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3 무투대회 2 (30/34)

챕터3 무투대회 2

고오오오.

홀로그램 속, 거대한 석룡(石龍)의 울부짖음에 대기실이 웅웅 울렸다. 굵기는 장정 세 명이 손을 맞잡아야 할 정도에다 길이만 해도 5m에 가까운 거대한 몸집의 석룡이 묵직한 포효를 터트리며 눈앞의 적을 향해 쇄도했다.

크르르륵.

돌로 이루어진 석룡의 배가 경기장과 부대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무서운 기세로 쇄도하는 석룡에 반대편에서 창을 쥔 전사가 눈을 빛냈다.

우우우웅.

붉은 일색을 가진 전사의 창이 어마어마한 적광을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전사의 몸이 한 줄기 화살이 되어 석룡을 향해 쏘아졌다.

“섭리를 관통하는 죽음의 창!”

콰아아.

붉은 창을 든 전사의 몸이 한 마리 적룡(赤龍)으로 변했다.

석룡이 내뿜는 기운이 무엇이든 부술 것 같은 기운이라면 적룡이 내뿜는 기운은 무엇이든 뚫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기운이었다.

‘과연……!’

홀로그램을 바라보는 내 얼굴 또한 대기실의 다른 유저들과 마찬가지로 긴장으로 물들었다.

“크오오오!”

“카우우우!”

꽈아앙.

마침내 석룡과 적룡이 포효를 터트리며 부딪쳤다. 동시에 터져 나온 커다란 충격파에 경기장이 으스스 떨었다. 이내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가 걷히면서 처참한 모습의 석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쩌적.

붉은 창이 박힌 석룡의 이마 부분에서부터 시작한 금이 점차 그 크기를 넓혀가더니 곧 석룡의 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과연 드래곤 스피어라 불리는 란돌 님이시네요!”

진정 감탄했다는 듯이 말하는 폭스와는 달리 붉은 창의 주인, 란돌을 바라보는 내 입에서 조소가 흘러나왔다.

“멍청한 놈.”

“예?”

싸늘한 내 말에 폭스가 막 반문을 하려는 순간, 무너진 석룡의 뒤에서 검은 인영이 번개 같이 몸을 날렸다.

“하앗.”

푹.

인영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단검이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란돌의 팔을 긁었고 창대를 잡고 있던 란돌의 팔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아악!”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거대한 창을 다루기에는 확실히 힘들어 보이는 상처였다.

“제길.”

욕설을 내뱉은 란돌이 황급히 포션을 꺼내 상처에 쏟아 부었다. 그런 란돌의 행동에 단검을 휘두른 검은 인영이 낮은 괴소를 흘렸다.

“키키킥.”

흡사 아프리타 원주민들이나 입을 법한 옷과 끝에 해골이 달린 나무 지팡이 그리고 동물의 뼈를 치렁치렁 매단 인영의 모습은 어느 모로 보나 음침한 주술사를 연상케 했다. 더군다나 검은 장발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어 한층 더 음산한 분위기를 흘렸다.

이제 막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인영의 이름은 바바룽가로 정식 랭킹에는 들지 못하지만 주술사 중에서는 꽤나 악명이 자자한 유저였다.

“뭘 웃는 거냐!”

괴소를 흘리는 바바룽가를 향해 란돌이 호통을 내지르며 창을 들어올렸다. 아니, 막 들어올리려고 했다.

철커덩.

란돌의 붉은색 장창이 힘없이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이, 이게 대체……?”

부들부들.

방금 바바룽가의 단검에 찔렸던 팔이 마치 심한 멍이라도 든 것처럼 시퍼렇게 되어서 거세게 떨렸고, 당황스러운 얼굴로 팔을 바라보는 란돌을 향해 바바룽가가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키키키. 체력 회복 포션으로 주술사가 만든 독을 해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멍청한 전사 자식아. 키키.”

“으어어어!”

바바룽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란돌의 오른팔이 저절로 움직였다.

“키키, 꼭두각시 독이라고 들어봤냐?”

“으아아악!”

란돌이 멀쩡한 왼팔로 제멋대로 움직이는 오른팔을 제지하려 했지만 무리였다. 오히려 란돌 자신만 아플 뿐이었다.

“주, 죽여 버리겠다!”

서서히 목을 향해 다가오는 오른팔을 보고 란돌이 왼팔로 창을 들어 바바룽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위태위태한 모습이었지만 드래곤 스피어라는 별명답게 창을 들자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창을 든 순간뿐이었다.

“멍청한 자식!”

“뭐… 으헉!”

날카로운 기운을 뿌리며 바바룽가를 향해 달려가던 란돌이 기겁을 했다. 목을 조이던 오른팔이 방향을 바꿔 자신의 뒷머리를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중심을 잡지 못한 란돌의 몸이 꼴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우당탕.

“크윽.”

란돌의 입에서 저절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키키키, 이제 그만 죽어라.”

달그닥. 달그닥.

스스슥.

바바룽가가 지팡이를 들어 한바탕 흔들자 지팡이 끝에 달린 해골에서 녹색 기운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란돌의 오른팔이 빠른 속도로 목을 졸랐다.

“커억, 컥.”

졸지에 자신의 손에 목을 졸린 란돌의 입에서 거친 기침이 튀어나왔다. 자신의 손으로 목을 조르는 란돌의 기괴한 모습에 관객석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대기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몇 분 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던 란돌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커윽, 하, 항복! 항복! 크윽!”

“키키키, 좋아.”

란돌의 항복에 바바룽가가 지팡이를 흔들자 스스로 목을 조르던 란돌의 손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허억, 허억.”

아직도 독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시퍼렇게 변한 오른팔을 주무르는 란돌의 입에서 거친 숨결이 터져 나왔다.

