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4/34)

【외전】

“암흑의 동굴 퀘스트를 깨실 분 모집합니다! 암흑의 동굴 퀘스트 깨실 무사랑 주술사 구합니다! 삼천(三天 레벨 300) 이상의 무사랑 주술사 구해요!”

커다란 광장 한가운데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내 모습을 개방의 거지 NPC들이 힐긋거리며 노려봤다. 아마 나 때문에 자신들의 구걸이 방해를 받아 그런 듯했다.

‘제길.’

개방이라면 월 나라에서 상당히 강력한 힘을 가진 방파다.

특별한 단체에 가입되지 않은 채 레벨 300이상, 즉 삼천 이상의 레벨만 가지고 게임을 하는 나로서는 개방 거지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암흑의 동굴 퀘스트 깨실 분 모집합니다! 암흑의 동굴 퀘스트 깨실 무사랑 주술사 구합니다! 삼천(三天) 이상의 무사랑 주술사 구해요!”

똑같은 말을 외치는 내 목이 따끔거렸다.

내가 며칠 전부터 외치고 있는 이 ‘암흑의 동굴’이라는 퀘스트는 화산파(華山派)에 사는 이무기에게 받을 수 있는 특수한 퀘스트로 화산 꼭대기의 동굴에 사는 거대한 지네, 천년오공(天年蜈蚣)을 잡아 천년오공의 내단을 구해오는 퀘스트였다.

천년오공의 내간을 구해올 시, 이무기에게 천년오공의 내단보다 한 차원 높은 영약인 ‘만년삼황(萬年蔘皇)’을 받을 수 있다.

‘제길!’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만년삼황에 욕을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외쳤다.

“암흑의 동굴 퀘스트 깨실 분 모집합니다! 암흑의 동굴 퀘스트 깨실 무사랑 주술사 구합니다! 삼천(三天) 이상의 무사랑 주술사 구해요!”

아무리 월 나라가 오픈한 지 오래됐다고 해도 삼천 이상의 유저들은 많지 않았다.

현재 사천(四天 레벨 400)을 이룩한 유저는 단 둘 뿐인데, ‘검존(劍尊) 계백’이라 불리는 무사 유저와 ‘천마(天魔) 구찌’라는 유저가 그 둘이었다. 각자 ‘정의맹(正意盟)’이라는 문파와 ‘천마궁(天魔宮)’이라는 단체의 마스터, 즉 수장인 그들은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힘들었다. 스크린 샷이나 동영상으로 몇 번 봤을 뿐이었다.

“암흑의 동굴 퀘스트 깨실 분 모집합니다! 암흑의 동굴 퀘스트 깨실 무사랑 주술사 구합니다! 삼천(三天) 이상의 무사랑 주술사 구해요!”

“저…….”

“응?”

다시 한 번 외치려던 내 입이 누군가의 부름으로 멈췄다.

“퀘스트 때문에 왔는데요.”

나에게 말을 건 유저는 여성 유저로, 주술사 특유의 개량 한복 같은 새하얀 옷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이었다. 아마 치료 계통의 주술을 익힌 듯했다.

“죄송하지만 레벨이……?”

“312에요.”

“아!”

여인의 말에 내 얼굴 위로 웃음이 떠올랐다.

드디어 내가 찾던 주술사 유저가 온 것이다.

황급히 루안 대륙의 파티와 같은 개념인 ‘동행’을 신청하자 맑은 종소리와 함께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백의성수(白衣聖手) 마리아’님이 동행하셨습니다.]

“허억! 백의성수?”

여인의 별호에 내 입에서 경악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마리아라는 이름이 무협 세계인 월 나라와 어울리지 않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백의성수!

별호 그대로 새하얀 옷을 입으며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한다는 성스러운 손!

‘의선문(醫仙問)’ 출신의 그녀는 항상 같은 연배의 무사와 함께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내 반응에 멋쩍은 웃음을 지은 백의성수 마리아가 슬쩍 내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일행이 한 명 더 있는데, 괜찮겠죠……?”

