저들의 단검에 흐릿한 검기가 아른거렸다.
쿠오오오.
콰가가강.
점차 거리를 좁히는 유저들을 향해 라노톤의 공격이 쏘아졌지만 몇 명의 유저만이 피해를 입었을 뿐 나머지 유저들은 여유롭게 거리를 벌렸고, 몇 명의 유저는 오히려 라노톤을 향해 단검을 던지기까지 했다.
“크윽. 모두 공격해라!”
고추가침퉤퉤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바젤이 힘겹게 외치자 뒤에서 대기하던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이 촤악 날개를 펼치고 유저들을 향해 마주 달려들며 마법을 시전했다.
“죽어라, 비천한 것들!”
“빌어먹을 마족 새끼!”
욕설과 욕설이 부딪쳤고 그 다음으로는 마법과 단검이 부딪쳤다.
꽈가가강.
거대한 화염의 창에 산개한 도적들이 검기가 형형한 단검을 던져 창을 소멸했다.
마법이 발동되는 틈을 타 소멸하는 적들의 공격 방법에 마법을 시전하려던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이 방법을 바꿨다. 바로 염력이었다.
위이이잉.
수만 마리의 벌 떼가 날갯짓하는 듯한 소리가 나며 주변의 허공이 마구 일그러졌다.
강력한 염력에 허공마저 영향을 받은 듯했다. 오십여 명의 서큐버스와 인큐버스가 내뿜는 염력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염력의 영향력에 있는 모든 것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라노톤 또한 염력을 염두에 둔 것인지 황급히 몸을 날렸다.
“염력이다! 산개해라!”
한 유저의 외침에 다른 유저들이 황급히 몸을 날려 산개했다.
하지만 몇 명의 유저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염력의 제물이 되어 사지가 비틀린 채 처절한 죽음을 당했다.
몽마족들은 마법과 염력에도 강하지만 체술 또한 능숙했다.
“죽어라아!”
“흥! 비천한 것이 감히!”
스르륵.
퍽!
고함을 지르며 단검을 휘두르는 유저를 향해 냉소를 날린 한 서큐버스가 스르륵 움직여 유저의 뒤로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손을 날려 유저의 등에 손을 박아 넣자 유저의 입과 귀, 코에서 붉은 피가 ‘푸확’ 하고 뿜어져 나왔다.
“비천한 놈!”
퍼억.
차가운 외침과 함께 팔을 빼낸 서큐버스가 유저의 몸을 발로 퍽 차올렸다.
“비천한 놈. …꺄악!”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유저를 향해 냉소를 날린 서큐버스가 돌연 어둠 속에서 나타난 단검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양쪽에서 날아오는 단검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날카로운 단검에 날개를 잘린 서큐버스가 비명을 질렀다.
마족에게 있어서 날개란 뿔, 심장과 함께 3대 급소다.
날개가 잘린 서큐버스가 비틀거렸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서큐버스를 놔둘 유저들이 아니었다.
“죽어라!”
푸욱.
“꺅!”
붉은 머리 유저의 단검이 서큐버스의 명치에 박혀 배꼽 부근까지 부욱 내려왔다.
피를 뿌리는 단검에 맞춰 내장이 딸려 나오며 잔인한 모습을 그렸다.
“빌어먹을 마족!”
“죽어라!”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부들부들 떠는 서큐버스의 위로 유저들의 단검 세례가 쏟아졌다. 허무하게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하는지 유저들의 단검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블러드: 각자 몸은 각자 챙겨라!]
[염환: 죽지나 마라!]
[마리아: 걱정 말아요!]
일행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등에 메고 있던 도를 꺼내 들고 전투장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블러드다!”
“현상금이다!”
나를 알아본 유저 몇 명이 라노톤을 향해 던지던 단검 세례를 멈추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돈에 눈이 먼 놈들의 모습에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손에 들린 도에 마나를 주입하자 도가 검붉은 마기로 뒤덮였다.
“쓰레기 같은 것들!”
현재 내 목표는 해골도 아닌 고추가침퉤퉤다. 아직 해골을 제외한 나머지 간부들이 오지 않는 상태에서야 간신히 이길 가능성이 있기에 나를 향해 달려드는 유저들을 향해 휘두르는 내 도에 강한 힘이 실렸다.
후우웅.
허공을 가른 내 도를 따라 검은 마기가 궤적을 남겼다.
까강!
내 심장을 노린 단검이 도와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터트렸다.
카가각.
크기가 작은 단검이기에 날이 아닌 면으로 단검을 받아치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어 올랐다.
도면에 얹힌 단검을 가볍게 튕긴 후 도를 허공으로 치켜든 내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어라!”
후우웅.
쩍!
“아악!”
