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5 나이트메어
쉬시시시.
마침내 모든 사람들과 몬스터, 심지어 인간 키메라들의 경배를 받은 어떠한 존재가 서서히 걷히는 연기 사이로 걸어 나왔다.
존재가 점차 형상을 갖춰갈수록 바젤과 서큐버스, 인큐버스들의 절 또한 빨라졌다.
주르륵 주륵.
콰드득 콰직.
보랏빛 연기가 작은 몸이 되고 짧은 팔, 다리가 되었다. 곧 동그란 얼굴이 생겨났고 보랏빛의 장발이 생겨나 존재의 등을 덮었다.
“아, 아버지!”
고작 해야 150cm 정도 될 듯 말 듯한, 13세가량의 어린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바젤은 아버지를 부르짖으며 무릎으로 기어 소년에게 다가가 아무것도 신지 않은 소년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바젤?]
아름답다 못해 요염한 소년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이질적인 미성으로 바젤을 불렀다.
이에 바젤이 몸을 떨며 대답했다.
“오오… 아버지! 제가 바젤입니다.”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연신 고개를 숙이는 바젤을 물끄러미 쳐다본 소년이 휙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흉측한 인간 키메라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구겼다.
[징그러운 것들.]
딱.
크에엑.
푸화악.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나이트메어에게 있어 흉측한 몰골의 인간 키메라는 보기 싫은 것임이 분명했다.
인간 키메라들을 향해 차가운 조소를 날린 나이트메어가 손가락을 튕기며 작게 중얼거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인간 키메라들의 상체가 터져 사방으로 썩은 고기와 피를 퍼트렸다.
후드득.
털썩.
분수 마냥 한바탕 피를 뿜어댄 인간 키메라의 하체가 비틀거리다 곧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
신전에 경악 섞인 적막이 내려앉았다.
가장 경악한 것은 바로 인간 키메라들을 만든 베팔이었다.
“이, 이럴 수가!”
지금 이 상황이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베팔이 말까지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놀라기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입에서 절로 무거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으음…….”
‘역시 악왕이라는 건가!’
비록 만들어진 존재라고는 하지만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에 대항했고 잠시나마 그들을 밀어붙이기까지 한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을 한둘도 아니고 무려 20이 넘는 수를 단 한 번의 손가락 움직임으로 처리한 나이트메어의 권능은 라데스에 비해도 처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 아버지!”
멍한 얼굴의 바젤이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나이트메어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키키킥.]
나이트메어가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인간 키메라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키킥. 냐하하하핫!]
그런 나이트메어는 착한 일을 하고 칭찬을 바라는,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잠자리의 날개를 뜯어내는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나이트메어가 한 발짝 내딛자 보랏빛 기류가 나이트메어의 몸을 타고 돌아 옷을 만들었다.
보통 시골의 어린아이들이 입는 평범한 옷이었다.
허리춤에는 나무로 만든 단검이 걸려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이 들고 놀 법한 단검이었지만 그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내 마도에 못지않을 정도였다.
[바젤, 이리 와.]
“예, 옛!”
나이트메어의 부름에 바젤이 재빨리 다가갔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나이트메어의 마기에 눌려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젤을 옆으로 부른 나이트메어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건 누구지? 익숙한 기운인데?]
“예, 아버지의 형제이신 암천왕 라데스 님의 사자입니다.”
[아!]
바젤의 설명에 작은 탄성을 흘린 나이트메어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너에 관해서는 악계에서 라데스에게 들었다. 흐음. 뭐, 내 부활 기념으로 특별히 너를 도와주지. 냐하하하!]
간드러지는 미성으로 한바탕 웃음을 흘린 나이트메어가 돌연 난처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 돼. 난 잠을 자야 하거든.]
“자, 잠이요?”
당황한 바젤의 물음에 나이트메어가 이름답지 않게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
“아버지! 잠이라면 지금껏 충분히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중간계로 나와 저희를 보살펴주십시오!”
쿠와아아앙!
애절한 바젤의 말이 끝나자 나이트메어의 몸에서 날카로운 마기가 폭사되어 신전을 가득 메웠다.
전의 연기 형태의 마기와는 질 자체가 다른 엄청난 마기였다. 농도 짙은 마기가 뭉클뭉클 신전을 뒤덮었다.
“크윽!”
“윽.”
몸을 옥죄는 엄청난 마기에 방어막의 보호를 받던 염환마저 신음을 삼켰다.
마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는 내가 유일했다.
나이트메어의 분노 섞인 마기에 바젤이 덜덜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바젤을 힐끗 노려본 나이트메어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잠을 자? 천만에! 난 갇힌 거다! 그 빌어먹을 하프 엘프 그랑데시아 때문에! 빌어먹을 하프 엘프! 그 빌어먹을 하프 엘프는 지금 어디 있어! 사지를 찢어 악계의 개들에게 던져주고 몸통은 영원히 악계의 삭풍을 가리는 천막으로 쓸 것이고 얼굴은 내 어깨에 박아 평생 내가 보는 악몽을 보게 만들겠다!]
쿠오오오.
나이트메어는 악왕답지 않게 이성을 잃어 흥분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듣기에도 소름끼치는 저주를 퍼붓는 나이트메어의 분노에 맞춰 마기들이 마구 들끓었다.
“아, 아버지, 그 하프 엘프는 이미 죽은 지 오래입니다.”
공포에 질린 바젤의 말에 분노로 일그러진 나이트메어의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죽어? 그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 빌어먹을 하프 엘프가 죽었다고?]
“예. 하프 엘프는 아버지를 봉인하고 점차 힘이 약해지다 죽어버렸습니다.”
[죽다니! 빌어먹을 하프 엘프가 죽다니…….]
그랑데시아의 죽음이 충격인지 마기를 폭사하며 저주를 퍼붓던 나이트메어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스토리에 따르면 그랑데시아와 나이트메어는 천적으로 나오지만 과거에는 친구였다고 한다. 그것도 아주 절친한.
물론 지금은 못 잡아먹어서 아쉬워할 앙숙으로 변했지만.
[그런데…….]
멍한 얼굴로 그랑데시아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나이트메어가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베팔을 노려봤다.
[어째서 저 늙은이에게서 그랑데시아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지?]
“허억.”
나이트메어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은 베팔이 숨을 삼키며 비틀거렸다.
갑작스런 나이트메어의 말에 나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오르는 것도 잠시, 곧 의문이 경악으로 바뀌었다.
“그랑데시아 스태프!”
율칸이 가지고 있던 블러드 문 소드와 함께 새로 업데이트 된 천 급 아이템!
그 아이템이라면 전 주인인 그랑데시아의 기운이 상당히 많이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다.
‘베팔이 그랑데시아 스태프의 주인이었다니!’
블러드 문 소드에 이어 그랑데시아 스태프까지 검은 사자 길드에 귀속되었다는 사실에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내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현재 율칸은 소멸된 상태다. 한마디로 블러드 문 소드의 주인은 없는 셈이었다. 여기서 블러드 문 소드를 차지하고 베팔과 월향, 그리고 보티스를 처리한 뒤 그랑데시아 스태프를 차지한다면, 나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이익이었고 검은 사자 길드로서는 엄청난 피해를 입는 셈이었다.
물론 베팔이 도망칠 가능성이 높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이트메어!
악몽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악왕이 부활한 이상, 베팔을 비롯해 월향과 보티스가 빠져나갈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익. 제길!”
더 이상 숨겨도 소용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베팔이 품에서 연한 녹색의 짧은 스태프를 꺼냈다. 아마 방금 전 인간 키메라들이 발광할 때 꺼내려고 한 것이 바로 그랑데시아 스태프인 듯했다.
길이는 30cm 정도로 스태프의 끝에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연한 녹색의 보석이 박혀 쉬지 않고 형형한 빛을 내뿜었다.
‘끝났군.’
그랑데시아와 앙숙인 나이트메어의 앞에서 그랑데시아 스태프를 꺼낸 이상 베팔이 살아나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차가운 조소를 흘렸다.
그러나 나이트메어를 향해 고개를 돌린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바로 나이트메어의 반응 때문이었다.
[으으… 빌어먹을 엘프! 스태프 안에 숨어 있었구나! 으으으!]
나이트메어는 고작 저 스태프 하나에 공포로 떨고 있었다.
두려움에 찌든 눈으로 바젤의 뒤로 몸을 숨긴 나이트메어가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하프 엘프! 죽은 게 아니었어! 육체를 버리고 저 스태프로 숨은 거야! 으으. 나를 죽이기 위해! 빌어먹을 엘프! 바젤! 저 스태프를 수거해서 당장 소멸해라! 빌어먹을 엘프의 혼을 소멸해!]
작고 고운 손가락으로 베팔이 들고 있는 그랑데시아 스태프를 가리킨 나이트메어가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갑작스런 나이트메어의 반응에 나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경악한 얼굴로 나이트메어와 베팔의 손에 들린 그랑데시아 스태프를 바라봤다.
