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6 마법사의 탑
휘이이잉.
온몸으로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눈을 뜨자 광활하게 펼쳐진 평원이 나를 반겼다.
유토리안이 푹푹 찌는 살인적인 더위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이곳, 이브젤 평원은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하는 바람이 쉬지 않고 부는 곳이었다.
내 몸을 휘감은 학살자의 망토가 불어오는 바람에 쉬지 않고 펄럭였다.
시원한 바람을 한껏 만끽한 나는 이내 몸을 돌려 내 옆쪽에 있는 작은 마을, 코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땅과 잡초가 적절하게 섞여 걸을 때마다 기분 좋은 감촉을 선물했다.
“어, 어서 오십시오!”
마을의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 NPC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게 인사했다. 아마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 때문인 듯했다.
본래 마기를 흘리는 인물이라면 종족을 막론하고 마을의 출입을 막지만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위압감에 경비병 NPC들이 딱딱하게 굳어 나를 제지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짙은 마기를 내뿜는 내가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길을 걷던 NPC 들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모여 있던 유저들 또한 굳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으음.”
예상보다 차가운 반응에 낮은 신음을 흘리며 코란 마을의 북쪽 입구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본래는 포션을 정비하고 가려고 했지만 지금 NPC들과 유저들의 반응을 보자면 포션을 사다가 기습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었다.
“아, 안녕히 가십시오!”
북쪽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들 또한 전의 경비병과 같은 반응으로 나를 경계했다.
그런 경비병들의 반응에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나는 코란 마을을 벗어났다.
휘이잉.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은 바로 거인의 계곡이라 불리는 거대한 계곡이었다. 계곡을 이루고 있는 붉은 바위가 마치 피 칠을 한 듯했다.
‘저긴가 보군.’
계곡의 중간 부분에 보이는 검은 점이 바로 이번에 새로 자리 잡은 마법사 탑의 아지트인 것 같았다. 역시 예상대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스르릉.
혹시 모를 몬스터에 대비해 도를 꺼내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구체적으로 약속 시간을 잡은 적이 없으니 조금 늦어도 상관은 없었기에 내 걸음은 여유로웠다.
확실히 거인의 계곡의 넓이는 거대했다. 이브젤 평원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거인의 계곡이 이 정도 크기라면 이브젤 평원의 크기는 어떨지 상상할 수 있었다.
과거의 나 또한 이브젤 평원은 완벽하게 일주하지 못했다. 몬스터는 물론이고 바로 엄청난 크기의 맵 때문이었다.
말을 타고서도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에, 나와 간부들은 이브젤 평원 일주를 포기해야 했다. 물론 그 뒤로도 판타즈마 월드 홈페이지에는 이브젤 평원을 일주했다는 말 따위는 나돌지 않았다.
여유롭게 탑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내 발걸음이 멈칫했다. 바로 저 앞에서 움찔거리는 검은 점 때문이었다.
크르르르.
킁킁!
가래가 끓는 듯한 목 울림과 코 막힌 사람을 연상케 하는 답답한 소리의 정체는 바로 자이언트 리자드와 그 주인인 스톤 자이언트(Stone Giant)였다.
자이언트 리자드의 목에 연결된 검은색의 가죽 끈을 잡고 연신 자이언트 리자드를 재촉하는 거인이 바로 스톤 자이언트였다.
어떻게 보면 내가 고곤의 광산에서 상대한 스톰 자이언트와 비슷한 이름을 가졌지만 그 모습과 힘은 확연히 달랐다.
일단 전기를 사용하는 스톰 자이언트와는 달리 스톤 자이언트는 아무런 특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보통 자이언트와 다를 것 없는 전형적인 거인족이다. 7m에 가까운 엄청난 덩치에 비해 힘은 스톰 자이언트보다 약했다. 있는 것이라고는 거대한 덩치와 자이언트 리자드뿐이었다.
‘그레고리에 이어 스톤 자이언트라니.’
점차 거리를 좁히는 자이언트 리자드와 스톤 자이언트를 보는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통이었다면 만나지 않을 몬스터를 연속으로 만나자 기묘한 불길함이 내 몸을 휘감았다.
이런 내 불길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침내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한 거리까지 다가온 자이언트 리자드가 ‘쉿쉿’ 하는 소리를 내며 내 손목 굵기만 한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킁킁. 뭐냐?”
자이언트 리자드의 목줄을 잡은 거대한 존재가 그 답답한 숨소리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인 양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큭.”
그런 스톤 자이언트를 바라보는 나는 조소를 흘렸다. 스톤 자이언트라고 해봤자 덩치만 큰 저능아에 불과했다.
예전에 내가 상대했던 스톰 자이언트보다 약한 존재가 바로 스톤 자이언트다. 하물며 나는 전보다 두 배는 더 강해진 상태다. 아무리 자이언트 리자드와 함께 있더라도 내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킁킁. 물어라!”
크롸라라!
자신보다 한없이 작은 나 따위쯤은 자이언트 리자드 한 마리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자이언트 리자드의 목을 옥죈 검은 가죽 줄을 손에서 떨어트린 스톤 자이언트가 나를 가리키며 외치자, 자이언트 리자드가 발을 구르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두두두두.
그레고리에 비해 전혀 처지지 않는 자이언트 리자드의 돌진에 잠시 주춤했지만, 살짝 몸을 날려 가볍게 자이언트 리자드를 피했다.
그 때문에 맨땅에 머리를 박은 자이언트 리자드가 내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혀를 내밀어 ‘쉿쉿’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차핫!”