“60번 란돌 선수가 항복하셨습니다! 승자는 2번 바바룽가 선수입니다!”

“우와아아아!”

초선의 말과 함께 관객석에서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뿌드득. 빌어먹을!”

꼭두각시 독에서 벗어난 란돌이 바바룽가를 보며 이를 갈았지만 그것뿐이었다. 이내 장창을 집어 들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경기장 위에서 환호를 받던 바바룽가 또한 몸을 돌려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키키키, 이 몸의 실력이 어떤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바룽가의 입에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대기실을 울렸다. 그 순간 대기실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고추가침퉤퉤가 입을 열었다.

“쓰레기가 말이 많군.”

“뭐, 뭐얏?”

고추가침퉤퉤의 말에 바바룽가가 얼굴을 붉혔지만 그것뿐이었다.

비록 나에게 몇 번을 죽어 약하다고 느껴지기는 하지만 고추가침퉤퉤는 검은 사자 길드의 간부였다. 또한 검은 사자 길드라는 배경을 떠나서도 고추가침퉤퉤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자였다. 주술사라는 직업을 가진 바바룽가가 상대하기에는 언령사라는 스페셜 직업을 가진 고추가침퉤퉤는 너무 거대했다.

현재 대기실에 남은 인원은 대강 10명 남짓이었다.

나와 폭스, 고추가침퉤퉤와 바바룽가를 비롯해 5명 정도가 더 있었는데 하나 같이 서로 견제하며 날카로운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나 또한 바바리안을 꺾고 그 뒤로 허마귀라는 드워프 유저를 꺾고 나서야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이제 겨우 숨통이 트이네요, 하핫.”

한산하게 비어 있는 대기실을 둘러본 폭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폭스를 무시한 내 시선이 홀로그램 속 초선을 향했다. 내 차례가 거의 다 왔기 때문이었다. 내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초선의 목소리가 대기실을 울렸다.

“이번은 26번 선수와 4번 선수입니다! 26번 선수는 홍문으로! 4번 선수는 청문으로 나와주세요!”

“…….”

“…….”

막 나를 향해 말을 걸려던 폭스는 물론이고, 홀로그램 속 초선을 주시하던 내 얼굴 또한 멍하게 풀렸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폭스의 얼굴 위로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윽.

“먼저 기다리겠습니다. 하핫.”

언제나 지어 보이던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린 폭스가 슬쩍 일어나 청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폭스의 등을 바라보는 내 눈에서 싸늘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폭스와는 저번 마법사의 탑 이후로 한 번도 싸워보지 않았다.

그저 실력을 가늠해보고 상상 속에서만 싸워봤을 뿐이다. 오늘 무투대회 전까지만 해도 폭스가 내 상대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투대회를 하면서 느낀 폭스의 실력은 결코 내 아래가 아니다.

스페셜 직업인 섀도우 어쌔신과 일류무공 삼무보의 만남은 지금의 폭스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무섭거나 긴장되지는 않았다. 그저 뜨거운 흥분이 내 몸을 지배할 뿐이었다.

“크크큭.”

몸속에서 점차 크기를 불려나가는 흥분감에 내 입에서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등에 걸린 도를 꺼내 들고는 청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끼익.

문이 열리는 마찰음과 함께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경기장이 나를 반겼다.

“우와아아아!”

“이겨라!”

엄청난 크기의 환호가 하나로 섞여 경기장을 울렸다.

걸음을 옮겨 경기장 위로 올라서자 먼저 경기장 위에 올라와 있던 폭스가 눈웃음을 지었다.

“규칙은 말 안 해도 알고 계시지요?”

초선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폭스 또한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나와 폭스를 번갈아 본 초선이 마이크에 입을 대고 힘차게 외쳤다.

“그럼 경기 시작하겠습……!”

“악왕의 기운! 죽어랏!”

꽈앙.

초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짙은 마기에 휘감긴 내 몸이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후우웅.

순식간에 경기장 끝에서 경기장 끝까지 이동한 내 몸이 마기로 이루어진 검은 궤적을 그렸다. 그와 동시에 내 손에 들린 도가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폭스의 허리를 노렸다.

“어이쿠!”

사락.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폭스의 머리칼이 흩날리는가 싶더니 곧 폭스의 신형이 방금까지 내가 있던 곳에 나타났다.

후웅. 콰르릉.

도에서 뿜어져 나온 도기가 애꿎은 경기장 바닥을 때리자 굉음과 함께 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설마 시작하자마자 제 다리를 자르려고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핫.”

살짝 굳은 얼굴인 폭스가 과장된 움직임으로 약간의 먼지가 묻은 자신의 다리를 털었다. 평소 같았으면 비아냥거리는 거리는 폭스의 태도에 화를 냈겠지만, 방금 폭스의 움직임을 몸으로 직접 체험한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삼무보냐……!”

방금 폭스의 움직임은 그저 빠른 것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하핫, 무인벽(無人壁)이라는 초식입니다. 저는 공격 무공에만 초식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검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은 폭스가 말을 이었다.

“그 다음은 초풍시(超風矢)입니다. 하…핫!”

쒜에엑.

마지막 웃음소리와 함께 거대한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폭스가 내 등 뒤를 점한 후였다.

‘어떻게……!’

초감각으로도 느끼지 못할 엄청난 빠르기였다. 내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꾸욱.

“빠르죠?”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을 내 목에 가져다 댄 폭스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곧 폭스의 태도에 멍하게 풀렸던 내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자식이!”

후우웅. 서걱.

몸을 숙임과 동시에 비틀며 손에 들린 도를 횡으로 긋자 마기와 도기가 어우러진 도가 애꿎은 폭스의 몸을 갈랐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손맛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허상?’

