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5 끝. 그리고 이어짐 (32/34)

챕터5 끝. 그리고 이어짐

쿵!

커다란 둔기로 뒤통수를 내려친 듯한 충격이 내 몸을 휘감았다.

“어, 어떻게……!”

전투 중이라는 것도 잊고 내 입에서 멍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큭, 자신이 만든 물건을 모르는 멍청이가 있나?”

쿵!

첫 번째 충격이 가시기 전에 다시 한 번 이어진 충격이 나를 덮쳤다.

카오스 큐브를 만든 존재가 바로 무라사마였다니!

“뿌드득. 카나리아가 그 카오스 큐브로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준 거냐!”

“물론. 명색이 내 두 번째 작품인데 아주 잘 알고 있지.”

까아앙.

잠시 떼어진 검이 다시 격돌하며 커다란 폭음을 터트렸다.

“너라면 ‘라그아노의 눈물’에 대해 알고 있겠지?”

갑작스런 무라사마의 물음에 멈칫하는 것도 잠시, 이내 도를 잡은 손에 힘을 가해 무라사마를 압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아노의 눈물’은 일종의 특수 퀘스트로, 라그아노의 힘으로 만들어진 어느 공간에서 몬스터 444마리를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의문 띤 표정으로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무라사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카오스 큐브는 그 라그아노의 눈물 퀘스트를 위해 만들어진 아공간을 약간 변형해서 만든 아이템이다. 1분이라는 시간 동안 커다란 움직임은 제외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충분히 쓸모가 있지. 무엇보다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고문이나 범죄 등을 현실의 몸에는 상처조차 남기지 않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마지막까지 카오스 큐브의 실험용이 되어서 죽겠다는데 말릴 필요는 없지. 크큭.”

“이 미친 자식!”

내가 더욱 분노하자 도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마기가 뿜어져 나와 무라사마의 검을 휘감았다. 아실레온의 신성력 덕에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마기가 섭혼기와 더해지자 그 힘을 얻어 무라사마를 압박했다.

“크윽.”

비틀.

몸을 옥죄는 마기에 묵직한 신음을 흘린 무라사마가 돌연 눈을 빛내며 검을 비틀었다.

“죽어라! 은우천겁란(銀雨天劫亂)!”

쑤우우웅.

무라사마의 검 끝에서 튀어나온 검강이 일제히 하늘로 쏘아졌다. 동시에 귀빈석의 천장에 막 부딪힐 높이까지 올라간 검강들이 일제히 쪼개져 나를 향해 쏘아졌다.

“제기랄!”

나를 노리는 검강에 욕설을 내뱉으며 막 도를 들어올리는 순간, 어디선가 낭랑한 외침과 함께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다.

“키하아앙! 토네이도 스피어!”

콰우우우우.

퍼퍼퍼펑!

폭풍에 휘감긴 창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강을 강타해 검강의 경로를 바꾸자 나를 향해 쏘아졌던 검강이 미끄러지듯 귀빈석의 밖, 경기장을 때렸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티나!”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창을 쥔 티나가 무라사마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티나, 너……!”

티나의 옆구리에서는 상당한 양의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마 내가 위기에 처하자 억지로 무리해서 움직인 듯했다.

“제길.”

재빨리 포션을 꺼내 티나의 상처에 쏟아 부으려는 순간, 귀빈석으로 오는 유일한 길인 계단 쪽에서 커다란 폭음이 터졌다.

“크윽, 마리아 님이……!”

“뭐!”

이어지는 티나의 말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복수전에서 마리아를 만나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귓속말과 메시지 거부까지 해놓았는데 마리아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물론 복수 후에 마리아가 나를 만나줄지 의문이지만 복수 앞에 흔들리기 싫은 마음에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 이내 다시 한 번 커다란 폭음과 함께 계단에서 두 개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마리아! 발록!”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마리아와 짧고 단단한 몸을 가진 발록이었다.

“블러드 님!”

폭발 때문인지 옷 곳곳에 그을음이 묻은 마리아가 나를 발견하고는 환히 웃으며 내 이름을 외쳤다.

“블러드 님!”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부른 마리아가 막 나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검을 들고 있던 무라사마가 마리아를 향해 검을 겨눴다.