스윽.

마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리아의 뒤편에서 검은 인영이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섰다.

‘설마?’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유저의 모습에 내 얼굴 위로 설마 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유저가 싸늘한 눈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혈영이다. 잘 부탁한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입에서 경악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독패혈왕(獨敗血王) 혈영!’

이것이 남자의 별호였다.

마리아와 항상 붙어 다닌다고 알려지는 독패혈왕은 거대한 대도를 사용하며 언제나 마리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그렇기에 다른 유저들은 이 둘이 연인 사이가 아니냐, 아니면 가디언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소문을 퍼트렸다.

“호, 혹시 독패혈왕 혈왕님?”

끄덕.

나 또한 ‘혈류마검(血流魔劍)’이라는 별호로 사파 쪽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고수지만 눈앞의 독패혈왕 만큼은 아니었다. 과거, 마리아가 독에 중독된 사람들을 치료하다 독에 중독된 적이 있었다. 나중에 그 사실이 ‘천독문(天毒問)’의 짓이란 것을 안 독패혈왕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천독문으로 쳐들어가 천독문을 멸문시켰다.

독패혈왕의 동료로는 3명의 유저가 있는데,

첫 째가 유난히 화염 계열의 무공에 집착하는 화염마귀(火炎魔鬼) 환염. 그 다음이 작은 키를 살려 세상 모든 것을 훔쳐내는 무영신투(無影神偸) 게리롱. 그리고 마지막으로… 싸움에 미친 자라고 알려지는 광투자(狂鬪子) 카나리아.

독패혈왕은 이 3명과 함께 하룻밤 만에 천독문을 멸문시켰다.

그때부터 단순히 ‘혈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 사내가 독패혈왕이 되었다.

“어서 동행해라.”

“예, 옛!”

혈영의 보챔에 황급히 동행을 신청하자 곧 여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독패혈왕(獨敗血王) 혈영’님이 동행하셨습니다.]

“장비는 모두 준비하셨나요?”

독패혈왕의 정체에 놀랄 새도 없이 마리아의 물음이 이어졌다.

“물론입니다. 그쪽은…….”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나는 조심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백의성수와 독패혈왕인 것이다.

이내 내 눈치를 보던 미라아가 입을 열었다.

“아이템 분산은…….”

확실히 아이템 분산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천년오공의 내단이었다. 백의성수와 독패혈왕 또한 내단을 노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이내 조용히 있던 독패혈왕, 혈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내단을 가져라. 나머지는 우리가 가지겠다.”

어떻게 들으면 재수 없는 반말이었지만 혈영이 하니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자연스레 자신의 아랫사람 대하는 듯한 반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혈영과 마리아는 이 퀘스트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기에 나에게 내단을 양보한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아니다.”

내 감사에 혈영이 고개를 저으며 한 발자국 물러나 다시 마리아의 뒤에 섰다.

그런 혈영을 향해 살포시 웃은 마리아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움직여볼까요? 분유 값을 벌러…….”

움직여볼까요, 다음 이어지는 말을 듣지 못해 ‘예?’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짓자 마리아가 웃음으로 대답했다.

화산(華山)은 이천 이상의 유저들이 자주 찾는 필드로, 화산파 주변을 제외하고는 고 레벨의 괴수들이 나오는 좋은 사냥터였다. 괴수들의 능력은 위로 갈수록 높아지는데 중간부터는 사람만 한 백년오공(百年蜈蚣)을 비롯해 코끼리만한 개구리인 혈거와(血巨蛙), 혈거와에 뒤지지 않는 몸집을 가진 사슴인 혈각록(血角鹿), 흑혈호(黑血虎)등이 있다.

더군다나 화산은 산 중에서 가장 거대하고 던전이 많다고 알려지는 오악(五岳)중의 한곳으로, 수십, 수백 개의 던전을 곳곳에 가지고 있는 산이었다.