스르륵.

내 의문과 동시에 반으로 갈라진 폭스의 신형이 그대로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극쾌의 빠르기만이 만들 수 있다는 허상이었다.

“하핫, 그러고 계시니까 꼭 거미줄에 걸린 나방 같네요.”

“뿌드득.”

‘거미줄에 걸린 나방? 거미줄…? 아!’

허둥대는 나를 향해 폭스의 조롱이 이어졌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폭스의 말을 되씹는 내 머릿속에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스윽.

“뭐 하세요?”

가슴팍까지 도를 들어올리는 내 모습에 막 몸을 날리려던 폭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

대답해줄 마음 따위는 없었기에 폭스의 물음을 무시하고 천천히 마기를 끌어올리자 곧 도를 중심으로 마기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고오오오.

“어라?”

점차 그 크기를 불려가는 마기에 폭스 또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무언가를 막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내 도를 중심으로 모인 마기가 사방으로 퍼져 경기장을 메웠다.

“이게… 뭐죠?”

경기장을 가득 메운 마기에 폭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기와 접촉한 뒤부터 급속도로 체력이 떨어지기에 힘이 들만도 하건만 폭스의 목소리에서 그런 기색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 또한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파밧. 후우웅.

땅을 박차고 튀어 올라 폭스를 향해 도를 휘두르자 폭스의 신형이 다시 사라졌다. 도기를 머금은 도가 애꿎은 경기장을 때리려는 순간, 내 손목이 다른 방향으로 비틀렸다. 바로 경기장 위를 메운 마기를 가르는 움직임이 멈춘 지점이었다.

스팟. 펄럭.

재빨리 날린 도기가 폭스의 옆구리를 베었다.

“어떻게……?”

꽤나 당황했는지 표정 관리도 하지 못한 폭스가 미약하게 피가 흘러나오는 옆구리를 잡고 입을 열었다. 그런 폭스를 보는 내 입에서 차가운 조소가 터져 나왔다.

“잘.”

경기장 위로 퍼진 마기는 내 몸의 일부분과 마찬가지다.

물론 뿜었던 마기를 다시 흡수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가 마기를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하면 내 몸으로 바로 신호가 오도록 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초감각과 같다고 할 수 있는데 초감각에 비해 이 기술은 마기의 소모가 극심한 기술이다.

내가 내뿜은 마기는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마치 촉수와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내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마기를 가르고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마기는 무언가가 조금이라면 움직이면 나에게 신호를 준다. 경기장 위처럼 한정된 공간에서는 초감각보다 유용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내 피가 흐르는 옆구리에 회복 포션을 쏟아 부은 폭스가 손에 묻은 피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흥분되는데요?”

흠칫.

동시에 몸 위로 수백 마리의 독사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에 도를 든 내 몸이 절로 움찔했다.

스르르륵.

폭스가 몸을 흔들면 흔들수록 폭스의 잔영이 점차 늘어났다. 끈적끈적한 기운을 흘리는 폭스의 손에는 어느새 그림자로 이루어진 단검 두 자루가 날카로운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스르르륵.

흔들거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폭스의 몸이 바닥에서부터 솟구쳐온 그림자에 먹혀들었다. 공격력과 동시에 방어의 기능까지 가진 섀도우 아머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림자에 잠식당한 폭스의 눈이 곡선을 그리며 새하얀 빛을 뿜었다.

스윽.

날카로운 웃음과 함께 폭스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쑥 꺼졌다.

아니, 너무 빨라 보이지 않은 것이다. 폭스의 신형을 찾는 내 배가 돌연 바늘에 찔린 것마냥 따끔거렸다. 초감각에 걸린 폭스의 살기였다. 그 뒤를 이어 마기를 가르고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쏘아졌다.

“치잇!”

까강.

황급히 도를 휘두르자 막 내 배를 꿰뚫으려던 검은 단검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소리 없이 내 앞에서 나타난 폭스가 날카로운 기합을 지르며 한쪽밖에 남지 않은 그림자 단검을 휘둘렀다.

“죽으세요!”

사악.

바바리안의 묵직한 파공음과는 정반대로 거의 무음에 가까운 파공음.

내 투구까지 다가온 그림자 단검이 빛을 뿌렸다.

서겅.

“크앗.”

황급히 고개를 뒤로 뺐기에 얼굴이 잘리는 것은 면할 수 있었지만 그 덕에 투구가 반으로 쪼개져야 했다.

덜그텅.

예리하게 잘린 투구가 맥없이 바닥을 굴렀다. 투구 속에 뭉쳐 있던 내 핏빛 백발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와 망토 위를 덮쳤다.

“하핫, 이제 좀 시원하신가요?”

어느새 거리를 벌린 폭스가 손에 들린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여유롭게 웃었다. 아마 일부러 투구를 가른 듯했다.

뿌드득.

“빌어먹을 자식!”

여유만만한 폭스의 모습에 내 입에서 서늘하게 이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상관없었다. 다만 폭스의 저 여유로운 행동이 열 받을 뿐이었다.

“개자식, 죽여주마!”

우우우웅.

내 분노에 맞춰 내 온몸에서 섭혼기와 마기가 뿜어져 나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경기장을 메우고 있던 반투명한 마기는 이제 눈에 보일 정도로 짙어졌다. 바바리안에게 사용한 악몽의 집합체와는 질적으로 다른 섭혼기의 기운에 폭스가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이내 막 폭스를 향해 몸을 날리려는 내 귓가로 유저들의 목소리가 꽂혔다.

“블러드다!”

“현상금 걸린 유저 말이야?”

“야수왕이다!”

한 유저의 외침을 시작으로 관객석이 급속도로 소란스러워졌다.