판타즈마 월드에서 인간은 ‘영원히 꿈을 꾸는 종족’으로 불린다. 그에 비해 엘프는 ‘영원히 꿈을 꾸지 않는 종족’으로 불린다. 그런 인간과 엘프가 만나 몸을 섞어 태어난 것이 바로 ‘꿈을 보지만 꿈을 꾸지 않는 종족’ 하프 엘프이다.
꿈을 힘의 원천으로 삼는 나이트메어에게 있어 꿈을 보지만 꿈을 꾸지 않는 종족, 즉 나이트메어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힘을 가진 하프 엘프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이 사실을 눈치 챈 것인지 마기에 억눌려 있던 베팔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손에 들고 있는 스태프를 나이트메어를 향해 겨눴다.
그에 나이트메어가 움찔하며 바젤을 방패로 삼아 뒤로 숨었다.
“아, 아버지!”
“키키키.”
악왕답지 않은 나이트메어의 모습에 바젤이 신음을 흘렸다.
베팔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방어막을 유지한 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키키키. 악왕도 별거 아니군. 이깟 스태프를 무서워하다니 말이야.”
역겨운 웃음을 흘리며 나이트메어를 조롱하는 베팔과는 달리 월향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와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어서 포탈이나 열어요! 지금 당장 돌아가게!”
“키키키. 뭘 그렇게 급하게 구시나. 천천히 해도 문제없소이다.”
그답지 않은 말투와 함께 다시 한 번 웃음을 흘린 베팔이 다시 걸음을 내딛으며 바젤 뒤에 숨어 있는 나이트메어를 향해 스태프를 겨눴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 스태프가 자신을 향하자 바젤 뒤에 있던 나이트메어가 몸을 움찔했다.
그런 나이트메어의 모습에 베팔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걸렸다.
“나와라, 꼬맹이 악왕. 키키키.”
“비천한 인간이 감히!”
우우웅.
베팔의 말에 분노한 바젤이 앞으로 막 나가려고 하자 베팔이 손에 잡은 스태프에 마나를 주입했다.
이내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스태프를 중심으로 옅은 초록색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청명한 느낌의 이 기운의 정체는 바로 하프 엘프이자 대마도사였던 그랑데시아의 기운이었다.
우우웅.
푸스스.
신전을 메우고 있던 나이트메어의 기운이 그랑데시아의 기운을 소멸하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랑데시아가 포 스타의 대마도사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육악왕 중의 하나인 악몽왕 나이트메어다.
그럼에도 그랑데시아의 기운이 나이트메어의 힘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점은 그랑데시아가 하프 엘프이기 때문이었다.
하프 엘프와 나이트메어의 기운은 상극. 아무리 나이트메어가 강해도 하프 엘프인 그랑데시아에게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으으… 빌어먹을 하프 엘프!]
한참 기운을 뿜어대던 나이트메어가 욕을 내뱉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막 걸음을 옮기던 베팔의 얼굴이 굳었다. 바로 베팔의 앞을 막아선 염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의 손에 들린 그랑데시아의 스태프를 믿는 것인지 베팔의 얼굴에 오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빌어먹을 장작불이 어디서 감히! 네놈도 그랑데시아 스태프의 제물이 되고 싶으냐!”
“흥.”
겁을 먹기는커녕 콧방귀를 뀌는 염환의 반응에 베팔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미친놈이 뭘 믿고 그렇게!”
막 그랑데시아 스태프에 마나를 주입하여 염환을 위협하려던 베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그건!”
오만 대신 경악으로 바뀐 베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베팔을 향해 차가운 조소를 날린 염환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시냇물을 말려버릴 불꽃이다.”
우우웅.
염환을 중심으로 허공에 둥그렇게 나열된 반투명한 한자들이 빙글빙글 돌며 붉은 궤적을 만들었다. 마법진과 비슷하지만 마법진처럼 복잡한 문양이 아니라 처음 보는 양식의 반투명한 한자들이었다.
위이이이.
짙은 열기를 토해내며 속도를 높여가는 궤적을 보는 경악한 내 입에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침이 튀어나왔다.
“역천불살술법!”
지금 염환이 시전한 마법, 아니 술법은 분명 초절정 무공인 ‘사령마존(邪靈磨尊) 양유평(良誘枰)’의 역천불살술법(逆天佛殺術法)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특수 효과를 내는 다른 무공이 존재할 리 없었다.
“미, 미친!”
베팔 또한 염환이 시전하는 술법의 정체를 눈치 챘는지 전과 같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며 입을 열었다.
“어, 어째서 방금 전에 싸울 때는 사용하지 않았지?”
공포 반, 의문 반인 베팔의 외침에 염환이 스태프를 들어 베팔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술법 없어도 이길 줄 알았거든. 크큭.”
오만한 염환의 말에 베팔의 얼굴이 구겨졌다.
“빌어먹을! 우, 우주의 마나여, 세계의 마나여, 창천의 마나여, 공간의 마나여. 지금 나에게…….”
베팔은 도망치려는 생각인지 연신 스태프에 마나를 주입해 그랑데시아의 기운을 뿜어대 나이트메어의 기운을 견제하면서도 워프 포탈의 주문을 외쳤다.
그런 베팔에게 차가운 미소를 흘린 염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멸겁화신(滅劫火神)! 겁겁난화(劫劫亂火)! 쏘아져라(彈)! 날아가라(飛)! 쫓아라(追)! 멸해라(滅)! 혈천비후(血天飛吼) 토염화룡(吐炎火龍), 출(出)!”
쿠와아앙!
염환의 주문이 끝나자 염환을 중심으로 회전하던 복잡한 한문으로 이루어진 원이 염환 앞으로 나와 한층 더 빨라진 속도로 돌았다.
마침내 원을 구성한 한자가 보이지 않을 때쯤, 우렁찬 포효와 함께 원 안에서 불꽃의 용이 튀어나와 베팔을 향해 쏘아갔다.
“허억! 브, 블링크!”
이글거리는 불꽃의 숨결을 내뱉는 거대한 화룡에 숨을 삼킨 베팔이 재빨리 블링크를 이용해 피했지만, 잠시 멈칫한 화룡은 또다시 베팔을 향해 몸을 꺾었다.
“비, 빌어먹을!”
베팔이 욕을 내뱉으며 연이어 블링크를 시전했다.
그럴 때마다 화룡은 몸을 꺾어 베팔을 향해 화염을 토하며 어금니를 빛냈다. 화룡의 몸 굵기만 하더라도 웬만한 어른 세 명이 둘러싸야 할 만큼 엄청난 굵기를 가지고 있었고, 길이도 엄청나서 아무리 뻗어 나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위압감은 얼마나 대단한지 나이트메어가 등장할 때 뿜었던 기세에 비교해도 처지지 않았다.
쿠와아아아!
화르륵.
치이익.
화룡이 내뿜은 화염과 부딪힌 모든 것들이 녹았다. 돌이건 장식이건 간에 순식간에 녹아 바닥에 달라붙었다.
“헉헉… 도, 도와줘!”
도망치는 것에 지쳤는지 블링크를 시전하는 것을 멈춘 베팔이 우뚝 서서 월향을 향해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월향은 도와줄 생각이 없는지 어떻게 하면 도망칠까 염환과 나이트메어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빌어먹을 계집아! 나 좀 도와달란 말이다!”
베팔 또한 포 스타. 죽으면 쓰리 스타로 레벨이 떨어지는 것이니 마음이 조급한 것도 당연했다.
베팔이 욕까지 하며 도움을 청했지만 월향은 여전히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다.
마침내 월향의 도움 받기를 포기한 베팔이 입술을 깨물고는 스태프에 마나를 주입한 후 서서히 거리를 좁히는 화룡을 향해 겨누며 소리쳤다.
“폭설의 마나여, 빙백의 마나여, 혹한의 마나여, 폭풍의 마나여!”
시동어가 세 개를 넘어 네 개에 다다르는 베팔의 주문에 나는 물론이고 화룡을 유지하고 있던 염환의 얼굴 또한 딱딱하게 굳었다.
시동어가 네 개라면 포 스타의 마법이라는 소리였다.
‘설마!’
지금 베팔이 할 수 있는 포 스타 마법이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블리자드!
선착장을 내어주는 조건으로 마법사의 탑에서 받은 빙설계 최강의 9클래스의 마법서!
점차 거리를 좁히는 화령을 바라보는 베팔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나의 힘을 빌려 이 자리에 현신해 절망의 눈보라를 일으켜라! 블리자드!”
휘우우우웅.
베팔의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스태프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차가운 바람으로 변해 몰아쳤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휘우우우웅.
우우우웅.
연이어 몰아치는 바람이 규모를 늘리더니 마침내 사방에서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집중적으로 몰아치는 곳은 염환이 소환한 화룡이 있는 곳이었다.