모든 것을 지나쳐 화산의 꼭대기에 도착하면 총 3개의 던전이 나오는데 한곳은 과거 억울하게 죽은 화산파 무인들의 유령이 나오는 ‘매화동(梅花洞)’이고 또 한곳은 ‘야수동(野獸洞)’으로 혈거와, 혈각록, 흑혈호 등이 나오는 곳이다.

가장 마지막으로 ‘독혈동(毒血洞)’이 있는데 이곳은 백년오공을 비롯해 갖가지 독물(毒物)들이 나오는 곳이다. 내가 죽이려는 천년오공은 독혈동에서도 가장 끝에 존재하고 있다.

크에에에엑.

촤르르.

“하앗.”

나를 향해 쇄도하는 거대한 지네, 백년오공을 향해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두르자 낭창낭창 휘어진 검이 백년오공의 각질을 때렸다.

퍼석.

크에에엑.

웬만한 강철보다 단단한 것이 백년오공의 각질이었지만 내 혈류강마검법(血流强魔劍法)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앗. 혈마지로(血魔之路)!”

콰르르릉.

크에에엑!

힘찬 초식명과 함께 내 검에서 뿜어져 나온 핏빛 검기에 백년오공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동시에 백년오공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이빨과 낡은 무공서가 떨어졌다. 보나마나 이류 정도의 무공서겠지만 이류 무공서라 하더라도 초보들에게는 잘 팔리기 때문에 적어도 현금으로 십만 원 정도는 했다.

“아…….”

“무공서다!”

내가 막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어디선가 나타난 마리아가 내 앞에 떨어진 무공서와 이빨을 주웠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공 계열의 최고 경지인 ‘이형환위’라 해도 믿을 수 있는 빠르기였다.

“고마워요!”

손에 들린 무공서에 시선을 맞춘 마리아가 나를 보지도 않은 채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하, 하하. 예.”

소문과는 매치되지 않는 마리아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것도 잠시, 내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혈영에게로 향했다.

“흐아압!”

콰드드득.

크크크에엑!

키에엑!

별다른 초식 없이 단순한 휘두르기로 백년오공 두 마리를 반으로 가른 혈영이 그대로 몸을 돌려 낮은 기합과 함께 다시 한 번 도를 휘둘렀다.

쩌적. 끽!

혈영 앞에서 막 입을 벌리고 독액을 내뿜으려던 백년오공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재가 되어 사라졌다. 과연 독패혈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실력이었다.

“끝…인가?”

흡사 마리아처럼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을 모두 싹쓸이한 혈영이 마리아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런 것 같네요.”

가볍게 대답한 마리아가 나와 혈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웅.

이내 마리아의 손에서 뻗어 나온 새하얀 빛이 나와 혈영의 몸을 휘감았다.

“후우. 감사합니다.”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체력에 감사를 표하며 긴장된 얼굴로 눈앞의 동굴을 바라봤다. 동굴의 위쪽에는 ‘독혈동(毒血洞)’ 글자가 음산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이내 마리아가 품속에서 작은 물체를 꺼내 각자 나와 혈영에게 건넸다. 은은한 녹광(綠光)을 내뿜는 물체의 정체는 독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피독주였다.

피독주는 상급의 주술사들이 만드는 보호구로 유용하게 사용되는 아이템 중의 하나였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내 말에 마리아가 웃으며 답했다. 혈영은 그저 묵묵히 피독주를 품속에 넣을 뿐이었다.

“그럼 가볼까요?”

마리아가 눈앞의 독혈동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스오오오.

독혈동 초입에 들어섬과 동시에 짙은 독무(毒霧)가 일행의 몸을 휘감았다. 보통 유저들이었다면 독에 중독되었겠지만 마리아가 만든 피독주 덕에 무사히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과연 독혈동이라는 이름답네요. 그렇죠?”

“그렇군.”

마리아의 질문에 혈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 대체 무슨 사이지?’

끈임 없는 의문이 내 머리를 잠식했다. 혈영은 분명 유저이니 가디언일 리는 없었고, 연인 사이로 보기에는 너무 어색했다.