“은우천겁란!”

쑤우우웅.

다시 한 번 이어진 은우천겁란에 무라사마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강이 천장으로 솟구쳤다.

“꺄아악!”

마리아의 비명이 터지는 순간, 내 의지를 벗어난 내 몸이 스스로 마리아를 향해 도약했다. 동시에 마기를 끌어 모으는 내 입에서 격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발록! 절기를 사용해라!”

“크윽!”

발록 또한 은우천겁란의 위력을 느꼈는지 마리아의 앞을 막아서며 도를 늘어트렸다. 이내 내가 막 발록의 옆에 도착함과 동시에 새하얀 강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나와 발록의 도가 거세게 울부짖으며 허공을 갈랐다.

“역산흑호조!”

“크하앗!”

“실드!”

힘찬 기합과 함께 발록과 내 도에서 강맹한 도기가 마구 뿜어져 나와 은우천겁란에 대응했다. 마리아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나와 발록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투명한 실드를 만들었다.

“막아봐라, 버러지들!”

콰르르릉. 콰아앙!

무라마사의 외침과 함께 새하얀 강기가 일행을 덮치며 폭음을 터트렸다.

“크윽.”

“큭!”

나와 발록의 공격으로 은우천겁란의 위력을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역시나 초절정무공답게 강력한 강기들이 실드를 때렸다.

“으윽.”

이번에는 무라사마 또한 꽤 타격을 입었는지 신음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동시에 충격으로 비틀거리던 내 눈이 번뜩였다.

“티나! 뒤를 노려라!”

“예!”

파밧.

대답과 동시에 몸을 날린 티나가 창을 번뜩이며 무라사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나 또한 도를 고쳐 잡고 무라사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뿌드득, 건방진 놈!”

한차례 이를 간 무라사마가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주먹이 무라사마의 몸통을 후려쳤다. 마리아였다. 동시에 무라사마의 뒤를 노리던 티나가 주춤하며 거리를 벌렸다.

“크헉.”

우당탕.

플라잉 피스트에 얻어맞은 무라사마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이내 눈을 번뜩이며 막 무라사마를 향해 몸을 날리려는 순간, 한 인영이 내 앞을 막아섰다.

“마리아……!”

내 앞을 막아선 인영의 정체는 바로 마리아였다.

“귓속말과 메시지를 수신거부 하고 있던 이유가 고작 이거였나요?”

마리아의 말에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고작… 이거라고?”

“……!”

분노 가득한 내 독백에 마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고작’이라고 했나?”

“브, 블러드 님……!”

내 입에서 싸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작? 큭, 웃기는군그래. 네가 뭘 안다고 고작이라고 하는 거지?”

“…….”

“네가 뭘 안다고 그딴 말을 지껄이냔 말이다! 네가 알아?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한 고통을, 상처를 아냔 말이다! 사람은 절대 못 믿는다! 이제 나는 NPC들밖에 믿지 못한다. 그들은 절대 배신을 못하니까! 그런데… 네가 안다고? 넌 지금 내가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거냐! 그걸 알고나 지껄이는 거냔 말이다!”

“…알아요.”

“뭐?”

갑작스런 마리아의 말에 내 입에서 멍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블러드 님이 헤라클래스였단 건 예전에 알았어요.”

“…뭐?”

‘날 알고 있었다고?’

당황 섞인 내 물음에 마리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블러드 님은 기억 못 하겠지만 블러드 님이 헤라클래스를 키우던 그때 초보였던 저를 도와주신 적이 있어요. 그때와는 분위기와 머리색이 달라서 자칫 못 알아볼 뻔했지만 얼굴 생김새는 변하지 않아서 알아볼 수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블러드 님이 아이템 복사를 했다고 욕하고 손가락질을 했지만 전 믿지 않았어요! 그때 저를 도와줬던 블러드 님이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왜, 왜 모른 척했지?”

내 물음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마리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당신을… 도와주고 싶었으니까요.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던 저를 도와줬으니 저도 당신을 도와주고 싶었어요!”

“…하!”

마리아의 말에 내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얼굴을 굳히고 소리쳤다.