역시 빙설계 최강 마법인 블리자드답게 내 체력을 빠른 속도로 떨어뜨렸다.
“괜찮아요? 그룹 힐. 그룹 힐. 그룹 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걱정한 마리아가 연신 그룹 힐을 사용해 파티의 체력을 회복시켰다.
나는 몸 이곳저곳에 달라붙어 얼어붙는 얼음덩이를 거칠게 떼어내고는 눈보라와 화룡의 싸움을 지켜봤다.
휘우우우웅!
쿠오오오오!
화르르륵.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눈보라에도 화룡이 화염을 토해내며 앞으로 나갔다. 눈보라가 거세지면 화룡의 기세 또한 거세졌다.
폭염의 마도사라 불리며 화염계 마법의 마스터라 불리는 염환과 바다의 마도사라 불리며 수계 마법의 마스터라 불리는 베팔의 대결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강 마법과 최강 주술의 대결!
물론 염환에게도 블리자드와 맞먹는 9클래스의 마법인 헬 파이어가 있었지만 초절정 무공인 역천불살술법의 위력이라면 헬 파이어보다 강력할 것이 확실했다.
쿠오오오오!
휘우우우웅!
마법과 주술의 대결이 끝을 보이는지 화룡이 토해내는 불꽃과 눈보라가 한층 더 거세졌다.
아무래도 마법에 대한 숙련도가 높은 베팔의 블리자드의 위력이 강한 것인지 화룡의 몸이 눈보라에 휩쓸려 점차 크기를 줄여나갔다.
“크윽. 이, 이겼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듯 신음을 흘리며 승리를 외치는 베팔의 모습에 내가 슬그머니 도를 들어올리며 공격 준비를 하자, 파티 음성창으로 염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염환: 멈춰라!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블러드: 괜찮겠냐?]
[염환: 당연하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만 믿어라!]
화룡을 유지하는 가운데도 말을 이은 염환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스태프를 들지 않은 왼손을 들어 한문으로 이루어진 주술진 옆으로 올려놓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옥의 마나여, 징벌의 마나여, 폭염의 마나여, 불꽃의 마나여!”
마침내 열린 염환의 입에서 베팔과 같은 시동어 네 개짜리 포 스타 마법의 주문이 흘러나왔다. 바로 밤손님 길드의 유저들을 전멸하게 한 공포의 헬 파이어였다.
구오오오.
서서히 형체를 갖춰가는 귀화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른 사람들은 화려한 마법과 주술에 신경을 빼앗겨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2중 주문이 가능했나?’
애초에 주술과 마법을 같은 분류라고 생각했기에 지금 염환처럼 주술과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만약 2중 주문이 가능하다면 나조차 염환과의 1대 1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왼손으로는 헬 파이어를 난사하고 오른손으로는 역천불살술법을 난사하는 포 스타 마법사의 모습을.
물론 염환의 마력이 그만큼 뒤따라줘야겠지만 지금의 염환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아, 안 돼!”
염환이 외우는 주문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베팔이 블리자드를 유지하면서도 비명을 질렀다.
“타오르는 숨결로 명하노니! 내 앞에 현신해 무지한 적들에게 끝없이 타오르는 절망을 내려주어라! 헬 파이어!”
콰아아앙.
섬뜩한 폭음과 함께 귀화를 연상케 하는 푸른빛의 화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가 천장에서부터 천천히 강림하듯 내려와 눈보라를 강타했다.
치지지직.
“안 돼! 안 된단 말이다!”
헬 파이어와 만나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녹아내리는 블리자드에 베팔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치지지직.
쿠오오오!
힘을 잃어가는 블리자드에 화룡이 힘을 입어 맹렬한 화염을 토해내며 다시 베팔을 향해 쇄도했다.
“안 돼!”
“뭐가 안 되냐, 시냇물의 마도사야! 크하하하하!”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스태프를 휘둘러 그랑데시아의 기운을 뿜어대는 베팔을 향해 커다란 비웃음을 토해낸 염환이 양손을 앞으로 내밀자 마침내 화룡이 베팔의 몸을 먹어 치웠다.
그와 동시에 블리자드를 녹이던 헬 파이어가 화룡에게 먹힌 베팔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크아아아악!”
꽈가가강!
화룡의 기다란 몸뚱이에 휘감긴 베팔의 몸이 모래가 되어 사라지기도 전에 헬 파이어가 베팔의 머리에 직격했다. 베팔의 비명이 헬 파이어의 폭음에 묻혀 사라졌다.
그야말로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죽음이었다.
쿠오오오오.
베팔의 죽음에 만족한 듯, 꺼져가는 불속에서 화룡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것이 끝이었다.
“푸하하하! 봤냐? 봤어? 동영상 촬영했지?”
“안 했다.”
“컥. 아, 안 했어?”
“그래. 안 했다.”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며 나에게 다가오던 염환이 싸늘한 내 말에 움찔했다.
“너, 대체 언제 역천불살술법을 배운 거냐.”
“음… 그러니까 그게 말이다…….”
“…….”
내가 아무 말 없이 염환을 노려보자 염환이 난감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검은 사자 길드의 배신 사건을 계기로 지인이 나에게 무언가 숨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게 된 나에게 있어, 가장 친한 친구인 염환이 역천불살술법을 배웠다는 사실을 숨긴 것은 배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뜸을 들인 염환이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귓속말로 말했다.
[염환: 사실 스틸했다.]
난데없는 염환의 말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블러드: 스틸이라니?]
[염환: 너도 우리 아지트가 거인의 계곡으로 바뀐 건 알고 있겠지?]
염환의 물음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법사의 탑의 아지트의 위치가 바뀐 것이라면 폭스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초대까지 받지 않았던가. 게임 시간으로는 내일 모레, 현실 시간으로는 내일이었다.
잠시 멈칫한 염환이 말을 이었다.
[염환: 오랜만에 경험치나 올릴 겸, 정체를 숨기고 어느 파티와 자이언트들을 사냥하다가 거인왕을 만났거든.]
거인왕이라면 과거에 나와 염환, 그리고 검은 사자 길드의 간부들이 힘을 합쳐 잡은 적이 있는 몬스터다. 내가 과거에 사용한 거인의 단검이 바로 거인왕에게서 나온 아이템이다.
[염환: 어쨌든 파티의 멤버는 나까지 포함해서 겨우 네 명이었지만 나와 어느 프리 나이트 유저를 제외한 두 명이 절정 무공을 익히고 있어서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한 명은 천귀소소공을 익힌 음유시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대력파산도법을 익힌 용병이었지.]
염환의 말이 이어질수록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염환이 말하는 사람들과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서서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염환: 우리는 거인왕을 사냥했다. 그런데 거인왕이 죽은 자리에서 처음 보는 책이 딱 나온 거다! 그 당시에는 새로운 종류의 마법서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무작정 도망쳤지. 정체를 숨겼기에 걸릴 염려도 없고 말이야. 새로운 마법서인 줄 알았던 것이 초절정 무공인 역천불살술법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꽤나 놀랐지만 그냥 익혀버렸다.]
[블러드: 나한테는 왜 숨긴 거냐.]
[염환: 나중에 검은 사자 길드와 전면전할 때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다. 미안하다.]
[블러드: 휴우… 아니다. 괜찮다.]
염환을 향해 한숨을 내쉬는 내 얼굴은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설마…….’
염환을 향해 귓속말을 보내는 내 목소리가 불안에 떨렸다.
[블러드: 설마 음유시인이 아직 어린 소녀에다 이름이 팅거벨은 아니겠지?]
[염환: 어라? 어떻게 알았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염환의 모습에 내 입에서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블러드: 크윽. 호, 혹시 용병의 이름이 발록이었냐?]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몸을 떠는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염환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염환: 맞는데?]
[블러드: 크윽!]
설마 했지만 염환 이 자식이 함께 사냥했던 파티원이 팅커벨과 발록일 줄이야!
부들부들 떠는 내 반응에 염환이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염환: 서, 설마 아는 사람들이냐?]
[블러드: 끄응… 아니다.]
‘혹시라도 마주치게 하면 안 되겠군.’
다짐하며 돌아서는 내 앞으로 이제는 전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나이트메어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대로 나를 지나친 나이트메어가 염환의 앞에 멈춰 섰다.
[고맙다. 빌어먹을 하프 엘프의 스태프를 가지고 있는 녀석을 처리해줘서.]
“아, 아니…입니다.”
상대가 어린아이인 줄 알고 무심코 반말을 하려던 염환이 어린아이의 정체가 나이트메어인 것을 뒤늦게 깨닫고 어색한 존댓말을 했다.
나이트메어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피우며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염환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월향은?”
뒤늦은 염환의 외침에 나와 일행의 얼굴 위로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월향!”