유저들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관객석을 훑은 폭스가 유쾌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인가 많으시네요, 하핫.”

“닥쳐!”

파밧.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도약한 내 몸이 날카로운 검이 되어 폭스를 향했다. 하늘로 힘껏 치켜든 도가 막 폭스의 정수리를 쪼개려는 순간, 살랑거리는 웃음을 흘리던 폭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

팟.

순식간에 눈앞에서 모습을 감춘 폭스의 행방에 내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그것도 잠시, 내 발 밑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살기에 몸을 날리려는 찰나, 내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폭스가 씨익 웃으며 손에 들린 단검을 비틀었다.

푸욱.

까드득.

“크악!”

각반의 틈새를 뚫고 들어와 무릎 뼈를 헤집는 검의 차가운 감촉과, 귓가를 때리는 폭스의 웃음소리에 내 입에서 고통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윽, 이 빌어먹을 새끼가……!”

당장에 폭스에게 달려들어 목을 날려버리고 싶어도 무릎에 박힌 단검 때문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내가 움직이지 못한 틈을 기회로 생각한 것인지 다시 그림자 단검을 생성한 폭스가 나를 향해 쇄도했다.

“죽어라, 빌어먹을 자식아!”

후우웅. 꽈가강!

무서운 속도로 쇄도하는 폭스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도기를 난사하자 폭스의 움직임이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이내 새하얀 이가 보이도록 웃은 폭스가 단검을 갈무리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

팟.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폭스의 신형이 푹 꺼지듯 사라졌다. 빠르게 움직인 것이라면 마기의 흐름이 변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런 움직임이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다. 폭스의 행방을 찾기 위해 막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다시금 다리 밑에서 찌릿한 살기가 느껴졌다.

“거기냐!”

깡.

도를 거꾸로 쥔 채 그대로 내 그림자를 향해 내려찍자, 막 내 그림자에서 나오던 단검이 도에 막혀 요란스러운 금속음을 토했다.

“키하핫!”

단검과 함께 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던 폭스가 기묘한 웃음을 토해내며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울렁울렁.

이내 경기장 한가운데 커다란 그림자가 생기는가 싶더니 쑤욱 하고 폭스를 뱉어냈다. 기습이 실패해서 열 받을 만도 하건만, 폭스의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걸려 있었다.

“하하핫, 역시 블러드 님이시네요. 설마 섀도우 점핑마저 막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요? 하핫.”

내 도와 격돌해 반으로 부러진 단검을 쓰다듬으며 지껄이는 폭스를 바라보는 내 입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뿌드득.

‘빌어먹을 자식!’

폭스가 말한 섀도우 점핑이라는 스킬은 아마 자신의 그림자에서 상대방의 그림자로 이동하는 스킬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사라진 폭스가 내 그림자에서 튀어나올 이유가 없었다.

“이미 눈치 채신 것 같으니 더 이상 섀도우 점핑은 무리겠네요.”

쨍강.

진정으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폭스가 반으로 쪼개진 그림자 단검을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바닥에 떨어진 그림자 단검이 스르륵 움직여 다시 폭스의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폭스의 말대로 처음이면 몰라도 더 이상 섀도우 점핑에 당할 정도로 난 멍청하지 않았다. 처음이야 당황해서 당한 것이지만 내 초감각이 있는 이상, 두 번째부터는 섀도우 점핑으로 나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것은 무리였다. 폭스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다시금 그림자 단검을 만들어 자세를 취했다.

콰드득. 콰득.

“크하악.”

무릎에 박힌 단검을 뽑아내자 벌어진 상처에서 마족 특유의 검은 피가 ‘푸확’ 하고 뿜어져 나와 경기장을 적셨다.

“크윽!”

마족 특유의 뛰어난 회복력 때문에 순식간에 피가 멎기는 했지만 내부의 상처마저 아문 것은 아니여서 빠르게 움직이기에는 무리였다.

‘제기랄.’

폭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나 또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리 부상은 최악의 경우였다.

사사삭.

온몸을 섀도우 아머로 도배한 폭스가 발을 놀려 거리를 좁혔다. 마기를 가르며 몸을 움직이던 폭스의 신형이 어느 순간 쭈욱 늘어났다.

‘치잇, 삼무보인가!’

스팟. 까강.

길게 늘어난 폭스의 신형이 코앞까지 다가왔다고 느껴진 순간 재빨리 도를 휘두르자 날카로운 소리와 동시에 노란 불꽃이 튀겼다. 그와 동시에 끝이라고 생각했던 폭스의 공격이 이어졌다.

사사삭. 까가강! 쩌정!

폭스의 손이 한 번 움직이는가 싶으면 몇 번의 금속음과 함께 노란 불꽃이 튀어 올랐다. 반격은커녕 도면으로 방어를 하며 뒷걸음질 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쌔신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사와 싸우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 정도였다.

까가강.

“크읏.”

눈앞에서 번쩍이는 불꽃에 반사적으로 눈이 감긴 순간, 나를 몰아붙이던 폭스의 입에서 낭랑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하늘에 떠오른 죽음의 북두칠성! 데스 스타! 하늘에 떠오른 죽음의 북두칠성! 데스 스타!”

쐐애애액.

이중으로 겹쳐진 주문에 폭스의 양손에 들린 단검이 검은빛을 내뿜었다.

‘빌어먹을!’

초감각이나 마기에 의존하지 않아도 저 두 자루 단검에 실린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콰가가가.

폭스와 내 주변의 마기가 두 자루 단검이 만드는 폭풍에 말려들어 허무하게 사라졌다.

“죽엇!”

표독스러운 폭스의 외침과 함께 두 자루 단검에서 검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도면을 때리는 엄청난 통증!

