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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1화 (1/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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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호밀밭이 있었다. 바람을 따라 물결치는 모습이 마치 황금색 바다처럼 보이는 호밀밭이었다.

그것은 단 한 사람에 의해서 일구어진 것이었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호밀밭을 돌보았다. 수많은 씨가 뿌려지고 광대한 호밀밭을 황금색 물결로 가득 채웠으나 결코 재물을 탐내지 않았다. 애써 키운 호밀들은 마을 사람들이 수확하게 했으며 때때로 마을과 호밀밭을 노리는 악귀들을 신성한 힘으로 쳐죽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호밀밭의 주인이라고만 알고 있었으나 그것은 옳지 않았다.

그의 진정한 이름은 성배기사 엔디미온이었다.

“후······.”

엔디미온은 낮잠에서 깼다.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광량이 적어서 집 내부는 어스름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만지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탁자 위에 있는 사발에는 물이 담겨 있었다. 잠들기 전에 미리 담아둔 것이었다. 물에 비친 얼굴을 보니 입가에 말라붙은 침이 자국처럼 남아있었다. 그는 사발을 들고 벌컥벌컥 물을 마신 후에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그 다음에 호밀밭 쪽으로 난 유일한 창문을 쳐다보았다.

낮잠을 잤을 뿐인데 벌써 밤이었다. 광활한 호밀밭은 마을 사람들 전부가 달라붙어도 하루 만에 수확을 끝낼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절반 정도 수확을 끝내두고 마을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은 문을 열고서 바깥으로 나갔다. 가을이라 바람이 쌀쌀했다. 하지만 겉옷도 없이 얇은 옷만을 입고 있는 그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의 몸은 추위를 느끼기에는 너무나 강력했다. 엄청난 힘이 끊임없이 열을 발산했고 그 덕분에 추위를 느낄 수가 없었다. 바다의 색깔을 가진 두 눈은 밤에도 낮처럼 볼 수 있었다. 불빛 하나 없어도 호밀밭을 향해 다가오는 악귀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엔디미온은 입 안의 침을 끌어모아 바닥에 뱉었다. 그는 호밀밭을 주시한 채로 손을 뻗어서 괭이를 집어 들었다. 성큼성큼 호밀밭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가는 것 같았다.

“개 같은 악귀 놈들.”

아주 오래 전에 세상을 위협했던 대악마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다르디낭이었고 힘을 합친 영웅들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다. 영웅들은 대악마 다르디낭을 지하에 묻었고 다시는 나타나지 못하게 봉인을 걸었다고 했다. 그리고 악마숭배자들이 사술을 부리지 못하도록 대악마가 묻힌 곳을 비밀로 부쳤다.

하지만 세상에는 할 일은 없고 호기심은 많은 자들이 참 많았다. 그들은 대악마가 묻힌 곳을 찾으려고 했고 노력 끝에 몇 군데의 후보지를 선정했다. 애석하게도 그곳 중 하나가 바로 이 호밀밭이었다. 엔디미온은 호밀밭의 성배기사로서 겁도 없이 호밀밭에 침입한 자들을 모두 대악마의 곁으로 보내주었다. 전부 죽였다는 소리다.

호밀밭에 침입한 악귀들은 총 세 마리였다. 악마라고 하기에는 저급하고 괴물이라고 하기에는 사악한 존재들이었다. 엔디미온은 호밀밭이 부스럭거리는 것을 보았다. 악귀들은 아이처럼 키가 작았으나 단단한 근육과 길쭉한 손톱, 그리고 새빨간 안광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발휘했다.

엔디미온은 다시 한 번 바닥에 침을 뱉었다. 목구멍 안이 거칠거칠한 것이 자꾸만 가래가 꼈다.

“키아아아악!”

악귀들은 엔디미온이 가래를 뱉는 소리에 놀라서 호밀밭에서 뛰쳐나왔다. 자그만 날개를 이용해서 순식간에 엔디미온을 향해 날아온 악귀 한 마리는 괭이에 얻어맞고 얼굴이 박살났다. 달걀이 깨지듯 사방으로 살점과 끈적거리는 액체가 튀었다. 본래 악귀는 병사 다섯 명이 달라붙어도 상대하기 힘든 존재였다. 그리고 악행을 거듭하여 악마에 가깝게 변해가는 중인 악귀라면 병사들로는 어림도 없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악귀들이 그만한 수준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결코 얕잡아볼 수 없는 적인 것도 사실이었다. 숫자가 다섯이니 저들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병사들 수십 명이 달라붙어야 했다.

하지만 엔디미온에게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악귀 한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운 후에 주춤거리는 악귀들을 향해서 걸어갔다. 남은 악귀는 두 마리였고 그들 중 그나마 용기 있는 한 마리가 그에게 덤벼들었다. 악귀는 날갯짓을 하면서 날아오는 괭이를 피했고 길쭉한 손톱으로 엔디미온의 손목을 그었다.

상처는 얕았다. 본래라면 인간의 연약한 살이 갈기갈기 찢어졌어야 했지만 엔디미온은 달랐다. 그는 모기라도 물린 것처럼 상처가 난 손목을 손으로 벅벅 긁다가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악귀를 향해 괭이를 던졌다. 빠르게 날아오는 괭이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얻어맞은 악귀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한 마리였다. 악귀는 이제 그냥 도망치려고 했다. 엔디미온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대악마의 힘을 노리고 온 게 아니었나? 겁쟁이처럼 도망갈 셈이냐? 그래서야 죽을 때까지 악귀 나부랭이겠군.”

