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2 무투대회 1 (29/34)

챕터2 무투대회 1

피부 위로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에 눈을 뜨자 익숙한 풍경의 유토리안이 나를 맞이했다.

“현재 시간.”

[현실 시간으로 2시 13분입니다.]

여인의 목소리에 내 입에서 절로 욕이 새어나왔다.

‘제길, 늦었군.’

게리롱의 잔소리를 생각하며 재빨리 약속 장소로 몸을 날렸다. 다른 마을이라면 나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버린 유저들 때문에 이렇게 대범하게 돌아다닐 수 없겠지만 현재 이곳, 유토리안은 게리롱에게 장악당한 상태였다.

밤손님 길드가 나이트메어의 신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게리롱은 발정 난 낙타들 길드원들과 함께 밤손님 길드를 급습해 전멸시켰다.

그렇게 유토리안은 게리롱의 손안으로 떨어졌다. 그렇기에 이렇게 얼굴을 내밀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습격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내 강함에 자신감이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휙휙.

많은 유저들을 피해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지나 약속 장소로 움직였다. 약속 장소는 무적산기(無敵山氣)라는 주점이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게리롱이 머무는 아지트가 된 곳으로 ‘죽음의 그림자’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용찬박이라는 유저가 관리를 맡고 있다.

용찬박은 한국 서버에서는 흔치 않은 외국인 유저로 본래는 중국인인데 어쩌다 게리롱과 알게 되어 발정 난 낙타들에 가입한 유저다. 어쨌든 내가 나타난 장소에서 무적산기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서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끼익.

내가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란스러웠던 주점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몇 명의 유저들은 날 알아보았는지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리 오시죠.”

내가 주점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순박한 인상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마 이 사내가 무적산기의 주인인 용찬박인 듯했다.

“이리로 오시죠.”

NPC에게 카운터를 맡긴 용찬박이 내 앞에 서서 나를 안내했다.

고레벨의 어쌔신보다 암살을 더 잘하기에 ‘죽음의 그림자’라는 섬뜩한 별명을 가진 용찬박은 그저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NPC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을 봐도 어디서 봤지? 라고 생각이 드는 평범한 얼굴이랄까? 듣기에는 직업이 교사라고 하던데 평범한 얼굴에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저벅저벅.

용찬박이 나를 안내한 곳은 주점의 뒤편에 있는 술 창고였다.

끼익.

이내 술 창고로 들어선 용찬박이 구석에 매달려 있는 촛대를 만지작거리자 ‘그그긍’ 하는 소리와 함께 창고의 바닥이 좌우로 갈라지며 비밀 통로를 드러냈다.

“제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작게 고개를 꾸벅인 뒤 사라지는 용찬박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둬 어두컴컴한 비밀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통로의 형식은 기묘해서 어느 지점에서는 솟구쳤다가도 또 어느 지점에서는 아래로 내려갔다 하는 형태였다. 마법을 이용해 일부러 꼬아놓은 듯했다.

다행히 통로 중간 중간에 빛을 내뿜는 마력석이 박혀 있어 발을 헛디딜 염려는 없었다.

그렇게 걷기를 5분. 마침내 빛 덩어리가 통로의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성인 남자 3명이 들락거려도 될 만큼의 크기를 지닌 나무문이었는데 문틈 사이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끼익.

“오. 이제야 왔군, 우리 보스!”

“늦었다, 블러드.”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섬과 동시에 문 너머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게리롱이었고 그 다음은 해파토스였다. 또 방 안에는 염환과 처음 보는 백발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백발의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던 염환이 내 존재를 눈치 챘는지 이야기를 멈추고는 나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늦었구나. 어서 와라!”

“미안하군.”

일행에게 사과를 한 뒤 게리롱이 건네준 의자에 앉자 염환과 대화를 나누던 백발의 사내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기 않기 위해 악수를 하며 익숙하게 인사를 했다.

“큭, 그래. 오랜만이군.”

백발 사내의 이름은 코롬으로 카나리아가 있는 조직의 행동 대장,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 조직 폭력배였다. 그럼에도 내가 그의 도움을 받는 이유는 바로 그의 게임 속 직업 때문이었다.

트랩 마스터.

보통 함정을 설치하는 트랩퍼라는 직업과 달리 트랩 마스터는 스페셜 직업으로 보통 트랩퍼들이 설치하는 함정의 몇 배에 달하는 위력을 가진 함정을 설치할 수 있다. 거기다 더 유용한 점은 보통 많은 재료를 필요로 하는 트랩퍼와는 다르게 트랩 마스터는 자신의 마나로 함정을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보통 소란스러운 조직 폭력배와는 달리 코롬의 성격은 조용했다. 약간 잔인한 것이 흠이기는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복수를 끝으로 볼 일 없을 테니까.

코롬은 카나리아가 소개해준 인물이기에 배신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염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코롬의 정체를 말해줄 수 없기에 그저 예전부터 알았던 유저라고만 해두었다.

“다 모인 건가?”

붉은 로브의 염환, 검은 옷의 게리롱,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고 있는 드워프 해파토스 그리고 해파토스와 비슷한 가죽 갑옷을 걸친 코롬. 4명이라는 적은 수였지만 이들의 전력 하나하나가 웬만한 유저들 30명에 가까웠다.

거기다 이들이 이끄는 수하들이나 스페셜 직업의 스킬을 생각한다면 30명이 아니라 1000명을 상대하는 것도 가능했다. 한 명, 한 명 4명 모두를 훑는 내 눈이 만족스럽게 빛났다.

“좋아. 회의를 시작하지.”

말이 회의지 이것 또한 암흑투마군단의 대장들과의 회의와 별다른 것이 없었다.

계획이야 메일을 통해 주고받았고 회의는 드래곤 클럽의 놈들에게 적발될 가능성을 염려해 게임에서 나와 화상 회의로 진행했다. 오늘의 모임은 계획의 마지막을 점검하고 전의를 불태우기 위해 모인 자리인 셈이었다.

“코롬?”

“예?”

한 명, 한 명 모두의 역할을 확인시킨 뒤 마지막으로 코롬의 이름을 부르자 코롬이 고개를 들었다.

“한 번에 설치할 수 있는 트랩의 숫자가 몇이냐? 위력은 상관없다. 혼란을 목적으로 하는 거니까.”

“흐음.”

내 말에 잠시 신음을 흘린 코롬이 말을 이었다.

“최소 위력의 폭발 트랩이라면 대충 250개 정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최소 위력이라 투 스타 이상의 유저에게는 거의 데미지가 없을 겁니다. 몬스터 몰이용 트랩이니까요.”

“효과는 어떻지?”

“말 그대로 폭발을 하는데 폭발을 한 뒤, 커다란 폭음이 일고 한 3분 정도 연기가 솟아납니다.”

코롬의 말에 염환을 비롯해 나머지들이 오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스폐셜 직업이라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확실히 보통 트랩퍼라면 쓰리 스타는 되어야 겨우 50개의 트랩을 설치할 수 있다. 물론 최소 위력의 트랩으로.

그에 반해 코롬은 겨우 레벨이 쓰리 스타 초반에 불과했지만 보통 트랩퍼의 5배에 달하는 트랩의 양을 설치할 수 있다.

“너는 무투대회가 시작함과 동시에 대회장 내부의 은밀한 곳에 트랩을 설치해라. 그리고 내가 신호를 주면 일제히 트랩을 터트려라.”

“알겠습니다.”

내 말에 코롬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혹시 마력이 모자랄지 모르니까 나중에 염환에게 최상급 마력 회복 포션을 받아가라.”

“알겠습니다.”

내 말에 염환이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왜 하필이면 내 거야! 네 거 주라고, 네 거!”

“난 체력 회복 포션밖에 없다.”

“허억!”

내 말에 염환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염환의 모습에 게리롱이 낄낄 웃었다.

“그럼 이만 끝내지. 혹시 질문 있는 사람?”

“…….”

내 말과 동시에 좌중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것도 잠시,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보이던 해파토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계획이 성공하면 그 후는 어떻게 되는 거냐?”

“말씀드렸다시피 드워프들에게는 피해가 최소화될 것이며 특히나 고곤에는 아무런…….”

“내가 묻는 것은 그게 아니다.”

내 말을 끊은 해파토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우리 계획이 성공해서 암흑투마군단이 대륙을 지배했다고 치자. 그럼 우리 유저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

“으음.”

해파토스의 말에 내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해파토스는 드워프의 수장으로서 묻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유저로서 묻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늘어놓고 싶지만 해파토스는 멍청이가 아니다. 더군다나 내가 아무리 복수에 목이 말랐어도 나를 믿어주고 온 힘을 다해 나를 도와주는 사람에게까지 거짓말을 할 만큼 썩은 놈이 아니다.

“…그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할 것입니다. 일단 현재 목표는 검은 사자 길드의 괴멸입니다.”

“으음.”

차마 ‘모든 유저들이 떠나고 판타즈마 월드는 망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리자 해파토스가 신음을 흘렸다.

현재 이 중에서 드래곤 클럽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나와 염환 그리고 코롬뿐이다. 나머지는 그저 단순히 내가 검은 사자 길드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 일을 계획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겠지.’

저들은 드래곤 클럽을 모른다. 아니, 비단 저들뿐만이 아니라 거의 99%에 가까운 유저들이 드래곤 클럽의 존재를 모른 채 그들의 손바닥 위에서 원숭이 노릇을 하고 있다.

“흐음.”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른 게리롱이 내가 말하지 못한 훗날의 일을 이미 짐작했는지 묘한 신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뭐, 나야 재미만 있으면 상관없지. 어차피 슬슬 질려가는 참이었으니까.”

“뭐?”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반문하는 해파토스를 무시한 게리롱이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크큭, 실패하는 일 따위는 없길 바란다.”

“물론이다. 그런 일 따위는 없을 거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자 게리롱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계획의 진짜 의도를 알고 있는 염환만이 불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비열한 놈으로 들릴지도 모르는 말이지만 이미 나와 염환은 착용한 장비를 제외한 모든 장비를 현금으로 팔아치운 상태였다.

몬스터들이 대륙을 장악하고 유저들이 줄어든다면 모르긴 몰라도 아이템 시세가 엄청나게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 전에 아이템을 미리 팔아둔 것이다. 복수를 실패하든 성공하든, 나와 염환은 게임을 그만둘 것이다. 이 복수는 말 그대로 마지막 도박인 셈이었다.

이 사실은 염환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심지어 마리아나 발록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게임을 생계 수단으로 사용하는 그들에게 있어 내 계획은 그들의 밥줄을 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말하지 못한 것이다.

‘마리아. 후우…….’

마리아를 생각하자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제길.’

언제부터인가 내 가슴속을 메운 여인.

머릿속에 떠오르는 마리아의 생각을 지우며 입을 열었다.

“더 질문할 것이 있나?”

“…….”

내 물음에 모두 침묵했다.

“모두 준비를 철저히 해뒀겠지?”

내 말에 해파토스와 게리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믿어라.”