쩌저저저저정정!

“크으윽.”

총 일곱 번의 번쩍임과 일곱 번의 통증이 이어졌다. 마기를 일으켜 가까스로 방어를 하고 있는 내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삐져나왔다.

쩡강.

폭스의 그림자 단검이 데스 스타를 하면서 받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졌다.

‘끝이… 아니다!’

데스 스타 스킬은 총 두 번 발동되었다. 오른손으로 한 번, 왼손으로 한 번. 오른손에 들린 단검이 깨졌으니 남은 것은 왼손이었다.

꾸욱.

곧 이어질 두 번째 데스 스타를 대비해 어금니를 깨물며 도를 곧추세우며 마기를 내뿜자 두 번째 데스 스타가 도를 강타했다.

쩌저저저저정정!

총 일곱 번의 번쩍임과 동시에 도를 지탱하는 내 몸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째쟁.

조각조각 나뉘어 바닥을 구르는 나머지 단검에 막 숨을 돌리는 순간, 끝이라고 생각했던 폭스의 공격이 다시 이어졌다. 폭스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만들어진 작은 낫이 들려 있었다.

“목을 거두는 잔혹한 추수자, 그림 리퍼!”

폭스의 뒤로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채 낫을 들고 있는 해골의 모습이 번뜩 비치며 두려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쓰아아앙.

방금 전에 시전한 데스 스타가 무엇이든 부숴버릴 듯한 웅장한 기세였다면 이번에 시전된 그림 리퍼는 무엇이든 가를 듯한 날카로운 기세였다.

쓰아아앙.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폭스의 낫이 내 목을 향해 쇄도했다. 데스 스타 때와 마찬 가지로 주변의 마기가 낫이 만들어낸 폭풍에 휘말려 허무하게 사라졌다. 마침내 그림자의 낫과 내 도가 부딪치는 순간, 엄청난 폭음이 경기장을 휩쓸었다.

콰아아앙!

“크윽.”

“컥.”

폭스의 내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쩌저정.

낫과 부딪친 내 도가 쇳소리를 터트리며 마구 떨었다. 신 급 아이템인 천살멸혼도가 몸을 떨 정도의 엄청난 충격에 내 입에서 ‘울컥’ 하고 핏물이 흘러나왔다. 폭스라고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쿨럭.”

쩌저적.

폭스가 한 움큼 검은색 죽은 피를 토해내자 그림자 낫의 표면 위로 새하얀 금이 파도를 타듯 퍼져 나갔다.

쩡.

끼아아악.

그림자 낫이 반으로 부러지자 폭스의 뒤에서 낫을 치켜들고 있던 해골이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한 줌 연기로 흩어졌다. 졸지에 무기를 잃은 폭스가 울컥 검은 피를 게워내며 비틀거렸다.

우우웅.

도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하는 마기에 폭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폭스: 브, 블러드 님! 잠시만요! 할 말이 있습니다!]

“개소리 마라!”

서걱. 푸화악.

귓가를 울리는 폭스의 말을 단번에 끊고 도를 휘두르자 폭스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크윽.”

“죽여주마!”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뒷걸음질 치는 폭스를 향해 막 몸을 날리려는 내 귓가로 다시금 폭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폭스: 제 말을 들어보세요! 마스터의 전언이 있습니다!]

멈칫.

다급한 폭스의 목소리에 막 도를 휘두르려던 내 몸이 멈칫했다.

폭스가 마스터라고 부를 사람이라면 단 한 명, 폭스의 형이자 마법사의 탑의 마스터인 크레이언뿐이다. 내가 자신의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폭스가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다시금 폭스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역시 블러드 님이시네요. 하핫.”

치이익.

품속에서 포션을 꺼낸 폭스가 어깨 상처에다 포션을 쏟아 붓자 새하얀 연기와 함께 쩍 갈라졌던 상처가 서서히 아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단숨에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크레이언의 전언이 있다는 말에 얼굴을 굳히며 폭스의 말을 기다렸다.

이내 어깨를 빙빙 돌리며 상처를 점검한 폭스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요?”

사사삭.

다시 모습을 감춘 폭스의 모습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오른쪽 무릎에 따끔한 느낌과 함께 폭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폭스: 오른쪽 다리에 단검을 던진 뒤, 블러드 님의 가슴을 향해 단검을 휘두르겠습니다.]

쒜에엑.

폭스의 귓속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오른쪽 무릎을 노리고 그림자 단검이 쏘아졌다.

“치잇.”

까강.

재빨리 도를 휘두르자 그림자 단검이 도에 튕겨 나갔다. 이내 가슴에 전해지는 따끔한 통증에 황급히 몸을 젖히자 폭스의 단검이 빈 허공을 그었다. 모두 폭스가 미리 말한 공격 순서였다.

스윽.

거리를 벌린 채 그림자 단검을 쓰다듬는 폭스를 향해 도를 겨눈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블러드: 무슨 꿍꿍이냐.]

[폭스: 일단 싸우면서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왼팔, 가슴, 왼팔, 가슴입니다!]

사사삭.

폭스의 신형이 다시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왼팔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크윽.’

아무리 먼저 말해주고 초감각이 있더라도 폭스의 스피드는 쉽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까강.

“쳇!”

왼팔을 노린 단검이 내 도에 막히자 폭스가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이내 왼팔을 시작으로 미리 알려준 공격 순서대로 단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폭스: 마스터께서 말씀하시길, 이제 슬슬 시간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블러드: 그 말은 지금 나보고 정체를 밝히라는 건가? 결승전에서가 아니라?]

[폭스: 예.]

까강.