“그래서 어쩌란 거냐! 이미 늦었다. 돌이킬 수 없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절규에 가까운 내 말에 마리아가 내 어깨를 붙잡고 입을 열었다.

“늦지 않았어요! 지금부터 새로 시작해도 늦지 않았어요! 당신이 복수를 한다면 내가 도와줄게요! 당신의 방식은 잘못됐어요!”

“…내 방식이 어디가 잘못됐다는 거지?”

척추를 타고 지독한 허무감이 몰려왔다.

‘내 방식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를 배신하지 못할 강력한 힘을 보여주며 공포로 군림했다. 그렇기에 아무도 나를 배신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강력한 공포로 군림하며 내 밑의 수하들을 다스렸다.

이내 마리아가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블러드 님은 처음부터 길을 잘못 선택한 거예요. 만약 블러드 님이 처음 게임을 했던 시절처럼, 사람들을 도와주며 천천히 그리고 진심으로 게임을 즐기며 레벨을 올렸다면 몇 명의 유저들은 블러드 님의 곁으로 돌아왔겠죠. 하지만 지금 블러드 님의 주변을 보세요. 누가 있죠? NPC를 제외하고… 누가 있죠?”

“……!”

“당신이 죄가 없다면 그걸 증명하면 돼요. 지금 당신이 하는 짓을 보세요! 지금 당신이 하는 짓은 그나마 당신을 믿어주던 사람들까지 배신하는 짓이란 걸 왜 몰라요!”

“그건……!”

이어지는 마리아의 말에 내 입에서 허무함 가득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블러드 님… 욕을 먹어도 괜찮아요. 제가 같이 먹어드릴게요. 그때는 혼자였을지 몰라도… 이제는 혼자가 아니에요. 제가 있잖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설마 예전만큼 힘들까요?”

“크윽.”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끝내는 마리아의 모습에 내 입에서 물기 섞인 신음이 새어나왔다.

내 손에 잡힌 도가 부르르 떨렸다. 척추를 타고 지독한 허무감이 몰려왔다. 허무감뿐만이 아니었다. 허탈함과 감동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들이 뒤섞였다.

“왜…! 왜 이제야 온 거냐……!”

사실 난 처음부터 내심 바랐는지도 모른다.

내 복수가 잘못되었다고, 날 말려줄 사람을.

어느 때고 힘이 되어준 친구는 있었지만 친구는 날 말려주지 않았다. 친구 또한 내 분노를 알기에 그랬던 것이지만 내심 섭섭했다. 그 친구가 날 말려줬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친구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선택하고 또 걸은 길이니까.

“왜 이제야 날 말려준 거냐!”

난 간절히 원했다.

날 말려줄 사람을……!

복수라는 거짓된 감정으로 변해버린 배신감에 잠식되어 마음에도 없는 거짓된 행동을 하는 날 말려줄 사람을!

“마리아!”

“블러드 님…….”

꾸욱.

내 어깨에 얹힌 마리아의 손을 막 잡으려는 순간, 마리아의 뒤편에서 음침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크큭, 쓰레기들이 아주 잘 노는구나.”

흠칫.

“무라사마!”

귓가를 때리는 무라사마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나의 표정이 변했다.

휘익.

“브, 블러드 님?”

어깨에 얹힌 마리아의 손을 거칠게 떼어낸 뒤 그녀를 내 뒤로 숨기자 마리아가 당황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네 말은 잘 알았다. 내가 잘못했단 것도, 또 내 방식이 틀렸단 것도! 하지만… 저놈만은 용서할 수 없다!”

쿠르르르. 우르르릉.

다시 도를 중심으로 마기와 섭혼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용서? 하! 감히 그 누가 황제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이냐!”

무라사마의 검을 중심으로도 유형화된 신성력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죽여……!”

“…주마!”

두두두두.

콰과광! 꽈강!

사방에서 몰려드는 엄청난 기운에 경기장 바닥이 마구 떨렸다. 경기장 하늘이 모여드는 마기와 신성력의 충돌로 폭음을 터트리며 번쩍거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경기장 밑의 유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염환: 야! 무슨 일이야!]

부르르 떨리는 도를 잡는 내 귓가로 염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힘겨움에 일그러졌던 내 입술이 비틀어지며 웃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은 것을 만들었다.