게리롱과 그 수하들이야 미리 무투대회장에 잠입해 내 신호가 떨어지면 혼란을 주동할 테고 해파토스가 나에게 준 1천의 드워프 전사들은 현재 무투대회 근처에 있는 드워프들의 대장간에서 장인 흉내를 내고 있다. 그러다 내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무투대회장 외부에서부터 정리하며 모일 것이다.

회의는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끝났다.

“그럼 이만 해산한다.”

“그래.”

“크크큭, 기대되는군.”

각자 서로의 방식으로 흥분을 표현한 일행이 하나 둘 스크롤을 찢어 사라졌다.

[블러드: 계획 잊지 마라.]

[염환: 오냐!]

염환은 끝까지 마법사의 탑에 있다가 전투를 치르기 직전, 이중으로 주술과 마법을 사용해 데미지를 주며 마법사의 탑에 혼란을 가져오는 역할이었다. 염환 또한 워프 마법진을 이용해 사라졌다. 이내 막 스크롤을 찢으려던 코롬이 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코롬: 부디 형님의 복수를 도와주십시오.]

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바라보던 코롬이 곧 스크롤을 찢어 빛과 함께 사라졌다.

공지 사항에 알려진 바로 무투대회 신청은 오늘까지였다. 하지만 미리 신청을 해뒀기에 게임 시간으로 내일 모레, 크라센 제국의 무투대회장으로 가기만 하면 됐다.

“휴우, 피곤하군.”

육체적으로는 끄떡없지만 최근 바쁘게 움직여서 그런지 정신적인 피로는 아무리 자도 풀리지가 않았다.

‘좀 자야겠군.’

계획의 실행 이전에 좀 자두겠다는 생각에 로그아웃을 하자 어둠이 내 몸을 덮쳤다.

* * *

와글와글.

시끌시끌.

귓가에 들리는 인파의 소란스러움에 내 입에서 절로 짜증 섞인 신음이 삐져나왔다. 잠까지 줄여가며 일부러 일찍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무투대회장 근처의 유저들의 수는 엄청났다.

지금 크라센 제국은 대륙의 거의 모든 유저가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의 유저들이 몰려 있었다. 유토리안처럼 정체를 밝히며 당당히 돌아다닐 수 없기에 학살자의 망토를 풀어 온몸을 가리고 흑청빛이 감도는 투구를 썼다.

천살멸혼도 또한 아이템 창에 넣어두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검을 들었기에 누군가를 나를 알아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크군.’

고개를 들어 무투대회장을 보는 내 눈에 놀라움이 번졌다.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고대 콜로세움 같은 거대한 건물을 중심으로 유저들이 개미같이 몰려들고 있었다. 무투대회 참가자를 배려하기 위함인지 동, 서, 남문으로는 구경꾼들이 드나들 수 있고 북문은 무투대회의 참가자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나 또한 무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북문으로 움직였다.

그나마 북문 쪽은 유저들이 적어 쉽게 움직일 수 있었다.

북문에는 총 5개의 책상이 나란히 나열되어 있었는데 그 책상에는 모두 비슷하게 생긴 NPC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 무투대회 참가자들을 관리하는 NPC들인 듯했다.

비교적 사람이 적은 맨 오른쪽으로 가자 무언가를 적고 있던 제롭이라는 이름을 가진 NPC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투대회 참가.”

“음, 참가증은 가지고 오셨습니까?”

스윽.

제롭의 말에 아이템 창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건넸다. 이 종이는 일명 ‘무투대회 참가증’으로 내가 무투대회를 신청함과 동시에 내 아이템 창에 생긴 아이템이다.

“흠, 맞네요.”

참가증과 나를 번갈아 본 제롭이 말을 이었다.

“일단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생각보다 무투대회에 참가하는 유저들의 수가 많아져서 간단한 방법으로 예선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예선?”

“예, 북문을 따라 들어가시면 공터가 나오는데 그중 푸른빛을 내뿜는 마법진 위로 올라서시면 몬스터가 있는 방이 나옵니다. 그 몬스터를 처리하시면 무투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거기서 탈락하시면 저절로 동문에서 부활되며, 한 번 탈락 시 재도전은 불가능합니다.”

“흐음.”

보통 유저들이라면 무슨 소리냐고 길길이 날뛰겠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더 좋은 일이었다. 괜히 어중이떠중이들을 상대하면서 힘을 뺄 생각도, 시간을 끌 생각도 없었다.

제롭에게 참가증을 받고 무투대회 참가자들로 보이는 유저들에 휩쓸려 북문에 들어서서 몇 분을 걷자 제롭의 말 그대로 마법진이 가득한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의 넓이는 엄청났는데 그 공터를 빼곡히 채우고 빛을 내뿜는 마법진의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마법진은 유저가 들어가면 붉은빛으로 변하게 되어 있었다. 내 곁의 유저 한 명이 마법진 위에 올라서자 곧 ‘스팟’ 하는 소리와 함께 유저가 사라지고 푸른빛을 내뿜던 마법진이 붉은빛을 내뿜었다.

스윽.

괜히 시간을 끌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근처의 아무 마법진이나 올라서자 발밑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내 몸을 휘감았다.

주변 환경이 바뀐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뜨자 마법진이 가득한 공터가 아닌 사방이 돌로 만들어진 커다란 방이 나를 맞이했다. 제법 커다란 크기였는데 간단한 장식 같은 것도 없이 그저 사방이 돌로 막혀 있었다.

투둑.

내 반대편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에 재빨리 몸을 날려 습격에 대비했다. 시험용 몬스터라고 하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오크 같은 그저 그런 하급 몬스터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스르릉.

재빨리 장검을 버리고 도를 꺼내 착용하자 장검과는 손에 착 달라붙어 편안함을 선사했다.

“후읍.”

스윽.

한차례 숨을 들이마신 뒤 어둠 속으로 진득한 마기를 흘려보내자 존재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릉!

개의 울부짖음보다는 거의 천둥소리에 가까운 울부짖음에 내 입에서 확신에 가까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헬 하운드(Hell Hound)?”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마침내 어둠 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헬 하운드가 거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크와아앙! 컹컹!

곰에 가까운 몸집과 털 한 올 없이 매끈한 검은 가죽, 내 허벅지 두 개를 한꺼번에 겹쳐놓은 것과 같은 거대한 다리와 내 주먹 굵기만 한 이빨이 촘촘히 박혀 있는 입은 과연 헬 하운드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말이 몬스터이지 전설 속 헬 하운드는 지옥을 지키는 마견(魔犬)이다.

‘켈베로스가 안 나온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헬 하운드와 켈베로스는 그 강함 자체가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저번 나이트메어의 신전에서 본 ‘침묵의 마수 라노톤’ 5마리가 켈베로스와 동급이라고 할까?

수백 마리의 헬 하운드를 이끌며 세 개의 입에서 헬 파이어를 쉴 새 없이 뿜어대는 켈베로스의 레벨은 무려 800이었다.

더군다나 켈베로스는 야수 계열의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몬스터. 켈베로스의 포효 한 번이면 대륙에 있는 모든 야수 계열의 몬스터들의 켈베로스의 권능에 굴복할 것이다.

켈베로스가 가장 무서운 이유는 바로 삼(三) 중 주문 때문이다. 세 개의 머리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포 스타 화염 마법은 지옥 그 자체였다.

과거 이벤트 때 켈베로스가 한 번 소환된 적이 있었는데 검은 사자 길드를 비롯해 막강한 힘을 가졌던 길드 4개가 힘을 합쳐 간신히 잡은 적이 있다. 어쨌든 여태껏 나온 몬스터 중에서는 판타즈마 월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보스 몬스터인 것이다.

크르르릉!

내 모습을 발견했는지 코를 킁킁거리던 헬 하운드가 낮게 울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빨리 끝내야겠군.’

점차 거리를 좁히는 헬 하운드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며 도를 들어 헬 하운드를 겨누자 다가오던 헬 하운드가 주춤했다. 곧 내 몸에서 엄청난 양의 마기와 섭혼기가 터지듯 밀려 나왔다.

“복종해라!”

크르르릉! 컹컹!

오만함이 가득 담긴 내 말에 헬 하운드가 머리를 휘저으며 서늘한 울음을 터트렸다.

“복종해라!”

크왕! 컹컹!

현재 내 종족은 야수혈마족이다. 켈베로스보다는 못하지만 헬 하운드보다 한 차원 높은 종족인 것이다. 거기다 야수혈마족의 권능은 야수 계열 몬스터들의 절대 복종! 더군다나 나는 야수혈마족임과 동시에 암흑투마군단장이다. 켈베로스라면 몰라도 겨우 헬 하운드 따위가 내 명령을 무시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복종해라!”

끼잉― 낑.

처음에는 거부를 하며 살기를 흘리던 헬 하운드가 마침내 땅바닥에 코를 처박고 앓는 소리를 냈다. 처연한 울음소리를 흘리는 헬 하운드에게 다가가 도를 치켜들었다.

“잘 가라.”

휘익. 퍽.

크륵!

하늘로 번쩍 치켜들었던 도를 단숨에 내려치자 도가 헬 하운드의 목에 박히며 진득한 피 분수를 뿜었다. 다행히 망토로 몸을 가렸기에 몸에 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크르륵. 크륵.

목 뒤편에 도를 박은 채 몸을 떨며 경련을 일으키는 헬 하운드를 향해 손을 뻗어 목에 박혀 있는 도를 빼내자 ‘푸확’ 하고 한차례 피가 솟구쳤다.

휙. 퍼억.

끽.

다시 한 번 헬 하운드의 목을 내려치자 경련을 일으키던 헬 하운드의 몸이 마침내 축 늘어졌다. 그리고 이내 경련을 멈춘 헬 하운드의 몸이 천천히 모래로 변했다.

스스스.

방금 전만 해도 헬 하운드였던 모래 더미에서 푸른 구슬 하나가 빛을 발했다.

스윽.

허리를 숙여 푸른 구슬을 줍자 푸른 구슬 속에 새겨져 있는 26이라는 숫자가 붉게 빛났다.

‘번호표인가?’

구슬을 품속에 갈무리하며 막 출구를 찾으려는 순간, 전과 같이 발밑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

웅성웅성.

귓가를 때리는 소란스러움에 천천히 눈을 뜨자 제법 많은 수의 유저들이 나를 반겼다.

26이라는 숫자는 먼저 온 순서대로 준 것이 아니라 랜덤으로 준 것인지 대기실로 보이는 곳에 있는 유저들의 수만 해도 거의 40명에 가까웠다. 대기실의 한편에는 붉은색의 문과 푸른색이 문이 있었는데 아마 경기장으로 통하는 문인 듯했다.

‘대단하군.’

소란스럽게 떠드는 대기실의 모습에 내 얼굴에 작은 놀람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헬 하운드는 결코 쉬운 몬스터가 아니다. 레벨은 쓰리 스타 중급은 되어야 하고 컨트롤 또한 고수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비교적 안전하게 잡을 수 있는 몬스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통과한 유저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번 무투대회가 수준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아마 아실레온 때문이겠지.’