가슴을 노리는 단검을 쳐내며 도를 휘두르자 도가 그대로 폭스의 몸을 빠져나왔다. 아마 삼무보의 스킬 중 한 가지인 듯했다.

[폭스: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 왼팔, 그 다음 뒤로 빠진 뒤 목으로 단검을 날리고 다시 달려들어 심장을 노리겠습니다.]

쉬식.

자신의 말한 것을 그대로 지키려는 듯, 단검을 쥔 폭스가 나를 향해 몸을 날려 단검을 휘둘렀다. 그러면서도 귓속말을 멈추지 않았다.

[폭스: 이 공격을 한 뒤 제 가슴을 베세요. 블러드 님이 조절만 하시면 섀도우 아머 때문에 큰 상처는 입지 않을 겁니다.]

[블러드: 그 다음은?]

후우웅. 째쟁.

왼팔을 노리는 단검을 쳐내며 폭스를 향해 묻자 폭스가 거리를 벌리며 귓속말을 전했다.

[폭스: 그때 제가 멈칫할 겁니다. 그럼 블러드 님께서 도면으로 제 가슴을 때린 뒤 쓰러진 제 몸을 밟고 진실을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

[블러드: 꼭 그렇게 해야 하나?]

[폭스: 예, 마스터께서 말씀하시길 이미 유저들의 주목을 끌었으니 이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쒜에엑. 쨍.

심장을 노리는 단검을 쳐낸 내 얼굴이 굳었다. 이내 심장을 노리고 달려드는 폭스를 노려보는 내 눈이 차가운 기운을 뿌렸다.

‘뭔가 이상하군.’

본래 작전은 내가 결승전까지 올라가 시합 전에 진실을 밝힘과 동시에 마법사의 탑과 다엘검 그리고 데스 스타가 검은 사자 길드의 총 본주를 치는 것이었다.

‘제길.’

머릿속을 채우는 복잡한 생각에 입에서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 머릿속에서 과거의 어느 장군이 했던 명대사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내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그래. 주사위는 던져졌다. 뭘 두려워하는 거냐!’

스스로를 향해 다그치는 내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크큭.”

움찔.

내 웃음 속에 담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인지 막 몸을 빼려던 폭스가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이 땅을 박차고 폭스를 향해 쏘아졌다.

후우웅.

[블러드: 시작하겠다.]

멈칫.

허공을 가르며 내는 묵직한 파공음에 막 몸을 피하려던 폭스가 내 귓속말을 듣고는 몸을 멈췄다. 다른 사람은 절대 알아볼 수 없을 찰나의 멈춤! 그리고 그 찰나의 시간을 놓치지 않고 내 도가 폭스의 가슴을 베었다.

지이익. 서걱.

두꺼운 종이를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섀도우 아머가 찢어졌고 섀도우 아머를 뚫고 파고든 도가 폭스의 가슴을 갈랐다.

“크윽.”

보통 유저 같았으면 몸통이 갈라져야 할 상처였지만 섀도우 아머 때문인지 도가 들어가다 말고 힘을 잃었다. 그래도 꽤나 깊이 베인 것인지 쩍 갈라진 상처 사이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후우웅.

비틀거리는 폭스를 향해 내 도가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날카로운 날 부분이 아닌 뭉툭한 도면 부분이었다.

쿠왕. 우당탕.

“쿨럭, 쿨럭.”

폭음과 함께 한바탕 경기장 바닥을 구른 폭스가 허리를 꺾으며 마른기침을 토했다. 누가 봐도 공격에 당해 괴로워하는 상태였다. 이내 바닥에 엎드려 연신 기침을 하던 폭스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쿨럭, 제기랄.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폭스: 어서 시작하세요.]

분하다는 듯이 내뱉는 말과는 달리 귓속말로 나를 재촉하는 폭스의 모습에 실소를 흘리며, 도를 들어 폭스를 겨눠 천천히 걸음을 옮겨 폭스에게 다가가자 폭스가 힘겨운 동작으로 일어섰다 엎어지기를 반복했다.

“큭.”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폭스의 연기력에 낮은 웃음을 흘리는 내 귀로 다시 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폭스: 블러드 님! 더 이상 시간을 끌면 티가 납니다.]

[블러드: 알겠다.]

[폭스: 하핫, 최대한 강렬하게 부탁드립니다.]

폭스가 상처 때문에 비틀거리는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힘찬 목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꾸욱.

“커흑.”

이내 발을 들어 폭스의 등을 밟고 힘을 주자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던 폭스가 경기장 위로 철퍽 쓰러졌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관객석이 술렁였다.

척.

폭스를 밟은 채로 도를 허공으로 곧추세우자, 관객석에 있는 유저들의 시선이 나에게 모였다. 온몸을 간질거리게 하는 유저들의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지난 100일 동안 게임을 하며 수도 없이 외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난……!”

마나를 담은 목소리가 무투대회장 곳곳으로 퍼져 나가 무투대회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난……!”

흠칫.

막 입을 열려던 내 몸이 움찔 떨렸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자, 척추를 타고 올라오던 불안감이 조금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식었던 내 두 눈이 다시 타올랐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다시 한 번 결심을 되씹으며 입을 열었다.

“난……!”

족히 만을 넘는 유저들의 시선이 내 몸을 꿰뚫듯이 꽂혔다.

마침내 굳게 닫혔던 내 입을 천천히 열었다.

“난… 헤라클래스다!”

헤라클래스다! …클래스다! …다!

마나를 담은 내 외침이 메아리로 변해 무투대회장을 때렸다. 그렇게 한참을 무투대회장을 떠돌던 외침이 마침내 사라지자 고요한 적막이 무투대회장에 내려앉았다.

적막.