[블러드: 친구야…! 고맙다!]

[염환: 야! 무슨 일이야! 야! 강철중!]

귓가를 때리는 염환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도를 허리 뒤로 축 늘어트리자 사방에서 들끓던 마기가 내 도로 모여들었다. 무라사마 또한 도를 허리 뒤로 축 늘어트렸다. 무라사마의 검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신성력에 움찔하는 것도 잠시, 내 입이 천천히 열렸다.

“마리아…….”

“예?”

“만약 내가 다시 게임을 한다면… 그때는 즐기면서 할 수 있을까?”

힘겨운 내 물음에 멈칫한 마리아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게 안 된다면 제가 억지로라도 끌고 다닐 거예요!”

마리아의 대답에 내가 막 웃으려는 순간, 신성력을 끌어 모으던 무라사마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만 닥쳐라! 다 죽어버려! 백팔광은천하(白八光銀天下)!”

“비켜, 마리아! 멸혼(滅魂)!”

콰아앙.

대포소리를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도에서 회색 기운이 무라사마를 향해 쏘아졌다. 동시에 무라사마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총 108개의 은색 검강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쐐애애애액.

쿠르르르릉.

백팔개의 검이 공기를 가르고 쇄도한다면 멸혼은 말 그대로 공기마저 소멸시킬 것 같은 기운을 내뿜으며 쇄도했다.

콰르르릉!

점차 거리를 좁혀가는 엄청난 두 기운에 주변의 공기가 마구 일그러졌다.

마침내 멸혼과 백팔광은천하가 만나는 순간, 거대한 폭음이 무투대회장을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앙!

쿠르르르릉!

“꺄악! 실드!”

“제길!”

귀빈석은 물론이고 무투대회장 전체를 휩쓸어버리는 엄청난 폭음에 마리가아 황급히 실드를 시전했고, 발록 또한 황급히 몸을 사렸다. 멸혼을 시전하고 있는 나는 몸에 가해지는 압력 덕에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콰르르릉.

꽝꽝꽝……!

108개의 검강이 일제히 멸혼에 부딪히며 폭음과 함께 사라졌다.

‘크읍.’

내 입에서 울컥하고 비릿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입술을 비집고 나온 검붉은 피가 턱을 따라 흘러 옷을 적셨다.

쩌적.

아실레온이라는 신 급 아이템과 백팔광은천검법이라는 초절정무공의 만남은 같은 신급 아이템인 철산멸혼도의 몸에 금을 만들 정도였다.

도를 쥔 내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에 반해 무라사마는 안색이 조금 창백할 뿐,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제기랄!’

자책하며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려는 순간, 내 뒤편에서 뻗어 나온 무언가가 내 손을 맞잡았다.

“마…리아?”

내 손을 맞잡은 무언가의 정체는 바로 마리아의 손이었다.

“헤, 헤헤… 제가 말했죠? 블러드 님은 혼자가 아니라고요.”

치지지직.

마리아의 손은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멸혼의 기운과 마기 그리고 섭혼기에 미라처럼 쪼그라들었다.

“너, 손이……!”

“괘, 괜찮아요!”

애써 괜찮은 척하는 마리아의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이 맺혀 있었다.

‘제기랄!’

마리아의 성격 상, 내가 비키라고 해도 비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끝낸다!’

내가 마리아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1초라도 빨리 무라사마를 끝내는 것밖에 없었다.

“크으으, 크아아악!”

우우우웅.

푸화악.

발악에 가까운 내 비명과 함께 도에서 마기가 솟구치듯 터져 나왔다. 동시에 무라사마를 압박하던 멸혼이 한층 더 크기를 키웠다. 손에 전해지던 떨림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남은 것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뿐!

무라사마를 바라보는 내 입에서 싸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끝이다! 쓰레기한테 죽은 최초의 황제야! 평생 기억해라! 블러드라는 이름의 쓰레기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신랄한 내 말에 무라사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으, 으아아! 안 돼!”

“아니, 돼!”

콰르르릉!