신검 아실레온이라면 조용히 게임을 즐기는 고수 유저들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했다.

“흐음.”

느긋하게 대기실을 둘러보는 내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몇 명의 익숙한 유저들도 보였지만 대부분이 모르는 유저들이었다. 물론 나를 알아보는 유저는 없었다. 이내 자리에 앉기 위해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대기실의 안쪽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블러드 님! 블러드 님!”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폭스였다.

내 이름을 사방팔방에 외치며 나에게 다가온 폭스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일찍 오셨네요?”

“큭, 그래.”

‘빌어먹을 자식.’

내 정체를 밝히기로 마음먹고 한 행동인지 연신 내 이름을 부르는 폭스의 행동에 대기실에 있던 유저들이 조용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치 없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뤘기 때문인지 폭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예선은 잘 통과하셨나요? 물론 블러드 님이 겨우 헬 하운드 따위에게 당할 일은 없겠지만요, 하핫.”

“안 본 사이에 더 수다스러워졌군.”

“안 본 사이에 더 싸늘해지셨네요, 하핫.”

싸늘한 내 말에 주절거리던 폭스가 움찔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번 피너스와 데스트론을 만나기 위해 마법사의 탑에 간 이후로 폭스를 만난 적은 없다. 딱히 만날 이유도 없거니와 만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쪽에 앉으세요, 하핫.”

나에게 자리를 권한 녀석이 내 옆에 앉고는 다시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그런 폭스를 보는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존재감이 없어?’

종족이 변화되며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주변에 있는 존재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는데 유독 폭스에게는 그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때 제가…….”

“조용해라.”

“예?”

“조용해라.”

고개를 갸웃하는 폭스를 향해 일침을 가한 뒤 고개를 돌려 대기실의 입구를 바라봤다. 한 무더기로 느껴지는 커다란 존재감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폭스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왔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례차례 한 무리의 유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 3명의 유저들이었는데 유저들의 등장과 동시에 대기실의 유저들이 술렁거렸다.

“검은 사자 길드다!”

“간부 유저들이야!”

무리의 정체는 바로 검은 사자 길드의 간부 유저들이었다.

‘해골, 베팔, 고추가침퉤퉤. 이 3명뿐인가?’

이내 유저들의 시선을 만끽하며 오만한 표정을 짓던 해골이 나를 봤는지 눈을 부릅뜨고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저, 저!”

“뭐야? 뭔데… 헉!”

해골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베팔이 나를 알아보고는 숨을 집어삼켰다. 얼굴까지 투구로 가렸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봤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네, 네, 네놈……!”

해골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향해 무언가 말하려다 내가 노려보자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요 며칠 동안 저 3명을 무차별적으로 죽여댔기에 저 3명에게 있어 나는 사신보다 무서운 존재로 탈바꿈했다.

“쓸데없이 싸울 생각 없다. 닥치고 있어라.”

“크윽, 빌어먹을 놈이……!”

내 말에 울컥한 해골이 검을 뽑아 들려고 했지만 그뿐이었다. 의미심장한 눈빛의 베팔이 해골에게 무언가를 말하자 해골이 잠자코 자리에 앉았다.

“나중에 보자!”

그래도 무시당하는 것은 싫은지 자리에 앉은 해골이 작게 투덜거렸다.

‘멍청한 놈!’

그런 해골을 향해 싸늘한 냉소를 흘린 뒤 고개를 돌려 베팔과 고추가침퉤퉤를 스윽 훑어보자 움찔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들을 보는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라마사는 나오지 않았나?’

무라사마가 나올 줄 알았던 나로서는 의외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이미 화살은 쏘아졌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내 천살과 함께 계획이 실행되는 것이다. 이제 무라사마가 드래곤 클럽의 권력을 빌어 무슨 수를 쓰든지, 아니면 율칸과 같은 인공지능을 무작위로 찍어낸다 해도 상관없었다.

검은 사자 길드와 마법사의 탑, 그 밖의 길드 연합은 서로 부딪칠 것이고 그 전투가 극에 달하는 순간, 내가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무투대회 근처의 건물들에서 엄청난 수의 몬스터와 전사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크크큭.”

웃는 내 모습에 폭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혹시 최근에 현실에서 머리 맞은 적 있으세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묻는 폭스의 모습에 내 얼굴이 폭스와 마찬가지로 구겨졌다.

“네 걱정이나 해라.”

폭스를 향해 차갑게 쏘아붙인 뒤 흥분을 가라앉힐 겸, 눈을 감았다. 주변에서 나를 주제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하며 몇 시간 후의 계획을 다시 한 번 점검하며 무투대회 시작 전까지 시간을 때웠다.

“…러드 님! 블러드 님!”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귓가를 때리는 폭스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어느새 대기실을 가득 메운 유저들이 보였다.

“블러드 님! 몇 번을 불렀는데 말이 없어서 놀랐습니다, 하핫.”

“…….”

폭스의 말을 무시하고 전에 비해 인원이 거의 2배 이상으로 늘어난 대기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최소 쓰리 스타 초급의 유저들이었다.

벌써부터 경쟁의식이 생긴 것인지 유저들이 적막 속에서 서로 눈치를 살폈다. 보통 저레벨들의 신경전이었다면 그저 그렇겠지만 고레벨들의 신경전이니만큼 뜨거운 열기가 대기실 안을 가득 메웠다.

‘역시나 없군.’

내 예상대로 마리아와 관련된 우코바치와 팅커벨은 없었다. 발록이야 나와의 계획 때문에 참가를 할 수 없었겠지만 팅커벨과 우코바치는 아니다. 절정무공이라면 우승까지 노려볼 만했다.

그럼에도 그 둘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 마리아 때문일 것이다. 마리아의 성격 상, 불확실한 우승을 노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시간에 몬스터를 잡는 것을 더 유익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벌써부터 대단한데요?”

폭스 또한 유저들이 내뿜는 경쟁의식을 느꼈는지 호들갑을 떨며 유저들을 바라봤다. 이내 조잘거리는 폭스를 향해 막 쏘아붙이려는 순간, 대기실 한편의 벽 쪽에서 커다란 홀로그램이 ‘파밧’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홀로그램에 유저들이 술렁거렸다.

“경기장인가?”

“그런 것 같은데요?”

내 물음에 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폭스의 말대로 홀로그램이 보여주는 곳은 바로 무투대회의 경기장이었다. 단 하나의 원형 경기장을 중심으로 계단식으로 있는 관객석에는 엄청난 수의 유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어서 시작해라!”

“가브리엘, 파이팅!”

홀로그램에서 들리는 유저들의 엄청난 환호가 대기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대단하네요.”

“으음.”

내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홀로그램 속의 엄청난 유저들의 수에는 나조차 질릴 정도였다.

“자자! 모두 조용해주세요!”

이내 경기장 위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잠시간 조용해졌던 관객석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우와! 초선 님이다!”

“초선 님 짱!”

“초선 누나! 사랑해요!”

인영의 정체는 바로 천 급 게임 운영자인 초선이었다.

이십대 중반의 미녀로 월 나라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한복 비슷한 옷을 입고 붉은색의 머리칼을 하고 있는 그녀는 요즘 판타즈마 월드 홈페이지를 달아오르게 하는 얼짱 게임 운영자였다. 그녀의 팬사이트만 해도 벌써 수백 개는 된다는 소문답게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두 조용히 안 하시면 혼내드릴 겁니다!”

그녀의 외침에 관객석이 웃음바다로 변했다.

“푸하하! 혼내보세요!”

“뽀뽀 해주세요!”

유저들의 반응에 마침내 초선이 얼굴을 붉히며 손에 들린 마이크를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초선을 중심으로 엄청난 마나의 폭풍과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억? 현무랑 백호다!”

“주작이랑 청룡도 있어!”

놀랍게도 초선이 소환한 것은 월 나라에서 사대신수라 불리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였다.

크르르릉!

낮은 울부짖음인데도 불구하고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백호의 울음소리에 유저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비록 월 나라가 아니라 루안 대륙에서 게임을 하고 있지만 이 사대신수의 힘은 얼마 전 월 나라 유저가 올린 이벤트 동영상으로 뼈저리게 느낀 바 있다.

비록 월 나라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고레벨의 유저가 얼마 없었다지만 월 나라의 수도인 ‘월천(月天)’이 사대신수에게 단 5분 만에 함락당한 것이다. 물론 미리 공지가 있었던 이벤트였기에 파손된 건물들을 모두 복구하고 죽은 유저들에게 페널티는 주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판타즈마 월드 게시판에 사대신수의 벨런스에 관해 엄청난 항의 글이 올라온 적이 있었다. 사대신수의 등장에 고요해진 관객석의 모습에 초선이 간단한 손동작으로 사대신수를 모두 사라지게 한 뒤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무투대회의 사회를 맡은 초선입니다! 모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와아아!”

초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저들이 언제 겁먹었냐는 듯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거대한지 대기실까지 웅웅 울릴 정도였다.

“그럼 이번 무투대회에 관해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현재 등록된 선수들은 총 68분이십니다. 모두 힘겨운 예선을 거치고 올라오신 대단한 분들이시죠. 이분들은 1대 1로 차례차례 싸울 것입니다. 선수들 모두 예선 때 얻은 구슬에 적힌 번호가 있는데, 무작위로 번호를 뽑아, 뽑힌 선수끼리 싸우는 것입니다.”

잠시 말을 멈춘 초선이 스윽 하고 손을 휘젓자 허공에서 두 개의 표지판이 나타났다. 표지판에는 1부터 54까지의 숫자가 쓰여 있었는데 표지판 위에는 화살표 표시가 되어 있고 표지판 자체가 돌아가게 만들어져 있는 형식으로 보아 저것으로 싸울 선수들을 뽑는 것 같았다.

“바로 이 장치로 선수들을 추첨하는 것입니다. 상대 선수가 로그아웃을 당하거나 항복을 했을 경우 승리하며 마지막으로 남으신 두 선수가 이번 무투대회의 우승 상품인 신검 아실레온을 두고 결투를 하게 됩니다!”

치이잉.

초선이 힘찬 외침과 함께 하늘 위로 손을 뻗자 경기장 10m 정도 위에 하나의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이 2m 정도의 기다랗고 가느다란 검이었는데 화려한 보석들이 촘촘히 박혀 있어 대단히 사치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장식용 검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신력은 저 검이 바로 신검 아실레온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우우웅.

아실레온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력에 주변의 하늘이 마구 일그러졌다. 그 엄청난 위력에 유저들이 다시 한 번 환호성을 내질렀다. 멍하니 홀로그램을 보던 폭스가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과연 신 급 아이템이네요.”

“으음.”

홀로그램으로 보고 있지만 아실레온의 힘은 결단코 천살멸혼도에 뒤처지지 않았다.

우우웅.