나는 더 기다릴 것 없이 도를 짧게 휘둘렀다.
그러자 막 나를 향해 뻗어 있던 자이언트 리자드의 혀가 썩둑 잘려 나갔다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자신의 혀를 본 것인지 자이언트 리자드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마구 발광했다.
퀴에에엑!
한참을 고통에 발광하던 자이언트 리자드가 돌연 몸을 돌려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쉬리릭!
턱.
3분의 1이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길이의 혀가 자이언트 리자드의 입에서 튀어나와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내 다리를 휘감았다.
부르르.
“크윽.”
발을 옥죄는 엄청난 압력에 내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마치 거인왕의 손이 내 다리를 꽉 부여잡은 듯했다. 자이언트 리자드의 혀는 그레고리의 코에 비해 뒤지지 않는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치이익.
자이언트 지라드의 혀가 감긴 각반이 매캐한 연기를 뿜어대며 주르륵 녹아 흘러 내렸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연기에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독인가?’
각반을 녹일 정도의 지독한 독의 정체는 자이언트 리자드의 혀에 있는 마비독이 분명했다. 마비독이 각반을 녹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비틀.
“크윽.”
설상가상으로 각반을 녹이고 내 몸으로 침입한 자이언트 리자드의 마비독에 몸이 비틀거렸다.
‘제기랄!’
점차 감각을 잃어가는 다리와 일그러져가는 시야에 황급히 아이템 창에서 해독 포션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퐁.
나를 한입에 삼키려고 하는 것인지 그 거대한 입을 쫙 벌린 채 나를 끌어당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이언트 리자드의 혀를 무시하며 해독 포션을 입에 흘려 넣자, 곧 일그러졌던 시야와 함께 무감각했던 다리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크, 빌어먹을 자식!”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잊었던 분노가 내 몸을 잠식했다. 겨우 자이언트 리자드 따위에 고전한 내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쉬시식.
푸욱.
허공을 한 바퀴 회전한 도가 내 다리를 휘감은 혀에 박혔다.
잠시 버티는 것 같았던 자이언트 리자드의 혀가 끊겨 바닥을 구르며 마구 꿈틀거렸다.
퀴에에엑!
쿵쿵쿵.
또다시 혀가 잘린 것이 꽤 충격이었는지 자이언트 리자드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마구 발을 굴렀다.
하지만 아직 힘이 남아 있는지 이내 뿌옇게 피어오른 모래먼지 사이로 자이언트 리자드가 붉은 안광을 뿌리며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몸놀림에 숨을 삼키며 도면이 아닌 도의 날 부분으로 몸을 막자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자이언트 리자드의 머리에 도가 박혔다.
퀴에에엑!
보통 유저였다면 도가 자이언트 리자드의 머리에 박히기 전에 밀어붙이는 자이언트 리자드의 힘에 나가떨어져야 정상이지만, 힘으로는 스톰 자이언트를 능가하는 내가 겨우 자이언트 리자드의 돌진에 밀릴 리가 없었다.
푸푸푹.
툭.
가죽과 살을 가르며 거침없이 자이언트 리자드의 머리를 파고들던 도가 딱딱한 무언가에 툭 하고 걸려 움직임을 멈췄다.
‘두개골인가.’
도의 날을 통해 느껴지는 이 딱딱한 느낌은 두개골이 분명했다.
‘부숴주마!’
“크하아압!”
퀴에엑!
힘찬 기합을 지르며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자이언트 리자드가 거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빼기 위해 황급히 발을 놀렸다. 아니, 놀리려고 했다.
콰지직.
퀴엑?
뭔가가 부서지는 둔탁한 소리에 막 몸을 빼려던 자이언트 리자드가 멈칫하며 의문 섞인 울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것이 자이언트 리자드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울음소리였다.
콰드드득.
투두둑.
거침없는 기세로 자이언트 리자드의 두개골을 가른 도가 자이언트 리자드의 뇌를 짓뭉갠 것으로도 모자라 척추까지 반으로 쪼갰다.
쿠궁.
부르르르.
척추를 전부 쪼갠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 쪼개진 것만으로도 데미지가 큰지 얼굴이 반으로 갈라진 자이언트 리자드가 미끄러지듯 그 자리에 몸을 기대 몸을 떨었다.
“킁킁. 쿠오오오!”
쿵쿵쿵.
그리고 들려온 거대한 발소리.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자이언트 리자드의 뒤로 거대한 몸집의 스톤 자이언트가 쿵쿵거리며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후우웅.
꽈앙.
“크윽.”
갑작스런 스톤 자이언트의 공격에 황급히 도를 들어 몸을 방어하자 자이언트 리자드의 피와 육편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도 위로 굵은 나무 몽둥이가 떨어져 커다란 굉음을 터트렸다.
“킁킁! 주, 죽여주마!”
자신의 자이언트 리자드가 허무하게 죽은 것이 꽤 분했는지 답답한 신음을 흘린 스톤 자이언트가 내 도와 함께 머리를 부숴버리려는 듯 나무 몽둥이를 잡은 손에 힘을 가해 내 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카가각.
하지만 애초에 스톤 자이언트를 넘어 스톰 자이언트의 힘을 능가하는 내가 겨우 스톤 자이언트에게 힘으로 밀릴 리가 없었다.
내 도가 오히려 나무 몽둥이로 파고들며 날카로운 소리를 흘렸다.
“킁킁. 죽여주마!”