단검을 가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유저의 머리까지 가른 내 도에 유저의 시체가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모래에 파묻힌 도를 꺼내 가로로 크게 휘두르자 내 뒤를 점하고 있던 몇 명의 유저가 화들짝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귀찮군.’
앞에서 맞붙는 전사 계열의 유저라면 모르지만 밤손님 길드의 유저들은 백이면 구십구는 도둑이나 어쌔신 계열의 유저들. 당연 내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런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주변의 유저들이 착실하게 나를 중심으로 모여 들고 있었다.
고추가침퉤퉤와의 거리는 10m 남짓. 내 주변으로 모여든 유저들의 수는 거의 50명은 되는 듯했다.
“크크큭. 빌어먹을 놈. 네놈 때문에 파라다이스 아지트를 잃은 걸 생각하면…….”
“죽여주마. 빌어먹을 놈!”
“흐흐흐. 순순히 로그아웃 당해라.”
썩은 웃음을 흘리며 점차 거리를 좁혀오는 유저들 손에 들린 단검이 번뜩였다.
“크크큭.”
돌연 내가 차가운 웃음을 흘리자 나를 향해 다가오던 유저들이 멈칫하고는 의문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멍청한 것들, 모두 죽어라!”
“피, 피해!”
내 싸늘한 외침에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파악한 한 유저가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내 입이 열린 후였다.
“섭혼강기!”
푸화아아악!
“으아악!”
“뭐, 뭐야! 크악!”
내 몸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온 섭혼기에 유저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애초에 사정거리가 10m인 섭혼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크크큭.”
3분의 1정도에 달하던 체력이 섭혼기의 위력 덕에 급속도로 차올랐다.
“으으으…….”
“눈이 안 보여!”
섭혼기의 사정거리 안에 있던 유저들의 태반이 이상 현상에 걸려 혼란에 빠졌고, 이상 현상에 걸리지 않은 유저들도 몸을 추스르기에 바빴다.
‘좋아!’
유저들로 이루어진 공간이 뚫리며 순식간에 고추가침퉤퉤를 향해 가는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러드: 염환! 여기에 강한 마법으로 몇 방 부탁한다! 아마 경험치 많이 먹을 거다! 크큭!]
[염환: 푸하하하! 나만 믿어라. 아주 제대로 된 거 하나 날리마!]
같은 유저를 죽이면 성향만 나빠질 뿐, 몬스터보다 경험치를 더 많이 주는 것이 바로 판타즈마 월드의 시스템이다.
염환의 광소가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열기가 내 주변을 휘감았다.
그에 따라 몸을 추스르던 유저들의 얼굴 위로 공포가 떠올랐다.
“헬 파이어!”
“비, 빌어먹을!”
엄청난 열기의 정체는 바로 헬 파이어였다. 저번 선착장에서 염환이 한번 보인 것만으로도 검은 사자 9단을 공포에 떨게 한 바로 그 마법이 악몽왕의 신전을 덮쳤다.
구구구궁.
지옥의 불꽃이 절망으로 그늘진 유저들의 위로 내리꽂혔다.
‘큭. 빌어먹을 자식!’
헬 파이어가 바로 머리 위에서 열기를 뿜어대자 황급히 몸을 날렸다. 그리고 바로 등 뒤에서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꽈아아아앙.
“으아아악!”
“크아악!”
구오오오오.
과연 지옥의 불꽃이라는 이름답게 엄청난 열기와 함께 비명이 사방으로 난무했다.
라노톤 또한 헬 파이어의 영향력 안에 있었는지 고통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후우우웅.
“으으음…….”
한차례 뜨거운 폭풍이 지나간 뒤 지옥으로 변한 신전의 모습에 내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으… 사, 살려줘.”
“포션! 포션!”
온몸의 반이 불에 덴 유저가 바닥을 기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 옆에는 붉은 머리의 유저가 완벽하게 사라진 자신의 하체에 미친 듯이 포션을 쏟아 붇고 있었다. 아무리 효과가 뛰어난 포션이라 할지라도 반 이상 날아간 하체를 치료할 수는 없는 법. 미친 듯이 포션을 붇던 유저가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이, 이게…….”
마기를 일으켜 보호하고 있는 내 입에서 넋 나간 신음이 흘러나왔다.
신전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염환이 스스로 조절한 것인지는 몰라도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은 피해가 극미했지만 입구 근처의 밤손님 길드의 유저들은 거의 전멸에 가까울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퀘스트용 건물이라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신전 전체가 검게 그을어 아직까지 김을 뿜고 있었다.
‘역시 포 스타란 거냐!’
이 모든 것이 포 스타 마법 단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염환: 뭐 하냐!]
머릿속을 때리는 염환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도를 들고 고추가침퉤퉤 쪽으로 몸을 날렸다.