아실레온의 등장 때문인지 내 등에 걸린 도가 낮게 울며 공명음을 흘렸다.

‘큭.’

비단 도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찌릿찌릿하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 마치 몸 자체가 저 신검 아실레온을 거부하는 듯했다.

“그럼 경기를 위해 신검 아실레온은 잠시 치워두겠습니다!”

스윽.

초선이 손을 흔들자 허공에 떠 있던 신검 아실레온이 허공에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내 아실레온을 사라지게 한 초선이 무투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무투대회의 시작을 알리겠습니다!”

“우와아아아!”

퍼버벙! 퍼벙!

유저들의 환호성과 함께 사방에서 폭죽이 터져 하늘을 수놓았다. 해가 쨍쨍한 낮임에도 불구하고 폭죽이 내뿜는 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태양빛을 압도할 정도였다. 화려한 폭죽에 유저들이 한층 더 거센 환호를 내질렀다.

이내 관객들의 반응이 시들해지자 초선이 선수들을 추첨하는 기계와 함께 경기장 밑으로 내려갔다.

-그럼 첫 번째 경기에서 싸울 선수들을 추첨하겠습니다!

위이잉. 트르르륵.

초선이 힘차게 외치자 기계가 자동으로 회전했다. 힘차게 돌아가던 기계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가 싶더니 이내 각자 한 가지씩 숫자를 뽑았다.

-예! 첫 번째 숫자는 13과 31번입니다! 13번 선수는 홍(紅)문 으로! 31번 선수는 청(靑)문으로 나와주세요!

스윽.

홀로그램 속 초선의 말에 대기실에서 2명의 유저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지명 받은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숨 막힐 듯한 무거운 분위기 속에 홀로그램 속 초선이 경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3번 선수는 브랜드라는 아이디를 가진 선수로 별명이 ‘진홍의 검사’입니다! 클래스는 프리 나이트! 즉, 자유 기사입니다! 레벨은 쓰리 스타 후반으로 무기는 검입니다. 종족은 엘프족이시네요. 그리고 상대편 31번 선수는 바바리안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선수로 ‘광전사’라는 살벌한 별명을 가지고 계십니다! 클래스는 전사! 레벨은 브랜드 선수와 같이 쓰리 스타 후반이십니다! 무기는 거대한 망치와 여러 자루의 손도끼를 쓰십니다! 종족은 휴먼이십니다.”

“우와아아!”

“브랜드! 힘내라!”

“바바리안! 이겨라!”

친절한 초선의 설명에 관객들이 각자 응원을 하며 열기를 뿌렸다.

‘과연 고레벨 유저들이 몰렸군.’

방금 나간 두 유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강자 랭킹 100위 안에 드는 고레벨의 유저들로 각자 전사 계열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특히나 바바리안은 과거의 나 또한 인정한 강자로 랭킹 50위 안에는 가뿐히 들어가는 유저다.

이내 각자 경기장의 남쪽과 북쪽 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브랜드와 바바리안이 경기장 위로 몸을 날렸다. 과연 고레벨 유저들답게 분위기를 잡은 것만으로도 소란스러웠던 관객석이 금세 조용해졌다.

이내 치열한 눈싸움을 벌이는 브랜드와 바바리안의 중심으로 들어간 초선이 양 선수를 보며 주의사항을 설명했다.

“항복을 했는데도 공격하면 탈락입니다. 또, 다른 유저의 도움을 받아도 탈락이며, 부정행위를 해서 탈락당하면 다음 무투대회는 참가하실 수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초선의 물음에 브랜드와 바바리안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선수의 모습에 초선이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경기장 밖으로 몸을 날리며 힘차게 외쳤다.

“그럼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후우웅. 꽈앙!

시작과 동시에 경기장 위에서 폭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뭐야?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야?

갑작스런 상황에 대기실에 있던 유저들이 얼굴을 구기며 불평을 토했다.

“호오, 빠르네요.”

다른 유저들과는 달리 눈을 빛내며 감탄사를 내뱉는 폭스의 모습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녀석… 본 건가?’

방금 전 폭음과 먼지의 정체는 바로 바바리안의 망치가 경기장을 때리면서 일어난 것이다. 커다란 망치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는 나조차 간신히 봤을 정도였다. 수준이 높은 대기실의 유저들 또한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휘이익. 타닥.

이내 자욱한 먼지를 뚫고 한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색 검기를 두른 검을 든 전사, 바로 브랜드였다.

“쿨럭, 쿨럭!”

먼지를 뚫고 나온 브랜드가 거센 기침을 하며 비틀거렸다. 그것도 잠시, 이내 몸을 지탱하던 검을 치켜든 브랜드가 고함을 지르며 먼지 속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러 검기를 날렸다. 평화를 사랑하는 엘프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독기 어린 모습이었다.

“죽어라!”

피피피핏.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경기장을 메웠던 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콰가강.

먼지를 가른 브랜드의 검기가 애꿎은 경기장을 마구 때렸다. 마치 바로 눈앞에 바바리안이 있는 양, 브랜드의 검이 쉴 새 없이 검기를 뿜어댔다.

“헉, 헉!”

그렇게 몇 분간을 검기를 뿜어대던 브랜드가 이제는 됐다고 생각했는지 숨을 헐떡이며 검을 늘어트렸다. 그런 브랜드의 모습에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멍청한 놈!’

상대가 죽으면 초선이 먼저 알리거나 죽었다고 안내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바바리안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리였다. 내 예상대로 경기장의 구석에서 거대한 망치로 몸을 가리고 있던 바바리안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악은 끝이냐?”

“으으으!”

홀로그램 속 바바리안의 차가운 목소리에 숨을 헐떡이던 브랜드가 몸을 떨었다.

“으으, 빌어먹을 새끼! 죽어……!”

브랜드가 채 말을 내뱉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그런 브랜드의 머리 위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하늘로 치솟았던 바바리안의 망치가 내리꽂혔다.

콰드득.

“쿠엑!”

낙하력과 회전력이 더해진 거대한 망치가 브랜드의 얼굴을 짓이기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바바리안은?’

내가 막 의문을 가지는 순간, 홀로그램에서 우렁찬 기합이 터져 나왔다.

“흐아압!”

퍼억!

“으악!”

허공으로 망치를 던지는 기묘한 수법으로 브랜드를 공격한 바바리안이 어느새 허리춤에서 꺼낸 작은 손도끼로 브랜드의 이마를 내려찍었다. 거대한 망치에 함몰된 브랜드의 이마가 손도끼의 날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쩍 벌어지며 피를 뿌렸다.

이내 바닥을 구르는 망치를 주워 든 바바리안이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브랜드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잘 가라.”

퍼억. 콰드득.

차가운 목소리와는 달리 엄청난 기운을 담은 바바리안의 망치가 브랜드의 가슴을 함몰시켰다. 부러진 뼈가 등을 뚫고 튀어나와 끔찍한 풍경을 그렸다. 랭킹 100위 안에 드는 강자치고는 허무한 죽음이었다.

‘뭐, 상대가 바바리안이었으니.’

차가운 웃음을 흘리는 내 귓가로 다시금 초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 승리자는 바바리안 님입니다!”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브랜드의 모습에 초선이 말을 더듬었다. 관객석의 유저들 또한 환호를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나왔던 문으로 사라지는 바바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내 초선이 뒤늦게 분위기 수습을 나섰다.

“예에! 여러분! 그럼 다음 시합을 계속해볼까요?”

“우와아아!”

관객석 또한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대기실은 아니었다.

끼익.

푸른색의 문을 열고 바바리안이 모습을 드러내자 대기실의 공기가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네놈! 브랜드의 원수는 갚아주마!”

평소 브랜드와 친분이 있던 유저인지 검은 옷의 마법사가 막 문을 열고 타나난 바바리안을 향해 스틱을 겨누며 외쳤다.

“마음대로.”

덜컹.

바바리안이 망치를 벽에 기대며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치잇.”

검은 옷의 마법사 또한 더는 상대할 마음이 없는지 혀를 차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내 고요가 내려앉은 대기실에 활기찬 초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 이번 숫자는 4번과 7번입니다! 4번 선수는 홍문으로! 7번 선수는 청문으로 나와주세요!”

“벌써 제 차례네요? 하핫.”

품속에서 4라고 쓰여 있는 구슬을 꺼낸 폭스가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하고 와라.”

‘네놈은 나한테 죽어야 하니까.’

내 속마음을 모르는 폭스가 내 응원에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역겨운 행동을 하고는 홍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폭스의 상대는 새하얀 옷의 사제였는데 가시가 촘촘히 박힌 철퇴를 들고 있었다.

“4번 선수는 폭스라는 귀여운 아이디를 가진 선수로 별명은 없습니다! 클래스는 비밀! 레벨 또한 비밀! 무기는 단검입니다. 비밀이 많은 선수네요. 종족은 휴먼입니다. 그리고 상대편 7번 선수는 케로로라는 아이디를 가진 선수로 폭스 선수와 마찬가지로 별명이 없습니다! 클래스는 성직자! 레벨은 쓰리 스타 중반으로 무기는 철퇴입니다! 케로로 선수 또한 휴먼입니다.”

“와아아아!”

방금 전의 잔인한 싸움은 잊어버렸는지 관객석이 다시 한 번 들끓었다. 바바리안과 브랜드의 싸움으로 부서졌던 경기장은 어느새 전과 같은 모습으로 복구되어 있었다.

이내 두 개의 문에서 폭스와 케로로라는 유저가 모습을 드러냈다. 폭스는 전에도 입고 있던 검은색의 가죽 옷을 입고 있었는데 무기가 없었다. 옷 또한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 옷이라 암기 따위를 숨길 장소 또한 없었다.

그에 비해 케로로는 품이 넓은 백색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백색의 머리칼과 어우러져 손에 들린 철퇴만 없다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제의 모습이었다. 폭스와 케로로가 경기장 위로 올라서자 초선이 양쪽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규칙은 잘 아시겠지요?”

“하하핫. 예!”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케로로와는 달리 폭스가 넉살좋게 대답까지 하자 초선이 당황한 듯, 잠시 움찔하고는 힘차게 외쳤다.

“그럼 시작하세요!”

우우우웅!

경기 시작과 동시에 케로로의 몸을 중심으로 백색의 신성력이 마구 요동쳤다.

“강철의 성령이여…….”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케로로의 목소리에 맞춰 주변으로 모여 들었던 신성력이 케로로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어떤 것은 다리로 스며들고 어떤 것은 팔과 가슴으로, 또 어떤 것은 그대로 케로로의 몸을 휘감았다. 홀로그램 속 케로로를 바라보는 내 입에서 호기심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전투 성직자인가?’

성직자의 필수 능력치인 지혜와 신마력을 최소로 올리는 대신 힘과 체력을 올려 육체적 능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보조 마법으로 육체적 능력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드는 전투 성직자는 한때 엄청난 유행이었다.

‘재미있군.’

전투 성직자로 쓰리 스타까지 레벨을 올렸다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와아, 전투 성직자라니 대단하네요!”