‘도저히 못 참겠다!’

“저…….”

“예?”

내 부름에 마리아가 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의 뒤에 있는 혈영이 두려웠지만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궁금증을 가라앉힐 인내력이 없었다.

“두 분… 무슨 사이십니까?”

“…….”

내 질문에 마리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침묵했다.

“…….”

혈영 또한 걸음을 멈춘 채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제길. 난 죽었다!’

질끈.

이어질 상황에 대비해 입술을 깨물며 막 도망칠 준비를 하는 내 귀로 동시에 두 개의 목소리가 울렸다.

“…연인이다.”

“…연인이에요.”

처음의 딱딱한 목소리는 혈영의 것이었고, 그 다음이 마리아의 목소리였다.

‘연인이라고?’

내 의문에 대답이라고 하듯,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누가 보나 연인으로 보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응?’

두 사람의 모습에 멍하니 풀린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독혈동 저 안에서부터 뻗어져 나오는 음습한 사기 때문이었다.

“옵니다!”

흠칫.

내 날카로운 외침에 그윽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명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소문으로 나돌던 독패혈왕의 모습과는 다르다 못해 아예 다른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키이이익.

크에엑.

드드드.

살기 어린 울음소리와 함께 가벼운 지축음이 이어졌다. 동시에 몇 마리의 백년오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년오공의 무리에는 사람 몸통만 한 나비인 ‘몽환혈접(夢幻血蝶)’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으음!”

마리아와의 좋은 시간을 방해받았기 때문인지 한차례 묵직한 신음을 흘린 혈영이 도를 휘두르자 검은 불꽃이 도를 따라 넘실거리며 궤적을 그렸다. 동시에 도 주변의 공기가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힘에 마구 일그러졌다.

“과연 흑염지옥도법(黑炎地獄刀法)!”

화르르륵.

콰우우우.

내 감탄에 대답이라도 하듯, 혈영의 도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불꽃이 혀를 날림거리며 백년오공을 향해 뿜어졌다.

“흑혈마겁(黑血魔劫)!”

콰르르릉.

넘실거리던 불꽃이 거대한 파도로 변해 괴수들을 휩쓸었다.

크에에엑. 찌이익.

케에엑.

참혹한 비명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혈영의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은 지옥에서 타오르는 저주받은 검은 불꽃. 시체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흠흠.”

혈영이 붉어진 얼굴을 애써 추스르며 아이템을 수거했다.

“다, 다시 움직이죠.”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마리아가 황급히 독혈동 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피식.

문득 아이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내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같이 가죠.”

두 사람을 따라 독혈동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대지모(大地母)! 토(土)! 행(行)! 파랑(波浪)!”

출렁.

마리아의 외침과 동시에 독혈동 바닥이 출렁이며 마구 흔들렸다.

크에에엑?

키에엑!

수십 개의 다리를 놀리며 일행을 향해 다가오던 백년오공들이 출렁이는 땅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나와 혈영의 신형이 섬전처럼 쏘아졌다. 대도를 사용하기에 나보다 속도라 느릴 법도 하건만, 혈영의 속도는 내 이상이었다.

쑤아아앙. 퍼억!

혈영의 도가 허공을 가르고 여지없이 한 마리 백년오공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과연 ‘왕(王)’이라는 칭호를 받은 무인이었다.

‘나도 질 수 없지!’

독패혈왕과 비교해서는 한참 부족하지만 나 또한 혈류마검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절정 무인이었다.

“비탄혈마(悲嘆血魔)!”

끼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내 검에서 실 같은 검기들이 가닥가닥 뿜어져 나와 백년오공을 압박했다.

서걱.

백년오공의 몸이 잘게 썰리며 재가 되어 사라졌다.

“피해요!”

파밧.

마리아와 외침과 동시에 등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에 황급히 몸을 날리자 그 뒤를 이어 혈영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지옥마룡(地獄魔龍)!”

콰우우우우.