이 한 단어로 표현되는 분위기에 나는 물론이고, 내 발 밑에 깔린 폭스 또한 긴장된 눈빛으로 관객석을 바라봤다. 여기서 유저들의 반응에 따라 이번 일의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것이다.

웅성웅성.

곧 적막을 깨고 관객석 여기저기가 소란스러워졌다.

“서, 설마 예전의 그 헤라클래스?”

“그 사기꾼 말이야?”

“설마……!”

“그러고 보니 닮았다! 머리색만 다르고 똑같은데?”

“그럴 수가!”

내 말을 의심하는 유저로 시작해 마침내 나를 알아보는 유저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조용했던 관객석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꽈앙.

“……!”

“……!”

이내 하늘로 곧추세웠던 도로 경기장을 내려치자 소란스러웠던 관객석이 다시 조용해졌다. 다행히 폭스가 깔려 있는 곳의 반대 부분을 내리쳤기에 폭스에게 피해는 없었다.

“난 한때 검은 사자 길드의 길드 마스터로 있던 헤라클래스가 맞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관객석에서 듣지 못한 이가 없는 듯, 관객석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힐끔 귀빈석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유저들 중 몇 명의 유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자왕이 돌아왔다!”

“사자왕이 야수왕이 되어서 변해서 돌아왔다!”

“뭐야? 그럼 검은 사자 길드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것보다 저 사기꾼 자식, 예전에 게임 접은 거 아니었어?”

내 복귀를 알리는 외침부터 검은 사자 길드의 안위를 생각하는 말과 나를 비하하는 말까지, 관객석에서 다양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꺼져라, 사기꾼!”

“캐릭터 삭제당했다고 공지로 띄우지 않았어?”

“분명 또 아이템 복사해서 강해졌겠지!”

“꺼져라! 너는 있을 자격이 없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유저들의 야유에 내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휘익. 꽝.

다시 한 번 도를 들어 전에 내리쳤던 곳을 다시 내려치자 소란스러웠던 관객석이 다시 조용해졌다.

“난…….”

[폭스: 어서 말하세요!]

꾸물거리는 내가 답답했는지 내 발 밑에 깔린 폭스가 나를 재촉했다.

[폭스: 어서요! 더 이상 늦으면 검은 사자 길드에서 방해를 할지도 모릅니다!]

[블러드: 빌어먹을! 알겠다!]

“난……!”

1만 쌍의 눈이 내 입으로 모였다.

“난 복수를 위해 돌아왔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관객석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이내 관객석이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진실을 밝힐 요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진실을……!”

쿠르르릉. 쿠와앙!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투대회장 하늘 위에서 번쩍이는 번개와 함께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내 발 밑에 깔려 있던 폭스의 몸이 부드럽게 내 발을 빠져나왔다.

가슴을 베인 사람의 몸놀림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재빠른 움직임으로 거리를 벌린 폭스가 진득한 웃음을 토해냈다.

“키키킥,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전에 봐왔던 살랑거리는 웃음이 아니라 조롱 가득한 웃음에 내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갑자기 무슨…….”

쿠와앙!

다시금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내 말을 끊었다. 이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뭐야, 저거?”

“갑자기 왜 저래? 이벤튼가?”

“뭐가 나타나는데?”

갑자기 돌변한 하늘에 관객석의 유저들 또한 수군거렸다. 이내 회색 빛 하늘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치이잉.

“저건……?”

회색빛 하늘에 나타난 무언가의 정체는 바로 거대한 모니터였다. 홀로그램 TV를 몇천 배 확대하여 하늘에 붙여놓은 것 같은 형상이었다.

“제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키킥.”

‘임무라니?’

“그게 무슨…….”

“난 복수를 위해 돌아왔다!”

홀로그램 속에서 흘러나와 귓가를 때리는 거대한 외침에 막 입을 열려던 내 얼굴 위로 경악이 떠올랐다. 홀로그램 속에서 흘러나온 외침은 방금 전, 내가 외친 외침이었다. 마치 내 목소리를 녹음한 뒤 커다랗게 조절해서 그대로 재생한 듯했다.

“난 복수를 위해 돌아왔다!”

콰르르릉.

콰가강. 쿠오오오!

홀로그램 속 외침과 동시에 내 몸에서 엄청난 마기가 솟구쳤다. 내 제어를 벗어나 하늘로 솟구치는 마기에 당황하며 막 마기를 제어하려는 순간, 내 모습을 보며 조소를 흘리던 폭스가 입을 열었다.

“블러드 님, 혹시 이거 아시나요? 가입 동의 사항 12조 4항. 만약 유저가 이벤트의 중요 인물로 채택된다면 유저는 아무런 불만과 보상 없이 (주)한신의 시스템에 따르며 차후 어떠한 법적 소송도 걸지 않는다. …하하핫.”

“그게 무슨 말이냐……!”

애초에 그런 걸 일일이 확인하고 가입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런 폭스의 말에 내가 굳은 얼굴로 반문하자 폭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장난감이었단 말이다, 병신아. 키키킥.”

쿵!

폭스의 말에 마치 커다란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내 몸을 덮쳤다.

“무, 무슨 말이냐……!”

“저걸 보면 모두 이해가 갈 거다. 키킥.”

스윽.

폭스가 가리킨 것은 바로 하늘 위에 떠 있는 거대한 홀로그램이었다. 이내 고개를 들어 홀로그램을 보던 내 얼굴 위로 경악이 떠올랐다.

“저건……!”

홀로그램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막 초보 존에서 시작한 내 모습이었다. 허술한 장비에 지금과는 달리 짧은 머리, 홀로그램 속 유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나였다.

“저게 뭐야?”

“저거 저 자식 아니야?”

“맞네! 초보 존인가 본데?”

