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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성배기사-4화 (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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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은 마을을 떠나서 한참을 걸었다. 허기가 지면 그 자리에 멈추어서 촌장에게 받은 식량으로 식사를 해결했다. 가방 안에는 말린 고기나 잘 훈연된 햄 따위가 넘칠 정도로 있었다. 일주일은 보급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말린 고기 한 조각을 질겅질겅 씹으며 걸어가다가 해가 지자 잠잘 곳을 찾았다. 엔디미온은 어두운 곳에서도 환한 낮처럼 볼 수 있었고 강철 같은 육체는 지칠 줄 몰랐다. 이대로 날이 샐 때까지 걸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그는 잠을 잤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백 년 동안 성배를 지키며 살아오면서 이제 인간과는 다른 무언가가 돼버린 그에게 유일한 취미가 있다면 잠을 자는 것이었다. 백 년의 시간은 길었고 수면은 시간을 한 번에 뭉텅이로 소모할 수 있는 흔치 않은 행위였다.

잠잘 준비를 하는 것은 간결했다. 적당한 자리를 고르고 나무에 등을 기댄 채로 눈을 감으면 될 뿐이었다. 엔디미온은 금세 잠들었으나 그의 민감한 감각은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눈을 떠보니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토끼는 엔디미온을 보고서 화들짝 놀라서 허둥지둥 도망쳤다.

다시 눈을 감았고 그대로 날이 샜다. 엔디미온은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서 길을 걸어갔다. 무려 백 년 동안이나 호밀밭에서만 지낸 탓에 모든 것이 낯설었다. 호수의 위치는 기억하고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많았다. 일단은 도시로 가기로 했다. 이왕이면 정보를 좀 많이 얻을 수 있는 큰 도시로.

엔디미온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서 도시로 가려면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이틀을 더 걸어서 산에 도착했다. 산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산의 초입에는 새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지저귀고 있었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했다.

가을답게 나무들은 단풍이 들어있었다. 떨어진 낙엽들 위를 지날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났다. 단풍 구경을 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 호밀밭은 아주 광활해서 어디를 보아도 호밀밭뿐이었다. 백 년 동안 그의 세상은 호밀밭과 오두막뿐이었다. 그 외에는 추수철이 되면 찾아오는 일꾼들이 있었다.

한참 산을 오르다보니 허기가 졌다. 대충 아무 곳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열어서 햄을 꺼내들었다. 한 덩이를 단검으로 자른 후에 손으로 들고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훈연한 냄새 덕분에 제법 풍미가 있었다. 다 먹고 나서 수통의 뚜껑을 열어서 안에 든 것을 벌컥벌컥 마셨다.

입가에 흐른 물을 손등으로 훔친 다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길이 멀었다. 그는 산을 넘는데 얼마나 걸릴까 생각해 보았다. 잘 모르겠다. 머리를 흔들다가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새들 지저귀는 소리와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났다. 하지만 엔디미온의 민감한 귀는 보통 사람이라면 들을 수 없는 먼 곳의 소리까지 듣고 있었다. 사람들이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가벼운 것을 보니 산을 넘어가는 상인들은 아니었다. 가끔씩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무기를 들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가벼우면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있었다.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쫓기고 있었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이 그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엔디미온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래서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는 가던 길을 다시 갔다. 쫓고 쫓기는 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가 마주칠 것 같았다.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다른 길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금세 생각을 고쳤다. 그게 더 귀찮을 것 같았다.

“쫓아라! 더 빨리! 더 빨리 달려!”

여자 한 명이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쫓고 있었다. 허겁지겁 도망치는 여자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것은 반짝이는 은색이었다. 키는 보통이었고 체형이 날씬한 것이 몸이 아주 날래보였다. 그리고 귀가 길쭉했다.

그녀는 뒤에서 쫓아오는 추격자들을 쳐다보면서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가 달려오는 방향에는 엔디미온이 있었다. 그는 달려오는 여자를 보고서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당연히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로 달리고 있던 여자는 엔디미온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

“아얏!”