우렁찬 포효와 함께 검은 불꽃으로 이루어진 용이 앞에서 발광을 하는 백년오공들을 집어삼켰다. 마리아의 손과 내 검에서 한줄기 빛이 막강한 힘을 머금고 번뜩였다.

“대지모(大地母)! 토(土)! 석(石)! 파랑(波浪)!”

“혈라뇌벽(血邏雷霹)!”

콰르르르릉. 꽈아앙!

엄청난 기파와 함께 일행의 공격이 백년오공들을 뒤덮었다.

크에에엑!

키에엑!

갖가지 비명과 함께 수십 마리는 될 법한 백년오공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위로 수많은 아이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는 몇 개의 무공서 또한 존재했다.

“아자. 분유 값!”

알 수 없는 말을 외친 마리아가 재빨리 아이템을 수거했다.

“블러드… 아니, 혈영! 어서 와서 아이템 좀 주워요!”

“그래.”

마리아의 요청에 혈영이 마지못해 아이템을 수거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막 옮기려고 했다.

들썩들썩.

마리아의 바로 앞쪽에서 들썩이는 땅을 보자 혈영은 물론 내 얼굴마저 딱딱하게 굳었다.

“음? 마리아! 피해!”

“마리아 님! 피하세요!”

“예?”

우리 둘의 외침에 아이템을 줍던 마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흘렸다.

“체엣!”

파밧.

짧은 신음과 함께 혈영의 몸이 한줄기 화살이 되어 마리아를 향해 쏘아졌다. 동시에 들썩이던 땅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포효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쿠워어어어어어!

우르르릉.

거대한 무언가, 아니 천년오공의 포효에 독혈동이 불길한 비명을 토했다.

“꺄, 꺄아아악!”

“제길. 꽉 잡아라!”

재빨리 등에 도를 맨 혈영이 마리를 품에 안고 보법을 시전해 자리를 피했다.

치이이익.

방금까지 마리아가 아이템을 줍던 곳에 떨어진 천년오공의 독이 매캐한 연기와 함께 땅을 녹였다. 땅까지 녹일 정도의 지독한 독에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길! 저딴 놈을 어떻게 잡으란 거야!’

만년삼황에 눈이 멀어 덜컥 퀘스트를 수락하는 것이 아니었다.

크워어어어.

자신의 공격을 피한 것이 분했는지 천년오공이 마리아를 품에 안은 혈영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거대한 몸이 움직일 때마다 모래구름이 피어올랐다. 제기랄!

“큭. 혈류혼세겁(血流混世劫)!”

콰르르르릉.

혈류강마검법의 절초인 혈류혼세겁이 내 검에서 뿜어졌다.

폭풍의 형상을 한 검기들이 천년오공을 향해 쏘아졌다.

‘제발 죽어라!’

나의 바람과 동시에 혈류혼세겁이 천년오공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콰아아아앙.

키에에에에엑!

검기의 폭풍에 격중당한 천년오공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아예 데미지가 없는 것은 아닌지 날카로운 가시로 뒤덮인 천년오공의 각질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따닥. 따닥. 따닥.

거미의 입을 연상케 하는 천년오공의 입이 거세게 부딪히며 불쾌한 소리를 터트렸다.

이내 웅크렸던 몸을 편 천년오공이 나를 향해 입을 쩍 벌렸다. 동시에 천년오공의 입에서 짙은 독액이 뿜어져 나왔다.

쏴아아아아.

마치 댐 방류 때 흘러나오는 물과 같은 엄청난 양의 독액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치이익.

천년오공의 독액과 마주친 것은 종유석이며 할 것 없이 한 줌 물로 변해 사라졌다.

‘제기랄!’

“혈류혼세겁(血流混世劫)!”

내 검이 빛을 뿌리며 두 번째 혈류혼세겁을 토해냈다.

콰르르르릉.

검기의 폭풍이 독액을 향해 쏘아졌다. 마침내 검기의 폭풍과 무엇이든 녹이는 독액이 부딪쳤다.