뒤늦게 월향을 찾아 고개를 돌리자, 막 3층으로 가는 입구를 향해 몸을 날리는 보티스와 월향을 볼 수 있었다.
“티나! 막아라! 크허어엉!”
“키하아앙!”
놈들의 움직임을 잠시라도 멈추게 할 생각으로 제왕의 포효를 터트리자 티나 또한 놈들을 향해 몸을 날리며 제후의 포효를 터트렸다.
“아악!”
신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에 막 몸을 날리던 월향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었다.
“죽여라!”
“크르릉!”
내 명령에 티나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단창을 뽑아 들고 월향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포효에 영향을 받지 않은 보티스가 단검을 빼어 들고 티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쉬시식.
까강.
“크르릉!”
“……!”
날카롭게 우는 티나와 침묵으로 일관하는 보티스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터트렸다.
몇 번의 공방에도 아무런 말도, 심지어 신음이나 기합도 내지 않는 보티스의 모습에 한 가지 의혹을 느꼈다.
‘설마!’
바로 보티스 또한 율칸과 같은 NPC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었다.
타닥.
척.
“죽여주마! 크르릉.”
몸을 날려 약간의 거리를 벌린 티나가 단창을 고쳐 잡고 허리를 비틀었다. 바로 티나의 필살기인 토네이도 스피어를 쓰기 전의 자세였다.
티나의 단창을 중심으로 모이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월향의 얼굴에 다급한 감정이 떠올랐다.
“내가 도망칠 때까지 시간을 벌어! 변해라! 허락하겠어!”
‘변하다니?’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고 발악하듯 외치는 월향의 말에 의문이 떠오르는 것도 잠시, 곧 나를 비롯한 모두는 놀라고 말았다. 점차 부풀어 오르는 보티스의 등 때문이었다.
찌지직 찌직.
등에서 솟아나는 무언가를 버티지 못한 옷이 찢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보티스의 몸속에 숨어 있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인간 키메라?”
보티스의 변화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마리아였다.
휘릭 휘릭.
마리아의 말 대로 보티스의 등에는 인간 키메라들과 같은 손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전의 인간 키메라와 같이 인간이 손이 아니라 자이언트 맨티스(Giant Mantis), 바로 거대 사마귀의 앞발이었다.
샤삭 샥.
족히 2m는 될 얄팍한 사마귀의 앞발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크르릉!”
파밧.
보티스가 변하든지 말든지 자세를 잡은 티나가 땅을 박차고 튀어 올라 보티스를 향해 쇄도했다.
콰르르르.
허공을 찢은 티나의 단창이 작은 토네이도를 만들며 인간 키메라로 변한 보티스를 향해 쇄도했다.
파밧.
보티스 또한 등에 달린 앞발을 움츠린 채 땅을 박차 올라 티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150cm는 될 듯한, 자신의 키만 한 거대한 사마귀 앞발을 달았다고는 생각지 못할 빠른 속도였다.
샤샥.
카르릉!
등에 달린 앞발을 교차시켜 티나의 단창을 막은 보티스의 눈동자가 거세게 떨렸다. 몸과는 별개인 단검이 아닌, 몸과 하나가 된 사마귀의 앞발은 설사 공격을 막는다고 해도 약간의 통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쉬리릭.
푹.
“캬악!”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보티스의 왼손이 야수화한 티나의 털과 가죽을 뚫고 들어와 티나의 갈비뼈와 장기들을 터트렸다.
쉬식.
푸욱.
그에 맞춰 단검을 들고 있는 오른손도 반대편 갈비뼈를 헤집고 몸속을 헤집었다.
몸속이 헤집어지는 엄청난 통증에 티나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릉!”
공격을 허용한 티나의 커다란 몸이 힘없이 축 처졌다.
“티나!”
팟.
티나를 돕기 위해 재빨리 몸을 날리는 나를 힐끗 쳐다본 보티스가 티나의 단창을 막은 사마귀 발 중 한 발을 빼내 티나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잘 벼린 언월도 같은 사마귀 발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안 돼!”
서걱.
툭.
잠시간의 고요.
푸화아악.
이내 붉은 피의 분수가 티나의 목에서 뿜어져 나왔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티나의 머리가 데구루루 굴러 내 발에 툭 부딪쳤다.
티나의 죽음.
티나의 죽음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티, 티나!”
비록 내 손으로 몰락시킬 게임이기는 하지만 티나는 내가 족장이 되기 전부터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나를 도와주고 보호해준 NPC다. 그러니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내가 평소에도 항상 티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
절규를 토해내는 나를 스윽 쳐다본 보티스가 이제는 3층으로 사라진 월향의 뒤를 따라 재빨리 몸을 날렸다.
[어딜!]
슥.
콰드득.
뒤늦게 나타난 나이트메어가 손을 들어 뭔가를 쥐는 시늉을 하자 보티스의 등에 달린 두 개의 사마귀 팔이 와그작 바스러졌다.
[치잇!]
본래는 보티스를 죽이려고 했던 것인지 나이트메어의 얼굴에는 짙은 아쉬움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티, 티나…….”
티나의 몸이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그런 티나의 시신을 보던 나는 문득 목에 건 학살자의 목걸이를 떠올렸다.
“레저렉션!”
“예?”
갑작스런 내 외침에 황급히 내 곁으로 다가온 마리아가 물었다.
그런 마리아를 무시하고 목걸이를 손에 쥔 채 약간의 마나를 흘려보내자 학살자의 목걸이가 ‘웅웅’ 하며 은은한 빛을 뿜어댔다.
발끝부터 시작해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티나의 몸과 목걸이는 보는 내 눈이 번뜩였다.
“운명과 필연, 인연의 실이 끊어진 가련한 영혼이여, 천상계의 빛과 지하계의 어둠조차 가련한 영혼을 데려가지 못할지니! 하물며 악계의 타락한 존재들조차 가련한 영혼을 데려가지 못할 것이라! 백광신 다아리엘과 흑광신 라그아노, 대악령 루키아논의 불멸의 법칙을 거스르는 자의 이름으로 명한다! 사기로 물들어가는 육체에 대고 명한다! 한 줌 허무로 변하는 영혼에게 명한다! 끊어진 필연의 실을 다시 연결하는 운명의 바늘을 입술에 대고 명한다! 레저렉션!”
우우우웅.
과연 부활이라는 엄청난 마법에 걸맞게 거창한 주문을 외우자 내 목걸이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여타 다른 매직 아이템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크윽!]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빛에 나이트메어가 신음을 삼키며 얼굴을 찌푸렸다.
우우웅.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온 은은한 빛이 티나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살아나라!’
티나는 내가 죽인 율칸과는 의미부터가 다른 NPC다. 그렇기에 율칸을 소멸했을 때도 태연했던 내가 이렇게 당황하며 티나의 부활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푸스스.
순식간이었다.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와 티나의 몸을 휘감은 새하얀 빛이 ‘푸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흩어졌다. 50% 확률로 시전된 레저렉션(Resurrection)이 실패한 것이다.
“아, 안 돼!”
내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내 곁에서 조마조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마리아가 안타까워 신음을 흘렸다.
잠시 후 레저렉션의 실패로 충격에 빠져 있는 내 어깨를 밀친 마리아가 양손을 티나의 몸에 얹었다.
“비켜요!”
“뭐?”
내 목소리에는 짜증이 담겨 있었다. 지금 티나는 죽은 상태다. 마리아가 아무리 치료 마법을 써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나를 보며 얼굴을 찌푸린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나도 부활 마법을 배웠다고요!”
“뭐?”
“에잇.”
나를 향해 답답하다는 듯 신음을 흘린 마리아가 티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운명과 필연, 인연의 실이 끊어진 가련한 영혼이여, 천상계의 빛과 지하계의 어둠조차 가련한 영혼을 데려가지 못할 지니! 하물며 악계의 타락한 존재들조차 가련한 영혼을 데려가지 못할 것이라! 백광신 다아리엘과 흑광신 라그아노, 대악령 루키아논의 불멸의 법칙을 거스르는 자의 이름으로 명한다! 사기로 물들어가는 육체에 대고 명한다! 한 줌 허무로 변하는 영혼에게 명한다! 끊어진 필연의 실을 다시 연결하는 운명의 바늘을 입술에 대고 명한다! 레저렉션!”
마리아의 입에서 레저렉션의 주문이 터져 나왔다. 설정상 고위 마법인 레저렉션의 주문은 따르는 신과 신전이 무엇이든 모두 똑같았다.
우우웅.
마리아의 손을 타고 흐른 은은한 빛이 다시 마리아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누군가는 그깟 NPC 하나 죽으면 어떠냐고 말할 수도 있다. 훨씬 더 강한 카인이나 어둠의 다섯 별에 소속되어 있는 NPC들을 가디언으로 하면 되지 않겠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티나가 아니다.
우우우웅.
푸스스.