유저들의 웅성거리며 홀로그램을 주목했다. 갑작스런 홀로그램에 초선의 제재가 있을 법도 하건만 초선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홀로그램을 지켜볼 뿐이었다.

파앗.

순간 홀로그램이 바뀌며 다른 장면을 비췄다. 바로 머드맨을 죽이는 내 모습이었다.

“죽엇!”

그어어.

이내 막 머드맨을 베는 내 모습에 맞춰 홀로그램에서 거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을 당했던 왕은 복수를 하기 위해 피눈물을 삼키며 다시 돌아왔다!]

음산하기 짝이 없는 이 목소리는 나 또한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라데스?’

분명 암천왕 라데스의 목소리였다.

“크큭, 크하하하!”

꽝꽝꽝꽝!

어느새 바뀐 홀로그램은 씨 스파이더 킹을 난도질하는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배신하지 않으면 배신당한다!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타락한 왕은 그렇게 믿었다!]

“사, 살려줘!”

“푸화악.”

이번에 홀로그램이 비춘 모습은 초보 존의 잡화점에서 검은 사자 6진이라 불리는 이들을 죽이는 내 모습이었다.

[타락한 왕은 복수를 위해 강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강해져서 자신을 배신한 모든 인간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워어어!

“죽어라!”

이번에 비춘 것은 망자의 던전에서 좀비를 죽이는 내 모습이었다. 교묘히 카나리아와 폭스만을 지운 채 좀비들을 죽이는 내 모습에 유저들이 술렁거렸다. 이내 라데스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타락한 왕은 결심했다! 복수를 위해 기꺼이 야수가 되기로!]

“붉은 어금니 카인이여, 그대는 나에게 시험을 치를 기회를 주겠는가?”

꿀꺽꿀꺽.

홀로그램은 내가 데스 랜드에 가서 카인을 설득한 것부터 시작해 카인의 피를 마시고 수인족이 된 것을 보여주었다.

[마침내 타락한 왕은 야수가 되었다!]

“크허어어엉!”

홀로그램 속의 내가 거칠게 포효하며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타락한 왕은 마침내 힘을 얻고 야수왕이 되었다!]

이번에 비춘 것은 좀비로 변한 수인족들을 향해 무한참을 시전하는 내 모습이었다.

무한참을 시전한 내 앞에는 걸릴 것이 없었다. 홀로그램 속 내 손에 들린 도가 빛을 뿌릴 때마다 여지없이 좀비로 변한 수인족들이 쓰러졌다.

[게리롱: 어떻게 된 거냐!]

[염환: 철중아! 지금 저게 뭐냐!]

게리롱과 염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지만 나 또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야수왕은 마침내 결심했다! 대륙으로 뻗어나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인간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자랑스러운 숲의 일족이여! 대륙으로 나가자! 인간의 피와 살을 제물로 받으며 대륙을 제패하자! 크허엉!”

“우와아아!”

홀로그램에서는 내가 대륙으로 떠나는 날, 수인족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는 모습을 비추었다.

[야수왕은 라데스의 노예가 되어 자신과 뜻을 함께할 자들을 찾았다! 다크 자이언트 로드, 다크엘프 로드, 다크 워리어 로드, 게르맨더 족장! 이들은 모두 라데스의 노예로 선뜻 야수왕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내 홀로그램이 점차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총 다섯 개의 인영을 비췄다. 나와 스톤, 키블릭, 발록, 용마인이었다.

이내 서큐버스와 인큐버스들을 배경으로 나와 바젤이 악수를 하는 장면으로 화면이 바뀌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300년 전, 봉인을 당한 나이트메어에게까지 손을 내밀어 몽마족들의 힘을 얻고 나이트메어를 부활시켰다!]

-들어라! 나는 정확히 70일 뒤에 깨어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힘을 키우고 몽마들을 퍼트려라! 나 루키아논 님의 세 번째 눈물! 여섯 악왕중에 꿈을 지배하는 악몽왕 나이트메어의 이름으로 명한다!

설상가상으로 침공을 예견하는 나이트메어의 목소리가 홀로그램 속에서 퍼져 나왔다.

쿠르르릉. 콰아앙!

햇볕이 쨍쨍했던 하늘은 이제 완전한 보랏빛으로 변해 불길한 천둥소리를 퍼트리고 있었다. 멍하니 홀로그램을 주시하는 유저들의 귀에 다시 라데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유저들이여! 복수를 위해 돌아온 왕과 라데스의 노예들을 처리해라! 죽이지 못하면 죽는다! 오늘이 바로 루안 대륙의 최후의 날이 될 것이다!]

라데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커다란 종소리와 함께 홀로그램으로 공지가 떠올랐다.

띠리링.

[특수 이벤트입니다. 이벤트 명 ‘대륙 최후의 날’! 유저 여러분께서는 이제부터 한마음이 되어 잠시 후에 있을 몬스터들의 침공에 저항해야 합니다. 만약 유저 여러분들이 몬스터들을 막지 못한다면 대륙은 몬스터들이 지배하는 암흑의 시대로 변할 것입니다. 이벤트는 이번 침공의 총사령관, 야수왕 블러드를 죽이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야수왕 블러드를 죽일 시, 침공한 몬스터들의 힘이 2분의 1 가량 줄어듭니다. 또한 이벤트 기간 동안은 경험치와 아이템 드랍률이 2배 상승합니다. 그리고 본래 무투대회의 우승 상품이었던 신검 아실레온은 이번 침공에서 가장 많은 몬스터를 처리한 유저에게 상품으로 드리겠습니다. 이벤트 기간에 로그아웃 당하신 유저분들은 특수 이벤트의 공평성을 위해 현실 시간으로 24시간 동안 접속하실 수 없으니 이 점을 유의하여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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