‘멍청한 자식!’

홀로그램 속 폭스의 여유만만한 목소리에 대기실의 유저들은 물론이고 내 얼굴마저 일그러졌다. 마침내 자신의 몸에 모든 보조 마법을 시전한 케로로가 붉은 얼굴을 애써 가라앉히며 철퇴를 들어 폭스를 겨눴다. 그와 동시에 케로로의 발이 땅을 박차고 몸을 띄웠다.

파앗.

“하앗!”

성직자의 움직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점프력으로 도약한 케로로가 손에 들린 철퇴에 힘을 가하자 철퇴를 중심으로 새하얀 신성력이 모여들었다.

“죽어라!”

꽈앙!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새하얀 빛에 휩싸인 철퇴가 폭스가 있던 땅을 때리자 경기장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돌 조각을 뿌렸다.

“대단한 위력인데요?”

어느새 경기장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폭스가 여유롭게 웃으며 짐짓 과장된 움직임으로 놀란 척을 했다.

“이 빌어먹을 놈이!”

태연한 폭스의 모습에 케로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건 대기실의 유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정도 속도라니!’

나조차 폭스가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아니, 움직이는 모습은 고사하고 언제 움직였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제대로 덤벼라!”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리는 폭스의 모습에 케로로가 거칠게 철퇴를 휘두르며 외쳤다. 그런 케로로의 모습에 폭스가 난처한 듯,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흐음, 알겠습니다.”

스윽.

양손을 자신의 그림자에 슬쩍 가져다댄 폭스가 다시 손을 들어올리자 그림자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폭스의 손을 따라 올라왔다.

폭스의 양손에 들린 그림자가 점차 형체를 갖춰가더니 곧 날카로운 단검으로 변했다. 말 그대로 그림자의 단검으로 변한 것이다.

“그럼… 가겠습니다!”

파밧.

미약한 외침과 동시에 폭스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흐릿해졌다.

“대체 어디… 허억!”

까가강.

갑작스레 사라진 폭스의 모습에 막 의문을 흘리던 케로로의 등 뒤로 노란 불꽃이 튀겼다. 그와 동시에 모습을 감췄던 폭스가 단검을 손에 든 채 케로로의 등 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신체 강화 마법까지 거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빌어먹을!”

제법이라는 듯한 폭스의 말에 케로로의 얼굴이 구겨졌다. 폭스의 말 대로 케로로가 입고 있던 새하얀 사제복은 찢겨져 있었지만 정작 공격을 당한 등은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신체 강화 마법이란 라그아노의 사제들만이 배울 수 있는 마법으로 말 그대로 신체를 강철처럼 강화시키는 것이다. 사용 시, 일정 시간 지혜가 떨어지는 마법이지만 애초에 스탯을 지혜에 투자하지 않은 전투 성직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스킬이다. 이내 고개를 돌려 하늘을 힐긋 쳐다본 폭스가 단검을 들어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이만 끝내야겠네요.”

“뭐, 뭐야!”

태연한 폭스의 말에 분노한 케로로가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 폭스의 신형이 다시 흐릿해졌다.

“어, 어디냐!”

폭스가 다시 모습을 감추자 케로로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막 돌리려 했다.

“잘 가세요.”

케로로의 바로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폭스가 짧은 말과 함께 양손에 들린 단검을 휘둘렀다.

스걱.

“큭?”

이내 미약한 소리와 함께 케로로의 입에서 단말마가 튀어나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슨…….”

푸화악.

입을 열자 케로로의 목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으아아악!”

“꺄아아악!”

그 끔찍한 모습에 관객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르륵.”

털썩.

한차례 가래 끓는 소리를 낸 케로로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핫.”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케로로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폭스가 자신이 나왔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양손에 들린 그림자 단검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끼익.

폭스가 대기실로 돌아오자 고요했던 대기실이 한층 더 고요해졌다.

“블러드 님! 보셨나요?”

그런 대기실의 분위기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들어오자마자 나를 향해 다가온 폭스가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어땠나요?”

나를 향해 묻는 폭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마치 ‘네놈이라면 날 잡을 수 있겠냐?’라고 묻는 듯한 폭스의 눈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라면 시작하자마자 네 다리를 끊어버렸을 거다. 당한 놈이 병신인 거지.”

“…하, 하하. 그렇군요. 역시 블러드 님이시네요.”

차가운 내 대답에 눈썹을 꿈틀거린 폭스가 말을 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고요 속에서 다시 한 번 초선의 목소리가 대기실에 울렸다.

“예! 다음 숫자는 11과 26번입니다! 11번 선수는 홍문으로! 26번 선수는 청문으로 나와주세요!”

* * *

‘내 차례군.’

스윽.

“어라? 블러드 님 차례이신가요?”

내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내 옆에 앉아 있던 폭스가 물었다.

“그래.”

“열심히 하세요.”

폭스의 응원을 무시하고 청문으로 걸음을 옮기며 힐끔 홍문으로 가는 유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방금 전 바바리안과 시비가 붙었던 검은 옷의 마법사가 나와 마찬가지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내 나를 노려보던 마법사가 입을 벙긋거리더니 몸을 돌려 홍문을 열고 나갔다.

‘죽여주마.’

마법사의 입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피식.

‘웃기는군.’

이제는 보이지 않는 마법사를 향해 조소를 흘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푸른색의 문을 열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계단의 위로 향하자 관객들의 함성 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계단을 벗어나 문을 여는 순간, 엄청난 크기의 환호성이 내 몸을 때렸다.

“우와아아아!”

“이겨라! 이겨라!”

고막을 울리는 환호성에 얼굴을 구겨졌다.

‘시끄럽군.’

걸음을 옮겨 경기장 위로 올라서자 환호성이 한층 더 커졌다. 이내 상대편 흑마법사 또한 경기장 위로 올라서자 초선이 입을 열었다.

“11번 선수는 듀오라는 아이디를 가진 선수로 별명이 ‘검은 사신’입니다! 클래스는 흑 마법사로 레벨은 쓰리 스타 후반입니다! 종족은 흑마법사로는 흔치 않은 투칸족입니다. 상대편인 26번 선수는 모든 것이 비밀입니다! 무기는 커다란 대도로 클래스가 전사라는 것과 휴먼이라는 것만 밝혀두셨네요!”

잠시 말을 멈춘 초선이 입을 열었다.

“규칙은 모두 아시죠?”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듀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나와 듀오를 번갈아 본 초선이 힘차게 외쳤다.

“그럼 경기 시작하세요!”

“암흑의 마나여, 타락의 마나여, 나의 손을 떠나 적을 멸하는 명멸(明滅)의 창이 되어라! 다크 스피어!

초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흑마법사, 듀오의 스틱에서 생성된 검은 창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흐압!”

꽈앙!

기합과 함께 내 등에 걸린 도를 뽑아 힘껏 휘두르자 대기를 찢어발기며 나를 향해 쇄도하던 사나운 창이 폭음을 터트리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듀오의 주문이 이어졌다.

“암흑의 마나여, 부정의 마나여, 죽음의 마나여, 666개의 부정한 기운으로 화(化)해 내 앞을 가로막는 무지한 적을 멸하는 필사(必死)의 검이 되어라! 데스 소드!”

스으으으.

듀오의 주문과 함께 허공으로 모여 들었던 검은 마나가 그 크기를 불려 나가며 형상을 갖췄다. 이내 경기장 위로 총 666개의 핏빛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흐흐흐, 죽어라!”

우르르릉!

파파팟.

듀오의 외침과 함께 666개의 검이 천둥소리를 내며 나를 향해 쏘아졌다.

“치잇.”

스으응.

도에 마나를 흘려보내자 도가 금세 붉은빛에 휘감겼다.

경기장 사방이 검으로 둘러싸인 상태!

‘받아쳐주마!’

가슴팍까지 도를 들어올리자 듀오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막겠다고? 하! 멍청한 자식, 막아봐라!”

우르르릉!

듀오의 목소리에 맞춰 나를 향해 쏘아진 666개의 검이 다시 한 번 천둥소리를 터트리며 그 속도를 높였다. 데스 소드의 위력은 원 스타 검사가 뿜어내는 검풍의 위력. 양이 많다 뿐이지, 내가 마음먹고 도를 휘두른다면 막지 못할 위력이 아니다.

“크하압!”

타다닥.

힘찬 기합을 내지르며 나를 향해 쏘아지는 검들을 향해 마주 달리자 듀오가 ‘이런 미친놈!’ 하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그와 동시에 마침내 검붉은 검이 사방에서 나를 향해 쏟아졌다.

휘익. 쨍!

날렵하게 휘두른 도에 막 왼쪽다리를 꿰뚫으려던 검이 깨지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대로 한 바퀴 회전한 도가 다시 허공을 누볐다.

파밧. 째쟁!

어깨를 향하는 검을 파괴한 뒤 그대로 도를 품으로 끌어와 도면으로 가슴을 막자 도면을 때린 검이 작은 폭음과 함께 사라졌다. 도기와 파천기를 휘감은 도로 막은 것이라 그런지 데미지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부숴주마!’

쏟아지는 검을 보는 내 입에서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큭. 크하앗!”

후우웅.

휘두른 도에서 부채꼴 모양의 도기가 뿜어져 나와 앞으로 뻗어 나가 검들을 덮쳤다.

꽈가가강!

검과 도기가 부딪치며 커다란 폭음을 터트렸다. 이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소멸된 검들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3분의 1이 넘게 사라진 검에 웃음이 걸리는 것도 잠시, 그 배는 되어 보이는 검들에 내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암흑의 마나여, 타락의 마나여……!”

설상가상으로 내 도기의 위력을 본 듀오가 데스 소드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스틱을 들어 나를 겨누며 다시 한 번 외칠 준비를 했다.

‘큭, 제길.’

수많은 검을 쳐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힘들었기에 여기서 듀오가 다른 마법을 사용한다면 꽤나 커다란 데미지를 입을 것은 분명했다. 이내 도를 휘둘러 몇 개의 검을 더 소멸시킨 뒤 힘껏 숨을 들이마시고 듀오를 향해 내뱉었다.

“크허어어엉!”

“타락의 권세를… 어헉!”

한창 마나를 긁어모으며 주문을 외우던 듀오가 내 입에서 터진 제왕의 포효에 주춤했다. 시전자의 정신이 흐트러진 것 때문인지 나를 향해 쇄도하던 검들 또한 주춤하며 허공에 멈추더니 곧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흐읍.”

그와 동시에 잔뜩 웅크린 채 도를 든 내 몸이 듀오를 향해 쏘아졌다.

파바밧. 꽈가가강!

몸을 움직이며 무차별적으로 휘두른 도에 내 진로를 방해하던 검들이 하나 둘 허공으로 녹아들 듯 흩어졌다. 뒤늦게 제왕의 포효의 영향에서 벗어난 듀오가 다시 정신을 집중했는지 허공에 떠 있던 검들이 다시 나를 향해 쏘아졌다.

