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4 결말 (31/34)

챕터4 결말

“뭐야? 특수 이벤트야?”

“아싸, 땡잡았다!”

“저 자식만 죽이면 되는 거야?”

“그러면 아실레온을 못 가지잖아!”

로그아웃 당하면 24시간 뒤에야 접속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은 잊었는지 유저들이 신검 아실레온과 나를 주제로 마구 떠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유저들의 목소리 따위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몸을 덮치는 절망감에 내 얼굴이 멍하게 풀렸다.

내 계획은 물론이고 나이트메어를 부활시킨 것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안 거냐!”

“키키킥.”

절망 섞인 나의 외침에 음침한 웃음을 터트린 폭스가 입을 열었다.

“말 안 했었나? 우리는 유저임과 동시에 천 급 운영자 캐릭터를 하나 더 가지고 있다고 말이야. 크크큭, 네놈의 행동 따위야 예전에 알고 있었다. 중간에 유영혁의 개입으로 길이 빗나가기는 했지만 우리가 네놈의 행동을 꿰뚫고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 크큭.”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비아냥거리는 폭스의 말에 내 입에서 허무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하하…….”

“네놈은 재미있는 장난감이었다고 형님이 전해달라고 하더군. 더불어 폭염의 마도사라는 멍청한 쓰레기도 말이야. 키킥, 나도 형님의 말에 동감한다. 요 2년간 네놈들처럼 우리를 재미있게 한 장난감은 없었으니까 말이야! 크하하핫.”

귓가를 때리는 폭스의 광소와 함께 세상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털썩.

엄청난 상실감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몸을 지탱할 힘 따위는 예전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자포자기 한 내 모습에 폭스가 킬킬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이런. 어서 일어나라고. 네놈은 이제부터 네놈이 계획한 작전을 시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처럼 마련한 무대가 쓸모없어지잖아. 크크큭. 자, 저길 보라고. 나이트메어와 몽마족들이 몰려오고 있잖아.”

폭스의 말대로 하늘 저편에서 한 무더기의 검은 점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쓰레기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쓰레기다. 크큭. 네놈 같은 쓰레기는 잠자코 우리들의 장난감으로 만족하며 살다가 죽는 거다! 키하하핫!”

뿌드득!

비아냥거리는 폭스의 말에 내 입에서 절로 서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개…자식!”

“응? 뭐라고? 키키킥. 자, 어서 날뛰어라! 어서 그 잘난 암흑투마군단을 부르란 말이다! 키하하핫.”

폭스의 광소가 유저들의 목소리에 파묻혀 사라졌다.

“절대… 용서 못한다!”

살기 가득한 내 외침에 폭스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누가… 용서해달라고 했던가? 응? 키하하핫!”

“뿌드득. 죽어라!”

파밧.

한바탕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도를 올려치자 웃음을 흘리던 폭스가 여유롭게 몸을 날려 도를 피했다. 발끝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에 숨을 몰아쉬는 나를 향해 폭스가 관객석 쪽으로 몸을 날렸다.

“키하하핫!”

분명 폭스가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중간에 유영혁이라는 놈의 개입으로 길이 빗나갔다고. 그 말은 곧 놈들 또한 내 모든 계획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크큭, 그렇게 하는 거다. 더 발악해봐라!”

[이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유저들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폭스의 말과 동시에 허공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관객석에 있던 유저들이 경기장을, 아니 정확히 말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우와아아아!”

“죽여라!”

“죽여 버려! 신검 아실레온은 내 거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유저들의 모습에 내 입에서 광기 어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크큭.”

내 몸을 잠식하던 절망감 대신 사라졌던 복수심과 광기가 다시 척추를 타고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고개를 돌려 귀빈석을 바라보자 나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유저들과는 달리 여유롭게 앉아 있는 무리가 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한 우리에 두 마리 야수를 두고 누가 살아남는지 구경하는 것 같았다.

‘네놈들에게는 이것조차 유희란 말이냐!’

으드득.

분노에 이를 가는 내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법사가짱이얌, 아니 크레이언이었다.

[크레이언: 수고해라, 쓰레기. 제법 머리를 굴렸다만 쓰레기는 쓰레기다. 크큭.]

귀빈석을 바라보는 내 눈에서 살기가 들끓었다.

[블러드: 무라사마랑 같이 목 닦고 기다려라, 쓰레기.]

크레이언에게 답변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모든 것은 변함없었다. 내 의지가 아닌 누군가의 의지로 시작된 계획이라지만 어차피 실행할 계획이었다.

[블러드: 당황하지 마라. 계획대로 간다!]

염환을 비롯해 해파토스, 게리롱, 코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내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내가 입고 있는 암천섭혼갑이 웅웅 울며 낮은 공명음을 흘렸다. 품속에서 꺼낸 악몽의 집합체를 양손에 쥐며 몰려오는 유저들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섭혼강기!”

빠각.

외침과 동시에 양 손에 들린 악몽의 집합체가 반으로 쪼개졌다.

푸화아아악.

끼아아악!

내 몸과 양손에서 뿜어져 나온 섭혼기와 악몽의 기운이 나를 죽이기 위해 몰려드는 유저들을 덮쳤다.

“으아악! 뭐야, 이거!”

“꺄아악!”

“놈이 공격한다!”

사방으로 퍼지는 자욱한 안개에 유저들의 당황하며 비명을 질렀다. 항마력이 낮은 유저들은 이상 현상에 걸린 채 바닥을 굴렀다.

[블러드: 코롬, 시작해라!]

[코롬: 알겠습니다!]

코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객석 여기저기에서 폭음과 함께 먼지가 솟구쳤다.

꽈가강. 쿠아앙!

처음에는 한두 번 터졌던 트랩들이 이제는 한 번에 수십 개씩 터지며 사방으로 돌조각을 뿌렸다. 더군다나 트랩이 터지며 뿜어져 나온 연기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유저들의 혼란은 더해져만 갔다.

“뭐, 뭐야!”

“으악!”

“살려줘!”

아무리 위력이 약한 트랩이라고 하지만 원 스타 화염계 마법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관객석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투 스타 이상의 유저에게는 무용지물이라는 코롬의 말대로 상처를 입은 유저들 대부분이 간단한 장비를 착용한 저레벨의 유저들이었다.

아수라장을 연상케 하는 관객석과는 달리 이미 경기장 위에는 꽤 많은 수의 유저들이 모여 있었다.

“흐흐흐, 그냥 곱게 죽어라!”

황금색 갑옷을 입은 이십대 중반의 유저가 장검을 들이대며 음침하게 웃었다. 그 유저의 탐욕이 전염된 것인지 유저들이 하나 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나를 보는 유저들의 눈에는 하나 같이 신검 아실레온을 향한 탐욕이 어려 있었다.

‘신검 아실레온은 이런 용도로 등장시킨 것이었나!’

놈들의 능력이라면 신검 아실레온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좋은 검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신검 아실레온을 상품으로 내건 이유가 이제야 밝혀졌다. 일단 신검 아실레온의 이름으로 많은 수의 유저들을 모은 뒤 가장 많은 몬스터를 죽인 유저에게 신검 아실레온을 준다면 이벤트에 관심을 두지 않은 유저들이라도 눈을 까집고 몬스터들을 사냥할 동기는 충분했다.

“흐흐흐.”

“크크큭.”

탐욕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향해 다가오는 유저들을 보는 내 입에서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큭. 그래, 쓰레기들. 덤벼라. 내가 야수왕 블러드다!”

부우웅.

“피, 피해라!”

“피해!”

횡으로 휘두른 도에서 부채꼴 모양의 거대한 도기가 유저들을 향해 쏟아졌다. 검붉은 마기와 어우러진 거대한 도기에 나를 향해 달려들려던 유저들이 기겁을 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꽈아앙.

“크아악.”

“으악.”

미처 피하지 못한 유저들의 도기에 휩쓸려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블러드: 모두 시작해라!]

콰르르르릉!

꽈아앙!

전체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귀빈석 근처에서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 폭음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소란스러웠던 관객석이 일순간 조용해질 정도였다.

쿠오오오!

화르르륵.

폭음의 근원지인 귀빈석에는 한 마리 거대한 화룡(火龍)이 쉴 새 없이 화염을 쏟아내고 있었다. 한편에는 아직 채 꺼지지 않은 푸른색의 불꽃이 관객석을 태우고 있었다.

‘다훈아!’

거대한 화룡은 분명 역천마불술법이었고, 푸른색의 불꽃은 헬 파이어가 분명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유저는 판타즈마 월드에 단 한 명, 폭염의 마도사라 불리는 다훈이가 유일했다.

스팟.

“후우, 죽을 뻔했네.”

단거리 이동 마법인 블링크를 이용해 내 옆에 나타난 염환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건지 마법사가짱이얌, 아니 크레이언 그 자식이 갑자기…….”

“염환!”

화르륵.

후끈한 열기와 함께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이 빌어먹을 쓰레기 자식!”

쿠우웅!

거대한 절규와 함께 나와 염환의 앞으로 검은 인영이 떨어졌다. 갑작스레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인영에 주변의 유저들이 ‘어? 어?’ 하며 주춤거렸다.

“크레이언!”

놀랍게도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인영의 정체는 크레이언이었다. 카나리아, 아니 권중혁의 복수의 대상! 무라사마와 함께 드래곤 클럽을 이끄는 쓰레기!

“크으윽!”

헬 파이어 때문인지 아니면 화룡 때문인지 크레이언의 왼팔은 재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새카맣게 타 있었다. 아마 염환의 기습 공격에 당한 듯했다.

“크으으, 이 쓰레기 자식!”

분노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모를 신음을 흘린 크레이언의 뒤로 마법사 탑의 오행마왕으로 보이는 마법사들이 부랴부랴 블링크를 시전해 모습을 드러냈다. 폭스를 제외한 오행마왕 모두가 모였는지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들은 총 4명이었다. 그중에는 녹마왕인 호프만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어떠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크레이언은 왜 블링크를 사용하지 않지?’

염환을 비롯해 나머지 마법사의 탑의 오행마왕들은 모두 블링크를 사용해 이동했지만 크레이언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괴상한 방법으로 나타났다.

‘놈의 스페셜 직업 계열은 마법사 계열이 아니군.’

카나리아가 말하길 크레이언의 직업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스페셜 직업이라고 했다. 마법사 계열의 스페셜 직업이라면 블링크는 필수다. 그럼에도 크레이언이 블링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크레이언의 스페셜 직업이 마법사 계열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럼 대체…….’

내가 막 의문을 가지는 순간, 신음을 흘리던 크레이언이 돌연 오른팔을 이용해 왼팔을 잡아 뜯었다.

콰드득.

“크윽, 쓰레기 자식!”