“빌어먹을! 안 돼!”
전과 같이 한 줌 먼지로 흩어지는 빛에 내 입에서 욕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리아! 다시 해라! 티나를 살려라!”
“아, 안 돼요! 부활 마법은 하루에 한 번밖에 불가능해요!”
“빌어먹을!”
체념 섞인 마리아의 말에 내 입에서 다시 한 번 욕이 튀어 나왔다.
마리아가 몸을 떨며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는 동안에 티나의 모래화는 이미 배꼽 언저리까지 진행되었다.
나는 옆에 단창과 함께 놓여 있는 티나의 머리를 들어 목에 붙였다.
‘끝인가.’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말 그대로 티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지능 NPC니까. 하지만 슬펐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확실히 슬픔이라는 감정이 일었다.
스윽.
비탄에 빠져 가슴 부근까지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티나를 안고 있는 내 곁으로 작은 인영이 다가왔다.
[자는 거야?]
바로 나이트메어였다.
악몽을 먹고 힘을 키우는 악왕!
악몽왕이라 불리며 그 어떤 악왕보다, 심지어 아크 리치인 불멸왕(不滅王) 루키페노돈보다 능숙하게 마법을 사용하는 악왕!
‘나이트메어라면!’
나이트메어라면 티나를 살려줄지도 모른다. 과거 용마인이 죽었을 때 라데스가 그저 ‘살아나라’라고 한 것만으로도 용마인은 살아났다. 그것도 전과 다름없이.
티나가 나이트메어 혈통의 마족이 아닌 라데스 소속의 수인족인 것이 문제였지만 악왕에게 그런 것 따위가 문제될 리 없다.
“사, 살려주십시오!”
[응? 뭘?]
내 부탁에 나이트메어가 어린아이 같은 눈망울을 굴리며 천진난만하게 답했다.
“티나를, 제 가디언을 살려주십시오!”
[음… 에이, 귀찮은데.]
정말 귀찮다는 듯 나이트메어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런 나이트메어의 반응에 감정이 무척 상했지만 부탁하는 입장인지라 차마 티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큭. 빌어먹을 악왕!’
스스스.
그러는 동안에도 티나의 모래화는 이미 어깨까지 진행됐다.
그런데 나이트메어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넌 나에게 무엇을 해줄 거지?]
“뭐?”
[넌 나에게 무엇을 해줄 거냐고 물었다. 수만의 금은 필요 없어. 난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만 쓰지 않으니까. 순결한 처녀도 필요 없어. 난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만 품지 않으니까. 권력도 필요 없어. 난 경배를 받는 것을 즐기지만 이미 왕이니까. 그래, 넌 나에게 무엇을 해줄 거지?]
띠리링.
[A급 퀘스트 ‘나이트메어의 질문’이 발동되었습니다. 제한 시간은 30초입니다. 30초 안에 나이트메어가 만족할 수 있는 대답을 해야 합니다. 30, 29, 28…….]
갑작스런 퀘스트에 내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종류의 퀘스트를 겪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의 퀘스트는 충분히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나이트메어가 만족스러워할 만한 대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회전하던 내 머리가 마침내 한 가지 대답을 토해냈다.
“재미!”
[응?]
다시 한 번 말해보라는 표정을 지은 나이트메어를 향해 내 입에서 말이 쏟아져 나왔다.
“재미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재미를 드리겠습니다. 수천, 아니 수만의 인간들은 눈을 감는 순간부터 악몽을 꾸게 될 것이고 눈을 뜬다 해도 악몽을 봐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강해질 것이고 세상은 재미있게 변할 것입니다. 악몽은 곧 현실이 될 것이고 현실은 곧 악몽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암천왕 라데스 님의 대리자이자 암흑투마군단의 군단장인 저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입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난 판타즈마 월드를 몰락시킬 계획을 짜고 있으니까.
살기어린 내 말에 몸을 움츠리는 염환과 마리아와는 달리 나이트메어의 표정은 흥분 그 자체였다.
[정말? 정말 그럴 거야?]
“예!”
[빌어먹을 예쁜 엘프의 꿈도?]
“예.”
[난쟁이 못생긴 드워프의 꿈도?]
“예.”
[멍청하고 더러운 투칸의 꿈도?]
“예!”
[키키키. 그래도 난쟁이 꿈은 안 먹어. 난쟁이는 매일 쇠 꿈만 꿔서 쓰거든.]
뭐가 그리 좋은지 킥킥거리며 한바탕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린 나이트메어가 나를 바라보며 진득한 웃음을 흘렸다.
[좋아. 약속은 지켜야 한다. 안 지키면 혼내줄 거니까. 냐하하하!]
그와 동시에 머릿속으로 종소리와 함께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띠리링.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이트메어의 목소리에 맞춰 머릿속을 연이어 강타하는 목소리에 내가 정신을 못 차릴 때, 나를 지나친 나이트메어가 이제는 머리밖에 남지 않은 티나를 향해 손가락을 겨누며 입을 열었다.
[자지 마.]
우우우웅.
그것으로 끝이었다. 레저렉션 같은 그럴듯한 주문도 없었다. 그저 ‘자지 마’라는 말과 함께 티나의 몸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콰드득 콰득.
주르륵.
바닥으로 흩어졌던 모래들이 순서를 역행하고 거슬러 올라 다시 뼈와 근육으로 변했다. 그 뒤를 이어 살이 만들어졌고 옷도 만들어졌다.
생기를 잃고 하얗게 변했던 피부가 생기를 되찾고 붉게 달아올랐다.
[염환: 미친… 저게 가능한 거냐?]
[블러드: 악왕이니까.]
과거, 라데스가 용마인을 살려 내는 장면을 목격한 나와 마리아의 놀람은 덜했지만 염환은 아니었다. 이 놀라운 권능에 놀라는 염환을 간단한 말로 수긍시킨 내 입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큭.”
마지막 가죽 신발이 생성된 것을 끝으로 마침내 티나의 육체가 완성되었다.
“으음…….”
힘없이 쳐졌던 손끝이 움찔하는가 싶더니 티나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몸을 떨던 티나가 ‘허억’ 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허억, 허억…….”
숲의 마녀라 불리는 티나라 할지라도 죽음의 경험은 꽤나 충격이었는지, 몸을 일으킨 티나는 한참이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괜찮나.”
“마, 마스터!”
나직한 내 부름에 티나가 화들짝 놀라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이거 꽤 충격이 컸던 모양이군.’
하긴 세상에 그 누가 목이 잘려 죽는 경험에 태연할 수 있겠는가. 티나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내 손을 잡고 있던 티나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렸다.
“괜찮다.”
평소 같았으면 색다른 티나의 모습에 즐거움의 웃음을 흘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티나는 죽었다 살아난 것이다.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이트메어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하자, 방글거리며 웃던 나이트메어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라데스의 자식이니 약속은 지키겠지?]
“물론입니다.”
[그거면 좋아. 냐하하하.]
한차례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흘린 나이트메어가 다시 살아난 티나를 스윽 쳐다봤다.
그러자 티나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비록 그녀가 섬기는 악왕은 아니지만 나이트메어는 라데스와 같은 악왕이다. 티나의 행동이 조심스러운 것은 당연했다.
나이트메어의 눈치를 보던 티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 감사합니다.”
[아냐. 네 주인과 내가 거래를 한 건데 뭘. 냐하하.]
연이어 웃음을 흘린 나이트메어가 돌연 비틀거렸다.
“아, 아버지!”
갑작스런 나이트메어의 행동에 바젤이 얼굴을 굳히며 나이트메어를 부축했다. 살아남은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 또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이트메어를 바라봤다.
바젤의 부축을 받고 몸을 추스른 나이트메어가 입을 열었다.
[휴우… 소울 에너지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언령을 사용하니까 힘들군. 역시 잠을 좀 자야겠어.]
“아, 아버지!”
[조용해라, 바젤. 난 다시 깨어날 것이니까.]
지금까지의 장난스러운 아이의 음성이 아닌 장엄한 악왕의 음성을 흘린 나이트메어가 바젤을 한 번 쳐다본 뒤 나와 일행, 그리고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을 보며 다시 장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라! 나는 정확히 70일 뒤에 깨어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힘을 키우고 몽마들을 퍼트려라! 나 루키아논 님의 세 번째 눈물! 여섯 악왕 중에 꿈을 지배하는 악몽왕 나이트메어의 이름으로 명한다!]
우우우웅.
나이트메어의 입에서 흘러나온 언령이 보랏빛 기운으로 변해 바젤과 나머지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서큐버스와 인큐버스의 몸에서 한차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우득.
쿠오오오.
육체적 능력을 주로 사용하는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은 몸의 근육이 불어났고, 마법과 염력을 사용하는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은 마력이 한층 더 불어났다.
‘대단하군.’