“죽어라!”

콰우우우.

나에게 당한 것이 꽤나 분했는지 독기 오른 듀오의 외침에 맞춰 검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50개 남짓 남아 있는 검이 위협이 될 리 만무했다.

“멍청한 놈!”

스팟.

두 다리를 움츠렸다 힘껏 도약하며 거리를 좁히자 듀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크윽. 암흑의 마나여, 뇌전의 마나여, 적을 멸하는 뇌전의 되어 멸명의 권세를 부려라! 다크 라이트닝!”

치지직!

듀오의 스틱에서 나온 검은 번개가 나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며 쏘아졌다. 뇌전 계열 마법의 특성 상, 방금 전 데스 소드처럼 맞받아친다면 그 자리에서 폭발하며 전기를 내뿜기 때문에 전과 같은 방법은 불가능했다.

‘베어버린다!’

처억.

듀오를 향해 내달리던 발을 멈추고 폭을 넓혀 자세를 잡는 내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검은색 뇌전이 내뿜는 열기가 코앞에서 느껴졌다.

“하앗!”

푸확.

기합을 내지르며 도를 휘두르자 물을 가르는 듯한 시원한 소리와 함께 나를 노리던 검은 뇌전이 반으로 갈라졌다.

꽈가강!

“어, 어떻게……!”

자신이 시전한 마법이 반으로 갈리자 듀오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건 초선을 비롯해 관객석의 유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치지직.

애꿎은 바닥을 파헤친 전기가 치직거리다 사라졌다. 경악 섞인 듀오를 바라보는 내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떠올랐다.

“알 것 없다.”

파밧.

“아, 안 돼!”

갑작스레 몸을 날리는 내 모습에 듀오가 비명을 지르며 마법을 시전하려고 했지만 이미 내 도가 듀오의 어깨에 걸쳐진 후였다.

콰드득.

마법사 특유의 얇은 천 종류의 로브를 가른 도가 듀오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가슴을 향해 어깨부터 사선으로 파고드는 도에 듀오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닥쳐라.”

우드득.

미친 듯이 손을 휘두르며 발광하는 듀오를 향해 싸늘히 말한 뒤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가슴팍까지 파고든 도가 조금씩 더 파고들었다. 동시에 듀오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콰드득.

“쿨럭, 쿨럭.”

투툭.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쓰고 있는 투구 위로 듀오의 피가 떨어져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구멍이 뚫린 곳으로 들어오는 붉은 피에 인상을 구기며 도를 빼내자 뼈 부스러기와 함께 내장이 주르르 딸려 나왔다. 그 덕에 도에 의지해 서 있던 듀오의 몸이 허물어졌다.

“커윽…….”

부들부들.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지 바닥에 쓰러진 듀오가 몸을 떨며 연신 검은 피를 게워냈다. 눈물이 맺힌 듀오의 눈을 바라보는 내 눈에서 차가운 한광이 뿜어져 나왔다.

“잘 가라.”

푸욱.

“크악!”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을 끝으로 듀오의 몸이 가슴부터 천천히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경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환호성은 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요한 적막이 관객석에 내려앉아 있었다.

내 전시합인 폭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시합이었다. 투구 속 얼굴을 구기며 내가 나왔던 문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관객석 여기저기에서 약간씩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것도 잠시, 곧 작은 환호가 커다란 환호로 변해 경기장을 덮쳤다.

‘멍청한 것들.’

귓가를 때리는 관객들의 환호에 차가운 냉소를 흘리며 막 문의 손잡이에 손을 걸치는 순간, 찌릿하는 통증이 심장을 찔렀다.

“크윽.”

갑작스런 통증에 의아해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내 몸이 돌처럼 굳었다.

“무…라…사마!”

분노 섞인 목소리가 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무라사마가 왜 거기에?’

관객석의 정중앙, 가장 화려하게 치장된 자리에 바로 무라사마가 있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은빛 갑옷을 입고 바로 옆에 월향을 앉힌 채 앉아 경기장을, 아니 정확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라사마의 옆에는 월향 말고도 여러 유저와 NPC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모두 대륙에서 제법 유명한 유저, 혹은 NPC나 거대 길드의 마스터였다.

‘혹시……!’

설마 하는 마음에 안력을 돋워보자 역시나 내 예상대로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 또한 자리 잡고 있었다.

‘피너스 그리고 크레이언!’

데스트론은 오지 않은 듯했지만 피너스와 크레이언은 그곳에 앉아 있었다. 웃기게도 유저들로 이루어진 길드의 마스터들은 거의 이십대 초반, 그러니까 무라사마와 같은 또래였다. 내 예상이 맞다면 귀빈석의 유저들 중 상당수가 드래곤 클럽일 것이다.

“크크큭, 드래곤 클럽 지정석이라는 거군.”

내 입에서 낮은 광소가 터져 나왔다.

“조금만 기다려라, 개자식들. 크큭, 그 잘난 얼굴을 짓뭉개주마.”

내 말이 들릴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 혼잣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를 바라보던 무라사마가 고개를 돌려 다시 경기장을 바라봤다.

휙.

나 또한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대기실로 돌아가며 염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블러드: 염환, 지금 어디냐?]

[염환: 지금 무투대회장으로 가는 중이다. 왜?]

[블러드: 별거 아니고, 대회장에 오면 관객석 중앙에 귀빈석이 있을 거다. 크레이언도 거기 있으니까 찾기 쉬울 거다.]

[염환: 귀빈석이 왜?]

[블러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기서 대기하고 있어라.]

[염환: 끄응, 알겠다.]

앓는 소리를 내는 염환의 귓속말을 들으며 문을 열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자 소란스러웠던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고요하게 내려앉은 대기실을 걸어 자리에 앉자마자 폭스가 호들갑을 떨어댔다.

“전보다 더 강해지셨네요?”

나를 향해 묻는 폭스의 눈에는 진정 놀란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럼 놀고만 있을 줄 알았나?”

“하하핫.”

차가운 내 말에 폭스가 볼을 긁적이며 유쾌하게 웃었다.

“다음 시합입니다! 숫자는 1번과 51번입니다! 1번 선수는 홍문으로! 51번 선수는 청문으로 나와주세요!”

고요한 대기실에 다시 한 번 초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윽.

이번에 일어난 유저는 붉은 옷의 궁수와 어쌔신으로 보이는 검은 옷의 유저였다.

“대체 어디서 사냥을 하셨기에…….”

“폭스.”

“예?”

갑작스런 내 부름에 폭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피식.

“경기나 봐라.”

차가운 웃음과 함께 홀로그램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알 수 없는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9번과 35번입니다! 9번 선수는 홍문으로! 35번 선수는 청문으로 나와주세요!”

초선의 외침과 함께 다시 두 명의 유저가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 눈싸움을 한 뒤 각자 지정 받은 문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환호성이 이었다.

스윽.

“휴우, 아슬아슬했네요.”

방금 전, 경기를 마치고 돌아온 폭스가 예리하게 잘린 가슴팍의 옷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편 선수는 정령술사였는데 최상급 정령을 2마리나 소환할 수 있는 고레벨의 정령사였다.

“그래도 이겨서 다행이네요, 하하핫.”

살랑거리며 웃는 폭스를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막 전투를 시작하는 유저들을 비추고 있는 홀로그램을 바라봤다. 내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지루함이 떠올라 있었다.

‘지루하군.’

무투대회가 시작된 지 거의 4시간이 지났다. 대기실에 있는 유저들 또한 절반 이상이 줄어들어 3분의 1정도가 남아 있었다. 말 그대로 진짜 실력자들만 남은 것이다. 거기에는 가장 먼저 시합을 했던 바바리안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해골 따위야 탈락한 지 오래였다. 그나마 베팔과 고추가침퉤퉤만이 남아 있었다.

‘슬슬 내 차례가 됐는데.’

내가 싸운 횟수는 총 2번이었다. 가장 처음 흑마법사 듀오와 한 번, 그리고 그 뒤 전사 클래스인 진검황이라는 투칸족 유저와 또 한 번. 다행히 진검황이 듀오보다 수준이 떨어져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다음 숫자는 31번과 26번입니다! 31번 선수는 홍문으로! 26번 선수는 청문으로 나와주세요!”

스윽.

초선의 말과 동시에 대기실 구석에 있던 31번, 바바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26번이라면 나였다. 망치를 챙기는 바바리안을 보는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길.’

바바리안이라면 상당한 강자다. 물론 평범한 종족에 평범한 직업을 가진 보통 유저인 이상, 나에게 상대가 될 리 만무했지만 상대가 바바리안이라면 충분히 긴장할 만했다.

“다녀오겠다.”

“꼭 이기세요! 하핫.”

자리에서 일어나 살랑거리며 웃는 폭스를 뒤로하고 청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지나 대기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유저들의 환호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우와아아아!”

어느새 경기장 위에 올라선 바바리안이 열기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바바리안의 눈을 피하지 않고 경기장 위로 올라서자 초선이 말을 이었다.

“따로 설명을 필요하지 않으시겠죠? 31번 바바리안 선수와 26번 정체불명의 선수입니다!”

간략하게 나와 바바리안을 설명한 초선이 마이크에 입을 대고 힘차게 외쳤다.

“그럼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꽈앙!

초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자리에서 도약한 바바리안이 나를 향해 몸을 날리며 무차별적으로 은빛 거대한 망치를 휘둘렀다.

후웅. 후웅.

“치잇.”

타닷.

은빛 궤적에서 뿜어져 나오는 커다란 풍압에 가볍게 혀를 차며 발을 놀려 거리를 벌리자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바바리안의 망치가 내리꽂혔다.

꽈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거대한 망치가 반 이상 경기장 바닥에 박혔다.

“끄응!”

푸스스.

한차례 신음을 토한 바바리안이 힘차게 망치를 뽑아 올리자 절대 뽑히지 않을 것 같던 망치가 돌가루를 흩날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스윽.

우우웅.

멍청하게 당할 마음은 없기에 도를 빼어 들어 마나를 불어넣자 핏빛의 기운이 도를 휘감았다. 이내 망치를 들어 자세를 취한 바바리안이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끓어오르는 야생의 힘!”

투둑. 투드득.

바바리안의 외침과 함께 옷 밖으로 드러난 바바리안의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일시적으로 시전자의 근력을 상승시켜주는 주문인 듯, 한 손으로 망치를 번쩍 든 바바리안이 망치를 들지 않은 손으로 작은 손도끼 2개를 꺼내 나를 향해 던지며 괴성과 함께 몸을 날렸다.

“죽어라!”

까가강! 후후웅.

가슴을 노리는 손도끼를 쳐냄과 동시에 재빨리 도면으로 옆구리를 막자 강맹한 풍압이 망치와 함께 도를 때렸다.

꽝!

“크윽.”

찌릿찌릿하게 울리는 통증에 신음을 흘리며 도를 잡지 않은 손을 품속에 넣자 달걀 반 정도 크기의 구슬이 손에 잡혔다.

바로 ‘악몽의 집합체’였다.