자신이 힘에 밀린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지 분노 어린 괴성을 내지른 스톤 자이언트가 내 도와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던 나무 몽둥이를 회수해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그 육중한 힘을 실어 내 머리를 향해 다시 휘둘렀다.
휘이잉.
꽝!
그대로 내 머리를 부술 듯한 기세의 나무 몽둥이가 덮쳐오자 슬쩍 몸을 피하자 방금까지 내가 있던 곳에 커다란 나무 몽둥이가 박히며 커다란 굉음을 터트렸다. 거대한 나무 몽둥이가 내가 웅크리고 들어가도 될 정도로 흉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오오, 거인족은 거인족이라 이건가.’
“으음…….”
몽둥이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내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말이 나무 몽둥이지, 7m에 가까운 스톤 자이언트가 사용하는 나무 몽둥이가 평범한 나무 몽둥이일 리가 없었다. 그 길이만 해도 3m에 가까웠고, 굵기는 보통 어른 한 명이 양팔로 잡아야 할 정도였다. 한 마디로 나무 몽둥이가 아니라 그냥 나무 한 송이를 그대로 뽑아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 무식한 크기를 자랑이라도 하듯, 나무 몽둥이의 끝에는 나무의 뿌리로 보이는 것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내 생각대로 어린 나무 한 그루를 그대로 뽑아 나무 몽둥이로 쓰는 듯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거인족 특유의 힘과 저 엄청난 몸집이었다.
“킁킁! 으어어어!”
너무나 쉽게 공격을 피하는 내 모습에 스톤 자이언트가 다시 한 번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 박힌 나무 몽둥이를 뽑아 다시 휘둘렀다.
이번에는 위에서 내려찍은 공격이 아니라 옆에서 베어오는 형식의 공격이었다. 아마 옆 방향에서 휘두르면 내가 도망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얕은꾀로 이런 공격을 한 듯했다.
“제법이군. 크큭.”
거인족답지 않게 머리를 굴린 스톤 자이언트를 향해 낮은 조소를 흘리며 그대로 도를 들어 도면을 이용해 나무 몽둥이가 날아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이내 허공을 날아온 나무 몽둥이가 내 도와 부딪쳤다.
스톤 자이언트가 들고 있는 것은 말이 나무 몽둥이지 보통 강철과 비슷한 강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나무 몽둥이와 도가 부딪쳤으니 평범한 소리가 날 리 없었다.
꽈아앙!
투두둑.
“크윽.”
“어억.”
엄청난 크기의 굉음과 함께 스톤 자이언트의 몽둥이에서 나무껍질이 떨어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나와 스톤 자이언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의 경우에는 미약한 신음이었지만, 스톤 자이언트의 경우에는 제법 커다란 데미지를 입은 듯한 억눌린 신음이었다.
“크하앗!”
휘이잉.
격돌의 영향으로 부르르 떨리는 도를 들어올려 멍하니 몽둥이를 바라보고 있는 스톤 자이언트를 향해 휘두르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스톤 자이언트가 막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 스톤 자이언트의 모습을 보는 내 눈에서 차가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늦었다!”
서걱.
푸화아악!
내 외침과 동시에 스톤 자이언트의 허벅지를 가른 도가 다시 한 번 허공에 검은 궤적을 남기고는 반대쪽 허벅지 또한 베어버렸다. 30cm 이상 베인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으워어억!”
마도의 영향으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피에 스톤 자이언트의 입에서 우렁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보통 도에 입은 상처였다면 그저 약간의 피가 흐르는 것으로 멈추겠지만 내 도는 신 급 마도. 약간의 상처만 입어도 그 상처에 마기가 머물러 상대의 기운과 함께 상처의 지혈을 막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킁킁! 킁!”
비틀거리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스톤 자이언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처를 막지 않은 한 손으로 몽둥이를 들어올렸다.
“주, 죽여주마!”
후우웅.
그대로 나를 날려버리려는 듯 가로로 크게 휘두른 나무 몽둥이를 따라 묵직한 파공음이 뒤따랐다.
비록 스톤 자이언트가 상처를 입고 내가 입은 갑옷이 뛰어난 방어력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저런 나무 몽둥이 같은 거대한 둔기에는 내가 착용한 갑옷은 오히려 속도를 늦추게 하는 걸림돌일 뿐이었다.
어쨌든 나를 향해 휘둘러진 나무 몽둥이를 멍청하게 맞아줄 마음은 없었기에 가볍게 나무 몽둥이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나무 몽둥이가 만들어낸 바람이 내 머리칼을 마구 휘날렸다.
“킁. 크워어어!”
후웅 후웅.
혹시나 내가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러는 것인지, 발악이라도 하듯 스톤 자이언트가 손에 든 나무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스톤 자이언트의 그런 행동은 오히려 자기 자신의 힘을 빼는 멍청한 행동에 불과했다.
“허억. 허억. 킁!”
한바탕 주변을 헤집은 스톤 자이언트가 손에 든 나무 몽둥이를 바닥에 늘어트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커다란 상처를 입은 몸으로 무리를 한 것이 꽤 힘들었는지 스톤 자이언트의 얼굴 위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는 스톤 자이언트를 바라보는 내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크큭.”
우우웅.
내 살기에 맞춰 내 눈에서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아마 마기로 인한 특수 효과인 듯했다.
우우웅.
내 몸을 중심으로 폭사되는 살기에 내 몸을 휘감은 옅은 마기가 반응하여 낮게 울며 일렁거렸다.