누구를 향해 하는지 모를 욕을 내뱉은 크레이언이 어깨 부근부터 뽑혀 나온 팔을 아수라장을 연상케 하는 유저들의 틈으로 던졌다. 트랩 덕분인지 아직까지 관객석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거기다 밖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를 보니 아마 해파토스가 드워프 전사들을 이끌고 도착한 듯했다.

‘좋아!’

할짝.

미소와 함께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고통에 신음을 흘리던 크레이언이 돌연 광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크흐흐, 빌어먹을 쓰레기 자식들. 모두 죽여주마. 생(生), 목(木).”

푸들푸들.

“뭐, 뭐야, 저거!”

크레이언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긴장된 눈빛으로 스태프를 들고 있던 염환이 화들짝 놀랐다. 놀랍게도 크레이언의 왼팔이 빠른 속도로 자라나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것을 빠른 속도로 재생하는 것처럼, 크레이언의 왼팔이 거침없는 기세로 자라나는가 싶더니 마침내는 재가 되기 직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우드득, 우득.

“크큭, 역시 편하군.”

어깨를 돌리며 왼팔을 주무르던 크레이언이 진득한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키웠던 개가 주인을 물 줄이야. 크큭.”

“개소리 하고 있네.”

“…….”

“너도 드래곤 클럽인가 뭔가 하는 놈이라며? 미친 새끼. 어쩐지 입 냄새가 지독하더라.”

“……!”

바로 코앞에서 냄새가 나는 양, 코를 막은 염환이 크레이언을 향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비아냥거리자 크레이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놈도 드래곤 클럽에 대해 알고 있냐?”

“친구를 물먹인 빌어먹을 지렁이 새끼들 모임이라면 잘 알고 있다.”

염환의 대답에 크레이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도 잠시, 크레이언의 입가에 짙은 웃음이 떠올랐다.

“크크큭,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겨우 쓰레기 두 마리와 NPC들로 이루어진 몬스터들을 가지고 뭘 어쩌겠다는 거냐. 자, 봐라. 저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다!”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외친 크레이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유저들에 의해 궁지로 몰리고 있는 나이트메어와 몽마족들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유저들이 아니라 거대 길드의 간부들과 길드원들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 길드에는 검은 사자 길드를 비롯해 마법사의 탑, 다엘검, 그 밖의 유명 길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길드들의 공통점은 길드 마스터나 간부들이 하나 같이 드래곤 클럽으로 보이는 것들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나이트메어가 육악왕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한 손이 열 손을 당해내지 못한다고, 수백에 가까운 유저들이 거는 안티 매직과 신성주문 앞에서는 간신히 방어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이트메어가 그 정도이니 다른 몽마족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제길, 왜 안 오는 거냐!’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암흑투마군단과 몬스터 용병단이었다. 아무리 내 계획을 미리 알아채고 대비를 했다지만 강력한 힘 앞에서는 대비고 뭐고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이내 조용히 크레이언을 주시하는 내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크큭, 아무래도 그 힘은 코앞에서는 무용지물인 것 같군.”

“…뭐?”

“크억.”

풀썩.

의미심장한 내 말에 크레이언이 막 반문하려는 순간, 오행마왕 중 붉은 로브를 입고 있던 유저가 돌연 쓰러져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화, 화마왕! 대체 어떤 자식이!”

화마왕이라 불린 붉은 로브 유저의 뒷목에 꽂힌 단검에 푸른 옷을 입은 유저가 막 고개를 돌리는 순간, 푸른 옷을 입은 유저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단검이 푸른 옷을 입은 유저의 목줄기에 박혔다.

꾸르륵.

가래 끓는 소리를 낸 푸른 옷의 유저 또한 붉은 옷의 유저 옆에 털썩 몸을 뉘었다. 이내 푸른 옷의 유저가 만들어낸 그림자가 출렁이는가 싶더니 자그마한 키의 인영을 뱉어냈다. 바로 게리롱이었다.

“내가 죽였다, 새끼야.”

한바탕 욕을 내뱉은 게리롱이 입을 벌린 채 자신을 노려보는 나머지 오행마왕과 크레이언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너네도 죽고 싶냐?”

“늦었구나.”

“그렇게 됐다. 빌어먹을 홀로그램 때문에 애들이 좀 동요해서 말이다.”

씁쓸한 기색이 스며든 크레이언의 목소리에 나 또한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 발정 난 낙타들의 길드원들은 자신들이 도와주는 사람이 과거 헤라클래스였던 유저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런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게리롱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라. 자기들 역할은 잘하고 있으니까.”

“으아아악!”

게리롱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명의 정체는 어느 마법사로 보이는 유저였는데, 난데없이 유저의 동료로 보이던 어느 유저가 마법사 유저의 가슴을 찌른 것이다. 마법사 유저는 동료의 당황해하면서도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씨익.

이내 자신의 손으로 동료를 죽인 유저가 게리롱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인 뒤 아수라장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놀랍게도 걸음을 옮기는 유저의 얼굴은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마침내 이십대였던 유저의 얼굴이 삼십대 중반의 사내의 모습으로 바뀌자 유저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단하군.’

방금 전, 유저의 얼굴이 바뀐 스킬은 도둑들이 쓰리 스타 때 배우는 스킬로 주로 물건을 훔칠 때 사용하는 스킬이다. 절도용 스킬을 이용해 손쉽게 사람을 죽이는 유저를 보는 내 얼굴에 새삼 감탄이 떠올랐다. 게리롱을 향해 웃어 보인 것을 봐서 아마 발정 난 낙타들의 길드원인 듯했다.

“이것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나와 게리롱의 모습에 크레이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쓰레기들이 감히……!”

고오오.

분노하는 크레이언의 몸 주위로 무형의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결코 나에게 뒤처지는 기운이 아니었다.

“너희는 저 빌어먹을 도둑놈을 처리해라.”

“그, 그래.”

오행마왕 또한 드래곤 클럽의 일원이었는지 크레이언의 명령에 두려운 기색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이 허접한 놈들이 내 상대야?”

“이 쓰레기 자식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오행마왕 중 호프만을 비롯해 남아 있던 나머지 한 명이 게리롱의 도발에 성을 내며 스틱을 휘두르자 몇 개의 불꽃덩어리가 허공에 나타났다. 호프만 또한 스태프를 들어 게리롱을 겨누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게리롱 또한 양손에 단검을 손에 쥔 채 긴장된 눈으로 두 마법사를 노려봤다.

‘걱정 안 해도 되겠지.’

호프만이나 나머지 오행마왕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지만 그만큼 게리롱도 강했다. 도둑이라는 순수한 클래스로 게리롱만큼 강해진 이가 판타즈마 월드에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게리롱은 강했다.

‘도둑 클래스가 다 강하다면 유저들이 전부 다 도둑을 키우겠지.’

머릿속에 떠오른 쓸데없는 생각에 조소를 흘리며 크레이언과 대치상태에 있는 염환을 향해 귓속말을 보냈다.

[블러드: 염환, 넌 가서 바젤을 도와라.]

[염환: 끄응, 알겠다.]

서큐버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염환이 신음을 삼키며 스태프를 들었다.

“어딜!”

염환이 빠지려고 하는 것을 눈치 챘는지 조용히 나와 염환을 주시하던 크레이언이 돌연 주먹을 앞세워 염환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강(强)! 뢰(雷)!”

“치잇.”

알 수 없는 말을 외치는 크레이언을 향해 도를 휘두르자 염환을 향해 쇄도하던 크레이언이 돌연 방향을 틀어 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

“크윽?”

설마 크레이언이 무투가 계열일 줄 몰랐기에 내 입에서 당황 섞인 신음이 새어나왔다.

치이잉.

묘한 공명음과 함께 크레이언의 주먹과 도가 부딪쳤다.

꽈앙. 치지직~.

커다란 폭음과 함께 푸른빛의 뇌전이 크레이언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왔다. 내 몸을 덮치는 뇌전에 내 입에서 고통 섞인 비명이 새어나왔다.

“크윽, 카나리아! 어서 가라!

“그, 그래!”

내 상태를 염려하는 것인지 움직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카나리아를 향해 소리치자, 카나리아가 블링크를 이용해 몽마족들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이내 전기로 찌릿하게 울리는 팔을 흔들며 도를 고쳐 잡자 크레이언이 씨익 웃었다.

“멍청한 자식, 그나마 둘이 있었으면 살 확률이 높아지는 건데 말이야. 이래서 쓰레기들은 안 된다는 거다.”

“멍청한 놈, 네놈도 무라사마랑 있었으면 살 확률이 높아지는 건데 말이야. 이래서 멍청이들은 안 된다는 거다.”

교묘히 말을 바꿔 말하자 크레이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죽여 주마…! 강(强), 화(火)!”

화르륵.

크레이언의 양 주먹을 타고 붉은 불꽃이 넘실거렸다.

‘언령사?’

말을 할 때마다 그 기운이 크레이언의 주먹 위로 유형화가 되어 나타났다. 마치 언령사와 같았다. 하지만 언령사는 엄연히 마법사 계열의 직업. 그러나 지금 크레이언은 직접 자신의 몸에 언령을 걸고 무투가처럼 싸우고 있다.

‘굳이 따진다면 언령무투사(言靈武鬪士)인가?’

“죽여주마!”

스팟.

나를 향해 몸을 날리는 크레이언의 행동에 생각을 접으며 나 또한 도를 잡고 크레이언을 향해 마주 몸을 날렸다.

폭스와 나의 대결이 힘과 기술의 대결이라면 크레이언과의 대결은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화르륵.

도와 대치하는 크레이언의 주먹에서 다시금 붉은 불꽃이 넘실거리며 타올랐다.

“크윽.”

손목을 타고 올라와 내 몸을 집어 삼킬 듯 넘실거리는 불꽃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곧 거리를 벌리며 도를 흔들자 불꽃이 사그라졌다. 몸을 사리는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크레이언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크크, 어서 끝내자. 네놈이 그토록 기다리던 암흑투마군단이 온 것 같으니까 말이다.”

“뭐……?”

“우와아아!”

내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객석으로 통하는 문에서 우렁찬 고함이 울려 퍼졌다. 이내 고함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내 입가에 크레이언의 그것과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크큭, 미안하지만 암흑투마군은 좀 비싸서 말이야.”

“뭐?”

크레이언의 물음이 채 여운을 남기기도 전에 화려하게 치장된 갑옷을 입은 전사가 헐레벌떡 다가와 입을 열었다.

“주, 주만아! 사방에서 드워프하고 오크들이 몰려온다!”

아마 전사 또한 드래곤 클럽의 일원인지 크레이언의 본명으로 추정 되는 이름으로 크레이언을 부르며 자연스레 반말을 했다. 전사의 말에 크레이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 암흑투마군단은?”