전의 기운이 리자드 맨 정도의 기운이었다면, 이 새로운 기운은 게르맨더 전사 정도의 기운이었다. 거의 두 배 이상 불어난 것이다. 물론 총 수가 채 30이 넘지 않지만 이 정도라도 엄청난 것이다.
이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이 70일, 그러니까 현실로 35일 동안 대륙을 돌아다니며 하급 몽마들을 무작위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몽마들은 훗날 나의 군사들이 되어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을 것이다.
‘교묘하군.’
새롭게 변한 자신의 몸을 감상하는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을 바라보는 내 눈이 가라앉았다.
70일.
아무렇지 않을 것 같지만 이 숫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현실 시간으로는 35일. 바로 내가 무투 대회에 출전하는 날이고 복수를 실행하는 날이다.
물론 마법사의 탑, 그리고 탑을 도와주는 두 개의 세력과 함께 검은 사자 길드를 치겠다는 예전의 복수가 아닌, 암흑투마군단과 나이트메어의 세력으로 대륙의 모든 유저들을 쓸어버리겠다는 복수지만.
[하암. 졸려.]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는 날 뒤로하고 나이트메어가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아!]
그런데 하품을 하던 나이트메어가 어느 지점을 가리키며 눈을 빛냈다.
‘응?’
나이트메어의 시선을 따라 가던 내 눈이 급속도로 커졌다.
“그랑데시아 스태프와 블러드 문 소드!”
나이트메어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자루의 녹색 스태프와 붉은 검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아마 월향이 황급히 도망치느라 챙기지 못한 듯했다.
은은한 빛을 뿜어대는 두 아이템을 바라보는 내 눈이 탐욕으로 가득해졌다. 물론 그 아이템을 탐내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좋아. 크크큭.’
비록 내가 쓰는 것이 저 두 아이템보다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필요가 있었다. 그랑데시아 스태프는 염환에게 줄 생각이었지만 블러드 문 소드는 아니었다.
[좋아! 저 두 아이템이라면 내 힘을 더 증폭시켜 줄 테지. 키키킥]
“뭐?”
갑작스런 나이트메어의 말에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 나왔다.
하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다시 한 번 눈을 빛낸 나이트메어가 두 아이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르르륵.
타닥.
잠시 땅에서 구르던 두 아이템이 허공을 날아 나이트메어의 양손에 잡혔다.
우우웅.
카가각.
[크윽. 가만히 있어!]
마검인 블러드 문 소드는 나이트메어의 손길을 환영했지만 그랑데시아의 기운을 품은 스태프는 아니었다.
은은한 빛을 뿜어대며 반항하는 그랑데시아의 스태프를 잡은 손에 모든 힘을 집중한 나이트메어가 힘겨운 표정으로 반으로 쪼개진 탑의 조각에 걸터앉아 입을 열었다.
[그럼 70일 뒤에 봐. 그리고 라데스의 자식,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쉬시시식.
“아, 아버지!”
바젤이 깜짝 놀라 불렀지만, 이미 나이트메어는 연기로 변해 탑으로 모두 스며든 후였다.
드드드드드.
그르르륵.
나이트메어가 스며든 작은 탑이 주변의 작은 조각들을 끌어 모으며 원래의 모양을 찾아갔다.
쩌정.
쿠웅!
마침내 반으로 쪼개졌던 탑이 하나로 합치며 둔탁한 소음을 토해냈다. 탑의 표면에 새겨져 있던 눈 조각들이 한차례 빛을 뿜고는 전과 같이 평범한 조각으로 변했다.
“미친!”
순식간에 두 천 급 아이템을 들고 사라진 나이트메어의 행동에 내 입에서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따로 반응할 수조차 없었다.
“가셨군요.”
멍한 얼굴의 바젤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게 문제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바젤은 나의 조력자였다. 어떻게 보면 두 개의 천 급 아이템보다 가치가 있는.
“70일 뒤에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예…….”
단호한 내 말에 바젤이 힘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곧 자세를 가다듬은 바젤은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을 향해 눈을 번뜩이며 우렁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가라! 고귀한 몽마족들이여! 가서 비천한 종족들의 꿈에 우리들의 힘을 심어라! 또 갈취해라! 대륙의 비천한 것들에게 고귀한 혈통을 심어라! 심고 또 심어라! 모든 것이 아버지의 힘이 될지니!”
“예!”
촤르륵.
바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열해 있던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이 한층 더 거대해진 날개를 펼치고 허공을 날아 반쯤 부서진 입구를 통해 3층으로 나갔다. 던전을 지나 지상까지 날아가려는 듯했다.
푸드득.
마지막 한 마리까지 모두 날아가자 바젤이 내 곁으로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비천한 것들에게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뻔했습니다.”
“아닙니다.”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 연신 고개를 꾸벅이는 바젤을 바라보는 내 입가에 짙은 조소가 걸렸다.
월향의 일행이 쳐들어온 것은 모두 나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처리한 것이다. 물론 바젤을 치러 왔다고 하더라도 도와줬겠지만, 어쨌든 월향 일행은 나를 치기 위해 온 것이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사람은 바젤이 아니라 나였다.
천 급 아이템이 아깝기는 했지만 나이트메어가 가지고 사라진 이상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70일이란 시간이 남아 있는데.”
내 눈치를 본 바젤이 조심스레 물었다.
“으음.”
내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디로 가냐라…….’
게임 시간으로는 내일 모레, 현실 시간으로는 내일.
장소를 바꾼 마법사의 탑의 아지트에 가기로 크레이언과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나를 도와주기로 한 두 세력의 수장들 또한 만날 터였다.
“빌어먹을 것들.”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젤을 향해 답하는 내 입에서 전과 같은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금은 마법사가짱이얌이란는 가명을 쓰고 있는 마법사의 탑의 수장인 크레이언과 마법사의 탑과 뜻을 같이 하기로 한 두 세력 또한 드래곤 클럽이 분명하다. 내가 복수한다는 쪽에 건.
까드득.
드래곤 클럽을 생각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이를 갈고 말았다.
나의 제2의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게임을 자신들의 유희를 위해 이용한 빌어먹을 것들!
마음 같아서는 카나리아처럼 며칠이고 잠복한 뒤 놈들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었지만 명색이 한 조직의 간부라는 카나리아마저도 실패한 일을 내가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난 나만의 방식으로 복수하면 된다!’
우우우웅.
부르르.
내 분노와 마기가 뒤섞여 짙은 공명음을 흘리자 내 곁에 있던 마리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기를 갈무리한 뒤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바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결전의 그날까지 힘을 쌓으려고 합니다.”
“이미 충분히 강하십니다.”
바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속 편해서 좋겠군, NPC.’
바젤을 향해 씁쓸한 웃음을 흘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예. 그럼 결전의 날에 뵙겠습니다.”
꾸벅.
바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미련 없이 3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본래 4층은 스크롤 발동 불가능 지역이라 귀환 스크롤이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 뒤를 일행이 따라 붙었다.
3층으로 올라온 염환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후우… 이제 어디로 갈 거냐?”
티는 내지 않았지만 염환 또한 상당히 정신적 피로가 쌓인 듯했다.
마리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직 티나만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으음…….”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자 나는 곤혹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각자 흩어져서 로그아웃 한다.”
“응? 정말이냐?”
염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염환이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나를 바라보는 염환의 눈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끄응…….’
확실히 1분 1초가 아까운 이 시점에는 당장 달려 나가 사냥하며 레벨을 올려야 정상이겠지만, 일단 내일 크레이언과 나머지 드래곤 클럽을 만나기 위해서는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후우… 그럼 파티를 그대로 두고 나중에 내가 따로 연락하마.”
“그래. 휴우… 난 이만 나가봐야겠다. 끄응. 로그아웃.”
한차례 앓는 신음을 흘린 염환이 로그아웃이라 중얼거리자 곧 그의 신형이 흐릿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전 동생들이 불러서 가봐야겠네요.”
“잠깐.”
“예?”
갑작스런 내 부름에 막 귀환 주문서를 찢으려던 마리아가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받아라.”
아이템 창에서 거대한 도끼를 꺼내 마리아에게 건네자 마리아가 그 표정을 지우지 않고 물었다.
“뭐예요?”
“오늘 일을 도와준 보답이다. 최상급 레어 아이템이다.”
내가 마리에게 건넨 아이템은 바로 ‘갈색 곰의 앞발’이었다. 과거 웨어베어 일족의 족장인 둔카를 죽이고 획득한 아이템이다.
“너무 부담스럽네요. 다른 건 없어요?”
거대한 도끼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기운을 눈치 챈 것인지 마리아가 부담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없다.”
“휴우… 너무 큰 보답인데…….”
“뭔가 착각하고 있군.”
“예?”
갑작스런 내 말에 마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 도끼는 최상급 레어 아이템이다. 현금으로 팔아도, 음… 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분유를 사도 천 개는 살 수 있는 아이템이다. 이것은 오늘 일의 보답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나를 도와달라는 의미로 주는 것이다.”