스톤 자이언트가 아무리 거인족 중에서는 최하급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강한 축에 끼는 몬스터다.
“크크큭. 끝내주마.”
파밧.
스톤 자이언트를 향해 살기어린 웃음을 흘린 나는 번개와 같은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스스슥.
내가 사라진 자리를 시작으로 내가 움직이는 곳을 따라 마기로 이루어진 검은 궤적이 생겨났다.
“으어어어!”
갑작스런 내 움직임에 스톤 자이언트가 화들짝 놀라며 거친 숨을 멈춘 채 손에 들린 나무 몽둥이를 무차별적으로 휘둘렀다.
아무리 지쳤다고는 하지만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거인족!
치명적인 데미지를 주는 공격 한 번 한 번이 내 귓가를 스치며 짜릿한 긴장감을 선물했다.
“크하앗!”
“으워어!”
꽈가강!
다시 한 번 이어진 도와 나무 몽둥이의 격돌에 거친 바람이 한차례 일어났다 사라졌다.
이번에는 힘의 대결이 아니라 일방적인 공격이었기에 내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점차 나무 몽둥이가 밀리고 스톤 자이언트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쿨럭. 으, 으으…….”
가뜩이나 심각한 외상과 내상은 입은 상태에서 내 마기를 정면으로 쬔 스톤 자이언트가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새하얗게 변한 얼굴의 스톤 자이언트가 턱을 딱딱 떨며 입을 열었다.
“네, 네놈 뭐냐! 어, 어떻게!”
“어떻게 거인족인 너보다 힘이 강하냐고?”
“그, 그래! 있을 수 없어! 있을 수 없단 말이다! 킁킁!”
고고한 자존심이 망가진 것이 꽤나 충격이었는지 싸움 중이라는 것도 잊은 스톤 자이언트가 걸쭉한 침을 질질 흘리며 발작적으로 외쳤다.
“큭. 멍청한 놈.”
지이잉.
나는 그런 스톤 자이언트를 향해 차가운 조소를 흘렸다.
내 도가 강맹하게 울부짖으며 거친 마기를 토해냈다.
“으엉?”
발악하던 스톤 자이언트는 내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에 흠칫하며 대비하려고 했지만, 이미 나무 몽둥이를 튕겨낸 내 도가 허공을 날아 스톤 자이언트의 배에 박힌 후였다.
푸욱.
“욱!”
도가 가죽 옷을 뚫고 두터운 살에 박히자 스톤 자이언트가 꽉 막힌 비명을 질렀다.
그레고리의 것보다 두터운 가죽에 도가 파고드는 짜릿한 느낌에 손을 떨었다. 그리고 스톤 자이언트의 무릎을 박차고 올라 도를 잡은 손을 있는 힘껏 위로 올리자 ‘부아악’ 하는 거북한 소리를 내며 스톤 자이언트의 배가 쩍 갈라졌다.
도를 따라 스톤 자이언트의 장기들이 따라 올라왔다.
“쿠와아악!”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고통에 스톤 자이언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제껏 들어온 그 어떤 비명보다 처절한 비명이었다.
투두둑.
“크윽!”
강철 같은 거인족의 뼈가 다른 종족에 비해 약할 리가 없었다.
갈비뼈를 부수고 위로 올라가는 도를 통해 느껴지는 묵직한 압력에 내 손목이 부들부들 떨리며 내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 나왔지만, 스톤 자이언트의 비명에 묻혀 사라졌다.
투둑.
“챠핫!”
쑤욱.
푸화악.
스톤 자이언트의 허벅지를 밟고 계속해서 쳐올린 도가 마침내 스톤 자이언트의 가슴을 뚫었고, 그곳에서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쏟아져 나왔다.
“크웍?”
쩌적.
촤르륵.
스톤 자이언트의 배꼽 부근부터 가슴 부근까지 거칠게 난 상처가 쩍 갈라지며 흉하게 짓뭉개진 장기와 바스러진 뼈를 한가득 쏟아냈다.
땅을 적시는 자신의 장기를 보는 스톤 자이언트의 눈이 회색으로 물들었다.
“킁. 뭐, 뭐…….”
쿠쿵.
미처 말할 새도 없이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스톤 자이언트가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눕혔다.
곧 바닥을 어지럽힌 장기와 피를 시작으로 스톤 자이언트의 몸이 모래가 되기 시작했다.
스스스.
과거에는 스톤 자이언트였던 모래가 바람에 휘날리며 그 속의 아이템을 보여줬다. 몇 개의 금화와 굵은 반지였는데 반지를 이루고 있는 재료가 돌이었다.
스윽.
내가 반지를 줍자 스톤 자이언트의 몸에 맞춰 거대한 크기로 되어 있던 반지가 내 손가락에 맞는 크기로 작게 줄어들었다.
“흐음.”
아이템 설명을 클릭하자 ‘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홀로그램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인의 돌 반지-
스톤 자이언트가 자신의 몸에 쌓인 돌의 결정으로 만든 반지다. 대지의 기운을 한껏 받아 약간의 민첩성이 감소하는 대가로 무지막지한 힘을 준다.
내구력- 30/22.
특수능력- 힘 40 증가.
민첩성 10 감소.
석화(石化) 계열 저주에 대한 저항률 5% 증가.
아이템을 착용하고 캐릭터 창을 부르자 아이템 설명 란보다는 약간 더 커다란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이름: 블러드. 레벨: 302. 속성: 혈(血).