“암흑투마군은 모르겠고 드워프들하고 오크들이 몰려오고 있다니까! 지금 추가로 다른 제국에 유저와 병사들을 지원하기는 했지만 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거다.”

“빌어먹을……!”

전사의 말에 크레이언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크크큭, 아쉽군.”

드워프들이라면 해파토스가 이끄는 1천의 전사들일 것이고 오크들이라면 암흑투마군단이 넘어오기 전에 건네 보내기로 했던 몬스터 용병단이 틀림없었다.

그 말은 곧, 암흑투마군단이 넘어올 시간이 다됐다는 말이었다.

“이이, 빌어먹을!”

신경질적으로 욕을 내뱉은 크레이언이 전투 도중이라는 것도 잊었는지 전사를 향해 말했다.

“너는 당장 무라사마에게 가서 각 길드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해! 어서!”

“그, 그래!”

크레이언의 명령에 전사가 막 몸을 돌렸다.

“어딜!”

“크악!”

날카롭게 쏘아진 도기가 막 이동하려던 전사의 옆구리를 훑자 전사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네 이놈……!”

“크큭, 죽어라!”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며 분노에 잠긴 크레이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큭. 강(强)! 석(石)!”

부우웅.

쩌정!

크레이언의 팔과 부딪친 도가 찌르르 울며 쇳소리를 흘렸다. 사람의 팔과 부딪힌 소리라기보다는 마치 커다란 바위 덩어리와 부딪쳐서 난 소리 같았다. 손을 울리는 통증에 주춤하는 나를 향해 크레이언이 독기 어린 외침을 내뱉었다.

“죽어라! 강(强)! 뢰(雷)!”

치지직.

다시 한 번 뿜어져 나온 푸른 뇌전이 크레이언의 팔을 휘감았다. 잠시간의 적막이 나와 크레이언을 휘감았다. 우리 둘과는 달리 주변의 상황은 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으아아악!”

“죽여라!”

“몬스터다! 죽여라!”

“블러드! 블러드만 죽이면 끝이다!”

트랩의 혼란에서는 벗어났지만 얼마 안 가 유저들을 덮친 것은 트랩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들이었다. 1천에 달하는 드워프 전사들과 500의 몬스터 용병단! 더군다나 무투대회장 곳곳에 퍼져 있는 100명의 도적들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 명, 한 명 차근차근 유저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 쪽 진영이 밀리고 있었다. 드래곤 클럽 휘하의 길드들과 신검 아실레온을 향한 유저들의 탐욕 때문이었다. 속절없이 죽어 나가는 드워프와 오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 챈 것인지 크레이언이 음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크큭. 사람은 말이야, 주제라는 게 있어. 그런데 너와 네 친구 놈은 그걸 모르고 있어. 누구나 주제에 맞게 살아야 해. 권중혁이라고 했던가? 놈도 주제를 모르더군. 크크큭.”

“그거 미안하군.”

“……!”

어디선가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에 크레이언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늘에서야 얼굴을 보는군, 크레이언. 아니, 박주만이라고 불러야 하나?”

놀랍게도 싸늘한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권중혁, 즉 카나리아였다.

“주제 타령을 하기 전에 이 쓰레기 좀 챙기는 게 어떠냐?”

휘익.

손에 잡고 있는 검은 물체를 질질 끌며 경기장 위까지 올라온 카나리아가 손에 잡힌 검은 물체를 크레이언을 향해 던졌다.

철퍽.

“끄으……!”

“포, 폭스! 지수야!”

카나리아가 질질 끌고 온 물체의 정체는 바로 폭스였다.

“혀, 형님…….”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폭스가 크레이언을 부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대체 어떻게 때렸기에 사람이 저렇게 되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블러드: 수인족들은 어떻게 하고 온 거냐!]

내 귓속말에 잠시 멈칫한 카나리아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카나리아: 카인에게 맡기고 난 먼저 왔다. 저 자식이 먼저 기습을 하더군.]

[블러드: 끄응, 알겠다.]

카나리아의 말에 내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나 또한 야수연합의 전사들을 관리하는 권한을 카인에게 맡긴 상태였다. 카인이라면 충분히 야수연합의 전사들을 이끌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네놈이 감히……!”

포션을 꺼내 폭스에게 쏟아 부은 크레이언이 카나리아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오금이 저릴 법한 모습에 카나리아가 코웃음을 치며 싸늘히 입을 열었다.

“오늘을 기다렸다!”

팡. 퍽!

“커흑.”

카나리아의 주먹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때리는가 싶더니 돌연 크레이언이 배를 부여잡고 신음을 토했다. 동시에 죽은 듯이 바닥에 누워 있던 폭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혀, 형님, 놈은 백보신권(百步神拳)을 익히고 있습니다…….”

소림소승(小林小僧) 일각(一角)의 백보신권! 허공을 때려 백보 밖의 사람을 격하는 무공!

방금 전 크레이언을 때린 무공은 백보신권이 분명했다.

‘카나리아가 백보신권의 주인이었군.’

팡팡팡. 퍼퍼퍽!

“크으윽.”

허공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타격음, 그리고 크레이언의 비명이 연달아 터졌다. 보이는 공격이라면 피하기라도 하겠지만 무형의 기운을 쏘아내는 백보신권이라면 직접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크레이언에게는 최악의 무공임이 틀림없었다.

“빌어먹을…! 강(强)! 철(鐵)!”

지잉.

계속해서 카나리아에게 타격을 허용하던 크레이언이 작게 중얼거리자 크레이언의 몸이 청동빛으로 변했다. 동시에 크레이언의 몸에서 터지던 타격음이 멈췄다.

팡팡. 쩌정!

보이지 않은 카나리아의 권경이 청동빛 크레이언의 몸에 부딪히자 크레이언의 몸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도 완전히 타격을 상쇄시킨 것은 아닌지 크레이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크윽, 다른 자식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모, 모두 거의 다 왔다고……!”

폭스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답했다.

“죽어라!”

파밧.

이내 권경을 쏘아대던 카나리아가 땅을 박차고 크레이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무지한 적에게 성령의 철퇴를!”

“빌어먹을!”

콰앙.

우윳빛 신성력에 휩싸인 카나리아의 주먹과 청동빛 크레이언의 주먹이 부딪치며 커다란 폭음을 터트렸다. 크레이언의 곁에서 몸을 추스르던 폭스가 충격파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벌렁 넘어졌다.

“으윽.”

이내 격돌 끝에 거리를 벌린 크레이언이 카나리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뿌드득. 네놈도 네놈 동생처럼 만들어주마!”

움찔.

크레이언의 말에 카나리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도 잠시, 카나리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것도 좋지, 크큭.”

한차례 낮은 광소를 흘린 카나리아가 입을 열었다.

“심판의 권능을 가진 성령의 권세여, 지금 나의 주먹에 깃들라.”

우우웅.

카나리아의 오른쪽 주먹이 은은한 새하얀 빛을 뿜었다. 점차 거세져가는 기운에 크레이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크윽. 철(鐵)! 금(金)!”

지잉.

크레이언의 몸이 금색으로 물들며 동시에 은은한 금광이 뿜어져 나왔다.

“심판의 권능을 가진 성령의 권세여, 지금 나의 주먹에 깃들라.”

이번에는 카나리아의 왼손으로 기운이 몰리며 마찬가지로 새하얀 빛을 뿜었다. 동시에 카나리아의 주먹이 슬쩍 움직였다.

투팡!

“쿠악!”

거대한 대포를 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크레이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문을 건 주먹으로 백보신권을 시전한 것이다.

비틀거리는 크레이언을 보는 카나리아의 눈이 빛났다.

“1분 동안만 얌전히 뻗어 있어라!”

파밧.

땅을 박차고 튀어 오른 카나리아가 비틀거리는 크레이언을 향해 막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투명한 막이 크레이언의 앞에 생성됐다.

쿠와앙.

카나리아의 주먹에 부딪힌 투명한 막이 커다란 폭음을 터트리며 크게 출렁였다.

“크윽, 누구냐!”

재빨리 몸을 날려 내 곁으로 다가온 카나리아가 이를 갈며 외쳤다. 그와 동시에 경기장 밑에서 한 무리가 경기장 위로 올라섰다.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유저들과 검은 사자 길드의 간부들이었다. 거기에는 해골과 베팔, 그밖에 월향과 때까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거의 15명에 가까운 인원이었는데 하나같이 거대 길드의 길드 마스터나 간부 유저들이었다. 베팔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십대 초중반이었다.

“쓰레기 주제에 감히 우리에게 대들다니……!”

앞으로 나선 월향이 이를 갈며 나를 째려봤다.

“주만 오라버니! 거기서 뭐 하세요!

“크윽.”

날카로운 월향의 외침에 투명한 막 안에서 포션을 먹던 크레이언이 신음을 삼키며 폭스와 함께 무리의 곁으로 다가갔다.

“크큭, 쓰레기들이 다 모였군.”

“그러게 말이야, 큭.”

내 말에 카나리아가 비릿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자 베팔이 얼굴을 구기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누구한테 하는 소리냐! 오냐오냐 했더니 감히……!”

노호성을 터트리는 베팔의 모습에 내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네놈도 드래곤 클럽이냐?”

내 말에 모여 있던 무리들이 흠칫하며 진지하게 바뀐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놈들은 베팔과 해골밖에 없었다.

“드래곤 클럽이라니? 무슨 개소리냐!”

고개를 갸웃한 베팔이 앞으로 나서 스틱을 흔들며 외쳤다. 그런 베팔의 모습에 내 입에서 싸늘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크큭, 멍청한 놈. 네놈 또한 진실을 모르고 놀아나는 다른 유저들과 별다를 것이 없군.”

“그, 그게 무슨 소리냐!”

“한마디로 지금 네놈의 꼴이 우습다는 이야기다.”

“이런 미친… 컥!”

내 조롱에 막 소리를 지르려던 베팔이 돌연 작살 맞은 물고기마냥 몸을 떨었다.

콰드득.

동시에 베팔의 가슴을 뚫고 나온 검이 그대로 한 바퀴 회전하며 소름끼치는 파육음을 냈다. 베팔의 가슴을 뚫은 검의 주인은 놀랍게도 고추가침퉤퉤였다. 고추가침퉤퉤의 손에는 언제 꺼냈는지 모를 날카로운 장검이 들려 있었다.

“왜……?”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부릅뜬 베팔의 모습에 고추가침퉤퉤가 싸늘한 웃음을 머금었다.

“쓰레기를 치우는 데 이유가 필요하나?”

콰드득.

“커헉!”

비릿한 웃음을 흘린 고추가침퉤퉤가 검을 뽑아내자 베팔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홍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무, 무슨 짓이야!”