치지지지직.

검기들이 독에 녹아 허공으로 사라졌다. 한낮 독액이 검기를 녹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천년오공의 독액이라면 가능했다. 만독불침체(萬毒不侵體)보다 한 단계 아래지만 천독불침체(千毒不侵體)까지 중독시키는 것이 바로 천년오공의 독이었다.

“쿨럭. 크윽!”

주르륵.

내 입에서 검은색의 죽은 피가 흘러 나왔다.

치이이익.

동시에 독액과 맞서던 검기의 폭풍이 점차 힘을 잃고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여기서 죽었다간 만년삼황이고 뭐고 이무기한테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난… 죽을 수 없다!”

우우웅.

내 손에 들린 검이 맑은 검명을 토했다. 독액과 맞서던 검기가 힘을 얻어 독액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좋아. 할 수 있어!’

꾸욱.

서서히 보이는 가능성에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천년오공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서히 솟구치는 천년오공의 꼬리 때문이다.

천녀오공의 꼬리 끝에 달린 독침이 번뜩였다. 말이 독침이지 웬만한 사람 두 명을 합친 것 만한 크기였다. 찔리는 것이 아니라 꿰뚫리는 것이다.

스르륵.

천녀오공의 꼬리가 나를 향해 겨누진 순간, 날카로운 독침 끝에 맑은 독액이 맺혔다.

크에에에엑.

쐐애애액.

우렁찬 포효와 함께 천년오공의 꼬리가 나를 향해 쏘아졌다.

‘끝이다!’

허공을 가르는 묵직한 파공음에 눈을 질끈 감으며 곧 다가올 미약한 통증과 로그아웃을 알릴 여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응?’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여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독침이 줄 통증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스윽.

엄습하는 두려움을 애써 떨치며 슬며시 눈을 뜨자 바로 코앞에서 멈춘 천년오공의 독침이 보였다.

“흐익.”

숨을 삼키며 고개를 젖혀 돌리자 그제야 천년오공의 꼬리가 멈춘 이유를 발견했다.

파르르.

천녀오공의 꼬리에는 혈영의 대도가 박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천년오공의 꼬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크에에에엑.

꿈틀꿈틀.

꼬리에 박힌 대도를 뽑으려 함인지 천년오공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으음.”

거세지는 반항에 혈영이 묵직한 신음을 흘리며 도를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움직일 수 있나?”

끄덕끄덕.

혈영의 물음에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혈영이 내 뒤편을 턱으로 가리키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뒤편에는 마리아가 연신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리며 주술을 시전하고 있었다.

“일격필살로 갈 거다. 마리아의 주술이 끝나면 너와 내가 절초를 사용한다.”

“아, 알겠습니다.”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던 혈영이 고개를 돌려 천년오공을 보며 싸늘한 안광을 뿜었다.

“죽여주마. 분유 값!”

“네?”

“흐아압!”

푸화악.

내 의문을 무시한 혈영이 힘찬 기합과 함께 천년오공의 꼬리에 박아 넣은 도를 뽑았다.

크에에엑.

천년오공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동시에 도를 들어올린 혈영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죽어라!”

푸화아악.

크에에엑!

시원한 피분수와 함께 천년오공의 입에서 진득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썩둑 잘린 천년오공의 꼬리가 펄떡이며 독혈동을 배회하는가 싶더니 곧 재가 되어 사라졌다.

크에에에엑!

쿵쿵쿵.

꼬리가 잘린 고통 때문인지 천년오공이 비명을 지르며 마구 발광을 했다. 그 거대한 덩치가 발광을 하자 동굴이 마구 울리며 돌가루를 뿌렸다.

“마리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혈영이 뒤편에서 주술을 준비하는 마리아의 이름을 힘차게 외쳤다.

“준비됐어요!”

“시작해라!”