성향: 악중악(惡中惡). 종족: 웨어라이언(Werelion).
명칭: 암흑투마군단장(暗黑鬪魔軍團匠).
체력: 1785000. 마력: 89000. 신성력: 0.
힘: 1620. 민첩성: 690. 체력: 450.
지혜: 150. 신마력: 150. 행운: 200.
“흐음.”
한층 더 상승한 힘에 내 입에서 만족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민첩성이 떨어진 것이 문제지만 바닥을 기는 민첩성으로도 잘만 사냥했던 나였기에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시 가볼까.’
아이템 창에서 꺼낸 포션을 입에 물고 저 멀리 보이는 마법사의 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중간 중간에 몬스터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거의 다 자이언트 리자드였다.
시간을 끌 필요도 없이 자이언트 리자드를 도륙하는 내 귓가로 가벼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폭스: 블러드 님, 지금 어디세요?]
[블러드: 거의 다 왔다.]
대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폭스의 가벼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폭스: 알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의 메시지는 없었다.
‘빨리 가야겠군.’
또다시 폭스의 재촉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이제는 제법 형체를 드러내는 탑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탁.
“흐음…….”
가벼운 몸놀림으로 걸음을 멈춘 내 입에서 묘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에 맞춰 탑의 주변을 배회하던 수많은 존재들의 입에서 울음소리 비슷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탑은 전에 망자의 대지에서 본 것 같은 작은 탑이 아니었다. 높이만 해도 거의 30층 가까이 되는 높이와 어른 백 명이 양손을 벌리고 둘러싸도 모자랄 정도의 둘레를 가지고 있었다. 탑의 표면은 백색이었는데 창문이나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탑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도 보이지 않았다.
우우웅.
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변한 탑의 외부와는 달리 탑의 꼭대기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보석은 변함없었다.
‘키메라에 소환수, 거기다 도플갱어라…….’
탑 주위에는 키메라를 비롯해 소환수, 그리고 도플갱어들이 판을 치고 있었는데 아마 탑을 수호하는 가디언인 듯했다.
베팔이 전에 보였던 인간 키메라와는 달리 몬스터 키메라였는데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보통 오크의 몸에 트롤의 팔을 붙인 것이나 거인족의 몸에 날개를 붙인 것이 보였다.
위이잉.
그런 키메라의 머리 위에는 검은색의 기묘한 물체들이 떠다니고 있었는데 바로 흑마법사들이 소환하는 소환수인 듯했다.
낮은 진동음을 흘리며 허공을 배회하는 검은색의 물체는 ‘발로그’라 불리는 마족의 한 종류로 발록의 심부름꾼으로 알려진 악계의 악마다.
검은 안개에 휩싸여 보이지는 않지만 크기가 50cm 정도 되는 발로그는 주인인 발록의 모습을 축소한 것 같은 모양으로 쓰리 스타 수준의 화염계 마법을 난사하는 무서운 가디언 몬스터다.
하지만 내 눈길을 가장 잡아끄는 것은 틈틈이 보이는 유저의 모습을 가장한 도플갱어였다.
보통 레벨 250 정도의 도플갱어는 상대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술을 비롯해 스킬을 복사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약간의 지능도 있어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다.
하지만 도플갱어를 상대하는 게 짜증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도플갱어 체력이 10분의 1 정도 남았을 때 행하는 변신이다. 여태껏 도플갱어 자신이 마주치거나 죽인 모든 캐릭터 중 가장 강한 인물로 변하는데, 빌어먹게도 스킬 또한 완벽하게 재현한다.
한때는 흑마법사들이 길드전이나 공성전에 도플갱어 무리를 소환해서 상대 길드를 섬멸하는 것이 유행하던 때도 있었다. 물론 얼마 안 가 (주)한신의 처리로 사라졌지만.
“으음…….”
아직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낮은 울음을 흘리며 탑의 주변을 배회하는 몬스터들을 바라보는 내 입에서 난감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한다…….’
마음먹고 뚫겠다면 뚫을 수는 있다. 하지만 상대는 마법사의 탑에서 고의적으로 풀어놓은 가디언 몬스터다.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귓가에 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폭스: 어디세요?]
[블러드: 지금 탑 앞이다. 몬스터들 때문에 못 가고 있다.]
[폭스: 아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그그긍.
폭스의 메시지가 끝나기가 무섭게 탑의 한쪽이 천천히 열렸다.
성인 남자 두 명이 들어갈 만큼의 작은 입구에서 검은 그림자가 획 튀어 나왔다.
딱 사람 크기만 한 검은 그림자의 등장에 나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슥.
거침없는 움직임으로 몬스터들을 지나쳐 내 앞으로 다가온 검은 그림자가 점차 옅어지는가 싶더니 한 인물을 만들어냈다.
“폭스?”
“하핫. 오랜만이네요.”
그 살랑거리는 웃음을 토해낸 폭스가 아이템 창에서 정체불명의 포션을 꺼내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 보는 보랏빛 포션을 마신 뒤 빈 병을 챙긴 폭스가 나를 향해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늦으셨네요?”
“개인적인 일이 있었다.”
“아하. 어쨌든 가시죠.”
고개를 끄덕인 폭스가 돌연 내 몸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런 폭스의 행동에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점차 크기를 키워가며 나와 폭스의 몸을 덮어가는 그림자에 내 입에서 얼빠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
‘다른 유저들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나?’
기묘한 스킬에 감탄하는 나를 잡은 폭스가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그림자가 커지다 마침내 나와 폭스를 완전히 휘감았다.