베팔이 고추가침퉤퉤의 검에 쓰러지자 해골이 검을 들어 고추가침퉤퉤를 경계하며 소리쳤다. 이내 전과 같은 싸늘한 웃음을 흘린 고추가침퉤퉤가 말을 이었다.

“처리해라, 월향.”

“응, 오빠.”

“뭣?”

뒤에서 들리는 월향의 목소리에 해골이 황급하게 몸을 돌렸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는 월향뿐이었다. 해골이 뒤늦게 다시 몸을 돌리려 했다.

“멍청하군, 쓰레기.”

푸욱.

어느새 해골의 뒤로 다가간 고추가침퉤퉤가 싸늘히 중얼거리며 검을 들어 해골의 가슴을 쑤셨다. 언령사라고는 생각지 못할 빠르고, 정확한 솜씨였다.

“커흑, 왜, 왜……?”

“쓰레기들은 죽을 때 항상 똑같은 것을 물어보는군.”

푸확.

싸늘히 웃으며 검을 뽑은 고추가침퉤퉤가 쓰러지는 해골의 몸 위로 침을 뱉으며 말했다.

“쓰레기를 치우는 데 이유가 필요하나? 응? 하핫, 하하하하!”

한차례 앙천광소를 터트린 고추가침퉤퉤가 월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쓰레기들을 판타즈마 월드에 영구 접근 금지시켜라. 무슨 수를 써도 상관없다.”

“알겠어요.”

월향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뿌드득, 네놈도 드래곤 클럽이었냐!”

“아, 그래.”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고추가침퉤퉤의 모습에 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죽여주마!”

살기 가득한 내 말에 고추가침퉤퉤를 비롯해 월향 그리고 나머지 드래곤 클럽이 조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네놈에게 그럴 힘이 있을까?”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반문하는 고추가침퉤퉤의 말에 내 입이 닫히는 것도 잠시, 곧 주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기운에 내 입가에 고추가침퉤퉤와 같은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물론, 한번 죽어보겠나?”

“해봐라, 쓰레기.”

가소롭다는 듯이 입매를 비트는 고추가침퉤퉤를 향해 나 또한 입매를 비틀며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생각이다, 쓰레기.”

고추가침퉤퉤를 향해 조소를 날림과 동시에 사방에서 우렁찬 포효가 울려 퍼졌다.

“크허어어엉!”

“우어어어!”

-크르릇! 크르릇!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포효에 드래곤 클럽은 물론 한창 싸우던 유저들 또한 싸움을 멈추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무, 무슨……!”

“뭐야!”

“무슨 소리야!”

점차 그 크기를 키워가는 포효에 고추가침퉤퉤가 이를 갈며 물었다.

“설마 암흑투마군단이냐!”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라, 쓰레기.”

두두두두.

땅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무투대회장 곳곳에서 암흑투마군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가 질릴 정도의 엄청난 수였다.

“크허엉! 하등한 인간들을 쓸어버려라!”

“우어어어! 죽여라!”

-크르릇! 크르릇! 라데스 님께 영광을!

드워프들과 오크 그리고 몽마족과 나이트메어를 상대로 빠르게 밀어 붙이던 전세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사방에서 쏟아져 나온 암흑투마군단이 유저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중 수인족의 활약은 당연 발군이었다.

[블러드: 게리롱, 혹시 모르니 길드원들을 빼라.]

흉성에 빠져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하는 암흑투마군단이 발정 난 낙타들 길드원들을 구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리롱: 알겠다. 후방에 빠져 있으마.]

[블러드: 그리고 무라사마의 위치 좀 부탁하마.]

[게리롱: 알겠다, 크크크큭.]

정말 재미있다는 듯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게리롱의 귓속말에 나 또한 나직한 웃음을 터트리며 이젠 지옥이라 부를 만한 무투대회장을 바라봤다.

“으아악! 살려줘!”

“빌어먹을 몬스터들! 크아악!”

“블러드! 블러드를 죽여라! 그놈만 죽이면 끝이야!”

누군가의 말을 시작으로 암흑투마군단과 치열하게 싸우던 유저들 중 일부가 나를 죽이기 위해 경기장으로 달려왔다.

이내 순식간에 뒤집힌 전세에 고추가침퉤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여주마……!”

“할 수 있으면 해봐라.”

분노에 떨며 각자 무기를 꺼내드는 드래곤 클럽과 나를 죽이기 위해 경기장으로 달려오는 유저들을 보는 내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동시에 내 도를 중심으로 마기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블러드: 잠시만 피해 있어라. 천살을 사용하겠다.]

[카나리아: 크레이언은 죽이지 마라.]

카나리아의 귓속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하며 힘을 끌어올리자 마기의 폭풍이 점차 거세졌다. 이내 몸을 날려 경기장 밑으로 사라지는 카나리아를 뒤로한 채 마기를 끌어올리자 도를 중심으로 모이던 마기가 한층 더 난폭하게 휘몰아쳤다.

쿠와아아아.

“주, 죽여 버리겠다!”

엄청난 마기에 몸을 떨던 어느 검은 옷의 어쌔신이 단검을 고쳐 잡았다. 이내 마기를 끌어 모으는 내 입에서 우렁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 어떤 수인족의 포효보다 강력한 포효, 바로 제왕의 포효였다.

“크허어엉!”

“큭.”

흠칫.

이내 막 나를 향해 몸을 날리려던 어쌔신이 흠칫하며 단검을 잡은 그 자세로 굳었다.

“빌어먹을 자식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했는지 고추가침퉤퉤가 이를 갈며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내가 보는 상대는 고추가침퉤퉤가 아니었다.

“월향……!”

나직한 내 부름에 실드를 시전하며 나를 노려보던 월향이 움찔했다. 그것도 잠시, 곧 왜 부르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내 말에 월향의 몸이 다시 한 번 움찔했지만 잠시였다.

“뭐지?”

“지난 2년간…….”

내가 잠시 말을 끊자 월향이 의문 섞인 눈으로 나를 재촉했다. 이내 굳게 닫혔던 입을 열며 천천히, 마음 깊은 곳에 담아뒀던 물음을 던졌다.

“지난 2년간 나와 함께 게임하며 만든 추억 또한 단순한 유희였냐……?”

“…….”

내 물음에 월향은 물론이고 나머지 드래곤 클럽들의 얼굴 또한 멍하게 풀렸다. 이내 멍하게 풀린 월향의 입가가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나직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 호호, 호호호… 깔깔깔!”

간드러지는 듯한 월향의 웃음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이내 한참을 웃던 월향이 큭큭거리며 입을 열었다.

“역시 재미있어. 철중이 오빠가 왜 네 곁에 붙어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깔깔.”

“…뭐?”

“호호, 추억? 그런 건 개나 주라 그래. 넌 쓰레기랑 노는 게 추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악몽이면 몰라도. 깔깔깔.”

꾸욱.

“그…래?”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자 입술에서 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비릿한 피 맛에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팍까지 도를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망설이지 않겠다.”

“뭐… 꺄악!”

내 중얼거림에 반문하려던 월향이 피부를 할퀴는 날카로운 폭풍에 비명을 질렀다. 마기로 이루어진 폭풍이 향하는 곳은 한곳, 바로 나의 도였다.

드드드드.

내 손이 도의 떨림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떨렸다.

이벤트의 형식을 빌리지 않았다면 분명 드래곤 클럽에게 훨씬 더 유리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 클럽이 이벤트 형식을 빌림으로써 유저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것 때문에 자신들의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지 못할 것이다.

“24시간 후에 땅이나 치면서 후회해라.”

“주만이 오빠! 저놈 말려요! 천살이라구요!”

“뭐?”

저번에 천살을 한 번 겪었던 월향이 주변으로 몰려드는 마기와 내 자세를 보고 천살임을 눈치 채고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외치자 고추가침퉤퉤와 크레이언 그리고 폭스가 눈을 부릅뜨며 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피식.

“다 꺼져라. 천살(千殺).”

후우웅.

차가운 조소와 함께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내 머리칼이 휘날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앞의 드래곤 클럽도, 주변에서 나를 죽이기 위해 몰려드는 유저들도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스스슥.

내 손에 들린 도가 내 의지를 벗어나 스스로 움직이며 허공에 열십자(十)자 형태를 그었다.

허공에서 십자 형태의 상처가 쩍 벌어지며 음습한 악계의 강풍을 풍겼다. 동시에 악계의 소악령들이 상처의 틈으로 새어나왔다.

크에에엑!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끔찍한 모습의 소악령 한 마리를 시작으로 엄청난 수의 소악령이 해일처럼 쏟아져 나와 사방으로 퍼졌다. 아마 성향과 종족이 바뀐 것이 스킬에 영향을 준 것인지 저번 파라다이스에서 사용했을 때보다 거의 3~5배 가까이 많은 소악령들이 뛰쳐나왔다.

크에에엑!

쿠웨엑!

가장 먼저 소악령의 제물이 된 사람은 나에게 달려들려고 했던 드래곤 클럽의 어쌔신이었다.

“저, 저리 꺼져!”

마치 주인을 만난 강아지라도 되는 것처럼 한 마리 소악령이 어쌔신의 앞으로 다가가 꼬리를 흔들자 어쌔신이 기겁을 하며 발작적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애초에 영체(靈體)인 소악령에게 마검, 혹은 성검이 아닌 보통 무기로 하는 공격이 통할 리가 없었다. 자신의 몸을 휘젓는 단검이 거슬렸는지 꼬리를 흔들던 소악령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크에에엑!

푸욱.

“컥.”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소악령이 어쌔신의 가슴에 파고들자 어쌔신의 입에서 울컥 하고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그걸 시작으로 주변의 소악령들이 어쌔신의 몸을 마구 통과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럴 때마다 어쌔신의 입은 물론 귀, 코, 할 것 없이 모든 구멍에서 붉은 피를 게워냈다.

꾸르륵.

수십 마리의 소악령에게 집중 공격을 당하던 어쌔신이 마침내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몸을 뉘었다.

이내 조금 전만 해도 어쌔신이었던 모래 더미에서 수십 마리의 소악령들이 튀어나와 고추가침퉤퉤를 비롯해 나머지 드래곤 클럽을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크에에에엑!

퀘에에엑!

“뭐, 뭐야… 으아악!”

“사, 살려줘!”

“으아악.”

“도, 도망쳐! 빨리 귀환! 귀환!”

방금 전까지 무투대회장이 지옥이었다면 지금은… 지금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처절함이 넘치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지옥으로 따지자면 가장 깊은 곳의 무간지옥이라고 할까.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소악령들이 무투대회장을 자기들 집처럼 헤집으며 살육의 그림을 그렸다. 비명의 음악을 연주했다. 한 편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이, 이건 아니야!”

월향과 폭스의 보호를 받으며 뒤로 후퇴하는 크레이언이 나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믿지 못하겠다는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쓰레기 따위가… 쓰레기 따위가 감히……!”