도발은 효과가 있었다. 악귀는 도망치려다가 다시 엔디미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멍청한 새끼. 엔디미온은 날아오는 악귀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악귀가 기다란 손톱으로 또 한 번 손목을 그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악귀의 머리를 덥석 손으로 붙잡았다.

딱 일곱 살 정도 되는 아이의 머리 크기였다. 부수기 딱 알맞았다.

“끼에에엑! 끼에에에엑!”

악귀의 머리가 점차 찌그러졌다. 엔디미온의 손가락은 골통 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악귀의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압력 때문에 악귀의 눈이 툭 튀어나왔다. 잠시 뒤에 두 눈이 튕겨져 나오며 구멍에서 초록색 액체가 쏟아졌다. 뾰족하게 솟은 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악귀는 한참 버둥거리다가 힘을 꽉 주자 그대로 머리가 박살나면서 몸이 축 늘어졌다.

“별 것도 아닌 것들이 설치고 있어.”

엔디미온은 괭이를 집어 들고 다시 집을 향해 걸어갔다. 바람이 쌀쌀했다. 하지만 춥지는 않았다. 그는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불청객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대략 여섯 명은 되지 않을까 했다.

씨발, 오늘이 무슨 날인가. 왜 다들 잠도 안 자고 지랄들이야. 엔디미온은 괭이를 오두막 벽에 기대어 두고서 문으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부터 집 안에 충만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나면서 날카로운 빛이 번쩍였다. 엔디미온은 칼이 날아오는 방향을 보지도 않고 손을 뻗었다. 맨손으로 칼을 붙잡은 탓에 상처가 생겼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설마 그가 칼을 붙잡을 줄은 생각지 못했던 습격자는 당황했다. 하지만 오래 당황하지는 않았다. 엔디미온이 바로 목을 비틀어서 죽였기 때문이다.

그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지는 습격자를 발로 차서 밀어냈다. 그리고 성큼성큼 집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집 안에는 다섯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아까 한 명을 죽였으니 처음에 생각한 것처럼 여섯 명이 맞았다.

그들은 모두 검은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분위기가 음침한 것이 대번에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빌어먹을 악마숭배자들. 엔디미온은 겁도 없이 의자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걸어갔다. 망토에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턱선을 보아하니 여자였다. 삐져나온 은색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서 반짝였다.

“비켜. 옷 좀 갈아입게.”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집 안에 있는 모두가 들었다. 악마숭배자들 중 하나가 엔디미온의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사악한 힘을 사용하려고 했다. 그가 손을 뻗어서 검은색 기운을 발사하려고 하자 엔디미온이 손날로 손을 쳐서 손목을 부러뜨렸다. 그는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억센 손아귀에 의해서 목이 부러졌으니까.

엔디미온은 다시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 다른 악마숭배자들이 마법을 사용하려고 하자 여자가 손을 들어서 제지했다. 얼씨구.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엔디미온이 눈썹을 까닥거리자 여자가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엔디미온.”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엔디미온은 마녀다운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옷장의 문을 열어서 새 옷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악마숭배자들 쪽을 쳐다보면서 웃옷을 벗었다. 잘 단련된 근육이 달빛을 받아서 선명히 보였다.

마녀가 웃으며 말했다.

“멋진 몸이로구나. 그걸로 날 유혹하는 것이냐, 기사야?”

“난 싸구려는 상대 안 해.”

마녀는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내가 싸구려라고?”

“왜? 기분이 나빴나? 그럼 뭐 자기가 고급이라고 생각한 거냐? 어리석군. 하긴 멍청하니까 여기에 왔겠지.”

마녀가 이를 갈았다. 그녀가 모자를 벗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길고 뾰족한 귀였다. 엔디미온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뭐야, 요정이었나?”

“그래, 나는 요정이다. 다리 달린 뱀의 추종자이며 여섯 날개 악마의 충실한 종복이지. 내 이름을 들어라. 나는 검은 첨탑의 마녀 올리비아다.”

그게 누군데. 마녀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소개했지만 엔디미온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일 뿐이었다. 그는 그냥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 올리비아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알고 있다. 성배를 수호하고 그 힘을 휘두르는 자. 그것이 바로 너다.”

“용건만 말하지그래.”

“모든 악마들은 다르디낭의 자식이다. 당연히 그들은 대악마를 부활시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것은 악마들의 추종자인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성배는 보잘 것 없는 영웅들이 감히 대악마에게 맞설 수 있게 해주었고 결국에는 다르디낭의 목숨을 빼앗았으니 그 힘의 강력함은 알만한 것이지. 성배가 다르디낭을 죽였으니 그것을 타락시켜 사악한 힘을 내뿜게 하면 마땅히 대악마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소리다. 자, 엔디미온. 그러면 내가 어째서 여기에 왔는지 이제 알겠지?”

엔디미온은 입으려고 들고 있던 옷을 침대에 집어던졌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종족차별이고 다른 하나는 요정이야.”

“뭐?”

“그래, 성배를 가지러 왔다고?”

엔디미온은 뒤로 돌아섰다. 널찍한 등은 성이 난 것처럼 꿈틀거렸다. 올리비아는 그의 등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등 위에는 그림이 있었다. 황금색 잔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장미가 있었다.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줄기가 황금색 잔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마녀는 그게 무엇을 뜻하는 그림인지 알고 있었다.

성배였다.

“그럼 한 번 가져가 봐, 씹새들아.”

엔디미온은 다시 뒤로 돌아서며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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