엔디미온의 단단한 몸에 부딪혀서 뒤로 발랑 넘어진 여자는 머리를 흔들다가 얼른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엔디미온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당신은? 당신도 추격자야?”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엔디미온은 코를 움찔거리며 킁 소리를 냈다.

“지나가던 선량한 여행객.”

“여행객이라고?”

여자는 엔디미온을 한 번 쳐다보았다. 큰 키와 딱 벌어진 어깨, 단단한 근육과 허리에 찬 검까지. 어딜 보아도 선량한 여행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돈을 노리고 더러운 일을 맡은 용병이라면 모를까.

“어, 어쨌든 비켜! 난 급하단 말이야!”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면을 보았다. 그는 벌써 쫓아온 추격자들을 보고 있었다.

“이미 늦은 것 같은데.”

그의 말대로 여자가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추격자들을 쳐다보았다. 추격자들 중 한 명이 걸쭉한 침을 바닥에 뱉으며 말했다.

“이 망할 년이, 달리기 한 번 빠르네.”

여자는 몸을 떨면서도 한 마디 쏘아붙였다.

“망할 년? 말조심해, 그 더러운 혓바닥을 뽑아버리기 전에.”

“얼씨구. 할 수 있으면 한 번 해 봐, 이 망할 년아.”

추격자와 여자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추격자들이 검을 뽑으며 달려나갈 준비를 했다. 엔디미온은 그들의 대치를 잠깐 쳐다보다가 다른 길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잠깐! 저 좀 도와주세요! 제가 지금 쫓기고 있는 몸인데 도와준다면 반드시 보답을······.”

다급해서인지 반말이 아니라 존댓말을 하는 여자를 보며 엔디미온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싫어.”

엔디미온은 바로 여자의 손을 뿌리쳤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여자는 쪼르르 달려서 엔디미온의 등 뒤에 숨었다.

“뭐야?”

“이, 이 사악한 놈들! 너희들은 이제 끝이야! 이 남자가 너희들을 끝장낼 거다!”

이게 미쳤나, 지금 뭐라는 거야? 엔디미온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추격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에서 그들이 유리했으니 그냥 싸우자고 합의한 모양이었다. 추격자들은 바로 엔디미온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씨발, 이게 무슨 개짓거리야. 엔디미온은 쯧 소리를 내며 주먹을 들었다.

단단한 주먹은 제일 먼저 달려든 추격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손목을 비틀어서 박살낸 후에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반대쪽 주먹으로 추격자의 얼굴을 박살낸 후에 발로 차서 뒤로 날려버렸다. 달려오던 추격자 한 명이 날아오는 추격자의 몸에 부딪혀서 넘어졌다. 엔디미온은 바닥에서 돌멩이를 하나 주워서 힘껏 던졌다. 화살처럼 날아간 돌멩이가 추격자 한 명의 눈을 터트렸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그의 정수리에 주먹을 망치처럼 때려 박았다. 순식간에 세 명을 해치우고 남은 세 명을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추격자 한 명이 검을 휘둘렀지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간단히 피했다. 그리고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손을 뻗어서 멱살을 붙잡았다. 그대로 바닥에 내던진 후에 발을 들어서 얼굴을 짓뭉갰다. 사방으로 부러진 이가 날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추격자 두 명뿐이었다. 그들은 두려움에 찬 눈으로 엔디미온을 보고 있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망치려면 지금뿐이다.”

그 말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추격자가 무기도 내던지고 냅다 도망쳤다. 엔디미온은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발로 차서 공중으로 띄운 후에 손으로 잡아챘다. 그리고 도망치는 추격자를 향해 던졌다. 억 소리가 나며 추격자가 쓰러졌다.

“살려준다고는 안 했는데.”

“너, 너, 너 대체 뭐야! 뭐하는 놈이야!”

마지막 추격자는 두려움 때문에 뒷걸음을 쳤다. 엔디미온은 그가 물러나는 만큼 쫓아가면서 말했다.

“지나가던 선량한 여행객.”

“지나가던 선량한 여행객이라고?”

엔디미온은 잠깐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까까지는 말이야.”