“쓰레기라… 쓰레기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군.”

파앙.

크레이언을 향해 냉소를 흘리며 몸을 날려 소악령들의 틈새를 헤쳐 월향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시, 실드!”

쩌어엉!

“꺄악.”

실드를 울리는 강맹한 위력에 월향의 입에서 고음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월향의 실드가 출렁이며 점차 옅어졌다.

“오, 오빠들, 더 이상은 무리예요!”

월향의 투정에 크레이언이 이를 갈며 폭스를 향해 외쳤다.

“지수야, 네가 시간을 끌어라!”

“하, 하지만 형님…….”

찰싹.

“어서 하지 못해! 이번 이벤트 담당자는 유영혁 그 자식이라 지금 죽으면 24시간 동안 접속도 못한단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크레이언의 외침에 폭스가 마지못해 앞으로 나섰다. 이내 양손에 그림자 단검을 만든 폭스가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쓰레기 자식…! 천살이 끝남과 동시에 죽여주마!”

“아무래도 네놈이 먼저 죽을 것 같군.”

[블러드: 보호 부탁하마.]

폭스를 향해 냉소를 날리며 카나리아를 향해 귓속말을 보내자 경기장 밑에서 검은 물체가 튀어 올라 내 곁에 착지했다. 은은한 신성력을 몸에 두른 붉은 머리의 무투가, 바로 카나리아였다. 카나리아가 경기장 위로 올라오자 폭스가 움찔했다.

“30초만 시간을 끌어라.”

“알겠다.”

파앙.

짧게 답한 카나리아가 폭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무투대회장을 바라보는 내 눈이 차갑게 빛났다. 천살의 시전 시간이야 이미 끝나 있었다. 시전 시간이 비록 30초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30초 동안 엄청난 피해를 주는 것이 바로 천살이다.

어쨌든 지금 무투대회장은 천살로 혼란에 빠진 유저들을 암흑투마군단과 나이트메어, 몽마족, 드워프들이 휩쓸고 있었다. 게리롱과 발정 난 낙타들은 후방으로 빠져 도망치는 유저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특히나 나이트메어는 여태껏 당하고 있던 것을 분풀이라도 하듯이 신나게 웃으며 언령을 이용해 유저들을 도륙했다.

“냐하하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태산! 날카로운 바람으로 이루어진 해일!”

나이트메어의 말 한마디에 수십 명의 유저들이 돌연 엄청난 크기의 태산에라도 눌린 듯 허리를 굽히며 힘을 쓰다 마침내 볼썽사납게 바닥을 나뒹굴다가 보이지 않은 무언가에 눌려 죽었다. 또 나이트메어를 향해 신성 마법을 걸던 성직자들은 보이지 않은 바람의 칼날에 당한 것처럼 온몸이 난자되어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그나마 마법사들이 안티 매직으로 언령의 힘을 최소화시키고 있었기에 고레벨의 유저들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 * *

‘어쩔 수 없이 변해야 하는 건가.’

1초라도 빨리 폭스와 월향을 처리하고 무라사마를 처리하러 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싫어도 변신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후우.”

나직한 한숨과 함께 내 입이 열리며 묵직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마족화(魔族化).”

수인족 고유 스킬이었던 야수화(野獸化)가 내가 마족이 됨으로써 한층 더 강력하게 변한 것이 바로 마족화(魔族化)다. 말 그대로 마족으로 변하는 것이다.

마족 유저들 중에서도 쓰리 스타 이상의 유저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고위 스킬로, 스탯은 물론이고 공격력, 방어력, 항마력, 그 밖의 기타 등등 거의 100%에 가까이 모든 능력들이 5배 이상 향상되는 엄청난 스킬인 것이다.

페널티 또한 적어 3일에 한 번, 현실 시간으로 12시간 동안 변신할 수 있고 시전자가 원하거나 12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변신이 풀리게 되어 있다.

투웅!

거대한 망치로 심장을 맞은 것 같은 강한 충격이 심장에서 느껴졌다. 내 입에서 미약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크윽…….”

두근, 두근, 두근…….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마치 바로 귀 옆에 심장을 가져다 댄 것처럼 심장소리가 엄청난 크기로 귓가를 때렸다.

투웅!

“커헉!”

다시 한 번 강렬한 통증과 함께 내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내 심장을 찌르는 통증을 참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뿌드득. 뿌득.

이를 가는 것과 같은 소리와 함께 두피가 찌를 듯이 아파왔다. 과거,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마족화 스킬을 사용했을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크아아아아!”

쿠콰카카카.

내 입에서 내 의지를 벗어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제왕의 포효와는 차원이 다른 막강한 포효에 주변의 마기가 마구 소용돌이쳤다.

무언가 머리를 뚫고 나오는 느낌과 함께 몸 깊은 곳에서 엄청난 힘이 용솟음쳤다. 야수화와는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엄청난 힘에 내 입에서 다시 한 번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

우드득. 우득.

포효와 함께 굽혔던 무릎을 펴고 몸을 일으키자 몸 여기저기에서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으음.”

몸에 남아 있는 미약한 통증에 신음을 흘리며 새롭게 변한 몸을 감상했다. 몸의 크기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는데 대신 피부색이 커피색보다 약간 짙은 검정색으로 변해 있었다. 굳지 따지자면 짙은 밤색이라고 할까?

가장 커다란 변화는 바로 머리였다. 연한 핏빛 장발을 뚫고 하늘로 치솟은 6개의 검정색 뿔은 마치 산양의 뿔과 비슷했지만 내뿜는 예기는 웬만한 검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다.

등에는 4장의 날개가 달려 있는데 차곡차곡 접혀 갑옷처럼 등과 옆구리를 가려주고 있었다. 또 엉덩이 쪽에는 공룡의 그것과 같은 꼬리가 달려 있었는데, 꼬리 길이만 해도 거의 2m에 가깝고 두터운 비늘에 싸여 있어 공격용으로 사용해도 될 듯했다. 더군다나 꼬리 끝에는 날카로운 단도와 같은 침이 박혀 날카로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게리롱: 뭐, 뭐냐, 그거?]

[염환: 에엑? 뭐야, 그 모습은!]

거의 동시에 머릿속으로 두 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란 것은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 치열하게 싸움을 하던 카나리아와 폭스 그리고 월향과 크레이언마저도 얼굴을 굳히며 나를 바라봤다. 나를 죽이기 위해 달려오던 주변의 유저들까지도 잠시 싸움을 멈출 정도였다.

“마, 마족? 부, 분명 기록 데이터에는……!”

폭스가 단검을 쥔 채 당황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뒤에서 몸을 회복하던 크레이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유영혁! 그 빌어먹을 자식이다!”

“빌어먹을……!”

유영혁이라는 상대를 향해 욕설을 내뱉는 폭스의 모습에 카나리아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싸움 중에 어디 한눈을 파는 거냐!”

파앙.

“크윽.”

다시 한 번 허공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놓고 있던 폭스가 신음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몸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주체 못할 정도의 강렬한 힘에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카나리아, 혼자 처리할 수 있겠지?”

내 물음에 카나리아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잠시뿐이었다.

“물론이다. 애초부터 저놈은 내 것이었다.”

자존심을 앞세우는 카나리아의 말에 나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확실히 폭스와 크레이언 그리고 월향이라면 카나리아 혼자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한 명 정도는 처리하지.”

도를 들어올리자 도를 따라 검붉은 마기가 자연스레 실처럼 따라 올라왔다.

“죽여주마.”

자신만만한 내 말에 폭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나 바로 폭스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걸렸다.

“킥, 키키킥, 키하하핫! 쓰레기 주제에 말이 많구나! 그래, 죽여봐라! 그래 봤자 한 번뿐이니까! 이 한 번이라도 실컷 승리감을 느껴봐라! 지금 당장은 유영혁 그 빌어먹을 놈이 서버 관리를 하고 있어 무리겠지만, 로그아웃한 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을 망하게 할 테니까!”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입으로 자신들의 약점을 술술 말하는 폭스의 모습에 내 입에서 냉소가 터져 나왔다.

“멍청한 놈.”

“뭐……?”

평소의 나였다면 온 실력을 다해야 폭스를 상대할 수 있겠지만 마족으로 변한 지금은 아니다. 현재 내 힘은 내가 야수화를 한 상태의 5배가량. 설령 폭스가 3명이 온다고 해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인 것이다.

“이 쓰레기 자식이 감히……!”

폭스의 욕설이 채 여운을 남기기도 전에 내 몸이 폭스를 향해 움직였다. 예비 동작은 물론이고 움직일 때 나는 최소한의 소리마저도 나지 않는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뭐, 뭐야!”

순식간에 움직여 폭스의 코앞에서 멈추자 폭스는 물론이고 카나리아와 월향, 크레이언마저도 눈을 부릅떴다.

스르륵.

내 꼬리가 한차례 허공에서 출렁인 뒤 가볍게 내려앉았다. 동시에 손에 들린 도가 빠르게 움직였다.

“죽어라!”

“치잇.”

채챙.

아무런 소리 없이 허공을 가른 도가 폭스의 코를 가를 듯이 쇄도하자 짧게 혀를 찬 폭스가 황급히 두 자루 단검을 교차시켜 내 도를 막았다.

끼기긱.

그림자의 단검과 맞물린 도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불꽃을 튀겼다. 이내 교차된 두 개의 단 검 중 한 개를 뒤로 빼낸 폭스가 빼낸 단검을 휘두르며 눈을 빛냈다.

“하늘에 떠오른 죽음의 북두칠성! 데스 스타!”

전의 시합에서 나를 고전하게 만들었던 폭스의 데스 스타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전의 시합에서는 양손으로 시전하는 데스 스타였지만 이번에는 한 손으로 펼치는 데스 스타였다. 전의 것보다 위력도 약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진 스킬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에는 강맹해 보였던 데스 스타가 지금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스킬 처럼 느껴졌다.

‘막는다!’

퉁.

한차례 기합과 함께 도를 튕기자 도와 맞물려 있던 그림자 단검이 비틀리며 엇갈렸다. 동시에 마기가 휘감긴 내 도와 죽음의 기운이 휘감긴 폭스의 그림자 단검이 부딪쳤다.

쩌저저정… 쩍!

강맹한 기세로 내 도를 쳐내던 폭스의 데스 스타가 돌연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멈췄다. 동시에 데스 스타를 시전한 폭스의 그림자 단검이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다시 폭스의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치잇.”

타닷.

혀를 차며 거리를 벌린 폭스가 남아 있는 그림자 단검을 번뜩이며 살기 어린 목소리를 흘렸다.

“지금 이 혼돈의 길을 뛰어넘어 또 다른 나에게로 정착할 것이니, 섀도우 점핑……!”