스스슥.
나를 잡고 몬스터들 곁을 지나는 폭스는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다.
바로 옆에 나와 폭스가 지나가는데도 몬스터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기계적으로 똑같은 행동만 반복할 뿐이었다.
곧 탑 앞에 도착한 폭스가 무언가 메시지를 보내는 듯 입술을 조물 거리자, 탑의 한쪽이 열리며 작은 입구를 만들었다.
“들어가죠.”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폭스를 따라 들어간 탑의 내부는 확실히 예전 망자의 대지에 있던 탑과는 상당히 달랐다. 내부가 넓게 탁 트였는데 중앙의 길을 제외하고는 모두 워프 마법진으로 빼곡히 뒤덮여 있었다.
각 마법진에 걸려 있는 푯말이 마법진의 도착지가 어디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따로 관리하는 사람은 없는지 수십 개의 마법진이 가동 되는 소리만이 1층을 울릴 뿐이었다.
중앙에 나 있는 길을 따라 몇 개의 마법진을 지나친 폭스가 어느 마법진 앞에 다가갔다.
폭스의 뒤를 따라 ‘33층’이라는 푯말을 가진 마법진 위에 올라서자, 발밑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
후우웅.
확실히 장거리 워프가 아닌 단거리 워프라 그런지 보통 워프 마법보다는 몸에 가해지는 압력이 적었다.
“으음.”
살짝 뻐근한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뜨자 1층과는 다른 광경이 나를 맞이했다.
내 곁을 지나쳐 마법진을 벗어난 폭스가 과장된 행동으로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새로운 마법사의 탑의 마스터 집무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흥.”
스윽.
살랑거리는 폭스를 향해 콧방귀를 뀌어 보인 뒤, 마법진에서 나와 33층을 주욱 훑어봤다.
넓게 트인 1층과는 달리 33층은 기다란 복도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실험실과 창고 등이 있었다. 거기다 복도 끝에는 예전 망자의 대지에서 본 것과 유사한 황금색 명패를 달아 놓은 마스터 집무실이 있었다.
“하핫. 가시죠.”
냉담한 내 반응에 작은 웃음으로 대답한 폭스가 마스터 집무실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차가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이 내는 소리가 지겨웠는지 내 앞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폭스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럭저럭.”
“야수연합은 어떤가요?”
“카인이 알아서 하고 있다.”
“그렇군요.”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저 안에는 누가 있지?”
“제가 저번에 말해 드리지 않았던가요? 저희와 뜻을 함께 하기로 한 두 길드의 마스터들입니다.”
장난기 가득한 폭스의 말에 내 얼굴이 작게 구겨졌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 길드 마스터가 누구냐는 것이다.”
“흐음. 누구냐라…….”
묘한 신음을 흘리며 말끝을 흘린 폭스가 마스터 집무실이라고 황금빛 명패가 달린 문을 열며 작에 웃었다.
“직접 확인해보시죠.”
끼이익.
거북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문이 열렸다.
‘세 명. 최소 쓰리 스타 후반!
이것이 내가 문 건너편에서 존재들에게 느낀 것이었다. 이 정도라면 상당히 강한, 거의 랭킹에 있는 유저들 정도의 기였다.
‘누군지 궁금하군.’
마법사의 탑과 맞먹는 세력을 가진 길드의 길드 마스터라고 한다면 나 또한 잘 알고 있는 자들일 것이 분명했다. 내가 알고 있던 자들 중 과연 그 누가 드래곤 클럽인지 자연히 궁금증이 일었다.
“어서 와라. 오랜만이군.”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마법사가짱이얌인 크레이언이었다. 여전히 차가운 인상의 크레이언이 살짝 웃음을 흘리며 나를 환영했다.
무라사마와 함께 드래곤 클럽을 이끄는 두 리더 중 한 명! 그리고 내 복수의 성공에 승부를 걸고 나를 도와주는 빌어먹을 자식!
“그래, 오랜만이군.”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슬쩍 쳐다본 크레이언이 내 옆의 폭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가서 대기해라.”
“예. 하핫. 즐거운 대화하시길.”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폭스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크레이언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나를 봤다.
“강해졌군.”
“복수를 위해서다.”
크레이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입으로는 그럴듯한 말을 하면서도 내 눈은 크레이언의 양 옆에 앉아 있는 두 유저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둘 다 이십대 초반의 얼굴이었는데 한 명은 검은색 머리칼에 검은색의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새하얀 머리칼에 새하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둘의 공통점이라고는 둘 다 장발이라는 것뿐이었다.
‘모르겠군.’
아무리 살펴봐도 직업에 관련되어 보이는 아이템을 찾을 수 없었다. 옷차림마저도 어쌔신이나 로그들이 입는 옷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직업과 관련된 옷이라도 입고 있으면 누군지 유추해서 맞출 수도 있겠지만 평상복을 입고 있으니 그것마저 불가능했다.
“끄응…….”
내 입에서 절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작은 웃음을 흘린 크레이언이 자리를 권하며 입을 열었다.
“앉아라. 동료들을 소개하지.”
고개를 끄덕인 뒤 권한 자리에 앉아 그를 보자, 그런 내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크레이언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소개해줄 테니. 하핫.”
살모사와 같은 세모꼴의 눈으로 웃음을 흘린 크레이언이 자신의 왼쪽에 있는 검은 머리칼의 남자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모른다.”
“모른다고?”