주먹이 마지막 추격자의 얼굴에 직격했다. 엔디미온은 더러워진 손을 손수건으로 깨끗이 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개짓거리를 한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본래 엔디미온을 미끼로 삼은 후에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의 인간답지 않은 무용을 보고서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었다.

“너.”

엔디미온이 부르자 여자가 깜짝 놀라며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대, 대단하군요! 정말 대단해요! 훌륭한 싸움이었어요. 덕분에 목숨을 건졌어요.”

엔디미온의 목소리는 싸움을 하고 나서도 변화가 없었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왜 저 자식들과 싸웠을 것 같나?”

“그, 글쎄요. 위기에 처한 약자를 구하기 위해서······.”

“아니, 저 새끼들이 나한테 덤벼서야.”

여자가 입을 다물고 엔디미온의 눈치를 보았다. 엔디미온은 이어서 말했다.

“난 너를 구해준 적 없어. 나한테는 저 새끼들이랑 너랑 다를 게 없어. 넌 날 위험하게 만들었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해. 머리를 잘 굴려야 할 거야. 그래야 머리랑 목이 붙어있는 채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여자는 눈알을 또르르 굴렸다. 자색의 눈은 수정처럼 빛났다.

“이, 일단 통성명부터 할까요?”

“참고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종족차별이고 다른 하나는 요정이야.”

“······안녕하세요! 저는 베로니카입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살려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어요!”

베로니카가 두 손을 모은 채로 싹싹 빌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엔디미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슬쩍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더 열심히 빌었다. 엔디미온이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였다.

“무엇이든 하겠다고?”

“무엇이든 시키세요! 어······. 그런데 이상한 요구는 안 하실 거라고 믿어요. 처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했으면 해서······.”

혼자 무슨 개소리야. 엔디미온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말했다.

“너, 도시로 가는 길을 알고 있나?”

“물론이지요! 이 근방에 대해서 빠삭하답니다!”

“그럼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가 어디냐?”

“그건 이 산을 넘으면 나오는 할리아란 도시랍니다. 어, 그런데 거기로 가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왜? 문제라도 있나?”

베로니카가 불안한 듯 눈알을 한 번 굴렸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거기서 사고치고 도망쳐 나오는 길이라······. 쫓기는 것도 그것 때문에······.”

“내 사정 아니야. 거기까지 안내해.”

“안 돼요! 거기 가면 저 죽어요!”

“안 가면 넌 여기서 나한테 죽어.”

“······얼른 가실까요?”

엔디미온은 가방을 뒤져서 끈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베로니카에게 등 뒤로 손을 내밀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손을 내민 베로니카는 금세 끈에 의해 손목이 결박당했다. 엔디미온은 끈의 끝을 잡고서 베로니카의 등을 밀었다.

“가자.”

“······어, 이건 대체?”

“신뢰의 끈이다. 우리 둘의 신뢰의 증거지.”

“반어법이잖아요!”

엔디미온은 무시하고 다시 한 번 베로니카의 등을 밀었다. 그녀가 걷기 시작했고 엔디미온이 뒤따랐다. 한참 가다가 베로니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할리아에 무슨 용무가 있으신가요? 그게 아니라면 할리아가 아니더라도 다른 도시들이 근처에 많은데······.”

“용무라면 있지. 물건을 하나 팔아야 해.”

“어떤 물건이요?”

“너.”

“저요? 저? 베로니카? 저요?”

엔디미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홱 돌려서 엔디미온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를 팔겠다고요? 대체 누구한테요?”

“널 가장 비싼 값에 사줄 사람. 널 죽이기 위해서 칼 든 추격자 여섯 명을 보낼 만큼 널 싫어하는 사람.”

“아니, 저를 왜 굳이 그 사람에게 팔겠다는 건가요? 당신도 혹시 번스타인의 사주를 받은 사람인가요? 지금까지 저를 속였나요? 정말 감쪽같네요!”

그건 또 누군데. 엔디미온은 짤막하게 말했다.

“난 요정 싫어해. 그게 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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