내 외침과 동시에 108개의 검강과 부딪히던 멸혼의 돌연 기운을 내뿜으며 앞으로 쇄도했다. 검강들이 막으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모두 허무하게 허공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허공을 찢어발긴 멸혼이 그대로 무라사마의 몸을 지나치는가 싶더니 곧 ‘스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사라졌다.

“응? 주, 죽지 않았어?”

멸혼을 맞고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자신의 몸에 무라사마가 굳은 얼굴 그대로 고개를 갸웃했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뭐, 뭐야!”

내 입에서도 경악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내 확인이라도 하듯, 자신의 몸을 더듬은 무라사마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크크큭,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로그아웃한 쓰레기들 중 누가 운영자 캐릭터로 무슨 수를 쓴 모양이군. 이로써 네놈은……!”

“그만두시죠.”

어디선가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에 막 검을 들어올리던 무라사마는 물론이고, 나와 마리아 그리고 발록과 티나 또한 당황스러운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이내 내 눈에 티나와마리아, 발록이 나타난 계단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 인영이 보였다.

“때까치!”

“네놈이 어째서!”

모습을 드러낸 인영의 정체는 바로 검은 사자 길드의 간부 유저인 때까치였다. 쓰리 스타 중반의 궁수 유저로 로빈훗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뛰어난 활 솜씨를 가진 간부 유저! 때까치를 향해 겨눈 무라사마의 검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 네놈은 내가 분명 죽였는데……!”

“예, 분명 죽었지요.”

스윽.

고개를 끄덕인 때까치가 위에 입고 있던 셔츠과 가죽 갑옷을 가슴팍까지 올리자 마리아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어, 어떻게……!”

때까치의 배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 구멍으로 뒤편의 풍경이 보일 정도였다. 머리 하나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보통 유저, 아니 회복력이 뛰어난 수인족이라고 할지라도 저 정도 상처를 입는다면 필사였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네놈! 정체가 뭐냐!”

“…….”

날카로운 살기를 담은 무라사마의 검이 떨림을 멈춘 채 때까치를 겨눴다. 이내 무라사마를 무시한 때까치가 가슴팍까지 올렸던 셔츠와 갑옷을 내리고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회장님과 제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 이상’의 잘함이 문제였습니다. 원래는 유저들이 단합을 하고 드래곤 클럽의 도련님들이 당신을 죽여야 했지만 당신과 당신의 군대는 너무 강해졌습니다.”

평소의 헤실거리는 때까치의 목소리가 아닌,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때까치의 목소리에 나는 물론이고 무라사마의 얼굴마저 딱딱하게 굳었다.

부들부들.

“서, 설마 네놈은……!”

무라사마의 검이 마구 떨렸다. 그런 무라사마와는 달리 내 얼굴에는 복잡함이 서려 있었다. 때까치가 하는 이야기는 이미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때까치가 드래곤 클럽 그리고 무라사마보다 윗사람이라는 것과 난 또 놈들의 계획대로 움직인 것이라는 것!

수그러들었던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큭, 그래. 그래서 어쩌겠단 거냐. 이제 내 뜻대로 루안 대륙은 암흑의 시대가 될 거다! 여기서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남아 있는 몬스터와 나이트메어는 멈추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브, 블러드 님!”

“…….”

살기 섞인 내 외침에 마리아가 비쩍 마른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때까치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이내 조용히 있던 무라사마가 이를 갈며 검을 든 채 때까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파밧.

“날 무시하지 마라, 빌어먹을 자식아!”

섬전과 같이 움직인 무라사마의 몸이 한줄기 검이 되어 때까치를 노렸다.

“은령태월검(銀靈太月劍)!”

쭈아아앙.

거의 3m 가까이 커진 무라사마의 검이 짙은 은광을 뿜으며 무라사마의 몸을 집어삼켰다.

‘아직까지 저 정도 힘이 남아 있었다니!’

방금 전 사용한 백팔광은천하에 비해도 처지지 않는 위력이었다.

이내 거대한 검으로 변한 무라사마가 막 때까치의 가슴을 꿰뚫으려는 순간, 조용히 있던 때까치가 스윽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뚝.

“크, 크윽?”

무라사마의 몸이 허공에 뜬 상태로 그대로 멈췄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무라사마의 몸을 그대로 허공에서 잡아챈 듯한 형상이었다. 그럼에도 무라사마의 몸을 감싼 거대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푸스스스.