“꺼져라!”

빠각.

끼아아악. 푸화아악.

손아귀에 힘을 주자 손아귀 속 구슬이 너무나 손쉽게 반으로 쪼개졌다. 그와 동시에 내 손을 중심으로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보랏빛의 기운이 해일처럼 터져 나와 경기장을 덮쳤다.

“크아악!”

갑작스런 보랏빛 기운에 당황하던 바바리안이 보랏빛 기운이 몸에 닿자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악몽의 집합체를 깨트릴 시 발동되는 이상 현상에 걸린 것인지, 괴성을 지르던 바바리안이 망치를 들고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크으으, 빌어먹을 자식!”

황급히 거리를 벌려 악몽의 집합체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바바리안이 떨리는 손으로 황금색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만능 포션인가?”

“크으윽!”

내 물음에 바바리안이 대답 대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만능 포션.

유치한 이름이지만 그 어떤 이름보다 이 황금색 포션의 효과를 잘 말해주는 이름이다. 마비, 공포, 독, 심지어 석화(石化)나 그 밖의 모든 이상 상태를 회복시켜주는 이 만능 포션은 쓰리 스타 이상의 연금술사들이 만들 수 있는 포션이지만 그 희소성 때문에 개당 500골드 이상의 가격으로 경매가 된다. 더군다나 포션 사용 시, 5분 동안 사용자의 모든 능력을 10% 증가시켜주기에 비싼 가격이 아깝지 않은 포션이었다.

꿀꺽꿀꺽.

“크으으.”

포션을 모두 마신 바바리안이 우렁찬 기합과 동시에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츠핫!”

팟.

멍청하게 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나 또한 도를 치켜세우고 바바리안을 향해 마주 몸을 날렸다.

후우웅. 꽝!

나와 바바리안의 무기가 워낙 커서인지 쇠와 쇠가 부딪쳤는데 마치 폭탄을 터트리는 것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노란 불꽃을 터트리며 내 도와 맞물리는 은빛 망치에 이를 악물고 힘을 가했다.

카가각.

“크윽.”

손목을 울리는 압력에 내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힘든 것은 바바리안 또한 마찬가지인지 망치를 지탱하는 바바리안의 손이 거세게 떨렸다.

“파천기.”

푸화악.

“어헉!”

내 중얼거림과 동시에 도에서 뿜어져 나온 파천기에 망치를 지탱하던 바바리안이 숨을 들이 삼켰다. 갑작스레 뿜어져 나온 파천기에 당황한 듯, 망치를 지탱하는 바바리안의 힘이 약해졌다.

“죽어라!”

“으어억!”

까강!

어느새 반대편 손으로 손도끼를 꺼낸 바바리안이 내 도를 비껴냈다.

“허억?”

예상치 못한 방어에 내 입에선 헛바람이 튀어나왔고 동시에 바바리안의 망치가 은빛 궤적을 그리며 내 가슴을 강타했다.

쿠앙. 우당탕.

“크흑.”

가슴을 때리는 둔중한 충격에 내 몸이 붕 떠올라 허공을 날아 바닥에 처박혔고 차가운 돌바닥을 구르는 내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막 다섯 바퀴째 구르는 순간, 내 몸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자리를 고수했다.

욱씬욱씬.

“크흣.”

가슴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통증에 내 입에서 분노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칼이나 도끼 종류의 무기라면 차라리 갑옷에 막혀 데미지를 주지 못하지만 망치나 철퇴 같은 둔기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갑옷을 부수고 들어오지 못한다고 해도 때리는 면적이 넓기에 상대가 힘만 충분하다면 지금처럼 바닥에 처박히는 것이다.

“죽어라!”

휙휙.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숨을 고른 바바리안이 품속에서 꺼낸 손도끼를 연속으로 던졌다.

까강!

“크읏.”

황급히 도를 들어 도끼를 막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내 가슴을 노린 도끼들이 바닥을 굴렀다.

“으어어어!”

“칫.”

파밧.

바닥을 구르는 도끼를 확인할 틈도 없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바바리안에게 도를 겨누며 마주 몸을 날렸다.

후우웅.

바바리안의 망치가 은빛 궤적을 그리며 현란하게 움직였다. 거대한 크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짜증나는 것은 바로 바바리안의 품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손도끼였다.

스팟. 깡.

“큭.”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여지없이 나타난 3개의 손도끼가 내 목과 양 어깨를 노렸다. 황급히 도를 들어 방어하기는 했지만 그 뒤에 이어진 바바리안의 공격에 황급히 도의 방향을 틀었다.

쩌정! 푹.

“큭.”

쇠가 울리는 소리와 날카로운 무언가가 박히는 소리에 이어 내 입에서 낮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목을 노리는 손도끼를 쳐낼 수 있었지만 어깨를 노린 손도끼는 쳐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어깨로 손도끼를 받아내야 했다. 그나마 한 개는 갑옷에 맞아서 튕겨낼 수 있었다.

‘제길.’

망치보다 오히려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손도끼가 더 부담스러웠다.

“받아랏!”

스팟.

우렁찬 외침과 함께 여지없이 2개의 손도끼가 날아왔다. 그 뒤를 이어 망치를 곧추세운 바바리안이 따라붙었다. 손도끼를 쳐낸다면 그 뒤에 이어질 바바리안의 공격에 당할 것이고, 바바리안의 공격을 대비하면 손도끼에 당할 것이 분명했다.

“크흣.”

타다닥. 까강.

신음을 흘리며 재빨리 몸을 뒤로 날려 거리를 벌리자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손도끼가 박혔다.

쿠웅.

“도망치지 마라!”

내가 피하기만 하는 것이 꽤나 분했는지 망치로 경기장 바닥을 내려 친 바바리안이 노성을 터트렸다.

스윽. 움찔.

바바리안이 품속에 손을 넣음과 동시에 내가 움찔하며 몸을 떨자 바바리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겁쟁이 자식!”

“흥.”

저따위 저급한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지만 짜증나는 것은 짜증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꿈꿔왔던 복수를 코앞에 두고 이따위 경기에 시간을 잡아먹고 있자 내 머리가 분노로 물들었다.

스윽.

“죽여주마.”

스오오오.

도를 들고 자세를 취하자 내 몸을 중심으로 무형의 기운이 서서히 유형화되며 그 기운을 뿌렸다.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나.’

종족이 바뀌며 새롭게 생긴 하나의 스킬이 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크윽.”

순식간에 뒤바뀐 내 기세에 막 손도끼를 던지려던 바바리안이 신음을 삼키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바바리안을 노려보는 내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초감각 개방.”

스윽.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피부 위로 수백 개의 촉수가 돋아난 것과 같은 기묘한 느낌과 함께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바람의 흐름이 느껴졌다.

초감각.

말 그대로 감각을 뛰어넘는 감각으로 과거 수인족이었을 때, 인간 족 유저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던 내 감각이 마족이 되면서 한층 더 진화하며 하나의 스킬로 변한 것이 바로 ‘초감각’이다.

초감각을 시전할 시, 게임 시간으로 24시간 동안 엄청난 감각을 손에 넣는데 그 대신 스킬의 지속 시간이 지난 후에는 하루 동안 보통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감각이 하락하는 단점이 있었다. 본래는 계획이 시작됨과 동시에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변칙적인 공격을 사용하는 바바리안 덕에 더 빨리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초감각을 사용하게 한 빚은 톡톡히 갚아주마.”

“뭐라는 거냐!”

갑작스레 바뀐 내 기세에 눌린 것인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바바리안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

파밧.

따로 대답해주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기에 아무런 말없이 땅을 박차고 바바리안을 향해 몸을 날렸다.

‘느껴진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바람 한 줄기, 한 줄기가 마치 코앞에서 몰아치는 강풍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따끔.

‘코?’

작은 바늘로 콧잔등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황급히 고개를 꺾자 잠시 후, 날카로운 손도끼가 방금 전까지 내 머리가 있던 곳을 휭 지나쳐 경기장 밖에 떨어졌다.

“어, 어떻게!”

자신의 공격을 그저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피한 내 모습이 믿기지 않는지 막 망치를 들고 몸을 날리려던 바바리안이 불신 섞인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역시나 노련한 전사답게 금세 몸을 추스르며 망치를 들고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나 또한 초감각으로 느껴지는 바바리안의 살기를 느끼며 마주 몸을 날렸다.

꽈앙.

망치와 대도의 격돌에 노란 불꽃이 튀어 올라 시야를 어지럽혔다. 다행히 투구를 쓰고 있어 불꽃이 얼굴에 튀는 일은 면했지만 투구를 쓰고 있지 않은 바바리안은 아니었다.

쩌엉!

“헉!”

바로 눈앞에서 튀어 오른 불꽃에 바바리안이 숨을 들이키며 황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덕에 망치를 지탱하는 바바리안의 힘이 느슨하게 풀렸다.

“흡!”

텅!

짤막한 기합과 함께 숨을 멈추며 도를 튕기자 도에 걸쳐 있던 망치가 출렁하고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망치가 자신의 제어를 벗어나자 바바리안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어렸다. 허공으로 튕긴 망치를 제어하기 위해 허공을 향해 양손을 치켜든 바바리안의 옆구리가 훤히 보이며 빈틈을 드러냈다.

“하압.”

후우웅.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허공을 가른 도가 바바리안의 옆구리에 박혔다.

까가강.

바바리안이 입고 있는 판금갑옷 덕에 갑옷을 가르지는 못했지만 갑옷 위를 때린 것만으로도 꽤나 타격을 입었는지 바바리안의 입에서 한 움큼 피가 쏟아져 나왔다.

“크흑.”

부르르 떠는 망치와 함께 거리를 벌린 바바리안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소리쳤다.

“네놈, 마족이었구나!”

내가 마족이라는 확신을 담은 바바리안의 말에 관객석이 술렁였다.

‘대체 어떻게… 아!’

방금 내 도가 바바리안의 갑옷을 때릴 때 도를 휘감고 있던 마기가 흘러나와 바바리안의 갑옷 속으로 스며들었는데, 아마 바바리안이 피를 토한 이유가 스며든 마기 때문인 듯했다.

‘쓸 만하군.’

마기가 가지고 있는 의외의 효능에 미소를 흘리자 바바리안이 자신을 비웃는 것인 줄 알았는지 얼굴을 붉혔다.

뿌드득.

“죽여주마!”

서늘하게 이를 갈며 외친 바바리안이 가슴팍까지 망치를 들고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대초원을 질주하는 초원의 왕자여, 가로막는 존재를 발굽 아래 두는 그대의 권능을 몸에 내려주소서! 버팔로 혼!”

음무우우우! 음무우우!

바바리안의 주문과 함께 경기장 여기저기에 우렁찬 소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맹한 기운을 담고 있는 울음소리에 초감각으로 활성화된 피부가 연신 따끔거리며 경고를 울렸다.

슈우우우.

이내 소 울음소리의 근원으로 보이는 새하얀 무언가가 바바리안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훅훅.