스슥.

폭스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쑥 사라졌다. 자신의 그림자를 통해 상대의 그림자로 이동하는 스킬이었다. 동시에 내 그림자에서 불쑥 폭스의 상체가 튀어나왔다.

“차핫, 죽어라!”

“너나 죽어라!”

스팟.

내 손에 들린 도가 폭스의 손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째쟁.

한차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폭스의 손에 들린 그림자 단검이 부서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폭스의 눈이 번뜩였다.

“진짜는 이거다!”

쐐애액.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폭스의 나머지 손에 들린 단검이 싸늘한 예기를 뿌리며 내 명치를 노렸다. 이미 승리를 예견한 듯, 폭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런 폭스를 바라보는 내 입가에 또한 작은 미소가 걸렸다.

“멍청한 놈.”

폭스의 관자놀이를 향해 내 꼬리 끝에 달린 날카로운 가시가 푸욱 파고들었다. 동시에 폭스이 입에서 울컥하고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으, 으아아악!”

오른쪽 관자놀이를 뚫고 왼쪽 관자놀이를 통해 튀어나온 날카로운 가시 침에 폭스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쓰레기 자식.”

투두둑.

매끈한 검은빛을 뽐내는 꼬리가 폭스의 머리에 박힌 채로 꿈틀거리며 폭스의 뇌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폭스의 두개골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쩍 갈라졌다.

“끄, 끄으!”

폭스가 흰자를 까뒤집으며 새하얀 거품을 흘렸다. 아무리 스페셜 직업을 가졌다고 하지만 심장과 함께 가장 중요한 급소로 설정되어 있는 머리를 관통당한 폭스가 오래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혀, 형님……!”

스스스.

마지막으로 크레이언을 향해 손을 뻗은 폭스의 몸이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지, 지수 오빠가!”

“이 빌어먹을 자식!”

크레이언은 여기가 게임 속이라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동시에 크레이언의 손에서 푸른 뇌전이 뿜어져 나와 크레이언의 양팔을 휘감았다.

“강(强), 뢰(雷)!”

치치칙.

“주, 주만 오빠!”

팔을 휘감아 올라 이제는 몸 전체를 뒤덮은 푸른색의 뇌전에 실드를 시전하고 있던 월향이 주만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내 월향을 힐긋 쳐다본 크레이언이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잘 봐둬라. 이런 쓰레기는 한번 기어오르면 확실히 죽여둬야 하니까.”

파밧.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푸른 뇌전으로 변한 크레이언의 몸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폭스의 데스 스타를 가뿐히 뛰어넘는 강맹한 기운이었기에 아무리 마족화를 했어도 방심할 수 없었다.

“치잇.”

짧게 혀를 차며 막 도를 휘두르려는 찰나, 내 곁에서 새하얀 인영이 튀어나와 푸른색 뇌전에 휘감긴 크레이언과 부딪쳤다.

사방으로 퍼지는 푸른 뇌전 사이로 새하얀 인영의 몸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신성력이 마구 요동치며 경기장을 녹이는 뇌전을 가라앉혔다.

“이놈은 내 몫이라고 약속되어 있을 텐데.”

새하얀 인영, 카나리아의 말에 크레이언이 피가 흐르는 주먹을 감싸 쥐며 이를 갈았다.

“크윽, 이 빌어먹을 쓰레기가……!”

이를 가는 크레이언을 향해 차가운 냉소를 흘린 카나리아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라. 네게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

전에 봐왔던, 멍한 얼굴의 멍청이가 아닌 당당한 남자의 모습을 한 카나리아의 모습에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동시에 내 입가에 카나리아의 그것과 같은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조직폭력배는 업소 같은 걸 관리한다지? 나중에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하지. 네가 관리하는 업소에서 말이야.”

멈칫.

내 말에 막 걸음을 옮기려던 카나리아의 걸음이 멈췄다.

“그래. 미안하지만 좀 오래 기다려야 할 거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최소 살인 미수에다 게임 내에 바이러스를 소유한 죄는 사이버 법률에 위배되어 적어도 몇 년은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

“죽을 때까지만 기다리지.”

나직이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 내 눈에 실드 안에서 입술을 깨무는 월향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내 손에 들린 도가 낮은 공명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잠시 잊고 있었군.”

“뭐, 뭐?”

싸늘한 내 말에 월향의 얼굴에 새하얗게 변했다. 이내 자신이 시전한 실드를 믿고 있는 것인지 월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뭐, 뭘 어쩌겠다는 거냐!”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나를 쏘아붙이던 월향이 서서히 거리를 좁히는 나를 보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내 월향을 바라보는 내 입에서 싸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우웅.

동시에 도에서 강맹한 도기가 피어올라 마기와 함께 뒤섞여 검붉은색의 도기를 뿜어냈다.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강한 기운에 도 주변의 허공이 마구 일그러졌다.

저벅저벅.

“다, 다가오지 마!”

도를 들고 월향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월향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월향의 비명을 들은 크레이언이 막 나를 향해 몸을 날리려 했지만 카나리아의 공격에 혀를 차며 방어에 급급했다. 크레이언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한차례 신음을 흘린 월향이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자식, 잘 있어라.”

로그아웃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막 입을 여는 월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딜!”

부우웅. 꽈아앙!

“꺄아악!”

실드를 때리는 커다란 도기에 막 로그아웃을 하려던 월향이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월향을 보호하고 있던 실드가 옅어졌다.

[게리롱: 야! 찾았다!]

이내 귀를 때리는 게리롱의 목소리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내 움직임이 멈췄다. 동시에 월향을 바라보던 내 얼굴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드디어!’

스윽.

몸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흥분에 웃음을 흘리며 들었던 도를 내리자 잔뜩 굳어 있던 월향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의문 섞인 월향의 웃음에 내 입에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큭, 내가 그냥 간다고 했나?”

“뭐……?”

고오오오.

월향의 목소리가 내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마기에 먹혔다.

“파천기.”

우우웅.

불길한 기운이 손목에서부터 뿜어져 나와 내 도를 휘감았다. 동시에 바닥을 향했던 도가 다시 월향을 향하며 날카로운 빛을 뿌렸다.

“오늘을 평생 기억해라. 무한참(無限斬)!”

콰앙!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동시에 내 손에 들린 도가 무직한 파공음과 함께 허공을 가르며 실드에 부딪쳤다.

콰아앙!

손목에 전해지는 찌릿한 통증과 함께 내 손에 들린 도가 다시 한 번 허공을 가르고 실드를 때렸다.

도가 부딪칠 때마다 도를 휘감고 있던 마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마족화를 하기 전의 평소의 나였다면 상상도 못할 위력이었다.

“로그… 꺄악!”

막 로그아웃하려던 월향이 실드에 가해진 충격에 비명을 지르며 주춤했다. 동시에 연이어 허공을 가른 도가 실드를 강타했다.

마기를 퍼트리는 강력한 일격에 마침내 실드가 이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잠시 주춤했던 도가 다시 허공을 갈랐다.

“죽어라!”

부우웅.

콰직.

“꺄아악!”

밑에서부터 사선으로 그어진 도가 월향의 오른팔을 끊었다. 이내 월향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닥…쳐라!”

부우웅.

이번에는 위에서부터 밑으로 사선으로 그어진 도가 월향의 왼팔을 끊었다.

“꺄, 꺄악!”

쇳소리를 연상케 하는 비명을 지른 월향이 비틀거리며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두 팔을 잃은 상태였기에 그저 추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시작된 이상 체력이 ‘1’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목표를 베는 것이 바로 무한참이다. 이내 허공을 가른 도가 다시 월향을 노렸다.

부우웅.

서걱.

“큭.”

이제는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지 옆구리를 베인 월향이 신음을 흘렸다. 이내 한 바퀴 회전한 도가 월향의 반대쪽 옆구리도 깊게 베었다.

“사, 살려줘……!”

양팔이 사라지고 양 옆구리에서 피를 쏟아내는 처절한 모습의 월향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처절한 월향의 모습에 도를 멈추려고 했지만 무한참이 발동된 내 팔에는 자비가 없었다.

부우웅.

“제, 제발……!”

허공으로 치솟았다 월향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는 내 도에 월향의 얼굴 위로 절망이 떠올랐다. 동시에 내 입에서 낮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안 돼!”

퍼억.

나의 외침과 동시에 도가 정확히 월향의 정수리에 꽂혔다.

피슉. 끼기긱.

한차례 소량의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가 싶더니 월향의 두개골이 도에 갈라지는 섬뜩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아으……!”

월향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와 함께 도를 잡은 내 손이 월향의 목숨을 완전히 끊기 위해 움직였다.

푸화아악.

“커어억.”

월향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새하얀 뇌수와 함께 붉은 피를 뿌렸다. 가래 끓는 비명을 지른 월향의 입을 시작으로 월향의 몸이 내 도에 반으로 양단되어 피분수를 뿜었다.

휘우우우.

스스슥.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모래로 변한 월향의 몸이 아수라장 속으로 흩날렸다.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빌어먹을……!’

감상에 빠질 시간도 없이, 월향을 처리한 내 몸이 다음 목표물을 찾기 위해 경기장 밑으로 움직였다.

“브, 블러드다!”

“놈을 죽여라!”

“빌어먹을 새끼!”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유저들이 공격을 하다 말고 저마다 나를 향해 살의를 내뿜었다.

“대 족장이다! 모두 힘을 내라!”

“암흑투마군단을 위하여!”

-크르릇! 라데스 님을 위하여!

반면에 암흑투마군단은 나를 향해 존경을 나타내며 무기를 거뒀다.

“죽어라, 이 새끼야!”

어느 게르맨더 전사 한 명의 목을 자른 전사 한 명이 나를 향해 검을 곧추세우며 달려들었다. 내 몸 또한 전사를 향해 쇄도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

후우웅. 까강!

검과 도가 부딪치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흘렸다. 그래도 꽤 고레벨의 유저였는지 그저 뒤로 밀리기만 했을 뿐, 검과 함께 양단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까가강. 까강.

쩌적.

두 번, 세 번 연이어 부딪치는 전사의 검 위로 흉한 금이 번졌다.

쨍그랑.

“허억.”

마침내 힘겹게 버티던 검이 반으로 깨지자 미친 듯이 내 도를 막던 전사가 헛숨을 삼켰다.

“제길!”

황급히 몸을 빼내려는 전사의 옆구리를 향해 내 도가 쇄도했다.

“하앗!”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번뜩이는 도가 전사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갔다.

부우욱.

“크아아악.”

갈비뼈가 부러지고 장기들이 끊어지는 섬뜩한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짐과 동시에 나는 다시 한 번 거친 일갈을 터트렸다.

“꺼져라!”

퍼어엉.

후두두둑.