이내 때까치가 손을 휘젓자 무라사마의 몸을 휘감고 있던 거대한 기운이 모래처럼 사라졌다. 비단 무라사마뿐만이 아니었다.

푸스스스.

“뭐, 뭐냐!”

“뭐야!”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기는 물론 발록과 마리아, 티나의 마나와 신성력마저도 한 줌 연기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귀빈 석 밖, 경기장의 유저들의 힘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여전히 시끄러운 소리가 난무했다.

“뿌드득. 무슨 짓을 한 거냐!”

내 입에서 서늘하게 이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힐긋 나를 쳐다본 때까치가 다시 고개를 돌려 무라사마를 보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명령대로 카오스 큐브에 관련된 모든 일은 묵과하겠습니다.”

움찔.

때까치의 말에 무라사마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동시에 내가 살기를 품고 소리쳤다.

“잠깐! 그럼 카나리아와 크레이언은 어떻게 되는 거냐!”

“……!”

이번에는 때까치의 몸이 움찔했다.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쉰 때까치가 무라사마를 바라봤다.

“도련님은 일단 회장님에게 가보시죠.”

“내가 어째서! 난 지금 저놈을 죽여야 한다!”

“회장님의 명령입니다.”

싸늘한 때까치의 말에 무라사마의 얼굴이 굳었다.

“크윽, 알겠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무라사마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내 제의를 거절한 것을 언젠가는 후회……!”

딱.

살기등등한 기세로 소리치던 무라사마의 몸이 때까치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대로 사라졌다. 로그아웃할 때처럼 흐릿한 잔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어, 어떻게……?”

“단순합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 그러니까 이 공간의 신(神)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게 무슨……?”

내가 막 의문 섞인 질문을 하며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때까치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콰우우우우.

콰르르릉.

나나 무라사마가 내뿜었던 기운조차 지금 때까치가 내뿜는 기운에 비한다면 새 발의 피가 될 정도였다. 그 엄청난 기운에 신음조차 흘리지 못할 정도였다. 이내 때까치를 집어삼킨 회색빛에서 때까치의 목소리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블러드, 아니 강철중 님. 확실히 당신은 게임에 관해서는 도련님을 능가하는 천재일지도 모르겠군요.”

우우우우우.

잠시 말을 멈춘 때까치의 몸, 회색빛이 거대한 공명음과 함께 점차 크기를 키워갔다.

끊임없이 그 크기를 불려나간 회색빛이 귀빈석의 천장을 부수고 계속 크기를 키워나갔다.

쿠쿠궁. 콰당.

처참하게 박살난 천장의 조각들이 나와 마리아의 곁으로 마구 떨어졌다.

“크윽.”

신음과 함께 마리아의 몸을 감싸고 떨어지는 돌을 피하는 내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대체……!’

마침내 동그란 모양의 회색빛이 점사 형상을 갖춰나갔다. 회색빛에서 튀어나온 30개의 뭉툭한 것이 거대한 날개로 변해 하늘을 뒤덮었고, 뒷부분에서 튀어나온 6개의 빛 뭉치가 거대한 꼬리가 되어 사방으로 퍼졌다. 동시에 2개의 가느다란 빛 뭉치가 흉흉한 발톱 달린 앞발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하늘로 치솟았던 굵은 빛 뭉치가 목과 함께 12개의 거대한 뿔이 달린 드래곤의 얼굴로 변했다.

[크오오오오!]

구구구구.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포효를 토해내는 때까치, 아니 이전에 때까치였던 회색빛 드래곤을 보는 내 입에서 허탈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카오스 드래곤……!”

과거, 라그아노와 다아리엘이 루키아논과의 싸움 끝에 휴면을 취하기 위해 각 차원을 만들 무렵, 다시 부활할 루키아논과 육악왕을 두려워한 두 신은 자신들의 마지막 힘을 쥐어짜 한 생명체를 만들었다. 그 생명체가 바로 조화의 조율자인 드래곤이었다.

기본 레벨 1000 이상의 그 무지막지한 생명체는 아직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는데, 단 한 드래곤만이 루안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카오스 드래곤!