혈영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리아를 중심으로 엄청난 기파가 휘몰아쳤다. 내 절초인 혈류혼세겁이 비해서 뒤지지 않을 정도의 강맹한 기파였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파에 마구 발광을 하던 천년오공이 몸을 돌려 기파의 주인, 마리아를 바라보며 이빨을 들이댔다.

천년오공의 거대한 몸체가 막 움직이려는 순간, 마리아의 입에서 낭랑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대지모(大地母)! 비탄혈루(悲嘆血淚)! 지(地)! 석(石)! 흉(凶)! 혈파랑(血波浪)!”

출렁.

우르르르릉.

한차례 크게 출렁인 땅이 마치 파도라도 되는 양, 천년오공을 향해 쏘아졌다. 동시에 도를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던 혈영이 나를 보며 외쳤다.

“절초를 시전해라!”

“예!”

화르르륵.

내가 대답함과 동시에 혈영의 도에서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힘차게 진각을 내딛은 혈영이 천년오공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

“지옥천살겁(地獄天殺劫)!”

콰우우우우.

나 또한 내공을 끌어 모아 천년오공을 향해 마지막 절초를 시전했다.

“혈류혼세겁(血流混世劫)!”

우르르르릉.

거대한 포효와 천둥소리, 그리고 대지의 파도가 천년오공을 향해 쏘아졌다.

크에에에에엑!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한차례 포효를 내지른 천년오공이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 절정의 기운을 담은 3개의 공격이 천년오공의 몸을 때렸다.

번쩍. 콰아아아아앙!

동시에 번뜩이는 순백의 빛과 함께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당신은 기절 상태가 되었습니다. 체력이 회복될 5분 동안 아공간에 계셔야 합니다.]

“으음.”

5분을 다 채웠으니 기절 상태를 해제한다는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내 눈을 찔렀다. 독혈동의 음습한 빛이 아닌 태양의 밝은 빛이었다.

‘내단!’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며 상체를 일으키자 내 곁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인영이 나에게 다가왔다. 혈영과 마리아였다.

“정신 차리셨어요?”

“예. 으으.”

기절의 후유증인지 찌릿찌릿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신음을 흘리자 마리아가 나에게 치료 주술을 시전했다. 이내 조금 나아진 두통에 한숨을 내쉬며 마리아를 바라보자 마리아가 아! 하는 탄성과 함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받으세요. 천년오공의 내단이에요.”

“오오!”

주먹만 한 크기의 내단은 보랏빛 기운을 은은하게 뿌리고 있었다.

‘드디어!’

내단을 받아든 내 얼굴이 감격으로 물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내단은 처음부터 저희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싱긋 웃은 마리아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는 이미 그 퀘스트 깼거든요. 후훗.”

“예?”

내 의문에 웃음으로 답한 마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혈영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주변을 보니 아마 독혈동 앞의 공터인 듯했다.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 예…….”

붙잡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마리아 옆에서 눈을 부라리는 혈영 때문에 말조차 걸 수가 없었다. 마리아가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자 혈영 또한 목례로 인사를 했다.

“자, 잠깐만요!”

“예?”

내 부름에 마리아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혈영 또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죠?”

어떻게 보면 허무한 내 물음에 마리아가 빙긋 웃으며 혈영을 바라봤다. 그런 마리아를 향해 씨익 웃은 혈영이 서서히 떠오르는 노을을 등진 채 입을 열었다.

“우리? 그냥 단순히 게임을 즐기는 유저다. 그리고…….”

말끝을 흐린 혈영이 마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씨익 웃었다.

“…부업으로 분유 값도 벌고 있고 말이야. 그렇지?”

“맞아요. 호호호.”

혈영의 물음에 마리아가 웃으며 혈영의 팔짱을 꼈다.

‘아름답다!’

노을을 등진 채 서서히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에 내 눈에 선명하게 박혔다.

마리아와 혈영.

내가 루안 대륙에서 검은 사자 6진으로 활동하며 NPC들에게 수금을 걷다 죽음을 당한 뒤 회의를 느껴 새로 시작한 월 나라에서 몇 개월 만에 만난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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