전사의 옆구리에 박혀 있는 도에 그대로 마나를 주입하자 전사의 몸이 풍선처럼 터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동시에 갈 곳을 잃은 내 도가 이름 모를 마법사를 향해 쏘아졌다.

“히익! 사, 살려줘! 매직 미사일!”

저레벨의 유저였는지 다소 가벼운 로브 차림의 마법사가 나를 보고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매직 미사일을 시전했다. 하지만 투 스타 이하의 화염계 마법마저도 가볍게 무시하는 내 항마력이 겨우 초보 마법사들의 마법인 매직 미사일에 타격을 입을 리가 없었다.

텅!

가슴을 노리는 매직 미사일을 가볍게 쳐내고 그대로 도를 휘두르자 마법사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허공으로 치솟았다 내 몸 위로 떨어지는 붉은 피에 인상을 구기는 찰나 내 뒤통수로 찌릿한 통증이 전해졌다. 이내 둥그렇게 말고 있던 꼬리를 뒤쪽으로 뻗자 꼬리 끝에서 둔탁한 느낌이 전해졌다.

“어윽!”

부들부들.

내 뒤에서 기습할 준비를 하고 있던 어쌔신이 심장에 꼬리가 박힌 채 부들부들 떨다 모래가 되어 사라졌다.

“저, 저럴 수가…….”

“저걸 어떻게 죽이라고!”

“도, 도망쳐야 되는 거 아냐?”

방금 전까지만 살의를 내뿜던 유저들이 하나 둘 굳은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내 체력 또한 거의 바닥을 보이는 상태였기에 마음속으로 유저들의 후퇴를 바라는 찰나, 유저들의 뒤에서 비명 소리와 함께 핏빛 폭풍이 한차례 휘몰아쳤다.

“대 족장!”

“대 족장님!”

핏빛 폭풍의 정체는 바로 야수연합의 족장들이었다.

내 가디언인 티나를 비롯해 카인 그리고 알카와 텍사스, 그 밖의 각 일족의 족장들이 무기를 쥐고 나타난 것이다. 한 명 한 명 모두가 쓰리 스타 이상인 족장들의 등장에 주변 유저들의 분위기가 바싹 굳었다.

“크허어엉! 대 족장을 해하려 한 자들이다! 다 죽여라!”

“크허엉!”

카인의 외침을 시작으로 각 족장들이 무기를 쥐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난 무한참의 부작용으로 ‘1’로 변한 체력 때문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기에 족장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런 표정으로 다가온 티나가 황급히 포션을 꺼내 내 몸에 쏟아 부었다. 동시에 바닥을 보이던 내 체력이 서서히 차올랐다.

“괜찮다.”

걱정스런 표정의 티나를 안심시킨 뒤 게리롱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블러드: 게리롱, 어디냐!]

[게리롱: 나 말이냐, 아니면 무라사마 자식 말이냐?]

[블러드: 무라사마 말이다.]

잠시 말이 없던 게리롱이 다시 말을 이었다.

[게리롱: 귀빈석으로 올라와라!]

스윽.

게리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시던 포션병을 버린 뒤 도를 들고 티나를 향해 외쳤다.

“티나! 나를 따라와라!”

“예!”

파밧.

내 명령에 티나가 힘차게 답하며 내 뒤를 좇았다.

귀빈석으로 가는 틈틈이 나를 죽이려 드는 유저들을 처리하면서도 최대한 빨리 움직여 귀빈석으로 향했다. 귀빈석으로 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계단을 통해 움직여야 했다.

‘제길!’

인상을 구기며 막 계단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나의 몸을 감싼 날개가 내 눈에 들어왔다.

“티나! 넌 계단을 통해 귀빈석으로 와라!”

“예!”

계단으로 몸을 날리는 티나를 뒤로하고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날개를 펼치는 상상을 하자 내 몸을 감싸고 있던 4장의 날개가 곧 움찔하며 서서히 모습을 보였다.

파앙.

마침내 4장의 날개가 칠흑 같은 검은빛을 내뿜으며 그 위용을 뽐냈다.

한 장, 한 장 크기가 거의 2m 가까운 거대한 날개 4장이 주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박쥐의 날개와 비슷하지만 표면은 날카로운 가시와 딱딱한 각질로 뒤덮여 있었고, 끝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달려 있다.

‘난다!’

하늘로 난다는 생각과 함께 날개에 힘을 가하자 하늘로 치솟았던 날개가 점차 움직이는가 싶더니 곧 크게 출렁이며 내 몸을 띄웠다.

펄럭펄럭.

후우우.

마치 와이번의 날개 소리와 같은 거대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모래 바람이 몰아쳤다. 이내 내 몸이 점차 하늘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곧 빠른 속도로 비상했다.

볼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의 느낌에 감탄할 새도 없이 귀빈석에 도착한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게리롱!”

“여어, 보스. 왜 이렇게 늦게 왔냐? 쿨럭.”

한 움큼 피를 토하는 게리롱의 모습에 황급히 날개를 접고 귀빈석에 내려 앉아 게리롱에게 달려가자 게리롱이 손을 들어 나를 제지했다.

“왜……!”

내 물음에 검붉은 피를 게워내던 게리롱이 평소의 장난기 가득하던 웃음 대신 힘겨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방심하지 마라. 그리고 웬만하면 게임 접지 마라.”

“뭐……?”

후두두둑.

푸화악.

내 물음에 채 여운을 남기기도 전에 게리롱의 몸이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피보라를 일으켰다.

“게, 게리롱!”

“시끄럽군.”

“……!”

모래가 되어 사라지는 게리롱의 이름을 부르짖는 내 귓가에 차가운 목소리가 꽂혔다.

‘설마……!’

마음속에는 ‘확신’이라는 감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마’ 하는 생각이 내 마음을 울렸다.

시리도록 차갑고 세상 어느 일에도 관심이 없을 듯한 무심한 목소리! 과거의 추억 속에서 나를 마스터라 부르며 항상 곁에 있어준 단 한 사람!

“무라…사마!”

경악 섞인 목소리로 무라사마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돌리자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는 검을 닦는 한 유저의 모습이 보였다.

은색의 영롱하게 빛나는 갑옷과 함께 검은색 장발과 검을 길게 늘어트린 유저가 바로 한때 검은 사자 길드의 부길드 마스터였던, 지금은 길드 마스터로 있는, 크레이언과 함께 드래곤 클럽의 또 다른 리더!

뿌드득.

내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서늘하게 울렸다. 동시에 나를 바라보던 무라사마의 무표정한 얼굴이 잠시 움찔했다. 이내 말없이 나를 주시하던 무라사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감탄했다. 여기까지 올 줄이야.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이라는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충분히 잘했다.”

잠시 말을 멈춘 무라사마가 검을 들어 나를 겨눴다.

스윽.

“그러니 이제 그만 죽어라. 너 따위 때문에 내가 처음으로 계획한 이벤트가 망가졌다.”

“…큭, 크큭. 크크큭.”

무라사마의 말에 굳게 닫혀 있던 내 입술을 비집고 옅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크, 크하하하! 크하하하핫!”

그리고 미약했던 웃음소리가 곧 앙천광소로 변해 귀빈석을 휩쓸었다. 이내 한바탕 앙천광소를 쏟아낸 내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스윽.

“네놈도 다를 것이 없구나.”

무라사마를 향해 도를 겨누며 말하자 무심한 표정의 무라사마가 눈썹을 꿈틀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놈도 드래곤 클럽의 다른 쓰레기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 거다, 이 쓰레기 자식아.”

“…….”

신랄하다 못해 욕설에 가까운 내 말에 무라사마의 표정이 굳는가 싶더니 곧 무라사마의 얼굴 위로 처음으로 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떠올랐다. 바로 비웃음이었다.

“큭, 무슨 소린가 했더니 네놈 또한 저기 악을 쓰는 쓰레기들과 다를 바 없군. 그나마 쓰레기치고는 똑똑해서 다른 줄 알았더니…….”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끝을 흐리는 무라사마의 모습에 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오오오.

마기 또한 내 분노에 맞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내 거침없는 기세로 무라사마를 향해 뻗어나간 마기와 섭혼기가 막 무라사마를 덮치려는 순간, 마치 보이지 않은 무언가에 잘린 것처럼 마기와 섭혼기가 바스러졌다.

“무, 무슨!”

“너는…….”

경악 섞인 내 질문을 무시한 무라사마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왕, 아니… 황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

“…….”

갑작스런 무라사마의 물음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곧 차가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친 자식, 설마 네놈이 황제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래.”

순순히 자기 자신을 황제라 칭하는 무라사마의 모습에 내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황제란 말이다, 모든 사람들의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과거에는 핏줄 같은 쓸데없는 것으로 황제를 정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힘! 돈! 권력! 이 세 가지 조선을 충족시키는 자가 바로 황제다.”

“…….”

“그리고 마지막, 그 누구보다 인간을 잘 이용해먹을 줄 아는 자가 진짜 황제다.”

자신의 한 말이 꽤 만족스러운 듯, 잠시 눈을 감은 무라사마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네놈은, 그 누구보다 인간을 잘 이용해먹을 줄 안다는 소리냐?”

“물론이다.”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인 무라사마가 말을 이었다.

“네가 드래곤 클럽을 쓰레기라고 했지? 동감이다. 놈들은 진짜 쓰레기다. 자신들 부모의 배경을 믿고 나대는 쓰레기에 불과하지. 놈들은 아주 오래 전 황제들의 전철을 밟으려 하고 있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오직 쾌락만을 추구하는 무능한 인간들! 난 그런 쓰레기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큭, 네놈도 드래곤 클럽 아닌가? 어딜 봐서 다르단 거지?”

비웃음 가득한 내 물음에 무라사마가 입을 열었다.

“드래곤 클럽을 처음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나? 바로 나다. 내가 가장 먼저 드래곤 클럽을 만들었지. 그리고 그 다음으로 크레이언, 그러니까 박주만을 섭외했고 천천히 (주)한신 간부의 자식들을 섭외했다. 처음에는 쓸 만했던 놈들도 쾌락에 빠지니 다른 쓰레기들과 마찬가지더군. 놈들이 그러면 그럴수록 놈들 부모의 입지는 조금씩 줄어들었고 대신 내 아버지와 나의 입지는 점차 넓어졌다. 그럼에도 놈들은 여전히 쓰레기 짓을 그만두지 않더군. 내 입장에서야 고마운 일이었다. 놈들은 천 급 운영자 캐릭터를 단순히 자신들을 위해서만 사용했지만 난 아니다. 게임 내의 버그들을 정리하고 이벤트를 만들고 그 밖의 일을 하면서 회사 내 간부들은 물론 이사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면서 한 발짝씩 ‘사장’이라는 이름의 황제에 다가갔지.”

“미친 자식……!”