“아!”
가벼운 감탄을 터트린 마리아가 혀를 내밀어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도끼를 받아들었다.
“끄응… 무겁네요.”
도끼를 건네받는 마리아의 얇은 팔이 휘청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자신의 몸에 보조 마법을 건 마리아가 거대한 도끼를 아이템 창으로 이동시켰다.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으며 뭔가를 조작한 마리아가 스크롤을 들고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진짜 가볼게요. 아이템 고마워요. 호호. 언제든지 필요하면 부르세요.”
부욱.
화아악.
맑은 웃음을 토해낸 마리아가 스크롤을 찢자 곧 그녀의 발밑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와 신형을 삼켰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티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야수연합으로 가서 나를 기다려라.”
“예!”
고개를 끄덕인 티나도 스크롤을 찢어 빛과 함께 던전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나뿐이었다.
“후우… 캐릭터 창.”
한숨을 내쉬며 캐릭터 창을 부르자 ‘파밧’ 하는 소리를 내며 내 커다란 홀로그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 블러드. 레벨: 302. 속성: 혈(血).
성향: 악중악(惡中惡). 종족: 웨어라이언(Werelion).
명칭: 암흑투마군단장(暗黑鬪魔軍團匠).
체력: 1785000. 마력: 89000. 신성력: 0.
힘: 1580. 민첩성: 700. 체력: 450.
지혜: 150. 신마력: 150. 행운: 200.
나이트메어의 질문에 대답하는 퀘스트를 통과해 레벨이 올랐기에 능력치는 전보다 약간 상승해 있었다.
스윽.
철컹.
이내 능숙한 손놀림으로 보너스 스탯을 힘에 투자한 뒤 손에 들린 도를 등에 걸린 도갑에 꽂아 넣으며 입을 열었다.
“로그아웃.”
[로그아웃하시겠습니까?]
“그래.”
[감사합니다. 또 하나의 세상, 판타즈마 월드였습니다.]
화악.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어둠이 나를 덮쳤다고 느끼는 순간, 내가 있는 곳은 이미 던전이 아니었다.
***
“후우.”
철컥.
머리를 옥죄는 헤드셋을 벗은 뒤 몸에 붙어 있는 장비들을 해제하고 붉은 버튼을 누르자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캡슐의 문이 열렸다. 시원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후우.”
가슴 속까지 맑게 만드는 시원한 공기에 심호흡하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미네르바, 온수 가동. 1번 정식 준비.”
[예.]
삑.
쏴아아!
작은 전자음과 함께 들리는 물소리에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몸을 눕혔다.
미지근한 물이 장시간의 게임으로 뭉친 내 근육을 쓰다듬었다. 그 나른한 기분에 절로 졸음이 밀려왔다.
“후우…….”
굳어 있던 몸이 풀어지고 수증기로 욕실이 뿌옇게 되었을 때쯤에야 나는 욕조에서 일어나 물기를 닦고 준비된 옷을 챙겨 입었다.
주방으로 가자 내가 나오는 시간에 맞춰 준비된 음식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우걱우걱.
때마침 배가 고픈 상태였기에 자리에 앉아 음식으로 정신없이 손을 놀렸다.
덜그덕.
식사를 마친 뒤, 식기들을 세척기에 넣고 가볍게 소화를 도와줄 요량으로 러닝머신에 올라 버튼을 눌렀다.
우우웅.
부드럽게 움직이는 발판을 따라 10분 정도를 걷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후우.”
그렇게 10분 정도 더 달리고는 러닝머신을 끈 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침대에 누었다.
포근한 기분이 내 몸을 휘감았다.
‘찝찝하군.’
약간 흐르는 땀에 찝찝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곧 로그아웃할 때와 같은 어둠이 나를 덮쳤다.
“끄응…….”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정확히 하루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폭스와 약속을 잡은 날이기도 했다.
“제길.”
폭스 생각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영양제 몇 알을 삼키고 저지방 우유를 마신 뒤 캡슐을 열고 들어갔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장비를 착용한 뒤 게임에 접속하자 게임 속의 나, 블러드가 무시무시한 마기를 흘리며 나를 반겼다.
저벅저벅.
바위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다가온 블러드의 손을 마주 잡자 순식간에 뿜어져 나온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
***
크오오오.
접속하자마자 들리는 우렁찬 포효에 인상을 찌푸리며 포효의 출처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구석의 어둠에 숨어 있던 거대한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고리?”
크오오오.
의문 섞인 내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 존재가 다시 한 번 낮은 포효를 터트렸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바로 꿈과 절망을 만드는 마수 그레고리였다.
황토색의 거대한 몸집에 코끼리를 닮았다. 짧고 굵은 발로 땅을 지탱하고 있었다. 팔은 없었는데 그 대신 얼굴에 달린 기다란 코가 팔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쉬익! 쉬익!
크오오오.
한바탕 거친 숨을 몰아쉰 그레고리가 포효를 터트렸다. 그레고리의 포효에는 숨길 수 없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감히!”
그레고리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은 내 입에서 살기 어린 음성이 튀어나왔다.
리나와 함께 있을 때는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던 그레고리가 내가 혼자 있다고 저런 살기를 보이는 것은 나를 얕잡아보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레고리의 지능이 낮을지라도 어쨌든 나에게 살기를 보인 상대. 감히 몬스터가 나에게 살기를 보였는데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었다.
“죽여주마.”
스르릉.
내 등에 걸린 도가 맑은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와 날카로운 예기를 뿌렸다. 확실히 신 급 아이템으로 각성하고 난 뒤부터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짙은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우웅!
도를 울리는 마기에 나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레고리가 흠칫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크오오오!
쿵쿵쿵!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불길한 기운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거대한 포효를 터트리며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좁은 복도 형태의 던전이라 거대한 몸집의 그레고리가 달려오자 복도가 꽉 차는 느낌과 거대한 압박감을 느꼈다.
커다란 포효를 지르며 휘두른 그레고리의 코가 내 머리를 스쳐 던전의 벽을 때렸다.
우수수 소리를 내며 무더기로 떨어지는 돌가루를 본 내 얼굴에 약간의 긴장감이 떠올랐다.
그레고리는 350에서 360 레벨 사이의 몬스터로 강력한 힘과 최면 마법을 주 무기로 하는 상위 몬스터다.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휘리릭.
퍼억!
“큭.”
던전의 벽에 박힌 코를 회수한 그레고리가 그대로 코를 말아 내 명치를 후려쳤다.
말이 코이지 웬만한 장정의 허벅지 굵기만 한 코에 맞으니 둔기에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내 몸을 강타했다. 워낙 방어력이 높아 체력이 많이 깎이진 않았지만 충격은 장난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자식!”
퍼억.
부우욱.
명치에 박혀 꿈틀거리는 그레고리의 코에 양팔의 토시를 박아 넣고 양 옆으로 당기자 그레고리의 굵은 코의 껍질이 부욱 뜯겨 검은 피를 뿌렸다.
크오오오오!
피를 뿌리는 코를 회수한 그레고리가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며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레고리의 두 눈이 사이한 붉은빛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레고리의 주특기인 최면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우우웅.
푸스스스.
그레고리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빛이 내 몸을 휘감은 마기와 부딪쳐 허무하게 사라졌다.
크오오?
자신의 최면 마법이 통하지 않은 것이 의외인지 의문의 포효를 흘린 그레고리가 다시 최면 마법을 걸었지만 헛수고였다.
애초에 리나를 뛰어넘어 바젤과 동급인 내가 겨우 바젤의 밑 계통인 그레고리의 마법에 걸릴 리가 없었다.
‘멍청한 놈!’
“차핫!”
타닥.
연신 최면 마법을 거는 그레고리를 향해 조소를 날리면서 힘찬 기합을 터트리고는 도를 들어 몸을 날렸다.
우우웅.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나가 짙은 도기로 변해 도를 휘감았다.
크오오오.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기운을 느낀 것인지 연신 최면 마법을 걸던 그레고리가 포효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몸집이 거대한 그레고리가 좁은 던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부우욱.
크오오오!
날카로운 도기에 그레고리의 옆구리가 한 움큼 뜯겨 피를 쏟아냈다.
치이익.
땅에 떨어진 그레고리의 살점이 떨리는가 싶더니 곧 녹아 없어졌다.
본래 그레고리는 현실에 존재하는 않는 꿈의 마수. 그렇기에 몸의 일부분이 떨어지면 모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녹아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레고리를 비롯한 서큐버스, 인큐버스 종류의 몽마족들을 상대하려면 보통 무기가 아니라 소울 에너지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한 것이다.
크오오오!
상처를 입자 분노하는 것인지 한차례 거센 포효를 토한 그레고리가 무차별적으로 코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상처가 난 코였지만 그 위력은 변하지 않았다.