“크으으!”

스며드는 연기의 양이 늘어남에 따라 바바리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바바리안의 눈이 붉게 물들었고 입에서는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와 경기장을 메웠다.

“후욱, 후욱!”

“야수화?”

어떻게 본다면 수인족들이 사용하는 야수화와 같은 바바리안의 모습에 내 입에서 의문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애초에 태어남과 동시에 야수화라는 권능을 받고 그 권능을 사용하면 외양마저 바뀌는 수인족과는 달리 바바리안이 사용하는 것은 동물의 영혼을 몸속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힘을 일정 시간 동안 증가시키는 스킬이었다.

더군다나 겉모습이 바뀌는 야수화와는 다르게 바바리안은 눈이 붉어졌을 뿐, 겉모습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후욱후욱.

“음무우우우!”

마침내 변화를 마친 바바리안이 거친 숨과 함께 우렁찬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미노타우로스의 그것과 같은 울음소리였지만 울음소리 속에 담긴 기운은 감히 미노타우로스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강맹했다.

울음소리를 정면으로 받은 내가 가슴이 답답할 정도였다.

“으음.”

따끔거리던 통증이 이제는 찌릿하게 변해 온몸을 휩쓸었다.

“죽…여…주마! 음무우우!”

콰앙.

쩌저적.

나를 향해 살기 가득한 외침을 토해낸 바바리안이 망치의 손잡이 부분으로 바닥을 내려찍자 경기장 바닥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부서졌다. 전보다 거의 2배 가까이 늘어난 파괴력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선수필승이다!’

파밧.

굳은 얼굴로 도를 고쳐 잡음과 동시에 몸을 날리자 바바리안 또한 괴성을 지르며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흐아압!”

“음무우우!”

쩌정!

힘찬 기합의 뒤를 따라 날카로운 금속음이 고막을 때렸다. 방금 전의 격돌보다 몇 배는 더 날카로운 금속음에 내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카가각.

허공의 정중앙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대도와 망치를 노려보는 내 눈이 번뜩였다.

“흐읍.”

쩡. 핑그르르.

숨을 들이쉬며 도의 손잡이를 떼고 힘차게 돌리자 바바리안의 망치를 버팀목 삼아 내 도가 핑그르르 회전했다.

“음무우?”

졸지에 힘을 뿜어대던 곳을 잃은 바바리안이 당황 섞인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덥썩.

“죽엇!”

바바리안의 망치를 타고 한 바퀴 회전한 도의 손잡이를 낚아채며 어깨 갑옷의 틈새로 도를 박아 넣었다.

푸욱. 카드득.

“음무우우우!”

어깨 근육을 가르고 뼈를 건드렸는지 도의 끝으로 딱딱한 촉감이 느껴졌다. 이내 중심을 잡기 위해 비틀거리던 바바리안이 고통 섞인 비명을 지르며 무차별적으로 손에 들린 망치를 휘둘렀다.

후웅후웅.

“음무우! 음무! 무무!”

섬뜩한 파공음에 재빨리 도를 빼내고 뒤로 몸을 날리자 졸지에 목표를 잃은 바바리안이 인간의 비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기괴한 비명을 토해냈다. 이제는 손도끼를 날릴 생각도 못하는 건지 한참을 비명을 질러대던 바바리안이 망치를 곧추세우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두두두두.

“음무우우!”

망치를 뿔로 돌진하는 바바리안의 뒤를 따라 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죽여주마!’

고오오오.

거리를 좁히는 바바리안을 보는 내 눈이 싸늘한 기운을 품었다. 내 도 또한 차가운 마기를 품고 그 예리함을 더했다.

펄럭펄럭.

내 몸을 휘감은 학살자의 망토에 마기를 흘려보내자 망토가 마구 펄럭였다.

투두두두.

“음무, 무우!”

어느새 몇 미터 앞까지 다가온 바바리안의 망치가 내 가슴뼈를 그대로 부수려는 듯이 빛을 발했다. 초감각에 느껴진 바바리안의 살기 덕에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투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진동에 내 몸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음무우우!”

‘지금이다!’

마침내 바바리안의 망치가 가슴팍까지 다가온 순간 오른발을 왼발의 뒤로 뺌과 동시에 왼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돌리자 간발의 차로 바바리안의 망치가 옆구리를 스치고 펄럭이는 망토에 꽂혔다.

“음무! 음무?”

내 몸을 가리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는 학살자의 망토가 망치와 함께 바바리안의 상체를 덮었다. 갑작스레 어두워진 시야 때문인지 망토 속, 바바리안의 입에서 당황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죽어라!”

푸욱. 카드득.

도를 든 손을 하늘로 힘껏 치켜든 뒤 움찔거리는 망토를 목표로 있는 힘껏 찌르자 내 도가 망토를 파고들어 바바리안의 갑옷에 박혔다.

“음무우?”

카득. 카드득.

다른 부위였다면 튕겨나가거나 미끄러졌겠지만 도가 박힌 곳이 평평한 등 부분이었기에 도가 무리 없이 갑옷을 파고들었다.

“끄응!”

쩌엉.

한차례 신음을 흘리며 힘을 더하자 쇠가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갑옷에 가로막혀 더 이상 파고들지 못한 도가 쑤욱 파고들었다.

콰드득.

“음무우우우!”

쪼개진 갑옷의 틈새로 파고든 도가 등을 가르고 척추를 으스러트렸다. 도 끝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촉감에, 있는 힘껏 도를 밀어 넣자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망토 속, 바바리안의 신형이 바닥으로 꺼졌다.

“으어어…….”

강한 충격으로 스킬이 강제로 깨어진 것인지 망토 속 바바리안의 신음은 이제까지 들었던 소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그것이었다.

쑤욱.

거친 손놀림으로 도를 뽑자 질퍽한 피가 따라 올라와 망토를 적셨다. 이내 바바리안의 몸을 덮은 망토를 걷자 처참한 꼴로 바닥을 구르는 바바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으, 으으…….”

아무렇게나 바닥을 구르는 은빛 망치의 옆에서 연신 신음을 흘리던 바바리안이 다시금 도를 들어올리는 내 모습에 힘겹게 입을 열었다.

“비, 빌어먹을…….”

똑똑.

도신을 타고 흘러내린 붉은 피가 절망으로 물든 바바리안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잘 가라.”

푸욱.

“커억!”

도를 들어 턱 바로 밑의 빈 공간에 쑤셔 박자, 바바리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부르르르.

한차례 몸을 떤 바바리안의 몸이 천천히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스, 승자는 26번 선수입니다!”

“우와아아아!”

뒤늦게 초연이 내 승리를 알리자 관객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귓가를 때리는 환호를 뒤로하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자 전보다 싸늘해진 분위기가 나를 반겼다.

전에는 그저 그런 놈으로 나를 보던 유저들의 눈이 내가 바바리안을 처리함으로써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광전사라 불리던 바바리안이라면 이번 무투대회의 유력한 우승 후보. 그런 바바리안을 꺾은 나였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크큭.”

고요하게 내려앉은 대기실을 향해 조소를 흘리며 내 자리로 돌아가 앉자 폭스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우와, 바바리안이라면 그래도 랭킹 50위 안에 드는 유저인데 용케 이기셨네요?”

“그래.”

“그건 그렇고, 중간에 뭐라고 중얼거리셨는데 대체 뭐라고 하신 거예요?”

이어지는 폭스의 물음에 내 얼굴이 짜증으로 물들었다.

“폭스 바보라고 했다.”

“네, 넷?”

툭 내뱉은 내 말에 폭스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것도 잠시, 곧 폭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못 본 사이에 유머가 참 많이 느셨네요.”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초감각을 시전하기 전에는 몰랐지만 초감각을 시전한 뒤 폭스에게서 느껴지는 꺼림칙한 기운 때문에 얼굴 위로 떠오른 짜증이 짙어졌다. 살기라고는 볼 수 없지만 미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기운이었기에 짜증이 더했다.

“그런데 카나리아 님은…….”

“이번 숫자는 4번과 12번입니다! 4번 선수는 홍문으로! 12번 선수는 청문으로 나와주세요!”

폭스의 말을 끊고 초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놈 차례군.”

4번이라면 폭스의 번호였다. 내 말에 폭스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끝내고 오겠습니다. 하핫.”

가볍게 웃은 폭스가 경쾌한 걸음으로 홍문을 나섰다.

‘12번은…….’

“으음.”

폭스의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청문을 향한 내 입에서 묘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베팔인가.’

12번 선수는 바로 베팔이었다.

염환에게 죽임을 당하고 나에게도 몇 번을 죽었지만 한때 포 스타라는 경지까지 올라갔던, 바다의 마도사라는 이름으로 공포로 군림하던 유저였다. 더군다나 베팔이 사용하는 마법의 계열은 수빙(水氷)계.

방어와 공격의 비율이 적절하게 섞인 수빙계 마법의 특성 상, 근접전을 하는 폭스에게 있어서는 그만큼 불리할 것이 분명했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

개인적으로 폭스와 승부를 내고 싶지만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베팔이 이겨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베팔이야 몇 번을 죽인 경험이 있으니 손쉽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폭스나 베팔이나 뛰어난 강자. 홀로그램을 보는 내 눈에 기대감이 어렸다.

“우와아아아!”

폭스와 베팔이 경기장 위로 올라서자 관객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곧 환호를 내지르던 관객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베팔의 행동 때문이었다. 폭스를 본체만체한 베팔이 초선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말하자 초선이 당황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12번 선수인 베팔 님께서 기권을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승부의 우승자는 4번 선수인 폭스 님입니다!”

초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관객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에이, 뭐야…….”

“재미있는 거 구경해보나 싶었는데. 쩝.”

대기실에 있는 몇 명의 유저들 또한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가장 당황한 것은 나였다.

‘대체 왜?’

어느 모로 보나 베팔이 기권을 할 이유는 없었다. 베팔이 기권을 했다면 이유는 단 하나, 드래곤 클럽의 개입이었다.

“빌어먹을 새끼……!”

홀로그램 속 폭스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리자 대기실의 유저들이 힐끔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상관없다!’

확실치 않은 사실에 떨 필요는 없다.

‘최선을 다한다!’

이미 작전은 완성되었고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싸늘한 안광을 내뿜는 내 시선이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폭스를 향했다.

“하핫, 이거 운이 좋았네요.”

대기실에 들어서며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폭스가 볼을 긁적이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하마터면 바다의 마도사와 싸울 뻔했네요.”

“놈의 왜 기권했는지 알고 있나?”

싸늘한 내 물음에 잠시 흠칫한 폭스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글쎄요, 관절염이라도 도지셨나 보죠, 뭐. 하핫.”

딴에는 유머라고 했지만 싸늘하게 내려앉은 대기실에서 누군가 웃을 리가 없었다.

피식.

“정말 그랬나보군.”

홀로그램 속, 무릎을 두드리며 한쪽으로 사라지는 베팔을 노려보는 내 눈이 차갑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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