바젤과 고추가침퉤퉤 또한 헬 파이어의 위력에 꽤나 놀랐는지 싸움도 잊고 경악한 눈으로 지옥으로 변한 신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헬 파이어 때문에 고추가침퉤퉤를 향해 가는 길은 뻥 뚫려 있었다.
우우웅.
땅을 박차고 도약하는 내 손에 들린 도가 낮은 울음을 흘리며 도기를 뿜어냈다.
“허억!”
내 도가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고서야 뒤늦게 나를 발견한 고추가침퉤퉤가 숨을 삼키며 방어막을 구성하고 있던 양손 중 오른손을 나에게 뻗으며 외쳤다.
“무엇도 뚫지 못하는 강철의 방패!”
“크하압!”
꽈강.
힘찬 기합과 함께 뻗어나간 도가 고추가침퉤퉤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투명한 막에 막혀 폭음을 터트렸다.
“크윽.”
같은 스페셜 직업이라고 하지만 레벨은 고추가침퉤퉤가 훨씬 위.
내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고추가침퉤퉤를 향해 차가운 조소를 흘린 뒤 입을 열었다.
“네놈도 무라사마의 개냐?”
“개라뇨. 동지입니다.”
서늘한 내 물음에 고추가침퉤퉤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드래곤 클럽의 존재를 따지며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여태껏 카나리아가 참아온 노력이나 내 작전을 모두 헛일로 돌리는 것이었기에 애써 마음을 추스른 뒤 조소를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동지? 크크큭. 나는 동지가 아니었나?”
카가각.
방어막에 가해지는 도의 힘에 투명한 방어먹이 마구 너울거렸다.
아무리 스페셜 직업인 고추가침퉤퉤라고 해도 두 개의 방어막을 구성하는 것은 무리였는지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 당신은 예전의 동지이고 무라사마 님은 말 그대로 현재의 동지입니다.”
“박쥐같은 자식!”
우우우웅.
꽈강!
“크윽.”
거친 일갈을 내지르며 다시 한 번 도로 고추가침퉤퉤의 방어막을 후려치자 고추가침퉤퉤가 신음을 삼켰다.
점차 흐릿해지며 힘을 잃는 방어막에 바젤이 힘을 끌어 모아 고추가침퉤퉤를 압박했다.
‘끝낸다!’
흐릿해지는 방어막을 노려보는 내 눈에서 차가운 살기가 번뜩였다.
여기서 방어막을 없애고 고추가침퉤퉤를 처리한다면 승률을 높이는 동시에 사기도 올릴 수 있다. 더군다나 지금 고추가침퉤퉤는 나 말고도 바젤과 언령을 상대하고 있는 상태.
지금이 바로 기회였다.
“파천기.”
우우웅.
손목 부근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한 기운이 도의 손잡이를 타고 올라 그대로 도를 휘감았다.
“헉!”
고추가침퉤퉤 또한 방어막을 누르는 힘이 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는지 숨을 삼키며 나를 바라봤다.
경악한 고추가침퉤퉤의 모습에 짙은 미소를 흘리며 하늘로 치켜들었던 도를 다시 내찍으려는 순간, 새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이 내 몸을 후려쳤다.
마리아가 사용하는 버닝 피스트와 같은 종류의 마법이었다.
꽈앙!
“크윽.”
도를 든 채 저 멀리 날아가 땅에 처박힌 내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갈비뼈를 중심으로 몸을 울리는 찌릿한 통증과 함께 5분의 1 정도 하락한 체력에 얼굴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 위로 몇 개의 빛 뭉치가 다시 쏟아졌다.
“크윽. 빌어먹…….”
“비켜라!”
욕을 내뱉으며 몸을 날리려는 내 곁으로 다가온 붉은 로브의 인영이 다가오는 빛 뭉치를 향해 스틱을 겨누며 소리쳤다.
“실드!”
꽈아앙.
빛 뭉치와 격돌한 실드가 폭음과 함께 마구 너울거렸다.
“크윽. 괜찮냐?”
한차례 신음을 흘리며 안부를 묻는 붉은 인영의 정체는 바로 헬 파이어를 시전한 염환이었다.
“괜찮다. 나머지 일행은?”
“봐라.”
내 물음에 염환이 신전의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티나와 마리아가 호흡을 맞추며 유저들에게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키하앗!”
“바인드! 데스 스웜!”
주로 마리아가 유저들의 발을 묶어놓으면 티나가 앞으로 나서 마무리하는 형식이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신경전을 펼치던 사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완벽한 호흡이었다.
“문제없군.”
“아니, 문제 있다.”
“뭐?”
내 물음에 실드를 소멸한 염환이 고개를 돌려 입구 근처, 빛 뭉치가 날아온 곳을 바라봤다.
이내 염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내 입에서 살기어린 외침이 튀어 나왔다.
“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