휘이이잉!
후드득!
꽝!
파공음이 난 뒤에는 어김없이 그레고리의 코에 난 상처에서 뿜어진 피가 뒤따랐다. 그리고 그레고리의 코가 부딪친 던전의 벽에서 커다란 폭음이 터졌다.
코라고는 하지만 단단한 근육으로 뭉쳐 있다 보니 웬만한 몬스터의 주먹질보다 위력이 강력했다.
스슥.
콰깡!
간발의 차이로 몸을 날리면 여지없이 그레고리의 코가 벽을 때렸다.
자꾸 피하기만 하는 내가 짜증나는지 그레고리의 숨이 더 거칠어지고 코의 움직임도 더 거칠어졌다.
“큭.”
제왕의 포효와 같은 기운을 담은 그레고리의 포효에 인상을 찌푸리며 낮은 신음을 흘리자, 그레고리가 짧은 다리를 놀려 다가와 마구 코를 휘둘렀다.
터덩!
도면을 이용해 그레고리의 코를 막자 탄력 있는 소리가 그레고리의 코에서 터졌다.
내 반격이 의외였는지 그레고리가 포효를 흘렸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다시 몸을 날리는 내 모습에 그레고리가 당황한 듯한 신음을 흘렸다.
퍽!
꾸엑!
어깨를 이용해 그레고리의 가슴을 들이박자 그레고리가 답답한 신음을 터트렸다. 팔이라도 있으면 방어를 하겠지만 그레고리에게 있는 것은 코뿐이었다. 그 코마저 내 도에 튕겨 힘없이 축 쳐져 있었다.
“죽어라!”
크오오오!
내 외침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레고리가 신음을 흘리다 말고 포효를 내질렀다. 하지만 부질없는 반항이었다.
뻐억!
크오오!
도면에 강타당한 그레고리의 입에서 고통에 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내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흐읍.”
서걱.
푸화악!
그대로 허공을 한 바퀴 회전한 도가 그레고리의 얼굴을 사선으로 그었다. 매끄럽게 잘린 그레고리의 황토색 피부에서 검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퍽!
처절한 비명을 지른 그레고리가 코를 휘둘러 내 가슴을 때렸다.
나는 미처 방어하지 못했기에 굵은 그레고리의 코에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크윽.”
타닥.
낮은 신음을 흘리며 재빨리 거리를 벌리자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로 몇 번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제 끝내기로 작정한 것인지 코끼리의 것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어금니를 빛낸 그레고리가 돌진해왔다. 형태는 코끼리와 같지만 찌르기보다는 상대를 묶어두는 것에 치중한 것인지 엑스(X)자 형태로 발달한 어금니가 나를 위협했다.
쿵쿵쿵쿵.
던전을 뒤흔드는 엄청난 굉음에 내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이내 도를 고쳐 잡아 앞으로 향하게 한 뒤 쭉 뻗자 도가 그레고리의 어금니와 같이 훌륭하게 변했다.
“챠핫!”
쐐애액.
힘찬 기합과 함께 땅을 박차고 몸을 날리자, 그레고리의 어금니처럼 앞으로 뻗은 도가 공기를 가르며 날카로운 파공음을 흘렸다.
두두두.
꽈앙!
마침내 내 도와 그레고리의 두 개의 엇갈린 어금니가 만나며 커다란 굉음을 터트렸다.
끼끼긱.
반질반질한 하얀 어금니와 도가 만나며 내는 날카로운 소음에 내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맞붙은 도와 어금니.
도를 짓누르는 힘에 나 또한 도를 잡은 손에 힘을 더하자, 그레고리의 어금니가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크오오!
점차 번져가는 어금니의 균열에 그레고리가 불길함을 느끼고 황급히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걸 용납할 내가 아니었다.
“크하앗!”
쩌저적.
구오오!
힘찬 기합과 함께 내지른 도에 그레고리의 어금니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부러져 허공으로 비산했다.
어금니가 부러지자 그레고리가 커다란 포효를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내 도가 그레고리의 눈을 파고들었다.
푸욱.
크오오!
처음엔 그저 놀란 듯했으나 곧 엄습해오는 엄청난 고통에 그레고리는 미친 듯이 포효를 내지르며 고통에 몸을 떨었다.
크오오오! 크오오!
푸우욱.
“크크큭.”
발광하는 그레고리의 눈에 더 깊숙이 도를 박아 넣는 내 입에서 진득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쑤욱.
날카로운 도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레고리의 눈을 뚫고 그레고리의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본래 그레고리의 이마에 도가 박혔다면 두개골 때문에 이렇게 매끄럽게 박히지는 않을 것이지만, 눈에 박혔기에 이렇게 도가 매끄럽게 파고드는 것이었다.
콰드득.
“크큭.”
그레고리의 눈에 박힌 도를 그대로 회전시켜 두개골마저 으스러트리는 내 입에서 광기 어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오오오오!
털썩.
쿠웅.
마침내 포효를 내지르던 그레고리의 거대한 몸이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치이익.
빠른 속도로 녹아가는 그레고리의 몸 안에서 많은 금화와 내 주먹만 한 보랏빛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아이템이었기에 호기심에 아이템을 들어 설명을 누르자 ‘파밧’ 하는 소리와 함께 보랏빛 구슬에 관한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악몽의 집합체-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은 지능이 낮은 하급 몽마족인 그레고리를 시켜 각 종족의 악몽을 모아 하나의 결정(結晶)으로 만들어오라고 시켰다. 이 불길한 보랏빛 구슬이 바로 그 악몽의 결정이다. 우연히 이 결정을 주은 자에게 경고한다. 함부로 결정을 깨트리지 마라. 악몽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니까.
내구력- 무한.
특수능력- 악몽의 집합체를 파괴했을 시,
반경 10m 안의 모든 적은 5% 확률로 ‘절망’과
‘공포’ 상태에 빠짐.
10m 안의 적의 공격력 5% 하락.
10m 안의 적의 방어력 5% 하락.
10m 안의 적의 생명력 3분 간격으로 2% 감소.
(이 효과는 10분간 지속된다.)
“하하하!”
예상 외로 뛰어난 옵션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정도 옵션이라면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적에게 충분히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만약 적진의 한복판에서 섭혼강기와 함께 사용한다면 좋은 효과를 볼 것이 분명했다.
스윽.
마음 한편에서는 던전에서 하루 동안 그레고리를 잡아 악몽의 집합체를 모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약속이 있었기에 아쉬워하며 아이템 창에 악몽의 집합체를 넣었다.
‘거인의 계곡이라…….’
폭스의 말로는 새롭게 바뀐 마법사 탑의 아지트가 거인의 계곡에 위치해 있다고 했다.
정확히 거인의 계곡 어딘지는 모르지만 계곡의 형태를 하고 있는 곳에서 탑의 모양을 하고 있는 아지트를 찾는 것은 쉬웠기에 따로 물어보지 않았다.
거인의 계곡이 있는 필드는 이브젤 평원으로 대륙의 북쪽에 자리 잡은 곳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문제없었다. 바로 나에게는 각 마을의 귀환 주문서가 있기 때문이다.
‘거인의 계곡이라면… 코란 마을인가.’
코란 마을은 거인의 마을 초입에 있는 작은 마을로, 거인의 계곡으로 사냥을 가는 유저들이 잠시 쉬거나 사냥 전에 장비를 점검하는 곳이었다.
[블러드: 염환, 어디냐.]
아직 파티를 해제하지 않은 상태여서 파티 음성창을 이용해 염환을 부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염환의 목소리가 울렸다.
[염환: 지금 탑이다. 무슨 모임 때문에 모였는데, 나도 탑의 간부 자격으로 모였다.]
포 스타의 마법사인 폭염의 마도사라면 마법사의 탑 간부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블러드: 그래, 나도 곧 가마. 대충 코란 마을에서 탑의 위치가 어디냐?]
[염환: 코란 마을의 북쪽 출구로 나와서 쭉 올라오면 보일 거다. 가끔 자이언트 리자드가 보이니까 조심하고.]
[블러드: 그래.]
자이언트 리자드(Giant Lizard)는 그 크기가 거의 3m에 이르는 거대한 도마뱀이다. 거인족이 기르는 이 몬스터는 레벨 200에서 220사이로, 데스 랜드의 야수들과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야수들보다 까다로운 취급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빨에 있는 마비독 때문이었다.
그 이빨에 스치기만 해도 5분 정도는 꼼짝도 할 수 없는 마비독으로, 독에 대한 면역력이 높은 쓰리 스타의 어쌔신이라도 자이언트 리자드의 이빨에 스치면 최소 3분을 움직이지 못했다. 더군다나 놈들의 꼬리는 내가 방금 전에 상대한 그레고리의 코에 버금가는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부욱.
이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코란 마을의 귀환 주문서를 찢자 발밑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