내 대답의 의외인 듯 크레이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건 검은 머리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곧 ‘아!’ 하는 탄성을 터트린 검은 머리칼이 돌연 아이템 창에서 아이템을 꺼내 착용했다. 칠흑의 로브와 끝에 해골이 박힌 짧은 스틱이었다.
“이러면 알겠나?”
우우우.
나를 향해 입을 연 검은 머리칼을 중심으로 보랏빛 마기가 뭉클거리며 솟아났다. 그저 아이템 하나를 착용한 것뿐인데 검은 머리칼의 분위기가 변해 순식간에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내 머릿속에 한 명의 이름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데스트론?”
“맞다.”
의문 반 놀람 반 섞인 내 물음에 크레이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반갑군. 내가 바로 데스트론이다.”
살벌한 분위기의 데스트론이 딱딱한 얼굴로 내게 인사한 뒤 착용한 아이템을 해제하고 아이템 창에 넣었다.
‘타락한 자들의 왕’, ‘루키아논의 일곱 번째 눈물’.
사자왕이라는 나에 버금갈 정도의 이 거창한 별명들이 바로 내 앞의 검은 머리칼, 아니 흑마법사 데스트론을 칭하는 말이다.
흑마법사들로만 이루어진 ‘데스 스타’라는 길드의 길드 마스터인 그가 행한 악행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NPC들로 이루어진 왕국을 공격하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할 경우에는 같은 유저들을 죽이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데스트론에게 걸린 현상금만 해도 엄청나다.
그럼에도 데스트론이 악행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데스트론의 실력이 그의 악행을 뒷받침해줄 만큼 강하기 때문이었다.
흑마법사 특유의 막강한 위력의 공격 마법은 물론이고 ‘파라오의 황금 지팡이’라는 레어 아이템을 이용해 저주를 퍼붓는 데스트론은 가히 폭염의 마도사라 불리는 염환에 버금갈 정도였다.
물론 ‘그림자들의 아버자’라 불리던 폭스도 데스트론에게는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놈이 드래곤 클럽이었다니!’
데스트론과는 과거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물론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데스트론이 이끄는 데스 스타는 검은 사자 길드, 그리고 마법사의 탑과 함께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열 개의 길드 중 하나였다.
이내 평정을 되찾은 내 시선이 새하얀 머리칼에게로 향했다.
가만히 앉아 내 반응을 즐기던 크레이언이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한번 맞춰봐라. 참고로 데스트론과 아주 관계가 깊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려주겠다.”
건방진 크레이언의 말투에 내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화를 낼 만큼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대체 누구냐!’
내 머리가 이 앞의 새하얀 머리칼의 정체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회전했다.
다른 길드와 거의 교류를 하지 않는 데스 스타 길드의 특성상, 데스트론과 관계가 깊은 유저나 NPC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오히려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관계라면…….
‘설마!’
“피너스?”
“맞습니다.”
내 물음에 새하얀 머리칼의 피너스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바로 피너스입니다. 반갑습니다.”
피너스가 크레이언과는 다른 얼굴 가득 퍼지는 웃음을 흘리며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이언의 웃음이 냉정함을 숨기지 않는 차가운 웃음이라면, 피너스의 웃음은 철저히 가식으로 치장된, 마치 폭스와도 같은 웃음이었다.
그 역겨운 웃음에 평소였다면 인상을 구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만큼 내 앞의 피너스가 의미하는 바는 거대했다.
‘성자.’
이 한 단어가 피너스를 칭하는 모든 말이었다.
성직자와 성기사들로 이루어진 ‘다아리엘의 검’이라는 길드의 길드 마스터이자 본인 또한 강력한 성기사로, 철저히 악인으로 분류된 데스트론과는 달리 유저들은 물론이고 NPC들에게까지 좋은 이미지로 칭송을 받고 있었다.
데스트론이 이끄는 데스 스타 길드와 피너스가 이끄는 다아리엘의 검은 앙숙 관계였다. 확실히 하는 짓마다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데스트론과 데스 스타를, 유저와 NPC들에게 성자로 존경받는 피너스가 검이 곱게 볼 리 없었다.
‘재미있군.’
“크큭.”
천하에 둘도 없는 앙숙으로 알고 있던 두 놈이 사실은 친한 지인, 그것도 드래곤 클럽이라는 더러운 단체에 묶인 놈들이라니.
놈들은 나뿐만 아니라 판타즈마 월드의 모든 유저들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이다.
놈들에게 속아 편을 갈라 싸움질을 하는 유저와 NPC들을 생각하자 내 입에서 절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 한때는 나도 놈들처럼 속고 살았지만.’
진실을 알기 전까지의 내 모습 또한 저 밖의 유저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내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크큭.”
자괴감과 비웃음이 반씩 섞인 내 웃음에 데스트론과 피너스를 소개 하던 크레이언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러지?”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유명한 유저들을 봐서 놀랐다고나 할까. 큭.”
능청스러운 내 말에 잠시 멈칫한 크레이언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판타즈마 월드에서 가장 유명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군.”
“그런가? 크큭.”
크레이언의 말을 맞받아치며 낮게 웃자 크레이언 또한 낮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유토리안에서 크게 한 건 했더군.”
“아, 밤손님 길드 일을 이야기 하는 건가?”
“그래.”
내 물음에 크레이언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이언의 입장에서 나는 무투 대회전까지 숨을 죽이고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그런 내가 마구 날뛰니 크레이언이 애가 타는 것도 당연했다.
“앞으로는 조심하지.”
“끙. 그래.”