“원래 황제는 미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난 스스로 미친 것뿐이지. 너는 그 게임에 대한 재능만큼은 나를 뛰어넘는다. 나와 손을 잡자. 네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부를 주마. 다른 쓰레기들이야 너를 장난감으로 생각해 네게 시련을 준 것이지만, 난 다르다. 네가 과연 내 옆에 있어도 될 만한 사람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시련을 준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 시련을 이겨내고 지금 내 앞에 와 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너는 내 곁에 있을 자격이 된다. 어때, 나와 함께하겠나?”

“……!”

무라사마의 갑작스런 제의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수락할 만큼 매력적인 제의였다. 확실히 (주)한신의 힘이라면 내 팔자는, 파리 한 마리 죽이는 것보다 쉽게 펴줄 수 있다. 누가 뭐래도 (주)한신은 세계에서 10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그 제의를 수락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너는… 단순히 게임을 즐기기 위해 하는 유저를 어떻게 생각하냐?”

굳게 닫혔던 내 입에서 나직한 물음이 새어나왔다. 갑작스런 물음에 눈썹을 꿈틀한 무라사마가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용해먹을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군.”

스윽.

대답과 함께 도를 들어올리는 내 모습에 무라사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거절하겠다는 건가?”

“미친 자식, 너 같으면 널 이용해먹겠다는 놈 곁에 남고 싶겠냐!”

콰아아아아.

거친 외침과 함께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기 무라사마를 향해 쏘아졌다.

쿠르르릉.

파삭.

그러나 당장이라도 무라사마를 집어삼킬 것처럼 뻗어나간 마기가 무라사마의 코앞에서 바스러졌다.

‘어떻게!’

무라사마가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무라사마의 손에 들린 영광의 검이 레어 아이템이기는 하지만 마기를 소멸하는 능력 따위는 없다는 것은 과거의 사용자였던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무라사마가 입고 있는 갑옷 또한 ‘실버 드래곤의 비늘’이라는 아이템으로 내가 직접 구해다준 아이템이었다.

“혹시 이거 알고 있나?”

한차례 웃음을 흘린 무라사마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마족의 천적은 천족(天族)이라는 거!”

파아앙.

시원스러운 소리와 함께 무라사마의 등 뒤에서 오색찬란한 날개가 솟아났다. 총 4장이었는데 나와 같은 마족의 날개가 아닌, 새의 날개를 연상케 하는 새하얀 천사의 날개였다.

“서, 설마 천족?”

고오오오.

경악 섞인 내 물음에 무라사마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으로 대신 답했다.

‘무라사마가 천족이었다니……!’

마족보다 희귀한 것이 바로 천족 유저다. 일단 천족 유저가 되기 위해서는 선행을 엄청나게 해야 하고 신탁 또한 몇 번 받아야 한다. 그렇기에 천족 유저의 수는 마족 유저들의 수보다 몇 배는 더 적었다. 내가 있을 때, 무라사마의 종족은 분명 인간이었다. 그런 무라사마가 천족이 되었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빌어먹을 자식, 운영자 캐릭터를 이용해 종족을 바꿨군!’

천 급 운영자라면 판타즈마 월드의 웬만한 프로그램을 수정할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천 급 운영자에게 있어 캐릭터의 종족을 바꾸는 일 따위는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무라사마는 다른 드래곤 클럽들처럼 본래 캐릭터와 함께 천 급 운영자 캐릭터도 가지고 있는 상태! 무라사마에게 있어 종족 변화 따위는 간단했다.

“내가 인정한 남자가 이 정도로 놀라면 섭섭하지.”

한차례 짙은 조소를 흘린 무라사마가 손에 들린 영광의 검을 바닥에 꽂았다. 역시나 레어 아이템답게 딱딱한 바닥을 마치 두부처럼 쑤욱 파고들었다.

드드드.

이내 영광의 검이 꽂힌 귀빈석이 마구 흔들렸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크윽, 신성력?’

영광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에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그리고 바닥에 박힌 영광의 검이 신성력을 흡수하는가 싶더니 점차 모습을 바꿔갔다.

스스스.

화려했던 영광의 검이 한층 더 화려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그 길이를 늘였다. 크기는 오히려 작아졌는데 언뜻 보면 레이피어와 같은 종류의 검으로 보였다. 처음 보는, 아니 겨우 두 번째 보는 것이지만 저 검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실레온……?”

경악 섞인 내 외침에 대답이라도 하듯, 내 손에 들린 천살멸혼도와 암천섭혼갑이 마구 몸을 떨었다.

‘강하다!’

결단코 내 천살멸혼도에 밀리는 위력이 아니었다.

휙휙.

이내 아실레온을 몇 번 휘둘러본 무라사마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물었지? 너 같으면 널 이용해먹는 놈 곁에 남고 싶냐고.”

고오오오.

무라사마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아실레온이 막강한 신성력을 뿜으며 그 존재감을 내뿜었다. 동시에 내 손에 들린 천살멸혼도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이 마기를 내뿜으며 불길한 기운을 내뿜었다.

이내 아실레온을 가슴팍까지 들어올린 무라사마가 말을 이었다.

“난 남는다. 그놈이 이용해먹기 전에 내가 먼저 이용하면 되니까!”

“미친 자식!”

더는 들을 것도 없이, 내 몸이 땅을 박차고 튀어 올라 무라사마를 향해 쇄도했다.

“훗!”

무라사마 또한 짧게 숨을 내쉬며 나를 향해 마주 달렸다.

쩌엉!

콰르르릉.

신 급 아이템의 격돌에 쇳소리와 함께 우렁찬 천둥소리가 터져 나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치지지직.

동시에 아실레온과 천살멸혼도에서 뿜어져 나온, 서로 상반되는 기운에 매캐한 연기와 함께 역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죽여주마!”

부우웅.

재빨리 몸을 날리며 외침과 함께 도를 휘두르자 도에서 마기가 부채꼴 모양으로 무라사마를 향해 쏘아졌다. 동시에 무라사마의 검에서도 막강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앙.

‘크윽.’

역시나 레벨의 차이 때문인지 내가 뿜어낸 마기가 신성력에 밀려 허공에 바스러졌다. 그 때문에 무라사마의 신성력이 내 가슴을 때렸다. 마기와의 격돌로 힘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지만 아예 데미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현재 나는 마족으로 변한 상태였기에 신성력에 더 커다란 데미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놀라면 섭섭하지. 명색이 제왕인데 말이야!”

새하얀 이를 보이도록 웃은 무라사마가 나를 향해 몸을 날리며 힘찬 외침을 토해냈다.

“백린만천하(白燐滿天下)!”

쏴사사사!

무라사마의 검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곧 은빛 섬광을 마구 뿜어댔다. 반짝이는 은빛 반딧불로 이루어진 36개의 섬광의 나를 향해 쇄도했다. 한 줄기, 한 줄기 무시 못 할 기운을 내뿜는 섬광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검존(劍尊) 백무극(白武極)의 백팔광은천검법(百八光銀天劍法)!’

염환이 익히고 있는 역천불살술법과 같은 초절정무공 중 한 가지!

내가 무라사마가 사용한 무공의 정체는 알아채는 순간, 36개의 섬광이 내 몸통에 작렬했다.

“크아악!”

콰당탕.

사방에서 쏟아지는 섬광에 허공으로 떠올랐던 내 몸이 바닥에 처박히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냈다. 확실히 초절정무공답게 삼살도법과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에 체력의 3분의 1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크으으.”

“자, 어서 일어나라.”

바닥을 구르며 신음을 흘리는 나를 향해 무라사마가 조소를 흘렸다.

“뿌드득, 빌어먹을 자식…! 죽여주마!”

파밧.

한차례 이를 갈며 도를 곧추세운 채 무라사마를 향해 힘껏 도약하자 조소를 흘리던 무라사마의 입가에 한층 더 짙은 조소가 떠올랐다.

“멍청한 놈. 만리광백유(萬里光白流)!”

치리리링.

한차례 맑은 검명과 함께 무라사마의 검에서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검강이 마치 은하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받아친다!’

섣부르게 방어를 하다가는 오히려 저 공격에 먹힐 가능성이 높았다. 뿜어지는 기운을 보더라도 방금 전에 시전한 백린만천하에 뒤지지 않는 기운이었다.

“크하앗!”

힘찬 기합과 함께 몸을 날리자 내 몸과 도에서 검붉은 마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무라사마의 만리광백유와 격돌했다.

콰르르릉.

엄청나게 큰 천둥소리와 함께 노란 불꽃이 거칠게 튀어 올랐다. 동시에 엄청난 폭음과 함께 충격파가 성난 바람으로 변해 귀빈석을 휩쓸었다.

폭풍으로 변한 충격파가 귀빈석에 장식되어 있던 장식품들과 의자들을 휩쓸어 경기장 밑으로 떨어트렸다. 경기장 밑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무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내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크으윽.”

신음을 흘리며 몸을 사리는 나와는 달리 무라사마는 그저 얼굴을 찡그리며 몇 걸음 뒷걸음질만 쳤을 뿐 그나마 멀쩡해 보였다.

뿌드득.

‘여기까지란 말이냐!’

게임 접속 거부를 당한 3개월과 지난 100일 동안 미친 사람처럼 살아오며 오직 복수만을 꿈꿨다. 강해지기 위해서 예전의 나약한 성격을 버리고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차가운 소리를 내뱉었고 감정을 차단했다.

“그 대가가 겨우 이것이란 말이냐!”

우르르릉.

콰가가가!

내 분노에 동요한 마기가 횃불처럼 타올랐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크르릉. 죽여주마!”

내 입에서 야수의 그것과 같은 목 울림이 흘러나왔다. 도를 곧추세운 나는 무라사마를 향해 섬전처럼 쏘아져갔다.

콰강!

기기기긱!

도와 검이 부딪치며 커다란 폭음을 터트리고, 쇠와 쇠가 부딪치는 마찰음과 함께 마기와 신성력이 부딪히며 내는 거북한 천둥소리가 귀를 때렸다.

다시 한 번 이어진 격돌에 도와 검에서 노란 불꽃이 튀어 올랐다.

투툭.

도와 검이 맞물리며 둔탁한 소리를 터트렸다. 도를 지탱하는 내 팔뚝에서 힘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건 무라사마 또한 다르지 않았다. 레벨의 차이가 있지만 나는 모든 능력치를 힘에 투자했기에 그나마 무라사마와 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내 나와 마찬가지로 검에 온 힘을 쏟아 붓던 무라사마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 권중혁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이 같더군, 큭.”

짧은 웃음으로 끝을 맺는 무라사마의 말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나의 반응을 즐기듯이 한차례 웃음을 터트린 무라사마가 말을 이었다.

“카오스 큐브. 참 잘 만든 물건이지 않나? 크크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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