라그아노와 다아리엘의 진정한 힘을 모아 받은 드래곤의 왕이었던 용! 그 강함으로 스스로 신이 되어버린 혼돈의 용신(龍神)! 라그아노의 마기와 다아리엘의 신성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카오스 드래곤의 레벨은 8000으로, 현재 존재하는 몬스터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몬스터다.

카오스 드래곤은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 위기에 처했을 때만 나타나 어둠의 세력을 소멸시키는 드래곤이다.

‘때까치가 카오스 드래곤이었다니……!’

때까치 또한 드래곤 클럽의 윗사람이니 분명 천 급 운영자 캐릭터보다 강력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카오스 드래곤은 확실히 의외였다.

쿠오오오오!

천지를 울리는 거대한 포효에 하늘 밑의 모든 것이 침묵했다.

[때까치: 강철중 님, 만약 저희 (주)한신에 입사하실 생각이 있다면 본사로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최소 팀장급의 자리는 확실하게 마련해드리겠습니다.]

귓가를 울리는 때까치의 목소리에 내 입에서 조소가 터져 나왔다.

“그런 일은 없을 거다. 난 게임을 즐기는 유저로 충분하니까 말이야.”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역시나 신 급 능력을 가진 카오스 드래곤답게 내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카오스 드래곤의 거대한 머리가 잠시 나를 향했다. 이내 총 12개의 뿔이 나를 향한 채 서서히 회색빛을 머금었다.

카오스 드래곤의 속성은 가장 강력한 혼돈!

하물며 모든 힘을 잃어버린 나 따위가 그 힘에 대적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끝인가……!’

왠지 모를 홀가분함을 느끼며 막 눈을 감으려는 순간, 무언가 차가운 것이 내 손을 잡았다.

“…마리아?”

내 손을 맞잡은 것은 비쩍 마른 마리아의 손이었다.

꾸욱.

“헤헤, 분유 값 때문에 사냥하다 민철이 말 듣고 와서 본전도 못 뽑고 가네요.”

“큭.”

익살스러운 마리아의 말에 내 입에서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 카오스 드래곤의 뿔에 맺힌 회색 기운은 그 크기를 불려 거대한 검으로 변해 정확히 귀빈석으로 향했다. 이 상태로는 나뿐만이 아니라 티나마저도 위험한 상태였다.

‘제길.’

파밧.

“브, 블러드 님?”

카오스 드래곤의 힘으로 마기와 섭혼기를 잃기는 했지만 본래의 힘은 잃지 않았기에 그대로 마리아를 품에 안은 채 멍하니 카오스 드래곤을 바라보는 티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마, 마스터?”

갑작스레 몸을 날리는 내 모습에 멍하니 있던 티나가 당황스러운 듯 나를 불렀다. 동시에 나는 나를 바라보는 티나의 가슴에 어깨를 걸치며 외쳤다.

“오늘 부로 야수연합의 대 족장 자리는 카인에게 양보하겠다! 티나! 너는 그 증인이 되는 것이다! 야수왕 블러드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이 도는 바로 내 유언의 증표다!”

“마, 마스터! 마스터!”

당황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부르짖는 티나를 향해 천살멸혼도를 쥐어 주며 힘겹게 웃었다.

“티나… 모든 것은 자신의 자리를 지킬 때가 아름다운 것이다.”

“마…스터?”

파악.

온 힘을 다해 어깨를 이용해 티나의 몸을 쳐올리자 티나의 몸이 붕 떠올라 귀빈석 밖으로 떨어졌다.

“마스터어!”

품에 천살멸혼도를 안은 채 떨어지는 티나를 보던 시선을 거둬 내 품에 안긴 마리아를 바라보자 마리아가 작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시 시작해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마리아의 웃음에 나 또한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분유 값부터 벌고 다시 시작하지.”

“큭. 후훗, 좋아요.”

작게 웃음 짓는 마리아의 입에 막 내 입술을 부딪치는 순간, 거대한 회색빛 검이 귀빈석을 덮쳤다.

[당신은 죽었습니다. 이벤트 기간이므로 24시간 동안 재접속이 불가능합니다. 이상, 또 하나의 세상! 판타즈마 월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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