더는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건지 크레이언이 앓는 소리는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려 데스트론과 피너스를 번갈아 본 크레이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우리가 동맹이라는 이름 하에 뭉치고 나서 처음으로 모두 모인 기념비적인 날이다. 비록 이익을 위해 맺은 동맹이라고는 하지만 배신 같은 행위는 절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니, 해도 상관없다. 서로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배신 뒤에 따르는 대가도 알고 있을 테니 말이야. 큭.”
배신 어쩌고를 운운하는 크레이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데스트론과 피너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쓰레기들.’
그런 세 명을 바라보는 내 눈도 날카롭게 빛났다.
놈들은 지금 내가 자신들의 정체를 모르고 멍청하게 속고 있는 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렇게 서로 모른 척하며 연극하는 것이겠지.
“궁금한 것이 있다.”
싸늘한 웃음으로 말을 끝낸 크레이언이 내 말에 닫았던 입을 다시 열었다.
“뭐지?”
“내가 궁금한 것은 검은 사자 길드가 몰락함으로써 데스 스타와 다아리엘의 검이 얻는 이익이다. 솔직히 남부러울 것 없는 두 길드가 이런 모험에 합류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호오…….”
내 말에 데스트론이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거기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크레이언 또한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는지 약간 굳은 얼굴로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내 눈을 피했다.
“말해라.”
내 입에서 흘러나온 싸늘한 목소리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새하얀 머리칼의 성자 피너스였다.
“당신이 나가고 무라사마가 검은 사자 길드의 마스터가 된 뒤부터 검은 사자 길드는 예전의 길드가 아니라 단순한 깡패 집단으로 변했습니다. 오직 힘을 앞세워 유저들을 핍박하고 NPC들에게까지 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검은 사자 길드를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흥.”
살짝 미소를 흘리는 피너스를 향해 콧방귀를 뿜은 검은 머리칼의 마왕 데스트론이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놈들이 우리 길드의 구역을 넘보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말을 마친 데스트론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렸다.
‘멋진 연기군. 크크.’
과거의 나였다면 정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완벽한 연기였다. 마음 같아서는 일어나서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매일 게임만 해온 놈들이 어떻게 저런 연기 실력을 길렀는지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이제 궁금증은 풀렸나?”
“물론. 크큭.”
낮은 웃음을 흘리는 나를 향해 기묘한 눈빛을 보낸 크레이언이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서로에 대한 궁금증은 모두 해결된 것 같으니, 우리들의 미래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한 이야기를 해볼까?”
크레이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 * *
철컥.
“후우…….”
크레이언을 비롯해 피너스와 데스트론이 있는 마스터 집무실에서 나온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은 뒤 고개를 돌리자 서서히 닫히는 문 사이로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는 크레이언과 피너스, 데스트론이 보였다.
겨우 문 하나 차이인데도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생각하며 웃음을 터트리고는 천천히 마법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회의는 잘 하셨나요?”
마법진 옆에 서 있던 폭스가 나에게 다가와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셨나요?”
“네 형에게 물어봐라.”
폭스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게임 속에서는 형이 아니라 마스터입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싸늘한 내 말에 잠시 멈칫한 폭스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그날’이신가요?”
“그날?”
내가 반문하자 폭스의 입가에 걸린 능청스러운 미소가 짙어졌다.
“예. 왜 있잖아요, 여자들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것처럼, 수인족에게도 한 달에 한 번씩…….”
“멍청한 놈.”
화가 날 법도 하건만, 그저 씨익 웃은 폭스가 말을 이었다.
“하핫. 분위기가 날카로워서 한번 해본 말이었습니다.”
“약간 긴장해서 그런 것뿐이다.”
“긴장이요? 블러드 님이요?”
내 말에 폭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내가 내 입으로 긴장했다고 말한 것이 꽤 놀라운 듯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멍청하게 배신당하고 다시 게임에 복귀한 뒤로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또 약해보이지 않기 위해 억지로 강해보인 척하던 나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반말을 내뱉는 것도 서슴지 않았고 무기를 꺼내는 것 또한 고민이 없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 앞에서 힘들다거나 긴장을 했다거나 하는 말 따위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약점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훈은 제외지.’
내 유일한 친구인 다훈은 제외였다.
“왜? 난 긴장이란 걸 하면 안 되나?”
갑작스런 내 물음에 폭스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냥요. 블러드 님이 긴장이라니, 재미있어서요. 하핫.”
“훗.”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폭스를 뒤로하고 1층으로 가는 마법진 위로 올라서자 ‘웅웅’ 하는 소리와 함께 마법진에서 서서히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염환에게 보자고 말했지만 빌어먹을 드래곤 클럽 놈들과의 만남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내 피는 또 다른 피를 원하고 있었다.
내 적, 그러니까 드래곤 클럽의 수준이 데스트론과 피너스 정도의 수준이라면 나 또한 그 만큼 강해져야 했다.
물론 드래곤 클럽의 모든 놈들이 저 정도 수준은 아니겠지만 무라사마를 비롯해 검은 사자 길드의 나머지 간부들, 그리고 지금은 동맹을 맺은 데스트론과 피너스, 크레이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다.
우우웅.
점차 짙어지는 빛의 농도에 따라 내 입가에 걸린 미소 또한 짙어졌다.
“크큭. 이제 재미있는 일이 더 많이 생길 거다.”
“예?”
짙은 광기가 스며든 내 말에 폭스가 묻는 것과 동시에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밝은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
<5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